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7-가 ( 고려. 고려장. 고려 역사. 고려 성풍속. 원. )

donkyhote 2010. 5. 14. 01:38

고려.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는 고려 역사와 밀접한 곳.
천왕봉 성모사의 석상 주인공은 위숙왕후라는 설.
위숙왕후는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의 어머니.

오늘날까지 전세계에 '코레아'로 알려진 대한민국.
'코레아'는 '동아시아의 해상왕국'이었던 우리나라.
고려 시대를 전후로 한 당시 국제정세부터 살펴보자.

................국제정세..........................
'한반도 삼국시대 후기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수(隋)는 581 ~ 618까지 중국을 도탄에 빠뜨린 제국
581년, 북조 대승상 수왕(隋王)은 주왕 정제를 폐위
황제가 되어 국호를 ‘수(隋)’라고 개칭한 수 문제.

589년 남방 마지막 정권 진(陣)을 공격해 남북통일.
이로써 위진 이래 근 4백 년간의 분열 국면은 종결.

수 양제(隋煬帝)가 황위를 계승한 후에는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경(東京)을 건설
운하를 파고 양자강 남북 경제 문화교류를 진행

수는 문제로부터 수 양제 시기에 이르기까지
더욱 발전해 당나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정권.

수 양제는 서역 및 동남아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
수 양제 말년에 수나라의 영토는 대폭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수나라는 급속히 쇠락하게 되었다.

이는 수 문제 시대에 쌓였던 부가 급속히 소진되고,
수 문제 때 다진 정국이 양제 때 급박하게 요동친 탓.

수 양제는 큰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짧은 생애에 무력을 남용해 전쟁을 벌려,
세 번이나 강남의 도시들을 순행하였으며,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고,
거국적으로 큰 공사를 일으켜,
젊은이들을 병사로 동원했던 탓.

하여, 논밭이 황폐해져 수나라 전역에서 농민봉기.
수나라 지배층 내부 분열로 신속하게 정권이 와해.
급기야 618년, 이연은 수 공제 양유(陽侑)를 폐위
황제가 되어 당나라를 세우니 이로써 수나라는 멸망.


당(唐, 618 ~ 907)

이태백과 양귀비로 상징되는 중국 최고 전성기
당나라는 중국 봉건 사회에서 가장 강성한 시기.
건국 초기에 사회안정과 정치적 개명을 몹시 중시.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치세 당시엔 오곡이 풍성
백성이 안락한 생활을 누린 ‘정관의 치세’(貞觀之治)
현종(玄宗) 황제 이융기 치세에는 국력이 몹시 강성했다.

당은 위진(魏晋) 이래의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폐지
진일보 개선된 과거제를 시행해 정부 관리 시스템을 확립.
세금제도에 있어서 균전제(均田制)와 조용조(租庸調)를 실행

황무지의 개간과 농업 및 잠업(누에치기)을 장려
농업과 수공업이 모두 전대미문의 발전을 이루었다.

당의 문화와 과학 사업 역시 공전의 번영을 이뤘는데,
특히 시가(詩歌) 발전에 중국 고전의 최고봉으로 발전.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 중의 하나
주변 인접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당의 번영과 강성한 배후에는
심각한 내우외환이 잠복하고 있었으니,
이융기 집정 후기의 당조는 쇠퇴의 길.

755년 폭발한 8년간의 ‘안사(안록산과 사사명)의 난’

당나라의 국력을 전부 소진시켜 당나라는 재기불능
이후 헌종(憲宗)이 중흥을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875년 ‘황소(黃巢)의 반란’은 정권에 치명적 타격

당은 각 지역에서 일어난 군벌들에 의한 혼란과 전쟁
당은 이름만 존재하는 멸망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907년, 주온(朱溫)은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압박하여
제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새 정권을 수립해 당나라는 멸망.


오대십국(五代十國, 907 ~ 960)

안록산의 난에 의한 당나라의 멸망이후
송나라 건국 때까지 중국의 혼란기 시대.

당 말기, 중국 대륙 각지에 형성된 군벌호족 세력
907년, 당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주전충(朱全忠)
당 애제(唐哀帝)를 물러나게 한 뒤, 후량(後粱)을 건립

이로서 중국은 오대십국의 시대로 진입.

907년에서 960년까지 중국 황하 유역에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 다섯 왕조
역사에서는 이를 ‘오대(五代)’라고 칭한다.

이와 동시에 남방에서도
전촉(前蜀), 오(吳), 민(閩),
오월(吳越), 초(楚), 남한(南漢),
남평(南平), 후촉(後蜀), 남당(南唐)

아홉 개 군벌호족들이 할거해 수립한 정권들이 출현
여이게 산서 지역 북한(北漢)까지 합쳐.. 십국(十國)’

오대 십국은 중국이 위진남북조 이후 다시 분열과 혼란
백성들은 분열과 할거로 인해 초래된 여러 재난에 저항
중국은 거란족 침략과 약탈을 막기 위한 통일을 원했다.

979년, 북송이 다시 한 번 중국을 통일
오대십국 할거는 이로서 종말을 고했다.

오대십국 시대에 북방은 전쟁과 난리가 빈번
정국은 혼란스러웠을 때, 남방은 비교적 안정

중국의 경제중심은 황하에서 양자강 유역으로
농업, 수공업, 그리고 상업 등이 비교적 발달
중국의 해상무역 또한 상당한 번영을 이루었다.
..............................................

중국 수나라, 당나라와 밀접했던 신라.
그후 송나라와 밀접한 고려 시대 개막.

.............고려........................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일으켰고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일으켰고
936년 왕건이 후삼국 통일후 고려 창건.

통일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 삼국간 전쟁.

후삼국 중 해상무역 패권을 장악한 나라는 후백제.
후백제 견훤은 신라 무역항을 막고 중국과 직접교역
후삼국 중에서 가장 경제력이 막강한 나라로 추정된다.

후삼국 시대를 주도했던 3사람의 영웅.

궁예(?~918)

옛 고구려의 부흥을 내걸며 후고구려를 세웠다.
신라 왕족으로 정권다툼에 밀려나 어려서 승려
통일 신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 기반세력을 확장.

가원, 경기, 황해도 대부분과 평안, 충청도 일부를 점령
왕건으로 하여금 후백제 나주를 치게 하여 해상권을 장악.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고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칭하며
수많은 부하를 죽음에 몰아넣는 횡포를 부리다가 쫓겨나게 된다.


견훤(?-936)

900년 완산주(전주)에 입성하며 후백제를 세웠다.
신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혼란을 틈타 신라에 반기
고려와 잦은 싸움을 벌이며 고려를 괴롭혔던 후백제.

926년에는 통일신라의 도읍 금성을 점령하게 된다.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운 신라인 원한을 산다.
맏아들 신검과 왕위계승 불화가 생기며 왕건에게 투항.


왕건(?-943)

개성 상인 세력을 거느린 호족 출신.
궁예의 부하가 되어 후백제와 싸우며
백성들의 신망을 한몸에 얻었던 왕건.

궁예를 내쫒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에서 '고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들여 신라와 합병하고
936년 견훤과 함께 신검의 후백제를 공격하여 후삼국을 통일.

왕건의 능은 지금 개성에 남아 있다.

해상무역 도시 인천은 통일신라 때 지방도시로 전락.
통일신라 도읍인 금성(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탓.
따라서, 인천은 통일신라의 무역 중심지가 될 수 없었다.

통일신라가 끝나갈 무렵 지방 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며
인천, 강화 지방은 바다를 무대로 하는 해상 세력이 장악.
가장 큰 세력은 인천 이씨 시조이자 가락국 후손.. 이허겸

통일신라에서 권력다툼에 밀려 신라말 인천으로 이주
고려 시대 인천은 바다를 통한 해상무역이 활발하였고
인천 이씨는 고려에서 7왕비를 배출한 명문가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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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골은 고려의 패망 역사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
즉, 고려 잔여세력이 이조에 마지막까지 항거한 은신처.
이조가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고 불렀던 '전설의 고향.'

법천골은 고려 역사의 명맥이 끊긴 비극의 현장 같다.
고려 위숙왕후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는 법천사.
천왕봉 마야부인 석상이 고려의 위숙왕후라는 전설 유래.

'위숙왕후(威肅王后)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919년 태조 2년 아버지 왕륭을 세조위무대왕으로
어머니 한씨(韓氏)부인을 위숙왕후라 추존하였다.

왕륭은 일찌기 꿈에 만난 미인을 부인 삼기로 다짐.
훗날 그 부인과 결혼했기에 몽부인(夢夫人)이라 한다.
송악(개성)에서 영안성으로 가다가 만났던 꿈속의 여인.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그 부인이 삼한(三韓)의 어머니.

'위숙왕후는 고려 창건세력의 상징적 모태.'

하여, 고려는 위숙왕후 석상을 지리산 천왕봉에 모신 듯.
말하자면, 고려를 창건한 밑바탕 토착세력은 지리산 일대.
천왕봉 위숙왕후 석상은 옛 삼한 세력의 결속을 위한 상징.

신라는 노고단에 선도성모 제단을 만들어 성역화.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선도성모'로서 신격화 했다.

'고려에서 위숙왕후를 신격화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의 창건 과정을 통해 그 베일 속 수수께끼를 풀어보자.
왕건의 본관은 개성,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 금성태수(金城太守) 왕륭(隆)의 아들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이 되고, 900년 광주, 충주를 공략,
그 공으로 아찬 위계를 받고 903년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공략,
영토를 확장해 알찬에 승진되고 전라도 경상도 견훤군사를 격파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913년 시중(侍中)이 되고, 918년 민심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이듬해 수도를 송악으로 옮겨 융화정책
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사찰 건립.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 앞서 항복한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

한편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북방을 개척
만년에 청천강 하류 安州 지방에서 영흥까지 영토를 확장.
또한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 유민을 맞아 민족융합을 마련.

...................................거란........................................
4세기 이래 동몽고(東蒙古)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민족.
993년부터 1019년까지 3차례에 걸친 거란은 고려를 침공.

10세기초~ 14세기 말 거란·여진·몽고는 한족(漢族)을 압박.
고려는 건국 이후 중국의 역대왕조와 친선관계를 유지했으나,
북방민족, 특히 거란에 대해서는, 대립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고려는 거란이 동족인 발해를 멸망시킨 국가로 보고 배척했다.
거란은 942년(태조 25)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교빙을 청했으나,
태조는 거절했고, 나아가 거란을 금수(禽獸)의 나라로 단정한다.

그후 고려 역대 왕들은 태조의 반 거란 정책을 계승한다.
그러나, 훗날 징기스칸이 중국 중원을 제패하고 고려 침공.
징기스칸이 세운 원나라에게 고려는 80년간 지배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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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거란과 국교를 단절. 죽기전 943년 남긴 '훈요 10조.'
후세 왕들이 대대로 귀감으로 삼도록 했던 태조의 정치이념


훈요십조.

1.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쟁탈을 금지할 것.
2.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3. 서열에 관계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
4. 중국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5. 서경에 일 백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6.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 하지 말 것.
7. 상벌은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8. 차령산맥 이남 공주강 외각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9. 백관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10.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 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건국초기 왕건은 정주유씨, 평주유씨, 경주김씨, 황주황보씨,
광주의왕씨, 충주의유씨 등 지방호족 딸들과 혼인해 세력확장.

거란은 942년 사신 30명과 낙타50필을 보내 고려와 화친제의
왕건은 일찍이 거란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맹약을 배반
발해를 멸망시켰으니 친선관계 맺을 대상이 못된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거란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사신은 섬에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다리 밑에서 굶겨 죽였다는 역사 기록이 전해온다 .

고려 개국공신 중에 최응([898~932)은 고려시대의 문신.
궁예 밑에서 한림랑으로 있으면서 왕건의 신임을 얻었다.

915년(신덕왕 4) 궁예가 왕건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울 때
왕건이 변명하자 최응이 붓을 뜰에 떨어뜨리고 주우러 가서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귀띔하여 왕건은 화를 모면

그 후 왕건이 태조로 즉위하며 총애를 받았던 개국공신.
고려개국공신 홍유(경북 의성)의 딸은 왕건의 제 26 비.

배현경은 936년 경주 출신, 신숭겸은 927년 전남 곡성 출신.
3세 때 춘천으로 이사 호는 능산 본관은 평산 평산 신씨 시조.
공산 전투때 왕건을 대신해 왕건의 복장을 하고 싸우다가 전사.

지리산은 봉우리와 계곡마다 전혀 색다른 전설의 고향.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밑바탕은 옛 삼한과 후백제 세력.
법천골은 고려 흥망성쇄에 관한 흔적이 서려있는 곳이다.



.......
코레아.
........


고려는 한반도 역사상 첫번째 자주적 민족 통일국가.
그 역사적 위상에 걸맞게 고려는 동아시아 해상 왕국
바다를 잘 경영한 고대국가가 한반도에서는 강성했다.

태조 왕건은 해상무역 상인집단 호족세력 출신으로
고려 건국 전에는 궁예 예하의 백선장군 해군 대장
고려 건국 후 해군 총관으로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왕건은 장보고가 쌓아올린 해양 경영의 위업을 계승
그 해상왕국이 무너진지 70년 만에 고려를 일으켰다.
그러한 면에서 고려는 장보고 해상왕국 계승국인 셈.

이러한 점이 고려를 해상 왕국으로 발돋움하게 하고,
주권 국가로서의 자주성을 확립할 수 있게끔 하였다.

'오늘날 <코레아>라는 국호가 그 사실을 뒷받침’

고려는 귀족적, 불교적 성격의 동아시아 해상무역 왕국.
1224년 프랑스 루이 9세가 원나라에 파견한 사신 루브룩
그의 여행기에서 ‘카우레’가 서구에 처음 알려진 한반도.

그 후 페르시아 역사가 라시둣 딘(1307~11년)
고려를 ‘카올리’라고 불러 서구에 알려졌다.

고려는 최첨단 조선술과 항해술을 구비하고 있었다.
1274년 고려 몽골 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 하카타 해전

원나라 전함은 모두 돌풍에 깨졌으나
고려 전함은 대부분 무사했다고 한다.

이 해전에 투입된 고려군 대선 한척 길이는 30m
90명 승선, 쌀 3천 석을 실을 수 있는 250톤 가량.

240 년 후 마젤란이 세계 일주할 때 끌고간 5척 배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배라고 해야 130톤 규모 정도
고려는 '배 위에서 말을 달릴만 하다'는 대선 300척
그리고, 그외 600척 선박을 불과 4개월만에 건조했다.

아울러 최신식 무기까지 장착한 고려 전함

'날아가는 불' 주화(走火)를 장착한 천하무적 함대.
화약을 태워 생기는 추진력으로 날아가는 로켓 무기
사정거리는 화살의 두배가 넘는 화포를 군함에 장착.

최무선이 20년 노력 끝에 1373년 개발한 화약
군함에 화포를 설치한 것은 고려가 지구촌 최초.
고려 조선술은 평평한 바닥, 유선형, 등 다양했다.

고려는 첨단 조선술을 바탕으로 해상왕국을 부상.
태조 왕건은 무역을 통한는 중상주의를 표방하고,
15대 숙종은 상업을 권장해 고랴는 상업의 중흥기

고려는 도시 지방은 물론, 사찰까지도 상업에 종사
개경의 시전과 관영 상점은 외국상인들 거래처 역활

개경에는 신분에 따라 유숙하는 영빈관이니 청하관
외국인 숙소가 10 여 곳 모여있는 국제 무역항 중심

개경과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는 국제무역항
세계 각국 인종들이 일년 내내 붐비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겨울철에 열리는 팔관회에 참석해
공물을 바치고 문물을 교환하며 주연을 베풀었다.

고려는 중국을 비롯한 국제정세 따라 외교정책.
사신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을 통한 사무역을 배합
최대의 이익을 취하는 실리적 무역정책을 추구했다.

일본과는 김해에 설치한 동남해도부서를 통해 교역
997년 고려는 세 통의 서한을 보내 통상을 요구한다.
내치에 여념이 없던 일본으로서는 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500척의 전함으로 공격을 준비하였다
일본은 방어진을 구축하고 버티려다 고려 요구에 호응

그후 일본은 김해에 와서 공물을 바치려고 하자,
고려는 공물을 세자에게는 허용하나 왕에겐 불허
비밀 누출을 우려해 해로로만 개경에 오도록 했다.

이렇게 고려 눈치를 보던 일본은
13세기 말부터 돌연 해적을 보내
한반도에서 노략질을 일삼게 된다.

이어 두 차례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일본 침공으로
공무역은 주춤해졌지만 사무역은 여전히 활기를 띠었다.
고려의 대외무역에서 가장 비중이 큰 나라는 중국 송나라.

고려는 그 중간에 있는 요나라나 거란과의 관계를 고려
외교활동을 펴며 능란하게 송나라와의 교역을 유지한다.

초기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국교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곧 회복되어 11세기 약 100년 동안 송나라와 교역한다.
상선만 90 차례 오갔으며, 상인들도 4500 명이 내왕했다.

이들 상인은 대부분 남방에서 활동하는 사무역업자들
동남아, 아랍 상인들과 각종 특산물이 고려에 들어왔다.

송나라 상품은 비단, 금은공예품, 자기, 약재,
특히 불경과 유학서, 의학서 등 서적이 많았다.

고려에서 수출하는 상품은 나전칠기, 도자기,
옷감, 붓, 부채, 무기, 마구류 따위가 중심.

송나라 수도 개봉에서는 고려 비단과 도자기,
종이, 먹, 부채가 고려 명물로 인기가 높았다.

송나라는 고려의 사신이나 상인을 위해
고려관을 따로 지어 편의를 보아주며 접대.
고려는 대송 무역에서 여러 특전을 누리었다.

예를 들면, 송나라가 일반 외국인들에게
상품 가격에서 1/15를 관세로 징수했지만,
고려 상인들에게는 1/19 관세를 적용했다.

고려의 해상무역 교류망은 동남아와 아랍까지 뻗어갔다.
장보고 시절엔 신라 상선이 중국의 남단 광주까지 진출,
고려 시대에는 동남아 인도, 대식(아랍)까지 확대되었다.

11세기 전반 하선, 보나합 등의 회회족, 즉 아랍 무슬림 상인
수백명이 세 차례나 개경에 와서 수은, 몰약, 등 방물을 바치고
25대 충렬왕 때는 인도 동해의 코로만델 해안에 있는 작은 나라
마팔아국(馬八兒國: 모바르) 의 왕자 패합리가 침향, 면포 등 공물

이에 앞서 충렬왕은 대신 채인규의 딸을 공녀로
원나라 승상 상가에게 시집보냈는데, 그가 죽자
원의 신속국인이 마팔아국 왕자에게 재가시켰다.

고려와 인도양 소국간에도 정략적인 혼인
그밖에 고려는 베트남 타이, 캄보디아 등
동남아 국가들과 교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려의 주요 교역품 청동거울에 새긴 배 문양
고려의 해상무역이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11대 문종이 자신감과 기상을 드러냈던 말.

“고려는 문화와 예악이 융성하고
상선들이 끊임없이 출입하여 날마다
귀중한 보화가 항구로 들어오니
중국으로부터 도움 받을 것이 없다."

고려인은 고려 왕을 해동천자(海東天子)라고 불렀다.
즉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동방의 천자라고 불렀으며,
중국사신도 사대주의 예우가 아닌 손님으로 맞이했다.

이렇게 자기 중심의 자주적 천하관을 지녔기에
고려는 동방의 선진 해상왕국으로서 우뚝 선다.
하여, 오늘날까지 "코레아"로 알려진 대한민국.


덧 말.

고려를 창건한 왕건의 뒷받침 세력은 개성상인.
고려는 수 차례 도읍을 한양으로 이전하려 한다.
그러나, 이조시대에 이르러 한양으로 도읍지 이전.

한양은 인천에 가깝고 중국 산동반도와 가깝다.
따라서, 중국과 해상무역을 하기에 적합한 한양.
마포나루 - 인천 - 강화도 -산동반도 - 동아시아.

한반도 한수 이북은 동아시아 해상무역권.
한반도 한수 이남은 중동아시아 해상무역권.
고려는 실크로드 육로 해로를 통해 국제무역.

지리산 인근 남해는 중동아시아 국제무역항.
주로 양자강 이남의 중동아시아 국가들과 교역.
하여, 지리산 일대에 남아있는 대식국(중동) 풍습.

개방된 성풍속은 아라비아에서 유래된 풍습.
고려가요에 회회아비 등 그 흔적이 전해온다.
아울러, 원나라 속국 당시 성풍속도 알 수 있다. 


 
고려장. 



<고려장>은 한반도 고려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사례.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든 루머인지 출처가 없는 관습.
아직도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에 흠집을 내고있는 악성 루머.

노인을 광 또는 석실에 옮겨 두었다가 죽으면 그곳에 안치.
금은 보화를 넣은 다음 돌로 쌓아 봉토하였다는 고구려 풍습.
에스키모인은 폐경기 여성을 썰매에 태워 북극점에 버린 풍습.

고구려 시대부터 고려까지 노인을 버렸다는 풍습의 구전.
고려장은 노인을 공경하기 위한 설화가 잘못 전해진 설화.
몽골과 연합해 두 차례 침공한 고려에 대한 일본의 적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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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대한 왜의 구혼이 고려장 루머 근원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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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묘자리를 생전에 미리 만들었던 한반도 옛 풍습.
효자는 묘자리 옆 움막에서 삼년을 기거하며 조상을 섬겼다.
고려 역사의 어느 곳을 찾아봐도 고려장에 대한 사례가 없다.

칠순 아버지를 산중에 버리고 돌아을 때
따라간 아들이 그 지게를 갖고 내려왔다.

"아들아! 왜 그 지게를 다시 갖고 오느냐?"
"이다음에 저도 아버지를 버려야 하잖아요?"

그 후로 고려장이 없어졌다는 이 이야기
중국 문제가 만든 전래 설화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가문마다 족보를 소중히 여기는 민족.
고려 역사에는 고려장에 관한 내용이 한줄도 없다.
고려 역사가 무너지면, 고구려 역사 또한 무너진다.

하여, 고구려 역사를 되찾는 길목이 고려 역사.
옛 고구려 영토를 되찾기 위해 창건했던, 고려.
고려장 오해를 풀기 위해 고려 역사를 소개한다. 


 
고려 역사. 



918년 ~1392년까지 474년간 34대에 걸쳐 존속한 왕조.
918년 신라 말 송악(개성) 호족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다.
왕건은 철원에서 즉위하여 고려태조가 된 후 도읍지를 송악.
호족세력을 통합해 북진정책과 숭불정책으로 세력을 굳힌다.

935년(태조 18) 신라를 평화 병합 다음 해 후백제를 멸한다.
후삼국 통일후 경종 때 국유화 한 토지를 관료들에게 관리 위임.
11대 문종때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가 완성되어 국가기반이 안정.

그러나, 예종·인종 때 권력층의 토지관리로 농민들이 몰락한다.
승려 묘청이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려다가 실패하자 난을 일으킨다.
이후 잦은 반란과 무신들의 권력다툼이 일자 1196년 최충헌이 평정.

최씨 일가의 무단정치가 4대 왕에 걸쳐1258년(고종 45) 왕권이 회복.
고종 다음 원종은 몽골과 강화하고 1264년(원종 5)에 개성으로 도읍지
이때부터 원(몽골-징기스칸)의 지배를 받아 80년간 원나라에 예속된다.

왕실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 겨우 맥을 이어나갔다.
원나라가 새로 일어난 명에 밀리자 공민왕이 국권회복.
그러나, 조정의 기반을 굳히기 전에 홍건적과 왜구 침입.
중용된 이성계 등 신흥 무장(武將)들이 세력을 얻게 된다.

1388년(우왕 14) 고려는 이성계를 우군도통사 삼아 요동정벌
이때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에 이어 최영을 제거 후 우왕을 폐위
그 아들 창을 왕으로 즉위시켜 자기 세력을 키운 끝에, 이조창건.

고려는 처음부터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항상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그들의 지배까지 받게 되었다.
북방민족과의 갈등은 이성계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된 원인이 된다.

고려는 신라의 골품제를 청산하고 당,·송 제도를 도입하여 관제정비.
행정구획(촌, 향, 소,·부곡), 교통요지(진.·역,·관), 군사요지(진) 설치.
남자 16세면 '정(丁)'이라 하여 나라의 역사에 종사할 의무가 생긴다.

'60세가 되면 '노(老)'라 하여 면제.'
( 주 : 고려장으로 잘못 왜곡된 듯.)

고려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아 유교교육을 받은 관리를 양성
귀족층, 농공상 계층이 중심, 그 중간에 서리, 밑바닥에 천민과 종
유교가 정치이념이 되었는데 비해 불교는 정신적인 지도계층 이념
고려 말 이색,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권근, 길재 등 '성리학' 기반.

918 고려 건국. 태조 왕건 즉위. 국호 고려, 연호 천수(天授)
919 태조, 송악(개성)으로 천도. 삼성(三省) 관제 정비. 평양성 축조
920 신라,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교빙(交聘)
922 명주의 장군 순식, 고려에 투항. 태조가 평양에 와 관부 설치, 재성 축조
926 고려에 볼모로 와있던 후백제 견훤의 조카 진호, 병사.
후백제 견훤이 고려의 볼모 왕신(태조의 사촌동생)을 죽이고 고려 침공

931 태조가 금성(지금의 경주)을 방문하여 임해전에서 잔치
934 발해 태자 대광현, 수만의 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내부(來附)
935 후백제 신검을 견훤 금산사에 유폐. 견훤항복. 신라 경순왕 항복.
936 태조, 일리천에서 후백제 신검 군대 대파. 후삼국 통일.
940 경주에 대도독부 설치. 주부군현의 이름을 고침.

941 유금필 죽음. 후진에 사신을 보냄
942 거란이 낙타 50필 보내옴. 거란사신 30명을 귀양 보냄.
943 태조, 박술희에게《훈요십조》를 남김. 혜종 즉위
945 왕규, 혜종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다 발각됨. 박술희를 죽임.
서경대광 왕식렴이 입경하여 왕규를 죽임. 정종 즉위

947 서경에 왕성 축조. 광군 30만을 두고서 거란 침입에 대비
949 왕식렴 죽음. 정종, 아우 광종에게 선위. 주현의 세공액수 책정.
국초의 유공자들에게 예식(例食)으로 미곡 지급
950 연호를 광덕(光德)이라 함
953 황룡사 9층목탑 불에 탐

956 노비안검법 시행. 문무백관의 공복을 중국 제도에 따라 개정
958 쌍기의 건의에 따라 과거법 설치
960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로 고침. 문무백관의 공복 제정.
체관,《천태사교의》저술. 연호를 준풍(峻豊)으로 고침

961 과거제 실시.
962 처음으로 송나라에 사신 파견.
963 제위보 설치
973 균여, 《보현십원가》저술. 공사진전 개간과 경작에 관한 수조법 제정
975 경종 즉위
976 문무관의 묘제 제정. 전시과 제정(시정전시과)

977 개국공신과 향의귀순성주(向義歸順城主)에게 훈전 지급(공음전시과)
980 쌀과 베에 대한 이자율 책정
981 성종 즉위
982 중앙관제 개정. 10세 이상의 남자에게 모자를 쓰게 함.
최승로, 시무이십팔조 올림. 자모정식법(子母停息法) 제정

983 기곡적전례(祈穀籍田禮) 거행. 12목 설치. 3성·6조·7시(寺) 제정.
주부군현 아전들의 직제 개정. 관(館)·역(驛)에 공수전·지전(紙田)·장전 지급
984 처음으로 군인의 복색 제정
985 5 복제도 제정.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드는 것을 금함
986 흑창을 의창으로 고치고 쌀 1만섬 비축

987 개경의 오부방리 제정. 12목에 경학박사·의학박사 1인씩 둠.
주군의 병기를 거두어 들여 농기구 제작. 노비환천법 제정.
각 촌의 대감·제감(弟監)을 촌장·촌정(村正)으로 고침.
노비방량법 제정.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 폐지

989 동북면·서북면에 병마사 설치
990 서경에 분사(分司) 설치.
991 처음으로 사직 건립. 중추원 설치
992 국자감 설치. 공전의 수조 책정. 주·부·군·현·관·역·진·강·포 개정
993 거란의 제1차 침입. 서희, 거란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화약 체결.
개경·서경·12목에 상평창 설치. 주부군현과 역로의 공수시지(公須柴地) 책정.

995 관제 개정. 6부상서의 칭호 제정. 전국을 10도 128주 449현 7진으로 개편.
996 건원중보 주조. 각 주 사심관의 수 책정
997 목종 즉위
998 개정전시과(문무양반 및 군인 전시과) 제정
1009 김치양의 반란. 서북면병마사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킴. 중추원 폐지, 중대성 설치

1010 거란의 제2차 침입. 강조, 거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함. 순무사 양규, 곽주에서 거란군 섬멸.
1011 《초조대장경》조판 시작. 중대성 폐지, 중추원 다시 설치. 탐라를 주군으로 인정
1012 12주 절도사 폐지, 5도호부·75목에 안무사 설치
1013 문무양반 및 궁원 소유 30결 이상 토지에 대한 세액 결정
1014 70세 이상으로 관직이 없는 자에게 정위급 하사.

1017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드는 것과 부녀의 출가 금함
1018 안무사 폐지, 4도호부·8목·56지주군사·28진장·20현령 설치. 거란의 제3차 침입.
1019 강감찬, 구주에서 거란군 섬멸(귀주대첩)
1021 아들이 죄를 저지른 경우 손자에게 공음전 지급
1022 공전 다시 측량. 주부군현의 아전은 호장, 향·부곡·진·역의 아전은 장(長)이라 함

1024 자식 없이 죽은 군인의 아내에게 12분전(分田) 지급. 개경 확장, 5부 35방 314리로 구분
1031 덕종 즉위. 국자감시 새로 설치.
1033 북쪽 국경지대에 천리장성 축조
1034 양반전·군인전·한인전시과 개정. 정종 즉위
1039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 제정

1040 권형(權衡) 책정, 계량의 도량형 통일
1044 천리장성 완성
1046 문종 즉위
1047 구분전 제정
1048 각도 관·역 공수전의 전조 책정

1049 양반의 공음전시법 제정
1050 손재면역법·답험손실법 제정
1051 유음기광군(有陰奇光軍) 설치. 주현 아전과 향직의 승진 규정 제정
1053 경창 운반 미곡의 결손 보충으로 세미 1석당 모미(耗米) 1 되씩 증수.
내외관곡(內外官斛)의 길이·넓이·높이 제정

1058 15세 이상 60세 이하 병이 없는 자로서 사면기광군(四面奇光軍) 편성, 설치
1061 내사문하성을 중서문하성으로 고침.
1062 형벌 결정은 법관 3명 이상이 참석하여 결정하도록 함.
공시봉미법 시행. 개성부를 다시 두어 경기의 여러 군현을 다스리게 함

1063 거란, 《대장경》을 보내옴
1069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 제정. 전세(田稅) 책정
1073 자식 없는 자의 공음전을 사위·친조카·양자·의자(義子) 순으로 주도록 함
1076 과거 급제자에게 주는 등과전 제정. 경정전시과 제정. 관제 개혁. 녹과 책정.
1083 순종 즉위. 진사 이하 제업은 3년에 한 번씩 시험을 보기로 정함.
송(宋)에서 보낸 《대장경》을 개국사에 보관. 선종 즉위

1086 《속장경》간행 시작
1094 헌종 즉위
1095 중추원, 추밀원으로 고침. 헌종, 숙종에게 선위
1105 예종 즉위. 탐라국을 폐하고 군으로 함.
황해·경기·강원 충청·전라 등 전국적 유민 발생으로 사회불안

1107 윤관, 여진을 정벌하고 점령 지역에 6성 축조
1108 윤관, 여진을 정벌하고 북계에 9성 축조
1109 개경에 전염병 유행. 구제도감 설치
1111 전주·전호의 수확분급률 책정
1112 혜민국 설치

1123 인종 즉위
1126 이자겸의 난
1135 묘청의 천도운동
1145 김부식,《삼국사기》편찬
1146 의종 즉위

1153 문무양반에게 산직(散職)을 더하고 전시(田柴) 지급
1162 이천·동주·선주 등지에서 대규모 민란
1170 무신정변(정중부의 난) 일어남. 의종 폐위, 명종 즉위
1172 창주·성주·철주 등 서북면 민란
1173 김보당의 난 일어남. 3경·4도호부·8목 이하 군현역관의 문신 축출, 무인 임용

1174 조위총의 난. 서북면 40여성에서 민란,(이후 30 년간 전국에서 민란)
1176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의 난 일어남
1193 경상도에서 김사미·효심의 난 일어남
1196 최충헌,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장악(최씨 정권 성립)
1197 최충헌, 명종을 폐하고 신종을 즉위시킴

1198 만적의 난
1204 희종 즉위. 동경유수를 지경주사로 강등. 안동도호부를 대도호부로 승격
1225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
1231 몽골의 제1차 침입
1232 강화도 천도. 몽골의 제2차 침입. 몽골 침입으로《초조대장경》불탐.

1234 금속활자로《상정고금예문》인쇄
1235 몽골의 제3차 침입.
1236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두고 대장경(재조대장경) 조판 시작
1247 몽골의 제4차 침입
1258 최씨 정권 붕괴. 몽골, 화주(영흥) 지방에 쌍성총관부 설치

1259 원종 즉위
1269 전민변정도감 처음 설치
1270 개경 환도. 배중손·노영희 등, 삼별초의 항쟁 지휘
1271 녹과전 제정
1273 삼별초의 항쟁 진압

1274 충렬왕 즉위. 제1차 일본정벌 실패
1278 녹과전 개정 지급
1281 제2차 일본정벌 실패
1281 일연,《삼국유사》저술( ~83)
1287 이승휴,《제왕운기》저술

1292 염세별감(鹽稅別監)을 하삼도(下三道)로 파견, 염세 징수
1296 홍자번, 《편민18사》올림
1298 충선왕 즉위. 관제 복구
1307 충렬왕, 다시 정권 장악
1308 충선왕, 다시 즉위. 처음으로 개경 5부의 호구 조사

1309 각염법(소금전매법) 제정. 각 군현에 염창 설치
1314 충숙왕 즉위
1318 사심관 폐지(곧 이어 복구)
1330 충혜왕 즉위
1331 경기도 내 사급전(賜給田) 폐지, 녹과전으로 충당
1332 충숙왕 다시 즉위

1339 충혜왕 다시 즉위
1344 충목왕 즉위
1347 정치도감 설치, 각 도의 양전사업 실시
1348 진제도감 설치, 관리를 서해도와 양광도로 보내어 백성 구휼
1350 왜구 침입이 본격적으로 고려 말까지 이어짐.
이들을 격퇴하며 이성계와 최영 무장 세력이 힘을 얻게 됨

1351 공민왕 즉위
1356 기철·권겸·노일 친원파 숙청. 정동행중서성 이문소 폐지. 쌍성·함주 등지 수복. 관제 개혁
1359 홍건적의 제1차 침입
1361 홍건적의 제2차 침입
1363 문익점, 원나라에서 목화씨 들여옴

1365 전민변정도감 설치. 신돈을 판사로 삼고서 정치개혁 단행
1367 호복제(胡服制) 폐지.
1374 우왕 즉위
1377 화통도감 설치. 최무선, 화약을 발명하고 화약무기를 만듦. 《직지심경》간행
1387 문무백관의 공복, 명나라 제도에 따름

1388 요동정벌 개시. 이성계, 위화도회군으로 실권 장악. 창왕 즉위
1389 공양왕 즉위. 관제 개혁. 박위, 대마도 정벌
1390 윤이·이초의 사건. 한양 천도. 공사전적(公私田籍) 모두 불태움
1391 개경 환도. 과전법 공포.
1392 이방원(태종), 정몽주를 죽임. 노비결송법(奴婢決訟法) 제정.
배극렴 등 신진 사대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공양왕, 이성계에게 선위.

 


고려 성풍속 



고려 말 국운이 기울자 퇴폐 풍조가 만연하였다 한다.
패전국 역사가 승전국에 의해 왜곡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부여와 고구려에서 계승된 고려의 형사취수제 풍습.

형사취수제는 티벳고원 북부를 정복한 유목민의 풍속.
형사취수제는 형의 미망인을 동생이 아내로 맞는 제도.
몽골 유목민이 형의 유가족을 굶어죽지 않게 하려던 풍습.

그 전통 관습이 고려로 이어져 시동생이 형수와도 혼인.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기며 단정한 몸가짐 당부.
훈요십조 4조 -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

태조 왕건이 고려를 창건할 당시 거란은 야만국.
유목민 집단에게는 힘이 곧 법이라 약탈혼이 성행.

'용감한 자 만이 미녀를 찾이할 수 있다.' -약탈혼 -

티벳 고원 북부를 휘저은 홍건적이 고려 개경을 침입.
공민왕은 몽진까지 떠나고 피난지에서 신년 하례 행사.
그당시 고려 성풍속은 홍건적의 만행으로 문란해진듯.

고구려에는 데릴사위 제도가 있었고
민며느리 제도는 옥저에서 유래된 듯.
옥저는 고구려 수도 바로 앞에 있던 나라.

한반도와는 살수(단강)와 패수(한수)를 국경으로 대치한 옥저.
데릴사위, 민며느리 제도는 유목민이 노동력 확보를 위한 풍습

신라에 정복되어 열도로 떠난 중국 왜도 많았지만,
중국 대륙에 남은 중국 왜도 상당수였을 것으로 추정.

고려 시대에 괄세 받고 살았던 중국 왜.
이성계는 중국 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거란의 야만족 풍속을 경계한 때문이었다.

중국 왜의 성풍속은 문란함의 극치였다.
신라에 정복된 중국왜 역시 추잡한 성풍속
중국 왜는 고려 때가지도 그들의 전통을 고수

'왜는 몽골 초원을 떠돌던 오랑캐 집단.'

중국 왜는 일본으로 건너가 추잡한 성풍속을 전파.
기모노 섹스, 혼욕 등의 원조는 중국 왜의 성 문화.
그들은 남녀가 들에서 야합하고 개울에서 함께 목욕.

'물 귀한 초원의 유목민들은 개울만 보이면 혼욕.'

초원 유목민들은 여자가 귀해 남자들이 공동 관리.
일본에서 남자들이 공동 관리하는 여자를 유녀라 한다.
그 요바이 문화는 8세기 일본으로 이주한 중국 왜 풍속.

'마쿠라에' 음화에는 남녀들이 뒤엉킨 온천의 섹스 장면
환락이 극치를 이뤘다는 에도 시대 성문란은 상식을 초월
일본 춘화는 우키요에(浮世繪) 화파의 등장과 더불어 활발

일본 춘화는 대부분 옷을 반쯤 걸친 반라의 상태.
그러나, 성기 부위가 과장되거나 화려한 채색이 특징.
온천이 솟는 곳마다 남녀가 공개장소에서 야합하는 풍속

'몽골 초원 유목민들의 풍습에서 유래된 듯.'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던 김홍도.
10개월간 140 여자의 춘화(우키요에)를 그렸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홍도가 이조에서 그렸던 춘화.

'조선통신사로 다녀와 일본의 영향을 받은 듯.'

원래, 기모노 섹스, 혼욕, 요바이는 몽골에서 유래
전쟁이 많았던 몽골 유녀들은 떠돌아다니면서 매춘,
전쟁에서 죽은 남편 대신 남은 가족 생계를 꾸린 유녀.

고려의 유녀 및 혼욕 풍습은 이조시대에 사라져간다.
이조는 음란 행위를 태형으로 다스릴 만큼 엄격한 나라.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몽골에서 유래된 연지는 볼에 칠하는 전통 화장품.
원래, 연지 곤지는 생리 중이라는 표시였다고 한다.
궁궐 여인들이 오늘은 임금을 모시지 못한다는 표시.

남자가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것도 오랑캐 풍습.
1572년 선조는 남자들의 귀고리 유행 풍습을 막았다.

임진왜란 당시에 한반도 수많은 역사 서적이 불탔다.
따라서, 우리나라 역사왜곡은 일제 치하의 흔적 같다.
고려장은 일제 시대에 한반도 역사 말살정책 흔적인 듯.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했던 몽골족의 왕국(1271∼1368).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

유러시아 대륙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았다.
가혹한 수탈과 약탈로 경제적인 욕구를 충족했다.

그러나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 끊임없는 동요.

1206년 테무진은 부족합의 군장 칭기즈칸으로 추대
바이칼호 남쪽과 동남쪽 초원지대의 부족장에서부터
몽골제국 건국과 함께 주변 국가들을 향한 정복전쟁

최초 공격목표는 중국 서북방 탕구트족 서하(西夏)왕국
이어서 요를 토벌하고 위구르 카를루크 등을 굴복시켰다.
1211년 숙적인 금나라 황하 이북과 만주 땅까지 점령했다.

1219년 서아시아, 카프카스, 남러시아를 빼앗고 1225년 귀환.
아시아 내륙을 정복한후 다시 서하를 토벌 중 1227년 병사했다.

칭기즈칸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를 정복.

1236년 서방을 향한 새로운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러시아와 동유럽의 점령을 위한 시도였다.

볼가·부르갈인들의 제국은 1~2년만에 멸망했으며,
그 승리는 러시아 본토로 향하는 길을 연 셈이었다.

그 무렵 러시아 도시국가와 독립제후국
이들은 몽골군에게 차례로 함락되어갔다.

발트 해까지 진격했던 몽골군은 겨울 추위로
진격을 멈춰 러시아는 멸망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몽골군은 더 나아가 폴란드의 일부를 토벌

독일과 폴란드 연합군은 몽골군과 싸워
1242년 4월 9일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몽골군은 독일 중앙부를 침입하는 대신
남쪽으로 바꿔 1241년 4월 헝가리군 격파
헝가리에서의 몽골 통치의 기초를 구축했다.

헝가리 평야는 남러시아의 초원과 마찬가지로
몽골인들에게 유목지로서 매력을 느끼게 했다.

유럽과 서아시아에서의 몽골의 진격은
1241년 12월 오고타이의 죽음으로 중지

칭기즈칸 자손들은 정벌계획을 뒤로 미루고,
동유럽에서 그들이 점령한 모든 땅을 방기했다.
1241년은 유럽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의 전환점

만약 오고타이의 돌연한 죽음이 아니었다면
헝가리는 몽골에게 점령당할 수 밖에 없었다.

당분간 섭정을 하던 오고타이의 부인은
아들 구유크가 칸위에 오르기를 원했으나,
칭기즈 칸의 장손 바투의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1246년 오고타이 아들 구유크는 칸위에 등극
3년 만에 죽자 다시 그 어머니에 의한 섭정이 계속.

이처럼 칸위의 공백기가 계속된 것은
오고타이 일가와 툴루이 일가와의 대립
결과는 툴루이 일가 측의 승리로 돌아갔고,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가 제4대 칸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족 내부에서의 대립과 항쟁은
마침내 몽골 제국의 분열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원인

몽케는 이미 서정에 참여해 명성을 얻었고
그의 치세에 수도 카라코룸은 제국의 번영

1252년 아바스 왕조를 멸하고
이라크 이란 남송을 정벌했다.

몽골군의 살육은 유명한데 수렵에서 기인된듯.
왕위계승분쟁과 농경문명지대를 둘러싼 파벌싸움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남송을 평정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에도 침략군을 보냈다.

그러나 원나라 내부의 국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어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다.
하여, 주원장에 의한 명조가 출현하며 원나라는 소멸.

원나라는 많은 이민족문화를 수용한 다민족국가였고,
몽골 사회는 혈통을 존중하는 봉건적 신분제사회였다.
따라서 통치에 있어서도 신분제 의식에 좇아 이를 규제

먼저 몽골인을 국족(國族),
서방계의 투르크 ·
이란 유럽인을 색목인(色目人),
금국(金國)의 유민 즉 화북의 백성을 한인(漢人),
강남에 사는 남송의 유민을 남인(南人)이라 구별

몽골 색목인층 최상층은 40∼50만 호(200∼300만 명)에 불과
한인은 200만 호(1,000만 명), 남인은 1,200만 호(6,000만 명)
원나라의 경제정책은 현저한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경제시책

원나라는 교초(交褻)라 불리던 정부 신용의 지폐를 발행.
중국전역에서 유통되었으나 해외무역에서는 은전으로 거래

몽골인들은 원래 샤머니즘의 신봉자로서
문자도 갖지 않아 외래문화 수용에 관대
불교는 원나라 황실, 귀족층의 열렬한 비호

특히, 티베트에서 도래한 라마교가 번영
그 밖에 특히 선종(禪宗)이 교세를 떨쳤다.

그리스도교는 몽골궁정이나 일부 왕족 사이에서 성행.
로마 가톨릭교의 기세에 눌려 나중에는 그 안에 흡수
그러나, 다채로운 외래종교 그늘에서 성장한 민간종교

백련교 두타교 등 하층민 중심 비밀결사 민간종교
이는 원나라에 대한 민족적 반항심을 불러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