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23. ( 흥부전. 박. 제비꽃. 오랑캐. 달오름마을. )

donkyhote 2010. 5. 14. 02:07

흥부전(興夫傳)
 
이조 후기에 나온 작자·연대 미상의 국문소설.
소설로서뿐만 아니라 판소리로도 불려지고 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가 만나는 삼남지역이 배경


..................
고로쇠 흥부전.
..................


엄동설한에 형님 집에서 놀부로부터 거리로 쫓겨난 가족들은
길에서 만난 실상사 스님의 말씀대로 북쪽으로 십리길을 가다가
'복덕촌'이란 마을 빈집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복덕촌이란 마을이 이름 답게 인심이 후하고 정이 많긴 하지만
워낙 없는 시골마을 인데다가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다.

공부 밖에 모르고 이 날 이 때까지 살아왔던 흥부인지라
당장은 마누라 날품일로 근근히 끼니를 때우던 흥부네 식구들은
점점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아지는 것이야 당연지사 이라,

'굶주림을 참다 참다~~ 못한 흥부..'

형님 놀부에게 보리쌀이라도 얻어 보려고 갔다가
놀부에게 매만 흠씬 맞고 놀부 형수님에게는
밥주걱으로 뺨만 좌우로 맞고 돌아오는디,

'아이고 ! 흥부가 기가 막혀...'

겨울이 가고 이른 봄이 되자
먹을 것은 아예 찾아 볼 수가 없는데
말 그대로 춘궁기 인지라 참다못한 흥부,

의관을 정제하고 현청에 가서 궁휼미를 얻으로 갔다가
전주감형에 갇힌 인월고을의 박좌수를 만났는데,
박좌수가 곤장 열대를 대신 맞아주면
돈 삼십냥 준다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계약금 닷냥을 받고들고 어깨 춤을 덩실거리면서
임시 먹을 곡식과 반찬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온 흥부,
매품 팔려고 받은 계약금으로 배불리 저녁먹은 흥부네 가족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에 겨워, 기나 긴 저녁 밤을 보내었다.

다음날 새벽, 전주 감영에 당도한 흥부,
붉은기, 푸른기가와 노란기를 꽂아 놓고
인정사정없이 형틀에 매달아 곤장을 치는디,
아따 곤장 열대에 살가죽 찢어지고 선혈이 낭자하며
아프다 못해~ 하늘이 핑핑돌아.. 정신이 하나도 없는디,
돈받으려고 박좌수에게 가보니 놀부가 벌써 가로채 갔다는디,

“아이고 형님!~~ 어쩌려고 그 돈을 챙기셨다요."

아픈 몸을 이끌고 눈물 범벅, 피 범벅, 인월 까지 오려니
한나절 다잡아먹고 팔령치 앞 지리산 삼봉산 자락에 도달하여

집에 들어갈려니 눈앞이 깜깜~~~~,
자식들 끼니 기다리다 굶을 것 생각 하니

"더 이상은 못 가겠네 , 죽어도 못가겠네~~~"

허기 지고 상처 나고 힘 없고 눈물이 앞을 가려,
큰나무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었는데 한참을 있다보니
신기하게도 엉덩이 찢어진 상처가 아물고 있는게 아닌가,

"어라 ! 이 무슨 신기한 조화 당가요~~~ "

흥부가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보니
나무에서 수액이 흘러내리고 있지 않은가?
흥부가 대나무 잎으로 그 물을 받아 먹고보니
달짝찌근하며 알싸 청량한 감이 온몸을 휘돌아
힘이 불끈 나는 것이... 정말로 신기한 물인지라,

"천지신명님! 부처님! 산신령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구나, 마구 절하며
정성스레 그 물을 받아 다시 한번 나무님께 감사드리며
얼씨구 절씨구 콧노래를 부르며 집 앞 마당에 들어서자,
아이들 집앞에서 모두들 나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

“ 여보 마누라! 애들아 들어가자꾸나”,
“ 아부지 곡식 자루는 어디 있당가여?"

"에따! 우선 이거라도 받거라"
"배고파 죽겠는디.. 밥 주세요~~."

"밥 대신에 이거라도 마시거라."
"밥은 없고 어디서 냇물만 한동이 퍼 왔당가요?"

” 천지신명이 보호하사 우리가 굶어 죽지 말라고 내린
신령스런 물인디~~ 여러소리 말고 빨랑 마시거래이~~“
"........................"

애들의 볼멘 소리에..모처럼 흥부가 버럭 화를 내자
생전 흥부의 화낸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인지라
애들은 서둘러서 물을 마시는디, 과연 달짝찌근 하면서
입안에 감도는 맛이 예사롭지 않아 다들 정신없이 먹었지만
배탈나지도 않고, 허기를 면하게 되어, 배부름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린 것만 빼놓고 힘이 샘솟는 듯.
아침에 눈뜨기가 바쁘게 흥부 가족은 그 나무를 찾아가보니,
주변에 비슷한 나무가 많아 모두 신이 나서 나무 수액을 먹고,
몇 동이를 지고와 끼니 때마다 허기를 때우며 며칠을 보냈다.

복덕촌 마을 사람들 모두 춘궁기라 힘든 걸 아는 마음 착한 흥부.

마을 사람들에게 신기한 나무를 얘기하며 수액을 받으러 가자니,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산에 올라가 수액 채취해 춘궁기를 넘겼다.

그후 흥부는 마을 사람 추천으로 아랫마을 인월에 서당에서 훈장.
각시는 음식솜씨와 바느질 솜씨로 굶지 않으며 잘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봄에 날아온 제비 다리 고쳐주고
이듬해 봄에 박씨 받고 부자된 뒷 이야기는
모두 다 아는 이야기 이니까 생략하기로 한다.


........
흥부가.
........


-흥부가 초입 놀부 심술 -.

아동방이 군자기국이요,
예의지방이라,

십실촌에도 충신이 있었고,
삼척 유아라도 효제를 일삼으니,
어찌 불량헌 사람이 있으리요마는,
요순의 시절에도 사흉이 있었고,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어찌 일동여기를 인력으로 할 수가 있나!

전라도는 운봉이 있고,
경상도에는 함양이 있는데,

운봉, 함양, 두 얼품에 박 씨 형제가 살았으되,
형 이름은 놀보요, 아우 이름은 흥보였다.

사람마다 다 오장이 육보인듸,
놀보는 오장이 칠보였다!

그 어찌 칠보냐 하며는,

이놈이 밥곧 먹으면,
남한테 심술 부리는 보 하나가
왼쪽 갈비 속에 가서 장기 궁짝만헌 것이 붙어 가지고,
병부 줌치 찬 듯 딱 이놈이 앵겨 가지고,
남한테 심술을 부리는듸, 꼭 이렇게 부리것다.

놀보 심사 볼작시면,
술 잘 먹고 쌈 잘하기,
대장군방 벌목시켜,

오귀방에 이사 권코,
삼살방에다 집 짓기고,
남의 노적에 불 지르고,

불 붙는 듸 부채질, 새 초분으도 불지르고,
상인 잡고 춤추기와, 소대상 주정 내여 남의 젯상 깨뜨리고,
길 가는 과객 양반 재울듯이 붙들었다 해 다 지며는 내어 쫓고,

의원 보며는 침 도적질, 지관 보며는 쇠 감추고,
새갓 보면 땀때 떼고, 좋은 망건 편자 끊고,

새 메투리는 앞총 타고, 만석 당혀 윤듸 끊고,
다큰 큰애기 겁탈, 수절 과부 무함 잡고,

음녀 보며는 칭찬허고, 열녀 보면 해담허기,
돈 세난듸말 묻기와, 글 씨는듸 옆 쑤시고,
사집병으 비상 넣고, 제주병에다 가래춤 뱉고,
옹구 진 놈 가래 뜨고, 사그짐은 작대기 차고,
우는 애기는 발구락 빨리고, 똥 누는 놈 주저앉히기,

새암 가상이 허방을 놓고, 호박에다가 말뚝 박고,
곱사동이는 되집아놓고, 앉은뱅이는 태껸하고,
이런 육시를 헐 놈이 심술이 이래 노니,

삼강을 아느냐,
오륜을 아느냐?

이런 난장을 맞을 놈이!
심술이 이래 노니, 삼강 오륜을 알며,
형제 윤기인들 알 리가 있겠느냐?


...................
흥부가 기가막혀.
...................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아이고 성님 동상을 나가라고 하니
어느 곳으로 가오리오 이 엄동설한에
어느 곳으로 가면 산단 말이오
갈 곳이나 일러주오

지리산으로 가오리까 백이 숙제 주려죽던
수양산으로 가오리까

아따 이 놈아 내가 니 갈 곳까지 일러주냐
잔소리 말고 썩 꺼져라

해지는 겨울들녘 스며드는 바람에
초라한 내 몸 하나 둘 곳 어데요
어디로 아- 이제 난 어디로 가나
이제 떠나가는 지금 허이여

굳게 다문 입술사이로
쉬어진 눈물이 머금어진다
무거워진 가슴을 어루만져
멀어진 기억 속에 담는다
어슴프레 져 가는 노을 너머로
소리 내어 비워본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나
이제 나는 어디로 가나
갈 곳 없는 나를 떠밀면
이제 난 어디로 가나

안으로 들어가며

아이고 여보 마누라
형님이 나가라고 하니
어느 명이라 안 가겄소
자식들을 챙겨보오

큰 자식아 어디 갔냐
둘째 놈아 이리 오너라

이삿짐을 짊어지고
놀부 앞에다 늘어놓고

"형님! 나 갈라요."

해지는 겨울들녘 스며드는 바람에
초라한 내 몸 하나 둘 곳 어데요
어디로 아- 이제 난 어디로 가나
이제 떠나가는 지금 허이여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흥보가 기가막혀



- 남원에서 당일에 가볼 수 있는 곳.-

육모정, 구룡폭포, 정령치, 노고단, 달궁계곡,
뱀사골계곡, 반선 지리산 전적 기념관, 살상사. 

 

 

 

박.

 

 

 



 

'박'은  농가 지붕이나 텃밭에서 재배하는 한해살이 식물.

한여름 흰색 꽃은 저녁 무렵에 피어 이른 아침에 시드는데,

수술에 3개의 꽃밥이 붙어 있고, 암술머리는 3개로 갈라진다.

 

열매는 수정후 보름 정도면 5∼6kg으로 커지는데

이 때가 박고지 등의 식용으로 사용하기 적당한 때.

 





관상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표주박형

바가지로 사용하는 길쭉한 모양의 박,

박고지용으로 이용하는 둥근 박이 있다. 

 

초가지붕 위에 둥근 박은 농촌의 전형적인 가을 풍경

여인 살결을 비유하듯 꽃도, 속도 모두 눈부시게 희다.
박은 원래 인도에서 아프리카에 이르는 열대지방 식물

 

우리나라에서 심기 시작한 시기는  2,000년 전부터 인듯.

<삼국사기〉신라편에 박혁거세가 박에서 나왔다는 기록

박은 신라시대 이전부터 널리 심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제비꽃.

 

 

<< 제비꽃 : 07.04.11, 복두산 >>

 

<< 제비꽃 : 07.04.11, 복두산 >>

 

<< 제비꽃 : 07.04.11, 복두산 >>

 



-->남산 제비꽃

-->개별꽃


옛부터 진달래꽃과 더불어 봄을 알려주는 꽃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시기에 꽃을 피운다.
또한 그꽃의 모양과 색깔이 제비와 닮아 제비꽃.

이꽃이 필 무렵 북쪽 오랑캐들이 침입.
일명 오랑캐꽃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제비꽃 줄기 두개를 묶어놓고 서로 잡아당기는 놀이
하여, 씨름꽃 또는 장수꽃이라고도 불리우는 제비꽃
또는 봄의 산야를 나즈막히 뒤덮는다 하여 앉은뱅이꽃

......................꽃싸움.........................
봄이 오면 풀싸움처럼 꽃술을 서로 걸어 당기는 꽃사움
그중 가장 대표적인 어린아이들의 놀이가 진달래 꽃싸움
진달래 꽃술을 뽑아 서로 마주걸어 당겨 꽃술을 끊는 놀이

수꽃술보다는 암꽃술이 더 굵고 든든하고 길어 좋다.
제비꽃은 뿔이 돋쳐서 오곳하게 갈고리처럼 생겼으나,
이것을 어긋맞게 걸어 당기면 약한 꽃꼭지가 떨어진다.

아카시아꽃을 따서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
홀수와 짝수를 맞추는 싸움을 하기도 한다.
......................................................

우리나라에서 30 여 종류가 자생하는 제비꽃

실제로는 변종이 많아 그보다 더 종류가 많은 듯.
제비꽃 어린 순은 봄나물..풀은는 약재로도 쓰인다.

나물로 먹고, 태독·유방염 등 부인병과 중풍·
이질 설사, 진통, 인후염, 황달, 독사교상 등
약재로 사용하며, 발육촉진제, 간장기능 촉진제.

제비꽃에서 축출하는 자화지정은 열을 내리는 해독제,
종기나 벌레에 물려서 붓고 가려운 증상에 주로 사용.
눈이 뻘겋게 충혈되거나 피부가 붉게 부었을 때 효험.

저수지 둑길에 뒤덮인 보라색 제비꽃
초록양탄자 위에 수를 놓은 듯 예쁘다.

둑길 걷다보면 제비꽃 이름에 의문이 생긴다.
제비를 닮지도 안은 듯 한데 왜 제비꽃 일까?
강남 제비가 돌아올 무렵에 피어나 제비꽃일까?

제비꽃은 일명 오랑캐꽃으로도 불리운다.

①유랑민(流浪民)들의 비극적인 삶과 비애.
②정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유랑민의 비애
③국경 넘어 유랑을 떠나는 우리 민족의 비애

제비꽃은 꽃의 색깔에 따라 꽃말도 각각 다르다.
흰색은 소박함, 보라색은 사랑, 노란색은 수줍음,
하늘색은 성실과 정결, 꽃말은 사랑, 나를 생각해주오.

지리산 종주를 하다보면, 봄을 알리는 제비꽃.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올 무렵에 피어나는 제비꽃.
'흥부전'까지 떠올리면 산행하는 발걸음마다 즐겁다.

'하늘을 날렵하게 날아다니는 제비.'
'발아래 여기저기 무리지어 핀 제비꽃.'

전라도 운봉과 경상도 함양 사이의 인월.
인월 흥부마을은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선.
판소리 '흥부가' 가락도 떠올리며 걸어보자.




오랑캐.



긴 세월을 오랑캐와 싸우며 살아왔던 우리 조상들
꽃의 뒷모양이 오랑캐 뒷머리같아 명명된 오랑캐꽃.

고려는 변방을 침입하던 오랑캐를 북방으로 몰아내자
오랑캐는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쫓겨갈 수밖에 없었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이들이 얼마나 경황없이 쫓겨났는지를 말해준다.
"도래샘", "띳집"은 오랑캐들 샘과 띠로 이은 집
그 정든 것들을 돌볼 새 없이 가랑잎처럼 굴러갔다

즉 오랑캐란 고향과 터전을 버리고 쫓겨난 존재

수백년이 지난 일제시대 오랑캐처럼 쫓겨난 우리 민족
1920년대 일제의 가혹한 경제수탈로 만주로 떠난 유랑민

이 땅의 주인으로서 삶터를 잃고
오랑캐 처지가 되었던 우리 민족

...........,,,,..오랑캐.......................
두만강 연변과 그 북쪽에 살던 여진족 가운데 한 부족.
원래 우수리 강 지류인 무링허 강 유역에서 살아온 듯
명나라가 세워질 무렵에 두만강 유역으로 민족 대이동.

〈연산군일기〉에 보면, 이들은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간도에서 함경도 무산쪽으로 압록강 상류에 이르는 곳에 분포
이 부족은 1 추장 밑에 수십 호 부락을 이루며 흩어져 살았기에
통일이 어려웠고 세력도 약해 고려와 명나라에 복속되기도 했다.

이조 초기 흉년이 들면 우리나라 변방을 자주 침입해 토벌 당했다.
기원을 살펴보면, 그들의 시조가 본래 개와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서
그의 후손들을 오랑캐라고 불렀다는 설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온다.

한 재상이 얇은 껍질로 만든 북을 만들어놓고
이 북을 찢지 않고 치는 사람에게 딸을 준다고 했다.

아무도 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개가 꼬리로 북을 쳐
재상이 딸과 개를 혼인시켰는데 밤마다 개가 딸을 할퀴고 물자
참지 못한 딸은 개의 네 발목과 입에 따로 주머니를 씌웠다 한다.

이들이 자식을 낳자 북쪽으로 쫓겨나 후손을 퍼뜨렸다.
그뒤 '오낭(五囊)을 낀 개' '오랑구'가 '오랑캐'로 변해
이조시대 한반도 북쪽의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북방 여진족에 대한 적대감과 멸시감을 보여주는 설화.
옛부터 여진족으로부터 침입을 많이 받아 온 우리나라.
제비꽃 필 무렵이면 여진족의 침입이 가장 극심했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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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女眞族)................
만주 동부에 살았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춘추전국시대에 숙신, 한나라 때에는 읍루,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당 때는 말갈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
명나라 때도 그대로 여진이라 불렀다.
청(淸)나라 때는 만주족이라 칭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야인(野人)으로 불렀다.

여진족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고려 초.
그 무렵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었다.

고려는 이들을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에게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했다.

숙종 때 만주 하얼빈에서 일어난 완안부 추장 영가(盈歌)
여진족을 통합하고 북간도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
그 후 여진은 세력을 확장 1104년(숙종 9)에는 평양까지 진출.

고려는 윤관(尹琯)을 보내 화평을 맺는 한편
1107년 윤관이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
그후 여진 여러 부족을 통합해 국호를 금(金)

고려에 대해 형제관계를 요구하여 왔으며,
요를 멸망시킨 뒤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

이조 초기 회유와 무력의 대여진 정책.
귀화 귀순을 장려해 관직과 토지를 주었고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국경무역 허락.

세종(世宗)은 4군 6진을 두어
압록강 두만강 연안선을 확보,
세조 때에는 여진을 토벌했다.

그 후 여진족은 명나라 국력이 쇠약해지자
이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점점 확장해 갔다.

1616년(광해군 8)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이조를 침공하여 1627년(인조 5)에는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후 이조는 청에 조공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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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靺鞨族]......................
한반도 동북부 및 만주에 거주하던 퉁구스계 고대 종족.
중국 주대(周代) 역사에 나오는 숙신(肅愼) 또는 식신(息愼),
한대(漢代) 읍루(婁),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 물길(勿吉)

모두 말갈과 같은 계통의 종족에 대한 이칭으로 추정된다.
말갈이라는 종족 명칭은 중국 수당시대 문헌에 나오는 호칭
각기 부족 별로 산과 계곡 사이에 살며 수렵과 농경에 종사.

각 부족에는 대인(大人)이란 우두머리가 있어
부족 내의 크고 작은 일들을 주관하고 처리했다.

하천유역의 저습지에 살던 부족은 밭농사를 주로 했으며,
산악지대의 부족은 수렵을 주로 하고 농경을 부수적 산업
곰·호랑이·이리 등을 토템으로 삼고 말을 사용해 밭갈이.

남만주 및 한반도 중북부 예맥족에 비해
사회발전단계 및 문화수준이 떨어졌으므로
고조선·부여·고구려 등의 지배를 받았다.

숙신으로 불린 시기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으나,
읍루로 불리던 시기에는 부여의 지배를 받다가
남만주를 근거지로 발흥한 고구려가 강성해지며
부여와 같이 고구려에 복속해 그 영향을 받았다.

고시(矢)·석노(石)·각궁(角弓) 등이 특산물이고
활쏘기에 능하고 몸이 날래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고구려의 대중국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수당시대 수십 부족 중 7개 부족이 강성해 말갈사회를 주도.
고구려가 강성해지며 고구려 지배를 받거나 영향권에 들어갔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들의 일부가 본래 부족적 자치생활로 돌아갔고
고구려화된 일부 부족은 당에 의해 요동으로 강제이주.

이들이 고구려의 부흥에 협력할 것을 우려한 당
상당수 고구려인과 함께 요동 영주로 강제 이주.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고구려 재건을 시도하자
이에 적극 협조해 발해 건국의 주체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발해 멸망 이후에는 고구려·발해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의 세력을 유지했던 흑수부를 포함한 모든 말갈족
거란의 지배 아래 들어간 이들의 훗날 금(金)을 세우고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한 여진족이 세운 여진(女眞)이다.

여진족 중 고려와 송의 영향을 받아 농경화된 숙여진(熟女眞),
수렵 위주의 전통적 생활방식을 유지하던 부족을 생여진(生女眞)
금을 세운 세력은 생여진이고 이들이 청(淸)을 세운 만주족의 원류.
.........................................................................

'태백산(백두산) 송화강 일대에 사는 말갈족'
말갈족은 주로 물 따라 살았다 하여., 물길족.
또한 폭 넓은 강은 여러 부족 사이의 자연경계

말갈족은 당나라 초기 남쪽 고구려를 괴롭혔다
삼국시대 및 발해 건국후 말갈은 일관성을 유지
고구려가 망했을 때, 말갈은 당(唐)에 의해 와해

그러나 말갈족은 강물을 끼고 사는 생활방식
만주의 강 줄기와 거주 공간이 일치했었을 것.
발해 영토 대부분은 말갈족에 의해 포위된 형국.

피지배민에게 포위당한 소수의 지배층 발해.
비리국 또는 동부여의 위치는 두만강 유역인듯.
그러나 말갈 위치는 약간 북쪽에 있었던 것 같다.

즉, 북부여의 위치가 현재 훈춘 또는 농안이라면,
동부여는 그 동쪽인 송화강 유역일 가능성이 높다.
주몽이 도망치던 '엄리대수'는.. 속말강(제2송화강)

발해는 당과의 연락을 해상 교통 루트로 활용했다.
당나라는 거란, 해, 발해를 정치와 무력으로 제어

신라는 육로를 통해 발해와 외교를 나누었고
또한 신라는 고구려와 발해를 역사에서 제거
왕건의 고려 건국은 그에 대한 반발인듯 하다.

보통 신라 지방 호족들은 육두품, 선종계 승려들
왕건이 옛 고구려의 재건을 외치고 건국한., 고려

속말말갈이 주축인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당한 뒤에
발해인들은 요동반도로 강제이주 후 거란족에 편입
숙여진이라 불렸고, 흑수말갈은 남북으로 나뉘었다.

남쪽 흑수말갈은 숙여진,
북쪽 흑수말갈은 생여진

'발해와 여진은 원래 한 집안'이라며 건국한 금(金) 왕조
하여, 고려는 발해와 동족의식, 금과는 동족 의식이 미약.

발해는 숙신, 예맥, 옥저, 고구려, 부여, 읍루, 말갈
과거에 존재하던 곳을 점거하고 나라를 유지했다 한다.
발해 5경 중 상경과 중경은 닝안현 동경성, 길림성 서고성

동경(東京)은 훈춘에 있는 팔련성
예맥의 옛 땅이고, 책성(柵城)이다.

흑수말갈은 숙신(또는 읍루)에 산다.
동 바다, 서 돌궐, 남 고구려, 북 실위

말갈족 가운데 불녈부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보로국
886년(헌강왕12년)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국
"신라와 화통하려 한다"는 판목을 걸어놓고 갔다 한다.

'소나 양은 기르지 않고 돼지를 사육한 말갈족'

.....................만주족................................
중국 동북지방 만주에 거주하는 퉁구스계 민족의 하나.
중국 최후의 왕조인 청(淸)을 세우고 지배층이 된 민족.
숙신(肅愼)·읍루(婁)·물길(勿吉)·말갈(靺鞨)·여진(女眞)

부여·고구려·발해·요(遼)·고려의 지배와 영향을 받다가
12세기 아구다[阿骨打]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금(金)을 세워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했다가 몽골에게 멸망후 다시 유목 생활

1616년 누루하치(奴爾哈齊)의 주도로 후금(後金)을 세웠다.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신해혁명 때까지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
그러나 200년간 중국을 지배하며 절대다수 한족(漢族)에게 동화

청의 지배 기간중 만주에 남아 있던 자들의 후손이 만주족.

최근 연구에 의해 퉁구스 인종집단의 일부가 만주족
1세기경 북동부 만주지역에 살던 수많은 퉁구스족들
북부와 서부로 이주해 시베리아 지역 대부분을 점령.

만주족의 인종적 형질은 몽골로이드 계통으로
키는 비교적 작고 머리는 단두형(短頭形)이다.
그러나 다른 여러 종족과 섞여 신체유형이 다양.

만주족의 퉁구스 선조인 이로우인
주로 사냥·어업·채집 생활을 한듯.

그들의 후예인 주센인과 만주인들은
원시적인 농경생활과 가축사육을 시작.
몽골족 돌궐족과 달리 돼지를 길러 식용.

만주족은 돼지꼬리 모양의 머리 변발 관습이 있다.
그들이 중국을 정복했을때 충성 표시로 변발을 강요.

1920~30년대 모쿤이라란 부계 씨족단위로 사회생활을 영위.
모쿤은 한 남자를 시조로 하는 5~9대 정도까지의 부계사회.
그 가족이 한 씨족을 이루어 모여살며 독자적인 마을 형성

모쿤의 씨족장은 씨족 내의 가벼운 범죄나 소송을 직접 관장.
중국을 정복한 후 대다수의 만주족들은 중국 본토로 이주했다.
자신들의 옛 영토는 휴가철 사냥을 즐기는 지역으로 남겨두었다.

결국 이 지역은 황폐해졌고 중국 본토 이주농민들에게 판매되었다.
이로 인해 1900년 만주에 만주족보다 중국 이주 농민이 더 많았다.

만주족 정복자들은 중국 예술과 학문, 문화를 수세기 간 추앙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한족에게 흡수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자신들의 언어를 썼고 자녀들에게 고유전통을 가르쳤다.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한족과 만주족의 결혼을 금했고
두 민족간 사회적 교류는 금기시했지만 청조 말 큰 변화
한족에 동화되며 문화적 인종적 분리 노력은 차츰 무너졌다.

결국 한족의 관습과 언어를 채택했고,
한족과 만주족 간 결혼도 허용되었다.

그러나 현 중국정부는 만주족을 분리된 민족집단으로 규정
랴오닝 성[遼寧省], 지린 성[吉林省],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후베이 성[湖北省], 베이징[北京], 네이멍구 자치구 등지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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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말갈족 만주족은 모두 같은 뿌리의 민족이다.
거란족은 고려를 세차례 침공한 '매처럼 강인했던 민족'.
1000년 전 중국 동북 지방에서 일어나 중원을 강하게 압박

1018년 강감찬 장군이 적장 소배압을 상대로 귀주대첩
강성했던 거란은 몽골이 세운 원대 이후 자취를 감췄다.

어떻게 한 민족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었을까?

중국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거란족의 실종
요즘 거란족에 관한 의문점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

동북지방의 싱안링(興安領)산맥과 푸르고 맑은 넌(嫩)강,
후룬베이얼(呼倫貝爾) 넓은 초원이 모인 곳에 사는 다얼족
예전부터 '거란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가장 큰 민족'으로 지목.

중국 학계는 서남쪽 윈난(雲南)성 다얼족 후손들을 확인.
윈난성 산골 마을에 거란의 시조 '아쑤루'의 한자식 이름
'야율(耶律)'이란 글자를 사당에 걸어 놓고 있는 사실을 확인.

거란족 부계(父系) 혈통을 그대로 전승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거란족 후예들은 왜 이처럼 멀리 떨어져 살게됬을까?
거란족이 몽골 군대 전위부대였기 때문이라는 중국학계의 설명.

요나라 멸망 뒤 자신을 공격했던 금(여진족 왕조)을 증오
거란족은 몽골 징기스칸과 손을 잡고 대제국으로 성장하며
용맹한 거란족은 원 왕조 정복부대 선봉으로 세계 곳곳에 파견.

그 결과 거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중국 내 중요민족으로 부상할 기회를 상실.

중국 학계는 거란족의 일부가 요나라 멸망 뒤
이란 지역으로 이동해 이슬람 세력으로 귀화설.

......................거란족(契丹族)..................
야율아보기가 동부 몽골에 세운 국가(916~1125).
뒤에 중국 동북부를 점령한 중국정복 왕조의 하나.
야율아보기는 한인(漢人)의 원조를 얻어 거란족을 통합

916년 황제라 일컬었고 태조 때 동쪽 발해를 멸망시키고,
오대의 후진(後晉)의 건국을 돕고 936년 연운 16주를 받아
화북(華北)지방에 진출하여 9대를 이어 중국을 다스린 민족.

6대 성종(聖宗) 7대 흥종(흥종) 8대 도종(도종) 때 전성기
1004년 송(宋)과 전연()의 동맹을 맺고 세폐(歲幣)를 얻었다.

고려· 서하(西夏)를 예속시켰으나 여진족의 금(金)이 흥하자,
송과 금의 협공을 받아 1125년 천조제는 금에 잡히고 요는 멸망

거란인의 유목사회와 한인 발해인의 농경사회가 분리
일부에서는 그 둘이 교착하여 거란인 사회에서는 부족제,
한인· 발해인 사회에서 주현제를 채용, 남북 이원 지배체제

독자적인 거란문자를 만들었으며 불교를 숭상하여
대장경을 간행하였고 경릉에 뛰어난 벽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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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은 오늘날 만주 지역에 살고 있던 민족
흑룡강성, 길림성과 요령성 지역에 살던 사람들.
여진(女眞)이란 명칭은 거란족이 붙여준 이름이다.

"진짜 여자같은 놈들"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거란족은 서쪽의 유목민 해(奚)를 먼저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발해를 기습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리고는 발해 중심지였던 오늘날의 간도 지역에
동란국이란 허수아비 정부를 두어 발해 인민을 통치
그러나 저항이 심하자 오늘날 요동 반도에 이주시켰다.

이때부터 거란족은 피정복민 발해 인민을 여진이라 불렀고,
이때 이주 당한 발해 유민은 이미 "익은 여진"이란 뜻으로
숙여진이라 불렀고, 시골에 남은 여진인들은 "생(날) 여진"

영어로는 여진족을 "주르센(Jurchen)"이라고 한다.
거란족을 기탄(Kitan)이라 하는데, 이는 '철'이란 뜻
주르센은 '금'이고 "주르센 "숙신" "조선"은 한 발음.

단군이 세운 나라 "조선"은 그러한 종족 이름을 딴 것.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은 전부 그 후손들.
조선을 (북)부여가 계승했고, 그 갈래가 고구려와 백제
백제는 남쪽에 있던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취하여
4세기에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 삼한과 대립하게 된다.

삼한은 연합국 형태였으며, 밖으로는 백제로 불렸다.
삼한에 복속되지 않고 존재한 나라 가운데 하나 사로국
<삼국사기> - "옛날 조선의 유민이 진한 땅에 살았으니"

신라 사람들도 조선의 유민임을 알 수 있는 대목.

그옛날 주르센(조선)은 어디에 있었을가?
태백산 신단수며 아사달이며 모두 어디일까?

태백산은 바로 발해만 북안에 있는 무엽산(無葉山)이다.
의무려산이라고도 부르는 무엽산 옛 이름은 목엽산(木葉山)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치기 전 전승을 기원하는 제사지낸 곳.

결국 여진족은 전날의 원수를 갚고,
거란을 물리치고 금나라를 창건했다.

여진족은 나라 이름이 왜 금(金)이라 했을까?
여진족은 금을 좋아 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금(金)은 오행(五行)으로 따지면 흰색(白)이다.

즉 여진족들은 백색을 숭상하였던 것.

그후 임진왜란으로 명나라가 곤궁해지자,
요동반도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누루가치는
세력을 길러 후금을 세우고 중원을 점령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래 살던 땅으로부터 나와서
중국 각지에 주둔하며 원거주지를 만주라 불렀다.
이 이름은 여진족 족장 이만주(李滿州) 이름에서 비롯

이 여진족들은 이조 초기까지는 우리나라와 친했다.
예를 들어 이성계의 절친한 친구 퉁두란이 여진족이고,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여진족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랐다.

여진은 거슬러 올라가면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족.
한반도 고대사에서 말갈 또는 물길은 이상한 존재.

말갈은 여기저기 신출귀몰하며, 주특기는 기병 전술.
이들은 고구려를 도와 10만의 기병으로 중국과 대적
고구려가 망하자 대조영 등과 힘을 합쳐 대진국 창건.

대진국(발해)는 약 200년을 동방의 강자로 군림
훗날 발해는 거란족 기습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여진과 발해 사람들을 힘을 합쳐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원나라에 의해서 망하게 되나,
누르가치가 후금을 세우고, 청을 건설.

고려사를 보면 여진족은 고려에 수시로 드나들었고,
고려도 여진족 북방 정책에는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이조시대 후반에 여진족 북방정책은 배타적

'오랑캐'라는 말이 그 사실을 대변하는듯.




달오름 마을.



남원시 인월(引月)면 마을 남서쪽에는 바래봉, 덕두봉
북쪽에는 운봉읍에서 발원해 함양 방향으로 흐르는 광천.
달이 뜨면, 달빛의 화사함이 마을 전체에 퍼지는 명당터.

인월이라는 지명이 붙게 된 유래를 찾아..역사 기행.

1380년 인월리 황산(607m)에서 이성계 장군.
왜구를 토벌하려고 여진족과 함께 동맹군 결성.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물리치려 진을 쳤다.

'하지만, 그믐날 밤이라 칠흙같은 어둠,'

이성계는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이 나라 백성을 살피시어 달뜨게 해 주소서”

그러자 거짓말같이 칠흑 같은 하늘에 보름달이 떠
환히 길을 밝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전해온다.
이성계가 달을 끌어 올렸다 하여 명명된 인월(引月).

달오름마을은 지리산 자락 맑은 공기와 물,
달빛의 신성한 기운이 365일 함께 하는 곳.
하여, 기(氣) 수련 도시인들이 즐겨 찾는 곳.

달오름마을 특산 토속음식은 흥부 거지 비빔밥.
지리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하룻밤을 묵으면
이곳이 무릉도원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난다.

이 마을 주민은 78가구 178여명.
24번 국도변에서 바라본 달오름마을.
마을 뒤로 지리산 바래봉 줄기가 보인다.

이 마을은 흥부가 살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
그래서 비빔밥을 흥부 바가지에 비벼먹는다.


...........여진족 후예들의 풍습................
이조 초기 귀화한 여진족 잔류민들
산간에 살며 머리깎고 절을 짓고 생활

함경북도 부령군·회령군·유성군·종성군·온성군·
경원군·경흥군 6진 변방에 주로 모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궁벽한 산간지역에서 여타 사회와 교제를 끊고
은둔부락으로 살아갔기에 재가승 마을이라고 불리웠다.

재가승들의 직업은 대개 농업이며
화전을 하며 주로 귀리를 생산했다.

귀리로 황지(黃紙)를 생산해 세공(稅貢)으로 바쳤다.
황지는 연지(燕紙)라고도 하 진귀품으로 이름 높았다.
소를 중심으로 품앗이 하는 소겨리 농업 조직이 성했다.

장례풍습은 원래는 화장법이었으나
함경도의 풍습을 받아들여 매장했다.

마을공동으로 상여를 준비하고
마을전체가 몇 개 조로 나뉘어
윤번으로 장(葬) 일체를 책임지는
향도가 재가승생활에도 이루어졌다.

정초와 10월 2일에 올리는 산치성(山致誠),
연중 4번 국사당에 올리는 산제가 있었다.

민속놀이로는 주지춤·수박치기·길마지기·
벙어리놀음(걸립굿)·윷놀이·그네뛰기·장기

외부세계와는 거래를 하지 않았고
혼인도 자기들끼리 한 폐쇄적인 생활
산간 오지에 살았던 자연지리적 환경 탓.

그러나 차츰 함경도를 중심으로 우리민족에 동화
8·15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거의 동화

재가승 풍습은 여진족들의 연원에 대한 자료를 제시
단일민족으로 동화과정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

우리 조상이 유목 민족이란 대표적인 증거.
똥에 관한 해학적인 속담이 많은 우리나라.
일상생활에서도 똥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편.

<속담>

똥을 싼다.
방구가 잦으면 똥이 된다.
똥 치는 막대기 취급을 한다.

똥 누고 밑을 아니 씻은 것 같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똥 누러 갈적 마음과 올 적 마음 다르다

똥 치는 막대기는 유목민에게 필수품
일정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유목민.
똥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흥부전.

'우는 아이에게 똥 먹이기.'
'똥누는 사람 주저 앉히기.'

...............선악형제담(善惡兄弟譚)....................
흥부전은 흥부이야기와 놀부이야기의 이원적 구조.
<단 방귀 장수> <말하는 염소>에 관한 설화가 있다.


<단 방귀 장수>

욕심이 많아 유산을 독차지한 형과 가난한 동생.
동생이 산에 가 꿀통을 발견하여 실컷 먹고 온다.
그후 동생은 꿀처럼 단 방귀 장사로 큰 부자가 된다.

형이 그 말을 듣고 꿀을 찾다가 없어
할 수 없이 생콩을 한 말이나 먹는다.
형은 방귀 장사 한다고 잔칫집에 불려가
방귀 뀌니 똥물이 나와 매만 죽도록 맞는다.


<말하는 염소>

착하나 못 사는 형, 인색하나 잘 사는 동생.
형이 산에 갔다가 말하는 염소를 데려와
이를 사람들에게 구경시키고 돈을 번다.

동생이 형의 염소를 빌려다 돈을 벌고자 하였으나
염소가 말을 하지 않아 망신만 당한후 염소를 죽인다.

형은 염소의 뼈를 가져다 울안에 묻어 주었더니
거기서 대나무가 자라 하늘에 있는 돈보를 찔러
집안에 돈이 가득 차 큰 부자가 된다.

동생도 그말을 듣고 염소의 뼈를 가져다
울안에 묻었더니 거기에서 자란 대나무가
하늘에 있는 똥보를 찔러 똥에 파묻혀 죽는다
..................................................

................방이 설화...........................
신라에 방이 형제가 살았는데 형 방이는 가난하여
의식을 구걸해서 살아가는 형편이었고, 아우는 부자.
어느 해 방이는 아우에게 누에알과 곡식의 종자를 구걸.

동생은 나쁜 사람이었으므로 알과 종자를 삶아 주었다.
형이 받아 온 알 중에 누에 한 마리가 황소만큼 자랐다.
동생은 누에를 죽이고 가자 사방에 누에가 모여 실을 켰다.

종자도 한 줄기만 살아 이삭이 한 자나 자라나자,
어느날 새 한마리가 날아와 그것을 물고 달아났다.
그는 새를 따라 산 속으로 갔다가 밤을 맞게 되었다.

이윽고 난데없이 아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금 방망이를 이리저리 치는데
그때마다 그들이 부르는 것이 나타났다.

그들은 술과 밥을 차려 먹더니 어디론지 가버렸다.
방이는 이 방망이로 아우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아우는 시기심이 나서 그도 역시 형이 한 바와 같이
새를 따라가서 아이들을 만났는데 아이들은 그를 보자,
이놈이 전에 방망이를 훔쳐 간 놈이라면서 부역을 시킨 후
코를 뽑아 코끼리처럼 만든 후에야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우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속태우다가 죽었고 그 방망이는 방이의 후손에게
전해졌는데 어떤 후손이 "이리 똥 내놓아라."고 희롱

그후 갑자기 벼락치며 사라진 방망이.
.................................................

'이러한 모방담 설화들이 흥부전의 골격'

지금까지 ‘흥부전’의 근원설화에 대해서는
고유설화 외래설화 혼합, 몽고설화, 불교설화
그중 흥부전과 유사한 몽고 ‘박 타는 처녀 설화’

..............박 타는 처녀'.....................
옛날 처녀 하나가 하루는 바느질을 하고 있노라니까,
무슨 소리가 들려, 나가 본즉 처마에 집을 짓던 제비
땅으로 떨어져 버둥거리기에 상처를 실로 동여매어 치료.

얼마 뒤 그 제비가 튼튼한 몸이 되어서 날아오더니,
고마운 인사를 하는듯 씨앗 하나를 떨어뜨리고 갔다.
처녀는 그것을 뜰 앞에 심자 커다란 박이 하나 열렸다.

엄청나게 큰 박이라 굳기를 기다려 타 보았다.
박을 켜자 그속에서 나온 금은주옥과 온갖 보화

그 이웃에 심사 바르지 못한 색시가 하나 있었다.
이 색시가 박 타서 부자가 된 처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 처녀처럼 제비 상처를 고쳐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제집 처마 밑 제비를, 일부러 떨어뜨려서
부둥깃을 부러뜨리고, 오색 실로 동여매어 보냈다.

얼마 후 박씨 하나를 가져왔기에 얼른 뜰에 심었더니,
박이 열려 탔더니 독사가 나와 그 색시를 물어 죽였다.
..........................................................

이런 설화들이 서로 어울려 흥부전을 이룬듯 하다.
이 작품은 구전설화로 전해지다가 판소리로 불려지며
내용에 첨삭이 가해지며 차츰 세련된 형식을 띠게 된듯.

판소리에서는 〈흥보가〉·〈박타령〉이라고도 하며,
개화기에 이르러 이 작품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며
〈연(燕)의 각(脚)〉이란 이름의 신소설 형식으로 개작.

〈흥부전〉은 형제간 우애를 강조하는 도덕적 측면과
빈부간의 격차를 문제삼은 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 이해

표면상 이 작품은 형제간의 우애를 내세우지만,
작품 중심 소재는 도덕률과 재물의 갈등에 있다.

가난하면서도 착하게 살려고 하는 인물과
부유하면서도 탐욕스럽게 사는 인물의 대비

놀부의 심술과 흥부의 가난에 대해 과장된 수사법
해학성을 높임으로써 독자들을 흥미롭게 한 줄거리.

〈춘향전〉〈심청전〉 같은 여성 취향의 소설과는 달리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서민 실생활과 경제문제를 주제
기존의 고대소설과는 또 다른 일면을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