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22. ( 바래봉 철쭉. 운봉. 인월. 피바위. 성리마을. )

donkyhote 2010. 5. 14. 02:05

바래봉 철쭉.

  

바래봉의 봄
 
전북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  
 
바리를 엎어놓은듯해 바래봉.
산판길이 끝나는 바래봉 정상 
그 아래부터 철쭉 군락이 만발.
 
바래봉 철쭉의 백미는 정상에서 약 1.5km 거리의 팔랑치 구간.
바래봉 정상은 지리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손꼽힌다.
동쪽 천왕봉에서 서쪽 노고단에 이르는 지리산 주능선.,파노라마
 
하산은 남서쪽으로 뻗은 철쭉 군락지를 따라 팔랑치까지 간다. 
팔랑치에서 산판길을 따라 산덕리 - 운봉읍으로 내려가는 길과 
세걸산-정령치 종주코스, 내령리 - 뱀사골 입구로 하산하는 코스.

운봉읍에서 동쪽 바래봉과 정령치 갈림길 3거리까지
1시간 10분. 3거리 남쪽 팔랑치 철쭉군락지까지 30분




운봉목장
 


 



 


 

 

 

 


 


 


 


 




팔랑치


 


 

 



팔랑치에서 바래봉쪽


남쪽으로 부운치 정령치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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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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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철쭉> : 쌍떡잎식물 진달래목 진달래과의 낙엽 활엽관목.

진달래과 、한반도 만주 우수리 해발 100m 이상의 고산지대

크기 높이 1~5m 잎은 가지 끝에 4~5개씩 모여서 어긋난다.

 

잎의 생김새는 거꿀 달걀꼴(도란형)이나 넓은 거꿀 달걀꼴.

처음에는 옅은 분홍색을 띠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흰색.

흰철쭉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 것. 꽃 지름은 5~8㎝.

 

수술은 10개, 암술은 1개.

수술 길이는 각기 다르고,

씨방에 선모(腺毛)가 있다.

 

해발 100~2000m 고산지대에 서식하며,

습기가 많고 비옥한 숲속이나 능선 지역.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과 만주 우수리

 

<황철쭉> :쌍떡잎식물 진달래목 진달래과의 낙엽관목.

 진달래과 원산지 일본. 높이 1∼2m 황갈색 나무껍질

 살충효과가 있고 반그늘이나 광선 아래에서 잘 자란다.

 

<산철쭉> 쌍떡잎식물 진달래목 진달래과의 낙엽관목.

진달래과 한국 ·일본,  산지의 물가 크기 높이 1~2m

꽃은 4∼5월에 붉은빛이 강한 연한 자주색으로 피어난다.

 

한방에서는 꽃을 약재로 쓰는데, 독성이 강하고 마취 효과

악성 부스럼, 사지마비에 효험. 한국 ·일본(대마도)에  분포.

겹산철쭉,  흰산철쭉도 있고 전라남도 불갑산에서 자생한다.

 

 

 

 

운봉(雲峰)

 

 

 


▲ 서천리 돌장승, 방어대장군

리산 자락이지만 농업 생산력이 평야 못지않았던 운봉

삼한시대부터  각 세력들이 힘을 겨루던 군사적인 요충지.

왜구들이 진주를 함락하고 쳐들어오던 통로이기도 하였다.


 

옛부터 전라도 운봉, 경상도 함양.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선에는 인월.
흥부마을 역시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

청학동과 함께 지리산 십승지로 일컫는 운봉
백두대간 끝자락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분지.
옛부터 경상도 함양과 전라도 남원의 길목 운봉.

반야봉 일대는 남원에 편입되기 전까지 운봉.
노고단, 반야봉의 운해에서 유래된 지명.,운봉.
운해가 아름다워 풍류묵객들이 즐겨찾던., 운봉.

'옛부터 동편제 본향으로 명성 높은 운봉.'

'운봉. 흥부마을, 인월. 함양.'을 잇는 길.
옛부터 왜구의 침입으로 피혜가 잦았던 고장.
하여, 일본에 대한 경계와 저항의식이 거센 곳.

옛부터 주막과 여곽이 대물림했던 운봉마을 초입
전춘 전각 숲그늘에 다정한 연인 같은 백로 한 쌍
판소리 고장 답게 사랑가’ 한 자락을 엮어내는 듯.

황산대첩비가 있는 언덕위는 운봉 아이들의 놀이터.
운봉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황산대첩비와 피 바위

 


황산대첩비.

 

피바위.


운봉아이들은 너나 없이 나무칼 몇 자루씩 갖고있다.
칼싸움 대물림은 운봉의 자존심인 황산대첩에서 유래
운봉 아이들의 칼싸움은 전통적으로 계승된 놀이문화.

'황산대첩비에서 인월 피바위까지 칼싸움 원정.'

고려 우왕 6년, 원나라의 간섭으로 왕권이 실추되고
권문세족 토지독점과 농민 수탈로 극도로 피폐할 무렵
한반도 서해안을 내 집 드나들 듯 하며 약탈했던 왜구들

그무렵 지리산 동북쪽 운봉 황산대첩은 유서 깊은 승전터
처음에는 아군의 열 배가 넘는 왜구들과 전투가 시작된다.
전투는 이성계 장군의 지혜로운 전략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가 끝날 무렵 왜구 칠팔십명만 살아남아 줄행랑
당시 이성계의 화살에 죽은 적장 아비발도와 왜구들
전투가 끝날 때까지 시냇가 너럭바위에 쌓아둔 시체들.

'그후 바위가 피로 붉게 물들게 되어..피바위.’

훗날, 당시 전승을 기리기 위해 황산대첩비 세운 선조.
그러한 연유로 황산대첩비가 있어 비전마을로 불리웠다.
운봉 땅과 지척인 비전리는 명창들의 전통적인 공연장소.

예나 지금이나 영호남의 교류가 활발한 운봉
'각성바지' 사람들이 어울리며 살아온 곳이다.
각성바지 집성촌을 이루고 한 형제처럼 사는 곳.

삼국시대 풍운의 거센 황토바람을 휘날리던 고구려
광활한 만주 벌판 영토를 잃고 지리산 자락에 정착
신라 유민정책에 의해 운봉에 정착한 고구려 후예들

고구려 유민들이 망국의 슬픔을 달래던 노래
운봉 동편제에는 고구려 유민의 한이 담긴 듯.
판소리 선구자 송씨 가문은 원래 고구려의 유민

송첨지 또는 또랑광대라 비꼬는 말투로 불린 그들.
이조 정조 임금 무렵에는 어전에서 북장단을 울렸고
비단 세필을 하사 받는 큰 영광을 누리며 신분 상승.

운봉 소리꾼들은 발길 닫는데로 산천을 유랑한다.
마치, 옛 고구려 유민들이 고향을 잃고 유랑한 듯.
섬진강 상류 오원천변은 판소리 소리꾼들의 공연장.

섬진강 서쪽 광주·나주·보성 등지는 서편제 본향.
섬진강 동쪽 운봉 구례 순창 흥덕 등는 동편제 본향.

판소리 소리꾼들이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 구경꾼.
가마끄는 역군들조차 서로 모셔 가려고 한바탕 소동
운봉은 예나 지금이나 명창들을 배출한 판소리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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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은 양강도 개마고원 두운봉(頭雲峯)에서 따온 이름.
두운봉 주위엔 궐덕산 노룡봉 희사봉 등이 애워싸고 있다.
황수원강까지 뻗은 평정능선은 각각 엄방천 장동천 발원지.

두운봉은 백두대간의 머리 지점
운봉은 백두대간이 끝나는 지점.

두운봉은 여러 부족의 연합체 옥저 동예의 영토.
BC 108년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현토군에 속했다가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 소관 하에 들어 갔다.

고구려 태조 때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미천왕 때부터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한때 당의 지배를 받았고
699년 발해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部)에 속해 있었고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 여진의 지배를 받았던 곳.

이 무렵 발해 유민들이 고향을 떠나 고려로 유입.
그들이 정착한 곳에 두운봉을 본따 운봉이라 명명.
지금까지 운봉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게 된 것 같다.

'따라서, 운봉은 발해 두운봉 유민들의 정착지.'

발해 유민들이 정착하기 전부터 고구려 유민 정착지.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 결과로도 추정된다.
훗날, 운봉 발해 유민들은 고려 창건의 밑바탕 세력.

'잃어버린 고향 두운봉을 되찾으려 했던 것일까?'

고려 말 위화도 회군으로 이조를 창건한 이성계.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1995년 전북 남원시 운봉읍으로 승격, 읍소재지는 서천리.
사방이 덕두산(1,150m)·바래봉(1,165m)·고리봉(1,305m)·
수정봉(805m) 등으로 둘러 싸인 고원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배추·고추·마늘 고랭지채소 생산지이고 화훼재배도 활발.

 


용산리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면양목장 국립종축장이 있다.
동남부는 지리산 국립공원에 속하며 운봉목기가 유명하다.

주촌(舟村)·덕산(德山)·공안(孔安)·행정(杏亭)·산덕(山德)
동천(東川)·용산(龍山)·북천(北川)·준향(準香)·장교(長橋)
권포(權布)·임(林)·신기(新基)·매요(梅要)·가산(佳山)·화수(花水)
17개 동리가 있고, 면적 69.49㎢, 인구는 2002년 현재 5,317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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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은 판소리 동편제의 고향이기도 한 고장.
봉화산에서 백운산(1278.6m) 아래 중재까지 숲길.
종주자들은 이 구간을 가장 볼 것 없는 곳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곳 역사를 알면 걸음마다 산행이 즐거워진다.

3억 2천 300만년 전, 동해의 해저 지각이 팽창
한반도 지각을 밀어붙이며 대대적으로 지각변동.

이때 한반도는 서쪽에 비해 동쪽의 지반이 더 높이 융기
동쪽으로 경사가 급한 동고 서저의 지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두대간이 탄생했고 지리산 또한 높이 솟았다.
세석평전처럼 지리산의 주능선 곳곳에 평탄한 곳이 그 증거.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동서로 밋밋하게 이어진 주능선 자락
남북으로 15가닥의 지능선이 있고, 그 능선과 능선 사이엔 계곡.
달궁 계곡, 심원 계곡, 뱀사골 계곡 하나같이 북동이나 남서 방향.

'어떤 이유로 그런 형태가 되었을까?'

한반도의 대륙 지각은 북서 방향으로 밀어붙인 해양 지각변동.
태평양 판의 횡압력을 받아 지각에 많은 구조선과 단층선이 형성.
이때 금이 간 주방향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 금이 갔던 자리가 계곡.

지리산 북서쪽 노치마을에서 여원치·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동쪽 운봉, 인월, 아영, 산내는 신라였고, 서쪽 주천, 이백, 산동은 백제.
백두대간에 의한 문화권 구분을 오늘날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사투리.

백제 권은 전라 방언을 쓰지만, 신라권은 경상 방언에 가깝다.
동부권은 경남 함양과 교류가 빈번해 아직도 경상도 억양이다.
동부권 지역 주민들이 외지에 가면 경상도 사람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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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을 조금 지나 인월 방향 왼쪽에 황산대첩비가 있는 '화수리'
비전마을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왼쪽에 황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황산은 운봉의 길목에 있고 운봉 평야지대를 제압할 수 있는 산이다.

옛부터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피혜 많았던 운봉.
운봉의 황산대첩비가 그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여, 역사적으로 항일 운동에 선봉이 되었던 고장.

고려 말에 함양·운봉을 노략질하며 인월에 주둔한 일본 장수 아지발도
그 투구를 활로 쏘아 입을 벌리게 하고 이지란이 활을 쏴 그를 죽인 곳.
그가 죽자 적의 기세는 단번에 꺾여 고려군들이 대승해 세운 황산대첩비

'황산벌에서 왜구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승전비.'

남원에서 함양으로 가는 국도에 백두대간의 한 구간인 여원치
이성계가 백발 노파로부터 승전 날자와 전략을 계시받은 고개.
아지발도가 젖가슴에 손댄 처녀가 자기 가슴을 베어 자결한 혼.

하여, 노파의 고마움을 기려 벽에 여인상을 새긴 산신각을 지었다.
그 여자 산신령을 여원(女院)이라 불렀고, 이곳을 여원치라고 명명.
이성계는 이곳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기에 훗날 이조창건의 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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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치 고남산 운봉' 오르니 고려 승전고 들리는 듯.'
고려 때 이성계의 승전을 기리는 지리산의 몇몇 지명.
그곳에 남아있는 이성계에 관한 자취를 좀 더 살펴보자.

노치마을의 당산 소나무 앞에서 산줄기들을 바라다본다.
눈앞 수정봉이나 고남산은 백두대간이 아니라면 동네 뒷산

그러나, 백두대간의 한 부분이라 지리산과 동등한 지위
'낮은 산이 없이는 높은 산도 없는 법.' = 산에 관한 이치.

여원치(450m)는 남원, 운봉, 함양을 잇는 24번 국도 고갯마루.
고려 말 왜구의 희롱을 거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한 여인
산신령이 되어 이성계의 전승을 도왔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여원치에서 두 시간 걸어서 가면 고남산( 846.5m)
조망만큼은 높은 산에 뒤지지 않는 유서 깊은 산이다.
오래 전부터 고남산은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한때는 태조봉 혹은 제왕봉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고려 말 우왕 6년(1380)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 장군

이 산에 천제단을 세우고 전승을 기원했던 곳이다.
동행한 정도전 "이 산의 기운으로 권세를 널리 펴라."
하여, 아랫마을의 이름이 ‘권포(權布)’가 됐다고 한다.

이성계는 이조창건의 발판이 된 지리산을 훗날 반역의 산이라 한다.
지리산에는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는 고려의 지지세력이 많았기 때문.
특히, 운봉은 '동학의 난'을 비롯해 이조정권에 항거세력이 많은 고장.

'백두대간의 등마루에 걸터앉은 <매요리>
백두대간 종주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쉼터다.
마을 인심도 좋아 경로당은 종주자들 잠자리.
마을 끝 지점에서 매점을 하시는 신순남 할머니

“여원치에서 출발했어? 그럼 오늘 복성이재까지 가겠구만.”

모래재에서 새맥이재를 지나 복성이재를 향하는 대간 길은 단순하다.
오른쪽으로는 산동네 치고는 꽤나 너른 들판에 안긴 마을이 옹기종기.
남원시 운봉읍 일대. 이 한가로운 마을이 한때는 혁명의 싹을 틔운 곳.
고려의 장수 이성계는 운봉의 황산에서 치른 왜구와의 전투에서 대승.

이조가 창건할 수 있었던 전기를 마련한... 운봉.
'이조의 멸망 계기'인 동학혁명이 일어난....운봉.

................운봉 찾아가는 길......................
군산에서 전군산업도로를 이용 전주로 입성
전주동부우회도로를 이용 전주를 우회한후 남원
남원 춘향터널 500m지나 우회전 구례 순천방향 도로

약 7-8Km진직후 첫 갈림길에서 좌회전 (이백, 운봉방향)
약 10분정도 직진후 검문소 삼거리에서 우회전(운봉,인월방향)

오르막 시작 재를 지나 조금 가다 보면 운봉 면소재.
운봉 소재지 뒤에 보이는 산이 지리산 자락의 바래봉.
읍내로 진직하면 이정표에 바래봉 철쭉군락단지 표지.

전주,임실,오수,운봉,인월로 이어지는 직행버스.
남원에서 운봉 인월로 향하는 직행버스나 시내버스
운봉에서 도보로 약 15-20정도 걸으면 바래봉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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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 다리 하나 건너면 전남 구례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화개장터와 비슷한 여건.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이었던 격전지.

지리산 태극종주 북부능선 들머리..'인월'. 
농지 부족한 오지마을이자 빨치산 격전지.

경남과 전북의 도 경계선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
경남 함양에서 5분도 안되어 사투리가 바뀌는 인월
흥부전의 배경마을로 알려져 관광지 개발 붐이 한창.

흥부전은 이조 후기 작자 연대 미상의 소설.
흥부전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된 판소리 소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가 만나는 지역의 이야기.

형인 놀부는 심술이 궂고 욕심이 많아서
부모 재산을 독차지하고 아우를 내쫓는다.
그런데도 형을 원망않고 가난하게 사는 흥부.

흥부는 자식이 많고 재산이 없어 형에게 양식을 구걸
흥부는 남의 품을 팔기도 하고, 매를 대신 맞아 돈벌이.
온갖 애를 쓰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루는 처마 밑에 떨어져 다리 다친 제비를 살려주고,
그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 하나를 심어서 부자가 된다.
박이 열렸는데 그 속에서 많은 금은보화가 쏟아졌기 때문.

이 소식을 들은 놀부는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고 싸매주지만,
제비가 가져다준 박씨에서 온갖 재앙이 쏟아져나와 패가망신.

흥부전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도덕적 측면
빈부 격차를 문제삼은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이해
서민의 실생활과 직접적 연관을 갖는 소재의 소설. 


 
피바위. 



고려는 건국 초기엔 국력이 튼튼하였으나
고려 말 숭불 정치로 인한 승려들의 발호와
원나라의 80년간 국정 간섭으로 극도로 어수선

왜구들은 공민왕 이래로 침략이 잦아져
해안과 내륙까지 깊숙히 쳐들어와 장기전
때론 개경 변두리까지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1380년 (고려 우왕 6년) 왜구가 남부 내륙을 휩쓸자
이성계 장군이 인월에 주둔한 왜구 토벌에 앞장섰다.
당시 인월에 진을 친 아지발도를 괴수로 하는 왜구들.

아지발도는 18세쯤 되고 특히 괴상한 힘이 있는데다
키가 7척이 넘었으며 화살이 뚫지 못하는 갑옷을 착용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다녀 아군에게는 실로 공포의 대상

그는 개경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호언장담하자
고려 조정에서 이성계를 남원에 급파했던 것.

이성계는 여진족 귀화병과 고려군 혼성부대를 편성
변안열을 참모로 하고 퉁두란을 부원수로 하여
전주를 거쳐 남원에 들어와 인월로 향했다.

이성계 장군은 본진을 황산에 주둔하였는데
황산은 운봉과 동면의 중간에 솟은 고지였다.

황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인월이 손에 잡힐듯 한데 굽어보면
운봉 람천 물이 황산 밑을 흘러간다.

아지발도는 고려군이 토벌나온 것을 알았지만
이성계가 황산에 진을 친 다음에야 인월에 당도.

인월과 황산은 지척지간 인지라
아지발도군은 말을 몰고 총 공격.

이성계는 퉁두란과 함께 천하의 명궁.
아지발도의 투구를 겨냥해 활을 쏘아
입을 벌리면 입을 맞추어 죽이기로 작정

계획되로 이성계의 화살은 아지발도의 투구에 맞았고
아지발도가 입을 벌린 순간에 입과 목을 꿰뚫은 화살.
아자발도는 마상에서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었다.

그가 흘린 피가 바위에 스며들어., 피바위(血巖)

아지발도 없는 왜구들은 오합지졸이 되었는데
고려군이 쏘는 화살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이날 싸움은 해가 넘어가 이윽고 차츰 어두워졌다.

이에 이성계 장군은 용력을 부려 달을 잡아당겨
일찍 뜨게 하여 왜구를 무찔러 승리하게 되었고
싸움터 마을을 인월리(引月理)라 부르게 되었다.

이성계 장군과 퉁두란의 용맹은 더욱 높아졌으며
후일 이성계가 이조를 건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황산대첩으로 민심은 이성계 장군을 신격화하게 되고
그로 인해 많은 인물이 이성계 휘하로 몰리게 된 계기
인월은 이성계가 이조을 건국하는데 큰 의의가 있는 곳.

...................진포(鎭浦)대첩..........................
고려 말 진포(충남 서천군)에 대규모로 침입해온 왜구
1380년(우왕 6) 8월에 500척이나 되는 왜적 선단(船團)
밧줄로 배를 서로 묶어놓고 연안에 올라와 살육과 약탈

최무선(崔茂宣)이 화포(火砲)로 왜적의 배를 불사르고,
그곳 왜적을 무찔르자 살아남은 왜적은 주력부대와 합류
각지를 노략질하며 남원 운봉을 거쳐 황산까지 이르렀다.

그곳에서 이성계(李成桂)가 지휘하는 고려 군에게 참패.
황산대첩의 원동력이 된 것은 최무선의 진포대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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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왜구들은 우리 나라 해안에 자주 침입해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사람까지 죽이곤 했다.

최무선은 중국인 이원에게 화약 제조법을 배워
1380년 금강 하구 왜선 500척을 화약으로 폭파.
금강 하구는 왜구가 내륙으로 들어오는 지름길.

1383년 5월 남해에 침입한 왜구들을
원수 정지가 화포 함선으로 물리쳤다.

1389년 원수 박위에게 100 척 함대를 이끌고
쓰시마(대마도) 왜구를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되자 오키나와 왕이 신하의 예를 갖춰
고려에 사신을 보내 왔고, 조정과 친교를 약속.

최무선의 화약 무기 개발은 더욱 발전돼
임진왜란 때 왜선을 격파하는데 큰 역할

왜군의 화포는 5~6 m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이조 수군의 화포는 10~15 m까지 나갔던 것. 



성리마을. 



남원시 아영면 인월 성리마을은 흥부전 배경마을.
설화 속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
이 마을에 전해오는 복덕가(福德家) 춘보설화(春甫說話)

성리마을에 박춘보(朴春甫) 묘로 보이는 무덤이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망제단에서 흥부를 기리는 춘보망제.
성리엔 흥부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허기재, 고둔터, 새금모퉁이, 흰묵배미 등의 지명

허기재는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주민들이 도운 고개
고둔터는 고승이 가난에 시달리는 흥부에게 잡아 준 명당
흥부가 제비를 고쳐준 발복집터, 고둔'이란 곳집(창고) 터

고둔은 장수군 번암면으로 넘어가는 짓재 고개마루에 위치.
사금모퉁이는 흥부가 금을 채취해 부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흰죽배미'란 흥부가 부자가 된 후 은인들에게 주었다는 논.

흥부 아내가 이웃의 흰죽을 먹고 살아나 명명된‘흰죽’
'노디막거리'는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건넜다는 개울의 지명으로 추정.

지금은 콘크리트로 덮여있지만 개울가에는 억새가 무성
흥부가 성공한 후 이웃을 잊지 않은 나눔의 정신이 바람직.

...............성리마을 찾아가는 길...............
남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뱀사골행 시외버스를 타고
(20분 간격, 6:50~ 20:30), 인월리에서 하차(30분 소요).
여기서 아영까지 가는 버스를 갈아 탄다(약 10분 소요).

88고속도로 대구방향 - 지리산 I.C - 좌회전 아영 방면 -
아영면사무소 삼거리 좌회전- 8km - 성리 마을 - 20분 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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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일대 남원시 아영면에는 마땅한 숙박시설이 없다.
대신 아영면에 있는 인월요업 역사관에서는 민박을 한다.

관광지 : 황산대첩비, 실상사, 바래봉,
뱀사골, 정령치, 구룡폭포, 지지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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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 마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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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아지발도를 물리친 황산벌
인월면과 아영면 여러 마을의 이야기

지리산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들어선 인월(引月)
1380년 고려 말 우왕 6년 이곳에서 왜구와 전투.

금강 어구인 진포 해전에서 최무선 장군의 화포 공격
배 500 척을 잃어 퇴로가 막힌 왜구가 경상도로 우회
함양을 거쳐 남원으로 진출할 때 왜구와 맞선 이성계

당시 삼도도통사였던 이성계 장군은
인월에서 왜구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인월은 남원에서 운봉을 거쳐 함양에 이르는 중간지점
왜구가 함양 도륙 후, 남원산성을 치고 운봉현을 방화.
왜구는 인월에 주둔하고 한양까지 북상하려 전열을 정비

이성계가 남원 운봉을 경유 황산(荒山)에서 왜구와 대치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용맹스러운 것을 안 이성계

아지발도 투구를 쏘아 맞추고 투구가 떨어지자
동두란이 재빨리 사살하니 적은 기세가 꺾였다.
이성계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아군의 10배나 되던 적은 겨우 70명이 도망쳤다.

약 200년이 지난 선조 10년(1577년) 8월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비석을 세웠다.

1945년 1월 한민족 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일제는
이 비를 폭파하고 비문 각자를 모두 지워 버렸다.

현재 인월을 중심으로 한 대부분 부락의 지명은
이 성계의 업적을 기리는 지명들로 바뀌어 명명.

지리산 인터체인지를 벗어나면., 인풍리(引風里).
이 마을에서 7대를 살아 온 박남보(69) 할아버지.
이계순(67) 할머니와 사이에 아들 둘과 딸 여러 명

150년 전 5대 조부께서 토정비결을 보시고
지리산 주변인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인풍리는 길 양쪽으로 내인풍과 외인풍으로 구분.

박 할아버지가 사는 내인풍은 현재 40호(일제 때 60 호)
일정 초 인풍리 북쪽 면소재지 갈계리에 국민학교가 있었고,
너더리(현재 강평마을)로 옮겨 졸업한 다음해 해방을 맞았다.

그당시 논밭농사로 생계를 이어왔지만 대부분 소작
운봉에 살던 만석군이 인월의 대부분 논을 소유했다.

초가집에 낙엽을 긁어 때는 어려웠던 마을이었으나
일제 때 진흥촌으로 선정되어 관에서 지원을 받았다.
뽕나무 재배, 누에고치, 담배 등의 특산물 재배 농가.

원래 인풍리는 경주 이씨가 처음 정착
현재 경주 이씨는 한 가구만 남아있다.

6.25 전후 반란군과 빨치산이 자주 내려왔으나
인풍리는 다른 마을에 비해 인명 피해가 없었다.
현재 70에서 95세에 이르는 노인이 많은 장수마을

40년 전 박 할아버지가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했을 때
돌담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간이 숙박시설이 있었고
여자 혼자 운영하고 있었고 천왕샘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지발도의 누나가 전장에 나가면 황산을 조심하라 했다.
경상도 함양까지 처들어온 아지발도는 누나의 말이 걸려
마침 산청 왕산(王山)을 황산으로 착각하고 조심하였으나
아무 일이 없자 팔랑재를 넘어 황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아지발도가 피를 흘리며 죽은 곳이 피바위
인근 중군리는 당시 군사들이 주둔했던 곳
사창 마을은 무기를 저장하는 무기고였던 곳.

인풍(引風)은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시
달을 끌어 솟게 하고 바람을 일게 하여
왜적을 섬멸시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무리(西茂里)는 황산대첩 적의 시체를
내(川) 서쪽에 묻어., 서무듬 또는 서무.

취암리(就岩里)는 뒷산 수리바위에서 유래.
사창(社倉)은 현(縣)의 창고가 있었던 곳.
정봉(鼎峯)은 황산대첩 군사들의 밥을 짓던 곳.

자래(自來)는 지형이 자라 모양처럼 생긴 곳.
구평(龜坪)은 뒷산이 거북이등 같다 하여 유래,

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 폭격

아영면 인풍리 지나 인월면 좌측으로 취암리 입구.
취암리는 취암, 덕실, 구평(동무) 마을로 구분된다.

9대째 취암 마을에 살아오신다는 오형순(72) 할머니
바로 옆마을 구평에서 취암으로 20세 때 시집을 왔다.
오 할머니는 일제 때 어려웠던 일부터 이야기 하셨다.

61년전 기묘년 물이 부족해 큰 흉년이 들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보리이삭을 훑어 먹었고,
물을 대지 못하는 논에 벼 대신 메밀을 심었다.

병자년의 대홍수 때는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다.
여자라 당연히 학교 공부를 시키지 않았던 시절,
지금의 인월 시장터가 인월 국민학교 자리였다.

한 학년이 두 개 반 정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 대부분 길쌈하여 옷감을 자급 자족,
뽕 누에 재배, 삼베, 명주 베, 면베 생산

70리 되는 남원장에 가지고 나가 팔고
소금 쌀 등 생활필수품을 사가지고 왔다.
새벽에 나가 늦은 밤 집에 도착하곤 했다.

취암리는 일제 때 논이 많지 않았으나
개간하여 지금처럼 논을 많이 만들었다.
일제 때는 마을에 디딜방아간이 두 군데
쌀은 공출로 뺏기고 콩깨묵을 배급받았다.

일제 때 80여 호 되던 취암리는 현재 50여 호
원주민은 외지로 떠나고 외지인들이 살고 있다

6.25 전후해 반란군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인근 산 방공호로 마을 사람들이 피신했다.

인월국민학교에 주둔한 아군을 빨치산으로 오인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많은 군인이 죽기도 했다.
오 할머니댁 길 건너 아영면의 봉대리를 찾았다.

길 양쪽으로 논엔 비바람으로 쓰러진 벼이삭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인적이 드물다.

15대 째 이곳에 사신다는 김기주(84) 할아버지
동갑 김계완 할머니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셨다.
400년전 난을 피해 아곡마을로 정착한 15대 조부

봉대리란 산에서 토사가 많이 내려와 쑥대가 많아
쑥대 봉자를 썼으나 일본인들이 받들 봉자로 개명.
훈장인 6대 조부 서당 제자들이 관직에 많이 올랐다.

일제 때 봉대리는 60여 호였으나 지금은 50여 호
주로 벼농사를 하고 있던 일제 때 서너 집만 지주
마을 사람들은 그 집 일을 하고 식량을 얻어 왔다.

봄에는 보리 나기까지 초근목피로 버텼고
밥 한 끼 옳게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공출은 말도 못하게 심해
공출에 응하지 않으면 일본놈이 두들겨 팼다.

5일마다 열렸던 남원이나 인월, 함양장에 나가면
생필품을 사왔지만 가지고 나갈 물건조차 없었다.

김 할아버지는 일제 때 면소재지 국민학교를
4학년까지 마치고 17세 때 다시 5학년에 입학.
당시에는 기혼자도 국민학교를 많이 다녔다 한다.

27세 일본군으로 끌려가 캄차카반도 섬에서 비행장 건설
6.25 때 빨치산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마음고생이 심했다.

인월은 남원과는 300m나 차이 나는 고지대로서
15일 가량 기후 차이가 나 농작물 냉해가 발생

김 할아버지와 대화하는 동안 어둠침침한 방안의 형광등
이름모를 잡초들이 가득한 김 할아버지의 뜰에는 가을비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점점 고령화 되어가는 마을.

인월 서무리에서 3대째 사시는 조대근(71) 할아버지
3대 조부께서 이 마을로 이주해 오시면서 마을 훈장
서무리는 일제 때 식량을 공출 당해 초근목피로 연명.

식량 대신으로 삼았던 쑥은 뿌리마저 남지 않았다.
쑥죽 또는 소나무 껍질 하얀 속을 물에 불려 먹었다.
간혹 배급되는 콩깻묵으로는 배고픔을 이길 수 없었다.

학교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한 부락에 3명 정도 학교를 다녔다.

귀한 소금은 벽소령을 넘어
하동까지 가서 져다 먹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바로 옆 황산을 왕산이라 부른다
일제 때 100 호 마을이었으나 현재 80 호로 줄었다.

장날은 3일과 8일이었는데 3일은 아랫장터,
8일은 인월 구사거리와 지리산 진입로 장터
약 60년 전 큰 수해로 아랫장터는 폐지되었다.

30년 전부터는 교통수단의 발달로
남원이나 함양으로 장을 보러 나가며
인월장터는 차츰 그 규모가 줄어들었다.

해발 450m 인월은 고랭지 감자, 배추, 무 등을 생산
마을 전체가 지리산 끝자락인 덕두봉 계곡물을 받아
간이 상수도시설을 설치하여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일제 때 무쇠솥 제작하는 곳이 있었지만 곧 없어졌다.
최근 모대학 교수가 용역 받아 흥부 놀부 마을을 선정
형제의 마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이에 이의를 제기

인월면의 성산 마을은 놀부 마을,
아영면의 상성리는 흥부 마을
주민들 간 이견이 분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