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8. ( 통천문. 천왕봉. 성모사. 하동바위. 참샘. 백무동.)

donkyhote 2010. 5. 14. 01:47

통천문.

  


 

 

마지막 가는 겨울이 아쉬운듯 지리산 눈꽃의 향연.
상고대(나무서리꽃) 아름다움이 만발한 통천문 주변.

바람과 구름이 빚어낸 산호 또는 사슴뿔 모양 상고대

대기 중 수증기가 승화되어 차가워진 물체에 붙는 것

짧은 생을 가진 상고대는 해가 나면 대부분 소멸된다.

 

 


하늘이

멀지 않았다

 

통천문으로

달도 별도

바람이 지난다


날개 없는 마음만이 통할 수 있는가

지나가면 날개가 돋아날 것인가


入此門來莫存知解

歷千劫而不古亘萬歲而長今

 

달빛에 주련 글씨가 또렷하다

 

맑은 비늘을 벗고 새벽을 들이키는 용 한 마리

하늘을 취하지 않고 땅을 버리지도 않는다

내 스스로 남든 줄 안다면 어떤 문에도 속지 않는다


이 문에 들어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를 뻗쳐도 항상 오늘이니

 

 

 

천왕봉.


 

 

 

 


 

지리산 10 경 중에서 << 제 9 경 - 천왕봉 일출.>>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가릴 곳 하나 없는 탁 트인 전망.
천왕봉은 하늘에 닿을 듯 장엄한 기상으로 우뚝 솟았다.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칠선계곡, 함양읍내 건너 멀리 백운산,
덕유산 연봉이 있고 가까이 창암산, 법화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중봉, 하봉, 연봉을 넘어 북동쪽 감악산, 가야산의 암봉도 보인다.

'동쪽으로 웅석봉의 기나긴 능선 아래로 아른거리는 경호강.'

남쪽으로 첩첩산맥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남해.
서남쪽으로 광양 백운산이 가물거리고 서쪽으로 뻗은 지리산 주능선
서북쪽으로 인월, 운봉이 부분적으로 드러나며 멀리 성수산이 보인다.

한반도의 조상들은 옛날부터 높은 산을 섬겼다.
산은 하늘로 통하는 지름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은 신의 섭리란 믿음.

천왕봉에는 하늘나라 선녀가 살고 있다고 믿어왔다.
엄천사 법우화상이 선녀와 결혼해 8 딸을 얻은 전설.
그 여덟 딸이 팔도의 무당이 되어 인간과 신의 중재자.

하늘나라 선녀가 늙어 죽은 후
천왕봉에 세워진 할미당이 성모사.

이조시대 학자 김일손은
그녀가 위숙왕후라 믿었다.
고려를 창건한 왕건의 어머니.

이조시대에서도 천왕봉 제사를 엄숙하게 지냈다.
평소 제관은 남원부사,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당상관.
조정에서 직접 파견하여 이곳까지 내려와 제사를 올렸다.

훗날 이조는 이곳까지 오르기 벅차
국가 제사 사당을 종석대로 이전한다.
1737년 영조 13년 구례군 강의면 종석대.
제사를 맡은 제관 노고를 덜기 위한 조치.

이조 말 국력이 기울어 종석대는
스님들에 의해 화엄사로 이전한다

한반도 5악 중 지리산은 남쪽에 있어
이조는 그 절을 남악사라고 명명한다.

북한산이 중악
백두산이 북악
설악산이 동악,
묘향산이 서악.

신라 5악에서 본딴 이름.

대구 팔공산이 중악,
경주 토함산이 동악,
공주 계룡산이 서악,
강원도 태백산이 북악.

신라시대 천왕봉에 모시던 할미당
이조시대에는 노고단으로 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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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主와 天王'은....... 점 하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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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에다 '(점)하나를 찍으면.. 주인 주(主).
주인 주(主)에서 ' 하나 떼면 임금 왕(王).
왕(王)은 옛날부터 고독한 존재의 대명사.

천왕성모는 천왕봉 전설 속 여자 주인공.
할미당 성모에 天王을 합쳐.. <천왕성모>.

'천왕봉은 언제부터 불리워진 이름일까?'

아직 밝혀진 바 없고, 문헌상 기록도 없다.
천왕봉의 이름은 다양한 유래를 품고 있다.

천왕봉은 불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지배적.
사찰에 들어설때 반드시 사천왕문을 통과한다.
즉, 천왕봉은 사천왕문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

우리나라 산봉우리 이름에는 불교적인 이름들.
천왕봉이라는 이름은 지리산 이외에도 여러 곳.
불교 성지인 지리산 천왕봉도 예외일 수 없을 듯.

.......................천왕문 (天王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전각.
불국정토의 외곽인 동서남북 네 곳을 지키는 수호신.
4 천왕상은 지옥의 사자인듯 한결같이 무섭고 위압적.

잔뜩 불거져 부릅뜬 눈과 치켜 올린 검은 눈썹,
크게 벌어진 빨간 입과 두려움을 주는 얼굴표정.
몸에 갑옷을 걸치고 손에 큼직한 칼을 들고있다.

발로 마귀를 밟고 있고 마귀들은 고통스러운 얼굴
사천왕과 그 수하들은 천하를 두루 다니며 권선징악
천왕문은 보통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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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오행설(五行說) 천왕문.
목 동쪽, 화 남쪽, 토 중앙, 금 서쪽, 수는 북쪽.
동쪽 목(木)은 청색, 태양의 상징 화(火)는 적색
금(金)은 흰색, 수(水)는 흑색. 그 중앙은 부처님.

'천왕봉 정상은 불교관점에서 보면 부처님 자리.'

동서남북 사천왕에게 둘러싸인 중앙은 부처님 자리.
황금빛을 띤 부처님, 오행 중 중앙인 토(土)의 자리
불교에서 사천왕이란 천상계 6천 중 첫번째 욕계(欲界)

불교에서 상정하는 하늘 중앙에 수미산(須彌山)이 있고,
그 산 중턱 동서남북 각 천왕이 그 관할지역을 관장한다.
사천왕은 원래 고대인도의 신화적 존재였으나 불교에 흡수

고대 인도에서도 초기에 귀족적인 상으로 표현되었다가,
중앙아시아를 거치며 갑옷입은 무장 모습으로 바뀌었고,
신라에 이르러 무섭지 않은 소박한 표정으로 정착되었다.

천왕문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기에
이 문 밖은 하늘아래 천하(天下)가 되고
문안은 하늘위 천상(天上)이 되는 것이다.

사왕천에는 사천왕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천하 어떠한 힘도 천상은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이 문을 지나면 이미 하늘나라 사람.

마음과 행동도 곱게 가져야 한다는 믿음.

따라서, 천왕봉은 신라 때 명명된 듯 싶다.
그후 불교종주국 고려도 천왕봉 지명을 계승
오늘날까지 천왕봉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

'천왕봉 이름에는 몇가지 흥미로운 유래.'

그중 일본의 황실도 천왕봉 유래에 한 몫.
원래 천황봉이 천왕봉으로 바뀌었다는 주장.
천황의 조상이 백제 왕조였다는 학설에서 유래.

일본 천황은 김해 김씨 후손이라고도 한다.
가락국을 창건한 김수로왕은 김해김씨 시조.
천왕봉 마야부인 전설 실제 주인공은 허황후.

고려와 이조 때 저질렀던 왜구들의 만행.
천왕봉 위숙왕후 성모상에 칼질했던 흔적.
왜구가 성모 석상 목을 자른 사례도 있었다.

원 속국 당시 고려가 일본을 3차례 침공.
일본이 고려에게 그 침공에 대한 보복인듯.

일본 천황은 도교에서의 우주 지배자 천황대제
일본이 7세기초 중국 수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천황대제에서 두자를 따서 천황이라 처음 사용.

그 이전까지는 오오기미(대왕)라 하였는데
중국 수나라의 황제도 도교에서 비롯된 것.
일본 천황은 외교의례 상 국가 원수로 예우.

왜구들은 성모사를 천황 성지로서 여긴듯.
하여, 고려의 위숙왕후 성모상에 칼질한듯

천왕봉 위치는 사실상 한수 이남 한반도 중심.
천왕봉에서 동해 서해 남해까지의 거리가 비슷.
천왕봉은 삼면의 바다에서 솟아오른 한반도 중심.

빙하가 녹아 저지대가 3면의 바다로 변한 한반도.
지금의 동해 서해 남해 해안선은 7천년 전에 형성.
지리산 자락에 살던 조상에게 천왕봉은 신앙의 대상.

대홍수가 세상을 삼킬 때마다
천왕봉은 구세주와 같은 존재.

아사달 도읍지에서 대홍수 때 묘향산으로 대피한 단군.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대홍수의 천재지변을 많이 겪은 듯.
천왕봉 정상 서쪽 암벽에는 '천주'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온 공터가 옛 성모사 터.

그 아래 철창이 설치된 곳이 옛 반 토굴식 석조산장 터.
예전에 천왕봉의 성모사 자리에는 성모상 유적이 있었다.
지리산신으로 섬겨왔으나 1960년대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점필재의 유두류록 및 김일손의 속유두류록 속의 성모상.'
흰옷을 입고 얼굴 눈썹에 분칠하고 머리를 쪽진 고운 얼굴.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성모사가 극성스러운 풍기문란 장소.
치성드리던 남녀끼리 추위를 못견뎌 성모사 바위틈에서 포옹.
극성스러운 그곳 풍기문란을 막으려 천연선사가 불태운 성모사.

그당시 무당을 비롯한 백성들까지 생업을 버려두고 기도에 전념
성모상을 찾는 인파때문에 미신 타파를 위해 성모상을 부셨단다.
이조시대에는 마고와 마야 두 신위를 모시고 제석봉에서의 제사.

1908년 11월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1969년 4월 20일에 부활
곡우절에 화엄사에서 구례 군민들이 해마다 성대한 지리산 남악제.
1969년 화엄사 지장암 옆에 세운 남악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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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의 성모상은 언제 어디로 사라진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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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뢍봉을 찾던 이들은 사라진 성모상에 대해 궁금해 했다.
아직도 성모상은 토탬신앙으로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여, 중산리 주민들이 앞장서서 사라진 성모상을 찾아냈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던 성모상은 중산리 가까운 곳에 있었다.

중산마을 뒤 천왕사 혜범스님이 천왕 성모상을 천왕사에 안치.
천왕봉을 신성시하는 주민들과 법적공방 끝에 원위치 할 움직임.
그러나, 또 다시 파손될 것을 우려, 현재 천왕사에 안치되어 있다.

천왕봉 정상은 일출을 감상하려는 많은 인파로 늘 몸살을 앓는다.
특히 정상 주변의 등산로는 그 여파로 인한 환경 훼손이 심각하다.
지리산 전설 모태이자 산실인 그곳이 소중히 지켜졌으면 하는 바램.

'옛부터 천왕봉 성모상에 관해 전해오는 전설.'

천왕성모와 백무동 스님과의 사랑 이야기는 <백무동 전설>.
마야부인과 반야 도사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반야봉 전설>.
두 전설 내용은 일부 다른 듯 해도...< 주인공들은 같은 인물>.

'천왕봉은 장장 1,621,5 km 백두대간의 시발점.'

백두대간은 백두산 장군봉에서 출발 원산 낭림산 거쳐 금강산.
태백산까지 내려와 소백산, 속리산을 거치고, 남쪽으로 추풍령
덕유산, 영취산, 백운산, 고남산, 정령치, 만복대, 삼도봉  천왕봉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천왕봉 정상 1m 높이 타원형 돌탑에 새겨진 문구.
행정구역상,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
천왕봉의 현주소 :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

천왕봉 일출은 동해안 일출 시간과 거의 비슷하다.
장터목 산장에서 70분 거리이면 천왕봉에 도착한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오르지 못한다는 통천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산사태가 일어난 아득한 벼랑과 마주치게 된다.
최근 제석봉 방향에서 중산리 방향으로 산사태가 일어났다.

칠선계곡 쪽인 천왕봉 북쪽에서도 역시 산사태가 있었다.
천왕봉 주변 일대가 산사태를 겪는 것은 급경사 지대인 탓.

자연적인 현상이라기보다 급증한 등산객들로 인해 자연훼손.
천왕봉이 무너지면 중산리 마을 전체가 폐허화될 우려가 있다.
천왕봉이 더 이상 무너지기 전에 대책을 강구해야만 할 듯 싶다.

한수 이남 한반도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지리산.

80 봉, 3도(전남 전북 경남), 5군(구례 남원 하동 산청 함양)
16개 면을 산자락에 거느리고 있기에 새해맞이 '일출의 명소'.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어 더욱 유명한 곳.

원시림이 우거질만큼 산세가 크고 깊고 넓은 환경자원의 보고.
고산식물 자생지이고 사향노루 반달곰 수달 천연기념물 서식처.
완만한 80 여 봉우리 사이로 수량이 풍부한 계곡이 발달된 산세.

지리산 자락에 현재 남아있는 사찰은 모두 11 군데 뿐이다.
이조시대의 엄격한 산림보호 정책 및 불교탄압의 결과이다.
하여, 오늘날까지도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것인지도 모른다.




성모사.




천지신명의 뜻을 전하는 신녀(神女)
또는 '태조의 어머니'가 성모(聖母)
새 나라를 창건한 왕의 어머니를 지칭

성모(聖母)를 모시는 사당이 성모사.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
'성모사'와도 관련이 있을듯.

........'마야 부인'의 전설.......
지리산의 수호신., '마야부인'.
그녀는 철마 2필과 사자 2 마리로
지리산 일대 잡신과 맹수들을 통솔.

마야부인은 신라왕 꿈에 나타나
지리산 천왕봉에 사당을 지어서
경주의 옥석으로 자기 상을 조각
그 사당에 모시라고 했다는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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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옥석이란 경주 남산에 돌을 뜻하는듯.

경주 남산(선도산)에 있는 성모사와 성모석상.

천왕봉 성모상은 경주 남산에서 유래된듯 싶다.

 

경주 남산(선도산) 성모사 뒤에 있는.. 마애불상(성모석상).

 

 

천왕봉 정상에 성모상이 안치되었던 곳이 성모사.
성모사는 우리나라 민중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곳.
남악사가 국가제사 터라면 성모사는 민중의 신앙 터.

그 출발점은 통일신라 시대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
성모상에 관한 최초 기록은 고려 이승휴의 <제왕운기>

①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설.
②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설.
③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설.
④마고의 여덟 딸 팔도무당 시조설.
⑤삼신 할머니 설이 그것이다.

성모상의 첫 번째 수난은 고려 말,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군이 지리산을 넘어 도망칠 때 분풀이

성모상의 목을 칼로 내리친 일.

그 다음으로는 1558년 음력 4월에 승려., 천연
성모상을 파괴하여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다.
천연의 행동은 성리학자들에게 칭송받을만한 일.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기대승과 남명까지 극구 칭송하였다.

천연은 성모상 파괴 이유를
다음 같은 요지로 설명했다.

“음탕한 말을 가지고서
성모에게 더럽힘을 더하는가.
무당들은 탐욕을 멋대로 하였소.

문둥이, 벙어리, 귀머거리가
다투어 와서 정성을 바쳤소.

저승이다, 이승이다,

난잡하기 그지없고 남녀의 외설도 많기도 하였소.
추잡함과 괴변 따위가 통속을 이루어 낱낱이 말하려니
입이 더럽소.” -(고봉선생 문집)에서 발췌 -

천연에 의해 파괴된 성모상은 곧 복구되었다.
민중들은 여전히 성모상을 산신령으로 믿었고,
성모상에 대한 신앙은 그들 삶의 중요한 부분.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사당을 부수고
성모상을 천왕봉 절벽 아래로 굴렸다.

다행이 산청에 사는 한 처녀의 도움으로
천왕봉 본연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된다.

1945년 11월 눈내리던 날 또 수난을 당한 성모상.
이불보와 가마니에 씌워지고 밧줄에 묶인 채 보쌈
다음해 가뭄이 들자 지리산 자락 마을 들에서 소동

마을 사람들은 보름동안 찾은 끝에
산청군 삼장면 내원골 농가에서 발견
그로부터 두달 뒤 천왕봉으로 돌아온다.

1972년 8월, 성모상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천왕봉에서 철야기도를 마친 어느 종교단체에 의해
우상이라는 이유로 두 동강이가 났다는 구구한 구전.

1987년 1월, 천왕사 스님이 꿈에 계시를 받아
진주 비봉산자락에서 성모상 머리부분을 찾고,
잘려진 몸통은 그해 5월 지리산통신골에서 발견

원형대로 봉합한 후 우여곡절 끝에
중산리 785번지 천왕사에 안치한 것.
높이 약 1.2m, 너비 50cm의 단아한 모습,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자세

기록에만 근거해도 천왕봉에서 천년 세월.
우리나라 민중의 소망과 함께 해온 성모상.
그것은 이념과 종교를 초월한 겨레의 상징물

- 2006. 8. 30. 경남일보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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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무당 무속신앙 근원지는 지리산 백무동
천왕성모가 8 딸을 보내 8도를 다스렸다는.. 무당
천왕성모가 백무동 무당의 시조이자, '당산 할머니'.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백무동이란 지명
백무동은 천왕봉 북사면 산자락의 음습한 위치.
풍수지리설로 본다면 음기가 천왕봉으로 뻗친 곳.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
옥황상제가 내려준 마야 부인
원시 민간신앙 대상, 당산할머니.

백무동 천방산 굴바위와 용류담에도
천왕봉에서 처럼 섬기어 왔던 성모상.
하여, 세 곳을 삼굴(三窟)이라 부른다.

용유담 성모상은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바둑두던 마적도사가 비가 오지 않는데도
개울물이 붉은 색을 띠며 불어 넘치는 광경.

개울을 거슬러 오르니 소피 보는 마고할미

마적도사는 그녀가 적당한 배필이라 여겼다.
하여, 같이 살며 아흔아홉 딸을 낳아 8도 무당.
백무당의 원조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백무동 계곡 건너편 천방산 굴바위.'

언제나 기도객들이 붐비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띈다.
얼굴에 분칠하고 머리에 고깔쓰고 한복입은 성모상
백년 전에 사라져 다시 만들었으나 최근 다시 도난

이조 말까지 성모에게 제사를 올릴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마을을 이루던 곳.
밥하고 소잡느라 솥과 그릇들이 널려 있던 곳.

밤이 깊어 기온이 떨어지면
남녀가 부둥켜 안고 체온유지
풍기문란이 심각했었다는 기록.

성모상은 굴바위와 용류담에서 먼저 자취를 감추었고,
마지막 남은 천왕봉 성모상은 온갖 수난 끝에 두 동강
현재 갈라진 두 몸통을 봉합해서 중산리 천왕사에 안치.

성모상이 천왕사로 옮겨진 과정은 석연치 않은 의문점

천년을 천왕봉에 있었으므로 제자리로 옮기는 것이 마땅.
제자리로 옮기면 언제 또 다시 도난당할지 모른다는 우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채 천왕사에 안치되어 있는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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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 촉촉이 내려 옷을 적시니
신모(神母)가 음기(陰機)를 맘대로 움직이는 것 일까?
마을마다 왁자지껄 제수(祭需)를 물리는데
태수는 오늘 아침 비를 얻어 돌아가네.' - 김종직. -

김종직의 두류록에 의하면,
천왕봉의 성모사 사당은 3칸,
엄천리(嚴川里)사람이 개창(改創)
판자집 밑에 못을 매우 든든하게 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흔들리기 때문.
두 중은 벽에 그림을 그려 붙였다.
성모는 석상으로 되었는데,
눈.눈썹.머리털 등이
완연하며 분을 발랐다.

이마에는 결진(缺盡)이 있는데
이것은 태조가 인월을 치던 해에
왜구들이 석상의 이마를 쳤다는 것.

동쪽 함석류(陷石류)에 소불(小佛)
이를 국사(國師)라고 호칭했다.
속설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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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사의 지붕옷이 모두 젖었다.
네 사람이 모두 사당 안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다시 두꺼운 솜옷을 ...
성모사 옆에서 흰 깃발이 남쪽 을 가리키며 나부꼈는데, ...'

- 유두류록에서 발췌 -

1472년 8월 15일(추석)에 점필제가 잠을 잤던 곳.
1489년 천왕봉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의 기록.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안 너와집에 성모상 석상이 안치된 성모사.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허물어진 뒤
오늘날까지 노천암대만 처량하게 남아
수십년간 성모상은 노지에서 보낸 처지.

오늘날 천왕봉은 나무도 자랄 수 없는 황량한 바위숲.
아직도 큰 바위 틈에서 샘물을 빚어내는 자연의 오묘함.
천왕봉 정상 바로 아래 천왕샘(법계사에서 천왕봉 방향).

천왕샘 주변엔 가끔 수북히 쌓인 쓰레기가 있어 안타깝다.
5백년전 대자연 풍류를 노래하고 호연지기를 키웠던 선조들.
그들이 쓴 지리산 산행기에 천왕봉 정상은 참 아름다웠던 곳.

천하제 1 경이라는 천왕일출과 석양낙조를 빚어내는 천왕봉
3대에 걸쳐 적선하지 않으면 일출 감상을 허락 않는다는 곳.
그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오를 수 있는 천왕봉.

천왕봉은 동쪽으로 개천문(일명 개선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
천왕봉은 경건한 마음으로 두 관문을 거쳐야만 오를 수 있던 곳.
두 관문 외 천왕봉 가는 길은 치밭목산장에서 중봉 거쳐 오르는 길.

개천문은 법계사 거쳐 천왕봉 가다보면 좌우 두 개의 바위기둥
한쪽은 벼락을 맞아 없어졌는데 하늘을 여는 문이라 하여 개천문
개선문으로도 알려졌고 천왕봉에서 눈이 오면 이곳은 비가 내린다.

통천문은 장터목 산장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마지막 관문
통천문은 천연 암굴로 철사다리를 이용해야 오를 수 있다.

통천문 위용은 시인 고은이 말에서 더욱 절정을 이룬다.
'신선들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다른 산에서는 자유롭지만
지리산에선 통천문을 거치지않고는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

신선 조차도 이 관문을 거쳐야 할 정도이니
인간은 마음을 가다듬어야 오를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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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에는 천왕봉 성모상에 관한 기록.

천왕봉 향적사에 모신 성모상 여주인공은 위숙왕후.
성모상은 옛부터 한반도 민간신앙 표상으로 자리매김.
그 탓에 고려 이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수난.

성모상이 언제부터 천왕봉에 모셔졌는지 알 수 없다.
대략, 천년 전 통일신라시대 말 또는 고려시대로 본다.
현재 성모상은 원나라 지배를 받았던 고려 말 작품인 듯.

지리산의 성모는 고대국가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
불교와 도교, 무속적 해석 등 다양하게 인식되고 있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설과 고려 태조 어머니 설은
각각 신라와 고려의 정통성과 신성함을 세울 목적

마야부인설은 불교 입장, 팔도 무당설은 무속 입장,
삼신할머니 설은 도교에서 성모상의 이름을 빌린 것
따라서, 때로는 성모상이 수난의 대상인 적도 있었다.

첫번째 수난은 고려 1187년 성모상 머리가 없어진 일
놀란 왕이 사람들을 보내 몇 개월만에 되찾았다 한다.

그후 고려 고종 때 벼슬을 지낸 권경중이 남긴 말.
"남녘 명산을 지키는 성모상은 그 지역 백성의 주체.
그 머리가 없어진 것은 조정에 부정한 뜻을 품은 자 탓."

고려말 이성계에 의해 운봉 황산에서 궤멸한 왜구 잔당
천왕성모 상을 칼로 내리쳐 가슴 부분에 상처가 난 흔적
유교가 정착된 이조시대에는 성모상의 수난이 더 심했다.

1558년 음력 4월 천연이라는 승려에 의한 수난사.
성모상과 성모사를 부순 다음에 불을 놓아 태웠다.
이곳이 극성 기도객 남녀의 풍기문란장소로 변한 탓.

시시각각 변하는 그곳 추위에 떨던 남녀 기도객들.
낯선 남녀 간에 얼어죽지 않으려고 바위틈마다 포옹.
추위를 이기려고 서로 부둥켜 안고 체온을 나누었던듯.

'이조시대 고루한 유교관도 추위 앞에 헛 것.'

한여름 더위에도 천왕봉 정상은 추워서 못견디는 곳.
별 준비없이 올라온 기도객끼리 포옹은 어쩔 수 없는 일.
추위에 시달리다 보면, 낯선 사람의 체온이라도 절실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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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옷차림으로 천왕봉 추위를 견디기는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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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는 추운줄 몰라도 새벽녁에는 못견딜 추위.
남녀노소 양반 상민 가리지 않고 부둥켜 안았을 듯.
남녀 구분없이 허리춤 속 체온에 언 손도 녹였을 듯.

'예나 지금이나 남성보다 많은 여성 기도객들.'

천왕봉 추위와 바람을 피해 바위틈마다 포옹한 남녀.
특히, 성모사 안은 남녀 기도객들 간에 풍기문란 심각.
결국, 성모사 민간신앙은 무속행위와 풍기문란의 원인.

당시 이조시대에 사회 문제로 대두될 만큼 심각했던 듯.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더욱 땅에 떨어진 이조의 성윤리.
무속 행위와 풍기 문란을 근절하려 사당을 부순 천연 승려.

그당시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와 남명 등등 유림.
천연의 용기있는 행위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성리학자들의 시각으로 볼 때 성모상은 한낱 무속행위.

그러나, 그 성모상을 마을 주민들이 다시 찾아내
사당을 만들고 예전처럼 제사를 올린 일반 민중들.
여전히 성모상을 영험한 지리산 산신령으로 믿은 듯.

'그당시 이조 민중들에게 성모상은 삶의 일부.'

일제 때 일본인들이 사당을 부수고 성모상을 절벽아래로
굴렸으나 다행히 산청 처녀가 찾아 천왕봉에 다시 모셨다
1945년 11월 성모상은 보쌈 당했다가 그 해에 다시 제자리

1972년 5월 특정 종교인들이 성모상을 훼손하는 수난사.
1972년 실종된 성모상은 1987년 혜범 스님이 다시 찾는다.
몸통과 머리를 각각 통천골과 진주 비봉산 근처에서 발견.
머리와 몸통을 봉합한 뒤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 놓고있다.

1991년 12월 23일 경남민속자료 14호로 지정된 성모상.
다시 천왕봉에 모셔야 한다며 혜범 스님과 법적인 공방전.
산악인들은 천왕봉에 쇠철책까지 만들어 성모상 복원을 시도.
혜범스님은 또 어떤 수난을 당할지 모른다며 그냥 모시고 있다.

하여, 현재 성모사는 옛 터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성모사는 선현들 유두류람 기록 속에만 남아있다.

'유두류록 속 성모상은 쪽진 머리에 분칠한 얼굴.'

성모상은 고려가 원나라 속국일 때 제작된 듯 보인다.
쪽진 머리 모양은 원나라에서 유래된 풍습이기 때문이다.
성모상의 모델은 고려를 창건했던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

위숙왕후를 신격화 하려는 의도였던듯.
고려의 기반을 확고히 하려 했던 목적.

당시 원나라 라마교는 티벳 몽골 네팔에 퍼진 불교의 분파.
라마교에서 '라마'는 덕이 깊은 승려 혹은 스승을 의미한다.
달라이는 큰 바다란 뜻이므로 <'달라이 라마'= 바다 같은 스승>.

13세기 경 티벳에서 몽골로 전해진 라마교는 원나라 왕실 종교.
징기스칸이 티벳을 점령후 티벳 승려 ‘파스파’를 왕실에 초청
그후 몽골 승려는 특권층에 속할 정도로 귀한 신분를 보장받았다.

징기스칸 당시 라마교의 사원은 정복국의 높은 산마다 세워진다.
그러나, 훗날 원나라는 라마교의 득세에 따라 국가 경제는 파탄.
결국 원나라 속국이던던 고려도 원나라처럼 쇠퇴의 길을 걷는다.

천년제국을 꿈꾼 원나라 패망 이유 중 하나는 초야권 풍습.
결혼식 전에 신부는 고매한 라마승에게 순결을 바쳤던 관습
당시 몽골은 어린 신부에게 행해졌던 실질적인 성교육 풍습

몽골 에르덴조 사원의 지붕을 지키고 있는 용머리 모습.
우리나라 용머리에 비해 투박하지만, 그 위용은 뛰어나다.
잡귀 잡신을 물리치는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듯 하다.

용은 원기왕성하고도 강력한 남성의 힘을 상징한다.
전사의 숫자가 국력이었던 징기스칸 유목민들의 신앙.
남녀 간 성적 결합도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중요한 관문.
하여, 불상의 형태에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유두류록을 보면, 위숙왕후와 엄천국사의 로맨스 전설.
이조시대 유교 관념에 젖은 점필재는 불륜 관계로 단정
고려시대의 불교적인 관념으로 보면 신성한 라마교 의식.

'위숙왕후와 엄천국사 전설은 라마교 초야권 의식.'

한반도에 원나라의 초야권 관습이 성행한 시점은 고려말.
천왕봉에 현재의 성모상을 안치한 시점은 고려 말로 추정.
천왕봉에 성모사를 지은 시기도 원나라 지배 하 고려시대.

원나라는 고려 함대를 빌려 두차례 왜 정벌을 시도한다.
그러나, 두 차례 모두 폭풍을 만나 왜 정벌을 실패한다.
하여, 고려 때 천왕봉 성모상은 왜구에게 수난을 겪는다.

왜는 침공한 원나라보다 거기에 협조한 고려가 미웠던 탓.
천왕봉 성모상 얼굴에 칼질을 하여 분불이를 했던 것 같다.

성모사가 언제부터 천왕봉에 있었는지는 기록 상에 없다.
그러나, 가락국 또는 신라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도 추정.
성모사 터는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근원지이자 불교의 성지.

................석모석상의 모습....................
1973년 8월 초 천왕봉 서쪽에 합장한 모습의 성모상
그 오른편에 높이 1,1m 크기의 여신상이 새겨진 바위.
1959년 천왕봉 성모석상 & 마애불(사진작가 김결렬 作)
1962년 천왕봉 산막의 김순용 옹과 성모석상 & 마애불

가부좌한듯 다소곳이 앉아 합장한 자그마한 석상

몸집에 비해 얼굴이 크지만 어머니 같은 인자한 얼굴.
움푹 들어간 눈, 햇볕에 눈이 시린듯 눈가에 배인 웃음
오뚝한 콧날, 오므리고 있는 작은 입, 그 언저리에 미소.

쑥색 바탕에 흰점 석질은 보기 힘든 희귀석이다.
천축국 또는 파미르고원이 원산지인 것으로 추정

1945년 11월 어느날 삼장면 내원리 한 농부에 의해
짚가마니와 새끼줄에 묶여 산 아래로 끌어내려왔다.

성모석상을 보쌈 형태로 끌어내려 자기 집에 보관 중
성모상을 찾아 나선 사람들에 의해 발견이 되었을 때,
농부는 꿈에 나타난 성모가 옮겨달라 간청했다고 변명

그로부터 두어 달 후 성모석상은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후 좌측 마애불여신상과 함께 73년 8월 사라진 성모상

전국 무당집 서낭당 산신각 등에 철거령이 내려졌던 즈음
성모석상 증발은 관청에서 행해진 것인지 모른다고도 소문.

1987년 1월17일 천왕사의 주지 스님이 꿈의 계시를 받고
진주 비봉산 어느 과수원 장작더미에서 찾아낸 머리부분
오른쪽 어깨 밑으로 잘려진 몸통은 그해 통신골에서 발견.

지금의 자리에 모신 성모상이 16일 만에 또 없어졌으나
그해 7월17일 절 앞쪽 대나무 숲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2000년 8월 지역주민 모임 두류산악회에서 중산리에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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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간신앙의 근원지는 지리산 천왕봉.
천왕성모의 여덟 딸이 8도의 무당이라는 전설.
천왕성모 전설의 시대적 배경은 이조시대 후반.

한반도에서 무속신앙이 가장 성행했던 이조시대.
한반도를 행정상 8도로 구분했던 시기도 이조시대.
성모상을 무당의 시조 할머니로 모신 성모사(聖母祠)

백여명 무당이 들끓던 동네라 하여 백무동(百巫洞)

성모사 성모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
또는 옥황상제가 내려준 마야부인이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자연발생적 민간 무속신앙 형태

고려시대에는 위숙왕후 설,
신라시대에는 마야부인 설.
이조시대에는 마고 할미 설.

이조시대에 만연한 성모상의 전설에 관해 알아보자.
성모상은 백무동의 천방산 굴바위와 용류담에도 있다.
하여, 천왕봉, 백무동, 용류담을 삼굴(三窟)이라 한다.

.............용류담 성모상에 관한 전설................
어느날 바둑을 두던 마적도사가 비가 오지 않는데도
개울이 붉은 색을 띠며 불어나는 신기한 현상을 본다.
그 개울을 따라가보니 마고할미가 소피를 보고 있었다.

이만하면 배필이 될 만하다 싶어 같이 살며
낳은 아흔아홉 딸이 8도 무당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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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 딸은 하동지역 무당의 원조인듯.
원래, 옛부터 동아시아 뱃길을 오간 무역상.
무사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무당들이 많았던듯.

원래, 마천은 지리산 북쪽 관문을 일컫던 지명
행정구역으로는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중심 일대
마천은 전라도 남원사람들은 '당벌장터'라 불렀다.

경상도 사람들은 좀 억세게 불러왔던.. 땅뻘.'
원래, 지리산 산신당이 있어 마천은 ..당마을'

지리산 정상 천왕봉 성모사에는 성모상.
지리산 일대 산신당 당마을 무당의 원조.
고려시대에 만든 성모상 모델은 위숙왕후.

성모상은 한반도 민속신앙의 상징적 존재.
백년 전에 한번 도난당한 사건이 있은 후
다시 꼭같은 모습으로 만들었으나 또 도난.

성모에게 제사올린 무당들이 들끓던 이조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마을을 이루었던 백무동.
밥해주고 소잡느라 솥과 그릇들이 널려 있었던 동네.

백무동에서 밤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남녀가 부둥켜 안고 체온을 유지했던 곳.
그당시 풍기문란이 문제됐던 기록도 있다.

성모상은 굴바위와 용류담에서 먼저 자취를 감추었고,
마지막 천왕봉 석상은 온갖 수난 끝에 두 동강 난 몸통
현재, 다시 봉합되어 중산리 천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성모상이 천왕사로 옮겨진 과정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성모상은 원래 있었던 천왕봉으로 옮겨야 한다는 현지 주민.
이 사건으로 인해 재판이 벌어질 만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동바위.



<하동 바위>는 장터목 거쳐 천왕봉 오르는 들머리.
마천사람들이 물물교환하려고 장터목 오르던 옛길.
옛날에 하동 군수가 떨어져 죽었다 하여...<하동바위>
그만큼 주변경치에 넋 잃고 실족할 정도로 조망 좋은 곳.

<하동바위> 이름에는 또 다른 유래가 전해 내려온다.
예전에 1년에 한번 큰 장이 열렸던 장터목(해발 1750m)
남쪽 사람들은 덕산-중산리-장터목 또는 화개-세석-장터목
북쪽사람들은 마천-백무동-하동바위-장터목 길을 이용했다.

장터목 장날에 북쪽 사람들이 가던 길목에 서있는.. '하동바위'
행정구역상 함양군인데도 바위 이름이 산 너머 하동군의 지명.

백무동 마을에서 한신계곡으로 가는 길목 초입에서 왼쪽 2Km 거리.
함양 원님과 하동 원님이 우연히 이곳에서 만나 장기 한판을 두었다.
산상의 내기 장기는 차, 포 양수겹장을 부른 하동 원님이 이겨 끝났다.

내기 장기에 진 함양 원님은 농담 삼아 이곳 바위를 가져 가라고 했고
하동원님은 고맙다며 그 자리에서 이 바위를 하동바위라고 이름 붙였다.
하여, 함양에 있으면서도..그 산 너머 하동바위가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지리산 주능선의 동쪽 끝에는 산청
지리산 주능선의 서쪽 끝에는 구례.

산청 동쪽에 합천이 있고 북쪽에 함양.
산청 남쪽으로 사천이 있고 통영이 있다.

구례 서쪽에 화순이 있고, 북쪽은 남원
구례 남쪽에 순천. 광양, 여수가 나란히.
지리산 남쪽 광양과 진주 그 사이에 하동

지리산 주능선에 가로막힌.. 함양과 하동.

하동바위는 함양과 하동의 밀접한 관계를 대변.
가락국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역사적으로 친밀.
함양, 산청, 진주, 사천, 하동은 동일 생활권역.

'남원 구례 순천 광양 여수가 동일 생활권 이듯.'
             
백무동 하동바위는 천왕봉 등반 최단 들머리.
백무동 -하동바위 - 장터목 - 제석봉 - 천왕봉.
백무동 - 장터목 - 중산리는 함양과 하동 교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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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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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성모의 8딸 가운데 셋째 딸이 하동에 정착
그후 백무당을 배출했다는 '전설의 고향' 하동
전설로 풀이하면, 100 여 소국들이 일어났던 곳.

'고대 무당은 군주 버금가는 권력자.'

지금부터 전설따라 하동으로 가 보자.
섬진강, 순창에서 하동포구까지 80리.
무심한 강물에 생명이 넘쳐 흐르는듯.

강섶엔 계란꽃, 토끼풀꽃, 자운영꽃 등
낯익은 꽃들과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난다.
물총새가 피라미 낚아채는 묘기도 볼 수 있다.

오줌을 찍찍 갈기며 “나 죽네!” 내빼는 개구리
그뒤에 혀를 날름거리며 치닫는 꽃뱀이 있게 마련.

섬진강에서도 약동하는 생명감이 가장 충만한 구간은
전북 순창 동계면 싸릿재마을 장군목에서 하동포구까지.
장군목과 하동포구는 윗단과 아랫단을 잇는 풍치 지구.

장군목은 섬진강 상류 주변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하는 천담리,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인 구담리가 바로 위다.

장군목은 주변 회문산 등지의 물을 세찬 물을 받아
늘 풍부한 수량에 패인 바위 무늬가 별천지를 이룬다.

여기에 2톤 규모 덩치의 요강바위란 것도 있다.
어른이 들어가서 있을 정도 큰 구멍이 파져있다.
요강바위는 무량산에서 회문산 가는 빨치산 비트.

빨치산들이 다섯명 정도 구멍 안에 들어가
덮개바위를 얹으면 토벌대가 그냥 지나간 곳.
이렇게 큰 바위를 몇년전 누가 실어가 버렸는데
나중에 경기도 곤지암 근처에서 발견해 찾아왔다.

장군목은 강 양쪽 기산과 용골산 기슭이 온통 밤나무밭
장군목이 있는 순창 동계 싸릿재와 적성면 일대는 적성강
적성강은 그 아랫녘 곡성 옥과쪽을 지나면서 순자강이 된다.

순자강이 곡성읍을 빠져나가는 대목에 섬진강 첫나루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줄나루인 호곡나루가 있다.

호곡나루터 주변은 늘 나룻배가 떠다닐 만큼
수위를 유지하려 강바닥에 보를 쌓아 놓았다.
그 보 위로 물살은 언제나 "쏴"하면서 흐른다.

섬진강에서 두번째로 아름답다는 피아골나루.
길고 긴 피아골 물줄기가 내려오는 물목인 곳.
그 아래 몇해전 없어졌다가 다시 연 화개나루.

언제 또 다시 줄을 걷어들이지 모를 운명.

바로 옆에 남도대교(358미터)가 놓여 개통된 탓.
남도대교로 강 기운이 잘린듯 보여지는.. 섬진강
하동 송림숲 앞 ‘하동포구 80리’물길이 열리는 곳.

민물 참게와 바다 꽃게가 함께 잡히는 곳.

하동포구엔 재첩을 잡는 쪽배들과 남해 통통배들
건너편 높은 강마루 모퉁이에 '산마루 그리워’찻집
마당 귀퉁이에서 하동포구 정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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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 전 옛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는듯한 섬진강.
섬진강 변 하동 포구는 한반도 선진문명의 발상지.
하동 포구는 중국과 왜를 잇는 옛 해상 무역의 길목.

동아시아 선진문명이 한반도로 유입된..하동 포구.
가야국은 하동포구를 장악하며 급성장하게 되었고
백제에 하동포구를 빼앗긴 후 쇠퇴의 길을 걷는다.

삼국시대 하동 포구는 동아시아 국제무역 요충지.

 

 

 

참샘.(맑은 물).

 

 

 

하동바위를 지나 몇 백미터만 더 올라 가면 참샘이 있다.

“참” 이란 진짜, 먹을 수 있다는 의미가 있는 접두사이다.

백무동에서 장터목 방향으로  2.4km 오르면,  나오는 샘

 

백무동에서 장터목 가면 이곳에서 반드시 물을 채워야 한다.

참샘을 지나치면, 장터목까지 식수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샘 지나 약 3시간  더 산행을 하면 장터목 대피소가 나온다.

 

백무동에서  2km 오르면 계곡 철다리 앞., 하동바위.

 

천왕봉 일출 코스 = 백무동-장터목-천왕봉-중산리

<천왕봉 일출> 산행 들머리는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 
국립공원은 일출 2시간전, 일몰 2시간 전까지 입산 가능

 

장터목은 옛부터 닷새에 한번씩 물물교환을 위한 장터.

옛날 산청 시천 주민들과 함양 마천주민들이 만나는 곳.

하여, 장터목은 옛부터 반드시 1박을 해야하는 장소였다.


1971년 지리산에서 처음 이곳에 세워진., ‘지리산산장’

 

1986년에 재 건축하여 ‘장터목산장’이라 개명하였으며

지금의 대피소는 1997년에 다시 건축하여 150명을 수용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 1시간 걸려 일출 감상에 안성맞춤.





백무동.




백무동은 상백무 중백무 하백무 세 마을이 들어선 계곡.
백무(百巫)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백무동은 무당골이다.

어떤 사람은 백무(百霧)로 받아들여 안개골이라 하고
행정 지명은 무사 무(武)를 써 百武, 무사골이라 한다.
백무동은 어떻게 불리우든 받아들이든지 다 일리가 있다.

백무에 이르는 길가에 즐비한 굿당들.
굿당에서 버려지는 돼지머리 같은 제물
제수로 하천이 오염될 만큼 백무동은 당골.

백무에서 세석으로 오르기 전날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도정마을.

하천이 쉬엄 쉬엄 흐르기에 휴천,
말처럼 하천이 재빨리 흘러 마천
휴천에서 마천으로 흐르면서 급류.

그 급류 용틀임 위에 피어오르는 백무.
짙은 안개를 뜻하기도 하는., 백무(百霧)

백무동은 유민(流民)들의 피난처이다.
곰실로 불리기도 하는 인근 웅곡마을,
감나무골로 불리는 시곡마을이 그렇다.

'임진왜란 유민들의 정착 마을들.'

'百巫면 어떻고 百霧면 어떠하리
百武면 어떻고 당골인들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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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까지 최단거리로 올라갈 수 있는 들머리 깃점.
천왕봉에서 최단시간 하산길로 가장 각광 받는 백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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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는 상백무, 중백무, 하백무
도촌, 송알, 강청 등등 여러 마을을 합친 행정 명칭이다.
강청리란 명칭은 몰라도 백무동은 대부분 사람들이 안다.

북쪽 지리산 관문, 60년대 인월, 70년대 가흥리, 요즘 백무동.
동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백무동 직행버스를 타면 편하다.
2004.6.18 순환도로 개통 후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이 늘고 있다.

백무동은 교통이 불편하던 옛날에도 많은 기도객들이 붐비는 곳
전국 무당들이 '천왕성모'를 떠받들고 있는 전설의 고향..'百巫洞'
百巫洞은 지리산의 천왕성모가 모계사회의 중심세력 임을 상징한다.

'100 무당이 배출되었다는 뜻의 지명이.. 백무동.'

<1790년 '이동향' 방장유록>을 보면 백무당이라 했다.
이조시대에는 지명이 백무당이었고 무당이 많았던 고장.
<지리산 이야기 - 열 다섯.> 4월 18일 본문을 참조 바람.

전세계 7만기 고인돌 중 3만기가 한반도에 밀집되어 있는 수수께끼.
한반도에서도 지리산 천왕봉을 중심으로 밀집되어 있는 고인돌 군락.
백무동(百巫洞)이란 지명은 고인돌 군락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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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 창조설화 교육제도 사법제도 등은
수메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뮤엘 크레머 교수.
그 수메르 문명 발원지는 '한반도'라고 주장한다.

'수메르(메소포타미아) -> 에게(터키) -> 그리스.'

수메르인들이 살던 지역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2 강 사이란 뜻.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에덴동산(딜문동산)도 바로 이 2 강 사이의 지역
대동강 문명은 메소포타미아보다 더 오래 된 문명.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 모여든 수메르인
그 뜻은 '검은 머리카락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당시 선진문화를 갖고 왔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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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인'은 어디에서 메소포타미아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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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겨져 있다.
나일강 유역 이집트문명도 수메르보다 1000년 낙후.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 문명도 그와 비슷한 후기 문명.

히브리(이스라엘)인들은 'Habiru'(떠돌이, 산적)란 뜻.
수메르인이 설형문자를 쓸 때 히브리인은 문자도 없었고
옷이란 겨우 동물 가죽을 벗겨 입고 다닐 정도로 미개했다.

그러나, 수메르인들은 이미 옷 만드는 기술을 발견
이미 옷감을 짜서 옷을 만들고 염색하여 입고 다녔다.
2층 집을 지은 건축술과 상거래를 위한 계약문서 사용.

1830년대 이라크에서 수메르 문자 발견.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단체는 기독교 국가.
에덴동산을 팔레스타인 지역이라 여겼던 탓.

그런데, 창세기의 창조설화와 홍수 설화 등등
수메르 토판 속에 그 원형이 기록돼 있기 때문.

에덴동산에 남자와 여자가 있었고,
동산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금기,
그런데 남자가 먼저 따먹는다는 기록.

그리고 대홍수로 사람들이 다 죽는데
지아슈드가 배를 만들어 사람들을 구조
성서와 유사한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메르는 히브리(이스라엘)를 미개 문화로 분류.
서양은 그리스의 합리성과 히브리의 감성 두 줄기
두 줄기는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부터 비롯된 문화.

기원전 2000년경 슈메르 문명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그리스 올림프스 신전은 수메르 '딜문 동산'에서 유래
히브리인의 정신적 유산은 수메르인으로부터 비롯된 것.

그렇다면, 수메르인들은 과연 어디서 왔을까?

그 유래를 파헤칠 단서는 그들이 남긴 문자이다.
언어의 특징, 문법 구조, 유사한 단어, 특히 숫자.
수메르어는 우리나라 말과 거의 완벽하게 유사하다.
마치, 한뿌리인 영어, 독어, 프랑스어, 인도어 처럼.

우리말은 주어 목적어 다음에 '은, 는, 이, 가' 토씨
이는 중국어, 인도어와 다른 '우랄 알타이 언어' 특성.
수메르어 문법 구조는 '주어+목적어+동사'로 구성된다.

언어 이외에 수메르 문화의 특징은 벽돌로 쌓은 인조 탑.
물론, 피라밋의 유래이며, 구약성서의 바벨탑의 전신이다.
고고학자들은 터키 몽고에서 수메르 유적을 찾아내고 있다.

고대 한반도 문명은 몽고 티벳 수메르 등 세계로 전파.
수메르 문명은 터키 지역으로 전해져 에게문명을 이룬다.
몽고 수메르 유적은 만주로부터 유입된 사람들이 남긴 것.

고대 한반도에는 12개 나라로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 '수밀리'가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수메르 문명
고대 한반도에서 일부 나라가 몽고에 선진문명 전파.

'수밀리' 란 '소머리'라는 말을 한문으로 옮겨쓴 것.
만주에 소머리강 즉, 牛首河(우수하)가 지금도 있다.
고조선 뒤를 이은 부여의 5대 가문 우씨 가문(牛家).
즉, 중국 고대국가 하나라를 창건한 '소 집안'이란 뜻.

기원전 3500년경 찬란한 문명을 가지고 있던 수메르.
묘장, 순장제도, 60진법, 최고 지도자의 상징을 봉황.
고대 우리나라 문명과의 유사성은 앞으로 연구의 대상.

메소포타미아는 구석기시대 동서양 문명의 합류점.

고인돌 유적은 수메르인의 이동 경로를 말해주는 듯.
수메르인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전부터 선진 문명국.
한반도는 구석기시대의 선진 문명국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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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전세계 모계사회 근원지는 지리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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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어머니의 모성애는 세계 제일이다.
우리나라 여성은 세계 각 전문 분야에서 두각.
신석기시대 모계사회에서 비롯된 저력이 아닐까?

또 다른 이름으로는 '안개가 많은 마을'이란 의미로 ' 백무(白霧)동 '
백무동(白武洞)이란 주장도 있지만 '전설의 고향' '百巫洞'이 압도적.

옛부터 백무동은 하동군(김해일대)과 밀접한 생활권역.
'천왕성모의 전설'은 그 사실을 더욱 실감나게 뒷밭침.

.......................천왕성모의 전설........................
'천왕봉의 전설' 천왕성모는 백무동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백무동에 살면서 그 고장 사람들을 돌봐 주었고,
그 고장사람들은 늘 천왕성모를 하늘처럼 우러러 모셨다.
그 무렵 한 스님이 수도를 하기 위해 지리산에 입산하였다.
그 스님은 깊은 동굴 속에서 좌선과 수도를 몇 년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동굴을 나와 산길을 걷다가 길을 잃었다.
스님은 바위에 털석 주저앉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사람들 소원을 잘 들어주는 천왕성모에게 길을 찾아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스님 앞에 나타난 복사꽃 뺨에 반달 눈썹의 처녀.
앵두같은 입술로 말을 걸어온 처녀와 놀란 스님과의 대화.

"어떻게 하다 길을 잃으셨어요? 나를 따라 오십시요."
"누구십니까?"



"천왕입니다."
"...???........."



이제까지 천왕성모를 주름투성이 할머니로 알았던 스님.
막상 어여쁜 처녀가 천왕성모라기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스님을 동굴까지 인도한 처녀 천왕성모는 스님에게 말했다.

"여기가 스님이 거주하는 곳이 맞지요.
저는 여기서 멀지 않은 백무동에 살아요."

그 처녀가 돌아간 후부터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잃었던 스님.
오직 그 처녀 만 보고 싶었고, 천왕성모와 결혼 하는 것이 소원.
하여 스님은 천왕성모에게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스님의 간절한 청혼을 받은 천왕성모는 스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 후 스님과 천왕성모는 백무동에 함께 살며 딸만 여덟을 낳았다.
8 딸은 모두 무당이 되어 조선팔도로 보내졌고, 각각 터전을 잡았다.

그 중 셋째 딸은 벽소령 넘어 청학동 삼신봉 거쳐 하동에 정착.
그후부터 지금까지 하동에선 함양 마천 백무동까지 가지 않는다.

하동에서는 셋째 딸 무당을 찾아갔기에
무당이 하나 둘 늘어 그후 무려 백 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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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성모 전설에 관한 해설...................
우리나라가 8도 강산으로 불리우는 유래가 된 전설.
'천왕성모의 전설'은 지리산 전설의 핵심적인 골격.
단군신화와는 다른 한반도 민족 지도자에 관한 전설.

이 전설을 보면 우리나라 부족국가의 출발점은 백무동.
전설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전설.
한반도 불교 전파 경로는 곧 한반도 일부 민족이동을 의미.

단군신화는 한반도 민족의 이동경로를 북에서 남으로 본다.
천왕성모의 전설은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를 남에서 북으로
아울러, 한반도 민족이 모계사회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한반도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지.'

특히, 지리산 일대의 고인돌 분포 현황은 전세계에서 1 위.
전세계 고인돌 7만기 중에서 한반도의 고인돌은 3만 기이다.
그러므로, 단군신화와 상반되는 '천왕성모의 전설'이 흥미롭다.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월마천 산자락의 백무동.
산마을 백무동은 항상 백 사람의 무당이 있다 하여 백무.
백무동은 천왕성모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전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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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성모의 전설 속 무당은 오늘날 무당과 신분이 다르다.
무당의 어원을 이루는 무(巫)는 '샤먼(巫)'.. 제사장이란 뜻.
알타이어 계통의 몽골어·만주어 샤먼((巫)에서 비롯된 말이다.
모계사회에서 토템신앙과 정치를 함께 이끄는 지배자란 뜻이다.

하동에 백여명의 무당은 곧 하나의 국가를 의미.

역사상 하동 일대 고대국가는 가락국 연맹의 소국들.
가락국 이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삼한시대의 변한.
신라는 가락국과 평화합병 후 여세를 몰아 삼국을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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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는 가락국의 영역.
'천왕성모 전설'은 가락국 시대로부터의 전설 같다.
즉, 이 전설은 가락국 이전 신석기시대부터 전해온 듯.

고대국가 이전 모계사회에는 성모 신앙이 민간을 지배.
천왕성모의 8 딸이 팔도를 다스렸다면 한반도는 모계사회.
전설의 내용을 보면 모계사회의 진원지는 지리산 일대 같다.

'천왕성모는 민간신앙에서 마고할미와 같은 존재.'

마고할미는 신석기시대 모계사회부터 지리산 산신
우리 민족 신화에는 단군 신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반야봉은 마고 할미와 결혼한 반야가 불도를 닦은 곳.

우리나라 여러 명산에서는 마고 할미 전설이 발견된다.
환웅과 단군이 남성 천신이라면 마고 할미는 여성 산신

........5세기 신라 박제상作 '부도지(符都誌).......
지구를 생명이 있는 별로 만들기 위해 온 마고할미.
마고는 궁희와 소희를 낳고 율과 려를 맡아보게 한다.
궁희는 황궁, 청궁을 낳고 소희는 백소, 흑소를 낳는다.

이들은 마고성 천부(天符:하늘과 하나되는 이치)를 중심으로
율(律)과 려(呂), 음(音)과 향(響)을 맡아서 만물을 창조한다.

이들은 동서남북으로 흩어졌고 이것이 인류의 기원.
마고 할미가 살았다는 곳이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
마고는 사오천년 전 '토미리스’라는 모계사회 여신.

마고 신화는 바이칼, 캄차카, 남방 해양계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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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는 1만 4천년전 땅을 관장하는 생명의 여신 '우마이’
'우마이'는 몽골북부 바이칼 여성 무당인 '어마이,오마이’
파미르고원 마고 딸 자손 황궁씨(黃穹氏)와 유인씨(有因氏)
바이칼 호수로 이동한 발자취라고 추정할 수 있는 전설이다.

마고할미의 딸이 고대사회에서는 무당이 되고
통치자 무당은 고대국가에서 남성 제사장의 첩.
남성 제사장의 보호를 받기 위해 기생이 된 무당.

무당은 스스로 정절을 받쳐 통치하는 부족을 보호.
이조 및 구한말에는 기생 정치가 국가 운명을 좌우.
근대에 와서는 요정 밀실정치가 국가의 대사를 좌우.

고대국가 패전국 여성들은 승전국 관비로 전락.
전쟁으로 진 빚을 몸으로 때울 수 밖에 없던 탓.
전쟁이 유난히 잦았던 진주, 남원은 기생이 많다.

요정에서 인삼과 꿀은 빼놓을 수 없는.. 강장제 식품.
천왕성모의 영원한 젊음은 불로초 산삼을 복용한 때문.
하여, 지리산의 산삼과 토종꿀은 천왕성모 젊음의 비결.

천왕봉은 한반도 민족의 토속신앙 '천왕성모의 상징'.
하여, 오늘날까지도 지리산 일대에는 무당들이 많다.
앞날을 예언해 주고 진로까지 용하게 점쳐 주는 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