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3. ( 이륙. 청파집. 1463년 유지리산록. 南海 금산사. )

donkyhote 2010. 5. 14. 01:29

이륙.

 

세조~ 성종 명신으로 한양 청파동에서 출생(호 청파).
젊었을 때 호방하여 무슨 일에나 구속을 받지 않았고
22세(1459년) 생원과 진사과에 오르고 1464년 문과 장원

성균관 직강(直講). 예문관 응교(應敎).
병조참판ㆍ대사헌 등의 벼슬에 이르렀다.

저술한 책으로는 청파집(靑坡集이 있다.
인조 때 난을 일으킨 이괄(李适)은 육의 현손
이륙이 기묘년(1462.세조8년)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3년 동안 공부하며 지리산을 두루 산행후 남긴 기록물.

그가 오른 등산로는 중산리-법계사 - 천왕봉
지리산 동부지역의 지명 수계를 상세하게 기술
천왕봉 법계사 일대 지명 및 탐구산행의 좋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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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은 기묘년(1462.세조8년) 지리산으로 들어가
3년 동안 파묻혀 공부하며 지리산을 두루 유람한다.
그가 주로 오른 코스는 <중산리 - 법계사 - 천왕봉>

천왕봉과 법계사 주변과 지리산 동부지역의 수계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좋은 탐구산행 자료가 된다.
이륙의 유두류산록은 그의 시문집 청파집에 담겨있다.

 

 

청파집(靑坡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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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초기의 문신 이륙(李陸:1438~98)의 시문집.
연산군 때 간행하려 했으나 흉년으로 간행 못했다.

1512년(중종 7) 아들이 시 몇 수와 극담(劇談)을 찾아내
자신의 지(識)를 붙여 목판본으로 간행한 초간본 책머리
강혼(姜渾)의 서문과 1499년 성현이 지은 청파비명이 있다.

1600년 초에 거듭 목활자로 간행되었는데,
서문과 발문이 없고 간행연도를 알 수 없다.
중간본 권1에 시, 권2에는 기·녹(錄)·설(說)·
서(序)·묘갈명·대책(對策) 등이 실려 있다.

1853년(철종 4) 후손 노선이 초간본을 편집 보완하여 간행.
삼간본 책머리에는 목록과 강혼·권대긍이 1852년에 쓴 서문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은 두류산 위치와 주변환경을 기록한 글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



1463년 8월 이륙 作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영남,호남 사이에 웅거하고 있는데
그 높이와 넓이는 몇백리 인지 알 수 없다.

지리산 주변에는 목(牧)이 하나, 부(府)가 하나,
군이 둘, 현이 다섯, 부속된 고을이 넷 있다.

동쪽은 진주,단성이고 서쪽은 남원,구례,광양
남쪽은 곤양,하동,살천,적량,악양 북쪽은 함양,산음.

가장 높은 봉우리로 동쪽은 천왕봉, 서쪽은 반야봉.
서로 백 여리가 떨어져 있고 항상 구름에 싸여 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와 서쪽에 향적사.
서쪽 50 리에 가섭대, 그 남쪽에 영신사....<대성골 영신봉 아래>
천왕봉 서쪽 20 여리에 넓게 트인 평지........<세석평전>
편편한 사방 6~7리는 농사짓기 알맞다........<음양수 주변>
늙은 잣나무 숲과 무릎까지 빠지는 낙옆.
사방을 둘러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

평지 남쪽 시내 따라내려가면, 신흥,쌍계 등 세 절이 있다.
의신사 서쪽 20리 칠불사, 쌍계사 동쪽 고개 넘어., 불일암
산꼭대기 향적사, 그 밖의 이름난 사찰은 헤아릴 수 없다.
향적사는 나무 판자로 덮혀있고 거처하는 승려는 없다.

영신사만 기와지붕이 덮혀있고,
그곳에 승려는 한 두 명 뿐이다.

산세가 험하고 마을과 동떨어져
고승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환경.

영신사의 작은 샘에서 발원된 물은 신흥사 앞에서 큰 내.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이를 화개동천이라 부른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곧장 내려가면 천불암, 법계사.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
굴 동쪽은 바다가 보이고 서쪽은 천왕봉을 등지고 있어
극히 맑은 운치를 자아내는데 그 굴을 '암법주굴'이라 한다.

또 두 물줄기가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내려오고
또 다른 하나는 법계사 밑에서 합쳐져서 폭포로 내려온다.

살천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진 물은 소남진의 하류로 흘러
진주를 들러 동쪽으로 흘러가는데, 청천강이라고 부른다.

소남진 산 북쪽 물은 동쪽으로 와서, 단성현 서쪽으로 꺽인다.
살천 마을에서 20 여리를 더 걸어가면 보암사라는 사찰이 있다.
살천 마을 앞 쪽을 내산이라 부르고, 바깥쪽을 외산이라고 한다.

보암사에서 빨리가면 하루 반나절이면 천왕봉에 도착할 수 있다.
돌비탈이 험준해 길 찾기 어렵고 느티나무,회나무가 하늘을 가린다.

그 아래로는 가는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고,
간혹 천 길 벼랑에 걸린 나무 껍질에는 이끼가 꼈다.
샘 줄기는 구름 끝에서 날아와 그 사이로 내리쏟는다.
<천왕봉 아래, 빙벽등반 코스 통신골 폭포를 말하는 듯.>

그 쏟아진 물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떨어진다.
수십주의 나무를 베어내야 비로소 하늘을 좀 볼 수 있다.
일 좋아 하는 사람이 바위 위에 돌을 얹어 길을 표시해 둔다.

여름에 녹지 않는 골짜기 얼음과 눈.......<지금보다 추운 날씨>
음력 6월에 서리, 7월에 눈이 내린다.....<겨울이 일찍 시작된 흔적>

8월엔 얼음, 초겨울에는 이미 많은 눈.
온 골짜기가 펀펀해져 통행이 어렵다.
산에 사는 사람은, 이듬해 늦봄에 하산.

산 아래는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도,
산 위에는 날씨가 청명하여 구름 한점이 없다.
산이 높아 하늘과 가까워, 기후가 평지와 다르다.

산아래는 감나무, 밤나무가 많고 ,그위엔 느티나무.
느티나무가 끝나면 삼나무와 노송나무가 가득하다.
그중 절반은 말라 죽어 푸른 것과 흰 것이 뒤섞여 있다.

정상에는 철쭉나무만 있을 뿐.
나무 높이가 한 자를 넘지 않는다.......<천왕봉 정상>

모든 아름다운 산나물과 진기한 과실이 많아
이 산 주변 주민들은 그 이익을 먹고 살고 있다.

................주.................
살천은 현재 시천면 지명을 말한다.
시천은 화살처럼 빠른 개울이란 뜻

소남진은 '단성과 진주' 사이.
현재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 길

여원치, ⇒, 운봉, ⇒, 팔랑치, ⇒, 함양, ⇒,
사근역, ⇒, 산청, ⇒, 오조점, ⇒, 단성,⇒, 소남진,
⇒, 진주, ⇒, 관율역 .(단성현~소남진~평거역~진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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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海.,金山寺.

 

 

 

남해(南海.)는 혁거세의 아들인., 태자 이름

남해바다에 있는 南海 지명과도 관련이 깊다.

즉, 남해는 베일 속 신라 역사를 풀 수 있는 열쇄.

 

천왕봉 성모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南海.

남해는 지리산이 품은 핵심 전설들과 관련 깊다.

하여, 南海에 관해 우선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신라 시조는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

시조의 성(姓)은 박씨며 휘(諱)는 혁거세이다.

 

원년 갑자(BC:57년) 4월 병진일(일설 정월 15일)

13세에 즉위하여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 서라벌, 서벌 혹은 사라, 사로(중략)



[삼국사기 신라 본기]

 

20년(BC:37년) 경성(京城)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26년 봄 정월 금성에 궁실을 짓고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3월

왕은 하늘로 올라 가셨는데 7일 후 유체가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나시니

나라의 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해

5체(五體)를 각각 장례해 五陵이 되었다.

 

역시 능 이름을 사능(蛇陵)이라 하였다.

담엄사(曇嚴寺) 북쪽에 이 능(陵)이 있다.

태자 南海(남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 본문-


......사학자.,이병도 註(주)......................

금성(金城)은 지금 그 유적이 뚜렷하지 못하다.

검城(성) 즉 <임금성(왕성)>의 뜻인듯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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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박혁거세 묘는 경주 탑리 5능(五陵) 남쪽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를 살펴보면

담암사는 경주 탐리 오능 남쪽이 아니라 양산촌

 

그런데, 혁거세 묘가 중국에 있다는 설도 있다.

혁거세 묘는 강소성 吳縣(오현)의 虎丘山(호구산)

그렇다면,  신라의 영역은 중국까지 뻗어있는 셈이다.

 

고대 중국의 지도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륙백제 영역이 중국 일본까지 뻗쳐 있었던 사실.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영역은 동아시아 전체였다.

 

옛 고조선의 영역이 곧 고구려 신라 백제의 영역.

고조선 단군왕검 아들 셋이 세운 고구려 신라 백제. 

그러므로 고구려 신라 백제는 원래 형제의 나라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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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와 고주몽은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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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북부여]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재위 3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천제님은

하늘에서 내려와 5룡거(五龍車)를 타고

홀승골성(의주)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북부여라 칭하고

자칭 해모수(解慕漱)

 

[환단고기의 고구려 본기 제 6]

사로(斯盧)의 시조 혁거세왕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 아들.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

혹자는 말하기를 西述聖母(서술성모)가

혁거세왕을 낳았기에 선도산성모를 찬양.

 

성모가 동국의 선도산으로 가서

혁거세 성인(聖人)을 낳았기 때문에

선도산성모를 찬양했다는 말이 있다. 

 

또한 상서스러운 게룡(鷄龍)이 나타나서

알영을 낳았다는 것도 西述聖母(서술성모)가

인간 세상에서 몸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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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 7]................

선도성모 수희불사  본문에 있는 기록에 의하면

선도산 신모(神母)는 북부여 해모수 황제의 여인

하백의 딸(사소)는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깨우쳐

해동(海東:신라)에 들어와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그 성모(聖母)가 시초로 진한(辰韓:신라)에 도착하여

성자(聖子:혁거세)를 낳아 동국의 시조 임금이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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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본문에서].......

김부식은 정화년(政和年)에

사신으로 송(宋)나라에 들어갔는데

대궐의 우신관(佑神館)에 一堂을 설치해

여선상(女仙像)을 모셔 놓은 곳을 보았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輔)가 말하기를

이 상은 귀국의 神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이윽고 말하기를 고대 부여 황궁에 계셨던 여인이

바다 건너 진한으로 가서 낳은 아들이 해동의 시조

地仙이 되어 늘 선도산에 머물던 그분의 상이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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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 시조편]........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아

북 부여를 떠나 동부여(가섭원)를 개국한다.

 

즉 북부여 해모수의 여인이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

그녀의 이름은 사소(娑蘇)이며 또한 유화 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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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의 본문들을 종합하면

북부여 황제 해모수의 부인은

하백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柳花),

 

선도산성모 혹은 동신성모(東神聖母)

고주몽과 혁거세의 어머니는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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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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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원은 金山寺(금산사)가 있는

중국 강소성 楊州(양주)에 있다.

 

금산은 중국 楊州(양주)에서 爪州(조주)를 떠나

진강 왼쪽에 큰 탑이 있는 작은 산이., 金山(금산)

높이가 44M인 작은 섬이며 長江(장강) 기슭에 있다.
 
金山(금산)에 절을 창건한 나라는 東晋(동진:317-420년).

이후 고대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을 많이 찾았다 한다.

 

당나라 宣宗(선종:847-859년) 시대에 法海(법해)라는 사람이

法海洞(법해동)에서 수행하던 어느 날에 이 섬에서 금을 캐어 

황제에게 헌상하자 가람 건축 비용으로 충당하도록 지시했다.

 

이때부터 이 섬을 金山(금산)이라 부르게 하고

사찰 이름도 東晋(동진) 시대 澤心寺(택심사)에서

오늘날 金山寺(금산사)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금산 서쪽에는 塔影糊(탑영호)라는 호반이 있고

호반의 서쪽에 中冷泉(중냉천)이라는 샘이 있다.

 

이곳의 샘물은 맛이 좋아 天下第一泉(천하제일천)

전설에 의하면 養生之道(양생지도)를 잘 알고 있는

한 노인이 금산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산중턱에

오목한 암석을 파헤쳐 보니 독항아리가 있었다 한다.


그 독 속에 수십 종 귀중품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금산을 翁山(옹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1292년 원대의 과학자 곽수경은 昌平(북경 북쪽) 일대의

泉水(천수)를 옹산 아래로 끌어 들여 큰 저수지를 만들어

옹산박이라 불렀는데 당시 서호 서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무제는 장안 곤명지를 개간하여 곤명호라고 명명

명 무종(1506-1521년)은 옹산을 다시 금산이라 했고

옹산박도 옛 이름을 다시 찾라 金海(김해)로 개명했다.
 
지금 중국의 楊州(양주)는 인구 28만 명의 작은 도시.

9세기 초 양주는 장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첫 도착지.

사방이 운하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부와 동부의 운하는

수나라 煬帝(양제)시대에 만들어진 유서 깊은 운하이다.

 

양주(楊州)에서 爪州(조주)를 거치면 鎭江(진강)에 이른다.
 
진강은 오나라 손권(222-258)이 한때 도읍을 정했기 때문.

장강 연안의 金山. 北固山(북고산). 焦山(초산)바위산이 3 개.

北固山을 가운데 두고 금산과 초산은 각각 시의 동쪽과 서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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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와 후백제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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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50권-열전10-甄萱(견훤).]

견훤은 상주(길림성) 사람이며 본성은 李씨

견훤은 金山寺(전북 김제군 금산사)에서 있은지

석 달 만에 '아들 능예, 딸 애복, 애첩 고비 등과 함께

금성으로 도망쳐 나와 고려 태조에게 만나 줄 것을 청원.
 
태조는 기뻐하며 장군 검필, 만세 등을 파견하여

진강 水路로 들어가 위로하고 고려로 데려와 환대.

 

견훤은 태조보다 10년 연상이라 尙父(상부)로 받들어

南宮(강소성)을 주어 직위를 백관보다 상위에 있게 하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고 노비 40명과 말 열 필을 하사하였다.

후백제의 견훤은 전북 김제 금산사로 들어가지 않고

중국 강소성., 楊州(양주) 金山寺(금산사)로 들어간듯.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와 다르지만 일리는 있는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