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21. ( 여원치. 마애불상. 여진족. 이성계 )

donkyhote 2010. 5. 14. 02:03

여원치.

 


 

고남산.

 

노치마을 당산 소나무 앞에서 바라보는 산줄기들.

수정봉 고남산은 백두대간이 아니었다면 동네 뒷산

백두대간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에 지리산과 같은 명산

 

낮은 산이 없이는 높은 산도 없는 법.

여원치에서 두 시간쯤 지나면 고남산.

높이가 846.5m에 지나지 않는 산이지만

조망만큼은 높은 산에 뒤지지 않는 산이다.

 

오래 전부터 고남산은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관여.

한때는 태조봉 혹은 제왕봉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고려 말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 장군

이 산에 천제단을 세우고 전승을 기원

정도전이 명명한 아랫마을 이름이 권포.

 

봉화산.

 


해발 450m 여원치는 달궁과 함께 마한의 별궁터.. 연재.
기원전 삼한시대 궁터가 남아있는 아름다운 계곡 여원치
마애여래불에 얽힌 여인의 정절에 대한 전설이 눈물겹다.

또한, 호국혼의 전설을 간직한 아흔아홉 구비의 고개.
주지봉 산신단에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곳.
수 많은 전설은 간직해 온 곳이 바로 이곳 여원치이다.

여원치는 섬진강 상류에 있으며,
남원은 섬진강 상류를 끼고 있다.
하여, 여원치는 남원 10경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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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치는 아흔아홉구비를 돌아 남원과 운봉을 잇는 고개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로 숱한 전쟁을 치룬 역사의 현장.
여원치 능선에는 9개 산성과 성과 성을 잇는 순라길이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 경계선 고갯마루 여원치.'

특히, 여원치는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토벌하려
이곳을 지날 때 백발의 여인이 나타나 승리를 예언한 곳.
하여, 여원치라 불렀는데 그 여인은 지리산신 노고할미

그 사실을 뒷받침하듯 여원치 동남쪽 도로 아래 마애여래불
운봉 현감 박귀진이 이 여래상에 대한 내역을 음각해 놓았다. 



 
마애불상 


 

마애불상 아래 비스듬한 평지와 샘이 있고 절터 흔적.

달궁을 수호하던 정 장군과 황 장군 초상이라 전해온다.

정령치는 바로 정 장군이 지키던 곳이라는 데서 연유한 지명.

 

 이러한 설화는 어떤 연유로 형성되었을까?

 

마애불상


고리봉에서 암반이 내려오다 뚝 끊긴 곳에 자리한 마애불상.

그 아래 평평한 대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어 절터로서의 여건

비탈진 계곡이 달궁마을로 이어져있고 절터 흔적이 남아 있다. 

마애불은 동쪽으로 20도쯤 기울어진 남동향으로,

7m 높이의 암벽에 비교적 깊은 선각 부조로 조각.

 

이 불상군에서 많은 명문을 발견했음에도

아직 정확한 역사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고

근처에 있는 개령암지 또한 기와나 도자기,

토기 파편이 앞으로 그 수수께끼를 풀 열쇄


이곳 마애불상군이나 달궁의 흔적들,

경남 함양의 돌무덤, 생초의 봉분군 등

잠자고 있는 역사가 지리산 곳곳에 산재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양가리 5-3
여원치 정상 부근 바위에 새겨진 불상
고려 때 운봉현감의 글귀도 새겨져있다.

..................고려 운봉현감 박귀진 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꿈에 한 노파가 나타나
이성계가 황산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
이 불상은 그 노파에게 감사하기 위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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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아래 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지만
머리부분을 제외하고는 보존상태 좋은편.

조각수법이 평면적이어서 역동감은 없지만
넓은 어깨와 큰귀 또렷한 코는 시원한 느낌.

.........여원치 마애불에 관한 또 다른 전설.............
옛날 여원치 고개마루에 주막을 하는 주모가 살았는데
왜구가 주모를 희롱하므로 칼로 가슴을 도려내어 자결
그 여인의 정절과 애국심을 기리려 바위에 새긴 여인상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는 마애불.
이 전설의 신빙성을 한결 더 말해주는듯.

왼팔이 없는 마애불에 관한 또 다른 전설.
거지에게 적선을 하다가 붙잡혔던 여인의 팔.
스스로 짤라냈기에 정절을 기리기 위한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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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전설의 고향 여원치 중턱에 있는 여원정.
여원치의 정상 주지봉은 지리산 태극종주 첫머리.
여원정에는 주지봉의 산신단이 자리잡고 있는 곳.

이곳 제단에서 지리산 산신에게 소원을 빌면
만사 형통한다는데 특히, 득남을 한다는 전설.
여원치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남원 10경 중 하나

여원치에서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남원 시가지
미풍이 기억에서 잊혀진 추억을 떠올려주는 곳.
전북 남원시 운봉읍 장교리 여원치.. 장동마을

남원에서 운봉 함양을 잇는 위치의 장동마을.
장동마을의 서쪽은 섬진강이고 동쪽은 낙동강.
옛 전라도와 경상도 길손들의 휴식처 장동마을.

노루도 쉬어갈 만큼 높다하여 장동(獐洞)마을
여원치 고개마루 도로 변에 위치한..장동마을.

장동마을은 운봉과 가깝지만 남원 생활권.
장날 장동마을 주민들은 남원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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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주천면 용담사지석불입상 칠층석탑등성지답사
2006/11/27 오후 3:56 | 내 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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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양가리 여원치 마애불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2호]
남원시 효기리 미륵암석불입상 [문화재제62호]
남원시 이백면 과립리 석불입상[지방유형문화재제128호]



여진족. 



이성계가 여진족과 함께 왜구를 물리쳤던 여원치.
여원치는 고려와 여진과의 관계를 대변해주는 곳.
고려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여진이 군을 파병할 만큼.

'여진족과 이성계는 어떤 관계였던걸까?'

백두산 북쪽 장백산맥 지대를 거점으로 살아 온 민족.
명나라 지배하에 한 지방의 여진족 수장 ‘누르하치’
1616년 국호를‘후금’이라 하고 여진족 나라를 창건.

'1115-1234년까지 원래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

몽고족 원에게 멸망, 원은 1368년 명에 의해 멸망.
금(金)이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국호를 금이라 명명

한편 명(明)은 사천, 하남, 호북, 섬서에서 농민 봉기
이저성 혁명군이 명의 수도인 북경 자금성에 입성하여
숭정제를 폐위시키고 황제에 올라 청조(淸朝)제국이 시작.

한족으로부터 꾸준한 여진족 구축 항쟁을 받으면서
1912년 선통제 폐위까지 268년간 중국 대륙을 통치

한족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1912년 중화민국을 세우고
장개석(蔣介石)이 정권을 이어받아 중국 통일을 시도
여진땅을 만주라 불렀는데 만주란 여진족이 사는 고장.

여진족이 한족에게 침략자란 인상을 주기 때문에
문수(文殊)의 음과 뜻이 변한 만주(滿住)로 쓰다가
만주(滿洲)로 바꿨으며 현재 사용하지 않는 지명이다.

(지리산 일대의 뿌리깊은 문수보살 신앙.)
(한반도와 여진과의 관계를 대변해주는듯.)

한편 중국이 약화된 때 일본이 이조와 만주를 침략
1949년 모택동 인민해방군은 여진족 만주땅을 통합
중화 인민공화국을 건국 후 모든 외세를 추방하였다.

이성계(李成桂)의 이조건국 1392년을 전후해서
1260년 몽고족 진기스칸의 손자가 송나라를 멸망
1368년 명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멸망한다.

몽고족은 원나라 건국전 1230년경부터 고려를 침략
고려는 40년간 강화도에서1271년 원과 굴욕적인 강화
왕자 앞에 충자(忠字)를 붙여 원조에 충성한다는 忠( )王

고려 왕비는 원(元) 공주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세자는 원 궁실에 보내 길러서 고려왕으로 책봉
그러므로 당시에는 고려 말도 모르는 왕이 있었다.

당시 여진땅 '함흥'은 원에서 파견된 관리가 통치.
이성계는 1333年 이자춘(李子春)의 둘째 아들로서,
당시 여진족 땅 영흥(함흥에서 70리)에서 출생했다.

그후 이성계는 부친을 따라 함흥에 이주하였다.
부친 이자춘은 원 쌍성총관부 관직을 받아 종사
원나라가 망하자, 여진족이 옛 여진땅을 회복했다.

이성계도 여진족과 합세해 함남 일대를 회복.
1360년 고려조 공민왕은 이자춘과 협의하여
돈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하니
이성계도 고려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고려는 내란이나 외침이 있을 때면
이성계의 군사를 청하여 이를 진압
이성계는 고려에서 공을 세우게 되고,
고려 조정에서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 말엽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임명.
한편 명은 점점 세력을 확장해 만주까지 점령.
원은 명을 막고자 고려에 원군(援軍)을 요청했다.

이때 고려조는 반 몽고파이며
반 원나라파 이성계를 파병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 후 즉위.

이성계는 고향 함흥 일대와
거란족이 살고있는 압록강 남부와
여진족 영역인 백두산과 두만강 일대.
모두 고려에 통합해 이조 왕조를 건국.

'조선' 국호를 사용한 이성계의 숨은 뜻
단군조선 옛 영화를 재건하려 한듯 하다.
거란족 여진족 고려족 조선족을 모두 통합

('조선'으로 오백년간 살아 내려왔던 이조시대.)
(그러나, 5백년간 정권을 유지하는 동안 중국화.)
(중국 한족의 성씨로 개명하고 한자를 쓰게 된다.)

1107년 고려 전성기때 함흥평야, 홍원 일대까지 점령
여진족의 반격으로 철수했고 송시대에는 여진족이 지배.
거란족이 세운 려(遼)나라(916--1125) 가 지배하고 있다가,
다시 여진족 금나라(1115-1234)가 려를 물리치고 옛땅을 회복.

고려가 잠시 여진 땅 함흥 지방을 점령했을 때
고려 한족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점령지에 거주.
고려가 철수하자 그곳 고려인들은 여진족과 융합

이성계가 출생한 1333년 고려인은 여진족으로 동화
이성계는 전주(全州)에서 유랑해서 온, 실향한 한족.
그땅에 살아온 여진족일 것이란 사실이 더 믿을만하다.

'즉, 여진족으로 동화된 전주 이씨..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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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은 옛 고구려 영역으로 고구려가 패망하자
집권세력이 사라져 마을 단위로 생활하게 되었다.

여진족 근거지 장백산맥 일대와 만주는 날씨가 추워
농사가 잘 안되므로., 유목과 목축업이 주 생계수단.

그들은 고구려 귀족을 도와 발해를 건국 후
요서 지역의 유목민 거란족에게 나라를 잃고
고구려의 '려'와 발해 국호 '진'을 합쳐 여진.

신라 왕족출신 고려인 김보함이 여진을 통합하고
자기 성을 따 금을 세웠으나 몽고족에게 멸망하고
또 흩어져 살며 흉년에는 수시로 고려 국경을 넘어와
곡식과 가축을 훔쳐가고 사람들을 잡아가 노예로 팔았다.

그래서 고려 조정은 골치를 앓고 있엇다
여진으로 도망간 고려의 죄인들도 있었고
고려에서 흉년들면 떠돌이 초적이 되었다가
고려 조정에 토벌하면 여진족 지역으로 도주.

고려에서는 여진을 야만인(오랑캐)라 불렀지만
여진은 고려를 존중하고 형제의 예로서 대했다.

정도전은 여진족과 함께 요동을 정벌할 계획.
태종 이방원의 도전으로 숙청되고 좌절되엇다

하여, 여진과 이성개 군대는 평안도 일대를 공격
명 압력으로 여진은 철수하고 이성개 군대는 토벌
그후 이조의 반 여진 정책은 더욱 강경하게 나갔다.

세종대왕은 여진족을 한반도 이북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설치해 여진족 국경 방어선을 설치했다.

그당시 이조가 여진족과 손잡았다면
만주와 요동반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조는 명을 떠받들고 여진족과 왜를 격멸
여진이 청을 세우고 이조와 교류를 원했으나
인조가 이를 거부하자 청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여진은 이조를 형제의 나라라고 자기 영토로 안 삼고
이조 정권을 보존하고 중국을 지배하려 떠난 만주지역
임진왜란 전까지 만주는 여진 영역, 고종 때 이조 영역.

여진족이 고구려 후예이면 만주는 한반도 영역.
여진족이 중화민족의 후예이면 만주는 중국 영역

거란족은 터키 계열의 유목 초목민족이었고,
여진(돌궐)족은 만주족에서 분파된 민족이고,
만주족은 고조선부터 우리민족이 거주하던 지역

거란족은 만주족 몽골 한족의 압박을 받으며 멸망
소수가 유목생활을 하며 중앙아시아로 흘러들어갔다

고려시대 몽골군에게 끌려간 20-25만의 고려 여인들
몽골로 끌려가서 노예와 성노리개의 대상으로 살았다.
당시 고려의 인구는 1백만에서 150만 정도로 추정된다.

한 가정에서 한명 이상 끌려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끌려가는 딸을 보며 한탄하는 시를 지은 고려 재상.
궁녀를 제외한 전 고려인의 딸들이 끌려간 것 같다.

'몽골 반점은 고려시대 몽골인들의 정복 흔적.'

고려 시대에는 재혼도 가능했고,
정절을 생명으로 여기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겁탈 당해 임신한 여인들
거의 자살했거나 화전민으로 숨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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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여진족 후예들의 풍습.'

이조 건국 초기에 귀화한 여진족들의 잔류민
산간마을에서 머리를 깎고 절을 짓고 살았다.

함경북도 부령군 회령군 유성군 종성군 온성군
경원군 경흥군 등 6진(六鎭)이 설치되었던 변방
여진족들의 은둔부락은 재가승 마을이라고 불렸다.

재가승들은 대개 산간에서 화전을 하며 귀리를 생산.
귀리로 황지(黃紙)를 생산해 세공(稅貢)으로 바쳤다.
황지는 연지라고도 부르며 진귀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소를 이용한 농업과 품앗이 소겨리 조직이 성행했다.
원래 화장 장례풍습은 함경도 매장풍습으로 바뀌었다.
마을 공동으로 상여를 준비해 장례 치루는 재가승생활

이들은 연중 4번 국사당에 산제를 올렸다.
민속놀이로는 주지춤·수박치기·길마지기·
벙어리놀음(걸립굿)·윷놀이·그네뛰기 장기

이들은 외부세계와는 별다른 거래를 하지 않고
혼인도 자기들끼리 하는 폐쇄된 산간오지 생활

차츰 함경도 한민족의 생활풍습에 동화되었으며,
특히 8.15 해방후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거의 동화

 

 

 

이 성계(1335 ~ 1408) .



이조 제1대 왕(재위 1392∼1398).
본관 : 전주(全州)
호 : 송헌(松軒)
별칭 : 자 중결(仲潔), 휘(諱) 성계(成桂)
출생지 : 함남 영흥(永興)

즉위 후 휘를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비(妃)는 한경민(韓敬敏)의 딸 신의왕후(神懿王后),
계비는 강윤성(康允成)의 딸 신덕왕후(神德王后).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한 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내응(內應)
공을 세웠고 아버지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 동북면상만호

1361년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토벌
홍건적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다음해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 제1착으로 입성, 전공을 세워 동북면병마사로 승진

함경도 홍원으로 침입한 원나라 나하추를 함흥평야에서 격파
1364년 최유가 충숙왕(忠肅王)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川江)에서 대파

이어 여진족 삼선 삼개를 함경도 화주(和州)에서 격퇴.
이 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
1368년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

1372년(공민왕 21)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고,
1377년(우왕 3) 왜구가 개경을 위협할 때 격퇴.
당시 그의 지위는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였다.

1380년 양광 전라 경상도도순찰사로 운봉에서 왜구 소탕
1382년 찬성사(贊成事)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다음해 함경도에 침입한 호바투를 길주(吉州)에서 대파

1384년 동북면도원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고
이듬해 함경도 함주(咸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1388년(우왕 14)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최영과 함께 권신 임견미 염흥방(廉興邦)을 처형,

이때 명(明)나라의 철령위(鐵領衛) 설치 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출정을 반대했으나 거절당했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다가
위화도 회군, 최영을 제거, 우왕을 폐한 후 창왕을 세웠으며,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으로서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

다음해 정도전과 창왕 폐위 공양왕을 세웠다.
1390년(공양왕 2) 삼사영사(三司領事)로 승진
1391년 삼군도총제사로서 전제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 구신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었고,
그의 일파 신진세력은 경제적 토대를 구축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
그 해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이조 창건.

이듬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도읍을 한양으로 이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과에게 선위 후 상왕(上王)이 되고,
1400년 방원(芳遠)이 즉위하자 태상왕.

1402년 왕자의 난으로 인한 심적 고통으로
동북면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왔고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사대주의 배불숭유(排佛崇儒) 농본주의(農本主義)
건국이념으로 삼아 500년 근본 정책이 되게 하였고
관제의 정비, 병제(兵制)와 전제(田制)의 재조정 등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묘호(廟號)는 태조, 능은 건원릉(健元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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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차차 기반을 닦기 시작

이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 천호(千戶)로 원나라에 벼슬
이자춘도 원나라 총관부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고 비로소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 兵馬使)
이성계는 가문의 배경과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에서 활동, 새 왕조인 이조를 창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두고 치열한 쟁탈전
태조 즉위 후에 세자 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서 결정하였다.

그러나 방원(芳遠: 신의왕후 소생)이 이에 불만.

사병을 동원, 방석, 방번(芳蕃)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방원의 요청에 의하여 방과(芳果)로 결정하였다.
태조는 방석 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은 데 대해서 몹시 상심.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종 2) 방원이 세자로 책립,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방원에 대한 증오심이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과 함주(지금의 함흥)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함주에 있었을 때에 태종이 문안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를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태조의 태종에 대한 증오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에 귀경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 5월 24일 창덕궁에서 운명.

시호는 지인계운성문 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 神武大王)
능은 건원릉(健元陵) :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인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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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숙왕 4년 10월 11일, 한길도 영흥군
흑석 마을에서 이자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흥은 함흥에서 70리 떨어진 원나라 땅

이자춘은 원나라 천호장 벼슬을 지냈지만,
그의 조상은 전주에 뿌리박고 살던 호족이다.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활을 아주 잘 쏜 명궁.

"아니, 아이가 어른 활을 가지고 쏘잖아?"

이성계는 형 원계, 천계와 함께
말달리기 활쏘기 대회에서 최고상

이자춘과 이성계 부자는 고려군과 손잡고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켰고, 함주(함흥) 이북을
고려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자춘을 삭방도 만호겸 병마사로 봉하노라!"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해 4월, 이자춘은 병으로 운명했고
이성계가 상장군 동북면 상만호가 된 것.

이성계는 그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막아냈다.
어느 날, 서까래 셋을 지고 '꼬기오' 하고 우는 꿈
이성계는 고승을 찾아가 꿈의 해몽을 해달라 부탁했다.

"서까래 셋을 등에 지셨다면, 장차 왕이 되실 운명.
등에 서까래를 진 글자가 임금 왕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세력을 잡더니,
마침내 1392년 7월 17일 이조 왕조의 태조
그의 나이 58살 때였고 17가지 정책을 발표.

새 왕조를 일으키는 데 공이 큰 사람들,
배극렴, 조준, 정도전 17명을 1등 공신
조영규, 조반 등 12명을 2등 공신에 봉.

고려 옛 충신들은 광덕산 아래 두문동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다가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아
72 사람은 불에 타 죽어 고려 왕실에 충절을 다했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지 2년째인 1393년 2월 15일
국호를 '조선'이라 지었고 1292년 3월 계룡산에 도읍 공사.
그러나, 큰 강이 없어 도읍지로 부적당해 12월에 공사 중단.

"무학대사, 도읍지는 어디로 정하면 좋겠소?"
"한양이 좋을 듯싶습니다."

조선이 두 번째로 정한 도읍지는 무악이었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 신촌과 연희동 일대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무악 궁궐터를 반대했다.
예로부터 제왕은 남향에 자리잡았다고 주장
결국, 지금의 경복궁 자리를 궁궐터로 잡았다.

1394년 9월, '신도 궁궐 조성 도감'
도읍에 대궐을 짓는 관청을 두었다.
다음해 종묘와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1393년 10월, 태조는 궁궐이 완성되기 전
개경의 각 관청에 2명의 관인만 남겨 놓고
서울로 옮겼고 정도전은 경복궁 이름을 지었다.

한양에 도성을 쌓는데, 총 19만 장정이 동원
"유교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삼으리라!"
태조 이성계는 승유, 농본, 사대 교린 외교 정책

새나라 이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조를 창건하며 이성계는 수많은 정적을 숙청.
하여, 이성계는 건국 초에 민심 지지 기반이 취약.
라이벌 최영을 죽인 것이 가장 결정적인 중요한 요인.

"알 수 없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늘이 나를 내리고 또 제갈량을 냈을까?"

삼국지에서 주유가 제갈량에게 패하며 한탄한 말.
이조가 세워지자 고려왕조 최영 추종세력들이 한탄
"하늘은 최영을 내리고 또 어찌 이성계를 맞세웠나?"

최영과 이성계는 고려의 기둥이었고 세력도 비슷하였다.
최영은 진취적 기상을 갖인 인물이고 시대 예속적인 기품
이성계는 자주 독립적 보스이고 현실주의 사고방식의 인물,

최영이 북벌을 주장한 대신에 이성계는 반대했다.
최영이 기개로써 버티면 이성계는 모략으로 이끌었다.
최영이 의(義)로 책(責)하면, 이성계는 이(利)로 달랬다.
최영은 권세로 통솔했고, 이성계는 다수 의견을 존중했다.

당시 최영은 임금의 신임을 얻어 이성계 파의 반대를 눌렀고
14년 4월에 3만 8천의 군사를 내어 역사적 북벌을 시작하였다.
북벌을 하려면 이 성계를 좌우 도통사 중 하나로 임명해야 했다.

최영은 마음이 곧으나 지혜가 적었고, 뜻은 굳으나 기다릴 줄 몰랐다.
이성계를 앞세워 성급하게 북벌을 강행한 것 또한 최영의 실책이었다.
이성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조를 창건한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 <최 영 장군>.

최영은 전쟁에 나가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장수.
한번도 뇌물 받는 일이 없었고 맑고 깨끗한 성품.
73세에 목잘려 머리가 땅에 떨어져도 곧게 버텼다.

최영이 운명하자 고려 온 백성들이 슬퍼했다.
이성계의 집단 이기주의는 최영을 꺽는데 성공.
그러나, 고려의 민심을 장악하는데에는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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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산세 만으로는 풀 수 없는., 사상의 산실.
사상은 국경과 역사 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하여, 지리산이 품은 사상적인 밑바탕을 파헤쳐보자.

지리산의 옛이름은 <불복의 산> 또는 <반역의 산>.
그것은 이성계가 지리산을 그렇게 부른 데에서 유래.

명(明)이 일어나자 공민왕은 원나라를 몰아내고 국권 회복
조정 기반이 약할 때 홍건적과 왜구 침입으로 중용된 이성계
1388년 고려 우왕은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정벌 명령

'이때 요동정벌을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을 강행한 이성계.'

승산없는 명나라 정벌보다는 구데타가 유리한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후 우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운다.
이성계는 자기 세력을 키운 후 1392년(공양왕 4)에 이조를 창건.

이성계는 신라시대부터 계승된 골품제 악습을 청산.
아울러, 정권안정을 위한 과도기적인 조치를 취한다.
이조는 한양에 천도하여 옛 백제권의 민심을 수습한다.

'원래, 한양은 백제의 도읍(위례성 부근.)'

백제 초기의 도성은 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을 근거로 하여 건국.
전북 익산, 충남 직산, 경기도 광주 여러 설 중에서 광주가 유력.
위례라는 지명은 처음 온조가 남하하여 자리잡은 한강의 북쪽이다.

이조의 도읍지로 물망에 올랐던 한양과 신도안.
두 곳 모두 우연히 백제 영역이라 보기엔 어렵다.

'이조가 옛 백제권에 도읍을 정한 이유?'

태백산은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
검룡소와 황지 못을 모두 품은 영산.

태백산 신단수를 단군 성역화한 것은 강원도 민심 수습책.
아울러 한강과 낙동강 유역의 민심을 수습하려는 의도인 듯.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부른 이유는 옛 고려 민심을 경계.

'옛 고려를 창건한 세력 바탕은 지리산 일대.'

하여, 이조 500년간 영남 유림들은 재야 세력에 머문다.
이조의 지지 기반은 한반도의 중부(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이조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지지기반이 아닌 곳은 탄압.

이조는 반발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해 정권 조기 안정에 성공.
무인정치로는 민생 안정에 한계를 느껴 유림이 정권을 장악.
이조 중기 문무세력의 갈등, 지역 감정, 사색 당파가 싹튼다.

고려는 견원의 후백제 세력을 바탕으로 하여 창건한 나라.
왕건은 5호 세력과 지리산 불교 민심을 바탕으로 정권 안정.
그당시 한반도를 지배했던 사상은 유교와 불교가 양대 산맥.

이조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린 후 지지 기반이 불안정했다.
이조는 고려의 기반세력 사람들에게는 관직을 주지 않았다.
특히, 고려의 도읍 개성인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반발.

이조에서는 개성인의 관직등용을 차단.

훗날, 개성인이 한반도 상권을 장악하게 된 계기이다.
이조에서 관직에 오를 수 없어 상인의 길을 선택한 때문.
상권을 거머지고 옛 고려의 재건을 위해 이조 정권에 저항.

이조는 지지 기반이 취약한 고려(옛 신라 지역) 민심도 늘 경계.
지리산 일대의 500 여 사찰은 이조에 들어와 38 개 사찰만 남는다.

이조는 사찰을 없앨 구실을 찾으려 암행어사까지 파견해 감시.
이성계가 창건한 이조는 유교와 불교 양대 세력이 민심의 밑바탕.
그러나, 유교와 불교의 사상 대립으로 어느 한쪽은 포기해야 할 입장.

이성계는 민심 지지층이 두터운 유교세력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듯.
하여, 이 성계는 유교세력의 개국공신 정도전을 중용할 수 밖에 없었다.
무학대사는 불교중흥의 숨은 뜻을 접고 이조 권력의 핵심에서 떠나간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이조를 창건한 개국공신.
앞으로 두 인물의 발자취를 통해 '반역의 산'에 대해 알아보자.
아울러, 이조가 불교를 탄압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도 파헤쳐보자.

이조는 창건 초기에 불교 포용정책을 쓰다가
이조 후반 정책적으로 불교에 박해를 가한다.

이조를 창건한 밑바탕 주류는 유교사상을 추종하는 유림.
이조는 유림의 붕당정치로 민생이 피폐해져 국운을 다한다.
당파 간 권력 다툼은 나라를 망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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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창건개국의 기도처로 삼았던 신원사
연천봉 남쪽 신원사는 갑사 남쪽으로 약 2.6km
동학사, 갑사와 더불어 계룡산 3대 사찰 중 하나.

계룡산 갑사는 천 수백년 유서깊은 고찰
그에 못지 않게 고즈넉한 신원사 동학사

공주 금강은 백제 왕도를 느끼게 해주는 강
천안 지나 차령고개 넘어 공주 들머리 금강교
이 다리를 지나면 동서로 마주보고 송산과 공산

백제의 웅진시대 475년∼538년 도성., 공산성
북으로는 금강, 남으로는 계룡산을 바로 보고
서쪽에는 백제 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는 송산.

송산리에는 백제 무령왕릉을 비롯 10 여 왕실 고분
1971년 모습을 드러낸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문화재들
108종 2천 9백 점 유물 중, 국보지정된 것만 12종 22점

문주왕 원년 475년 한강 유역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성왕 16년 538년 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간 왕실 산성
북으로 금강이 흘러 지형적으로 천연의 요새를 이룬 지역

신기가 넘칠 만큼 깊고도 품이 넓은 계룡산
산성마을에서 금강 쪽으로 2층으로 된 공북루
여기서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2백m에 연지(蓮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

공주는 이조건국 당시 도읍지 물망에 오른 곳
이성계는 전쟁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았던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