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법주굴
광덕사교 지나 이정표에서 우측
광덕사지 찾아가는 길목.
광덕사지..기도처.
광덕사지.,샘.
암법주굴.
요즘 답사 산행지로 각광받는 명소.
지리산 관리공단에서 막아놓은 금줄.
그래도 답사산행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리산 매니아들 간에.,최우선 화제거리.
영신대. 암법주굴, 청학연못, 지리산 十대.
4곳에 관한 화제거리가 인사말보다 앞선다.
아직 산꾼에게만 알려진.,암법주굴.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램.
관리공단에서 조속히 개방하길 바란다.
지리산의 이성계 기도처였다는 굴.
일명 '이성계굴'이라고도 불리운다.
옛 기록을 보면 남해가 보였다는 굴.
그는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암법주굴은 남해와 관련이 있을듯 싶다.
남해 금산 7 경은 이성계의 백일 기도처.
민생 안정과 이조의 창건을 구상했다는 곳.
금산 38경 중 1경 망대에 있는 고려의 최남단 봉수대
29경 감로수는 이조 숙종이 병을 고친 샘(상사암 아래).
34경 부소암은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유배되었다는 곳.
35경 상주리 석각은 서불의 흔적이 있는 곳.
남해 앞바다는 다도해로 애워싸인 천연 항구.
수백척 선박이 동시에 태풍과 풍랑을 피할 여건.
'남해는 해상왕국인 고려의 전략적 요충지'
이조건국 전, 이성계의 지리산 기도처., 암법주굴.
그는 이곳에서 남해 앞바다와 관련된 구상을 한듯.
그가 이곳에서 어떤 구상을 했는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상당히 중요한 구상을 이곳에서 했던듯.
옛 문헌 기록들과 지도 상의 이곳 표기가 그 증거.
암법주굴이 문헌 상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463년
.............<이륙>의 두류산록 일부.................
自天王東下。有千佛菴,法戒寺。自千佛小北而上。
有小窟。東臨大海。西負天王。絶有淸致。號岩法主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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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부분 <號岩法主窟(호암법주굴)
<신동국여지승람> 국역본에서는 암법주굴(岩法主窟)이라 한다
대부분의 고서국역에서는 한결같이 <신동국여지승람>을 따른다.
문제의 마지막 구절인 <號岩法主窟>을 국역할 때
“바위(岩)를 법주굴(法主窟)이라고 부른다(號)”
'그렇다면, 암법주굴이 아닌 법주굴이 맞는걸까?'
고지도(古地圖)에는 법주굴(法主窟)로 표기
<조선지도> 제작연대 1750에서 1768년 사이
<동여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법주굴(法主窟)
동여도는 19세기 중엽 金正浩가 제작
대동여지도 저본으로 삼았던 조선전도
木版本 '대동여지도'와 달리 채색 필사본.
요즘 암법주굴 이름에 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암법주굴 기록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등장.
암법주굴은 이조시대에도 많이 알려졌던 명소였다.
.............이긍익 作 연려실기술 中에서...........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千佛菴)이 있고,
암자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굽어보며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어
맑은 경치가 절묘(絶妙)하다.
이 굴을 ‘암법주굴(巖法主窟)’
'연려실기술'은 이조 정조 때의 학자 이긍익 作.
태조에서 현종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서 59권 42책.
이긍익(1736~1806)은 본관 전주. 호 연려실(燃藜室).
부친에게 수학, 학문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실학을 제창
고증학파 학자로 소론파로 노론이 집권하자 여러번 귀양
저작(著作)은 많았으나 겹치는 귀양살이로 거의 유실되고
전해오는 대표적 저서로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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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법주굴은 이름,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던 곳.
기록으로만 전해왔고 그 위치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
하여, 어딘가에 있을 암법주굴 위치는 상당한 논란거리.
그 논란 중 가장 신뢰감 있던., 2가지 옛 설화.
............'암법주굴에 대한., 옛 설화.'...............
1. 암법주굴에 얽힌 설화 - 로타리산장 관리인 조재영 씨
"암법주굴은 이성계(李成桂)가 기도를 드리던 곳 中 하나.
그 위치는 법계사 우측 2㎞ 지점이다."라고 주장해 왔었다.
2. '다큐멘터리 지리산'을 쓴 김경렬 씨.
"암법주굴은 법계사와 천왕봉 사이 암자
절이라기보다 천연의 수도처였다."고 했다.
동학 농민 항쟁과 항일 의병들의 부상병 치료소.
여순반란 때 빨치산 야전병원이 되었다는 은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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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곳 외에도 암법주굴 물망에 오른 곳은 여러 군데.
천왕봉 아래 있는 토굴도 물망에 자주 올랐던 곳
해발 1900m 부근 천연암굴 안에 붉은 페인트 글씨.
종교단체의 흔적인데, 20~30명 들어갈 수 있는 동굴.
천왕봉에서 중봉 안부로 내려서는 벼랑 허리의 동굴
그러나, 이곳은 옛 문헌 상 위치와 일치하지 않았다.
그동안 구전으로만 그 위치가 전해왔던 암법주굴.
많은 사람이 암법주굴을 찾아나섰지만 찾지 못했다.
청학동을 찾아나섰지만 찾지 못했던 옛 성현들 처럼.
'그러나, 1463년 기록을 근거로 찾아낸 암법주굴.'
일명 '이성계 굴.'을 찾게했던., 몇 구절 글귀.
암법주굴을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
옛 기록의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했던 쾌거였다.
..................1463년 이륙의 유지리산록 일부..............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과 법계사가 있다.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를 향하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다.
지극히 맑은 운치를 지녔는데., 암법주굴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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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법주굴> 은 그 위치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명만 전해져 왔던 <천불암>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기 때문.
<암법주굴>을 찾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단서는., <유지리산록>.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암법주굴.'
천왕봉 남동쪽 혹은 남쪽의 아래 암법주굴이 있고
암법주굴 남쪽 혹은 남동쪽 아래 천불암이 있다는 것
하여, 구전으로 전해오던 <암법주굴> 위치를 찾아낸 것.
밝은 화강암 거대한 바위가 초가 지붕같이 튀어나와
지붕을 만들고 그 바위 뒤로는 숲에 가려진 병풍바위.
양지바른 마당 건너 석벽이 담을 치고있는 천혜의 토굴
지리산 토굴 중 첫 손을 꼽을 수 있는..암법주굴.
석굴 안에서 밖으로 바라본 넓은 마당
마당 주변에 담처럼 둘러 서있는 석벽
마치 인공으로 정교하게 만든 정원같다.
석벽 위에서 바라본 탁트인 전망과 남해 바다
1463년 이륙 선생의 두류산록 내용과 일치한다.
법계사에서 천왕봉 가는 등산로 옆에 있는 석굴
법계사에서 개선문 올라가는 길 옆에 있는 석굴
그동안 암법주굴 또는 천불암으로 추정되었던 곳.
암법주굴 위치가 밝혀지며 확실해진 천불암 위치
주변 정황으로 볼 때 광덕사지 터가 곧 천불암인듯.
해발 1450m 광덕사지, 북쪽으로 해발 1560m 암법주굴
'천불암 암자가 있었던 곳은.. 광덕사지 터.'
2004년 암법주굴 위치가 밝혀진 후 답사 열풍.
옛 선현들 유두류록 따라 답사 산행하는 산꾼들.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어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 2006년 6월 4일 암법주굴 답사 -................
중산리-순두류-광덕사지-암법주굴-
법계사- 세존봉 능선 - 두류 - 중산리
와룡산 사랑 100회 기념 산행
'국립공원 출입차량' 표를 달고
시멘트 도로따라 순두류 자연학습원
길가에 '사찰 방문차량’ 이름표 차량들.
30년 전 순두류목장이었던 해발 700~900m 분지
낙엽송 길을 따라 걷다가 출렁다리도 건너 보고
나무 다리도 지나 돌팍을 밟으며 지리로 빠져든다.
하늘은 낮은 구름이 깔리어 산행하기에 적절하고
무언가 모를 시원함과 청량감을 주는 짙은 숲향기
이어 계곡 물소리는 오감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법계사 1.1㎞ 안내판과 함께 드러나는 광덕사골
광덕사교 지나 금줄 넘어 그 아래 산죽 계곡 건너
오른쪽 희미한 산길 따라 진행하다가 다시 산죽 밭
역사속으로 이미 사라져버린, 옛 등산로.
누구인가에 의해 떼어져 버려진., 표식기.
그 표식기가 그곳이 등산로임을 말해준다.
넝쿨과 이끼 풀에 덮혀 길 흔적조차 없다.
광덕사지 기도처에는., 맑고 시원한 샘물.
샘물은 기도처에서 없어서 안될 중요 요소
좌측 산죽밭을 헤치고
암법주굴로 향하는 길.
계곡을 건너지 않고 그대로 올라가면
하늘이 보이는 오른쪽 산죽 밭에 흰 바위.
여기가 이성계의 기도처로 알려진 암법주굴.
담장처럼 애워싸인 바위벽 위에 전망대.
1463년 이곳에 오른 이륙이 보았던 남해
지금은 시계가 좋지 않아 보이지 않는 남해.
담장 안에는 수십명이 둘러앉을만한 공터.
비를 피할 수 있는 버섯처럼 생긴 큰 바위.
큰 바위 아래에는 비박할 만한 공간이 있다.
담장처럼 애워싼 바위벽 안에 숨은 암법주굴.
<이성계굴>이라 불리울만큼 명당 기도처이다.
암법주굴에서 하산길은 법계사 방향 오솔길.
암법주굴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 생긴 오솔길.
얼마 후, 개선문 아래 법주사 위쪽 나무다리.
여기서부터는 중산리로 하산하는 일반 등산로.
법계사- 로타리 산장 - 순두류 - 중산리 하산.
08:00 (해발 631m) 중산리 매표소
08:30 (해발 883m) 순두류 자연학습장
09:00 (해발 894m) 신선너덜
09:30 (해발 949m) 광덕사지교
10:00 (해발 1148m) 휴식
10:15 (해발 1165m) 합수부(광덕사골/천왕샘골)
10:25 (해발 1181m) 1기도처
10:45 (해발 1312m) 2기도처
11:00~11:10 (해발 1359m) 3기도처 (광덕사지터)
제 4 기도처
광덕사지터에서 광덕사지골로 나와
본류를 15분 올라, 우측 너덜 5분 거리.
11:50-13:40 (해발 1535m) 5기도처 암법주굴(점심식사)
14:15 (해발 1545m) 법계사-천왕봉 간 등산로와 만남
14:25 (해발 1630m) 천왕샘골 (석굴)
14:45 (해발 1367m) 천왕샘골 (광덕사지)
15:05 (해발 1350m) 법계사
15:40 (해발 1309m) 로타리 대피소
16:20 (해발 1239m) 삼거리 (세존봉 능선 순두류/칼바위)
16:45 (해발 895m) 주 등산로 만남 (순두류-법계사)
17:17 우천 허만수비
순두류 위령탑을 지나,
화장실옆 계곡이 들머리.
광덕사교를 건너면 광덕사골 입구
계곡을 오르다가 넓은 암반 휴식처.
천왕샘골 합수부 지나 광덕사골 본류.
제1기도처를 들리고
제2기도처도 들리고
제3기도처(광덕사지터)
광덕사골 본류 따라 10분 오르다가
계곡 우측 위에 있는.. 제 4 기도처
다시 광덕사골로 15분 올라 계곡 우측
제 5기도처 암법주굴은 일명 이성계 굴.
석굴 아래에서 약 두시간 동안
화기 애애한 점심 시간을 갖으며
좌측 바위벽을 오르면 탁 트인 전망.
(음주 후 올라가면 추락하기 쉬운 곳)
그곳을 내려와, 성벽같은 수직벽 아래를 지나
천왕샘골을 건너, 다시 사면을 타고 5분 오르면
법계사-천왕봉) 등산로가 나타나고 곧 법계사 경내
............................................................
.................찾아가는 길......................
광덕사지 들머리인 로타리산장 1.1㎞ 지점 지나
광덕사교 못미친 곳에 쉽게 건널 수 있는 바위지대.
광덕사지 왼쪽 100 m 계곡 따라 암법주굴로 가는 길.
뿌리채 뽑혀 급류에 떠내려온 나무들이 길을 막는 계곡.
좌로는 법계사 가는 길, 우측 50 m 전방에 둥근 흰 바위.
흰바위를 왼쪽으로 끼고 산죽밭 사이로 돌면., 암법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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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사지.
광덕사는 잃어버린 지리산의 옛 암자 중 하나.
언제 세워져 어느 때에 소실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산리 주민들은 광덕사에 관해 잘 알고 있다.
'중산리 주민들이 들려준 '광덕사골'에 관한 구전.'
절터 기가 세서 주지승이 바뀌면 큰 불이 났었다는 설
광덕사지 부근에 이성계의 수도처 암법주굴이 있다는 설.
절묘하게 애워싼 큰바위 담안에 석간수 샘물이 있다는 설,
주민들로부터 전해듣고 무작정 찾아나선 산꾼들.
그 결과 마침내 구전 속 광덕사지가 드러낸., 실체.
무엇보다 이곳 매력은 등산로와 동떨어져 있다는 점.
중산리에서 천왕봉 오르는 기존 등산로인 칼바위,
순두류, 통신골 등 북적대는 인파에서 벗어난 곳
광덕사지 들머리 산길은 순두류 코스와 동일.
법계사 가는 삼거리에서 법계사 쪽 기존 등산로
20분후 만나는 출렁다리를 건너 등산로 아님 이정표
마야계곡 입구 등산로 따라 40분 오르면 나무 이정표
법계사 1km 천왕봉 3.2km 이정표에서 10분거리 지계곡
그곳 건너 약간 너른 터 우측 바위 뒤로 10m 가면 계곡
천왕샘에서 발원한 작은 물길이
한참 아래 순두류계곡과 합류 후
중봉골과 합수되는 계곡 왼쪽 길.
길이 점점 희미해지며 드러나는., 광덕사골 속살
그중 가장 볼 만한 것은 제각각 떨어지는 3단 와폭
와폭 지나면 길은 계곡을 거슬러 우측으로 이어진다.
계곡을 왔다갔다 하는 구간이 많아 약간 까다롭다.
나침반은 3백50도 방향으로 놓고 40분 정도 오르면
20m 높이 바위가 나타나면 계곡을 버리고 우측 안부
그 주위에 예사롭지 않은 큰 바위들이 널려있다.
이 일대 넓은 공터가 '잃어버린 암자' 광덕사지.
가장 위쪽 너럭바위 아래는 무속인들의 제단 흔적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샘물 수량도 풍부하다.
광덕사지에서 천왕봉 등산로는..나침판 240도.
법계사와 광덕사지 오가는 길로 길이 뚜렷하다.
이 외길을 따라 30분쯤 비스듬히 산사면을 걸으면
잘록한 부근에서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지릉과 만난다.
잘록한 지점을 넘는 길은 법계사 가는 길 이며,
이 지릉을 타면 바로 개천문으로 향하는 길이다.
개천문에 도착 후 천왕봉까지는 기존 등산로이다.
광덕사지에서 옹달샘이 있는 바위 뒤 키작은 산죽숲
천왕봉 동쪽 봉에서 흘러내린 지릉에 오를 수 있으며 ,
지릉을 따라 천왕봉 오르는 길은 써레봉 길을 닮았고,
지릉 고개에는 마야계곡(중봉골) 등산로도 열려있다.
동학혁명에 실패 후 쫓기던 농민들.
대원군 시절 탄압받던 천주교 신자들.
일제 치하에 항거했던 의병 및 독립투사
그곳 등산로들은 은둔자들 옛 도주로.
그러한 사실을 대변해주는 계시판 하나.
계시판 내용이 눈길을 끌어 여기에 소개.
....................지리산 신앙 유적지.....................
이곳은 1943년 9월에서 1945년 8월 18일까지
대한의 젊은이들이 태평양 전쟁터로 잡혀가고
꽃다운 처녀들이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가던
암울했던 시대.. 일본의 신사참배 창씨 개명.
강제징용과 징병, 교회해산 명령을 목숨걸고
거부한 정인섭 신종균 최옥만 강한룡 20 여명
제 7일 안식일 재림교회 신자들이
신앙양심과 민족혼을 지킨 신앙 유적지.
1999.11.6 삼육대학교 대학원 신학대학원.
..............................................................
주의할 점.
암법주굴이나 광덕사지 코스는 非지정 등산로.
금줄을 넘어서면, 벌금 50만원을 각오해야 한다.
학술적인 답사목적이라도 사전 허가를 득해야 한다.
지리산 十대.
옛부터 지리산에서 영험한 기로처로 알려진 10 곳.
요즘, '지리산 十대'를 찾는 산행이 붐을 일고 있다.
지리산 매니아들 간에는 테마 산행지로서 인기 높다.
수천년 세월 우리나라 민중들의 무속신앙 발원지
그 대표적인 전설이 옛날 '천신의 딸' 성모 마고 설.
딸 여덟을 무당으로 길러 팔도를 다스리게 했다는 설
성모 마고가 천왕봉에 있던 성모상 주인공이란 전설.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신 설
성모상을 민중들이 정신적인 지주로 추앙해왔던 사실.
택리지에 의하면 민중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천왕봉 성모사에 모여 치성을 드리고 있는데
추위를 견디지 못해 남녀가 부둥켜 안을 정도
이 보다 큰 일은 농사철에 농사는 돌보지 않고
치성 드리는데만 정신이 팔려 실농을 면치 못해
조정에서 이를 금지했으나 별 효력이 없었다 한다.
지리산에서 무속신앙은 성모상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큰 산과 강 그리고 땅 나무 등에도
신이 붙어있다고 믿었기에 치성을 드리고 굿판을 벌였다.
이러한 치성의 행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지리산의 큰 바위나 물줄기 있는 곳마다 기도처.
대성골 상류의 영신대를 비롯,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신선너덜,
백무동 굴바위당, 칠선계곡 용류담,
서산대사가 도를 깨우쳤다는 피아골 산장 뒤,
중산리 계곡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 모두가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로 알려지며
득도 희망자, 무속신앙 신봉자, 기도객이 몰린다.
등산객을 가장해 들어오는 지성객들은 그래도 나은 편.
아예 북이나 징, 꽹과리에다 돼지머리 과일 떡 할것없이
보따리를 꾸려 와 기도처마다 굿판을 벌이는 일이 다반사.
이 때문에 영신대 바위에는 온갖 글귀들이 새겨지고
계곡에 음식물들이 널려 공단관계자들의 끈질긴 제재
백무동과 한신계곡 물줄기와 바위굴 등지도 마찬가지
백무동 굴바위당은 아들 못 낳는 여인네들의 기도처.
또한 한신계곡 가네소 폭포는 기우제 장소로서 유명.
우리나라 3대 계곡 인 칠선계곡과 용류담도 기도처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향해 기도하고픈 심정.
누구나 공통된 심리라 계곡 초입부터 기도처로 이용.
엄천강변 용류담은 산속의 호수와 같은 경관
교통편이 좋아 최근에 더욱 이용되고 있는데
아예 굿당이 지어져 있고 언제 가더라도 굿판
이밖에 이름난 봉우리 계곡 어느곳 할 것없이
지리산에는 아직도 샤머니즘 흔적이 남아있다.
지리산의 이러한 토속신앙은 근대에 이르러
주로 극성스런 무속신앙 신봉자에 의해 왜곡
지리산 지역 주민들의 정서에 동화된 각종 제례
평화제(산청), 약수제(구례), 천령제(함양) 행사
지역 주민들 간에 화합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신을 영험한 존재로 경배 대상으로 여기는 한
지리산의 토속신앙은 계속될 것으로 보아진다.
요즘 옛 기도처들을 탐방하는 붐이 일고 있다
..............................지리산 十대......................
문수대, 종석대(우번대), 묘향대, 서산대, 무착대,
향운대, 문창대, 영신대, 향적대, 금강대(미확인)
...............................반야봉 7대................................
문수대, 묘향대, 종석대, 만복대, 금강대, 무착대, 서산대.
............................천왕봉 5대........................
향적대, 문창대, 영신대, 소년대(영랑대), 향운대.
智異山 十臺(지리산 10대)는 옛부터 수도처로 알려진 곳.
지리산 十대 기도처 대부분 반야봉과 천왕봉에 몰려있다.
소년대(영랑대)는 하봉에 위치.
차일봉 종석대 = 우번대 = 관음대.
...............'지리산 十대'., 위치.................
1.노고단 아래 질매재 가는 길에 문수대.
2.종석대 아래에 있는 우번대.
3.반야봉 중봉 아래의 해발1450m 의 묘향대.
4.피아골 산장 위의 서산대.
5.불무장등에서 직전마을 내림길에 있는 무착대.
6.하봉 아래 두류능선의 향운대...
7.법계사 위의 문창대...
8.영신봉 아래의 영신대...
9.장터목 산장 샘터 옆의 향적대...
10. 금강대는 뱀사골에 있다고 알려졌을 뿐
..................................................................
피아골 직전마을 깃점으로 원점회귀 가능한 <무착대>
직전마을에서 불무장등 능선(1200m) 좌측 10분 거리.
희미한 길따라 걷다보면 누가 보더라도 명당 기도터
바위벽 아래 기도처에서
왕시루봉 능선조망이 일품.
사람이 기거한 집터의 흔적들.
반야봉 사면을 차지하고 있는 <묘향대>.
신기루 같은 이미지는 벗어나있는 기도처.
이제는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찾기가 좀 까다로운 곳에 있는 <서산대.>
돼지령 약간 못 미처 1435봉 피아골산장쪽
능선 상에 산길도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한다.
해발 약 1100m 쯤에 이른 뒤
능선을 벗어나 우측 너덜 사이
5분 정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위치.
어렵게 찾은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세곳 기도처 중 가장 넓고 아늑한 곳.
얼마전 헐린 집터와 가재도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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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처는 어떤 곳이기에 명당터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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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10대 공통점은 병풍 같이 애워싼 암벽.
그 아래엔 석간수 식수가 샘솟아 흐른다는 사실.
지리산 10대에는 대부분 구도자들이 머물고 있다.
암벽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 상에서 해탈을 상징.
갈증은 구도자가 극복해야 할 인간의 원초적 본능.
죽음과 갈증은 구도자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어려움.
'구도자의 길을 일깨워주는 암벽과 샘물.'
묘향대,문수대,우번대에는 수도자가 머물고 있다.
무착대,서산대,향운대는 암자를 철거해 아무도 없다.
지리산 10대는 수도처답게 신령스러운 기운이 늘 감돈다.
묘향대,영신대,문수대,문창대,향적대, 관음대(우번대)
지리산의 10대로 옛부터 알려진 기도처 임에 확실하다.
만복대,장군대,영랑대,소년대는 수도처와는 거리가 있다.
관음대와 영신대는 10대 기도처 중 가장 기가 강한 곳.
우리나라 전국 어느 산이나 대가 붙은 지명은 유명 기도처.
서울에 있는 북한산에서 예를 들면 백운대 만경대가 그렇다.
백운대 정상은 길이 잘 닦여져 위험하지 않은 기도처.
만경대 정상은 험한 침니를 올라야하는 위험한 기도처.
올라가기 보다는 내려서기가 더욱 위험한 위치의 기도처.
만경대 정상에는 구도자가 쌓았던 돌탑의 흔적.
낙석의 위험성이 있어 북한산 관리공단에서 제거.
예전에는 작은 성곽처럼 쌓아올렸던 바람막이 돌탑.
구도자가 그안에 밤새도록 들어앉았던 기도처.
만경대 구도자가 일반인 눈에 띤 적은 없는 듯.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시각에만 올라가는 듯.
누가 그곳에 돌탑을 쌓았는지는 베일 속 수수께끼.
인수봉 정상에 있었던 수수께끼 속의 돌탑.
1929년 9월 인수봉 초등 기록보다 이전 돌탑.
아직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는 베일속 수수께끼.
우리 선조가 그 전에 올랐다면 '설교벽 능선'뿐.
그곳 역시 오늘날 전문 산악인조차 오르기 힘든 곳.
등반장비조차 없던 시절 등반이라 귀신이 곡할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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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인수봉의 돌탑은 누가 쌓았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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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는 10대 외에도 세존대, 문창대, 무착대, 서산대,
의론대, 창불대, 신선대, 청량대, 고소대, 봉황대, 취적대,
마적대, 환희대, 금대, 오대 등이 널리 알려진 기도처이다.
지리산의 기도처는 옛부터 구도자들의 은둔처.
지금은 구도자들의 움막이 거의 대부분 철거된 상태.
환경보호를 위해 기도처 움막들을 철거하는 공단직원.
쌍방 간에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되어왔던 숨은 공방전.
'옛 지리산 산꾼들의 야영지로 각광받았던 기도처.'
지리산의 기도처는 불교와 모두 맥을 같이 하지는 않는다.
불교 도교 유교는 고대사회부터 한반도에 정착된 외래 종교.
우리나라 민족에게는 전통적인 토속적 민속신앙이 따로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안방을 찾이한 외래종교.
토속적인 민간신앙은 미신으로서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이젠 사라져가는 신토불이 민간신앙도 보호해야 할 시기.
그 민간신앙에 우리 민족의 전통과 풍습이 담겨있기 때문.
'지리산에 기도처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옛 사찰터가 많은 것이 첫번째 요인으로 보인다.
고대 민속신앙이 일어난 터전 위에 뿌리내린 불교.
옛부터 지리산 일대엔 민간신앙과 무당이 많았던 곳
이젠 꺼꾸로 임자없는 옛사찰터가 기도처로 각광.
원래, 고대 무속신앙 명당터가 제 주인을 찾은 듯.
그러나, 자칭 도사들 탓에 미신으로 전락하는 무속.
'전통적인 무형문화제로서 되살려야 할 듯.'
이륙의 유두류록에 나오는 지명 가섭대는 영신봉.
이조시대 억불정책으로 옛 사찰터에 들어선 기도처.
지리산 十대 최고 기도처로 알려진 영신대가 그 예
불교 유교 도교는 한반도에 뿌리내린 외래 종교
고대사회 한반도 민간 신앙 위에 뿌리내렸던 종교.
지리산 十대에는 한반도 고대국가 제사 터도 있다.
'즉, 기도처가 모두 사찰터는 아니었던 듯..'
고대국가들의 흥망성쇄에 따라 옮겨다닌 제사터.
그 제사터가 지금도 기도처로서 명맥을 이어온듯.
따라서, 지리산 十대 기도처는 저마다.. 전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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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전설을 찾아서.. 음미해 볼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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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향대.>
반야봉에서 중봉을 지나 동북동 방향 약 700m 아래
마야부인 전설 속의 반야가 살았음직한 토굴 묘향대.
산새가 지저귀고 다람쥐가 친근한 이웃인듯 뛰노는 곳.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 수도처로 알려진 곳.
반야봉에서 가장 아늑하고 깊은 맛이 있는 기도처.
만약 반야봉이 한 그루의 나무라면 그 나이테 중심
반야봉에 심장이 있다면 이 곳이 아닐까 여겨지는 곳.
반야봉은 일명 < 깨달음의 산 >또는 < 어머니 산 >
묘향대 기도처는 구도자의 머릿 속에 그려진 <허공의 꽃>.
'허공의 열리고 닫힘이 다양하고 자유자재로운 곳,’
어느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순간순간 변하는 모습
보이는 대로 실체이고,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실체이다.
구름에 갇히면 갇힌 대로, 어둠에 묻히면 묻힌 그대로
'더 좋고, 덜 좋다는 생각은 오직 나그네 마음일 뿐.'
<영신대>
영신봉 남서쪽 약 500m 아래 있는 기도처가 영신대.
대성골에는 도 닦거나, 푸닥거리 하는 곳이 참 많다.
백무동 굴바위를 포함 전국의 무속인이 오는 대성골.
도를 깨우치겠다며 자기 나름대로 은밀하게 수도.
산세가 절묘한 명당 자리를 찾아내 구도생활을 한다.
이런 구도자들이 '최고의 기도처'라는 명당이 영신대.
'영신사 터이자 대성골 발원지에 위치한 기도처.'
< 무착대 >
우측으로 멀리 노고단이 보이는 불무장등 능선.
좌측으로 흘러내리다 기세좋게 다시 치솟는 곳.
그 우람한 능선 뒤 좌측으로 버티고 선 왕시루봉.
무착대 절벽 아래로 피아골로 가는 완만한 능선.
부드러운 산세에 어느덧 마음 편안해지는 기도처.
주변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저절로 애착이 가는 곳.
<우번대, 종석대, 관음대 > : 차일봉.
노고단과 자매봉을 이루고 솟아 있는 차일봉
그 산세가 마치 차일을 친듯 하여 붙여진 지명.
우번대, 종석대, 관음대 여러 이름인 정상의 암봉
'자연 전망대로서 구실도 톡톡히 하는 기도처.'
차일봉 남쪽 천은사 계곡 상류 깊은 곳에 상선암이란 선원.
신라 우번조사가 젊은 시절 10년수도를 결심하고 혼자 9년째
그러던 어느 봄날에, 절세 미녀가 요염한 자태로 우번을 유혹
여인에게 흘린 우번은 수도승 신분을 잊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기화요초 만발한 숲을 지나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그녀.
우번은 그녀를 놓칠까봐 정신없이 뒤따르다 보니까 어느덧 정상
그런데, 우번을 유혹하던 여인은 사라지고
그녀 대신 우번을 바라보고 있는 관음보살
깜짝 놀란 우번이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이는 필시 관음보살이 자기를 시험한 듯.
우번은 그 자리에 엎드려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참회
순간 관음보살은 간곳 없고 큰 바위만 우뚝 서있었다.
자신의 수도가 크게 부족함을 그때서야 깨닫게된 우번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토굴 속에서 수도하여 득도.
우번 조사가 득도한 토굴 자리를 우번대라 부르게 됐고,
우번이 득도한 순간 석종소리가 들려왔다 하여.. 종석대
관음보살이 변신해 서있던 자리를 관음대라 부르게 되었다
그후 진응도사, 요화스님, 호음선사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
불도의 영지로 알려져 많은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구도자.
'나는 누군가에게 강요당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다수의 힘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내게 자신과 같은 사람이 되라 요구.
나는, 참다운 인간이 군중의 강요를 받아
이런 식으로 또는 저런 식으로 살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삶은 어떤 삶일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 -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나무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일까?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나무는 다람쥐나 새에겐 둥지를 주고
곤충들에겐 먹이를 주는 고마운 존재.
몸통 가운데가 텅 비어있는 고목의 모습
'마음을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가르침.
고목은 구도자같은 삶을 살아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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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인도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2천 킬로 사막을 하염없이 걷던 혜초
삶과 죽음의 고비를 걸었을듯 추정된다.
신라에서 배를 타고 중국 광저우 거쳐 인도 행.
돌아올 때 파미르 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통과.
4년후에야 당나라 장안에 당도한 신라 구도자 혜초.
당시 당나라에는 한문 번역판 인도 불경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장안에서 인도 불경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는, 왜 목숨을 건 인도 여정길에 올랐을까?
결국, 그는 자신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난듯.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여정 길에 올랐던 혜초.
결국 고국 신라를 떠나 당나라 장안에서 생을 마감.
구도 여정길에 뼈를 묻은 구도자들.
당나라 장안으로 유학간 신라의 원측스님.
인도에서 돌아온 삼장법사 현장스님의 제자.
스승이 가져온 불경번역 작업에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왜 편안한 삶의 길도 있었을텐데,
굳이 돌아오지 못할 험한 길을 택했을까?
18년간 인도 유학길에 오른 삼장법사 현장스님,
60세 인도 여정에 올라 불국기를 남긴 법현(法現)
당나라의 두 스님은 무사히 귀국을 했던 분들이다.
구도자에게는 숨쉬는 한순간 한순간이 곧 수행
윤회 속에 육신의 오고감은 문제되지 않았던 것.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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