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7-나 ( 기황후. 공녀. 고려가요. 청산별곡. 쌍화점 )

donkyhote 2010. 5. 14. 01:39

기황후 

'고려 역사를 살펴보면 원나라 지배를 받았던 80년.'
그당시 전세계 대부분 국가가 원나라에게 굴복했다.
따라서, 원나라 속국은 국호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

1298년 충선왕~ 1344년 충목왕의 왕 이름 머릿자 충.
고려왕의 즉위는 원나라 황실에 의해 좌지우지된 흔적.
원나라에게 정복된 나라중 국호를 유지한 나라는 극소수.

'고려는 어떻게 국호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원나라에 공녀로 착출되어간 미스 고려 기황후.
그녀는 타고난 미모로 원나라 황실을 장악한다.
원나라를 37년간 지배했던 전설적인 여걸 기황후.

기황후는 원(元)나라 순제(順帝;惠宗)의 제 2 황후.
고려 기자오(奇子敖)의 딸로 몽골 이름은 완자홀도.
1333년 원나라 황실의 고려환관 고용보에 의해 발탁.

황실 궁녀로 있다가 순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까지 책봉.
몽골인 이외 황후로 삼지 말라는 규칙을 깬 전설적 여걸.
1339년 황태자를 낳아 원 황실의 황통(皇統)을 잇게한 여인.

당시 기황후 세력은 원나라 말 30년간 황실 실권을 장악.
고려에도 영향을 미쳐 그녀 친척들은 영화와 권세를 누렸다.
1365년 제 1 황후가 되지만 다음해 몽골 내륙으로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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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를 37년간 지배한 고려여인 기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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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초원에서 일어나 전세계 4/5를 정복한 원나라.
징기스칸이 세운 원나라는 아시아와 동유럽을 제패
그 원나라를 실질적으로 무려 37년간 지배한 기황후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에 부정적으로 기술된 인물.
고려 고종 12년(1225년) 몽고 사신 '저고여' 피살사건
몽고 황제 오고타이는 이 사건을 구실삼아 고려를 침공.

1231년(고종 18년) 살리타 수만 군사가 고려를 공격한다.
이것이 고려로서는 28년동안 7차에 걸친 대몽항쟁의 시작.

결국, 고려는 원나라에게 굴복하고 종속관계가 되고,
이때부터 고려의 왕세자는 원나라에 인질로 보내지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야 고려 왕에 오를수 있는 부마국.

원나라는 고려에 환관과 공녀(貢女:공물로 바치는 여자) 요구
첫번째 고려에서의 공녀 착출은 고종 18년(1231)에 이루어졌다.
원나라에 항복한 남송 귀순병들에게 배우자를 마련해준다는 구실

원나라가 고려에 공녀 1,000명을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약 백여년에 걸쳐 수많은 고려 처녀들이 공녀로 끌려갔다.

1275년(충렬왕 원년) 충렬왕은 금혼령을 발표하고
10인의 처녀를 원나라에 바쳐 공납의 문을 열었다.

1276년에는 원에서 500인의 공녀를 요구하자
충렬왕은 금혼법을 만들며까지 이에 적극 호응
양가 규수는 관에 신고 후 결혼하도록 법 제정.

당시 공녀들은 출신성분 따라 황실 또는 고위관직 처첩
주점에서 노래하는 기생으로 살아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딸이 공녀로 뽑히지 않게 하려 애쓴 고려인들.
명문가문의 딸이 공녀로 선발되자 비구니로 만든 부모
아비는 섬으로 유배되었고, 딸은 원나라 공녀로 끌려갔다.

이렇듯 원나라 공녀 착출은 귀족가문도 피해갈 수 없었다.
원나라 대신들 사이에 고려 여인을 아내로 삼는 것이 유행
원나라 조정의 요구 뿐 아니라 원의 관료까지 공녀를 요구

공녀 착출 피해가 크자 뜻 있는 학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
그 가운데 고려 말 유학자 이곡(1298~1351)의 공녀 반대 상소문

“…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척이 서로 한 곳에 모여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공녀로 나라 밖으로 떠나보내는 날이 되면, 부모와 친척들이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어당기다가 난간이나 길바닥에 엎어져 버립니다. 비통하고 원통하여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는 사람도 있고, 피눈물을 흘리며 눈이 멀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 기씨 또한 공녀로 착출.
원 순제(順帝:1333~1368)의 눈에 들어 마침내 황후에 등극.
그 뒷 배경에는 고려 출신 환관의 대표인 고용보가 있었다.

당시 고려는 공녀 뿐 아니라 환관을 바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고려 환관이 학문과 정치적 경륜을 겸비
원 세조(쿠빌라이)또한 고려인을 우수한 민족이라 평

당시 원은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학문적 소양을 갖춘 고려 환관들이 필요.

고려 출신 환관들은 황제의 신임을 받기 위해
황제를 사로잡을 수 밖에 없는 고려 여인을 물색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기씨를 황제에게 적극 추천.

원나라 순제 역시, 고려인에 대한 애정이 각별.
1330년 11세일때 인천 앞 대청도에서 유배생활.

대청도 내동초등학교는 옛날 궁궐터이자 유배지.
아직도 궁궐터의 주변 마을을 장안이라고 부른다.

토곤 테무르는 1년 5개월간 대청도에서 유배생활.
고려에 대한 남다른 추억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가 원나라로 돌아간지 2년만에 원나라 황제로 등극
고려에 대한 추억이 궁녀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

원 순제(토곤 테무르)의 황후는 '타나시리'.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유배보낸 태평왕 딸
원 순제는 그런 황후에게 호감을 가지 못한 듯.

원나라 황제 순제가 기씨를 총애하자 황후가 질투.
타나시리 황후는 기씨를 여러 차례 채찍으로 때렸다.
야사의 기록에는 인두로 그녀의 몸을 지지기까지 했다.

다행히 황후의 형제들이 순제를 제거할 정변을 세우다가 실패
원 순제는 승상 빠앤(白顔)과 손잡고 타나시리 친정을 제거한다.
순제는 황제 역모사건에 연류해 황후 타나시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순제는 기씨를 황후로 책봉하려고 했으나,
타나시리 세력 제거 일등공신 빠앤이 반대.

당시 원나라에서는 몽골족 명문 출신 황후 책봉이 불문율
기씨는 황후가 되지 못했지만, 상당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황제의 총애와 고려출신 환관들 지원을 받는 실력자.

1339년 순제의 황태자를 낳아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 기황후.
그해, 드디어 세계를 지배하는 원 제국의 제 2 황후가 된다.
그 후 제 1 황후가 1365년 세상을 뜨자 제 1 황후에 오른다.

기황후가 황후가 되자 원에 끼친 영향은 상당히 크다.
고려의 문화가 원에 유행하게 되는 고려양이 바로 그것
몽골 국립박물관에 보관된‘인두’도 기황후로부터 전파.

고려 음악을 비롯해 생활풍속, 음식에 이르기까지 전파.
몽골 전통음식 ‘뮈시카’는 우리 전통 한과인 ‘매잡과’
고려병(高麗餠), 고려다식, 고려조청, 상추등이 원에 전파.

당시 고려에서는 원 영향으로 몽고 풍습이 유행하였다.
결혼할 때 연지곤지 찍기, 족두리, 남녀 옷고름의 장도.
변발, 고기를 지지거나 튀기는 조리법, 소주, 수라상 등

'기황후가 등극하면서부터 원나라에 퍼진 고려의 문화.'

“기황후는 고려미인들을 많이 데리고 있으며, 대신 중에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 그들을 보냈는데, 당시 원나라 고관들과 귀인들은 반드시 고려 여인을 얻은 뒤에야 명가(名家)라고 불렀다.… 순제 이후로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태반이 고려 여인이었으므로 의복, 신발, 모자, 물건 등이 모두 고려의 것을 따르게 되었다.”

기황후는 1353년 14세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통솔 최고 책임자로 임명.
이 무렵, 순제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설상가상 양자강 황하 유역 전국에서 한족들의 봉기
어느덧 한족의 봉기는 원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
1366년 원나라는 주원장에게 연경(북경)을 빼앗긴다.

순제와 기황후는 황급히 북쪽 몽골초원으로 도망간다.
기황후는 도피하면서 원병을 보내지 않는 고려를 원망
1368년 7월 몽골의 초원 카라코룸으로 도피했던 원 순제

나라에 관한 모든 권한을 황태자에게 넘겨준 뒤 운명.
기황후가 낳은 아유시리디다가 북원의 황제가 되었다.
그후 그녀의 최후에 대해서는 역사에 언급되지 않았다.

한편, 고려에서 한몫했던 기황후의 오빠 기철형제들
기황후 세력을 업고 고려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다.

충목왕의 개혁정치를 좌절시키기도 했고,
충혜왕을 원나라로 압송하는데 앞장섰고
각지에 농장을 개설해 백성들을 수탈했다.

왕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작태를 부리다가
결국 공민왕에 의해 제거 당한 기철 형제들.
기황후도 고려왕을 책봉하는 과정에 적극 개입

'심지어 고려 공민왕을 제거하려 했던 기황후.'

그녀는 충렬왕 이후 80년 간 계속된 공녀 징발을 금지
고려를 원나라에 속한 성 하나로 만들려는 입성론 폐지
고려 국호의 명맥을 잇게 된 것은 기황후의 영향력 덕분.

원나라는 명나라에게 밀려 패망의 길을 걷는다.
고려 역시 패망의 길을 걷고 이조시대가 열린다. 



 
공녀. 



고려와 이조시대에 원(元) 명(明) 청(淸)에 바친 여자.
몽골 1차 침입후 1232년(고종 19) 동남 동녀 각 500 명
몽골은 고려와 전쟁후에도 여러 차례 많은 공녀를 요구.

복속정책 내지 근친정책(近親政策)이라는 이유
실제로 원 황실에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원의 귀족 고관이 요구하는 여자도 보내야 했다.
1274년(원종 15) 남송 군인집단 혼인을 위해 공녀 140명
이를 위해 금혼령을 내리고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을 파견해 여자를 징발.
1355년 공민왕 4년까지 공녀 문제로 원은 50 차례 사신 파견
공녀는 대부분 원나라 궁중에서 급사(給事)나 시녀가 되었다.

그중 비파를 잘 타 세조의 총애를 받은 궁인 이씨(李氏),
원 인종(仁宗)의 황후로 책봉된 화평군 김심(金深)의 딸,
순제의 제2황후가 되어 황태자를 낳은 기자오(奇子敖) 딸

일부는 귀족이나 고관의 후실이 되어 부귀를 누렸다.
이에 따라 권력을 장악하려 딸을 받친 자들이 있었다.
고려에서 노책(盧)과 권겸(權謙)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딸이 공녀로 뽑히는 것을 피하려 했다.
공녀로 인한 폐단에 대해 충렬왕 때 박유(朴楡)가 지적
이곡(1298~1351)도 그 비참상을 극론하고 그 폐지를 요청.

민간에서는 조혼(早婚)의 폐습이 촉진되었으며,
원에서는 고려 여인이 많이 활동하게 됨에 따라
의복 기물 음식에 고려 풍속이 유행하게 되었다.

원에 대한 공녀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끝났으나
원을 이은 명도 요구해 이조도 공녀를 바쳐야 했다.

명은 원과 같이 많은 공녀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명 태조 후궁으로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은 한비(韓妃)
영락제(永樂帝)를 낳은 석비(碩妃)는 이조 공녀 출신이다.

명에 대한 공녀는 세종(世宗) 때 완화되었으며,
1521년(중종 16) 그 철폐를 요청해 허락받았다.

청에 대해서는 1650년(효종 1) 실권자였던 섭정
예친왕 도르곤 요구로 의순공주를 보낸 바 있다.
그외 청에서 이조에 공녀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고려가요.



고려의 기반은 신라 고구려 백제 세력들 바탕 위에 성립
고려의 지배층은 지방세력을 통합해 새로운 문화를 형성
삼국시대부터 전래된 전통적인된 지방민요를 적극적 수용.

신라의 〈동경 東京〉〈목주 木州〉,
백제의 〈선운산 禪雲山〉〈무등산 無等山〉,
고구려의 〈내원성 來遠城〉〈연양 延陽〉 등이 예

〈정읍사〉〈사모곡〉 등은 형식면에서 향가와 유사
〈처용〉은 향가인 〈처용가〉에서부터 발전된 모습.
이 노래들은 민간에서 유행하여 궁중 가악으로 발전.

음란가요 폐기논쟁에도 불구하고 이조시대까지 계승.
속요는 원래 민간에서 유행해 구전된 민요를 뜻한다.

① 지방의 성격을 띤 민요가 많은 점,
② 동일한 가사가 두 노래 이상인 점,
③ 남녀간 상사(相思)병에 관한 내용,
④ 민요 특유의 시어 음률을 가진 점,
⑤ 가사 내용을 개편한 흔적이 있는 점

유랑하는 백성의 괴로움을 노래한 〈청산별곡〉,
님과의 이별을 서럽게 노래한 〈가시리〉,
달거리 노래의 전형적인 모습 〈동동〉

<정과정〉〈동백목 冬栢木〉은 지은이가 분명한 작품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요를 수용하여 재창작된 것이다.
'정서' '채홍철'이 유배지에서 풀려나고 싶어 만든 노래.

그들의 처지를 임금에게 알리고 싶은 간절한 염원.
민중에게 친숙한 민요를 고쳐 노래를 짓고 불렀다.
그렇게 하여 그들의 처지를 널리 알려지기를 고대.

고려 후기 민중 속요는 궁중 속요로 수용 또는 개편.
충렬왕은 외모와 기예가 뛰어난 8도의 창기들을 선발.
이때 8도의 민요가 창기들을 통해 궁중으로 들어간듯.

이들 노래는 다시 궁중 속악가사로 개편.
왕과 신하들이 모이는 연회에서 불려졌다.
민중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통치의 기본.

지탄 받을 만큼 음란한 노래로는 〈쌍화점〉
고려 전기에 이룩한 왕조의 위업이 무너지고
고려 창건 이념마져 무너지며 타락해간 지배층.

왕마저 권문세도 가문들과 어울려 놀이에 몰두
이에 부응하여 퇴폐적인 노래가 만들어졌던 것.
고려속요는 건강한 민중적인 서정성을 상실한다.

'이조시대 왕실 연회까지 계승된 고려속요.'

8도에서 선발한 궁궐기생과 퇴폐를 즐긴 연산군.
강제로 모집한 어염집 규수 흥청들과 경회루 연회.
경회루 방지 연못에서 흥청들의 목욕 광경을 즐겼다.

왕의 여자가 될 꿈을 안고 대궐로 들어온 흥청들.
궁중 연회에서 왕이 대신들에게 베푼 주흥 노리개.
어염집 규수의 수줍음마저 무참하게 짓밟은 궁중연회.

'경회루 아래 붉은 비단장막 속에서는 퇴폐 연회.'

고려 속요는 향가나 시조 같은 정형성은 보기 어렵다.
전해오는 14 속요는 연장체(聯章體)와 단련체(單聯體)
조윤제는 이 점에 착안하여 속요의 형식을 3가지로 분류.

①노래에 후렴을 붙여 계속 이어가는 형식.
〈동동〉〈청산별곡〉〈쌍화점〉〈만전춘 滿殿春〉

② 가사는 절마다 달라도.. 후렴은 반복되는 노래.
〈가시리〉〈정읍사〉〈서경별곡〉〈정석가〉등등.

③ 처음부터 분절 없이 자유롭게 연장할 수 있는 노래.
〈처용가〉〈사모곡〉〈이상곡 履霜曲〉) 등등의 속요.
특이한 점은 반복되는 후렴 흥얼거림(오늘날 랩) 감탄사

이것은 궁중 속악 가사로 채용·개편되면서 강화.
궁중 연회 분위기에 따라 한없이 길어지기도 한듯.
속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노래가사의 시작과 끝

노래 시작은 궁중 악사들의 구호(口號)에서 비롯
노래 끝은 전통적인 형식에 맞추어 발생한 것인듯
즉, 10구체 향가에서는 9구 감탄사가 처음에 나온다.

고려 속요 마감 기법은 이조 시조 가요에도 큰 영향.
속요는 주로 2, 3, 4음절을 음수율로 채택하고 있으나
3, 4음절이 우세하고, 3, 4음보율은 3음보가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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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유행가 후렴 랩과 유사한 '고려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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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별곡靑山別曲 



청산별곡은 고려 여인의 한이 담긴 노래이다.
원나라 병사들에게 겁탈당하고 옷찢긴 여인들.
원나라로 공출 떠나는 여인이 님과 이별을 노래.

고향 떠나 원나라에 끌려가는 고려 여인의 신세한탄.
고려는 80년간 수많은 여인을 공출 원나라에 받쳤다.
오늘날까지 오페라 소재로서 명맥을 이어 온 청산별곡.


살으리 살으리랏다
靑山에 살으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靑山에 살으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고 일어나 울어라 새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만 나면 울고 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던새 가던새 보았느냐
물 아래 가던 새 보았느냐
이끼 묻은 쟁길랑 가지고
물 아래 가던 새 보았느냐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럭저럭하여
낮일랑 지내왔구나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밤일랑 어찌 하리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디다 던지던 돌인가
누구를 마치려던 돌인가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
맞아서 울고만 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으리 살으랏로다
바다에 살어랏로다
나문재나 굴, 조개 먹고
바다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듣노라
벌판을 돌아 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가서
奚琴 타는 것을 듣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더니 배부른 독에
텁텁하게 진한 강술을 빚는구나
조롱박꽃 누룩이 매워
붙잡으니 낸들 어찌 하리이꼬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쌍화점. 



고려가 80여년간 원나라 속국으로 지배받았던 시절.
수많은 대식국과 색목국의 유민들이 고려에 정착한다.
'쌍화점'은 그들로 인한 성풍속 폐해를 그린.. 고려 가요.


1절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2절.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만
그 절 지주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나며 들며 하면
조그마한 새끼 상좌 네 말이라 하리라


3절,

두레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만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우물 밖에 나며 들며 하면
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말이라 하리라


4절.

술 파는 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만
그 집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집 밖에 나며 들며 하면
조그마한 시궁 박아지야 네 말이라 하리라



(후렴)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쌍화점 해설.........................
회회(回回) 아비는 대식국(아라비아 상인) 이슬람 교도.
고려가 원나라 속국일 당시 한반도에 들어와 대거 정착.
당시 원나라 세력을 등에 업고 고려로 들어온 상인 집단.

'쌍화점은 작역하면 만두집이지만.., 기생집.'

'만두집에 만두 사러갔다'는 몸 팔러 갔다는 의미.
회회 아비는 기생집 기생들의 기둥서방인듯 보인다.
1274년 충렬왕때 회회 아비가 고려 본토에 차린 기방

650년 이후 아라비아는 급속하게 영토를 확장
중국은 아라비아를 '영토의 탐욕자'라 하여 대식
원나라 이후 대식이란 말 대신 회회(回回 Hui-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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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식국 상인이 고려에 들어온 첫 기록은 11세기.
이슬람 사료에 의하면 9세기 중엽부터 신라와 접촉
11세기 고려에 이주한 100명이 넘는 대식국 상인집단

'고려 현종 15년(1024) 대식국에 관한 역사기록'

"9월에 대식국의 열라자 등 100명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다음해 9월에도 "대식만 등 100명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정종 6년(1040) "11월 병인(丙寅년) 대식국 객상 보나합이
와서 수은·용치·점성향·몰약·소목 등을 바쳤다"는 기록.

대식국은 고려와 규모가 큰 무역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대식인들의 활동은 〈고려사〉에 보이지 않다가
원나라가 일어난후 13세기 중엽부터 본격 고려에 진출

회회인들은 고려에 오는 몽골 공주 수행원으로 오거나,
원나라에서 생활하는 고려 왕자 및 지배층들과 친분관계
그후 그들과 함께 고려에 와서 귀화하여 정착하기도 했다.

충렬왕비인 제국공주 시종으로 와서 고려에 귀화한 삼가(三哥)
장순룡(張舜龍)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덕수장씨(德水張氏) 시조
공민왕과 친분을 맺고 고려에 귀화한 설손의 아들 설장수와 설미수,

손자 설순은 고려말~조선초에 장수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고려말 회회인은 개경에 집단거주하며 원과 고려와 무역업
이조 초기까지도 정치적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고려왕실과 밀접한 이들이 개성상인 뿌리 아닐까?'

그들은 고유의 종교적 문화적 습속을 보존하고 있었고
이조 조정 하례의식에 그나라 대표로 초대받기도 했다.
1427년(세종 9) 이질문화 금지 칙령이 내린후 사라진다.

이슬람 교리는 엄격하지만 대식국의 성윤리는 문란.
아랍인은 골격이 굵고 예나 지금이나 성욕이 강하다.
하여, 변강쇠는 대식국 상인에서 유래된 듯 추정된다.

당시 사회혼란 속에서 퇴폐적인 성윤리를 풍자한 속요
왕의 취향에 맞춰 개작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가요.
전국에서 뽑힌 기생들이 남장을 했던 남장별대(男裝別隊)

오잠의 지휘로 충렬왕의 연회석상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조 성종 때 음사(淫辭)라 하여 배척을 받았던 고려가요.
8도 기생들이 왕이 베푼 궁궐 연회에서 불렀던 각 지방 민요.

8도 기생을 통해 8도의 민심과 풍습을 골고루 익힌 왕.
그러나, 충렬왕과 성종은 음란한 성풍속을 즐겼던 군주.
8도 기생을 통해 민심을 알려 하기보다는 퇴폐를 즐겼다.

이슬람 문화권은 전세계 56개국 약 13∼16억 인구.
옛부터 동서양 실크로드 상권을 장악한 중동 민족.
아라비안 나이트 '천일야화'로도 널리 알려진 민족.

'고려말 원나라를 통해 한반도에 진출.'

서역에서 온 이슬람 교도들의 문란한 성풍속.
이조시대에 미풍양속을 어지럽힌다 하여 추방.
이슬람 교도들 바람기 후손으로 짐작되는 변강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