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7 -라. ( 회현리 패총. 구석기시대. 황하문명. )

donkyhote 2010. 5. 14. 01:42

회현리 패총.

  

 정문에서 왼편으로 3층 망루대(높이 10m)

 

 ▲ 황세바위

 

 여의각 지붕

 

 고상가옥(오른편) :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사 때 사용된 건물.

 

 

조개골은 김해 낙동강 구석기시대 패총을 뜻하는 지명같다.
낙동강 유역은 구석기시대 패총유물이 출토되는 선사 유적지.

기원 전 2500년 신석기시대 김해 지역에서 발굴된 집단 주거지

 

조개 무지, 장유수가리 덧띠문 토기,

빗살무늬 토기, 뼈 낚시바늘, 등 유물, 

기원전 10세기∼1세기 청동기시대, 108년 고조선 멸망, 한사군 설치
구간사회(九干社會) 김해지역이 가락구촌(駕洛九村) 촌장에 의해 영도,
연합하여 부족사회 단계의 사회생활을 했던 가락국 이전의 고인돌 유물들.

구산동 구지봉, 장유면 무계리,

주촌면 양동리, 대동면 감내리,

상동면 우계리, 진영읍 본산리 독무덤,

회현리 조개무지, 돌널무덤, 회현리 조개무지,

좁은놋단검 대롱옥 구슬옥 간돌검 간돌촉 붉은간토기

민무늬토기, 널무덤 구지로12호분,

내덕리19호분, 양동리17호분 427호분.

봉황대유적 철제관 가야식동검 가야식본 뜬거울 중국식청 동거울
그 중 <회현리 패총>과 <봉황대 유적>이 있는 곳을 찾아가 보자.
봉황대 유적엔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 사랑 이야기가 눈물겹다.

..............가락국의 유물 <회현리 패총>을 찾아서.......................
회현리 패총! 1907년 우리 나라 고고학상 처음으로 발굴 조사한 곳.
그 뒤, 1920년 일본인 하마다, 1998년 부산대 박물관에서 다시 발굴.
회현리 패총은 2001년에 봉황대 유적과 합쳐 사적 제2호 봉황동 유적.

조개무지에서는 김해식 토기와 골각기,
철기 등과 함께 '화천'이라는 중국 동전

우리나라 최초로 출토된 불에 탄 쌀
벼농사 기원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가야의 유적들이 전시된 국립 김해박물관
찬란했던 가락국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가야 시대의 집은 반 지하식 위에 벽과 지붕을 올렸다.
전시된 대형움집은 봉황동 소방도로 안 유적 46호를 복원.
고상 가옥은 곡식 저장창고나 제사 때 사용된 특수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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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봉황동 유적지에 얽힌 사랑 이야기..............
봉황동 유적지에는 겹겹이 산책로가 있어 운동하기에 알맞다.
오래 전부터 하늘을 숭배했음을 알려주는 '가야국 천제단' 유적.
봉황동은 청동기 시대 금관 가야의 지배계층들의 거주지로 보인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가야시대의 주거지와 고상가옥, 망루를 설치
조경수목을 우리나라 고유수종으로 교체해 가야역사를 재현한 곳이다.

봉황동 유적지 정상은 높은 산이 아닌 언덕에 지나지 않는 곳.
하지만 이곳엔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의 비련이 담겨진 황새바위.
가락국 9 대 겸지왕 때 황 정승과 출 정승 두 사람은 가까웠던 친구.

두 사람은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맺고,
아들 딸을 낳으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속.

그후 몰락한 황 정승은 아들을 낳았고, 출 정승은 딸을 낳았다.
그렇지만, 출 정승은 몰락한 황 정승과 사둔 맺고 싶지 않았다.

하여, 출 정승은 딸을 아들로 위장해 의형제를 맺었다.
황정승의 아들 황세와 출정승의 딸 여의낭자와 의형제.

'혹시 여의는 여자 아닐까?'

황세는 여의가 아무래도 여자 같이 느껴졌다.
바위 위에서 오줌 멀리누기 시합을 하자고 제의.
여의 낭자는 삼대 줄기를 사용해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여성스러움이 점점 더해가는 여의낭자.'

어느날 황세는 여의에게 개울에서 같이 목욕하자고 한다.
여의는 마침내 스스로 여자 임을 밝히고 혼인을 약속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황세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왕은 그 공으로 황세 장군에게 유민 공주와 혼인하라 했다.
황세장군은 여의낭자를 두고 유민공주와 결혼할 수 없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황세장군은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 사실을 안 여의 낭자는 슬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민 공주와 결혼한 황세장군은 여의낭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황세장군도 사랑하는 여의 낭자를 뒤따라 죽고 말았다.
유민 공주는 황세장군이 죽은 후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가 오줌누기 시합을 한, 황세 바위.
여의 낭자의 혼이 돌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갔다는, 하늘문,
둘이 앉아 놀았던 여의좌, 여의 낭자가 책을 읽었던 독서대.

지금도 두 연인의 속삭임이 바위 틈에서 흘러나오는 듯.
하여, 24살에 죽은 여의낭자의 혼령을 달래어 주는, 사당.
973년에 세운 회운리 사당에서 해마다 단오날 추모제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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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 유물들은 가락국의 화려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
조개골은 두 연인의 비련 이야기를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조개골은 그 옛날 가락국 조상들의 역사를 품은 듯한 이름.

.......................패총(조개더미)..................
선사시대 생활 쓰레기들이 쌓여 이루어진 유적.
바닷가나 강가에 버린 조개, 짐승뼈, 폐 연장, 등
당시 사람들이 버린 조개가 대부분이라 조개더미 유적

그러나, 살림살이에 썼던 토기, 석기 연장, 치레걸이,
예술품 등 다양한 유물들이 드러나기에 생활 쓰레기 터
패총은 무덤을 뜻하므로.. 패구(貝丘)가 더 적절한 용어.

인류가 바다로 식량을 찾아나선 것은 구석기시대.

8만 년 전에도 바다 자원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본격적으로 바닷가에 삶의 터전을 잡은 것은 중석기시대

중석기시대는 후빙기의 따뜻한 환경이었으므로
추운 기후에 살았던 큰 짐승들이 북쪽으로 가서
먹이가 줄자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먹이를 찾았다.

한국에서도 약 1만 년 전부터 바닷가에 살면서
바다에서 나오는 식량을 이용했던 남해안의 통영.
상노대 패총에서 중구석기시대의 문화층이 드러난다.

조개더미 유적은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많이 나타나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섬지방에도 많이 있다.
하여, 신석기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조개더미 유적은 단순한 생활쓰레기 터가 아니며
그안에 집터를 만들거나 무덤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조가비와 흙을 섞어 바닥을 다진후 그위에 지은 집.

통영 연대도 유적과 욕지도 유적에서는 무덤으로 이용
패총 유적은 생활쓰레기가 대부분이지만 인근에 집터들.
서해 바닷가와 섬의 작은 조개더미들은 거의 1차 가공터.

1차 가공한 조개만 멀리 떨어진 집까지 운반.

조개 성분은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유지시켜주기 때문에
일반 유적에는 남아 있기 어려운 짐승뼈·뿔·나무 등
유기질 유물들이 잘 남아 고대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준다.

'선사시대 살림살이 사회구조 등을 알려주는 패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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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대륙에서 유일한 부동항 보유국 한반도.
조개는 선사시대 한반도 사람들에게 중요한 식량.
특히, 먹이가 귀한 겨울에도 조개는 식량 공급원.

육식 유목민은 큰 동물 사냥감따라 북상.
채식 어업 농민들은 바닷가에 남았던 듯.

한반도 옛 조상은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출발
따듯한 한반도에 정착했다가 또 다시 북상한 듯.
특히, 가야 문명은 낙동강 섬진강따라 북상한 흔적.

유목민 기마 민족은 동해안 백두대간을 따라 북상.
농본 민족은 서해안일대 기름진 평야를 따라 북상.
청동기 철기문화를 보유한 민족들은 한반도로 남하

'포경 및 농어업 민족은 일본으로 건너간듯.' 

 

 

 

구석기시대.

 

 

 

철새는 계절따라 월동 서식처를 이동하며 사는 새.
북쪽에서 번식하고 겨울에 우리나라에 오는 겨울새
봄에 남쪽에서 와 번식하고 가을에 되돌아가는 여름새

'그외 구름에 달가듯 떠도는 나그네새와 떠돌이새.'

한반도의 대표적인 여름새는 뻐꾸기, 백로, 파랑새
겨울새로는 기러기, 독수리, 두루미, 부엉이가 있다.

낙동강 하류 철새 도래지는 부산과 김해평야 사이.
넓은 하구지역으로 수많은 삼각주와 모래언덕(사구)
낙동강이 넘치거나 태풍이 불면 사라지기도 하는 사구.

철새들은 사구 주변 개펄의 먹이를 먹고 살아간다.
특히, 갈대밭은 철새와 물새들의 안식처로 적합하다.
낙동강 하류 삼각주는 11월부터 3월까지 겨울새 낙원.

간혹 천연기념물 재두루미, 저어새 등이 보이며,
제비물떼새, 넙적부리요 등의 희귀한 새도 있다.
낙동강은 러시아 한국 일본을 잇는 철새 도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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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에 철새처럼 떠돌며 살았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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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빙하기 후 중국에서 한반도 왜로 흘러간 문화.
티벳- 양자강. 황하강-서해 -낙동강 선사문명-일본.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까지 슈메르인 이동 경로.

'낙동강 선사문명은 가야 문명의 발상지.'

양자강과 황하 하구 퇴적층에서 농경문화를 형성.
지구온난화로 제 4 빙하기가 종식되며 대홍수 시작.
빙하가 녹아 홍수가 일자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탈출.

'중국 북경. 낙동강. 제주도 구석기시대 유적지들.'

창원 문화재 연구소가 관할하고 있는 가야 문화권역.
경상남도, 부산, 울산 등지는 구석기시대의 공백지대.
부산 해운대 중동·좌동유적, 밀양 고례리 유적지 등등

부산 경남지역은 대체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 출토지.
좀돌날몸돌은 몽고 극동 시베리아 한반도 일본에 분포
해운대 중동유적은 일본으로의 문화전파 경로로 보인다.

특히 진주 내촌리 남강유역에서 발굴된 구석기시대 유적
그 지역에서 희소하던 구석기문화를 일부 밝히게 된 계기.
남해안 구석기시대 개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귀한 자료

일본의 화산분출물이 검출되어,
해당 유적지의 형성 연대의 근거.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정착생활

간석기, 덧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였고,
사냥과 채집, 고기잡이 등을 생활기반으로 하였으며
농경도 이루어져 조개더미, 집터, 무덤 등이 보인다.

먼저, 해안 대규모 패총유적으로 부산 동삼동패총,
통영 연대도·욕지도·상노대도패총, 김해 수가리패총,
부산 범방패총, 울산 세죽패총, 하동 목도패총 등이 조사

패총에서는 이음낚시바늘 등의 각종 어로구와 조개껍질, 생선뼈
자연유물이 다량 출토되어 당시의 어로를 통한 생업활동의 복원
특히 일본열도 죠몽토기와 큐슈 석기, 조개팔찌 자료 대량 출토

한편 부산, 경남지역의 대규모 생활유적의 발굴
남강댐 수몰지구에 화덕자리 갖춘 장방형 주거지
신석기인들이 경남에 생활 터전을 마련했다는 증거.

합천 봉계리, 산청 강루리 등은 신석기시대 유적지.

기원전 800년 무렵 요령식동검 도끼 끌이 만들어진다.
기원전 300년 무렵 동검, 가지방울, 대쪽모양동기, 방패
자귀·대팻날·끌 등의 공구류, 괭이·가래 등 농기구류,

이삭 거두는 반달돌칼, 곡물 가공에 쓰인 갈판, 연장 숫돌,
이 밖에도 돌살촉, 간돌검 등의 무기 및 민무늬토기의 사용.
항아리·바리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모양의 토기를 생산.

진주 산청을 중심으로 가야문화권역 청동기시대의 취락 유물.
울산 검단리 유적 이후 창원 남산유적, 울산 옥현유적, 산청
특히 남강수몰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유적들의 보고.

울산 옥현 유적지 경우, 구릉 사이의 낮은 저지대에 만든 논.
논의 면적은 한 평에서 세 평 미만이고 수로 등등도 발견된다.
이 경작지는 최고로 알려진 미사리 백제밭 보다 1천년 앞선 것.

......................주........................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급상승한 제 4 빙하기 말.
서해 저지대 민족들은 차츰 고지대로 이전한 흔적.
대홍수 시기에는 현재보다 해수면이 무려 140m 상승.

어지간한 산들까지 깊은 물속에 잠긴 청동기시대.
저지대 민족은 살길 찾아 한반도 고지대로 대이동.
청동기문명으로 한반도 신석기문명 원주민들을 제압.

'고인돌은 저지대 민족들의 고유한 문화유산.'

철기문명 신무기가 개발되며 강력한 고대국가 탄생.
이 무렵 삼한시대가 열리며 고대국가 간 치열한 전쟁.
대홍수가 빠져나간 자리에 수북히 쌓였을 토사 퇴적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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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은 현지 표면의 2.5~3m 아래에서 발굴되었으며,
모래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보존된 듯.
밭고랑의 긴 부분 30m, 고랑 폭 35cm, 두둑 폭 50cm.

밭터에서는 반달돌칼·돌칼·돌낫·돌보습·돌괭이
경작용 연장 및 조·콩·쌀·참깨·수수 등이 발견.

.......................主 다랭이 논밭..........................
한반도 원주민들은 신석기 시대 문명.
저지대에서 이주한 민족은 청동기 문명.
원주민이 산으로 쫓겨간 흔적 다랭이 논밭.

지리산자락 산간마을 급비탈 다랭이 논밭들.
역시 고대사회 조상들로부터 치열한 삶의 터전.
지리산에서 사냥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산 흔적.

조개골 산간마을 터 역시
그 중 하나로도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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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묵곡리유적, 마산 가포유적, 합천 영창리 유적,
진주 남강댐 수몰지구 등에서 확인된 다양한 제사유적
청동기시대의 정신세계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

기원전 300년부터 서력기원까지는 초기철기시대
그 이후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철기시대 후기,
삼한시대(三韓時代)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가야문화권을 포함한 남부지역 철기문화는 대체로 4기
대동강 유역에서 육로를 이용하여 낙동강유역으로 파급
이것은 움무덤에서 발견된 중국 전한대 철기 유물로 추정.

기원전 108년 고조선 멸망
기원후 300년까지 삼한시대.
진한과 변한은 뒤섞여 있었다

김해 봉황대유적과 거창 대야리유적,
산청 소남리유적이 가야국 시기에 해당.

봉황대유적에서는 3세기 집터와 마을 주위에 돌린 도랑
집터는 네모꼴 타원형이며 집터에서는 바리, 접시, 항아리
이 시기는 움집 형태이며 창고와 같은 부속 시설도 있었다.

가야지역은 철 생산지로서 그 자체가 발전의 원동력
무기 갑옷 등등을 여러 이웃 나라에 수출한 철의 왕국.

동으로는 낙동강 하류, 서남으로는 남해안,
서북으로는 지리산, 동북으로는 가야산 남쪽
가야는 변한 때 김해 구야국(狗邪國)에서 유래.

특히 하동지역은 신라시대 불교문화 중심지.
반야봉에서 섬진강에 이르는 50리 화개 계곡
신라 불교의 중심지를 이루기도 했던 지역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955년 전국을 10개도로 구분.
상주 소관의 지역을 영남도(嶺南道)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전주 소관 지역을 영동도(嶺東道)라 칭했다.

1106년에 경상도 지방을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라 개칭
1204년에 상주안동도(尙晉安東道), 1314년에 경상도로 개칭
경남지역 남해안 일원은 예전부터 왜적이 자주 침입했던 곳.

특히 부산과 동래 일원은 우리나라의 관문
동래의 금정산성은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
임진왜란 병자호란후 숙종 29년(1703) 축성.

오늘날까지 그 전통적인 맥을 이어온.. 가야 문화권.
점령 국가가 뒤바뀌어 왔어도 그 맥은.. 가야 문화권.
구석기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가야 문화권.

 

 

 

 

황하문명.

 

 


우리나라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중국 양자강과 황하강 하류로 이동.
중국에서 한반도까지 대 이동을 한듯

중국 양자강과 황하강은 서해로 모여든다.
두 강 모두 티벳고원에서 발원한다는 공통점.
한반도는 제4 빙하기 전에 황하강과 양자강 하구

제 4 빙하기가 지나며 서해가 형성된 흔적.
양자강과 황하강에서 그 흔적들을 살펴보자

..............양자강 하구.........................
길이(6,300km), 동서 유역 3,200km, 남북 유역 970km
중국 서부 티벳에서 발원해 12개 성(省)과 지역을 통과.
세계 3번째 길이라 장강, 중국의 쌀 70%를 생산하는 곡창.

목화·밀·보리·옥수수·콩·대마 그밖 작물들 재배지역
중국에서 인구 백만 이상 도시가 양자강 유역에 모여있다.
상하이[上海]·난징[南京]·우한[武漢]·충칭[重慶] 등등.

중국(한족) 후이족[回族] 네팔 인도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다.
남서쪽 고지에 인접한 산악지대에는 중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은 다른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티벳고원 동쪽 끝 빙하 만년설 사이로 흐르는 양자강

상류 끝지점에 이르러 해발 300m로 낮아지며 중류 지점.
양잠업. 석탄·구리·인·금·석유 가스 광물이 집중 매장
인구는 성도(成都) 부근 평원에 밀집된 거대한 산업 중심지

하류는 온화한 해안성 기후로,
봄은 따뜻하고 여름은 더우며
가을은 시원하고 겨울은 춥다.

계절풍이 날씨를 좌우하며
여름 가을에 정기적인 태풍
벼농사 2모작 3모작도 가능.

넓은 계단식 모양 경사면에는 호수가 수없이 많다.
양자강 유역은 비교적 관개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바다로 들어가는 수량은 1년에 1,072㎦로, 세계 4위.

우기에 양자강은 낮은 지역을 크게 범람시킨다.
양자강 유수량이 황하강보다 많지만 토사는 적다.
양자강 하구 삼각주는 64년 만에 1.6km 더 늘어났다

양자강 범람은 인근 평원 주민들에게 커다란 위협
기록에 따르면 BC 206~AD 1960년 1,030차례 대범람
양자강 유역은 평균 50~55년에 1번씩 대범람이 발생.

양자강은 중국에서 수송을 위해 사용되는 주요한 강.
2,700km에 걸쳐 화물과 승객을 실어나르는 교통수단.
화물 수송에 정크가 이용되며 50~100t인 선박도 이용

배수량 1만t 선박은 해안에서 1,100km 떨어진 우한까지
2,000t 선박은 이창까지 갈 수 있으며, 소형선박은 平川.
양자강은 대운하를 통해 황하강 및 웨이허강 지류와 연결.

양자강 유역은 인간 거주역사가 긴 지역 중 하나.
직립원인 화석이 강 북쪽 안후이 성에서 발견되며,
호모사피엔스 유적지도 타이후 호 주변에서 발견

중국 정치 역사는 중국 북부와 황하강 주변에 집중
경제적으로는 양자강 지역 농업 잠재력의 중심지역.
양자강 대운하가 만들어진 것도 곡물 수송을 위한 것.

이 운하의 남쪽은 이미 BC 4세기에 사용,
운하의 대부분은 7세기에 축조된 것이다.

양자강은 정치적·문화적 경계의 역할을 해왔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부에 많은 제국 침입의 목표.
양자강 어귀 상하이는 주요한 외국 통상기지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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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어도
결코 황하강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하를 무시하는 것은 중국을 무시하는 것.- 모택동-

'황하는 곧 중국인들의 자존심인 강.'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 황하.......................
중국 북부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중국 제 2의 강
길이 5,464km. 유역면적 75만 2443km2. 티벳고원 발원.
중국문명의 발상지이자 신석기시대부터 농경 문화 발달

황허강 유역에는 은(殷)나라의 유물이 수없이 발견되었고
그 밖에 역대 왕조의 사적도 무수히 많고 토사가 많은 강.

황하 문명은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
즉, 은나라 및 철기가 거의 완전히 보급된 전한시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는 큰 강 유역에서 일어났다.
1.황하강 2.나일강 3.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4.인더스강

왜 중국 문명은 양자강 아닌 황하에서 일어났을까?

신석기시대 양자강은 무덥고 강우량이 많은 늪지대.
저습지에 크고 작은 호수와 늪이 많고 무성한 장글.
반면, 황하는 대륙성기후로 건조하고 비옥한 퇴적층.

B.C.770년부터 B.C.221년까지는 제후국들의 싸움
중국 신흥귀족 세력다툼이 만연했던 춘추전국시대
이 시기에 중국 대표적 사상가 노자와 공자가 등장.

최초 중국통일, 문자 화폐를 만들고 도량형을 통일
중앙집권제 확립, 만리장성 아방궁을 축조한 진시황.
지나친 토목공사와 가혹한 법률로 백성들 원성을 샀다.

진나라 이후 등장한 한 왕조에 열린 실크로드.

수에 이어 출현한 당나라는 인도와 페르시아, 일본,
우리나라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하며 경제 문화 발전.
귀족적인 특징을 갖춘 당 문화는 국제적으로 성장한다.

황하 유역 황토층에서 발굴된 B.C 5000년 ~ 4000년경
신석기시대 좁쌀 등이 재배되고 개 돼지 가축들이 사육.
B.C4000 ~ B.C 2000년 경, 칠무늬 토기를 만들어 썼다.

B.C 2500 ~ B.C1500년경 용산문화 검은 간 토기가 사용.
그 중심지가 산둥성의 용산이므로 이를 용산 문화라 한다.

신석기시대 끝무렵 청동기시대 은(殷)나라 탄생.

가축 소를 이용한 농경문화, 수리공사, 분묘, 청동화폐
상공업이 발달되며 도시가 형성되어 부강한 국가를 형성.
전한의 무제(BC 171~BC 87) 무렵에 철기문화가 거의 보급

황하문명은 널리 확산되며 한문화(漢文化)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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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문명 발생 연대표..................
~ B.C.6000 : 구석기 시대
B.C.6000 ~ B.C.2000 : 신석기 시대
- B.C.5000년 서안 반파촌을 중심으로 양소문화 발달
- B.C.2800년 전설상의 5제시대

B.C.2000 ~ B.C.1000 : 상왕조
- 탕왕이 하를 멸망시키고 상 왕조를 세움
- 갑골문자에 의한 역사시대의 시작
- B.C.1133년 주 무왕이 '호경'에 도읍을 정함
- B.C.1027년 상왕조 멸망

B.C.1000 ~ B.C. 475 : 서주 / 동주
- 노자와 공자의 출현
- B.C.770년 도읍을 '낙읍'으로 옮기며 동주시대가 시작

B.C. 475 ~ 0 : 전국시대 - 진 / 서한
- B.C.221년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진 왕국을 세움
- B.C.206년 유방이 황제로 즉위하고 '장안'에 도읍을 정함
- B.C.138년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파견되며, 비단길이 열림

0 ~ A.D. 220 : 동한
- 25년 광무제가 수도를 낙양으로 옮김
- 105년 채윤이 종이를 발명
- 220년 동한 왕조 멸망

A.D. 220 ~ A.D. 420 : 삼국시대 - 서진 / 동진
- 263년 촉의 멸망
- 265년 사마염이 제위에 올라 '서진'을 세움
- 위나라 멸망
- 280년 오나라 멸망
- 5호 16국 시대가 지속됨

A.D. 420 ~ A.D. 900 : 남북조 시대 - 수 / 당
- 420년 남조의 송 건국
- 581년 양견이 남조의 진을 멸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어 수나라를 세움
- 681년 당고조가 수도를 장안으로 옮김
-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가 중국 최초의 여제가 됨
- 881년 황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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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테베(Thebes)'는 나일강 중류에 있는 고대 도시 이름이다.
수메르인이 지배한 이집트 나일강 하류에서 중류까지 테베.
테베는 '티베트 고원'의 '티베트(Tibet)'에서 유래된 지명.

테베는 그리스 지명에도 있고 한반도 '태백산'도 같은 기원

중국 산동성 '타이산[泰山]'의 '타이',
타이랜드 '타이'도 테베에서 유래된 말.
'테베'는 우리말로 '토대가 되는 밭'이란 뜻

테베는 '텃밭'과 어원이 같고,
수메르인 중심지를 가리키는 말

슈메르인들은 큰 강 중상류 쪽에,
큰 산맥으로 둘러싸인 계곡을 선호.
그 입구만 막으면 방어하기 좋은 계곡.

'슈메르인 종족 거주지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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