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0 - 가.( 유두류록 해설. 당벌장터. 선암. 위숙왕후. )

donkyhote 2010. 5. 14. 01:23

유두류록 해설.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나는.. 김종직 일행.

 '역녀 월명이'에 관한 옛 이야기가 나온다.

역녀 월명이 전설에 관해 해설이 필요할듯.

 

..................역녀 월명이 전설.........................

역녀 월명이는 동경상인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역녀는 월명이 직업이며, 오늘날의 여성 통역관.
(동경상인은 청년의 직업이며 무역업에 종사한 듯)

'두 사람은 먼 길을 함께 다니다가 정든걸까?'

(어느날 청년은 모친의 위급한 소식을 들었던 듯.)
(하여, 월명이를 두고 머나먼 길을 혼자 달려간 듯)

청년은 월명이와 헤어진 뒤에, 돌아오지 않았다.
청년은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고 장사를 치룬 때문.

청년이 돌아왔을 때 월명이는 이미 죽고난 뒤였다.
기다림에 지쳐 상심 끝에 병들어 죽은 연인 월명이.
청년은 월명이의 무덤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저승에서 이루기 위한 죽음.
역마을 사람들은 월명이 무덤에 청년을 함께 묻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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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김종직은 사근역에 있는 월명이 무덤을 지날 때,
유호인과 둘이 슬픈 역녀의 넋을 회상하는 시를 남겼다.
(영남이 고향인 김종직은 월명이 전설을 잘 알고 있었던듯).

'들풀 푸른 무덤 위에
혼백은 나비로 날고 있네.

무덤 위에 들풀만 어지럽게 푸르렀고
나그네가 슬퍼 노래 부른다
오늘처럼 달도 숨은 밤에는 여우가 울고
봄을 만난 혼백은 나비로 날고 있네.'


塚上靑靑連理枝
行人爲唱華山畿

如今月黑狐狸嘯
應是春魂化蝶飛

- 김종직 作 -


유호인도 한수를 지어 같이 읊었다.

'월명이 무덤 위에 달빛은 밝아 푸르고
한식날이 찾아와도 잡초만 무성하네.
간밤에는 영혼의 소리 하도 은은하더니
봄바람 지나간 곳에 두견화만 피어네.'

- 유호인 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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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이 청이당을 지날 때 품었던 의문.

유두류록에서 그 기록의 일부를 다시 보자.


"발자국 마다에 구름이 밟히고 우거진 숲은 지날 때마다
대삿갓이 걸려 벗겨졌다."는 은밀한 숲길, 한곳에 이르니
청이당이라는 너와지붕의 당집이 있었다고.... 한다는데,
당집은 어떤 사람들이 세웠고 이곳 경계를 즐겼던 것일까?"

 

김종직이 품었던 의문에 대한 해설이 필요할듯.


김종직은 의탄마을(마천)을 중국의 명산지 동산에 비유.
역녀 월명이와 동경 상인의 사랑의 전설도 유두류록에 기록.
역녀는 통역하는 여성이고 동경은 발해의 옛 도읍지 지명이다.

발해는 742년 문왕이 구국에서 수도를 중경현덕부로 이전,
만주 해란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개발하여 경제력을 확보.
755년 문왕은 상경용천부에서 동경용원부로 도읍지를 이전.

문왕 말기에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고 일본과의 관계 중시.
'월명이와 동경 상인' 사랑 이야기는 발해 시대의 전설인듯.

당벌장터는 발해와 교역하는 동경 상인들의 장터로 추정.
즉, 마천은 고려 때 발해 유민들이 집단이주한 지역 같다.
또한 당벌장터는 통일 신라시대 이전부터 유서 깊은 장터.

발해의 동경 - 당벌장터 - 화개장터 - 대마도 - 일본.

전설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주는..
월명이와 동경 상인 청년에 관한 전설.

백무동 제석대 천왕봉 굿 제수를 팔던 당벌장터.
전국에서 몰려온 무당과 굿 인파가 북적거린 곳
김종직이 이곳을 찾았을 무렵 성행했던 당벌장터. 

 

 

 


당벌장터. 



유두류록  속의 당벌장터는 현재의 마천.
당시 화계장터 못지 않을 규모였을 마천.
발해와 왜를 잇는 교역이 성행했던 장터.

마천(馬川)은 경남 함양군 남부에 있는 면.
'말처럼 달리는 개울'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

면 소재지는 가흥리이고 면의 90%가 산지.
지리산(1,915m)·창암산(923m)·영신봉(1,652m)
삼정산(1,182m)이 있고 지리산 국립공원에 속한다.

산지에서 발원한 개울들이 모여 북부지역을 흐르며,
하천 양안에 취락과 소규모의 농경지가 밀집해 있다.

칠선계곡과 무명폭포 등등의 계곡과 폭포가 많다.
가흥 군자 덕전 삼정(三丁) 강청(江淸) 추성(楸城)
창원(昌元)·의탄(義灘)·구양(九楊) 등 9개 마을.

무역이 성행한 교역 도시는 성문화가 개방적.

마천은 역사적으로 지리산 휴양지로서 각광받던 명소.
예나 지금이나 장터 퍼서지 휴양지는 개방적인 성문화.
유두류록을 쓴 당시에 마천도 예외일 수 없었을 듯 싶다.

'성 해학의 극치로 일컫는 변강쇠전 배경무대.'

작가와 창작연대는 알 수 없고 신재효가 개작한 판소리
고종때까지 송흥록과 장자백이에 의해 불리워졌다는 기록
변강쇠 이야기는 함양군 마천면 등구 마을 일대가 배경무대

변강쇠와 옹녀는 각처를 떠돌다가 남으로 내려와
함양 땅에 도착해 오도재를 넘어 마천 땅으로 진입.

마천장이 없던 일제 때 마천 사람들은 오도재와 지안재 넘어
30여 리 떨어진 함양장까지 나가 가축과 소금 등을 사왔으며
집에서 기르던 돼지새끼를 지게에 짊어지고 함양장에 팔았다.

변강쇠가 살던 산속 폐 기와집은 가락국의 마지막왕 대궐터
500 년전 김일손의 속두류록에는 거북이 산세라 하여 등구사.
1500년 전 대궐터 = 500 년전 절터 = 임진왜란 당시 변강쇠 집

그곳에 정착한 변강쇠는 낮이면 낮잠자고
밤이면 옹녀 배만 타니 옹녀가 견디가 못해

“건장한 저 신세에 밤낮으로 하는 일이
낮이며는 낮잠만 자고 밤에는 나를 조르니
굶어죽기는 고사하고 우선 얼어 죽겠소.
오늘부터 지게를 짊어지고 나무나 좀 해주시오”

변강쇠는 등구 마천 가는 길의 장승을 뽑아 군불을 지피자
화난 함양 장승 목신은 노량진 나루터 장승대방을 찾아간다.

장승대방은 팔도에 통문을 돌려 수만 장승을 새남터에 모우고
응징방법을 강구해 결국 8백여가지 병으로 변강쇠를 죽게 한다.

함양 벽송사 목장승은 등구 마천의 대표적 장승

벽송사 건립년대인 152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 타 없어진 머리, 홀쭉하게 꼭 다문 입, 움푹 패인 뺨.
그 아래 짧은 수염에 얼굴 표정은 과장과 질박함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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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년 역녀 '월병이' 무덤에 들렀던 이륙 일행.
역녀는 통역 여인이고, 동경상인은 무역업 상인.
동경상인은 당벌(마천)에서 발해를 오가던 상인.

당벌 장터는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쇠퇴해 간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장터 기능을 잃어버린 당벌장터.
그러나, 유두류록을 쓴 당시까지는 장터로서 성행한 듯.

마천은 지리산 북쪽 관문을 통틀어 부르는 지명
행정구역으로는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중심 일대

마천은 전라도 남원사람들은 당벌장터이라 불렀고
경상도 사람들은 <땅벌>이라고 좀 억세게 불러왔다.
원래, 지리산 산신당이 있어 마천은 옛부터 '당마을'.

언제부터인가 이곳에 장터가 생기며 당벌장터.
곶감, 목기, 산나물, 토종꿀, 문종이 등등 유명
특히, 지리산 등구 마천은 예나 지금이나 곶감산지.

'큰애기들은 곶감깎기로 다 나간다. -민요.'

지리산 일대는 어디를 가나 감나무가 즐비.
산골마을 어지간한 길가 가로수까지 감나무.
감이 주렁주렁 익는 계절이면 풍요로운 마천.

2003년 11월30일 개통된 2차선 포장도로 오도제.
함양 휴천면 월평리 넘어 칠선계곡과 백무동 계곡
지리산 제 1 관문 오도제는 예전보다 훨씬 편해졌다.

북향 의탄 마천 산기슭 다랑이논 반달배미 삿갓배미
사닥다리논 배꼽논 등등 저나름대로 호칭마저 제각각.
지리산 산간마을 토박이 주민들 억센 삶을 보여주는 곳.


.....534년 전 김종직의 기록..............
"서너 곳의 모롱이를 돌아 이르는 곳에
깊숙하고 한적한 동부(洞府)가 열렸다.

숲이 해를 가리고 솔겨우사리와 댕댕이덩굴이
서로 얽혀 나무를 덮고 있는 아래에슨 시냇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꺾여 힘찬 소리를 낸다.

그야말로 동산(옛 중국의 명승지)에 와 있는 성 싶다.
..... 닭과 소 등을 기르며 나무를 베어 내고 밭을 일궈
벼와 기장, 콩과 삼을 심고 살면 바로 무릉도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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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을 유혹했던 땅이 오늘날 마천골 의탄마을이다.
김종직은 이곳에서 발길을 멈추고 지팡이를 두드렸다.
앞서 가던 유호인이 돌아 서자 김종직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떠리요.." -김종직.

김종직의 의식 속에 고개를 든.. 은둔의 싹.
당시 이조시대 정치적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당벌장터는 언제부터 성행한걸까?'

해동성국 발해 멸망이 당벌장터 성행 원인인듯.
10세기 초 거란과의 전쟁에서 발해는 갑자기 멸망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분분.

발해 지배층의 분열 및 사치풍조 등 원인이 지배적
백두산의 화산폭발에 의한 것이라는 소설 같은 견해
그러나, 발해의 멸망 원인은 당시 동북아의 정세 변화

9세기 말부터 10세기 전반기의 동아시아는 일대 전환기
안사의 난 이후 쇠퇴한 당은 황소의 난 후 907년에 멸망.

북아시아 형세는 시라무렌 강가의 거란이 점차 세력을 확장
북중국으로 진출하는 한편, 거란은 동쪽으로 발해를 위협한다.

한반도에서 신라가 패망하고 후삼국의 혼란기에
후백제와 태봉(고려)이 세력다툼을 벌이던 시기.
결국 이 시대는 한반도와 중원 지방 모두 혼란기.

이 틈에 북방 유목민족 거란이 세력 확장을 하던 시기
하여, 국제 정세는 발해에 불리한 입장에서 복잡한 양상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발해는 점차 외교적으로 고립

발해는 외교적 능력을 발휘할 기반을 상실했고
이는 곧 발해의 쇠퇴를 가져오게 된 결과를 초래.

발해는 초기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어 918년 사신 교환.
이후부터 거란의 동쪽진출에 위협을 느껴 상호 적대관계

919년 2월 거란이 발해인들을 요양으로 끌고가자
924년 5월 발해가 군대를 보내어 거란 요주를 공격
사람들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생산 요충지 요동을 상실

그 치명적인 타격이 발해 멸망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발해 유민들이 대거 고려에 유입된다.
하여, 이 무렵 당벌장터가 고려에서 성행한 듯.

원나라에게 80년간 속국으로 지배받은 고려.
발해 동경성의 옛 상권은 원나라로 이어진 듯.
하여, 당벌장터 영화는 이조 때까지 존속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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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이륙의 유두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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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698~926년) 멸망 원인 = 백두산 화산폭팔 설.

나고야 대학 연구팀이 백두산 용암과 화산재 고목을 채취
연대측정을 한 결과 백두산 화산폭발은 929~945년이란 결론
이는 발해가 거란족 요나라에 멸망한 926년보다 3~19년 이후.

'하여, 발해의 갑작스런 멸망은 백두산 화산 폭발과 무관.'

10세기 백두산 화산 폭팔 흔적은 홋카이도에서 발견될 정도.
도호쿠(東北)지방의 지층에서도 날아온 화산재가 발견될 정도.
학계에서는 발해의 멸망 원인을 지배층의 내분 때문으로 본다.

713년 당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해 국가 실체를 공인
발해는 건국 초 진국(震國)이라 칭했고 일본과도 사절 교환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하며 '고려'(高麗)로 자칭하기도 했다.

'발해와 고려는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

아무튼, 백두산 화산폭팔 후 동경성 상권은 쇠퇴.
발해 동경성 상인집단은 고려 개성으로 대거 유입.
지금도 마천 일대에는 당벌장터 옛풍습이 남아있다. 


 


선암. 



유두류록에 나오는 '선암'에 관한 전설.
고대사회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해상왕국.
한반도는 옛부터 몇 안되는 아시아 부동항.

파도로부터 배를 지켜줄만한 형태의 바위.
배를 묶어두어도 떠내려가지 않을만한 바위
예나 지금이나 뱃사람에게 선암은 꿈의 대상.

...................유두류록.......................
해유령을 넘자 길가에 있는 선암이란 바위.
법종이 그 바위의 유래에 관해 말해 주었다.

"아주 옛날 바닷물이 땅을 뒤덮었을 때
이 바위에다 배를 붙들어 매었다는 전설.
게가 이 고개를 기어서 넘어갔기 때문에
<선암 : 배바위> 이름이 붙여졌답니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대 말을 믿는다면
그때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부둥켜 잡고 살았을 것이 아니냐?"

드디어 우리 일행은 다함께 중봉에 올랐다.
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은 모두 돌이었는데,
유독 우리가 오른 봉우리만 흙으로 덮혀 있었다.

판판하고 넓직하여 말을 달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내려온 후 말을 쉬게 하였다.
바위에 마실 수 있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었다.

가뭄이 드는 해 이곳 주민들이
이 바위에 올라 발을 구르며 돌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 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어 시험을 해 보았더니,
그 소문대로 제법 효험이 있었다.

오후에 천왕봉에 올랐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온누리가 어둡고 안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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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선암은 가뭄에 기우재를 올렸다는 곳.
태고에 배를 묶어둔 바위로 알려진 전설의 고향.
선암(배바위)의 전설은 가락국의 것으로 추정된다.

화왕산 정상 분화구 옆 배바위 전설이 이를 뒷받침한다.
선암(배바위)에 관해 전해오는 전설은 가야국의 공통점.
따라서, 배바위가 바라보이는 일대는 가락국의 옛 영역. 



 
위숙왕후. 



신라 41대 헌덕왕 14년에 창건한 엄천사.
선왕들의 위령을 추모하기 위한 사찰이다.
헌덕왕은 선조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심성.

그당시 지금 전북 금산사 주지였던 법우화상
그를 불러 지금 함양군 휘천면 엄천사를 창건.
당시 고승이었던 법우화상은 엄천국사가 된다.

헌덕왕은 낙성식에 참석하여 친히 엄천사라 명명
'부처님 뜻을 엄하게 가져 그 복을 받는 후손이며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듯 후세까지 받으리라는 의미.'

왕으로부터 국사 중책을 받은 법우화상은 주야로 정진
어느덧 세월은 흘러 어느 해 여름 날 법상에 앉아 선정
이때 문득 밖이 소란해 문열고 바라보니 개울물이 넘쳤다.

법우화상은 주장자를 짚고 물길따라 지리산 상봉에 도달.
그곳 바위 위에 天女가 곱게 앉아 빙그레 미소로 반겼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소녀는 하늘에 계신 제석천왕 딸이고
옥황상제에게 벌받아 귀양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인간 세상을 살펴 보니
스님과 백년해로 할 인연이니 허락 바랍니다."

법우화상은 꿈인지 현실인지 몰라 정신이 혼미.
천녀는 법우화상을 바라보며 다시 거듭 애원했다.
법우화상은 스님의 신분이기에 단호하게 거절한다.

"사람의 목숨은 풀잎 끝에 이슬 같고,
바람 앞에 등불처럼 힘없이 사라지는 것
어찌 한평생을 애욕의 구렁에서 보내리까?"

"스님! 도를 닥아 부처를 이루는 것도
고해 중에 빠진 중생을 구제 하려는 목적

우리가 부부되어 재난에 울부짖는 인간을 구제
재난을 면하게 하고 복받게 하면 그게 부처님 일."

결국, 법우화상은 천녀와 부부가 되어 백무동에 움막.
원앙의 보금자리를 틀고 인간생활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리고, 백무동에 살며 선녀 사이에서 8 딸을 낳는다.

법우화상은 8 딸에게 경문을 가르치고
선녀는 굿하는 무술(巫術)을 가르친다.

8딸은 무당이 되어 조선 8도로 퍼져나간다.
천신에게 제사올리는 제장을 당굴이라 한다.

신라시대 제장 또는 당굴은 성직자로서 예우.
이조시대에 들어와 무당이라 부르며 천민 취급.
법우화상이 선녀를 처음 만난 곳에 지은.. 성모사.

지리산 제석봉은 제사 지내던 곳.
제석당은 당할머니를 모신 성모사.

제석 할머니가 세상에 내려와 길흉화복을 점쳐주었고
독경 무술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하여 제석당은 종가.
지리산 인근 각지 부락 근처 분가들은 당집이라고 한다.

당집 있는 곳에는 돌무더기를 모아 조탑을 세웠고.
잡귀를 물리고 신성시 하였던 이곳을 일컬어 '당산'.
새해가 되면 마을사람들은 당산에 모여 제사를 올린다.

이 풍습은 신라 이전 모계사회부터의 천신 숭배신앙
불교와 한반도 민속신앙이 자연스럽게 접합되는 과정.
신라시대 제석천녀는 고려에 와서 위숙왕후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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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숙왕후..그녀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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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창건한 궁예의 어머니.. 한씨(韓氏) 부인.
919년 왕건이 아버지를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
어머니는 위숙왕후라 추존했다는 사실 외 알 수 없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일찍이 꿈에 미인을 만나
부인을 삼기로 언약했는데 송악에서 영안성 가다가
길에서 한씨(韓氏) 여인을 만나 드디어 혼인하였다.

어디서 왔는지 몰라 세상에서는 몽부인(夢夫人)이라 부르고,
그 부인이 삼한(三韓)의 어머니라 성을 한씨라 하였다고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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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본관 개성(開城). 금성태수 융(隆)의 아들.
895년(진성여왕 9)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들어간다.

918년 궁예가 민심 잃자 왕으로 추대되어 고려를 창건.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
936년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후백제 점령후 후삼국 통일

왕건은 고려 창건 다음해 어머니를 위숙왕후라 추존.
'위숙왕후의 전설.'은 '천왕성모의 전설'에서 본딴 듯.
하여, '위숙왕후의 전설'은 919년 경 만들어진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