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12. ( 덕천강. 덕산. 양당촌. 남명. 1558년 유두류록. )

donkyhote 2010. 5. 14. 01:28

덕천강.

 

 

 

낙동강 지류인 남강의 상류로 함양, 산청을 거쳐 흐르고

또 하나는 멀리 마이산과 봉황산으로부터 흘러온 섬진강.

이들 강으로 흘러드는 개천인 화개천, 연곡천, 동천, 경호강,

 

덕천강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을 흘러내린다.

인근에 내원사와 대원사가  있어 경관은 좋다.

 

함양, 산청 서쪽은 경호강

동쪽으로 흐르면.,덕천강.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 진주로 흘러들어 

남강을 이루고나서 다시 남해로 흘러든다.

산청은 그야말로 청정 자연을 자랑하는 곳.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으리’
웅석산 사이를 흐르는 덕천강.
천왕샘과 산희샘이 모여든 곳.

강 주변으로 남명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덕천서원을 비롯 산천재, 세심정
남명 선생의 자취가 곳곳에 숨쉬고 있는., 덕천강

나들목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문익점 면화시배지
인근에 있는 성철스님의 생가인 전시장과 겁외사
성철스님의 유품과 발자취를 한 곳에 모은 곳이다.

겁외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
영원한 진리를 추구했던 성철스님의 의지가 담긴 곳.
덕천강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곶감으로 유명한 덕산.

덕산에는 남명 선생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북쪽 하늘 멀리 천왕봉이 보이는., 산천재(山天齋)
산천재 앞 마당에 남명이 61 세에 쓴‘남명선생시비’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쓴다(題德山溪亭柱)’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請看千石鍾)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非大 無聲)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千嗚猶不嗚).'

천재에서 덕산 지나 중산리 방면으로 오면
500년생 은행나무와 함께 덕천서원이 있다.
여기서 곧장 14㎞를 가면 중산리가 나온다.

덕산 삼거리에서 대원사계곡을 가는 길은 평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에서 시작하는 내원사 계곡
내원사 앞에서 다시 내원골과 장당골로 나눠진다.

양쪽 골짜기에서 흘러온 계류가 대포리 어귀에서
대원사 계류와 합쳐지며 물바다를 이뤄 대포(大浦)
대포리로 들어서면 먼저 노송 숲과 음양석이 반긴다.

지리산의 마지막 빨치산이 내원사 계곡에서 붙잡혔으며,
계곡 암자가 10여개, 구곡산에서 국사봉을 거쳐 써리봉,
중봉 천왕봉에 이르는 산정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 대포리.

대포마을에서 내원사에 이르는 2km는 계곡
내원사 계곡의 압권은 내원사 주변 반야교

덕천강은 영남우도를 대표하는 사상을 낳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 제자들이 의병을 모집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해 정인홍, 최영경 등 50 명

퇴계 이황으로 대표되는 영남좌도와 비교된다.
덕천강은 지리산의 강이고 그 운명을 대신하듯
강물은 굽이굽이 돌아 낮은 곳을 찾아서 흐른다.


.......
세심정.
........

덕천서원 앞 덕천강가에 허름한 정자. 세심정(洗心亭).
주역 聖人洗心(성인이 마음을 씻는다) 글에서 본딴 이름.
세심정은 남명제자인 진주 수곡 선비 각재 하항이 지었다.

한 여름이면 이 지역 사람들은 마음뿐만 아니라
육체의 무더위도 함께 식히는 장소로 유명한 곳.
남명은 이 정자에서 쉬었거나 공부한 일이 없다.

남명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명과 전혀 관계없는 정자는 아니다.

1582년 남명의 제자 수우당(守愚堂) 최영경이 건축.
1576년 덕천서원(당시 덕산서원)을 건립후 위패 봉안
서원 건립에 앞장섰던 최영경이 세연정도 건축했던 것.

수우당은 선비들의 휴식공간으로서 지은 세심정

.....세심정 송정 하수일(河受一) 글............
"군자는 은거해 수양하며 한가히 거닐며 휴식.
대개 은거해 수양하는 곳에는 한가히 거닐며
휴식하는 곳이 있는 것이 옛날 도리이다”
...........................................

>남명의 숨결을 느끼고자 하는 선비들이
덕천서원에서 학문을 논의하고 이 곳에서
덕천강을 바라보며 몸과 마음을 다스린 곳.

현재의 정자는 건립 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기록을 보면 1582년 문밖 시냇가에 2칸 규모.
이때 세운 것이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렸다.

정자는 원래 높은 곳 위에 세워진 집이란 뜻.

특히 굽이쳐 흐르는 냇가 경관을 즐길 용도가 정자.
세심정의 원래 위치는 덕천강가로 추측해 볼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복원하며 취성정(醉醒亭)이라고 개명

취성이란 굴원 어부사에 나오는 말
“세상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했어도
나만 홀로 깨어있는다”라는 뜻이다.

1815년 중수 후 다시 풍영정(風詠亭)
1870년 다른 곳으로 옮겨 지어졌다가,
도로 확장 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

그 시기는 대략 1920년대 쯤으로 추정
원래 2칸 규모였는데 지금은 1칸 규모 정자.
세심정을 지은 최영경(1529-1590)은 서울사람

39세때 남명의 제자가 되었다.
47세때 진주 도동 만죽산 기슭
한적하고 탁트인 대나무 숲가운데
집을 지어 수우당(守愚堂)이라 했다.

매화와 국화를 심어놓고 흰 학을 기르면서
좌우에 서적을 쌓고 심성을 수양하며 즐겼다.

1576년(48세) 하항, 하응도, 구변 등과 함께
덕천서원을 창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서원 앞 시냇가에 소나무 1백 그루를 심었는데,
시내 가까이 한 그루는 수우당이 손수 심었기에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수우송(守愚松)이라 한다.

수우당은 정여립 모반사건에 누명을 쓰고
62세를 일기로 해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1594년 누명은 벗겨지고 대사헌으로 추증했고
선조가 예관을 보내 제문을 내려 충절을 기렸다.


....................
덕천 서원(德川書院) .
.....................


1576년(宣朝9) 조식을 추모하는 위패를 모신 곳.
1609년(光海君1) 이곳은 '德川'의 서원으로 승격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高宗5)에 훼철

1920년대에 지방 유림이 다시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 경의당, 동재, 서재,
신문, 대문, 세심정, 산천재, 상실, 장판각, 별묘,
문루, 재실, 고사 등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있다.

숭덕사(崇德祠)는 3칸으로 조식 위패와 최영경 위패가 봉안
서원은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의장소로 사용.
동서 양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 고사는 제수 보관처.

 

덕산(德山).


  


지금은 지도에서 사라져버린 지명., '덕산'
일제 때 행정구역이 시천면 삼장면으로 나뉜 후
지도에서도 사라져 일부 주민과 옛 산꾼만 쓰는 말.

남명이 고향 합천을 떠나
이곳에 정착할 무렵만 해도
고려 때부터 천민들의 거주지.

'향, 소, 부곡’중‘부곡’

이곳은 농업을 주로 하던 원주민들이 살았지만
남명이 정착한 후에 ‘주자가례’ 등 예법을 보급
원주민을 교화시켰다는 기록이 <진양지>에 남아있다.

<진양지>는 덕산을 포함한 진주 지방 역사서.
남명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천왕봉 등산로와 유평계곡이 있는 곳.
수려한 풍광으로 연중 많은 인파가 몰리는 명소.
이곳 곶감은 천혜의 지리산 기후 덕택으로 특산물.

이곳은 뛰어난 자연환경과 소박한 민심을 자랑했지만
6. 25 전후 빨치산과 토벌대가 총을 겨누던 비극의 땅.

이태의 ‘남부군’에 당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현재, 시천면 사리와 삼장면은 일진일퇴 공방의 격전지
시천면 내대리에는 빨치산들이 환자를 돌보는 야전병원

주민들은 밤낮으로 점령 세력이 변할 때마다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아비규환의 지옥.
최근, 빨치산 루트를 개발, 관광 상품화 추진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는 곳.

한 시대를 풍미한 대학자요, 교육자였던 남명
그 후손은 현재 전국에 1천 2백여 세대(4천여명)
이 가운데 200세대(800여명)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

진주에서 지리산을 향한 국도 따라 40㎞
경사가 급해지는 지점에 이르러 길 오른쪽
'입덕문(入德門)'이란 글귀가 새겨진 바윗돌.
 
‘덕산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란 뜻이다.
남명이 명명했고 제자 도구(陶丘)가 쓴 글씨.
남명 생전에 사람하나 빠져나갈 언덕길 위 석문

15년전 도로 확장공사로 석벽이 잘려나가면서
글씨를 이정표 형태로 잘라내 이곳에 세워뒀다.
 
‘덕(德)있는 산(山)’을 뜻하는 ‘덕산’
덕산은 ‘지리산’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당시 이 이정표야 말로 이상향으로 향하는 문.

입덕문 이정표에서 5분 쯤 차로 달리면
남명이 숱한 제자를 길른 산천재에 도착.

남명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를 알게되는 산천재.
남명이 군자의 풍모를 닮은 산으로 칭송한 지리산
천왕봉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최적지이기 때문.

남명 사후 이곳은 둘째 부인 은진송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3남1녀 중 삼형제가 터를 잡고 유업을 계승.

큰 아들 차석과 둘째 차마는 각각 의령, 칠원 현감
셋째 차정은 ‘만호’벼슬의 무관으로 출사하게 된다.

남명 서거 400년후인 일제 당시만 해도
이곳에는 남명의 후손들이 500여호의 대가

그많은 일가가 먹고 살기에는 논밭이 부족
하여, 객지로 떠나 그 후손 수가 줄고 있다.

문중 종손은 수백년전 대가 끊어져
현재 문중 연장자가 제사를 주관한다.

남명의 후손 (주)부산교통 조옥환(70·12대손) 사장
지난 76년 남명선생 추모제인 제1회 남명제를 여는 등
'남명’에 대한 추모 열기를 전국으로 확산시킨 장본인.

........................................
.........................................

덕산은 진주 원지 단성을 거쳐서 들어간다.
단성(옛날 단성현)은 산청읍보다 풍요한 듯.
단성 인근의 묵곡은 성철스님의 생가(겁외사)

단성에서 4km 지점의 남사는 국내 최고의 선비마을
마을이 끝나면 단속사로 들어가는 운리 입구 삼거리.
단속사는 여기에서부터 6km 떨어진 북쪽 방향에 있다.

운리 마을 삼거리에서 4km를 들어오면 입덕문으로
근래 지리산 보승계에서 세운 강가 도로의 덕문정
덕문정부터 3km는 촌락 논밭이 전혀 없는 산과 강.

이 협곡을 지나면 이조시대 진양현에 속했던, 사리
사리 입구는 마근담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넘는 다리
현재 3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예전엔 장터.

1950년대말 100 가구가 살던 삼장면 유일한 오일장터
강변도로에 정비된 잔디밭이 '남명의 사적지 산천재'.
천왕봉을 보기 위해 서측에 서재를 짓지 않았다는 곳.

천왕봉은 산천재 북쪽 뒤에 있고 서쪽은 덕천강 언덕.
산천재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100m 가면 남명 묘소 입구
묘앞에 선 큰 비석 외 반쯤 누워있는 비석이 셋 더 있다.



양당촌.



1561년 남명 조식은 회갑 나이에
집과 전답도 버리고 고향을 등지고
생애의 마지막 거주지로 정한 양당촌

현재, 산청군 시천면 사리., 덕산.

지리산을 17 차례나 답사한 끝에
천왕봉이 올려다보이는 곳에 정착,
그당시 감회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봄산 어디엔들 방초야 없으련만
천왕봉이 하늘에 가까우니 자랑스럽다.

빈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으리오만
맑은 물 10리에 흐르니 먹고도 남겠네."

덕산에서 2km 남짓 떨어진 대포리(大浦里).
덕산은 시천면 면소재지로 동부 지리산 관문.
그곳에서 겨우 5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대포리

산청군 삼장면 면소재지인 때문에 일명 '삼장'
남명은 산천재(山天齋)를 열고 후학을 양성한다.

산천재는 중산리에서 흘러온 신천(新川) 물과
대원사에서 흘러온 삼장천이 합류해 덕천(德川)
두 개울 물줄기가 한데 모인다고 하여 양단(兩端)

큰 못(潭)을 이루며 합쳐진다고 하여 양당(兩塘)

사윤동 마을을 '양당촌'으로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두 개울물이 흘러드는 곳에 자리한 대포리도 마찬가지.
대원사계곡과 내원사계곡(장당골)이 합류하는 '양당촌'

남명은 양당촌에 살게 된 기쁨을 노래.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도원이 어디오. 나는 옌가 하노라."

지리산의 무릉도원 대포리

덕산이 어떤 곳인지 말해주는
남효온의 '유산기초(遊山記抄)'.

"양쪽 산자락에 단풍이 물들어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았는데,
아래에는 거울 같은 맑은 물에
고기떼가 헤엄쳐 놀고,
새들은 숲에 날아들어 노래한다.

냇바닥의 돌들이 기이하고
거대하여 눈길을 끈다.

그저 즐거울 뿐이다.
이윽고 양당촌에 다달았다.

집집마다 나무를 길러 숲을 이루었고,
감나무가 집들을 둘러 그윽하니
가히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지금의 덕산은 옛 양당촌의 모습이 아니다.
덕천강은 강물을 곧게 편 공사로 옛 정취를 잃었고,
2차선 포장도로 가에 콘크리트 건물들이 난립해 있다.

시골마을에 도시의 어지러운 풍경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대포리는 옛 정서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이 마을은 '민박'이란 간판을 단 집이 한 곳도 없다.

언제나 조용하면서도 풍요로움이 넘치는 마을이다.
대포리의 가치는 그 마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마을은 지리산의 장당골과 내원골의 문지방 같다.

장장 30여리에 걸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장당골,
지리산의 한없이 넉넉한 품은 이 마을로부터 열린다.

시외버스가 덕산까지만 운행되던 60년대까지만 해도
지리산의 천왕봉 등정은 대포리가 등산의 들머리였다.
지리산의 진정한 관문은 바로 이 마을이라 할 수 있었다. 



남명



이조 중기를 대표하는 도학자로 퇴계 이황에 버금
벼슬을 사양하고 지리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
남명이 지리산 밑의 덕산에 자리잡은 것은 61세 때.

젊은 날 정통 유학과 노장학 등 제자백가를 섭렵
아버지가 장원급제 하여 한양에서 공부 하였으나,
기묘사화 때 숙부인 조언경이 조광조의 일파라 하여
비명에 가고 아버지도 파직되어 집안이 쑥밭이 되었다.'

남명은 고향 삼가로 내려왔으나 생계가 어려워
중종 26년(1531) 살림이 넉넉한 처가를 찾아가
김해 탄동에 산해정을 짓고 18년간 제자를 양성.

38세인 중종 34년(1539)에 이언적의 추천으로
헌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몇 년 뒤에는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와서
만나기를 청하여도 만나기를 거절한적 도 있다.

"대감이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만나 뵈어도 늦지 않을 것이요" - 남명.

그뒤에도 몇 차례 천거 되었으나 번번이 사양,
1554년 벼슬을 천거한 이황의 권고도 물리쳤다.
명성은 자자해 제자가 되길 원하는 이가 많았다.

정구, 곽제우, 정홍인, 김우옹, 오건, 강익,
문익성, 박제인, 조종도, 곽일, 하항 등이 제자.
모두 지리산 지역을 중심으로 문풍을 일으킨 유학자

이들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 활동에 직접 참여한 선비들이라는 점이다.

남명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절제된 일상생활
마음이 밝은 것을 '경' 외적 과단성이 있는 '의'
'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 생활철학을 실천

학문을 익히는 것 못지 않게 실천을 중시했던 남명.
제자들은 임진왜란 위기상황에서 적극적인 의병활동.
회갑을 맞은 남명은 지리산 가까이 자주 찾아들었다.

이 곳 덕산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10년 동안
그는 자신의 학문을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전수.

방울을 차고 다니며 그 소리를 듣고 스스로 깨우치고
칼을 머리맡에 두고 의리의 결단을 생각했다는 남명.

한번 결심을 하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의리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용서 없이 질책

한편 퇴계와 남명은 모두 인품이 고결한 도학자
현실관으로는 서로 조금씩 다른 견해를 보였다.
두 사람은 한번도 만나지 못했으나 편지로 교류

한해 먼저 퇴계가 죽자 남명은 탄식.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도에 살면서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 운명이로다"

"내 명정에는 처사라고만 쓰라" - 퇴계 유언

"할 벼슬을 모두 다 하고 처사라니,
진정한 처사야말로 나"라고 한 남명.

두 사람은 생전에 사소한 성격 차이의 갈등.
갈등이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두 사람 사후.
광해군 3년(1611) 정인홍의 상소사건 탓이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5현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은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
특히,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두고 지적한다.

그러자 대부분이 퇴계 계열 성균관 유생과 조정 언관들
서로 있는 말 없는 말을 들춰내며 헐뜯기에 정신 없었다.
정인홍의 세력이 밀려 결국 문묘종사의 문제는 기정 사실.

정인홍은 인조반정 직후 역적으로 몰려 참형에 처해지고,
남명의 제자였던 북인들은 그후로 벼슬길이 막혀 버렸다.

284년 만인 순종 1년(1907)에
정인홍은 신원되고 관직도 복구
이미 남명 문도는 된서리를 맞은 후.


.................
산천재(山天齋)
.................


덕산은 입구가 좁은 동천(洞天)
벼랑길 돌문을 통해야만 했는데
이를 가리켜 入德門이라 하였다.

이는 '덕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란 뜻과
'군자가 덕으로 들어간다'는 뜻도 있다.

산천재는 조식이 61세 되던 명종 16년(1516) 세워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 마루를 두고 양옆으로 온돌방
앞으로는 툇마루를 내어 붙인 자그마한 한옥., 산천재

학문하는 처사의 서재답게 가식없는 목구조로 되어있다.
이 집의 네 기둥에는 조식이 회갑을 맞은 뒤 읊은 한시.
덕산으로 들어와 자리잡고 살 때의 심경을 읊은 시이다.

............ 德山卜居(덕산에 살 곳을 잡으며)........
春山底處无芳草(봄 산 어디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오마는)
只愛天王近帝居(상제와 가까워 천왕봉만이 사랑스럽네)
白手歸來何物食(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나?)
銀河十里喫猶餘(맑은 내 십리 마시고도 남겠지)
...............................................

산천재란 이름은 주역의 64괘 중 大畜卦에서 따른 것
하늘이 산 속에 있는 형상으로 군자가 그 형상을 본받아
강건하여 스스로 빛나게 하고 날로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

'조식이 서재를 짓고 자신의 결심을 함축한 시.'

또한 마루 위 토벽에는 벽화가 세 군데 그려져 있다.
현판 위의 그림은 隱者 네 분이 바둑 두는 청아한 모습,

오른편에는 '소부와 허유 고사' 그림.
왼쪽에는 '선비가 밭가는 모습' 그림.
조식이 백성을 위하는 실천위주 학문관.

남명은 산청 지방에서는 거의 신격화되었던 인물.
남명 선생이 67세 되던 1567년에 명종이 승하했다.
남명은 그날 산천재 앞 덕천강변에서 꺽지회를 드셨다.

그 앞으로 말을 거꾸로 타고 지나가던 오일봉
"산림처사는 국상이 나도 술이나 먹고 있는가?"

남명은 입속의 꺽지를 뱉고 일어서 곧 바로 북향사배
상복을 입었다는데 남명 입에서 나온 꺽지는 살아갔는데
그후 덕천강 꺽지는 그때 상처로 인해 한쪽 눈이 멀었단다.

새끼일 때는 양 눈이 멀쩡하나
철들만큼 크면 한 쪽 눈이 백태
꺽지는 덕천강의 '외눈박이 물고기'

퇴계 이황과 함께 이조 성리학의 쌍벽인 남명 조식 선생
무려 18년 동안 김해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성리학을 연구
1501년 연산군7년에) 합천 삼가에서 출생하고, 20세에 생원

진사의 초시에 1등과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30세에 처가 김해로 이사해 산해정을 짓고 연구와 교육에 전념

.........................산해정(山海亭).............................
산해정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는 정자.

학문을 닦아 경지에 오르면, 경륜과 도량이 바다같이 넓어진다
1588년 선조21년에 서원으로 착공했으나 임진왜란으로 공사중단.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완성하여 신산서원(新山書院)이라고 명명.

그러나,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고,
광복 후 고쳐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서원 형식.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 스타일.

남명 선생이 처음 성리학을 연구한 곳이었고,
기묘, 을사 사화 선비들 사기를 진작시켰던 곳
..................................................................

1561년 지리산 덕산으로 들어와 산천재를 짓고
생을 마칠 때까지 지리산에 묻혀 산 남명 조식.
그것이 그를 이조 최고학자로 우뚝 서게 한 바탕

그는 학문이란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하고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마음의 도를 터득
마음을 곧게 하고 몸소 의로움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

그것이 그의 철학이었고 삶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높은 학문과 고매한 정신을 이어
산천재에서 2km 떨어진 곳에 덕천서원과 세심정을 세웠다.

조식은 유두류록을 쓰기 전 17차례나 지리산을 유람
1558년 음력 4월 10일부터 25일까지 사천-하동-섬진강
배로 이동한 뒤 쌍계사를 비롯한 화개동천을 유람한다.




1558년 유두류록



남명은년 유두류록을 쓴뒤 3년 이후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평생을 보냈다.
'58세에 16일간 지리산을 유람한 유두류록.'

이 글은 '남명 선생 문집' 4권에 실린 <유두류록>.
1995년 경상대 남명학 연구소에서 번역한 글에서 발췌.
원문과 대조 후 수정 보완해 재구성한 글임을 밝혀둔다.




1. 시대적 배경.
2. 남명의 유두류록.


................
1. 시대적 배경.
.................


1558년 남명이 유두류록을 쓸 당시에
조선 왕조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했고
문정왕후는 불교에 우호적인 정책을 폈다.

불교는 성종 때까지 국가의 공인종교로 인정.
연산군과 중종을 거치며 과거에서 승과를 폐지
승려의 벼슬 길을 막고 양종 종단마저 폐지했다.

사찰 소유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폐찰.

승려들을 강제 환속시켜 관노와 궁방비(宮房婢)로 삼는 등
정책적으로 불교탄압을 위한 패륜적인 행위가 극에 달했다.
그무렵 이조의 사찰은 탄압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불교탄압이 극에 달할 무렵 인종이 즉위 1년 만에 서거
뒤를 이어 제13대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1545년 어린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문정왕후 배려로 일시 숨통이 트인 사찰들..'

남명이 유두류록을 쓴 시점은 성풍속이 문란한 시기.
당시 무속행위 풍기문란을 근절하려 사당을 부순 천연.
승려의 신분으로 천왕봉 성모사 철거는 용기 있는 행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등이 천연의 용기를 극찬.
성리학 유교관념 시각으로 볼 때 성모상은 한낱 무속행위.
이조시대 나라에서 벌목을 엄하게 금지했던 봉산(封山)정책.

특히, 봉산(封山)에서 기르는 소나무에 대해 엄격한 금령
우리나라에는 좋은 목재가 없어서 오로지 소나무만을 사용
궁궐과 민간 가옥 관청까지도 모두 소나무 목재를 사용했다.

관청에서는 중추(仲秋)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잡초를 제거
중동(仲冬)에 나무를 간벌하되, 재목이 될만한 놈은 두고
옹이가 많거나 재목이 안될 종자들은 제거해 산림 자원화

겸사겸사 당시 억불정책으로 늘어만 간 지리산의 폐찰.
과중한 세금과 억불정책으로 승려는 천민 신분으로 전락.
관리나 선비들이 지리산 사찰을 방문하면 극진히 대접했다.

승려들은 가마꾼을 자청하고
사찰을 유람 숙소로 제공했다.
당시 사찰은 오늘날 산장 역활.

'그 사실을 알려주는 유두류록.'

그당시 풍습도 알려주는 산행기록이다.
지금부터 유두류록 속으로 들어가보자.



........................
2. 남명의 유두류록
.......................


코스 : 화개 - 삼신리 - 용강리 - 운수리 - 황장리 - 신흥
시기 : 1558년 (음력) 4월 10일 ~ 25일


1558년 4월 초여름 진주목사 김홍,
김홍지, 김수재, 이공량(자 인숙),
고령 현감 이희안(자 우옹),
청주목사 이 정(자 강이)

그리고,

나는 두류산을 유람하였다.

산속에서는 나이를 귀하게 여기고
벼슬을 숭상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술잔을 돌리거나
앉는 자리를 정할 때에도
나이를 기준으로 하였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4월 10일

우옹이 초계에서 내가 있는 뇌룡사로 왔다. 함께 묵었다.


4월 11일

계부당에서 식사하고 여정에 올랐다. 아우 환이 따라왔다.
원우석이란 젊은이가 있었는데, 일찍이 중이 되었다가 환속.
총명하고 노래를 잘 불렀다. 그래서 불러내 함께 길을 떠났다.
문을 나서서 수십 걸음을 걸었을 무렵 어린아이가 앞을 막았다.

"도망친 종을 쫓아 왔는데,
이 길 아래쪽에 있으나
아직 잡지를 못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우옹이 재빨리 관노비 4,5명을 시켜
주위를 둘러싸게 했고 잠시 후 남녀 8명을 묶어서
말 머리에 데려 왔기에 말에 채찍질해 길을 떠났다.

"우연히 어떤 일을 했는데
이를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고맙게 여기는 사람도 있으니,
이 무슨 조화속이란 말인가?"

우옹의 말을 듣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우옹이 50년 간 팔짱끼고 앉아 있어
그 주막이 메줏덩어리와도 같았다.

비록 중국에 있는 황하와 황수 유역의 천만리 땅은
수복하지 못할지라도 한번 숨쉬는 동안에 오히려
일을 하는 방법과 계략을 지휘할 수 있으니
참으로 큰 솜씨라 할 만하다"

그러자 일행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저녁 무렵 진주에 묵었다.
길을 떠나기 전에 홍지와 약속하기를,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쌍계사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말티고개에서 뜻하지 않게 호남에서
어버이를 뵈러 오는 종사관 이준민을 만났다.
그의 아버지는 인숙이었다.

그리고 홍지는 벼슬이 갈렸다고 전해 들었다.
이윽고 인숙의 집에 투숙하였다.
인숙은 바로 나의 자형이다.


4월 12일

큰 비가 내렸다.
홍지가 편지를 보내어
우리 일행을 머무르게 하고
아울러 음식을 보내왔다.


4월 13일

홍지가 찾아와 소를 잡고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우옹과 홍지와 준민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음껏 술을 마시고 잔치를 끝냈다.


4월 14일

인숙과 함께 강이의 집에서 묵었다.
강이가 우리를 위해서 칼국수, 단술,
생선회, 찹쌀떡, 기름떡 등을 마련했다.


4월 15일

또 강이와 함께 사천강과 길호강이 합쳐지는
사천만 안쪽의 장암으로 향하였다.
강이의 동생 백도 따라왔다.

먼저 옛날 고려 공민왕 때의 무장이었던 이순의 쾌재정에 올랐다.
잠시 후 홍지의 둘째 동생 경과 홍지의 아들 사성이 잇따라 도착.
홍지는 맨 나중에 도착하였다.

잠시 뒤에 사천 현감인 노극수가
고을 수령의 자격으로 와보고는
작은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다.

이들과 함께 큰 배에 올랐다.

사천현감은 술과 안주와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마련해주고
배에서 내려 돌아갔다.

충순위 정당이 와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여러 물건을 대주어 일행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기생 열 명이 피리와 장구를 가지고 모두 늘어섰다.

이날은 성종의 원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기일.
그래서 음악은 연주하지 않고 채식만 하였다.

그때 백유량이라는 젊은이가
배 위로 올라와 일행에게 인사했다.

이날 밤의 달빛은 낮 같이 밝고
은 같은 물결이 거울을 닦은 듯.

마치 하늘에 있는 별과 아득한 산들이
모두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공이 번갈아 뱃노래를 부르니
그 소리가 이무기 굴을 뒤집을 듯.
삼태성이 밤하늘 복판에 오자 동풍.

서둘러 돛달고 노 걷어 치우고서
배를 몰아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다.
사공은 배가 하동 지나쳤다고 아뢰었다.

서로가 서로를 베고 가로 세로로 누웠다.
홍지의 담요와 겹이불은 폭이 매우 넓었다.
처음에는 내가 그 한 쪽을 빌어서 누워 잤는데,
점차 나머지도 차지해 홍지를 자리 밖으로 밀어냈다.

이것이 아마도 꿈속에 깊이 빠져
남의 물건이 자기 것 되는 줄 모르고
꿈결에 몰랐다고 말하는 격이 아니겠는가?


4월 16일

새벽빛이 조금 밝아질 무렵에 거의 섬진에 다다랐다.
잠을 깨었을 때에는 벌써 하동 땅을 지나 버렸다 한다.

아침 해가 이제 막 떠올랐다.
검푸른 물결이 붉게 타는 듯.
양쪽 언덕의 푸른 산그림자가
물결 밑에 거꾸로 비치고 있었다.

퉁소와 북을 다시 연주하니,
노래와 퉁소 소리가 번갈아 일어났다.

서북쪽으로 십 리쯤 멀리 바라다보이는
구름 끼인 산이 바로 두류산의 바깥쪽이다.
서로 가리키며 바라보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

"방장산이 삼한 밖이라 하더니
벌써 가까운 곳에 있구나"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친 악양 고을.
강가 삽암이 녹사 한유한 옛집 있던 곳.

한유한은 고려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처자를 데리고 미리 이곳에 와 살았다.

조정에서 불러 대비원녹사 벼슬 하사,
그러나, 그날 저녁으로 달아나 버렸다.
아무도 그가 달아난 곳을 몰랐다고 한다.

아!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하는데
어찌 어진 이가 붙어있을 수 있으랴!

착한 사람을 표창만 하는 것
어진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섭자고가
용을 좋아했던 것만도 못한 일이다.

그것은 어지러워 망하려는 형세에
국가에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정책.

문득 술을 청해 가득 부어놓고
거듭 한유한을 위해 길게 탄식.

한낮쯤 되어 배를 도탄에 정박시켰다.
두 눈에 정기가 전혀 없는 늙은 아전이
고깔 모양의 소골다를 머리에 쓰고와 인사.

이들은 악양과 화개 고을의 아전이었다.
또 깃 둥근 단령 입은 아전 두엇이 와 절.
홍지 관내 규찰과 권농 직책을 맡은 관리였다.

강가에는 높고 낮은 산간 마을들
밭이랑이 세로 가로로 나 있었다.

지금은 밭이랑이 열에 하나만 남아 있으나,
임금의 덕화가 이 깊은 산골짜기까지도 미쳐
예전에 백성들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도탄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화개 덕은리
정여창 선생의 옛 거처가 있었던 곳이다.
선생은 바로 함양 출신의 대유학자였다.

선생의 학문이 깊고 독실해
도학 실마리를 이어주신 분.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으나,
나중에는 내한 벼슬을 거쳐 안음현감
훗날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삽암과 10리쯤 떨어진 이곳.
선생의 행복과 불행은.. 운명.

홍지와 강이가 먼저 석문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쌍계사로 들어가는 문이다.
푸른 벼랑이 양쪽으로 한 자 남짓 트인 곳.

그 옛날 최치원이 오른쪽에는 '쌍계'
왼쪽에 '석문'이라 손수 써놓았던 곳.

자획 크기가 사슴 정강이만 하고
바위 속 깊이 새겨진 최치원 명필.
지금까지 이미 천년세월이 흘렀건만
앞으로 몇 천년 더 갈지 알 수가 없다.

서쪽 시냇물이 벼랑을 무너뜨리고
돌 굴리며 백리 밖까지 흐르는 개울
곧 신흥사가 있는 의신동 개울 물줄기,

동쪽에서 시냇물 하나가 구름 속에서 나와
산을 뚫고 흘러온 곳을 알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의 물인 탓이다.

두 개울 사이에 있어 절 이름도 쌍계
절 문으로부터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높이가 열 자 되는 비석이 귀부 위에 우뚝.

최치원의 글과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앞에 서 있는 높다란 다락집은 현판에 팔영루.
비석 전각은 수리중이라 기와가 채 덮여있지 않다.
쌍계사 중 혜통과 신욱이 차와 산나물을 섞어 대접.

어두워질 무렵 내가 갑자기 구토와 설사
음식을 물리치고 누워 있었는데,우옹이 간호



4월 17일

이른 아침에 홍지가 와서 나를 문병하였다.
문득 들으니, 어란달도에 왜구의 배가 정박
아침식사 후 여행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갈 작정
몇순배 술잔을 돌리며 헤어지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쌍계사에는 우리보다 앞서 도착한
호남 선비 김득리, 허계, 조수기, 최연 등
법당에 맞아들여 술잔을 돌리고 풍악 한가락
갑작스러운 이별에 서로 행색이 몹시도 급했다.

어제 배 안에서 자색 허리띠를 맨 홍지
그래서, 아래와 같이 내가 농담을 했다.

"이것은 토끼와 원숭이를 묶는 물건인데,
도리어 토끼와 원숭이에게 묶여 갈까 걱정."

그때 모두들 박수치며 웃은 일이 있었는데,
지금 그 농담대로 우리 입장이 그렇게 된 듯.

다만 한스러운 것은 내가 여력의 힘이 없어
신선이 앉을 만한 조용하고 깨끗한 곳에 앉아
늙은 몸속 창자에 가득한 띠끌을 토해내었을 뿐.

중국 한나라 때 신선이 된 적송자.
금화산 무한한 정기를 빨아들여도
늘그막 양식으로 삼을 수 없었던 점.

기생 봉월, 강아지, 귀천과
피리를 부는 천수를 남기고
그외 일행은 모두 보내버렸다.

이날 온종일 큰 비가 그치지 않고
검은 구름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이곳과 산의 바깥 인간 세상과의 사이에는
구름과 물이 몇 겹 둘러싸였는지 모를 지경.

낮 무렵 호남 지방 역리가 갖고온 종사관 편지,
봉화대에서 보고한 내용은 왜구의 배가 아니고
2,3 척의 우리 조선의 배라는 사실을 알려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홍지의 관상이 신선과는 연분이 없어
도끼 자루 하나 썩는 동안의 말미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

홍지는 한량없이 베풀 줄은 알았다.
그는 수없이 많은 술 안주를 보내왔고
산 아래 소식과 서찰을 잇따라 보내왔다.

놀이기구 육갑과 취사도구들을 강국년에게 맡겼다.
하여, 일행은 땔나무와 밥 걱정. 강국년은 진주 아전.

이날 강이 친척인 이응형이 쌍계사에 왔다.
저녁에 인숙이도 설사하고 신음을 토하였다.

해질 무렵 강이가
배가 아프다더니
두어 말 토해냈다.

창자가 꼬이는 듯
위장이 뒤집히는 듯
괴롭더니 점점 더 설사.

소합원과 청향유를 먹여도 효과 없었다.
그가 전부터 가까이 했던 기생 강아지가
강이의 머리 맡에서 지키며 간병했는데,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강이는 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였다.

"어제 저녁 가슴이 아파 이겨내지 못할 듯.
내 비록 죽더라도 그대들이 내 곁에 있는데
어찌 여인네의 손에서 죽을 수가 있겠는가?"

그말을 받아 일행 모두가 강이를 위로하는 말.

"그대 역시 겁쟁이다.
오직 오래 살고픈 마음을
늘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대단찮은 병에 걸려도
죽지나 않을까 안타까워 한 것.

죽고 사는 것은 진실로 중요한 것인데
어찌 그와 같이 하찮은 것이라 하는가?"


4월 18일

산길이 비에 젖었다.
그 때문에 불일암에 오르지 못하고
시냇물이 불어 신흥사에 못가고 그대로 머물렀다.

호남순변사 남치근이 인숙에게 술과 음식을 보내왔다.
종사관의 아버지를 위해 보낸 것이었다.

진사 하종악의 종인 청룡과 사인 정계회 종 등이
술과 생선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신흥사 지암 윤의가 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동생이 타던 말이 병이 났다.
그래서 접천 밖에 사는 진이라는 사람에게 보살피도록 맡겼다.
저녁에 우옹과 함께 뒷 불당의 서쪽 방에서 잤다.

4월 19일

아침을 재촉하여 먹고 청학동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인숙과 강이는 병 때문에 동행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아무리 뛰어난 경치일지라도 매우 참된 연분이 없으면
신령님께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진실로 알 수 있다.

인숙과 강이가 예전에 한번 들어와
보았다고 하는 것은 꿈에서였고
진정으로 온 것은 아니라 하겠다.

홍지와 비교하면 서로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그 또한 뒷연분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세 번이나 청학동에 들어왔어도
아직 속세의 인연을 다 끊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나 자신과 변변한 벼슬 한번 못하고
팔십 노인이 되어 일찍이 봉황지에 세 번 갔다온 일

그 일을 회상하는 이와 비교하면,
나는 오히려 상대가 안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 차례나 악양에 들어갔어도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던 이와 비교하면,
그보다는 내가 못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날 아침 김경의 병 탓에
같이 가는 것을 포기하고서
기생 귀천을 데리고 떠났다.

이때 김경의 나이는 77살
산을 나는 듯이 올라가면서
처음엔 천왕봉까지 오르려했다.

사람됨이 기개가 있었으니,
마치 중국의 한나라 현종이
배우 기술을 가르치던 이원에서
배우고 노닐다 온 젊은이 같았다.

호남에서 온 네 사람과 백,
이 두 사람만이 동행하였다.

북쪽 오암을 올라 나무를 잡고
좁고 험한 길을 타고 나아갔다.

우석은 허리에 맨 북을 두드리고,
천수는 긴 피리불고,두 기생이 따라가며
고기를 꼬챙이에 줄지어 꿴 것처럼 줄지어
앞으로 전진하면서 중간 무리를 형성하였다.

강국년과 요리사와 종들
음식을 운반하는 사람들
수십 명은 뒷무리를 이루었다.
그리고 중 신욱이 길을 안내하였다.

중간에 큰 돌 하나가 있었다.
이언경, 홍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오암에도 시은형제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이 있었다.

아마도 썩지 않는 것에 이름을 새겨서
영원히 전하려 하는 것이다.

대장부 이름은 하늘의 밝은 해와 같은 것,
기록에 남고 사람들 입에 새겨져야 하는 것.

그럼에도 구구하게 숲속 잡초더미 사이 짐승과
이리가 사는 곳에 있는 산속 돌에 이름을 새겨서
썩지 않길 바라니, 날아가 버린 새그림자만 못한 짓.

훗날 세인들이 그것이 무슨 새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진나라 두예라는 무장의 이름이 전해오는 것은
비석을 물속에 가라앉혀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름 있는 서적에 기록으로 씌여있기 때문.

열 걸음에 한번씩 쉬어가며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며
비로소, 불일암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세상 사람들이 청학동이라 부르는 곳.
바위로 된 묏부리가 허공에 매달린 듯 내리 뻗어
그 아래를 허리 굽혀 내려다 볼수 볼 수가 없었다.

동쪽에 높고 가파르게 서서 서로 떠받치듯
찌르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

서쪽 푸른 벼랑 만길 낭떠러지
우뚝 솟아 있는 것은 비로봉이다.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어 살며
하늘로 날아올라 빙빙 돌다가 내려오곤 했다.

그 밑에는 학연(청학연못)이 있는데,
컴컴하고 어두워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좌우 상하에 절벽이 고리처럼 둘러 서서
겹겹으로 쌓인 위에 다시 한 층이 더 있고,
문득 도는가 하면 문득 다시 합치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초목이 무성하여 수북히 우거져 있고
물고기나 새 또한 지나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멀리 떨어진 중국 서부 약수보다도 아득해 보였다.

바람소리와 우레같은 물소리가 뒤얽혀 아우성치니
마치 하늘과 땅이 열리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듯
문득,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풍경이었다.

그 가운데는 신선의 무리와 큰 힘을 가진 거령,
긴 교룡과 거북이가 한데 몸을 웅크려 숨어 있고,
그들은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 접근을 막고 있는 듯

어느 호사가가 놓아 둔 나무 다리.
덕분에 그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 낀 돌을 긁고 더듬어 보니
삼신봉 이라는 세 글자가 있었다.
어느 때 새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옹이 나의 아우와 원생 등
여러 사람이 나무를 잡고 내려가
이리저리 내려다 보고서는 다시 올라왔다.

젊고 다리 힘이 좋은 자는 모두 향로봉에 올랐다.
이윽고 돌아와서는 불임암에서 물과 밥을 먹었다.
그런 다음 나와서는 절문 밖 소나무 밑에 앉아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다.

또한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부니
우뢰같은 북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져
그 소리가 온 산을 뒤흔드는 듯 하였다.

동쪽에는 폭포수가 백길 낭떠러지를
내리질러 한데 모여 학담을 이루었다.
나는 이곳에서 우옹을 돌아보며 말했다.

"물길이 만 길 구렁을 향해 내려가는데
곧장 내려만 갈 뿐 다시 앞을 의심하거나
뒤돌아봄이 없다더니, 여기가 바로 그런 곳."

우옹도 그렇다고 하였다.
정신과 기운이 매우 상쾌
그러나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잠시 후 언덕길 더듬어 찾아간 지장암.
마침 그곳엔 모란이 활짝 피어 있었는데,
가지 하나가 은빛 진주 한 말 모아놓은 듯.

그곳부터 비탈진 산길을 곧장 내려가는데,
두서너 리 달려간 다음에 한차례씩 쉬었다.

양의 어깻죽지 고기를 삶을 정도의 짧은 겨를
드디어 우리일행은 쌍계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 위로 오를 땐 한 발자국을 내디디면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몹시 어렵더니,
내려올 때에는 몸이 저절로 흘러 내려갔다.

선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도 같고,
악을 좇는 것은 무너져내리는 것과 같은 일

인숙과 강이가 팔영루에 올라서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이하였다.

저녁에 인숙과 우옹과 함께
다시 절 뒤 동쪽 방에서 잤다.

4월 20일

신흥사로 들어갔다.
신흥사는 쌍계사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있다.

그 사이에는 보잘 것 없는 가게 두어 군데 있었다.
절 문간 앞에서 백 보쯤 되는 곳에 흐르는 칠불계
근처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줄지어 물가에 앉았다.

시냇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말에서 내려와서는
다른 사람 등에 업혀 냇물을 건넜다.

절의 주지인 옥륜과
지임인 윤의가 나와서
우리 일행을 맞이하였다.

절에 왔으나 문 안으로 들어갈 겨를도 없이
곧장 시냇가에있는 반석 위에 줄지어 앉았다.
인숙과 강이만은 가장 높은 바위에 올려 앉혔다.

"그대들은 만약 위급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이 자리를 잃지 말게나. 만약 몸을 하류에 두게 되면
올라갈 수가 없게 되고 말 것이네"

하니, 인숙과 강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바라건대 이 자리를 뺏지나 말게나."

얼마 전에 내린 비에 시냇물이 불어 있었다.
시냇물이 돌에 부딪혀 치솟아 오르고 부서졌다.
때로는 마치 만 섬 구슬을 들이마시고 내뿜으며
다투어 솟는 듯, 때로는 마치 천가닥 우뢰 소리.

거듭 우뢰가 쳐 씨근거리며 으르릉 거리는 듯.

마치 은하수가 어슴프레하게 가로 뻗쳐
뭇별이 빛을 잃고 시들어 버린 듯 하고,

신선이 산다는 중국 주나라의 요지에서
그 옛날 목천지가 서왕모를 맞아 들이며
잔치벌린 뒤 비단자리가 흐트러져 있는 듯.

검푸르게 깊은 못은 용과 뱀이 비늘을 숨긴 듯
그 깊이를 엿볼 수도 가름할 수도 없는 정도.
우뚝 솟은 돌들은 소와 말이 모습을 드러낸 듯
서로 뒤섞여 있어 헤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냇물의 모습은
중국 양자강에 있는 물살이 센 구당협
그 정도라야 견줄 수 있는 듯한 형편이었다.

이는 진실로 하늘나라의 장인이
빼어난 솜씨를 마음껏 발휘한 듯.

우리는 그 광경을 보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넋을 잃었다.

시 한 구절 읊조리고자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한바탕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보아도
그 소리라는 것이 기껏해야 큰 항아리 안에서
니나니벌 우는 정도와 같아 비할바 아니었다.

단지 시내에 사는 물귀신의 놀림거리가 될 뿐.

절의 중이 술과 과일을 소반에 갖춰
우리 일행을 위로하였다.
나 또한 가져온 술과 과일로 대접

바위 위에서 춤추며 한참 즐기다가 그만 두었다.
내가 억지로 5언절구 한 수를 읊었다.


'물을 아름다운 구슬 토해내고
산은 봄 신의 얼굴보다 짙구나

나에게 겸손함과 자랑함이 없으니
다만 그대를 마주보며 즐기는도다.'


저녁에 서쪽 승방에서 묵었다.
밤에는 누워 조용히 글을 외웠다.
그리고 또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말했다.


"이름 있는 산에 들어온 자는
누군들 그 마음을 씻지 않겠으며,
누군들 자신을 소인이라 하기를

달가워하겠는가마는,

필경에는 군자는 군자이고
소인은 소인이니,
한번 햇볕을 쬐는 정도로는
아무런 유익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월 21일

큰 비가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김사성이 갑자기 하직하고
비를 무릅쓰고 굳이 떠났다.

백유량도 함께 떠났다.

기생 셋과 악공도 그들과 함께 떠나도록 했다.
호남에서 온 여러 사람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절의 누각에 앉아서 불어난 시냇물 구경했다.


4월 22일

아침에는 비가 왔으나 저녁 녘에 개었다.
시냇물에 돌다리가 잠겨서 절 안과 절 밖이
서로 통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중국 한나라 고황제가
흉노족에게 7일 동안이나 포위되었던
백등산에 갇혀 있었던 것만 같았다.

사람 숫자가 무려 40여 명에 달하여
양식이 모자랄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양식을 담은 자루를 헤아려
평소에 주던 양의 반으로 줄였다.

다만 술은 제한없이 마시도록 했다.
아마 수십 항아리쯤 되었을 터인데,
대부분 술 마시길 즐기지 않았던 탓.

호남 선비 기대승 일행 11명
비에 막혀 천왕봉에 올랐다가
아직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한다.

쌍계사와 신흥사 두 절은 모두 두류산의 한복판에 있다.
푸른 산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흰구름이 문을 잠근 듯.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을 것 같은 데도,
이곳 절까지 관가 부역이 폐지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양식 싸들고 무리지어 오가는 자들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모두 흩어져 떠나갔다.

절의 중이 고을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세금과 부역을 좀 완화해주기를 빌었다.
나는 그들이 하소연할 데가 없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겨 그들에게 편지 한장씩 써주었다.

산에 사는 중의 형편이 이러하니
무지렁이 백성들 사정은 알 만하다.

행정은 번거롭고
세금은 과중하여
백성과 군졸이 흩어져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돌보지 못하는 실정이다.

조정에서도 이를 크게 염려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의 등뒤에서
여유작작 한가로이 노닐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참다운 즐거움이겠는가?

인숙이 벼루 보자기에다가
글귀 한 구절 써주길 간청.

그러므로 강이와 함께 차례로 써주었다.


'높은 물결은 우레와 벼락이 서로 싸우는 듯하고
신령스런 봉우리를 해와 달이 갈아놓은 듯하다.
격조 높은 이야기와 빼어난 풍채로 얻은 바 무엇인가.'

시내는 천 층의 눈처럼 솟아나고
숲은 만 길의 푸르름 떨쳤네.

살아 움직이는 생기는 끝없이 넓으니
장엄한 모습으로 높다랗게 우뚝 서 있네. '


4월 23일

아침에 떠나려는데,
신흥사 주지 옥륜이
아침을 대접하고 전송.

두류산에 크고 작은 가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으나
분명 신흥사 경치가 최고.

전에 성중려와 천왕봉에서 이 절을 찾아온 적이 있었고,
그 뒤 30년만에 하중려와 함께 름 내내 머문 적이 있다.
다시 20년 세월이 흘러 그 두 사람은 모두 저 세상 사람.

이제 나만 홀로 와서 보니,
마치 은하수 사이에 이르러
어느 날에 뗏목이 올 것인지
까마득히 모르는 것같은 처지.

신흥사 대웅전 안의 부처 앞에는
모란이 살아 있는 듯 꽂혀 있고,
사이 사이에 기이한 꽃이 섞여 있다.

바깥으로 나있는 들창에도
또한 복사꽃과 국화와 모란이
울긋불긋 꽂혀 있어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부실 정도

이 모든 광경은
우리나라 절에는
아직껏 없었던 풍경.

신흥사 절의 위치는
구례 나루터와 20리 정도.
쌍계사와는 10리 정도,

사혜암과는 10리 정도,
칠불암과는 10리 정도
천왕봉과는 꼬박 하룻길.

절을 떠나 칠불암 시냇가에 이르렀다.
옥륜과 윤의가 나무를 걸쳐 다리를 만들어
시내를 가로지르게 하였다.

그래서 모두 편안하게 건널 수 있었다.
시내를 따라 내려와 쌍계사 건너편에 이르렀다.
쌍계사의 중 혜통과 신욱이 시냇물을 건너와서
우리 일행을 전송하였다.

건장한 중 3, 4명이 함께 와서
일행이 시내건너는 것을 도왔다.

다시 예닐곱 마장을 내려가서
말에서 내려 시내를 건너려 하는데,
전날 우리가 타던 말을 맡아 보살피던 이와
마을 사람 3, 4명이 삶은 닭과 소주를 가지고 와서
우리 일행을 대접하였다.

또 악양 고을의 아전이
대나무를 엮어 가마처럼 만들어서
우리 일행 모두를 매고서 시내를 건넜다.

시냇물이 사나워서 물의 흐름이 몹시 급했고
바닥의 하얀돌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그렇지만 우리 일행을 건너주던 노복 가운데
넘어지거나 미끄러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들 잘 건넜다.

누구인들 시내를 잘 건너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오히려 때에 따라 잘 건너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이 또한 운명이 아니겠는가?

시내를 건너 10리 남짓 갔다.
노복인 청룡이 자기 사위와 함께
술항아리를 가져오고 소반에 생선과 고기.
시장에서 파는 것과 똑같아 보일만큼 잘 차렸다.

청룡의 처 수금은 예전에 서울 땅에 살았었다.
인숙과 강이가 혼인 맺어주었기에 인사차 온 것.

여럿이 장난삼아 아낙의 인사를 받는 인숙과 강의를 놀렸다.
배를 타고 점심을 먹었다. 배는 악양현 앞으로 내려가 정박.

고을 객사에서 잤다.
강이는 현 동쪽에 사는 숙모를 뵈러 갔다.


4월 24일

새벽에 흰죽 먹고 동쪽 고개에 올랐다.
하늘 높이 가로 놓인 삼가식현이란 고개.
두어 걸음에 세 번 가쁜 숨 내쉰다는 뜻 이름.

두류산 기세가 여기까지 백 리나 내려왔건만,
여전히 높기만 하고 조금도 낮아질 기미 없다.

우옹이 강이 말을 타고
혼자 채찍을 휘둘러
먼저 산을 올랐다.

제일 높은 봉우리 위에 말을 세우더니
돌에 걸터 앉아서 부채질을 하였다.

우리 일행 모두는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고
산을 오르는 사람과 말은 비오듯 땀을 흘렸다.

한참 뒤에야 겨우 도착.
내가 우옹을 질책하였다.

"그대는 말 탄 기세에 의지하여
나아갈 줄만 알고 그칠 줄은 모른다.
훗날, 능히 의로움에 나아가게 되면
반드시 남보다 앞설 듯..참으로 좋겠다"

우옹이 미안해 하면서 사과하였다.

"그대가 꾸지람할 줄 알았네. 내가 내 죄를 알겠네."

강이가 두류산을 돌아보았으나
검은 구름에 시야가 가리워져서
산속 우리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이에 나는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산은 두류산보다 큰 것이 없고
한눈에 바라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건만,
많은 사람이 눈뜨고 보아도 오히려 보지 못한다.

하물며

두류산보다 현명하지도 못하고
가까이 눈앞에 보이지도 않으며
여러 사람 눈으로도 볼 수 없는데
지금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랬더니 모두들 사방을 두루 돌아 보았다.

동남쪽 파랗게 가장 높이 솟은 것은 남해의 뒷산이고
동해물결처럼 널리 가득 차 서리어 엎드린 하동, 곤양 산들.
동쪽 하늘에 은은히 솟아 검은 구름과 같은 것은 사천의 와룡산.

그 사이에는 혈맥과 같이 서로 꿰이고 뒤엉킨
강과 바다와 포구가 경락처럼 서로 얽혀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산하는 그 견고함이
중국 위나라가 보배로 여기는 것 이상
넓은 바다에 붙어 있고 높은 성곽에 의지.

그러면서도 우리 백성은
조그맣고 추잡한 섬 오랑캐에게
거듭 곤란을 겪고 있으니, 이 어찌
그 옛날 길쌈 실이 적은 것은 돌아보지 않고
중국 주나라 왕실이 멸망하는 것을 근심한 과부
그 과부와 같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녁 늦게서야 하동 횡포역에 도착했다.
배고파 인숙 배낭 속 과자와 꿩고기를 먹고
추로주 한 잔을 마셨다. 낮에 두리현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나무 밑에서 쉬며 샘물로 갈증을 달랬다.

그때 짚신신고 깃 곧은 짧은 직령 차림의 사람이
말에서 내려 우리 일행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강이를 보더니 우리 일행이 가는 곳을 물어 보았다.

그 사람은 다른 아닌 광양의 교관이었다.
그때 장끼 한 마리가 끽끽거리며 울었다.

이백이 활시위에 오늬를 메우고
주위를 둘러싸자 장끼가 날아갔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웃었다.

우리 일행은 지금껏 구름과 물속에 있었기에
구름과 물이 아니면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지금 막 인간 세상에 내려와보니, 보이는 것은
광양 교관이 지나가는 모습과 날아가는 산꿩 뿐.
이 역시 볼 만하니, 어찌 식견을 기를 수 없겠는가?

저녁 무렵 즈음하여

하동 옥종면 정수리 삼장골 정수역에 도착.
객관 앞에는 정씨의 열녀문이 서 있었다.
정씨는 승지 조지서의 아내이며
문충공 정몽주의 현손녀이다.
승지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 높은 기상은 세찬 바람이 휘몰아쳐
벽안에 있어도 몸이 춥고 떨릴 정도였다.

그는 연산군이 선왕의 업적을 잇지 못할 것을 알고
10여 년 물러나 있었지만 그래도 화를 면할 수 없었다.

부인은 적몰되어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젖먹이 두 아이를 끌어 안고
등에 신주를 지고 다니며 아침 저녁으로 상식
그 일을 멈추지않아 절개와 의리를 모두 지켜낸 것.

높은 산과 큰 내를 보고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3군자는 높은 산과 큰 내.

10층 산봉우리 위에 다시 옥 하나를 더 얹어놓은 격
큰 내 물결 위에 둥그런 달 하나가 더 비치는 격이다.

바다와 산을 거치는 3백리 여정길에 본 세 군자의 자취
산과 물을 본 뒤 인간세상을 보니, 하루만에 불쾌한 생각.
산속에서 열흘을 지내며 품은 좋은 생각이 하루만에 물거품.

훗날 정권을 잡은 이가 산수를 구경하러 이 길을 온다면
어떤 마음을 가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될 것이다.

또한 산속 바위에다 이름을 새겨둔 것이 많았으나
세 군자의 이름은 결코 바위에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름은 반드시 세상에 전해질 것이니,
만고의 역사를 바위로 여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아닐까?

홍지가 숙수를 시켜 술과 밥을 역관에 보내온 지 4, 5일
생원 이을지와 수재 조원우가 여기에 와서 보고 내려갔다.
날이 어둡자 을지의 부친이 술을 가져왔고 조광우도 왔다.

밤에 우점에 갔다. 방 하나의 크기가 겨우 한 말 정도였다.
허리를 구부려 들어갔다. 방은 다리뻗을 수가 없을 정도였고
벽은 바람도 가리지를 못해 처음에는 답답하여 견디지 못할 듯,

조금 뒤에는 네 사람이 이마를 맞대고 베개를 뒤섞어 단잠.

사람 습성이란 잠깐 동안에도 낮은 쪽으로 내려가는 것
전날 청학동에서는 신선들이 된 듯해도 만족하지 않았다.
또 신흥동에서는 신선이 된듯 하면서도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은하수를 걸터 타고 하늘에 들어가려나,
학을 잡고 날아올라 인간 세상에 내려오지 않으려나.

그러나 모두들 좁은 방안에 몸을 굽혀 잠자면서
또 그것을 자기의 분수로 달게 받아 들이고 있다.

이것은 비록 현재의 지위가 편안하다고 하더라도
그 수양을 쌓아야 하며 머무는 것이 낮으면 안된다.

또한 착한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악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발전과 퇴보 차이는 단지 발 하나 까딱하는 사이


4월 25일

역관에서 아침을 먹고 각자 흩어져 떠나려 하니
왠지 가슴아파 잠시동안이나마 서로 머물러 있었다.

인숙은 서울에 살고 있고, 강이는 사천으로 가야 하며,
우옹은 초계로 돌아가야 하고, 나는 가수에 살고 있으며,
홍지는 충청도 보은에 살고 모두 나아가 오륙십 내지 칠십줄

서로가 2, 3백리 내지 5백리 또는 천리 쯤 떨어져 있다.
훗날 다시 서로 만난다는 것도 기약하기 참으로 어려우니,
어찌 이별을 슬퍼하지 않겠는가? 강이가 술잔에 술을 붓고

"지금 이 순간의 이별에 어찌 할 말이 있겠는가?"

눈으로 보고도 말을 잊는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다.
모두들 할 말을 잊고서는 이내 말을 타고서 떠났다.

진양 수곡면에 있는 칠송정에 이르렀다.
높은 누각에 오른 뒤 배타고 다회탄을 건넜다.

인숙은 강을 따라서 내려갔다.
강이는 다시 한 마장을 더 가서 작별.
나는 우옹과 함께 쓸쓸히 돌아왔는데,
망연히 넋을 잃고 있었다.

지리산으로 떠나던 날 우옹과 묵었던 뇌룡사에서 잤다.
다시 우옹과도 이별을 했다.
활 같은 초승달이 하늘에 걸려 있고 드문드문 새벽별이 떠있다.
이와 같이 서글픈 마음은 정녕 춘정에 겨워하는 처녀와 같은 것.

이번 여행을 함께 한 여러 사람들이
내가 두류산에 자주 다녀 그 사정을 아니
나로 하여금 여행의 전말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일찍이 두류산을 덕산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째,
청학동과 신흥동으로 들어간 횟수 또한 세 번이었고,
용유동 세 번, 백운동이 한 번, 장학동 들어간 것이 한번.

그러니 어찌 산수만을 탐하여
왕래하기를 번거로워할 것인가?

나름대로 평생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니,
오직 화산의 한쪽 모퉁이를 빌어 그곳을
일생을 마칠 장소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머무를 수 없음을 알고 배회하고
돌아보며 눈물흘리며 나오곤 하였으니,
이렇게 했던 일이 무려 열 번이나 되었다.

이제는 박이 시골집에 매달린 것처럼
걸어다니는 하나의 시체가 되어 버렸다.
이번 걸음은 또 다시 가기 어려운 걸음이었으니,
어찌 가슴이 답답하지 않겠는가?

내 이를 두고서 일찍이 시를 지었다. 다음과 같다.

'죽은 소 갈비뼈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주파했으나
썰렁한 까치집같은 가수마을에 세 차례나 둥지를 틀었네.'

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몸을 온전히 하고자 하는 온갖 계책 모두가 어긋났으니
이제는 이미 방장산과의 맹세조차 어기게 되었네.

이번에 모였던 여러 사람들이 다 길 잃은 사람이니,
어찌 나만 허둥지둥 돌아갈 곳이 없겠는가?

다만 술에 취해 즐거워하는 이들을 위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면서
그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였을 뿐이다. - 끝 -



.........
해설.
.........


남명의 두류산 유람은 경치만 즐긴 것은 아닌듯.
적지 또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을 답사.
당시를 회고하면서 자기 반성의 계기로 삼은 듯.

남명이 고려의 충신 한유한 은둔지 낙양에 들른 것.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한 일두 정여창 유적을 찾은 것.

4월 16일 정오 도탄에 배를 정박하고
정여창의 옛 집터를 둘러본 남명 일행
그날 오후 쌍계사 석문에 도착한 남명.

쌍계사 일주문 올라가기 전 남명이 보았던 것
지금은 온갖 상점 인근에 옛모습으로 남아있다.
쌍계사 주위를 둘러본 남명이 소감을 남긴 기록.

"서쪽으로 벼랑을 무너뜨리고 돌을 굴리며
백리 밖에서 흘러오는 시내(현재 : 화개천)

신흥사가 있는 의신동의 물줄기이고,
동쪽으로는 구름 속에서 새어나와 산을 뚫고
까마득히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의 물줄기이다.

절이 두 시내 사이에 있어 쌍계라 부른 것.”


18일 날이 밝자 불일암(佛日菴)에 오르고
불일폭포도 구경하려 했으나 어제 내린 비.
길이 젖어 갈 수 없어 신흥사로 가려 해도
시냇물이 불어 쌍계사에 그대로 머물게 된다.

19일 아침밥을 일찍 먹고 청학동으로 떠났다.
청학동은 도교의 이상향인 무릉도원을 말한다.
푸른 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청학동이라 한다.

쌍계사 뒤편으로 2km 정도 오르면
지리산 비경 중의 하나인 불일폭포.
그 곁 불일암터가 청학동이라 생각.

불일암 뒤쪽 봉우리에 올라갔다가 들른 지장암
목단꽃 흐드러지게 핀 그곳에서 쌍계사로 하산.
등산로 초입 팔영루에서 기다리는 일행과 합류.

이공량 이정등과 절 뒤채 동쪽 방장실에서 잔다.
20일 신응사를 찾아가자 중들이 술과 과일을 대접
남명은 바위 위에서 춤추며 실컷 즐기다가 시 한수.

................................
시냇물 절벽에 부딪쳐 흐르고,
산에는 봄빛 짙구나.

겸손과 자랑 심하지 않아.
그대를 바라보고 앉았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