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0 - 나.( 유두류록 시대적 배경. 옛 자취를 따라서.. )|

donkyhote 2010. 5. 14. 01:25

유두류록 시대적 배경.

 

1438년에 태어나 1498년에 운명한., 김종직.

그가 살았던 시기는 당파싸움이 한창일 무렵.

과거급제 선비들까지도 벼슬을 하지 않던 시기.

 

'피바람 나는 당파싸움 사화가 두려웠던 때문.'

 

유배지에서 제수명을 다하기란 극히 어려웠던 이조시대.
제주도 거제도 등등의 유배지는 농사짓기도 척박한 환경.
흉년에도 굶어죽는 척박한 외딴 섬의 견디기 힘든 외로움.

특히, 유배지에서 유도화 밭을 가꾸는 노역은 괴로운 일.
유도화 뿌리는 사약 원료로 쓰여질 만큼 독성이 강한 나무.
언제 사약받게 될지도 모르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귀양 생활.

사약 원료 유도화 밭를 아침 저녁으로 가꿔야 하는 유배생활.
유도화를 볼 때마다 불길한 절박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듯.
언제 귀양생활이 끝날지 기약없이 유배지에 갇혀 지내는 생활.

사약을 받으면 부인은 관비로 끌려가고 가문은 쑥대밭
사대부 안방마님도 하루 아침에 지방관아 방지기로 전락.
방지기 소임은 지방 출장 온 역관들의 객고를 풀어주는 일.

관비로 전락한 안방마님이 하급관리들의 잠자리 시중들기.
출장 온 중국사신 및 역관에게 기생처럼 숙청 드는., 방지기.
안방 마님에서 관비로 전락하면 정절마저 지킬 수 없는 처지.

남편은 귀양생활, 아내는 관아의 방지기,
아들은 노비가 전락하고, 딸은 관비 생활.

딸은 관기로 입적되면 대물림 천민 신분으로 살아야한다.
꽃다운 20대 나이의 딸은 사치 관비가 되어 숙청드는 신세.
양반 규수가 하루 아침에 천민인 관기로 전락한 비참한 삶.

젖 뗀 어린 아들까지 추자도로 보내져 노비로 성장.
안방 마님은 하루 아침에 지방관아의 관비인 방지기.
뿔뿔이 흩어진 가족은 서로 소식만 전해들어도 다행.

역적의 어린 아들은 추자도로 보내지고
역적의 20대 딸은 숙청드는 관비가 되고
30~ 40대 나이이면 허드레 일을 하는 관비.

양반 가문이라도 하루 아침에 몰락했던 이조시대.
사약은 죄인이 편히 죽을 기회를 주는 고마운 왕명.
하여, 궁궐의 왕을 향해 4배를 올리고 받았던., 사약.

이조 형벌제도에서 유배형은 유배지마다 차이가 많았다.
법전에 명시된 유배의 종류, 유배거리 및, 유배지의 규정,
유배형의 결정단계, 신분에 따라 달랐던 압송관 등 운영방식.

'북천일록' 이항복의 유배 기록은 참 이례적.

유배형을 받은 한 달 후에야 유배 길에 올랐던 이항복.
유배 행차가 이르는 곳마다 수령이 마중나와 후하게 영접.
기생집에서 머물기도 했을 만큼 대접받은 유배 길도 있었다.

정조 때 대전별감이던 안조원은 유배지 중 가장 먼 외딴 섬,
추자도로 유배를 가게되는데 괄시를 받다 결국 보리동냥까지
이조시대 귀양살이는 유배지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던 것 같다.

당파싸움으로 유배생활을 하는 선비가 많았던 이조시대.
당시 지리산 청학동은 남해 고도의 외딴 섬보다 이상향.
유배생활로 가문이 무너지기보다 은둔생활이 나았을 듯.

부관참시란 죽은 후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내리던 극형.
즉, 죄인의 관을 쪼개어 시신을 꺼낸 후 목을 베는 형벌.
김종직은 정몽주 길재의 학풍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절의를 중요시하여 도학의 정맥을 이어온 선비.
김종직은 지리산을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해발 1000m 이상 높이의 6개 산으로 둘러싸인, 함양. 

함양은 옛부터 울고 왔다가 울고 간다고 알려진 유배지.
첩첩산중 두메산골에 갇혔다는 외로움과 서러움에 울고
떠날때면 맑은 물 푸른 산을 떠나기 아쉬워 울었다는 고장.

김종직은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벼슬길

이어 저작·박사·교검·감찰 요직을 지내며,
'세자빈한씨애책문' '인수왕후봉숭왕책문' 저술.
그는 왕명으로 인수왕후에 관한 글을 쓸 만큼 석학.

1464년 세조의 잡학(천문, 지리 등등) 몰입을 비판하다 파직.
이듬해 경상도병마평사로 기용되며 관인(官人)으로서 본격 벼슬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임명된 후에, 노모를 모신다며 외직 함양군수를 자청.

'당시 함양군수를 자청한 심경은 어떠했을까?'

함양의 대표적 전통 민속주인 지리산 국화주.
늦가을 서리에 흠뻑 젖은 들국화로 빚은 향기
점필제는 서리 맞은 국화같은 심정 아니었을까?

눈이 밝아지고 근육과 뼈에 좋다는 동의보감 기록.
청혈해독 약리작용, 말초혈관 확장, 고혈압에 효능.
음력 9월 9일 중앙절에 마시면 무병장수 불로장생 효험.

지리산 국화주의 그윽한 향기와도 같은 인물 점필제.
함양군수로 부임 후 지리산행기인 유두류록을 남긴다.
점필제가 유두류록을 작성한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성종은 이조 10대 연산군과 11 대 중종의 아버지이자 성군.
성종이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면을 안정시켰다는 칭호의 뜻.
성종은 자유분방하게 삶을 살다가 37세 젊은 나이에 운명한다.

성종은 이조 9 대왕(1469∼94) 세조 손자이고, 덕종 둘째아들.

어머니는 소혜왕후(昭惠王后)이고, 비(妃)는 공혜왕후(恭惠王后)
계비(繼妃)는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9년 13세에 왕위를 계승.
그 뒤 7년 동안 정희대비(貞熹大妃;세조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김종직이 유두류록을 쓸 당시 성종은 16세 어린 임금.
성종은 어린시절부터 궁궐 여인들 치마폭에 싸여 성장.
성종은 30대에 3 왕비와 8 후궁만도 다스리기 벅찼을 듯.

결국 궁궐여인들 암투로 빚어진 폐비 윤씨 사건.

성종은 이조 역사 상 몇 안되는 성군 중 한 분이다.
세종대왕이 태종의 난세평정 위에 꽃피운 역사라면
성종은 태평성대에 세조의 피바람 위에 꽃피운 치적.

그 뒷배경에는 세조의 피바람 공신 한명회.

성종은 국모가 용안을 할퀴어 폐위시킨 오점을 남겼다
용안은 괜히 할퀴었을까? 성종은 유난히 여색을 밝힌 왕.
거기에는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도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

'김종직은 왕명으로 인수대비에 관한 글을 써야할 입장.'
'김종직 같은 곧은 선비로서는 글쓰기가 참 어려웠을 듯.'

자신의 권력이 며느리에게 옮겨가는게 싫어 예쁜 후궁 들이기.
그 후궁들을 뒤에서 조정해 국모인 며느리의 세력을 견제하기.
성종은 궁궐의 투기 다툼을 결국 지엄한 국법으로서 다스린다.

첫 왕비 사별후 맞은 국모 윤씨를 폐위 후 사약까지 내렸다.
후궁들 모함 시샘에 넘어가 세자의 생모인 국모를 죽게 했다.
폐비 윤씨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다툼에 휘말려 희생되었다.

"내 사후 100 년간 폐비의 일을 입에 담지말라" - 성종의 유언.

그 유언에는 후회와 우려가 가득 담겨있는 듯 보인다.
훗날, 성종의 아들 연산군이 등극하자 피바람 갑자사화.
폐비 윤씨 사건으로 인한 성종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난다.

연산군은 폐위로 왕권정치는 막을 내리고 대신정치 개막.
이조 역사 상 갑자사화는 피바람 당파싸움의 시작에 불과.
대신정치 시대가 열리며 암중모색 권력다툼은 수면위로 부상.

유두류록이 쓰여졌던 싯점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출발점.
왕실에서는 '세조의 비'가 어린 성종을 대신 수렴청정할 때.
왕실과 대신들 간 보이지 않는 권력다툼이 팽팽히 맞설 무렵.

성종의 비는 한명회의 딸이고 한명회는 세조의 가신.

 
수렴청정을 했던 '세조의 비'의 막후 실권자는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를 등극시킨 일등공신이다.
성종 당시 이조는 태평성대이면서도 권력 암투가 심했던 난세.

김종직은 암투를 피해 노모 핑계를 대고 한직을 자청.
함양 군수로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후학을 양성.

이조 500년 역사 상 순탄한 왕위 계승은 극히 드물었다.
이조왕실 역대 왕위 계승 계보를 살펴보면 파란만장하다.
하여, 왕위 등극은 하늘의 뜻이라 할 만큼 피바람의 결실.


'권신 간 권력다툼도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의 연속.'

성종은 역대 왕들의 평균수명(45세)보다 단명(37세)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자리가 결코 편안하지는 않았으리라.
성종은 임금만이 갖는 고독한 스트레스를 여색으로 푼것 같다.

고려가요 '만전춘별사'는 남녀 간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가요.
이 속요는 내용이 음란해 이조 성종 때 사대부들 사이에서 배척.
그러나, 성종은 궁궐기생 소춘풍과 속요 가사 같은 사랑에 빠진다.

어우동 사건은 성종 당시 퇴폐적인 성풍속도를 말해준다.
성종은 태평성대를 이뤘으나 왕 자신도 호색 유흥에 빠져
규방의 일로 물의를 일으켜 폐비 윤씨사건은 정쟁의 불씨.

그는 세 왕비와 여덟 후궁에게서 19 아들과 11 딸을 낳았는데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며, 중종은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

이조 왕권정치는 성종에 이어 연산군 시대로 막을 내리게 된다.
왕권정치가 무너진 근본 원인은 왕실의 문란한 성풍속 및 폭정.
유두류록은 이조 왕실이 섭정으로 혼란기인 성종 3년 산행기록. 

 

.......................한명회(韓明澮)........................

이조 당파싸움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권신 한명회.

한명회는 세조 때부터 핵심 권신이자 성종의 장인.

월산대군을 밀어내고 성종을 왕위에 올린., 권력자. 


1415(태종 15)~1487(성종 18). 이조시대 전기의 문신.
본관 청주(淸州). 자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 상질, 아버지는 증영의정 기(起)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의 딸. 딸이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 즉 한명회는 두 왕의 장인이었던 권력자.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고 권람과 더불어 산천을 주유.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의기투합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과 함께 정권을 장악
계유정난 때 참모로 큰 공을 세워 군기녹사에 임명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부승지로 승진했으며,
그해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우승지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사육신 주살

1457년 이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고 상당군(上黨君)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판병조사(判兵曹事) 겸임.

1466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병으로 사임했다.
1467년 이시애 반란 당시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된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서정을 결재.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성종 즉위 후 병조판서, 대궐 동서쪽에 군영을 설치

1484년 고령으로 벼슬을 사임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성종으로부터 궤장(杖)을 받고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성(忠成). 
....................................................................................

 

권신들의 농간으로 왕위에 등극하지 못한 월산대군.

성종의 형님이자.,연산군의 큰아버지인 종실의 어른.

부인이 연산군에게 겁탈을 당하는 수모까지도 겪는다.

 

결국,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을 묵인한 월산대군.

피바람 권력다툼에서 한발 벗어나 풍류로 일생을 보낸다.

그러나, 항상 살얼음 위를 걷는듯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듯.


..............................월산대군.............................

1454(단종 2)~1488(성종 19). 이조시대 전기의 종실.
이름은 정().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
추존된 덕종(德宗) 맏아들이며, 성종의 형이다.

빈은 병조판서 박중선(朴中善)의 딸 상원군부인(祥原君夫人).
1457년(세조 3) 아버지가 죽자 할아버지 세조의 사랑을 받는다.
1460년 월산군, 1468년 잘산군(성종)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지고,
이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

그의 좌리공신 책록은 성종의 장인 한명회(韓明澮) 등
권신들이 당시 종실의 대표격인 구성군 준을 제거하고
그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취한 조처의 일환이었다.

왕위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그는
권신들의 농간을 겪자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1473년 덕종이 추존되어 부묘되기 전
덕종의 별묘를 세우고 봉사(奉祀)했다.
어머니 인수왕후 병을 간호하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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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무서운 권력다툼에서 벗어나고팠던 선비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그러한 심경이 담긴듯 하다.
김종직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안주할 이상향을 찾은듯.

당시, 이상향이라기보다는 은둔지에 가까운 청학동.
한번 들어가면,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외딴 곳
김종직은 권력다툼에서 벗어나려고 함양군수로 부임한 듯..'

그는 반야봉과 청학동을 못 가본 아쉬움 안고 중도 하산.
그의 애민사상과 선비의 절개 그리고 유교관념이 흥미롭다.
아울러, 지리산 곳곳마다의 불교탄압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

성종은 재혼녀의 자녀 관직제한 및 불교 억제 정책.

이조시대 여성의 지위를 현격하게 떨어지게 한 주인공.
유두류록은 533년전과 현재를 연결해주는 타임머쉰 같다.
지금부터 기록 속으로 들어가 이조시대 지리산을 살펴보자.

함양군수로 원님 고을살이를 나온 김종직.
유두류록은 김종직이 45세 당시 산행기록.
제자인 유호인 조위 한인효 등과 함께 산행. 

 

 


옛 자취를 따라서. 



.......옛 유두류록 일정......
1472년(성종 3) 8월14일-8월18일

8/14 : 함양군 관아-엄천-화암-지장사
- 환희대-선열암-신열암-고열암(1박)

8/15 : 고열암-쑥밭재-청이당-영랑재(하봉)
-해유령-중봉-마암-천왕봉-성모사(2박)

8/16 : 성모사-통천문-향적사(장터목 인근)(3박)

8/17 : 향적사-통천문-천왕봉-통천문-중산(제석봉)-
습한 저여원(세석평원)-창불대-영신사(영신대)(4박)

8/18 : 영신사-영신봉-(한신계곡)-(백무동)
-실택리-등구재-함양군 관아 (4박5일)

일행 : 문인 유호인.조위.임대동.한인효,
승려 해공.법종, 아전 옥곤.용상, 노비
...............................................

.............옛자취를 따라서................
1472년 8월 14일 김종직 일행 산행 코스
엄천강 다리 넘어 (옛 나룻터)화암 바라보며
운암마을 들머리에는 (해동검도 수련원 건물)

박쥐굴-지장사터-금낭굴-선열암터-
유술이굴-의론대-고열암터-신열암터

독녀암(함양독바위)-안락문-상대날등-베틀재-마당재
-공개바위-수도골-한쟁이골끝-운암마을로 원점 회귀.

4곳 옛 절터엔 깨진 기와장이 널버려져 있고,
우리 민중과 가까웠던 지리산이라 느껴지는 코스)
아쉽게도 오늘날 대부분 옛 빨치산 은신처 (굴)들.
..................................................................

이조시대 지리산을 찾는 이들의 지침서 유두류록
김종직에게 '어머니의 산'이자 마음의 고향', 지리산.
지리산 유람 도중에도  당파싸움 소용돌이를 염려한듯

 

'유두류록에 무릉도원을 추구하는., 대목.'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하기로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본문 중에서-

그는 사림파 지식인과 목민관 자세를 갖고 산행 도중
매를 잡는 사람들의 응막을 보고 민생의 어려움을 걱정
승려의 혹세무민 행적도 비판하는 유교관을 갖고 있었다.

한편, 천왕봉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며 주위 명산을 설명
그의 국토 산하에 대한 깊은 애정과 지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단촐하고 검소한 유람단 일행 구성이 몹시 돋보인다.
이조 사대부들의 지리산 행적과는 분명하게 비교되는 유람기
그가 당시 산행했던 등산로는 개척 코스로 탐구가치가 있는듯. 

'2007년에도 534년전 그의 유두류록이 열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