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24. ( 춘향전. 십장가. 단오절. 굴원. 초나라. )

donkyhote 2010. 5. 14. 02:08

춘향전.

 

춘향이 살아 있는 듯이 역사가 생생한 남원 골 전경.


칠월칠석 오작교는 견우직녀 사랑이요
오월단오 광한루는 우리인연 맺어줬네

귀밑머리 풀어주고 칠보단장 못했어도
금삭같은 굳은절개 비바람에 꺾일손가

한양낭군 일편단심 춘향아씨 사랑은~
에루화 둥둥둥 참사랑 이로다


삼월삼진 제비편에 낭군소식 여삼춘데
살을에는 설한풍은 옥중설움 애달어라

화촉동방 첫날밤에 만리장성 쌓았는데
일편단심 춘향절개 비바람에 꺾일손가

어사화에 삼현육각 한양낭군 돌아오니
에루화 둥둥둥 참사랑 이로다

제목 : 성춘향
노래 : 하춘화


춘향전은 옛부터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리던 이야기.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특히, 청춘남녀를 애 태운 설화.
"암행어사 출도야!~~" 대목이 흥이 돋구는 하일 라이트.

작자·연대 미상. 현재 국문본·한문본 등 70 여 종
남원 기생 성춘향과 사또 아들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영조·정조 시대에 생성되어
개화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승되는 이야기.

이 작품은 소설 뿐만 아니라 판소리·희곡·
시나리오·오페라 등의 다양한 형태로 개작.

이에 따라 제목도 〈춘향전〉·〈춘향가〉·
〈열녀춘향수절가〉·〈광한루기 廣寒樓記〉·
〈광한루악부 廣寒樓樂府〉·〈남원고사〉·
〈옥중화 獄中花〉·〈옥중가인 獄中佳人〉

〈춘향전〉은 설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 소설.
작품의 근원설화는 〈박색터설화〉·〈암행어사설화〉

〈박색터설화〉는 일명 〈신원설화 伸寃說話〉
남원지방에 추하게 생긴 박색 기생이 있었는데
너무나 못생겨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빨래터에서 다리 건너는 사또 아들을 본 박색 기생.
첫눈에 홀로 사모하게 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병이 되어 그녀는 홀로 한을 품고 죽게 된다.

그후 남원에 가뭄이 들어 3년이나 비가 오지 않았다.
사또가 그 사정을 알고 박색 기생의 혼을 달래는 굿
비가 왔다는데, 그 내용은 〈춘향전〉의 전반부와 일치.

<암행어사설화〉는 양반 자제와 기생 사이의 연애담
노진·성이창·박문수 등 실존 인물 등과 관련된 설화.
양반 자제가 시골 어린 기생을 사귀다가 헤어지게 된다.

기생은 양반 자제와 사귄 이후 절개를 지킨다.
그러다가 암행어사가 된 양반 자제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산다는데 〈춘향전〉 줄거리와 일치한다.

〈춘향전〉양반사회 어투와 서민사회 어투가 혼재.
여인의 정절을 고취하고, 부정한 관리에 대한 저항
후대의 개화기 작품은 남녀간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춘향의 정절과 저항은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위한 방편
이 작품은 일관성의 결여, 논리의 상실 등 몇 가지 결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서민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첫째, 서민들에게 친근한 소재를 선택하고 있고,
둘째, 서민 예술양식 설화와 판소리를 통해 전파
셋째, 서민의 꿈과 정서를 절실하게 표출한 때문.

이 작품은 예나 지금이나 서민문학의 대표적 작품
여러 형태로 개작되면서 작품의 생명을 유지해왔다.


........
줄거리.
........

이조 숙종 초 전라도 남원에 월매라는 퇴기가 있었다.
월매와 성참판 사이에서 낳아 기른 외동 딸이 성춘향.
천하일색 춘향은 성장하며 시와 서예에도 능통하였다.

어느 봄날 남원부사 아들 이몽룡
광한루에 올라 시를 읊고 있었다.

이때 춘향은 향단이를 데리고
광한루에서 그네 뛰며 놀았다.

우연히 춘향을 보고는 한눈에 반한 이도령
방자를 시켜 춘향을 불러오게 하여 첫 상봉
헤어지며 밤에 찾아가겠노라고 언약한 이도령.

그날 밤 월담하여 춘향집에서 백년가약을 맺고
이도령은 밤마다 춘향을 찾아가 사랑을 속삭인다.

그런데 이부사가 내직으로 전출하게 되어
이도령은 부득불 상경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
이도령은 춘향에게 후일을 약속하고 서울로 떠난다.

춘향은 이도령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오기를 학수고대.

그무렵 남원에 새로 부임한 신관사또 변학도
정사는 돌보지 않고 기생 점고부터 시작한다.

그는 춘향을 발견하고 수청을 강요하지만,
춘향에게 거절당하자 노해 태형을 가하지만
춘향은 죽기를 결심하고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옥에 갇힌 춘향은 임을 그리워하다가
잠이 들면 꿈속에서 이도령을 만난다.

장님에게 물어보니 서방님 돌아오고
부귀영화를 누릴 꿈이라고 일러준다.

변학도는 자신의 생일잔치에 춘향을 불러낸다.
마지막으로 춘향의 의중을 묻는 자리이기도 하다.
만약 춘향이 수청을 거절한다면 처형하겠다 한다.(중략)

.....................수청(守廳) bed service.......................
1. 지난날, 높은 벼슬아치 밑에서 수종하던 일.
2. 청지기(양반의 수청방에서 일하는 하인의 우두머리).
3. 아녀자나 기생이 높은 벼슬아치에게 몸 바쳐 시중들던 일. 
...............................................................................................


......
구성.
........


춘향이 이도령과 만나 백년가약 맺는 시간이 반나절.
낮에 만나 밤에 월담해 춘향집에서 혼전에 백년가약.
그당시 성개방 풍조가 만연한 사실을 알수 있는 대목.

'당시 이도령 나이 17세, 성춘향 나이 16세.'

신관사또 수청 거절은 당시 관습 법에 어긋나는 일.
변사또를 나쁜 관리로 치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이도령이 과거급제후 곧자 어사 임명도 온당치 못하다.

그당시 최소한 3년 지나야 관직을 받는 관행.
이도령의 첫 부임지가 전라도 설정은 비현실적.
당시 암행어사는 연고지에 파견 않는 것이 관행.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자마자 첫 번째 한 일.
춘향을 구출하려 권력을 남용해 변사또를 응징.
이도령 역시 바람직한 관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변사또의 호화판 생일잔치 상을 뒤엎었던 이도령.
특히, 밥상을 뒤엎는 행위는 유교관과 맞지 않는다.

이도령이 온갖 고초를 겪은 춘향에게 숙청 강요.
물론 춘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단호히 거절.
요즘 같으면 이도령이 어사라도 빰 맞을만한 행동.

암행어사 이도령이 분부 - "얼굴 들어 나를 보라."

"얼씨구나 좋을씨고. 어사 낭군 좋을씨고.
남원 읍내 추절(秋節) 들어 떨어지게 되었더니,
객사에 봄이 들어 이화 춘풍(李花春風) 날 살린다.
꿈이냐 생시냐, 꿈을 깰까 염려로다." -춘향의 화답.

정숙한 여자라면 화낼 대목인데.. '춤과 노래(?).

이도령은 월매와 춘향 향단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다.
왕의 밀명을 받은 어사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왕은 이도령에게 이조참의 대사성, 춘향은 정경부인 하사.

'춘향이 고초 겪으며 정절 지켰어도 분에 넘치는 결과.'

과연 이도령 부모가 그 혼인을 기꺼이 허락했을지도 의문,
그당시 관습으로는 두 사람의 혼인에 거부감 갖는 것이 순리.
기생의 딸 천민 성춘향에게 왕이 정경부인을 하사했다는 대목.

이조시대 유교관 시대적 배경에서는 있기 어려운 일.
자유연애, 혼전 합방, 신분 격차를 초월한 양가의 혼인.
춘향전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춘향전은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조선조 순조 때 '조재삼'의 저서 <송남잡식> 에 있는 '춘양'.
남원부사 아들 이도령이 어린 기생 춘양과 친근하게 지내던 중
이도령이 떠난 뒤 수절하는 춘양을 신임부사 '탁종립'이 죽였다.
하여, 타령을 지어 '춘양'의 원혼을 위로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순조 때 이희준의 저 '계서잡록'에는 영조 때 어사 '박문수 설화'.
어려서 외숙부를 따라 진주에 갔는데 거기서 친밀히 지내던 기생.
10년 세월 후 암행어사가 되어 걸인 옷차림으로 찾아가니 푸대접.
하여, 박문수는 전에 알던 기생의 여종을 찾아갔더니 극진히 환대.

다음날 그곳 탐관오리 부사를 찾아간 박문수는 쫓겨난다.
이에 박문수는 어사로 출두해 백성을 괴롭힌 부사를 응징.
그 기생에게 벌을 주고 여종은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숙종 때의 김우항은 48 세가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가난한 그는 딸의 혼사비용이 없어 단천부사 이종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푸대접 받은 그는 옛정이 깊었던 단천 기생을 찾아간다.
그는 그 기생의 도움으로 딸을 출가시켰고 훗날 과거에 급제한다.

그는 암행어사가 된 후 걸인차림으로 그 기생을 찾으니 역시 환대.
다음날 단천에 들어가 어사 출두를 하여 부사의 죄를 다스려 파직.
임금에게 허락을 얻고서 그 기생과 행복하게 살았다는 설화가 있다.

이런 설화들이 밑바탕인 춘향전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완성.
'지리산녀 전설' 및 '도미부인 설화' 는 <지리산가> 판소리를 잉태.
아쉽게도 <지리산가>는 맥이 끊겼지만 춘향전 밑바탕에 일조한 듯.
남도 여인의 높은 정절을 기리는 줄거리는 모두 일치하기 때문이다.


............
춘향무굿.
............


원시종교는 무속에 기원을 두듯 '춘향가'는 무굿에서 유래.
이조 숙종 초, 남원 퇴기의 딸 성춘향은 인물이 몹시 박색.
어쩌다가 당시 남원부사 아들 이몽룡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2년 임기를 마친 이부사는 한양으로 올라가니,
이몽룡과 성춘향은 후일을 기약하고 이별하였다.

그후 이부사가 관직에서 물러나 집안은 점차 몰락.
이런 이몽룡 사정을 모르는 춘향은 병이 깊어가고,
소식 없는 이몽룡의 무정을 원망하면서 죽고 말았다.

춘향이가 죽은 이듬해부터 남원지방에 흉년과 재앙
군민들이 굶어죽어가자 원귀가 된 춘향 소치라 생각
흉흉한 민심을 걱정한 당시 이방이 지었던 '춘향전'

무당으로 하여금 <씻김굿>을 하게 한 춘향무굿.
그 '씻김굿' 다음해부터 재앙이 없어지고 풍년.
그후 춘향무굿은 남원은 물론 팔도에 퍼져 성행

당시 명창 하은담과 결성 최선달
판소리로 부르기 시작한 [춘향전]
이것이 우리나라 판소리의 첫출발.

고려 때 무당과 박수는 궁중출입 할만큼 성행
가무가 출중하면 궁중 무희를 전담할 정도였다.
이조 때 星宿廳에 나라무당을 소속시켰다는 기록

이조 말까지 나라당주로서 존재한 나라무당과 주무.
주무는 내무녀(內巫女)로 주읍의 성황당을 받들었다.
관부(官府)의 부군당(府君堂)을 모시는 관선무(官選巫)

남자는 장악청에 속하여 관아의 의식 때는 주악을 하고,
무사(巫事)에는 무악을 연주해 한때 군대에 조직을 편성.
각 관아와 민가 인근의 무당과 박수에겐 무세(巫稅) 징수.

왕실에 출입하는 무격의 힘은 참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 11년(1505년) 9월 박나인은 원주기생 궁궐무녀 월매
음률이 곱고 희학(戱謔)을 잘해 왕이 각별하게 돌보고 사랑

월매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자 왕은 몹시 슬퍼하며
여완(麗婉)이라 호를 지어주고, 후원에 차린 제사상
희빈과 기녀 흥청(興淸)과 함께 참석하여 슬퍼하였다.

장례를 치를 때 왕은 몸소 무당이 되어 노래와 춤
백악사에 올라 폐비 윤씨를 위로하고 의지하는 굿.
연산군은 무당 박수들과 음란한 제사를 올렸던 기록.

당시 왕실에서 성행한 무속신앙은 민중에게 절대적
인생 운명을 무의기원(巫儀祈願)에 의지할 정도였다.
따라서, 판소리 춘향전은 '춘향무굿'에서 유래되었다.

............... 여자 재혼을 금기로 여긴, 이조시대................
제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열녀는 두 사내를 섬기지 않는다."

<시경>의 '백주' 또는 이조시대의 법전 '경국대전'에도 언급.
<다시 시집 간 여자의 자손에게는 벼슬을 주지 말라.>는 기록.

'가물가물한 등잔불이 내 그림자 조문하듯.
외롭고 고독한 밤에는 새벽도 더디 오더이다.
처마 끝 빗방울 떨어질 때나 창가에 비친 달빛.

하얀 빛 흘리는 밤에 나뭇잎 하나 뜰에 흩날릴 때
외기러기가 먼 하늘에서 우는 밤, 멀리 닭 울음소리.
어린 자식 깊이 잠든 밤, 가물가물 졸음 오지 않는 밤.

'외로운 밤 깊은 고충을 누구에게 하소연할까?'

이처럼 과부에게도 절개를 강요했던 이조 국법의 영향.
죽은 남편 옷만 보고 혼례를 치룬 '함양 박씨부인 열부전'
함양 군수 윤광석이 한밤중 기이한 꿈을 꾸고 지은 <열부전>

그녀가 남편 상복과 혼례를 치룬 것은 장사를 지내야 했기 때문
장사를 지낸 뒤에도 자결을 참았던 것은 소상(小祥)이 있기 때문.
소상을 끝낸 뒤에도 죽음을 참았던 것은 대상(大祥)이 있기 때문.

3년 상을 마치고 지아비 죽은 날 같은 시각에 죽은 그녀.
그것이 이조시대에 바람직하게 여겼던 이상적인 열녀상.
..................................................................................

하여, 퇴기 월매까지도 춘향 앞날을 위해 재혼하지 않은 듯.
이조 여인네의 정절은 그 시대적 배경의 소산물로도 보인다.
그러나, 춘향전 밑바탕엔 보이지 않는 민초의 바램이 담긴 듯. 

성춘향(成春香)은 1675년(조선 제19대 숙종) 음력 4월 8일,
남원의 퇴기(退妓) 월매와 성씨라는 양반 사이에서 태어났다.
춘향이 16세가 되던 단오에 이몽룡과 광한루에서의.. 첫 만남.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이 뜨겁게 시작.'

이도령이 한양으로 영전해 가는 부친을 따라 떠난 후
춘향은 후임 사또 수청을 거절한 죄로 고초를 겪다가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을 다시 만나 행복을 찾게 된다.

춘향전은 창극 소설 연극 영화 오페라로 많이 알려졌다.
이몽룡은 춘향을 정실부인으로 맞아 백년해로하는 내용.
춘향전은 설화를 소재로 시대적 배경을 가미한 작품인 듯.

춘향은 성참판의 딸이지만 퇴기 월매의 딸 신분이다.
춘향이 신분을 초월한 사랑은 서민의 입맛에 맞는다.
춘향이 겪는 고초를 통해 탐관오리 비리도 꼬집는다.

춘향의 정절은 이조의 고루한 유교사상과 어울린다.
기생의 딸이어도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유교 윤리관
탐관오리 응징하는 암행어사 제도의 정당성도 합리화.

춘향전은 이조의 병폐를 지적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것을 바로 잡아달라는 백성들의 염원도 깃들어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는 줄거리 구성.

'불과, 16세와 17세에 사랑을 나눈 춘향과 몽룡.'

양반 도령이 야밤에 규수 집 담을 넘어 벌리는 혼전 정사.
옆방에서 숨죽이며 엿듣던 월매의 억장을 무너뜨린 첫날밤.
이조시대에 그 나이면 성혼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열 여섯, 열 일곱 나이이면 요즘 중 고등학생 수준.'

이팔 청춘 춘정을 못이긴 남녀 합방이 흠이 아니었던 듯.
그러나, 이조시대 고루한 유교 윤리관으로 보면 대담한 일.
이도령은 입신양명후 춘향과 굳게 백년가약하기로 맹세한다.

그후 목숨걸고 지조와 정절을 지킨 성춘향.
성춘향과의 첫날밤 굳은 약속을 지킨 이도령
두 사람은 백년해로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한다.

사랑은 춘향전처럼 숭고하고 아름답고도 미묘한 기쁨의 감정.
오늘날 청소년은 입시지옥 대학졸업 군대까지 다녀와도 미혼.
직장을 갖고 결혼하기까지 성욕을 억제하기란 무리인 것 같다.

'건강한 청소년들에게도 포르노는 성욕 해소 수단.'

바로 여기에 우리나라 청소년 성교육에 문제점이 있다.
이조시대 열 여섯 나이면 다 아는 사실까지 감추려는 점.
알 것 다 아는 청소년들이 성욕을 참다 못해 방황하는 듯.

'이조시대보다 낙후된 오늘날 성교육은 문제 아닐까?'

임신과 출산에 관해 옳바르게 알리는 교육.
사랑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라야 한다는 점.
사랑의 결과, 태어난 자녀에 대한 교육 방법

남녀간 바른 성윤리관을 갖기 위한 첫날밤 예의범절
청소년은 아이 출산과 양육을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이러한 문제점에 관한 교육이 청소년에게 필요할 듯.

춘향전은 모두 9 마당 판소리로도 오늘날까지 꾸준히 각광.
사랑은 기쁨 만큼 고통과 인내도 따르는 감정 임을 알려준다. 


 


 
십장가. 


 

 

춘향전 '십장가'엔 우리 민족의 맺힌 한이 잘 담겨 있다.
남원 사또 변학도가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줄거리이다.
수청 거부하는 춘향의 지조와 절개가 심금을 울리는 십장가. 

......................춘향전의 십장가. <판소리>......................
사또 분이 어찌 났던지 벌벌 떨며 기가 막혀 허푸허푸 하며
"여봐라, 그년에게 다짐이 왜 있으리. 묻도 말고 형틀에 올려매고
정치를 부수고 물고장을 올려라." (물고장 : 몸에 물 뿌려 곤장치기)

춘향을 형틀에 올려매고 쇄장이 거동 봐라.
형장이며 태장이며 곤장이며 한아름 담쏙 안아다가
형틀 아래 좌르륵 부딪치는 소리 춘향의 정신이 혼미한다.

집장 사령 거동 봐라.
이 놈도 잡고 능청능청 등심 좋고 빳빳하고 잘 부러지는 놈
골라 잡고 오른 어깨 벗어 메고 형장 집고 대상청령 기다릴 제

"분부 모셔라. 네 그년을 사정두고 허장하여서는
당장에 명을 바칠 것이니 각별히 매우 치라."

집장 사령 여쭈오되

"사또 분부 지엄한데 저만한 년을 무슨 사정 두오리까.
이년 다리를 까딱 말라. 만일 요동하다가는 뼈 부러지리라."

호통하고 들어서서 검장 소리 발 맞추어 서면서 가만히 하는 말이

"한두 개만 견디소. 어쩔 수가 없네.
요 다리는 요리 틀고 저 다리는 저리 트소."

"매우 치라"

"예잇, 때리오."

딱 붙이니 부러진 형장 개비는 푸르르 날이 공중에 빙빙 솟아
상대 대뜰 아래 떨어지고 춘향이는 아무쪼록 아픈 데를 참으려고
이를 복복 갈며 고개만 빙빙 두르면서

"애고 이게 웬일이어."

곤장(棍杖) 태장(笞杖) 치는 데는 사령(使令)이 서서
하나 둘 세건마는 형장(刑杖)부터는 법장(法杖)이라,

형리(刑吏)와 통인(通引)이 닭쌈하는 모양으로 마주 엎뎌서
하나 치면 하나 긋고, 둘 치면 둘 긋고, 무식하고 돈 없는 놈

술집벽에 술값 긋듯 그어 놓니 한일(一)자가 되었구나.
춘향이는 저절로 설움겨워 맞으면서 우는데,

"일편 단심(一片丹心) 굳은 마음 일부 종사(一夫從事) 뜻이오니,
일개 형벌 치옵신들 일 년이 다 못가서 일 각인들 변하리까?"

이 때 남원부(南原府) 한량(閑良)이며
남녀 노소 없이 구경할 제, 좌우의 한량들이,

"모질구나 모질구나. 우리 골 원(員)님들이 모질구나.
저런 형벌이 왜 있으며, 저런 매질이 왜 있을까?
집장 사령(執杖使令)놈 눈 익혀 두어라.
삼문(三門)밖 나오면 급살(急殺)을 주리라."

보고 듣는 사람이야 누가 아니 낙루(落淚)하랴.

둘째 낱 딱 부치니,

"이부절(二夫節)을 아옵는데, 불경 이부(不更二夫)
이내 마음이 매 맞고 죽어도 이 도령은 못 잊겠소."

셋째 낱을 딱 부치니,

"삼종지례(三從之禮) 지중한 법 삼강오륜(三綱五倫)알았으니,
삼치 형문(三治刑問) 정배(定配)를 갈지라도
삼청동(三淸洞)우리 낭군 이도령은 못 잊겠소."

넷째 낱을 딱 부치니,

"사대부 사또님은 四民公事 살피잖고 威力公事 힘을 쓰니,
사십팔방(四十八坊) 남원 백성 원망한을 모르시오.
사지를 가른대도 사생동거 우리 낭군 사생간에 못있겠소."

다섯 낱째 딱 부치니,

"五倫倫氣 그치잖고 부부유별 五行으로 맺은 연분
올올이 찢어 낸들 오매불망 우리 낭군 온전히 생각나네.
오동추야 밝은 달은 임 계신데 보련마는, 오늘이나 편지 올까
내일이나 기별올까. 무죄한 이내 몸이 오사할 일 없사오니,
오결 죄수(誤決罪囚) 마옵소서. 애고애고 내 신세야."

여섯 낱째 딱 부치니,

"육육(六六)은 삼십육(三十六)으로 낱낱이 고찰(考察)하여,
육만 번 죽인대도 육천 마디 어린 사랑 맺힌 마음 변할 수 전혀 업소."

일곱 낱을 딱 부치니,

"칠거지악 범하였소? 칠거지악 아니여든 칠개 영문 웬일이요.
칠척검(七尺劍) 드는 칼로 동동이 장글러서 이제 바삐 죽여 주오.
치라 하는 저 형방아. 칠 때 고찰 마소. 칠보 홍안(七寶紅顔) 나 죽겠네."

여덟 낱을 딱 부치니,

"팔자 좋은 춘향몸이 팔도 방백 수령 중에 제일 명관 만났구나.
팔도방백 수령님네 치민(治民)하려 내려왔지 악형하려 내려왔소?"

아홉 낱을 딱 부치니,

"구곡간장 굽이 썩어 이내 눈물 구년지수(九年之水) 되겠구나.
구고(九고-깊숙한 곳) 청산 장송 베어 정강선 무엇 타고 한양성중 급히 가서
구중궁궐 나랏님께 구구히 억울한 사정을 여쭈옵고 구정(九庭) 뜰에 물러 나와
삼청동을 찾아가서 굽이굽이 반겨 만나 우리 사랑 맺힌 마음을 마음껏 풀련마는."

열 낱을 딱 부치니,

"십생구사(十生九死)할지라도 팔십년 정한 뜻을 십만 번 죽인대도 가망 없고
무개내지. 십육세 어린 춘향 곤장맞아 원통 한 귀신 되니 가련하고 가련하오."

열 치고 구만 둘 줄 알았더니 열 다섯째 번 매를 치니,

"십오야 밝은 달은 떼구름에 묻혀 있고
서울 계신 우리 낭군 삼청동에 묻혔으니
달아 달아 임 보느냐? 임 계신 곳 나는 어이 못 보는고."

수물(스물)치고 끝날까 하였더니 스물 다섯 매를 치니,

"이십 오현 야탄월에 불승청원 저 기러기, 너 가는데 어디메냐.
가는 길에 한양성 찾아들어 삼청동 우리 님께 내 말 부디 전해다오.
나의 모습을 자세히 보고 부디부디 잊지 말라."
..................................................................

남원은 '동편제 판소리'의 본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가왕(歌王) '송흥록'에서 여류 명창 '안숙선'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 배출된 명창들은 밤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이 있고,
광한루 건너 편 남원 관광단지 안에는 '국립민속 국악원'이 있다.

민속국악원과 이웃한 춘향문화예술회관(0671-625-4027) 에서는
토요일마다 판소리 공연 및 임권택 감독 춘향뎐 야외세트도 볼거리.
흥부전 배경마을은 성산리는 남원과 함양을 잇는 팔랑치 아래 쪽에 위치.
박첨지의 묘, 박첨지네 텃밭, 서당터. 매년 삼월 삼짓날 박첨지 제사 볼거리.

백장공원 (변강쇠공원)는 정력의 상징으로 알려진 변강쇠와 옹녀.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지리산 주변은 <변강쇠 전>의 발상지이다.

판소리 < 변강쇠 타령 >의 여 주인공 옹녀의 고향은 평안도 月景村.
과부살이 들어 서방마다 첫날 밤에 죽자 사내 씨앗을 말린다고 추방.
어느 날, 옹녀는 개성 청석관에서 빌어먹으러 왔던 변강쇠를 만난다.

둘이 만나 인사를 나누고 배필 삼아 신랑의 고향인 삼남을 돌아다니는데
옹녀가 행상 날품 팔아 푼돈을 모으면 변강쇠는 술과 노름 계집질로 탕진.
옹녀가 변강쇠의 마음을 바로 잡으려고 둥지 튼 곳이 남원 산내면 대정리.




단오절.


 


춘향이 이도령과 광한루에서 처음 만났던, 단오절.
남원의 이조시대 단오절에는 어떤 풍습이 있었을까?
한반도의 단오절 풍습은 언제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단오절 모발 관리법................................
음력 5월5일은 창포물로 머리감고 참빗으로 머리 빗는 날.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여성은 헤어 스타일에 무척 민감하다.
하여, 고대사회의 여러나라 모발관리 풍습도 함께 알아보자.

중국 여인들은 여름철에 창포와 녹차 물에 머리를 감았다.
녹차에 함유된 비타민과 토코페롤은 비듬치료에도 효과적.

클레오파트라는 가발을 쓰고 악어와 사자 기름을 발랐단다.
가발은 사막 태양으로부터 모발 보호, 기름은 탈모방지 목적.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허브를 이용해 목욕하고 머리도 감았다.
향신료 '로즈 마리'는 탈모방지 및 발모촉진 用 21세기 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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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포주....................................
고려 시대에 남자들은 공차기, 편싸움, 여자들은 그네뛰기
이조시대 여자들은 창포 삶은 물에 머리감고 약수터 물맞이
특히 단오에 마시는 창포주 향기는 병마를 쫓는다고 믿었다.
고려 시대부터 술 담그는 방법으로 찹쌀 청주에 창포뿌리 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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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오절의 유래와 풍습...............................
단오의 '단(端)'자는 첫째를 뜻하고, '오(午)'는 다섯을 뜻함.
중오는 五의 숫자가 겹치는 양기가 왕성한 날로 뜻풀이 된다.
전통 절일(節日)로서는 1월 1일,· 3월 3 일, 7월 7일, 9월 9일.

단오날 쑥떡 모양은 수레바퀴처럼 만들어 '수리떡'이라고 한다.
단오날은 초나라 굴원이 수뢰(水瀨)에 빠져 죽었다 하여 수릿날.
수리떡은 초나라에서 비롯된 고유풍습이 한반도까지 정착되었다.
즉, 한반도로 초나라 유민들이 그만큼 많이 이동했다고 보여진다.

문앞에 터를 닦고 타맥장 하오리라
도리깨 마주서서 짓내어 두드리니
잠농을 마를 때에 사나이 힘을 빌어
누에섭도 하려니와 고치나무 장만하소

오월오일 단오날 물색이 생신하다.
외밭에 첫물 따니 이슬에 저젓으며
모찌기는 자네하소 논심기는 내가 함세
 

들깨모 담배모는 머슴아이 마타내고
가지모 고추모는 아이딸 너 하여라.
맨드람 봉선화는 네 사천 너무마라.

'단오날 새벽 상추잎에 맺힌 이슬에 분을 개어 바르면
버짐이 피지 않고 피부가 고와진다.'고 옛부터 믿었다.

단오날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
약쑥, 익모초, 찔레꽃 말리기 풍습.

말린 약쑥은 횃불 또는 담뱃불로도 사용했다.
약쑥 다발은 액땜 용도로 대문 옆에 세워둔다.
대추 풍년을 기원하며 가지사이에 돌 끼워놓기

'일명 대추나무 시집 보내기...풍습'.

단오날 여성들이 치마폭을 날리며 그네타기
남성은 씨름대회에서 이기면 상품으로 황소.

궁중 내의원에서는 옥추단과 제호탕을 왕에게 진상
공조에선 단오선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한 궁중풍속.

제호탕은 여름 더위를 먹었을때 효험있는 한약제.
옥추단은 배탈이 났을 때 물에 타 마시는 구급약.
단오절 무렵 더울 때 왕에게 진상한 부채 '단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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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원. 




............초나라 굴원(屈原)의 고향을 찾아서..................
우리나라의 단오절이 유래된 굴원의 고향을 찾아가 보자.

무협관광을 끝낸 빅토리아 선박은 자귀라는 곳에 정박한다.
자귀는 초나라 시대의 유명한 충신이자 시인인 굴원의 고향.

자귀에서 향계하(香溪河)라는 강을 따라 올라가면 향계(香溪)
이곳은 중국 4대 미인으로 알려진 왕소군(王昭君)의 고향이다.

자귀에 정박한 배는 제 3 협인 서릉협이 시작되는 곳이다.
저녁식사를 마친 승객은 선착장 민속공연장에서 공연 감상.

공연 무대는 삼협의 아름다운 경치가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 배경.
이곳 특유한 옷차림은 농사 일에 실용적인 바지와 저고리 스타일
산골짝에 씨 뿌리는 처녀와 농사짓는 총각 그리고 결혼식의 풍습.

소삼협에서 보았던 섬부(纖夫)들 애환을 담은 구성진 노래와 춤
있는 힘을 다해 배를 끄는 뱃사공들의 몸 동작을 잘 나타내준다.

이어서, 중국우산을 들고 나온 여배우들이 나와서 춤을 춘다.
남쪽 지방이라 짧은 팔 의상에 월남 스타일 치마 차림의 공연.
중국 인간문화재 노인이 부르는 뱃사공의 노래는 참 특이하다.
12명의 출연자가 노인의 선창에 따라 노젓는 모습으로 춤 춘다.

공연감상후 갑판에 앉아 흐르는 양자강을 보며 담소하는 사람,
선박 도서실에서 책 읽는 사람, 칵테일 바에서 담소 나누는사람
중국인들은 조그만 마작실에서 마작에 열중하는 것이 배안 풍경

자귀는 작은 마을이지만, 유람선 선착장에는 주막집들이 많다.
네온불빛 깜박이며 호객행위를 하지만 유람선 선원은 만류한다.
시골 항구의 빨간 등불 선술집으로 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빅토리아호 승무원들은 남녀가 삼삼오오 짝지어 외출한다.
항해하는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시골 선술집에서 풀려는 듯.
<자귀>는 굴원의 고향이며, 왕소군의 고향이라 여기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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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과 굴원의 고향 <자귀>는 너무나 유사하다.
<남원>의 섬진강과 <자귀>의 멱라(양자)강이 유사.
유서 깊은 풍류문화의 산실인 점과 기생, 단오절 풍습.

<남원>이 춘향의 고향이라면 <자귀>는 왕소군의 고향.
'굴원'과 '왕소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 굴원(屈原), 그는 누구인가?......................
기원전 340-278 시대 초사(楚辭)라는 서사시 장르 창시자.

이백, 두보에게 영향준 시인으로 망국후 강물에 몸을 던진다.
그 멱라강에서 몸을 던진 단오날 배에서 물고기 먹이 주는 풍속

그 풍속은 충신 애국시인 굴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풍습이다.
초나라 회왕의 신임을 받았던 굴원! 그 공로를 가로려 한 근상.
굴원이 거절하자 근상 모함으로 궐에서 쫓겨나 장강을 방황한다.

굴원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며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 많은 작품.
'이소(離騷)'와 '어부사(漁夫辭)'는 굴원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굴원은 제나라와 연합해 진나라에 대항을 주장한 친제파.
당시 초나라는 굴원의 반대파인 친진파가 득세하고 있었다.
진나라 장의가 6백리 땅을 베어 주겠다는 미끼에 속은 친진파.
제나라와 친교를 끊자 진나라 침략을 받고 초나라는 고립된다.

결국 회왕은 다시 굴원을 불러들여 중요하게 등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또 근상에 몰려 강남지방으로 추방되는 비운에 빠진다.
굴원은 '상수'를 방황하며 웅혼(雄渾)의 시 천문(天問)을 써냈다.
172가지 문제점을 제기하며 나라걱정을 한시도 잊은 일이 없었다.

경양왕 19년(B.C. 280) 초나라는 친진 정책에서 반진 정책.
그리고,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반진 동맹을 재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진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굴원은 이 소식을 듣고 조국의 앞날에 희망이 없음을 한탄
'애영과 회사(懷沙)의 시'를 짓고 음력 5월 5일에 자살한다.
이때 나이 62세였고 훗날 중국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자귀에 있는 굴원사(屈原祠)에는 굴원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음력 5월 5일은 단오절(端五節)이며 굴원을 추모하는 제일(祭日).

단오날 강남 사람들은 용의 머리를 장식한 용선 경주.
멱라수 물고기에게 갈대잎에 싼 송편을 던져주는 풍습.
물속 굴원 시신이 고기에게 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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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 미인 왕소군.........................
굴원의 고향 자귀는 미인 왕소군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자귀에서 향계하(香溪河) 강을 따라 올라가면 <향계(香溪)>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중국 4대 미인' 왕소군의 고향이다.

' 침어(浸魚) =서시(西施) :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는다.'
'낙안(落雁) = 왕소군(王昭君) : 기러기가 날개짓을 잊는다.
' 폐월(閉月) = 초선(貂蟬) :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다.'
'수화(羞花) = 양귀비(楊貴妃)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이밖에도 중국 미인으로는 조비연, 달기, 포사 등이 유명하다.

왕소군은 전한(前漢)말 원제(元帝)의 궁녀이다.
흉노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호한야선우에게 시집
그가 죽자 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그곳에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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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이 강한 중국에서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궁녀를 흉노에게 시집보낼 만큼 다급했던 한나라.
한나라는 그 뼈아픈 역사을 묘하게 변명하려 한다.
왕소군을 통해 그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추적해보자.

................. 왕소군이 변방으로 시집 간 이유.....................
중국 4대 미인 왕소군이 변방으로 간 까닭은 다음과 같다.
서경잡기(西京雜記) 에 의하면 원제는 후궁이 무척 많았다.
일일이 볼 수 없을 만큼 많아 그림을 보고 궁녀를 선택했다.

왕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밉게 그려졌다.
한나라는 흉노와 화친을 위한 못난 궁녀 한 사람을 간택.
초상화 중 제일 못생긴 왕소군을 뽑아 시집 보내기로 결정.

그런데 수레에 실려가는 그녀의 미모를 본 원제
안타까워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결정된 일

향계 기념관에는 왕소군이 사용했다는 우물
16세까지 사용했다는 화장대와 동그란 거울.
그녀가 변방으로 떠나기 전 사용하던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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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남원에 초나라 단오절 풍습이 정착된 배경.
남원은 초나라 때부터 중국과는 밀접한 문화의 교류.
진나라에 패망한 초나라 유민이 한반도로 유입된 듯.

단오절 풍습과 '왕소군' = 춘향전이 탄생한 근원.
초나라에서 용의 머리를 장식한 용선경주 = 거북선
굴원을 따르던 초나라 유민이 한반도로 피난온 흔적. 



초나라. 



우리나라 각종 운동회는 청군과 홍군으로 나눠 시합.
<장기>는 청색의 초왕 진영이 홍색 진영을 먼저 공격.
<바둑>은 흑돌을 잡은 쪽이 백돌보다 먼저 착점을 한다.

<장기>는 청색 초왕 측이 먼저 공격한다.
그러나, 홍색 한왕 측이 마지막에는 승리.
한왕 측은 보통 기물 몇개를 떼어도 이긴다.

장기는 왜 청색 초왕 측이 먼저 공격할까?

.............장기....................
옛날 중국 역사에서 유방과 항우.
각각 한나라와 초나라를 창건하고
오랜 전쟁 끝에 결국 한나라가 승리.

우미인을 앞세운 유방의 미인계로 항우가 죽고
초나라가 망했으며 결국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

역사는 승자가 기록을 하므로 한나라는 상국
초나라를 하국으로 묘사해 만들어진 장기 놀이

처음에는 실력에 관계없이 연장자가 한을 쥐고
연소자가 초를 쥐고 서로간 승부를 가리는 놀이
연장자가 실력이 낮으면 한을 쥐고도 먼저 공격.

'장기는 한나라의 우월성을 강조한 놀이문화.'
......................................................

'바둑은 왜 흑돌을 잡은 쪽이 먼저 둘까?'

...................바둑......................
요나라 임금이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순임금에게 물려주며 아들에게 가르쳤던 통치술.
바둑판 361칸 중앙 천원 자리는 천자 자리를 상징.

중국 360주 통치술을 아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바둑.

실력이 약한 쪽이 보통 흑을 잡는다.
흑이 여러 점을 깔아도 보통 백이 승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역전시키는 것이 통치술.

중화족의 우월성을 상징한 놀이문화, 바둑.
..................................................

중화족 한나라 존폐를 위협했던 남방묘족.
중화족은 의도적으로 남방 묘족을 평가절하.
한나라 역사는 남만의 야만족으로 표현해왔다.

역사적으로 선진 문명은 큰 강 하류에서 유래.
남방 묘족의 문화는 북방 한나라보다 못지 않다.
오히려, 한나라보다 앞선 문명을 갖고있는 남방 묘족.

'남방 묘족은 일본 한국 인도를 포함한 민족.'

한중 양국의 고대사를 보면 당혹감을 느낄 때가 많다.
한반도가 옛날에 중국의 한 부분이라 주장하는 중국인.
우리나라는 중국에 조공 바치고 책봉받던 나라라는 주장.

알기쉽게 말해 한반도는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주장.

중국인은 우리나라와 일본을 모두 한 형제라고 말한다.
그 말은 중국이 형이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아우라는 뜻.
한반도 문화뿌리는 고대중국 초나라라는 중국인들의 주장.

그 근거로 단오(端午), 곰을 토템으로 한 단군신화.
초나라 인접 소수민족 묘족의 신화와 닮았다는 주장.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려 삼신산에 보낸 한종(韓終)
단군신화에 나오는 환웅(桓雄)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시점은 진시황보다 앞선 연대.
초나라 왕조는 삼국지 소설 속에 나오는 남만(南蠻).
제갈공명이 맹획을 7종7금 했다는 미개한 나라 남만.

중국은 남방 묘족 역사를 애써 왜곡하려는 의도 같다.
우리 민족을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여기는 풍토.
알기쉽게 말하면, 중국 55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

'과연, 중국이 주장하는 역사 내용이 맞을까?'

....중국이 주장하는 역사......
진나라 말기 한종이 이끌고 온
초나라의 라씨. 노(盧)씨, 3천명
진한, 변한, 신라를 건국했다는 설.

강릉(江陵), 양양(襄陽), 단양(丹陽),
한강(漢江), 태백산(太白山) 등의 지명.

중국 춘추전국시대 북방은 주(周)나라,
남방은 초나라, 초나라 건국지는 단양
단양은 중국 초나라 한강(漢江)의 상류.

그후 초나라 도읍지는 강릉
초나라는 단양 일대를 지배.
한강은, 중국의 산시(陝西)성

친링(秦嶺) 남쪽 태백산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흘러 양자강으로 합류하는데
그 양자강 하류 지역 지명이 한양(漢陽).

초나라 토템은 단군신화 곰과 일치.

환웅이 갖고온 천부인(天符印.거울, 칼, 방울)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무속신앙의 무구 3가지.

초나라 묘족은 각종 귀신과 무속신앙이 성행
지금도 단오절에 마늘과 쑥으로 잡귀쫓는 풍습.

한반도에 조직적으로 이주했다는 초나라 유민들
한종(韓終)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중국의 주장.
한종은 강원도 경북 접경에 도착했다는 주장이다.

'한국(韓國) 국호도 초나라 한종(韓終)에서 유래.'

특히,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했던 신라
진나라 말기의 중국문화를 그대로 계승.

초나라 멸망후 노나라 항복을 받은 한왕
드디어, 한나라의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중국인이 주장하는 중국 역사
...........................................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힘든 중국 역사.
상당 부분이 왜곡되고 조작된 듯한 흔적.
중국과 일본이 합작한 짜맞추기 역사인듯.

.........초나라와 우리나라의 공통점...........
2천년전 진나라 말엽에 방사 한종(韓終)의 인솔하에
한반도 동남부에 이주한 초나라 라(羅)씨와 로(盧)씨
씨족 3천여명이 진한 변한, 그리고 훗날 신라 건국설.

한반도로 건너간 방사 한종이 단군신화 속 환웅.

고구려 역사를 놓고 한국과 중국이 역사왜곡 논쟁 중
이와 같은 가설은 지방에 있는 한 중국인 학자의 주장
양 교수 주장은 신라의 뿌리는 중국의 후베이(湖北)성.

강릉, 양양, 단양, 한강(漢江), 태백산(太白山) 등
강원도 일대 지명과 단오제 풍습은 초나라와 공통점.

중국 춘추전국시대 북방은 주나라, 남방은 초나라
초나라 건국지는 단양으로 한강(漢江)의 상류지역.
초나라는 강릉으로 도읍을 이전 단양 일대를 지배.

한강은 현재 산시성 친링(秦嶺) 남쪽 태백산에서 발원
동남쪽 우한에서 양자강으로 합류한 하류지역이.. 한양

우리나라 단군설화 속에 토템이 곰과 호랑이
초나라 토템은 곰이고 초 왕족 성은 슝(熊.곰)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다 본 두 곳(三危와 太白)

오늘날 쓰촨(四川)성과 간쑤(甘肅)성 교차지
민산(岷山)과 한국 강원도 태백산을 가리킨다.

환웅이 하늘에서 갖고 온 천부인(거울, 칼, 방울) 3개
초나라 묘족은 옛날부터 각종 귀신과 무속 신앙이 성행
묘족은 지금도 단오절에 마늘과 쑥으로 잡귀를 쫓는다.

초나라 유민들이 한반도에 조직적으로 이주한 과정
한종(韓終) 이라는 방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설.

진시황때 서불 방사가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간듯.
당시 한종은 강원도와 경북 접경에 도착했다는 설.
이때 함께 간 유민들이 라(羅)씨족과 로(盧)씨 씨족.

라국(羅國)과 로국(盧國)은 현재 후베이성 근처
BC 690년 초나라에 정복되어 나씨와 노씨 성 하사
남쪽 호남(湖南)성 일대로 강제 이주당했다는 주장.

진시황 말기 라국과 노국 유만 3천여명
각각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세웠고
진한이 신라(新羅 : 새로운 라국)로 발전

하여, 신라의 초기 국가명칭..사로국.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와 연관설.

신라가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한 것도
진나라 말 중국문화를 가지고 간 영향.
..........................................


덧 말.

신라 마의태자 후손이 중국 금나라를 건국
후금을 거쳐 청나라 대에 이르러 중국 통일.
중국에 우리나라 지명을 명명한 것은 아닐까?

'통일신라 당시 한반도 곳곳의 지명들..'

앞으로는 누구인가 풀어헤쳐야 할 수수께끼.
중국 곳곳의 한반도 지명은 베일 속 미스테리.
초나라 당시 한반도는 양자강 하류였던 듯 싶다.

즉, 양자강 하류는 우리 민족이 지배한 영역인듯.
산동반도 일대는 우리 민족이 정착했던 영역인듯.
풍습과 문화 면에서 우리 민족과 공통점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