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1.( 학사루. 조의제문. 유자광. 김굉필. 도동서원. )

donkyhote 2010. 5. 14. 01:26

학사루. 

함양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함양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
점필재 흔적이 깃든 곳으로 무오사화를 일어나게 한 누각

점필제는 29세때 과거급제했고 40세에 함양군수(종4품)에 제수.
그 이듬해 유자광이 이 고을에 와서 시를 지어 현판을 붙었는데,
이를 떼어 불사른 사건이 화근이 되어 숙청을 당한 누각이 학사루.

 

결국 점필제는 귀양살이를 하고

사후 부관참시 당하는 화를 입는다.

신라시대 문창후 최치원 선생이 이 지방에 태수로 재직시
자주 이곳에 올라 시를 읊은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

서쪽에 객사가 있어 정무를 보며 그 피로를 풀기 위한 장소.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소실되었고
이조 숙종 18년 (1692) 군수 정무(鄭務)가 중수한 기록이 있다.

1910년 이곳에 함양초등학교가 세워질 때도 학사루는 그대로 보존
1979년 현 위치로 이전, 정면 5칸, 측면 2칸 2층 팔작지붕 목조기와. 

 

15세기 함양군수 김종직은 엄천사터에 함양다원 조성

1475년까지 5년 동안 함양군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업적

그후 김종직은 정3품 통훈대부로 승진 한양으로 올라간다.

 

함양을 떠나며 학사루 앞에 느티나무를 심었던 김종직.
지금 천연기념물 407호 느티나무 고목이 그당시의 나무.

 

김종직은 함양군수 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마흔 넘어 얻은 다섯살 아들을 홍역으로 잃었다.
당시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시 한 수에 담았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
다섯 해 생애가 번갯불 같구나.

 

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
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김종직의 죽은 아들 이름은 목아(木兒)였다..
태어날 때 목성(木星)과 관련 있어 지은 이름

하지만 나무와 운명적인 인연을 갖고 태어난듯


최치원이 즐겨 찾고 시를 짓고는 했다는  학사루.
김종직 역시 함양군수 재직시 즐겨 찾았던 학사루

그러나, 김종직이 부관참시되는 비극을 잉태했던 곳

 

 

 

조의제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
그 사실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훈구파와 대립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사림파를 견제하려 하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李宗準)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으나 중종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직이 회복되어, 1689년 영의정에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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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 



유자광은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제거후 권력 장악.
세조에게 발탁되어 병조정랑이 되고 1468년 별시문과 장원.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 강순을 역모로 몰아 제거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1477년(성종 8) 도총관, 이듬해 탄핵을 받아 가산몰수
공신적(功臣籍)을 삭탈 당한 뒤에 동래에 유배되었다.
1481년 공신 회복되고, 정조사 등극사로 명나라 사신.
1491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1493년 장악원제조로 봉직.

성종 때 신진 사림파가 집권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
훈구세력은 연산군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 제거 음모.
유자광은 한때 김종직과 사귀고 추모하는 제문도 지었다.
그러나, 학서루 현판 시를 불태운 김종직과 개인적인 원한

1498년(연산군 4)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
훈구세력 외척을 모아 김종직·김일손을 대역죄로 모함.
무오사화로 사람파를 제거 후 숭록대부에 올라 권력 장악.

1506년 연산군 실정에 반감을 품은 중중반정 세력에 참여.
정국공신 1등으로 무령부원군에 봉해졌다가 이듬해에 탄핵.
관동 유배, 이어 경상도 변군으로 이배되어 눈이 먼 뒤 운명. 

 

 


 

김굉필.



김종직 문하이고 훗날 조광조의 스승인, 유학자.
그를 통해 유두류록의 시대적 배경을 되짚어보자.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 고초를 겪고 살해되고 만다. 

김일손. ·정여창 등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였던 김굉필. 
그는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소학〉에 심취했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의 청정적멸 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척불(斥佛)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던 김굉필

1486년 이조참판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올려
그가 국사에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1494년 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 제거를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키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 이때 조광조가 그에게 '소학'을 배웠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順川)으로 옮겨졌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자 무오당인 죄목으로 죽음
중종반정 뒤 신원,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 상소로 우의정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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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을 태운 소달구지가 곡성 강가에서 잠시 멈추었다.
평안도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 명을 받아 가는 중.
긴급체포 압송 중이 아니라 목에 무거운 칼이 걸리지 않았다.

대역 죄인처럼 상투를 풀어헤친 봉두난발도 아니었다.
호송 나졸들 배려로 소달구지에서 내려 쉴 수도 있었다.
평안도 희천에서부터 소달구지 위에서 시달린 그는 중환자.

김굉필 제자가 되려 따라온 남원향교 교생 최충성
그가 남원부터 뒤따라오며 그를 보살펴주고 있었다.

"순천이 아직도 멀었소."
"한훤당 어르신, 저 고개만 넘으면 순천 이옵니다."

"저 아름다운 강 이름이 무언가."
"모후산에서 발원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보성강이옵니다."

김굉필은 최충성의 섬진강이란 말에 느낀 아련한 그리움
섬진강과 지리산 부근에 도학 동지들이 유난히 많았던 탓.
서울 출생한 김굉필은 그들의 이름을 소리없이 불러보았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내려왔을 때
그 문하에서 도학을 공부한 제자들.

함경도로 유배 간., 정여창(鄭汝昌),
무오사화 때 죽은., 김일손(金馹孫),

하동에서 살다가 능주로 은거해 버린 정여해(鄭汝該),
사종 형제 정여창 권유로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던 그.
연산군 폭정으로 고인이 돼었거나 고초를 겪는 동지들

김굉필의 눈가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천도가 사라지고 살육 광풍이 휘몰아치는 땅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 조차도 부끄러운 일.

자신에게 할 일이 있다면 도학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유배지에서라도 스스로 공부해 수신하는 것뿐이었다.

연산군. 이름은 융, 폐비 윤씨 소생 성종의 원자.

성종이 38세로 승하하자, 세자인 연산군이 등극하면서
김종직에 이르러 막 꿈틀대던 도학의 기세는 멈추었다.
즉위식이 치러지는 1495년 1월 29일, 날씨는 거칠었다.

우박이 언 땅을 두들기며 화살처럼 쏟아진 잿빛 하늘

즉위식이 끝날 무렵, 연산군은 영의정을 불러 명했다.
성종이 기르던 사향사슴이 어정거리자 살기를 띤 연산군
사임을 요청했으나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연산군 장인

"영상, 내 활을 가져오게 하시오."
"전하, 이 경사스러운 날에 활을 무엇에 쓰려 하시옵니까."

"승지더러 어서 활을 가져오게 하시오."
"활을 어디에 쓰려고 하옵나이까."

"지난 날 저 사슴 때문에 아바마마께 꾸중 들은 것을
장인어른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억이 나시지 않습니까."

"네, 전하. 어찌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일찍이 성종이 사향사슴을 애지중지 길렀는데
그 사향사슴은 성종을 두려워 않고 따라다녔다.
형조판서 김종직을 비롯 신하들을 거느린 성종.

정전(正殿)으로 가는 길에 연산군을 보고 불렀다.
그때 그 사향 사슴은 혀로 연산군의 손을 핥았다.
그때 연산군이 사슴을 발로 차자 성종이 나무랐다.

"짐승이 사람을 따르는데 어찌 그리 잔인하냐!"

연산군은 도승지에게 활을 받자 사슴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사슴은 겁내지 않고 장송 사이를 어정거렸다.
그때 연산군이 쏜 화살이 날아가 사슴의 심장을 관통.

"누구든 나를 능멸한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과인의 화살이 누구라도 심장을 겨눌 것이니라.'

신승선은 그순간 사위인 연산군에게 정이 떨어져
영의정을 그만두고 거창으로 낙향할 결심을 굳혔다.
과거급제 한 선전관(宣傳官) 박영(朴英)도 마찬가지.

즉위식 다음 날 박영도 병을 핑계하고 낙향.

김굉필은 소달구지 안에서 작고한 스승 김종직을 떠올렸다.
스승이 앞에서 지켜보는 듯 자신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나졸은 순천이 가까울수록 채찍으로 황소 엉덩이를 후려쳤다.

'이랴, 이랴앗!'

1489년 성종 20년 이른 봄 5년후를 본 형조판서 김종직
연산군 행실로 보아 조정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
김종직은 판서직을 사임 어릴 때 수학한 밀양으로 내려갈 참

김종직이 밀양으로 내려가기 전날이었다.
남대문 밖, 개울가 정자에서는., 송별연
한강 나루터가는 길목이라 송별연의 명소.

서거정도 이별하며 시를 읊조린 적이 있었다.

친구는 날 이별하여 멀리 떠나며 노래하네
무엇으로 보낼 것인가 은 술병이 한 쌍일세

성문 앞 버들가지 꺾기는 어려워라
한 맺힌 꽃다운 풀 어느 때나 잊을손가

올해도 지난해도 늘 두고 어긋나니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이별엔 애가 타네

이별가 세 곡조를 더 노래하고 나니
동편 구름 아득하고 북쪽 나무 망망하다.

故人別我歌遠遊 何以送之雙銀甌
都門楊柳不堪折 芳草有恨何時休
去年今年長參商 富別貧別皆斷腸
陽關三疊歌旣闋 東雲北樹俱茫茫

정자마루 안쪽 중앙에는 김종직이 앉아 있고,
그의 좌우로는 제자들이 오는 순서대로 앉았다.
스승 앞에서는 모두가 제자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남효온, 정여창, 김굉필, 정붕(鄭鵬), 조위(曺偉),
정희량(鄭希良), 김일손, 권경유(權景裕), 권오복(權五福),
이목, 홍유손(洪裕孫), 이총(李摠) 등이었다.

김종직은 낙향하는 이유로 칭병을 들었다.

"병든 몸으로 판서직 수행이 힘들어 사임했다네.
더 늙기 전에 밀양에서 도학에 매진하려고 하네."

"유림의 거목이신 선생님이 계시기에
저희들은 선생님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생기는 의혹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하온데 이제 의문이 생겨도
누구에게 묻고 의지하겠습니까."

"허허허. 걸어갈 힘이라도 있을 때
낙향하려는 것이 이 늙은이의 마음일세.
그러니 너무들 나를 몰아세우지 말게나.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남아 있는 여생이라도
이루지 못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게나."

김굉필은 만류하지 않고 시종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히려 낙향을 종용한 제자가 김굉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송별연장에 느닷없이 나타난 유자광(柳子光)

유자광은 예종 때 남이장군을 모함
도학자들이 가장 경멸하는 소인배.

김종직의 제자들 대부분이 돌아앉거나 헛기침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도 유자광은 인사 한마디

"대감, 낙향하신다는 소문이 있어 이렇게 달려 왔습니다.
조정에서 정사를 돌보셔야 할 대감께서 낙향하신다니 섭섭"

"무령군께서 걱정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나설 때와 물러 설 때를 아는 것이 도리,
늙어가니 병든 몸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조정에 경륜 있는 선비들이 하나 둘 떠나는 것도 문제.
대감께서 중심을 잡아 주셔야 조정이 원만하게 굴러갈듯."

김종직은 유자광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 마셨다.
일찍이 함양군수 시절 학사루(學士樓)에 걸린,
경상도 관찰사였던 유자광이 쓴 시판(詩板)을
소인배 글이라 하여 떼어낸 일도 있어 미안.

과거 사감을 털어버리고자 흔쾌하게 술

유자광은 김종직의 속마음을 알려고 왔던 것.
비로소 때가 온 것 같아 마음속으로 반기었다.
김종직이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길 바랬던 유자광

그래야만 자신이 그 권력으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
미소를 짓고 있는 유자광의 두 눈에는 출세의 욕망

서자로 태어나 가출 경복궁 건춘문 문지기가 되었다가
한명회를 도와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권부에 다가섰고,
이시애의 반란이 나자 자원해서 남이 장군과 함께 전공
병조정랑이 되고 마침내 별시문과에도 장원급제 했던 그

그러나, 그를 보는 정여창, 김굉필 등의 시선은 싸늘했다.
김일손의 입에서는 마시던 술을 뱉어내는 듯 퉤 하는 소리
유자광은 아랑곳 않고 자리를 먼저 일어나며 한마디 남겼다.

"볼 일이 있어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대신 술과 안주를 보낼테니 욕하지 마소서."

연산군은 즉위식 날 잔인하게 사슴을 살생하더니
차츰 여자와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군자를 멀리했다.
일찍이 13살에 여자를 안 그는 20살에 황음에 빠졌다.

승려들을 몰아낸 원각사는 황음의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 궁중놀이를 전담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설치
3천 기생을 두었는데, 후에 장악원은 계방원(繼芳院)

임사홍 등을 채홍사로 삼아 팔도의 여자들을 불러들였다.
선왕의 궁녀까지 음행하고 외명부 여자까지 잔치에서 간통

부끄러움이 없는 부인들은 궁중에 남아 있기를 원했고,
그 남편들은 부인이 원하는대로 벼슬을 승진시켜주었다.

윤순(尹珣)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윤순의 아내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서
윤순은 과거급제 5년 만에 자헌대부 승진

연산군의 음탕한 행각은 그뿐이 아니었다.
백부 월산대군의 후실을 궁중에 불러 강간
궁 밖으로 나온 박씨는 부끄러워하며 자살

황윤헌(黃允獻)의 최보비(崔寶非)란 첩도 절세가인
채홍사 구수영(具壽永)이 빼앗아 연산군에게 바쳤다.
연산군은 그녀가 비위를 건드리자 그녀 남편을 죽였다.

옥지화(玉池花)라는 유부녀의 남편도 목숨을 잃었다.
연산군에게 '간밤에 남편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는데,
며칠 뒤 연산군은 그 남편 목을 소반 위에 올려놓았다.

"네가 이 얼굴을 보고싶어 꿈을 꾸었을게야" - 연산군.

채홍사들은 서로 다투듯 여자들을 연산군에게 상납.
가야금을 잘 타는 최유회(崔有淮)의 딸이 그러한 예.
정승 한치형이 끌어다 비(婢)를 만들고 그녀와 관계.

채홍사 임숭재와 신항이 다투어 이 여자를 추천했는데,
이때 구수영이 가로채 궁중에 바치니 연산군이 매우 사랑

연산군은 비구니를 상대로까지 음행을 저질렀다.
그가 자하문 밖 사냥을 나갔다가 정업원에 들러
정진 중인 비구니들을 모두 벗겨놓고 온갖 패란

김굉필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인륜(人倫)의 절멸(絶滅)이로다. 이 일을 어이 할꼬.
아, 천도가 무너진 이 땅에서 내 할 일이 무엇인고.'

김굉필은 소달구지에서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깨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워 곧 무너져버릴 것 같았지만
소달구지를 타고 보았던 전라도 산하가 자신을 위로하는듯


'그렇다. 내 할 일이란 제자를 기르는 것이다.
도학이 내를 이루고 천을 이루고 강을 이루게 하여
드넓은 땅을 적시며 바다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하여 도가 넘치는 군자의 나라가 되게 해야 할 것.'

......................... 연산군............................
생모 폐비윤씨를 모함한 성종 후궁들을 살해.
성종 후궁들을 배후 조종한 조모 인수대비 살해.
윤씨의 폐비에 찬성한 윤필상 김굉필 등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및 훈구세력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

결국,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교동에 유배된 그 해에 병사.
이후 50년간 사화(士禍) 유혈극이 잇따라 붕당정치로 확대
한편,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걷게된다.

연산군 유배지 강화 교동도는 살아 돌아 올 수 없는 곳.
역모 가능성이 있는 왕실 인사들을 특별 관리하는 유배지.
연산군은 9월에 이곳에 들어와 귀양생활 2달 만에 생을 마감.

20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12년인 31 세에 폐왕.
유난히도 먹구름 속에서 눈보라치던 날에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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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한훤당 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이.,도동서원.

원래 1568년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워져

쌍계서원이라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 타

160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건립했다.

 

사당을 먼저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 등 서원 일곽을 완공했다.

 

'한훤당 외증손' 한강 정구와 퇴계 이황.

두 인물에 의해 건축되어 1607년에 사액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

소수서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5대 서원으로 꼽히고 있다.

 

수월루  올라가는 진입 계단이 1개이며 좁다.

아마도 경건한 마음을 갖도록 하게 위함인듯.

 

 도동서원의 대지 단면은 4개 단으로 조성되어 있고

첫째 단 사당,  둘째 단 강당,  셋째단 서재와 환주문,

넷째단 루각, 수월루 안은 사방이 담장으로 막힌 공간.

 

(환주문 입구에서 본 강당) - 선비의 마음가짐을 한눈에 들어오게 하는 현판.

 

강학공간으로 진입하는., 좁고 긴 계단

가볍게 휘어지며 환주문까지 이어진다.

환주문(喚主門) 뜻은 “주인을 부르는 문”

 

그 주인은 내 마음의 주인일 수도 있고

환주문 안에 있는 주인일 수도 있으리라.

환주문은 도동서원에서 가장 매력적인 건물.

 

 (환주문 정지석) - 모란꽃 봉우리 형태로 다듬었음

 

 갓 쓴 유생이라면 고개를 숙여야 들어설 수 있는 사주문(四柱門)

지붕에는 사모 형태로 절병통이 얹힌 예쁘고 귀여운 형태의 건물.

 

환주문이 높았다면 강당에서 낙동강을 볼 수 없기에 낮게 지은 듯

문지방이 있어야 하는 곳에는 꽃봉오리 형태의 정지석으로 대체했고

문 열고 고개 숙이고 들어오는 이로 하여금 잠시 머물기를 유도한 의도.

 

 

(중정당 앞 계단석 수석-거북이상)

 

 환주문을 지나 강당으로 진입하다보면 좌우측으로 서재,

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깔아

사람 하나 지날 만한 돌길을 내고 그 끝에 낮은 축대를 쌓아

 중정당이 들어선 지대와 동서 양재가 앉은 지대를 구별했다.

 

 돌길과 만나는 축대 중앙에 튀어나와 있는 돌거북 머리

양쪽의 송곳니가 비죽이 나온 길게 찢어진 입을 앙다물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인상쓴 모습이 제법 사나워 보인다.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

 

(중정당 전경)  -거북돌이 단을 형성하여 놓았음

 

세 칸 대청 좌우로 한 칸 반짜리 온돌방

나머지 반 칸에 마루를 깔아 대청과 연결.

 

덤벙 주초에  굵다란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주심포를 올렸고 창방 중간마다 받친 화반

지붕 끝은 겹처마로 정리하고 양 측면 박공에 단 풍판

주심포식 건물로 기단이 높아 크기보다 웅건해 보인다.

 

마치 흔들림 없는 도학자인듯.

의젓하고 당당하게 앉은 듯 하다.

 

 

 (중정당 기단 면석 근경)     12개면

 

중정당에서 흥미와 애착이 가는 부분은 기단.

기단 면의 넓이는 길이 17m, 높이 1.4m 정도

측면은 대지의 상승과 비례해 점차 낮아진다.

 

정면 중앙에는 양쪽으로 나누어 계단을 설치하였고

갑석 바로 아래에는 네 마리 용이 물고기와 여의주

 꽃송이 옆으로 오르고 내리는 다람쥐가 조각된 돌

 

주변 돌을 똑같은 크기가 하나도 없게 다듬어

마치 조각보를 깁듯이 하나하나 짜 맞추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평범하게 네모진 돌보다

여섯 모 이상 각진 돌들이 더 많아 보일 정도

심지어 12모 돌이 있을 만큼 공들여 쌓았다.

 

(중정당 후원-사당 내삼문앞 계단)  - 좌우측에 모란꽃이 만개

 

중정단의 뒤쪽에는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소맷돌 대신에 설치한 동자 난간석에는 목련 꽃 모양

겨울에도 꽃이 피어있는 모습을 나타내고자 한 재치

 

지형에 따라 꺾이고 높낮이가 바뀌며 만든 담장 면의 변화

담장 지붕이 그리는 스카이 라인은 한옥 건축의 고유한 특징.

 

 

(도동서원 원경) - 지형에 맞추어 단을 지어 건축되어 있음

 

도동서원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구현하고 있다.

도동서원은 건축적으로 완성되고 균형 잡힌 공간

 

<자료출처 : 답사 자료집 - 가야 문화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