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0. ( 함양다원. 김종직. 1472년 유두류록. )

donkyhote 2010. 5. 14. 01:21

함양다원.

김종직의 발자취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함양다원'
함양 엄천사 북쪽 대나무밭 주변에 차밭 함양다원.
김종직이 다공(다공=차의 공납) 민폐를 없애려 조성.

뱀사골, 칠선계곡, 한신계곡이 이룬 용류담과 엄천강.
엄천강을 이루는 휴천계곡이 있어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대규모 사찰 엄천사가 있던 마을이라 지금까지도..'절골'.

엄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구형왕릉
그형왕릉을 품고있는 산청군 왕산(932m)

883년 신라 헌강왕 9년에 창건된 엄천사.
화엄사에 있던 결언선사가 창건했다는 사찰.
창건 당시 왕비가 초하루와 보름이면 꼭 기도.

신라 헌강왕이 선왕들의 위패를 모셨던 사찰.
신라, 고려 때 번창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할 당시에 있던 사찰.

'앞으로 5, 6리를 더 나아갔다.
왕대 숲속에 고색창연한 절이 있었다.
엄천사라는 절이었다. 땅이 평평하고 넓어
가히 집을 짓고 살만한 곳.'-김일손 유두류록 중

-이곳 마을 원로 주민들은 증언 -

'마을 곳곳마다 돌절구, 비석의 받침대,
주춧돌 등 사찰 유물이 없는 곳이 없다.
금동불상과 유물들은 일제가 마구 이전.'


1471년 조선 성종 2년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
차 한톨 나지 않는 이곳에 조정에서 차세를 부과해
주민들이 크게 고통을 받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점필재집 <다원이수병서>의 차세에 관한 기록.-


이조시대에 짚신을 신고 지리산 등반은 어려운 일.
특히, 군수의 신분으로 고생을 자처하기란 드문 일.
하여, 김종직에 관해 좀 더 알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우선, 함양다원을 재조명해 김종직에 관해 분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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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다툼에 혈안이 되어 민생을 외면한 사대부들.
백성은 굶어죽거나 말거나 가문의 부귀영화만 추구.
그당시 권세영화를 버리고 민생에 전념했던 김종직.

김종직이 함양군수 시절 조성했다는 관영 차밭 터.
군수가 백성을 위해 차밭을 만든 것은 이조 역사상 최초.
점필재 김종직은 도학사상 정맥을 이은 사림파 종조(宗祖)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실천하는 도학
정몽주에서부터 비롯하여 길재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계승.
김종직은 사리를 버리고 의를 지키는 도학사상 애민정신 실천.

'점필재집’- 차세(茶稅)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에 관한 기록.

“나라에 바칠 차가 나지도 않는데도
해마다 함양 백성들에게는 차세가 부과.
그래서, 백성들은 나라에 차를 바치려고
쌀 한말에 차 한홉을 바꿔서 차세를 납부.
이 폐단을 알고 관가에서 대신 납부했다.”

김종직이 함양다원을 일군 이유는 애민정신.

함양 농민들에게 과중하게 부과되었던 차 공물 납부
농민들은 과중한 차세를 납부하지 못할 만큼 무거웠다.
백성이 불행하면 나라도 불행해진다는., 김종직의 철학.

차 공물은 왕이나 사대부들이 애용하는 기호품이 아니라
중국황제와 귀족들의 기호품이라 외교에 사용되는 조공물
공물 납부에 차질이 생기면 국가의 위신에 큰 손상이 발생.

이조 왕조는 유교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기에
고려와 차별화를 위해 차문화 단절 및 불교탄압책.
그러나, 중국의 황실에 정기적으로 받친 조공품 차.

하여, 조공품을 생산하며., 차 문화 발전.

차문화는 중국이 앞섰지만 차의 품질은 우리나라가 우수
지리산 일대의 차는 향기 색갈 약효 면에서 중국보다 탁월.
하여, 역대 중국의 황실 귀족들이 특별한 좋아하는 조공품.

김종직은 관영차밭을 농민들과 함께 일궈 차 조공품을 해결.
높은 학문과 깊은 경륜으로 백성들 고단한 삶을 보살펴 준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로부터 칭송 받았던 어진 군수의 표상.

경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예림서원(禮林書院).

영남 유림의 종장(宗匠) 점필재 김종직 후학들의 교육기관.
점필제는 도학사상을 실천해 현실 속에 이상을 실천한 인물.
유학자로서 도학정치의 완성을 꿈꿨던 그는 정치가이자 학자.

낙동강의 좌강(左江)은 안동
낙동강의 우강(友江)은 함양.

낙동강 동쪽 안동은 훌륭한 유학자를 많이 낳은 땅이고,
낙동강 서쪽 함양을 자랑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함양 유학의 기반 안의현감을 지낸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하.

연산군 때 스승인 김종직과 더불어 무오사화 당시 숙청.
그들의 죽음은 오늘날까지 거룩하고 향기롭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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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휴천면 동호리 절터마을의 함양다원

그곳 엄천사는 신라의 결언선사(決言禪師)가 창건한 절.
헌강왕이 선고왕 명복을 빌기 위해 결언선사를 불러 창건.
왕명을 받든 결언선사가 지리산에 사찰 터를 잡고 공사 완공.

하지만, 천년이 지난 지금, 엄천사의 화려한 역사는 끊겼다.
고려 이조를 거쳐 여러 차례 중창 후 이조 후기에 완전 폐사.
흔적조차 찾기 힘든 절터의 북쪽 대나무밭에 함양다원이 있었다.

함양다원은 점필재(1470-1475)가 조성했던 차밭.

1998년 함양군 마을 입구에 관영 차밭 조성터 기념비.
삼국사기를 열람한 점필제는 이곳이 차재배지임을 안다.
신라 때 도입된 당나라 차 씨앗을 엄천사 대숲에서 발견.

그 땅을 다원(茶園)으로 만들고 차 재배에 성공.

점필재는 1431년(세종 13) 6월 밀양부 서대동리 출생.
아버지는 강호 김숙자, 어머니는 사재감정 박홍신 딸.
아버지는 처가 재산을 상속받아, 선산에서 밀양으로 이주.

점필제는 29세에 과거 급제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되었다.

34세에 제자들이 많이 모였고 40세에 함양군수(종4품)에 제수.
그 이듬해 유자광이 이 고을에 와서 시를 지어 현판을 붙었는데,
이를 떼어 불사른 사건이 화근이 되어 숙청을 당한 누각이 학사루.

42세때 정여창과 김굉필이 찾아와 글을 배웠다.
1475년 함양을 떠나자,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운다.
함양다원 기념비에는 김종직이 남긴 시가 새겨져 있다.


차밭 - 점필제 作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케 하고자 하나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또한 기쁘다

대숲 밖 거친 동산 1백여 평의 언덕
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무이차 같은 명다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점필재 선생의 애민정신이 배여 있는 함양다원 터
요즘 정치가가 그 애민정신을 본받았으면 하는 바램.





김종직.




1431년(세종 13) 경남 밀양~1492(성종 23) 문신 학자.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 사조(師祖).
세조 즉위를 비판한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효관(孝), 호는 점필재(畢齋).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 학통을 계승.

1446년(세종 28) 과거 응시, 주목 받았으나 낙방했다.
1451년(문종 1) 종직의 문인 조위(曺偉) 누나와 결혼.

1453년(단종 1) 태학에 들어가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
1459년(세조 5) 식년문과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 벼슬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 인수왕후봉숭왕책문 저술

1464년 세조가 잡학에 뜻을 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
1467년 수찬, 이듬해에 이조 좌랑, 1469년 전교서교리

1470년(성종 1) 노모를 모신다며 외직 함양군수 자청.
1471년 봉열대부·봉정대부,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
1475년 중직대부(中直大夫)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

이듬해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 시행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
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관에 임명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내며 사림파를 형성, 훈구파와 대립

1485년 사복첨정 문극정 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
1489년 공조참판·형조판서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을 양성
1492년 사망하여 부남(府南) 무량원 서산(西山)에 묻혔다.


 


1472년 유두류록. 



옛 지리산 산행기 코스를 따라 답사하는 산행이 요즘 붐.
특히, 1472년 유두류록 코스로 답사하는 등산 붐이 인기.
하여, 유두류록 원문을 알기쉽게 풀이해 해설을 겻들인다.

이조시대 유두류록은 정여창, 김일손, 이동항 등 70 여종.
수십명의 악공, 기생, 노비를 대동, 사찰과 암자에서 기거. 
사찰은 산장 역활을 했고 그당시 등산로는 지금과 달랐다.


이조시대 승려들은 없어서는 안될 산행 가이드.

..........김종직의 유두류록 코스.........
함양관아→엄천→화암→지장사→선열암→
신열암→고열암(1박)→ 청이당→영랑재→
해유령→중봉→천왕봉→성모사(2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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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은 지리산 동북부 자락의 지명을 많이 언급
함양 인근 지명들이 탐구산행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유두류록 기록 지명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엄천

신라 때 국가사찰 엄천사에서 유래된 지명 엄천.
지장사, 환희대,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독녀암,
향로봉, 미타암 등의 옛 지명도 옛 지명 탐구의 대상.

현재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마을 이름'은 절터.

남명은 임진왜란 20년 전부터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왜의 침공을 일찌기 경계 곽재우 등 50 여 제자 의병장 배출.
남명은 40여 벗들과 지리산을 12번 째 오른 후 유두류록 작성.

그러나, 이조시대 지리산 산행 지침서는 김종직의 유두류록.
오늘날까지 그가 남긴 유두류록은 산행 지침서로서 인기 높다.
그가 1472년 지리산 유람을 떠나는 길가 풍경이 자못 흥미롭다.





말방울 울리며 가는 마천길


'말방울 울리며 내닫는 마천길 들머리에
길손의 행렬이 길게 따르도다

그늘진 골짜기에 찬바람 몰아오고
벼랑의 단풍은 햇빛에 선연하다

신모사당은 눈속에 파묻혔고
우뢰소리는 용연에 깊이 움추렸네'


김종직 作



김종직은 성종 3년(1472) 음력 8월 14일 아침,
함양성을 나와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에 올랐다.
유호인 조의 한인효 제자들, 함양 관아의 관원들
길잡이 두 스님, 마부, 말바리 등 행렬이 길었다.

그는 사근역 마을을 지나 엄천(엄천 남호리)에서
휴천계곡을 50리 거슬러 올라 고열암에서 첫날 밤.

다음날 의탄마을에 이르는 벼랑길 타고 마천 도착.
의탄 못 미처 계곡 중 으뜸 명소인 용유담에 이른다.
김종직의 시에 나오는 '용연'은 용유담을 말한 것이다.

마천은 지리산 북쪽 관문(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전라도 남원 사람들은 "당벌" 이라 부드러운 억양.
경상도에서는 "땅벌"이라는 억센 억양으로 발음한다.

그것은 지리산의 산신당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신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마을로 부르다가
언젠가 이곳에 장터가 생기며 '당벌장터'가 되었다.

마천곶감, 마천목기, 마천 산나물, 마천임청(산벌꿀),
마천 문종이로 유명했고 지금도 마천 곶감은 유명하다.
500년 전 김종직은 마천 일대를 무릉도원으로 표현했다.

<'오늘날 마천골에 포함된., 의탄마을.'>

"서너 곳의 모롱이를 돌아 이르는 곳에
깊숙하고 한적한 동부(洞府)가 열렸다.

숲이 해를 가리고 솔겨우사리와 댕댕이덩굴이
서로 얽혀 나무를 덮고 있는 아래에슨 시냇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꺾여 힘찬 소리를 낸다.

그야말로 동산(옛 중국의 명승지)에 와 있는 성 싶다..
닭과 소 등을 기르며 나무를 베어 내고 밭을 일궈
벼, 기장, 콩과 삼을 심고 살면 무릉도원이 될 것 같다."

김종직은 그곳에서 발길을 멈춰 지팡이를 두드렸다.
앞서가던 유호인에게 함께 은둔하자는 속마음 표현.
"그대와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 사는 것이 어떠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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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하루 전 사근역에 있는 월명이 무덤을 지나칠 때,
유호인과 둘이 슬픈 역녀의 넋을 회상하는 시를 남겼다.
(영남이 고향인 김종직은 월명이 전설을 잘 알고 있었던듯).

'들풀 푸른 무덤 위에
혼백은 나비로 날고 있네.

무덤 위에 들풀만 어지럽게 푸르렀고
나그네가 슬퍼 노래 부른다
오늘처럼 달도 숨은 밤에는 여우가 울고
봄을 만난 혼백은 나비로 날고 있네.'


塚上靑靑連理枝
行人爲唱華山畿

如今月黑狐狸嘯
應是春魂化蝶飛

- 김종직 作 -



유호인도 한수를 지어 같이 읊었다.


'월명이 무덤 위에 달빛은 밝아 푸르고
한식날이 찾아와도 잡초만 무성하네.
간밤에는 영혼의 소리 하도 은은하더니
봄바람 지나간 곳에 두견화만 피어네.'

- 유호인 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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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 본문
................


길안내 : 해공, 한백인, 법종
도우미 : 하인과 짐꾼들, 말.
옷차림 : 삿갓, 짚신, 지팡이.
여벌 옷 : 원님 만 무명 솜옷.

코스 : 함양, 엄천, 화암, 환희대,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청이당,영랑재,중봉,천왕봉, 영신봉,백무동,등구재, 함양

산행일정 : 1472. 8.14 - 8.15 - 8.16 - 8.17 - 8.18
4박 5일 숙박지 : 고열암, 성모사, 향적사, 영신사.

추정 코스 : 함양. 하봉. 중봉. 천왕봉. 세석고원. 백무동. 마천
현재 : 모두 사라진 사찰(고열암, 성모사 터, 향적사 터, 영신대)


나는 영남에서 성장했다.
두류산은 바로 우리 고장의 산.

그럼에도 이곳 저곳으로 벼슬살이.
세상 일에 골몰하다 보니 불혹의 나이,
아직까지 두류산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1471년 봄에 함양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경내에 있는 두류산은 새파랗게 우뚝 솟아
고개들면 보였으나, 흉년이 들고 사무가 바빠
2년이 넘도록 한번도 그곳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유호인, 임정숙과 두류산 이야기를 나누면
그곳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늘 간절하였다.

마침 여름에 조위가 관등에서 와
나와 함께 <예기>를 읽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부모 곁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떠나기 전에 지리산을 한번 구경가자고 청하였다.

나 역시 허약한 증세가 날로 더해가고
요즘 들어 다리 힘이 갈수록 떨어지기에
금년에 못가면 내년을 기약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때는 바야흐로 가을철이고
장마철 습한 기운도 이미 걷혔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에서 달을 구경하고,
새벽 닭이 울면, 해가 뜨는 것을 구경하고,

밝은 아침에 또 사방을 두루 볼 수 있을 것이니
일거양득이라 드디어 길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이에 극기를 불러 태허와 함께
<수친서>에 적혀 있는 것을 참고
산행 떠날 도구를 대충 준비하였다.

......................<主>...............................
수친서 내용은 이륙 作 1463년 8월 '유 두류산록'
김종직은 산행 전 '이륙'이 쓴 청파집을 참고한듯.
1472년 산행 전 수친서에 지리산에 관한 정보를 기록.
............................................................


음력 8월 14일

덕봉사 중 해공이 길안내를 맡고 한백원이 따라왔다.
엄천을 지나 화암에서 쉬는데 중 법종이 뒤따라 왔다.
길을 자세히 알기에 그에게도 길안내를 하도록 하였다.

지장사에 도착했다.
길이 가닥이 났으므로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

골짜기와 숲이 맑고 깊숙하여
벌써 경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마장 쯤 가니 환희대라는 바위.
태허와 백원이 그 마루턱에 올랐다.
천길 아래로 금대암, 홍연암, 백련암 절.........절골

먼저 선열암을 찾았다.
암자는 가파른 절벽 아래.
그 아래 맑은 샘 두 개 있었다.
담장 밖 바위 홈으로 물이 흐른다.
물방울이 오목바위로 떨어져 괴었다.

마치 깨끗한 못과 같았다.

그 틈에는 몇 마디쯤 되는 적양과 용수초
듬성듬성 나 있는 곁에는 돌계단이 나 있고
등넝쿨 한 가닥이 나무에 매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붙잡고 묘정암과 지장암에 오르내렸다.

"한 비구승이 참선하면서 우란분을 만든 뒤
구름처럼 노닐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법종.

지금은 돌 위에 오이와 무가 심어져 있고
두어 되 곡식을 찧을 만한 절구통이 있을 뿐.

다시 신열암을 찾았다.
중이 없는 빈 암자였다.
솟은 벼랑을 등지고 있다.
동북쪽에 솟은 독녀암 바위. ...........함양 독바위.

................해설...............
운서리 운암마을에서 개울 건너
왼쪽 계곡따라 3.2㎞ <함양 독바위>.

'함양군 빨치산 탐방로'의 이정표,
노장대 마을 지나 오른쪽 능선 바위

서쪽 법화산과 그 아래 임천강이 보이는
<다섯 거대한 암괴 >가 있는 곳이 독바위.
...................................................

그 높이가 천 자나 되고
다섯 가닥으로 갈라졌다.

옛날 어떤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다 돌을 포개어 집을 만들고
혼자 살면서 도를 닦은 뒤 공중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때문에 그런 바위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 법종이 한 말 -.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있었고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었다.

그곳에 올라 가려면 사다리를 놓고
잣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돌고 돌아야 하는데,
등과 배가 벗겨진 뒤에야 오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목숨을 내건 자가 아니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따라온 아전 옥곤이와 용산이는 벌써 올라가
발을 구르며 우리를 향해 보란드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지방(현 경남 산청군)을 오가며
이 바위를 바라보았을 때, 하늘을 받치는 듯 높았다.

지금 이곳에 와보니 몸이 오싹하고 황홀해
내가 이 세상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조금 서쪽으로 돌아 고열암에 이르렀다.
현재 사라진 사찰로 점필재 일행 일박처.


해는 이미 저문 서쪽에 의논대가 있었다.
극기 일행은 쳐져 혼자 지팡이 짚고 삼반석.
발 아래에 향로봉과 미타봉이 내려다 보였다.

법공의 말에 의하면, 절벽 아래 석굴이 있단다. ..........선녀굴.
옛날 이 석굴에는 노숙과 우타가 살고 있었는데,
세 승려와 함께 이 돌에 앉아 불교의 진리를 득도
그래서 의논대라는 바위 이름이 붙은 곳이라 한다.

조금 뒤 중 하납이 와서 합장하며 말을 건다.
"듣자니 원님이 구경왔다는데 어디 있는가?"

법공은 눈짓을 하여 말을 삼가하라 시늉하니,
이를 눈치 챈 듯 하납은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나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여 위로하였다.

"불을 쬐고자 하는 자는 부엌을 다투고,
쉬고자 하는 자는 자리를 다투는 법일세.

이제 그대가 한 늙은이를 만났으니
누가 원님인 줄을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법공 등이 모두 웃었다.
첫날이라 시험삼아 20리 길을 걸었다.
피곤하여 잠에 빠졌다가 한밤중에 깼다.

달빛이 산봉우리를 삼켰다 뱉었다 하고
구름이 피어오르기에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8월 15일

"제가 이 산에서 오래전부터 살면서
구름의 형상으로 점을 쳐보곤 하였는데,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새벽에는 날씨가 더욱 흐렸는데
중의 그 말에 모두들 기뻐하였다.

우리 일행은 짐꾼을 갈라서 보낸 뒤
그 절에서 나와 서둘러 길을 떠났다.

푸른 등넝쿨과 깊은 대숲 속에는
저절로 말라 죽은 덩치 큰 나무가
냇가에 넘어져있어 다리가 되었다.

쓰러진 나무 중에는절반이나 썩었지만
아직 가지가 땅을 막고 있어 말탄 듯 했다.
머리 숙이고 그 아래로 나와 한 고개를 넘었다.

"여기는 앞으로 넘을 9 중 첫 번째 고개입니다"

법공의 말을 듣고 서너 고개 넘으니 골짜기가 보였다.
골짜기 주위는 넓고 깊숙하며 수목이 햇빛을 가리었다.
다래덩굴이 얽혀있고 시냇물이 구비치는 소리도 들렸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진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 길을 걸으면 의탄촌.
(의탄촌 = 현재,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에 해당하는 곳.)

.............主 : 의탄촌 (현재 의탄 마을)................
지리산 북쪽 관문을 통틀어 부르는 함양군 마천면.
천왕봉 및 중봉 준령 계곡 물줄기가 하나 되는 마을.
무더운 여름날 마천은 옛부터 피서 인파가 몰리는 곳.

마천의 으뜸 피서지는 칠선계곡의 들머리인 추성동
한신계곡 깃점 백무동, 임천과 엄천을 가르는 용류담
그밖에 벽소령 아랫마을 음정, 양정, 하정의 삼정마을

창암산, 추성동에서 하봉 가는 길목인 광점동, 얼음터,
국골, 지리산 최대의 계곡인 칠선계곡 일대가 마천이다.

마천면 추성동으로 가다보면 임천을 가로지르는 의탄교.
다리를 건너 의탄마을은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
..................................................................................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밭을 개간한 뒤
서속, 기장, 삼, 콩을 심고 살면 무릉도원 부럽지 않을 듯.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 극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볼거나"

여기 온 기념으로 바위에 이름을 썼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 능선 따라 걸었다.
지나가는 구름이 나직이 삿갓을 스쳐간다.
풀과 나무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다.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진주 땅이다.......쑥밭재

안개가 자욱하여 멀리 바라볼 수 없었다.
이윽고 판자로 지은 청이당에 도착하였다. .......쑥밭재.
............................................................
(진주가 보이는 산등성이의 당집= 청이당.)
(산청 쑥밭재로 내려가는 고개 옆 물길 부근)
...............................................................

네 사람이 각각 당 앞에 바위에 앉아 쉬었다.
여기서부터 영랑점까지는 길이 극히 험하였다.

'뒷사람은 앞 사람의 발 밑만 보이고
앞 사람은 뒷사람의 이마 만 보인다.'

- <봉선의기> 기록에 나오는 곳 -

나무뿌리를 잡고야 오를 수 있다.
정오가 지나 비로소 영랑점에 올랐다.
함양에서 보면 가장 높고 험준한 봉우리.
여기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이 올려다보였다.

이곳을 영랑점이라 부르는 것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영랑이
삼천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유람 중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말봉 또는 두류봉.

그 옆에 만길 절벽 우뚝 솟은 소년대.
(한신계곡 끝에 있는 절벽 이름인 듯.)
혹시 그 소년대는 영랑의 문도 아닐까?

바위를 감싸 안고 밑을 보니까 떨어질 것 같았다.
따라온 사람들에게 그 곁에 가까이 가지말라 했다.

때마침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해가 아래로 비쳤다.
그러자 산의 동쪽과 서쪽의 광활한 계곡이 나타난다.
계곡에는 잡목은 없고 모두 삼나무, 회나무, 소나무뿐.

그중 3분의 1은 말라 죽어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고
간간이 단풍이 들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산능선에 있는 것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가 모두 왼편 한쪽으로 쓰러져 자라 있고
바람불자 가지는 굽어진 채 머리칼처럼 나부꼈다.

이곳은 잣나무가 매우 많은 곳이다.
가을이면 잣을 공물로 따다 바친단다.
그러나 올해에는 열매맺은 나무가 없다.

그럼에도 공물을 받으면 백성들은 어찌 될 것인가?
수령인 내가 보았으니 참으로 다행히 아닐 수 없다.

서대초와 유사한 풀밭이 있었다.
부드러워 깔고 누웠다 할 만 하며
주변 곳곳마다 모두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에 오기 전까지 오미자가 울창한 숲
여기 오니 독활과 당귀 만이 보일 뿐이었다.

해유령을 넘자 길가에 있는 선암이란 바위.
법종이 그 바위의 유래에 관해 말해 주었다.

"아주 옛날 바닷물이 땅을 뒤덮었을 때
이 바위에다 배를 붙들어 매었다는 전설.
게가 이 고개를 기어서 넘어갔기 때문에
<선암 : 배바위> 이름이 붙여졌답니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대 말을 믿는다면
그때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부둥켜 잡고 살았을 것이 아니냐?"

드디어 우리 일행은 다함께 중봉에 올랐다.
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은 모두 돌이었는데,
유독 우리가 오른 봉우리만 흙으로 덮혀 있었다.

판판하고 넓직하여 말을 달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내려온 후 말을 쉬게 하였다.
바위에 마실 수 있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었다.

가뭄이 드는 해 이곳 주민들이
이 바위에 올라 발을 구르며 돌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 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어 시험을 해 보았더니,
그 소문대로 제법 효험이 있었다.

오후에 천왕봉에 올랐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온누리가 어둡고 안보였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 묘에 들어가 빌었다.
조그마한 부처에게 날씨가 개이게 해달라는 듯.

나는 처음에 장난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랬더니 속설에 이렇게 하면 하늘이 갠다고 하였다.
하여 나도 의관을 바르게 입고 세수하고 돌길을 더듬어
사당에 들어가서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성모에게 빌었다..........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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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찍이 공자께서 태산에 올라 구경한 일과
한퇴지가 형산에서 노니시던 뜻을 사모하였으나,
직무에 매인 몸이라서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금년 8월에 남쪽 경내의 수확을 살펴보다가
드높은 봉우리에 가서 미력한 정성이나마 드립니다.

드디어 진사 한인효, 유호인, 조위 등과 함께
구름사다리를 밟고 이곳 사당에까지 왔습니다.

하오나 비를 다스리는 귀신이 마술을 부려
구름이 김서린 듯 깔려 황당할 뿐만 아니라
산수유람의 좋은 기회를 놓칠까 두렵습니다.

옆드려 비오니 성모께서 이 술을 흠향하시고
신통력을 발휘하여, 저녁 안으로 날씨가 개어
달빛이 대낮과 같고 내일 아침에는 만리가 트여
산과 바다가 확연히 드러날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러면 우리들이 좋은 구경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어찌 그 큰 은혜를 잊으오리까."
...............................................

이렇게 제사를 지낸 뒤 다함께 신위 앞에 앉아
술 몇 잔씩을 나누어 마신 다음에야 일어섰다.

성모사당은 단지 3칸으로 엄천리 사람이 고쳐 지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못을 단단히 박은 판자집이었다. .....성모사 터.

두 중은 벽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돌 성모상의 얼굴은 예뻤고 머리엔 쪽
분칠한 얼굴로 이마에는 파손된 자국

그 이유를 중들에게 물었다.

1380년에 운봉 인월역에서 있었던 황산대첩 당시
태조 이성계에게 쫓기던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칼로 찍어 놓은 것을 뒷날 다시 손질했다는 것이었다.

동편 오묵한 돌무더기에
해공이 빌던 부처가 있었다.

이는 국사의 상으로,
민간에서는
성모의 음탕한 남편으로
보고 있다.

성모를 어떤 신으로 보는지 중들에게 물었다.
두 중은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 대답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인도와 우리나라는 여러 나라로 가로 막혀 있는데,
인도의 가유국 부인이 어찌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일찍이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성모가 선사에게 명한 것에 대한 주석 -
"지리산 천왕은 고려 태조의 비 위숙왕후"

고려 사람이 선도성모의 이야기를
왕실의 혈통을 신성화하기 위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는 기록.

그 기록 또한 증빙할 수 없거늘,
허무맹랑한 중말을 어찌 믿을까?

또한 성모를 마야부인이라 하면서
국사를 그의 음탕한 남편으로 만들어
욕을 먹이니 불경스럽기 짝이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음산한 바람이 몰아쳤다.
성모사의 지붕에 씌워놓은 옷이 모두 젖었다.
네 사람이 모두 사당 안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 두꺼운 솜옷을 껴입었다.

하인들이 온 몸을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
큰 나무 서너 그루를 가져다 불피우고 쬐게 하였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달빛이 어렴풋이 비쳤다.

반가워 일어나보니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다.
흙벽에 기대어 사방을 바라보니 천지가 아득하였다.
마치 큰 바다 한가운데서 조그마한 배 하나를 탄 듯.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며
파도에 빠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세 사람에게 말하였다.

"비록 한퇴지 같은 정성과
왕저 같은 도술이 없을지라도
그대들과 함께 우주의 근원을 타고

혼돈의 원시세계에 떠노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


8월 16일

비바람이 아직도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먼저 하인을 향적사(장터목 인근)로 보내어
밥을 짓고 내려갈 길을 찾은 후 돌아오라 했다.

정오가 지나서야 비가 조금 그쳤다.
길이 미끄러워 부축을 받며 내려왔다.
쇠사슬 박은 길이 있었지만 위태로웠다.
돌 구멍을 뚫고 힘겹게 향적사에 도착했다.

향적사에는 중이 살지 않은 지가 이미 2년이 지났다.
계곡 물은 아직도 나무 홈통을 타고 물통으로 떨어지고,
문 자물쇠와 향반의 불유가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깨끗이 청소를 한 뒤 향불을 피우고 안으로 들어가 쉬었다.

어둠이 깔릴 무렵 천왕봉으로부터 역풍이 불어와
눈 감짝할 사이에 먹구름이 흩어지고 먼 하늘에서
간혹 구름사이로 지는 해의 노을 빛이 비치곤 했다.

나는 기쁜 나머지 손짓을 하며
문 앞에 있는 마당바위로 나갔다.
멀리 구물거리면서도 감도는 살천.
여러 산과 섬이 반쯤 드러나 보였고,
혹은 산봉우리의 이마만 드러나 있었다.
마치 장막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 같았다.

정상 봉우리는 몇 겹으로 구름에 싸여 있었다.
그래서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성모사 옆에 흰 깃발이 남쪽을 가리키며 나부꼈다.
그림 그리던 중이 그 위치를 나에게 알리려고 한 듯.

남북의 바위를 두루 보면서 달 뜨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동쪽이 밝아 오기도 전에 추위가 느껴졌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관솔불을 피워 향적사 방안을 훈훈하게 했다.
잠자리에 누운 한밤에야 달과 별이 환히 밝았다.


8월 17일 (천왕봉 일출,세석, 영신대 )

새벽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자 눈부셨다.
일행은 내가 지쳐 더 못갈 것으로 여겼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여러 날 동안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다가 갑자기 갠 것을 보면
하늘이 나에게 많은 혜택을 준 것인데,
지금 정상을 눈앞에 두고 오르지 않는다면
평생 품었던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할 것 아닌가.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옷자락을 걷어붙인 뒤
지름길로 석문(현재 : 통천문)을 거쳐 올랐다.
발에 밟히는 풀과 나무마다 얼음이 맺혀 있었다.
성모사에 들어가 다시 잔을 올리며 감사드렸다.

"오늘 천지가 맑게 개어 산천이 활짝 열린 것은
신께서 도운 덕택이니, 깊이 감사드리는 바이다."

그런 다음 극기와 해공과 함께 북쪽 봉우리에 올랐다.
태허는 벌써 앞장을 서서 먼저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비록 나는 기러기일지라도 우리 위로 날지 못할 것 같았다.

때마침 비가 막 개어 사방에 구름 한 점 없고
탁 트여 끝이 보이기에 내가 일행에게 물었다.

"무릇 먼 곳을 보는 데에 요령이 없으면
나뭇꾼들이 바라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을
그 다음에는 남쪽과 서쪽을 보되,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눈을 옮겨
주위를 바라보며 알아야 옳지 않은가?"

그랬더니 해공이 곳곳마다 자세히 설명했다.

"이 산은 북에서 달려와 남원에 이른다.
그곳에서 처음 솟은 봉우리는 반야봉이고
그 동쪽으로 몇 백 리를 뻗어 천왕봉에 와서
다시 높이 솟아나 북으로 서리다가 끝난다.

그 사면으로 뻗은 곁봉우리와 골짜기는 다투듯 흘러내려,
제 아무리 능력있는 자라도 그 수효를 모두 헤아릴 수 없다.

끌어당기 듯 둘러쳐진 성은 함양의 성 같고,
푸르고 누런 무지개가 가로지른 곳은 진주 강물.
물고동이 점을 찍어 놓듯 비끼어 곧장 솟은 남해
그리고 그 뒤로 거제의 여러 섬이 아닌가 싶다.

산음, 단계, 운봉, 구례, 하동 고을들.
모두 겹겹 산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북쪽의 가까운 산은 황석산, 취암산이고.
먼산은 덕유산, 계룡산, 주우산, 수도산, 가야산.

동북쪽 가까운 산은 황산, 감악산,
먼 산은 팔공산, 청량산 등등이다.

동쪽의 가까운 산은 도굴산, 집현산,
먼 산은 비슬산, 운문산, 원적산이다.

동남쪽의 가까운 산은 와룡산이고,
남쪽의 가까운 산은 병요산, 백운산이다.

서남쪽의 먼 산은 팔전산이고,
서쪽의 가까운 산은 황산, 무등산,
변산, 금성산, 위봉산, 모악산, 월출산.
서북쪽의 먼 산은 성수산이다.

이들 여러 산은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이나 범 모양새 같기도 하며,
음식 접시를 괴어 놓은 듯, 칼날인 듯..
다만 동쪽에 있는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
주변의 여러 산에 비해 자못 우뚝 솟아있다."

계십령 이북은 푸른 기운이 하늘 가득.
대마도 이남은 바다 기운이 하늘에 닿아
시력이 끝까지 미치지 못해 분별할 수 없다.

그래서 이같은 해공의 설명을 극기로 하여금
기록할 수 있는 것만 위와 같이 기록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서로 돌아보면서 자축하였다.

"예로부터 이 천왕봉에 오른 자가 있었겠지만
어찌 우리들처럼 통쾌하게 본 사람이 있겠는가?"

천왕봉 정상을 내려와 돌층계에 앉아
술 서너 잔을 주고 받으니 정오가 지났다.

멀리 영신봉의 좌고대를 바라보니 아직도 까마득하였다.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석문을 뚫고 내려와 중봉에 올랐다.

이 역시 흙으로 된 붕우리였다.

함양에서 엄천 쪽으로 오르면 북쪽의 둘째 봉우리가 중봉,
마천쪽에서부터 오르면 시루봉(제석봉)이 첫째 봉우리이나
이 역시 천왕봉 다음으로 두 번째 높은 봉우리이므로 중봉이다.

이곳부터는 계속 능선을 타고 갈 수 있다고 한다.
그 사이에는 우뚝 솟은 10여 개의 봉우리가 있다 한다.
모두 올라갈 수 있고 천왕봉 못지 않으나 이름이 없단다.
옆에 있던 제자 극기가 나에게 봉우리마다 이름을 지으란다.

"증거가 없어 믿지 않을 터이니 이름 지어야 소용 있겠는가?"

숲에는 지팡이를 만들 만한 지팡이가 많았다.
그래서 하인으로 하여금 미끈하고 곧은 것만 가려
배어오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이나 되었다.

시루봉을 거쳐 저여원(세석)에 이르렀다.
길가의 단풍나무가 마치 문처럼 휘어져 있어
지나는 사람이 허리를 굽히지 않고 지날 수 있었다.
산마루에 펼쳐진 평원은 평탄하고 광활하여 5, 6리 정도.

수풀은 무성하고 샘물이 주위에 흘러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도 있는 곳이다. ........음양수.
시내 위쪽에는 조그마한 초막이 보이는데,
나무로 울타리를 두르고 흙으로 만든 아궁이....화전민 터.

바로 매를 잡는 움막집이었다.

나는 영랑점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골짜기 곳곳에 설치한 매잡는 덫을 보았다.
늦가을이 아니었기에 매를 잡는 자도 없었다.

매는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이다.

그런 새가 어찌 이처럼 험준한 곳에 덫을 놓고
움막에서 자기를 노리는 자가 있을 줄로 알리오.

먹잇감을 보고 탐 낸 나머지 마침내
그물에 걸려 끈과 방울을 차게 되니,
이런 점은 사람이 교훈을 삼을만 하다.
나라에 바치는 매는 한두 쌍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를 가지고 놀려는 자들
헐벗고 굶주린 자로 하여금 눈보라를 맞게 하며
천길의 산봉우리에 엎드려 있게 하니, 차마 못할 일
어진 마음이 있는 자라면 어찌 그 고생을 하게 하리오.

저녁에 험준하고 깍아지른 창불대에 올랐다
그 아래는 바닥이 없었고 그 위는 초목도 없다.
단지 진달래 몇 그루와 영양의 똥이 있을 뿐이다......<영신대>

그 아래로 두원관, 수관과 섬진강의 끝을 굽어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겹쳐 있어 매우 기이하였다.

옆에 있던 중 해공이 여러 골이 모인 곳을 가리킨다.

"저기는 신흥사 골짜기로 절도사 이극균이
호남의 도적, 장영기와 싸우던 곳 입니다"

장영기는 좀도둑이었다.

이같은 험준한 곳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극균도 날뛰는 장영기를 막아내지 못했다.
하여 졸지에 장흥군수가 공을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

또 해공은 악양 고을의 북쪽을 가리킨다.

"저기가 청학사가 있는 동네입니다"

'아! 저곳이 신선이 살던 곳이란 말인가?'

저곳은 인간이 사는 곳과 멀지 않은데,
미수 이인로는 어찌 찾지 못하였을까?
일 좋아하는 자가 이인로 이름을 사모해
절을 지어 그의 명칭을 붙힌 것은 아닐까?

또 해공은 손가락으로 악양 동쪽을 가리켰다.

"저기가 쌍계사 골짜기입니다.
고운 최치원이 일찍이 그곳에서 노닐며
돌에 새긴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입니다"

고운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
기개는 있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다.

중국에서만 불우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용납되지 못하였다.
드디어는 인간 세상 밖에 은둔하였다.
산수 깊고 고요한 땅은 그가 놀다 갔으니,
세상 사람들이 신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영신사에서 잤다.

그곳에는 단지 한 명의 중이 있었을 뿐이다.
절의 북쪽 비탈에는 가섭의 석상이 하나 있었다.
세종대왕 때 늘 내관을 보내 향불을 피웠다고 한다.

석상의 이마 한쪽이 파손되어 있었다.
그 역시 왜구가 칼로 깍아놓은 것이란다.

왜구는 참으로 잔인한 오랑캐!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도 모자라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칼질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돌일진대,
어찌 사람의 형상이라고 해서
저렇게 칼질을 해댈 수 있는가.

가섭상 오른팔에는 불에 탄 것 같은 반점이 있었다.
세계가 파멸될 때 일어난 불에 탄 것으로 조금 더 타면
미륵의 세상이 된다는데 반점은 본래 있었던 자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당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미래의 이익을 갈구하는 자들이 앞다투어 시주를 한다.
중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상을 모신 전각 북쪽 봉우리에 우뚝 선 바위 두 개.
이른바 좌고대이다. 하나는 아래가 뒤틀리고 위가 뾰족
머리에는 너비가 한 자쯤 되는 네모난 돌을 이고 있었다.

중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 예불하는 자는 효험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하인으로 따라온 옥곤과 염정이 그곳에 올라 절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사람을 보내 꾸짖은 뒤 내려오도록 했다.

어리석은 자들이 저렇게 목숨까지 걸면서 그러는데,
이것만 보아도 중들이 백성을 속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신사 법당에 원나라의 중 몽산화상 그림이 걸려있다.

"두타 제일로 번뇌를 없애고
밖으로 인간 세상의 먼지를 떨치고
안으로도 티끌이 없네. 님 먼저 득도하고
맨 뒤에 입멸하였도다,
설의 계산이 천추에도 썩지 않으리"

그 위에 몽산을 찬한 글이 있었다.

영신사 동쪽 섬돌 아래는 영계
서쪽 섬돌 아래는 옥천이 있었다.

물맛이 매우 감미로웠다.

그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중냉천이나
혜산천물도 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샘 서쪽에 무너져가는 절이 오똑 서 있었다.

옛날의 영신사였다.

그 서북쪽 깍아지른 봉우리에는 작은 탑이 하나.
섬세하고 아름다웠으나 그 역시 왜구가 쓰러뜨렸다.

그 뒤 다시 탑을 쌓고 그 가운데
철근을 박았는데 몇 층이 없어졌다.


8월 18일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문 열고 섬진강을 보았다.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참 그 광경을 지켜 보았는데
안개가 판판히 깔려 그리 보였다.

우리 일행은 서둘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절 서북쪽으로 출발해 고개마루에서 쉬었다.

반야봉을 바라보니 약 60리쯤 되어 보였다.
그러나 두 발이 부르트고 근력이 빠진 상태.
반야봉에 가보고 싶었지만 강행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름길로 곧바로 하산하였으나,
험해 나무 뿌리와 돌 모서리를 딛고 내려왔다.
하산하는 수십 리 길이 내내 모두 그러하였다.

동쪽을 보니 천왕봉.
마치 코 앞에 있는 듯.
대나무에는 간혹 열매
사람들이 대부분 따갔다.

둘레가 백 뼘이나 될 정도로 큰 소나무가
바위 사이 사이에 즐비하게 서서 있었다.

이런 광경은 전에 보지 못하였다.


드디어 우리 일행은 험한 곳을 모두 내려왔다.
두 골짜기 물은 하나로 합해진 뒤 요란한 소리.
산기슭을 진동시켰고 맑은 못에 고기가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물을 한 움큼 떠 양치질을 하였다.

그런 다음 절벽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걸었다.
기분이 상쾌하였다. 골짜기 입구에 있는 사당.
우리 집 종이 말을 끌고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말타고 실택리에 도착했다.

마을 노을 여럿이 길가에 나와 맞아 주며 절을 했다.
"사또께서 아무 탈없이 유람하고 오시니 축하드립니다"
일도 않고 놀러간 나를 탓하지 않는 백성을 보고 기뻤다.


중 해공은 군자사로 가고 범종은 묘정사로 갔다.
동행했던 태허와 극기, 백원은 용유담으로 갔다.
나는 둥그점을 넘어 지름길로 관사로 돌아왔다.

내가 유람한 것이 5일에 불과하지만, 신수가 좋아졌다.
처자나 아전들이 보기에도 예전과 같지 않은 모양이다.

오호라.

만일 두류산처럼 웅장한 산이 중국에 있었으면,
중국 황제는 숭산이나 대산보다도 먼저 올라가
제사를 지내고 금으로 쓴 옥첩을 신께 바쳤을 듯.

우리들은 이번에 평소의 소원을 겨우 풀었다.
청학동과 오대의 그윽한 경치를 보고 싶었지만
공무에 얽매인 몸인지라 두루 구경을 다 못했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 극기, 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놀러 가고,
나는 등귀재(登龜岾 현 오도재)를 넘어서
곧장 군재(郡齋)로 돌아왔는데,

나가 노닌 지 겨우 5일 만에
가슴 속과 용모가 확 트이고
조용해짐을 갑자기 깨닫게 되어,
비록 처자(妻子)나 이서(吏胥)들이
나를 볼 적에도 역시 전일과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 태산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을 봉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하였을 것,
그렇지 않으면 의당 무이산, 형악에 비유,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창려(韓昌黎),
주회암(朱晦庵), 채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한 이로는 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 같은 이들이 배회하며 서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를 배운다는 용렬한 사내나 천인들의 소굴

오늘날 우리 무리가 비록 한 차례 등람
겨우 평소의 소원에 보답하기는 했으나,
세속 직무에 급급하여 청학동을 못 찾고
오대(五臺)를 두루 탐토 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의 불우함이겠는가.

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
시구를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날아오른다.

임진년 중추(仲秋) 5일 후에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