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8. ( 傳 구형왕릉. 유의태 약수. 동의보감. 왕산.)

donkyhote 2010. 5. 14. 01:18

傳 구형왕릉.

 

전할 전(傳)은 '옛부터 전해오는..' 이란 의미.

구형왕릉 앞에  傳자가 붙은 사실이 특이하다.

왕릉 일 수도 있고, 전설일 수도 있다는 뜻 같다.

마야계곡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구형왕릉.
한반도 유일의 피라미드형 7단으로 쌓인 적석총
우리나라에도 피라미드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웁다.

'마야 또는 잉카의 피라미드보다 작지만.'

이끼나 풀이 자라지 않고 새도 날지 않는 돌무더기.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 곳이라 알려져왔던 신비한 곳.
단지,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곳으로만 알려져왔던 곳.

근래에 밝혀진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

'왕이시여… 병사들 추모의 눈물이 돌마다 어린듯.'
가락국 마지막 왕이 백제와 싸우다 전사했다는 구전.
병사 한명이 돌 하나씩을 쌓아 이뤄졌다는 구형왕릉.

애끓는 가야사 한이 담긴듯한 돌무덤.
지금은 사라진 가야 역사의 장엄한 침묵.
그 역사의 숨결이 저절로 느껴지는 구형왕릉.

'구형왕 그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구형왕..........................
금관가야의 마지막 제 10대 왕(521~532재위)이다.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겸지왕, 어머니는 각간 '출충'의 딸 숙(淑).

'통일신라 주역.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

532년(법흥왕 19) 왕비 및 세 아들(노종 무덕 무력)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상등 벼슬과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금관가야는 멸망했으나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하며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아들 무력은 백제 성왕과 좌평 4명을 죽인 관산성 전투 주역.

무력은 신라에서 많은 무공을 세워 각간 벼슬.

신라 진흥왕 23년(562년)에 나라를 받친 구형왕.
나라를 신라에 받쳤다는 뜻에서 양왕이라고 한다.

신라에서 상등 벼슬을 받아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 설.
동생 구해(仇亥)에게 양위하고 왜국 왕이 되었다는 설.
(일본 메이지 대학 鈴 木武樹 교수가 주장하는 학설)

일본 천황도 황실 조상이 김해 김씨라고 말한 바 있다.
김해 김씨와 일본 천황 황실과는 깊은 관련이 있는 듯.
앞으로 누구인가 좀 더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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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양대 거봉인 백두산은 단군 할아버지의 양산(陽山)
지리산은 삼신 할미 음산(陰山)이라 산청 옛지명은 산음(山陰)
산청은 '산 높고 물 맑은..' 산고수청(山高水淸)이란 뜻의 지명.

구형왕릉이 있는 왕산은 천왕봉 동쪽 능선 가운데 위치.

엄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김수로왕 별궁터
가락국 태조인 김수로왕이 지었다고 하여.. 태왕궁
태왕산이라 하였다가 지금은 왕릉이 있다 하여.. 왕산

하봉-쑥밭재-왕등재-밤머리재-응석봉 능선 가운데 왕등재
왕등재 부근에서 다시 지능선을 탄 지리산 동쪽 끝 봉우리.
이곳 왕산 산자락에 구형왕릉은 국내 유일의 돌로 된 왕릉

'피라미트 형식일까?
아니면, 탑 형식일까?'

그 옛날 가야는 낙동강 하류에서 중류에 걸쳐
금관가야니 아라가야니 이런저런 가야 연맹체.
가야 연맹 간 결속력이 오늘날 경상도 결속력.

"우리가 남이가."
"보리 문동이 제"

물이끼 머금은 돌 하나마다 체온같이 다가오는 온기.
햇볕에 달궈진 따듯함 하나마다 천년세월을 품은 듯.
왕릉 입구 화계마을에는 왕산 약국 식당 슈퍼도 있다.

'자랑스러운 가야인 후손이라는 자부심.'

벽송사 초입 추성 삼거리의 추성은 구형왕이 쌓은 성
왕릉은 비교적 큼직한 돌로 길쭉하고 편평하게 첫째단
위로 좁혀가며 일곱째 단이 맨위 봉분을 떠받드는 형상.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왕실 무덤으로도 알려졌다.
측면이 사다리꼴을 이루어 꼭대기가 평평한 것도 있다.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서아시아, 그리스, 키프로스.·
이탈리아, 인도, 타이, 멕시코, 남미 피라미드 등이 유명.

피라미드의 전성시대는 BC 2686 ~ 2345년 경.

사카라 남쪽 다슈르 장사방형(長斜方形) 피라미드
엄격한 4각뿔 무덤으로 발전하는 단계를 나타낸다
이집트에서 가장 큰 기자에 있는 파라오 피라미드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태양 피라미드와 달 피라미드,
치첸이트사 카스티요, 안데스 산맥의 잉카문명 유적
아메리카 피라미드는 흙 표면에 계단식 돌을 입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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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몽골리안 종족들의 왕실 무덤이란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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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가락국 제10대 구형왕 돌무덤.
사적 제 214 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형왕릉 릉.

 


층단(層段)을 이루는 방형(方形)으로 경사면에 축조한 것.
전면은 7단 이고, 후면으로 갈수록 층의 높이에 따라 체감.
무덤 경사면을 따라 7단으로 쌓아올린 형태가 참 특이하다.

꼭대기는 타원형으로 쌓았고 전면 중앙의 전체 높이는 7.15m이며,
제4단 동면에 너비 40cm 내외, 높이 40cm 내외, 깊이 68cm의 구멍.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이 쌓여있다.

'구형왕릉에 구멍을 뚫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감실이라고 부르며 구형왕의 영혼이 머무는 곳.
그 영혼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석실.
고대 가야인들의 죽음에 대한 의식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감실은 신주나 불상 또는 등잔을 안치해 두는 곳
살아남은 자가 죽은 사람을 위해 만든 눈과 통로.
영혼이나마 자유롭게 세상과 교통하라는 혼의 통로.

전면 중앙에 가락국호왕릉(駕洛國護王陵)이라고 새긴 석비가 있다.
그 앞에 상돌과 장명등, 좌우에 문인석·무인석·돌짐승 l쌍씩 배치.
이 석물들은 요즈음의 작품으로 원래 돌무덤과 시대적 차이가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서 왕릉임이 밝혀졌고,
이 산 아래에 왕산사에서 옮겨왔다는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가 봉안.

구형왕릉은 지금부터 약200년 전에 다시 찾게 되었다.
왕산사 절에 보관된 구형왕과 계화왕비의 영정과 유물
그리고, 탄영(坦瑛)의 왕산사기(王山寺記) 등에서 고증

생초면 어서리 태봉산 남향 구릉 위에 50 기의 고분 흔적.
개간, 도굴로 파헤쳐져서 지금은 10 여기 형태만 남아있다.
석실입구 통로가 있는 횡구식 석실분으로 5세기 지배층 무덤

고분군 바로 아래 강기슭 절벽 위에는 어외산성(일명 척동산성)
약 150 개 무덤 흔적이 남아 있고 성내에 동서 13m, 남북 12m 연못
7세기 경 신라와 백제 국경지대에 위치한 구형왕릉과 멀지 않은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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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역사속에서 밝혀지지 않은 5세기 경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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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의 중앙집권적 3국 시대에 가락국.
김해지역에 자리잡은 가락국은 6 가야 연맹 중 최대국.
1세기 무렵 일본의 야마타이(耶馬台) 왕국을 다스렸다.

한편 가야연맹은 신라와 영역 다툼에서 번번이 패배
백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라를 견제하였는데,
4∼5세기 초엔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낼 만큼 국력 신장.

6세기 초 고구려로부터 세력이 밀린 백제와 신라가 서로 동맹
가야 연맹을 넘보자 우호관계에 있던 백제와 사이가 벌어지며
신라의 무력과 회유에 말려들어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게다가 가야의 분국이었던 일본의 야마타이 왕국이 없어지고
친백제 야마토(大和) 정권이 들어서자 가야는 중계 무역권 상실.
백제 신라 일본이 직접 무역에 나서자 경제적 기반도 차츰 약화.

고구려 ·백제· 신라의 틈새에서 가야는 490년 역사를 마감한다.
철기와 비옥한 농경지를 토대로 선진 철기문화를 일궈낸 가락국.
신라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일본의 통일국가 수립에 공헌했고
한때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삼국과의 경쟁에서 밀려 역사의 뒤안길.

구형왕은 밀양의 이궁대에서 신라 법흥왕에게 선양 절차를 마친 뒤
낙동강을 지나 이곳 왕산 태왕궁으로 들어와 은거하다 5년 후 운명.

훗날 그의 후손 김유신이 신라에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구형왕 부친은 '분질수이질'이며 왕후는 '계화' 아들은 '무력장군'
신라가 삼국통일 위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무력장군의 아들 서현은 경주의 길목을 지키는 양주 도독.
지금의 양산 동래를 다스렸고 그 부인은 진흥왕의 조카 '만명'.
'서현'과 '만명'이 삼국 통일의 주역 김유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은 화랑도 시절 구형왕릉을 지키며
지리산 일원에서 호연지기를 사귀어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

화계리 덕양면에서 1km남짓 위에 위치한 구형왕릉은 석적릉
기존의 봉토무덤과는 다른 돌무덤의 형상으로 피라미드 같다.
언덕 중턱에 계단식으로 축조된 점이 평지의 피라미드와 차이.

층단은 모두 7개, 총 높이 7.15m이며, 방형이지만 앞면은 곡선
모퉁이도 뚜렷하지 않으며, 꼭대기는 봉분같이 타원형 반구형.

무덤 앞쪽엔 '가락국 양왕릉'이라고 새긴 비석과 상석,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석수가 각각 1쌍 씩 놓여 있다.
능 왼편에 보이는 '護陵閣'은 왕릉을 보호하는 전각이다.

'최근에 만들어진 것들이라 역사적 가치는 없는듯.'

돌담 소로 따라 올라 제일 위쪽 단은 높이 7.15 M 둥근 봉분
주변 숲과 거대한 돌무더기가 어우러진 독특한 계단식 적석총
1,500년 전 가야국의 유적지는 일반 왕릉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구형왕릉은 1798년 민경원이 왕산사기를 찾아내며 확인.
김유신이 화랑시절 이곳에서 시릉살이를 하며 무예 연마
돌무덤 1백m 아래 길가에 김유신장군이 활을 쏘던 사대비

현재 가락국의 신비를 간직한 유적은 구형왕릉 바로 아래 덕양전
가락국 시조왕 유허비, 수정궁, 왕대가 지리산 기슭에 흩어져 있다.
덕양전은 구형왕과 왕후의 영정을 모시고 매달 향례를 드리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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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읍에서 군내 버스로 왕릉입구에서 하차
덕양전 왼편 차로를 따라 10분정도 올라가면
넓은 주차장과 국내 유일한 돌로된 구형왕릉.

내려올 때에는 남쪽 향양리 구사촌 마을 가파른 흙길
향양리에서 산청읍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소요거리이며,
콜택시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관광버스도 진입 가능하다.

군내 버스는 산청 -향양 리-수철리 버스를 이용.

88고속도로와 대진고속도로를 지나 <생초IC>로 내려와서
나들목을 나서자마자 좌회전후 15분 가면 구형왕릉 안내판
마을 입구 덕양전(德讓殿)에서 2km 더 들어가면 <구형왕릉>.

왕릉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라가면 <유의태 약수터> 안내문
유의태는 산청 출신 명의로 동의보감을 펴낸 허준의 스승이다.
이곳은 한약 제조에 사용되었던 약수터라고 알려져 명성이 높다.

<구형왕릉>은 김수로왕의 직계후손이자 10대 마지막 왕의 능.
6 가야 가운데 가장 먼저 세력을 구축한 나라가 금관 가야이며,
김수로왕 이후 491년 간 이어오다가 532년 신라에게 평화 합병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구형왕이 이곳에 묻혔고 시호를 양왕.

신라에게 가락국을 넘겨주고 양왕 예우를 받은 구형왕.

전쟁에 시달리던 가락국 백성들 고통을 덜어주려 신라와 합병.
'왕산의 김수로왕 별궁'인 수정궁으로 옮겨 산지 5년 만에 운명.
구형왕릉은 자연석을 피라밋 식으로 쌓아 올렸고 봉분은 둥근 형태.

석총의 독특한 모습은 한반도 다른 왕조 왕릉과는 전혀 다르다.
고인돌도 아니고.. 돌무더기도 아닌..한반도에서는희귀한 돌무덤.
일부 학자들은 탑이라고 하지만 180 년 전 왕산사기에 기록된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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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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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광주를 잇는 88고속도로 경북 고령 구간
그곳을 지날때 이색적인 산봉우리에 눈길을 끈다.
산봉우리에 여러 작은 봉우리가 솟아있는., 고분군.

대가야 왕들이 잠든 지산동 고분군
(경북 고령군 고령읍ㆍ사적 제79호)
해발 311m 주산 남쪽 능선 따라 조성

6가야 중 유독 대가야 만 산중에 고분들
도로변 대가야 왕릉 전시관 왼쪽으로 산길
20분 걸어 오르면 줄지어 있는 200 여 고분.

우리나라 순장문화 현장이기에 주목 받는 곳.

32명을 산채로 매장한 최초의 순장묘인 44호
순장 풍습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인근 전시장.
멀리 가야산맥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전시관에서 주산 정상까지 1.84㎞ 1시간 거리.
88 고속도로 고령 IC 에서 좌회전하면.,지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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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흥망성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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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대는 가야사 흥망성쇄가 깃든 곳.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 5국의 격전장.
하여, 지리산은 골짜기마다 전혀 다른 문화권.

지리산을 잘 이해하려면
가야사를 먼저 알아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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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 무대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에 서 지리산(섬진강)까지

고고학적으로 낙동강 동쪽의 동래ㆍ양산ㆍ창녕 등과
섬진강 서쪽 진안ㆍ장수ㆍ임실ㆍ남원 등에도 가야 흔적
현재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경북과 전북의 약간을 포함

많은 산과 강으로 나누어진 분지 지리적 여건 상
독립적인 가야 연맹체 형성과 발전에 적합했지만,
통일왕국을 이루기 어려워 여러 이름으로 불리운듯.

▶ 1~4세기에는 김해 가락국이 '큰가야(大加耶)',
5~6세기에는 고령의 반로국이 '큰가야(大加耶)'였다.

가야사 마지막 '큰가야'가 반로국이었기 때문에
고령을 대가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가야사는, 400년 경 고구려 광개토왕이 5만의 군대를 파견
가야를 공격한 사건을 기준으로 전기 가야와 후기가야로 구분.

전기 가야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후기 가야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 연합세력의 중심세력이었다.

전기가야는 남해안에 인접한 거제(瀆盧國)ㆍ김해(狗邪國)ㆍ
창원(古淳國ㆍ卓淳國)ㆍ함안(安邪國)ㆍ고성(古自國)이 번성

후기가야는 고령(大加耶)ㆍ합천(多羅國)ㆍ창녕(不斯國ㆍ比斯國)ㆍ
의령 (爾赦國)ㆍ거창(居烈國)ㆍ남원(己汶國)ㆍ하동(多沙國)ㆍ사천(史勿國)
기원 전후 김해를 비롯한 창원ㆍ마산ㆍ함안ㆍ고성ㆍ사천ㆍ진주 등 정치집단.

소규모 체제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가야사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들 정치체제들은 대개 3천~3천5백명 가량의 소국들
김해 구야국(狗邪國)과 함안 안야국(安邪國)은 2만~2만5천명

남해안에서 가야사가 시작된 것은 낙랑군ㆍ대방군 같은
선진지역과 바닷길을 통해 교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세기경 대방군에서 일본에 이르는 해상 교통로가 열렸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남해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향하다가
김해 구야국에 정박후, 대한해협 건너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큐슈(九州) 항로

당시 최고 문명국 한(漢)의 선진문물 이동 경로
남해에 인접했던 가야 소국들은 그 항로의 관문

그 때문에 일찍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선진 문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김해의 대성동고분군ㆍ양동고분군, 창원의 다호리유적,
고성 동외동 패총, 울산 하대고분군 중국 유물이 증거.

▶ 전기가야 발전에 중국 군현과의 교역이 절대 요소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전하는 '포상팔국의 난'.
(浦上八國, 201~212년)의 난'은 사천ㆍ고성ㆍ칠원ㆍ마산 등

가야가 김해 해상교역권을 빼앗기 위해 가락국을 공격했던 전쟁
가야의 건국신화를 볼 때, 여러 가야국들은 형제관계와 같이 돈독
그러나, ‘포상팔국의 난’은 이해관계에 따라서 서로 전쟁도 불사.

313-314년, 가야 선진문물 공급원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고, 400년 광개토왕은 가야를 공략
하여, 가야사의 중심은 남해안에서 북부 내륙지역으로 이동.

가야의 연맹국들은 한반도 정세변화에 민감하게 대응.
고구려, 백제, 신라 동향에 따라 다각적인 외교 정책.
그당시 가야 지역에는 여러 소국들이 존립하고 있었다.

기록상 외교 활동을 엿볼 수 있는 나라는 김해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그리고 함안의 안라국 등을 대표적 국가.

4세기 낙랑과 대방은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자
백제 근초고왕이 황해도 지역까지 진출하는 등
한반도의 정세는 여러가지 변화를 겪고 있었다.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한반도 남부인 가야나 왜와의 교섭을 중요시하였고,
가야는 백제를 거친 선진문물이 필요해 백제와 우호적

신라는 고구려와 손잡고 가야와 백제 세력을 견제
즉 당시에는 크게 한반도에는 두 세력이 존재했다.

백제, 가야, 왜의 연합세력
고구려, 신라의 연합세력.

▶ 4세기 말 가야와 왜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
고구려는 이들 연합세력에 혹 백제마저 가담하면
자신에게도 위협이 될까 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
신라를 도와 가야와 왜의 연합세력 군사를 격퇴시켰다.

이로 인해 당시 가야연맹의 맹주격이던 금관가야(김해)는
커다란 타격을 입고 이후 역사의 전면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반면에 안라국(함안)은 간신히 국력을 유지하게 되고,
이 틈을 타 대가야(고령)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 5세기에 들어서서 고령 대가야의 성장과 함께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었다.

먼저 5세기 전반기에 가야는 백제와 연합을 하고,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해 연합전선.

즉, 고구려의 신라공격에 대항하여
가야와 백제가 구원군을 파견하여
이를 막는 일도 생겼던 것이다.

이는 당시 대가야가 크게 성장한 증거.
479년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어
받은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 本國王) 작호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대가야는 급격히 성장.

▶ 그러나, 대가야의 급격한 발전은 6세기 이후,
신라와 백제가 차츰 가야를 병합할 욕심을 불렀다.
510년 백제는 가야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고,
562년에 이르러서는 대가야가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멸망 직전 540년대까지의 시기를
셋으로 분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510년 - 520년대

▶ 513년 백제는 기문(임실, 남원) 지역을 침입하였다.
가야는 대사(하동)에 성을 쌓고 백제에 대항했으나 패배.
대사 지역은 가야와 왜측이 교역하는 주요 항구의 하나였다.

따라서 백제가 대사 지역을 확보함으로서
가야가 중요 항구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

이에 대가야는 친신라정책 그 사례가 혼인동맹(522)이다.
대가야 이뇌왕이 신라에 청혼하자 법흥왕은 혼쾌히 수락.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내며 혼인동맹이 성립된 것.


2. 530년대

▶ 신라와 백제가 가야 지역에서의 우위권을 확보하기 위해
가야 남부지역으로 진출한 시기이고 이 무렵 금관가야는 멸망
안라국(함안)을 경계로 하여 신라와 백제가 서로 대립하게 된다.

가야 지역에서는 대가야와 안라국이
각자 처한 입장에 따라 외교적 대응.

신라는 529년 이후 대가야와의 결혼동맹이 와해되자,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며 가야소국들을 공격.
이에 가야 남부 소국들은 안라국 중심으로 자구책 강구

이 때 안라회의’는 신라에 외교적 압력을 가할 목적.

당시 가야 소국들의 안라회의에는 백제도 참석.
백제는 신라의 가야진출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

이때, 안라국이 친왜 성향을 보이며 자주적 입장
백제는 이들 서남부 소국들에게 군사적으로 대응.

그 결과 안라를 비롯한 서남부 소국들은
백제의 간접 통치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3. 540년대

▶ 당시 가야는 대가야와 안라국이 중심적 역할
백제, 신라 사이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에 대가야와 안라국은 공동 외교노력을 했고,
이것은 백제와의 이해 관계와도 일치하게 되었다.

즉, 백제의 성왕은 고구려와 신라의 견제를 위해
가급적 전쟁없이 가야지역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왜를 외교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백제는 신라를 견제할 필요성으로 인해
가야와 왜에 압력을 가해 군사지원을 강요했다.

이에 가야는 백제의 압력을 느슨하게 하고
내부정비 시간을 벌기 위해 고구려와 내통.
548년에 고구려가 독산성을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뜻밖에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신라는 백제에 구원병을 보내주었고,
이로 인해 고구려는 쉽게 패하고 만다.

한편 고구려 포로들의 증언에 의해
가야와 고구려의 밀통 사실은 발각,

이로 인해 안라국의 상층부는
가야 소국들의 맹주역할을 포기.
가야 소국들은 백제 영향권에 합류.

김해 금관가야는 400년 경 광개토왕에게 패한 뒤 내리막
이후 고령 대가야, 함안 안라국이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다.
6세기 가야 연맹은 신라 백제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술 전개.

결국 금관가야는 532년(법흥왕 19년), 신라에게 멸망.

김수로왕부터 구형왕에 이르기까지 10대 490년만의 일.
한편 대가야는 30년 후인 562년에 다시 신라에게 멸망
마침내 가야 연맹은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대가야 멸망기의 주변 국가 상황을 살펴보면,
우선 고구려는 귀족사회의 내분으로 힘이 약화되고
서북부 국경에서 돌궐 등 압박으로 힘이 분산되었다.

551년, 이 틈에 백제는 신라와 가야 지원을 받아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백제는 신라를 무너뜨릴 의도로
552년 백제, 대가야(고령), 안라국(함안) 명의로
왜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553년, 신라는 백제 계략이 실효를 거두기 전
한강 유역을 기습적으로 빼앗는데 성공하였다.

다급해진 백제는 왜에게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왜의 구원군이 554년에 백제에 도착했다.
이리하여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은 554년 7월에
관산성(옥천)에서 신라와 국운을 거는 일전을 벌였다.

연합군의 수는 20,600명이었다고 한다.
한강 하류와 가야 지배권을 다투는 일전.

결국 이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가야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고,
백제는 가야 지역 지배권을 상실했다.

▶ 신라는 555년 비사벌(창녕)에 주를 설치
백제와 가야의 연합세력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성왕의 죽음 후
대군을 일으킬 여력이 없었으며,
가야 또한 백제와 마찬가지 입장.

신라는 점령지역에 주(州)를 설치해 안정을 도모.
이어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안정시킨 558년 이후,
안라는 별다른 저항 없이 신라에게 병합되었던 듯.

대가야는 자체적인 제철 능력도 있었고,
또 재지농경에 기반을 두었으며, 말기에는
백제측 문물을 수용하며 친백제 경향을 띈다.

하여, 대가야는 신라에 대해 독자적 위치를 확보.
신라는 이런 대가야에 대해 위협과 유화정책을 병행
결국, 562년(진흥왕 23년), 신라 이사부가 대가야 침공

이로써 대가야는 이진아시왕 이후
도설지왕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접고
16대 520년 만에 신라에 의해 멸망한다.

진흥왕은 가야 정벌을 마무리 짓고
신라의 삼국통일의 발판을 닦은 인물,

.....................진흥왕............................
신라 제24대 진흥왕(540~576 재위)부터 불교 중흥시대.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고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

진흥왕은 7세 때 즉위 법흥 왕비가 섭정하였는데
연호를 개국(開國)이라 고치며 진흥왕이 친정(親政)
그뒤 568년 대창(大昌), 572년 홍제(鴻濟)로 연호 변경.

555년 이전에 비화가야(창녕)·아라가야(함안) 합병
557년 사벌주(상주)를 폐하고 감문주(개녕)를 두었고,
562년 이사부를 시켜 대가야를 정벌함으로써 가야 정복.

565년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합천)를 설치해 백제를 방비
556년 비열홀주(안변)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파견.
비열홀주(동해안 북방 전진기지) 장악 후 그 이북까지 진출.

확장된 영역 북한산·창녕·황초령·마운령에 세운 순수비

568년 북한산주(서울)를 폐지하고 남천주(이천) 설치
비열홀주를 폐지하고, 달홀주(강원 고성)를 설치했다.

불교를 적극 지원 544년 흥륜사를 준공했으며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549년 중국 남조에서 불사리를 전달하자 흥륜사에서 맞이
553년 월성(月城) 동쪽에 새 궁궐터에 황룡사(皇龍寺) 건축.
565년 진(陳)나라에서 불교 경론(經論) 1,700여 권을 받았다.

572년 전쟁 전사자를 위한 팔관연회 7일간 개최
574년 황룡사 장육존상(丈六尊像)의 완성을 보았다.
진흥왕은 두 아들의 이름을 동륜(銅輪)·사륜(舍輪)

이는 자신을 전륜성왕(轉輪聖王) 지위에 비유한 것.

만년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고
법운(法雲)이라는 이름으로 생애를 마쳤다.

576년 원화(源花)·화랑(花郞) 제도를 창설
576년 8월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峰)에 장사.
...............................................




유의태 약수.



산청 맑은 물의 상징 = 유의태 약수.
산청군 금서면 오봉계곡 유의태 약수.
옛부터 물 맑은 고장으로 알려진 산청.

산청은 허준이 유의태 스승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구형왕릉(금서면 화계리)에서 볼 수 있는 그 흔적
구형왕릉에서 유의태 약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구형왕릉에서부터는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
4륜구동 덕분에 눈빙판 도로를 겨우 올라갔다
도로 끝지점에서 약 200m 올라가면, 유의태 약수

유의태는 지리산 산청 약초 효능을 알아본 명의.
유의태로 인해 산청은 일찍부터 의술이 발달했다.
선조 때 지금의 신안면 정태 마을에 태어난 유의태

유의태는 의술이 탁월해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그의 외손(진외손) 허준이 그 밑에서 의술을 배워
마침내 동의보감 의서를 편찬하고 양평군으로 봉군

그 뒤 숙종때 거창에서 생초로 이주한 유이태 의원
그 또한 청나라 고종의 천문창을 고쳐준 천하의 명의
선조 때 유의태와 100년후 유이태는 우리말 이름이 비슷.

허준의 생존연대(1539~1615)
유이태 생존연대 (1651~1715)
유의태 생존연대는 기록이 없다.

순조 때 단성의 금만에는 허씨 형제가 있었는데,
형 허영과 아우 허언 형제는 화타와 편작에 비유
형은 처방의학에 통달 아우는 침술에 능했던 명의

이렇듯 산청은 옛부터 한의학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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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은 구형왕릉에서 시작된다.
능선에 샘이 있는 왕릉 돌담따라
5분 가량 오르면 소나무숲 오솔길

'유의태 약수터’ 팻말.

여기서 다시 산길따라 오르면
명의 유의태가 사용한 약수터.

약수터 전 200 m지점엔 왕산사지
김수로왕의 별궁이었던 수정궁 터.

약수터는 왕릉에서 1.8킬로 떨어진 지점에 있다.
천하 명의 유의태의 약수라 물맛은 천하일품이다.
물통을 준비해 오지 않았다면 후회하게 되는 곳이다.

'산청 물맛은 좋지만, 이곳만큼 좋을까?'

허준도 이 왕산 어디에선가 약초를 캐다가 목을 축였을 듯.
그 자취를 말해주듯, 숲속 각종 산약초 팻말이 눈길을 끈다.
'약수터 가는 길' 좌우에 심어놓은 단풍나무 숲이 아름답다.

약수터 인근까지 차 한대 겨우 통과할 시멘트 길.
4륜구동 아니면 오르기 힘들 만큼 가파른 오르막.
그 길 끝지점에서 산책로 따라 10분 오르면 약수터.

'무색무취 '서출동류수' 유의태 약수.'

색깔도 없고 맛도 없지만 뒷맛은 상큼.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샘물.
유의태가 이물로 한약을 다렸다 한다.

그 옛날 이곳까지 오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제자들이 그 물을 떠오지 않으면 혼냈던 유의태.
물맛을 보면 어느 곳 샘물인지 구분했던 것 같다.
엄동설한에 물길러 다닌, 소설 속 그의 제자 허준.

'그 옛날 그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듯..'

한약 다릴 샘물까지도 일일히 선별 처방한 유의태.
그 샘물 맛을 확인 후에야 약을 다리게 했던 유의태.
그 샘물이 아니면, 물동이를 집어던졌던 명의 유의태.

유의태는 그만큼 생명의 존엄성을 소중하게 여긴 명의.
그 가르침 덕분에 소설 속 허준 같은 명의가 배출된걸까?
약수터 인근 숲숙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온갖 약초 향기.

'약수터 오른쪽 옆에 왕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약수터에서 목축이고 길따라 40분 오르면 왕산 정상.
정상에 서면 산청읍 일대와 경호강 엄천강이 보인다.
천왕봉에서 웅석봉까지 길게 뻗은 산자락이 그림같다.

'소나무 숲 따라 1.4km 내려오면 <망경대>'

고려에서 판서벼슬을 했던 농은 민암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이조를 창건.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불출.

산청에 낙향해 살며 이 바위에 올라
송도를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랜 곳.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바라보는.,망경대.

왕산 정상에서 바라보이는.,문필봉.
오솔 길따라 가까이 다가서고픈 마음.
내가 남자이기에 그런 생각이 드는걸까?

붓끝 같은 산세라 하여 문필봉
여성 젖가슴 같아 일명 유방봉.
여성의 발기된 젖꼭지 같은., 정상.

진정한 의술이 무엇인지 보여준
동의보감 드라마 속 유의태와 허준.
사상의학을 위해 모델이 된 예진아씨.


'처녀의 몸으로 얼마나 수줍었을까?'

허준 앞에 알몸을 드러낸 예진아씨.
그녀는 유부남인 허준을 사랑한걸까?
아니면, 의학발전을 위한 행위였을까?

예진아씨의 고운 젖가슴같은 문필봉.
까닭모를 갈증을 유의태 약수로 푼다.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유의태 약수

실제로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른다.
실제로 아무 색깔이 없고 아무 맛도 없다.
물을 마신 후에는 기분좋게 느껴지는 뒷맛.

아침 햇살의 정기를 가득 받아낸다고 하는 약수.
위장병과 피부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졌다.
집에 받아와 그 물을 마셔보면 더욱 느껴지는 진가.

하여, 지리산 답사여행 때마다 찾게 된다.
한약다릴 때 주로 이 물을 썼다는 유의태.
명의 유의태의 숨결이 느껴지는 샘물이다.

유의태는 소설 속 허준의 스승인 명의.
유이태는 산청이 배출한 이조시대 명의. 

 

........
유이태
.........


산청은 전통악기(퉁소, 단소, 대금, 소금)의 고장.
지리산 청정지역인 산청은 야생 대나무 중요 원산지
아울러, 유의태와 같은 명의를 배출한 한의학의 고장.

유의태 이후 산청이 배출한 유명한 명의 유이태(劉以泰).
그는 산청·함양·진주·남원·무주·전주 중심으로 활동
지금도 이 지역 구비문학에 명의 유이태가 빈번하게 등장.

특히 홍역(마진)을 잘 다루어 아이들 목숨을 많이 구했으며,
산부인과 병 또한 잘 다스렸다고 그 명성이 전해오는 까닭은
그가 환자의 귀천을 가리지 않았고 돈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 단방(單方) 위주의 처방을 했고,
감기치료제 승마갈근탕 같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을 처방.
유이태 고향은 거창이었으나 산청군 생초면 신연마을로 이사.

유이태가 생초로 이사한 까닭은
효능이 뛰어난 약초와 물 때문이다.

......유이태가 남긴 ‘마진편’글귀.........
“산청의 어느 절 스님들이 홍역에 걸렸는데
샘물을 반복해 마시게 하여 치료했다."
.............................................

그가 물을 통한 치료행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710년 그의 의술은 한양 왕실까지 알려지게 된다.
당시 숙종이 머리에 종기가 나 붓고 열이 가시지 않아
고생하는데도 어의들의 처방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전국의 유명 의사들을 불러 진찰하게 했는데
아산 현감 신우정, 안동의 박태초와 함께 차출된 것.

이른바 재야 의사들 가운데 전국 3대 명의였던 셈이다.
이어 1713년과 1715년에도 숙종의 병을 치료했다는 기록.
1715년 임금을 치료한 공로로 말 한 마리를 하사받고 귀향

그후 곧바로 사망했다는 기록.

유이태는 생초면 갈전리 명주골에 안장.
그가 생전에 즐겨 처방했던 승마갈근탕
그가 안장된 지명 갈전(葛田), 즉 칡밭

'갈전리(칡 밭)'에 안장된 유이태 무덤.
갈근(칡 뿌리)을 즐겨 처방했던 유이태.
'갈전리와 갈근'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듯.

약초와 약수의 고장 산청군 생초면에서 활동하다가
그가 영면할 장소로 택한 곳은 칡뿌리가 많은 칡 밭. 


 


동의보감.
 


16세기말 '허준의 저서' 동의보감
우리나라 최초의 사상의학 지침서.
오랜 기간의 연구와 임상치료 결과.

.................사상의학..................
'태극은 음양을 낳고 음양은 사상을 낳는다.'
주역에서 나오는 이말이 사상의학을 낳는다.

인체의 체질을 4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사상의학
태양(太陽)·태음(太陰)·소양(少陽)·소음(少陰)

체질, 성격, 심리, 장기 기능, 병리.
생리, 약리, 음식 먹는 법까지 구분.
환자마다 치료법을 달리하는 사상의학.

우리나라 고유의 한의학으로서
중국보다 앞선 자랑할만한 분야.
....................................

1610년 허준(許浚 : 1546~1615)이 편찬한 한의학서.
〈동의보감〉, 목활자본(1613 간행본), 규장각 소장
25권 25책. 고활자본 1613년 훈련도감에서 간행되었다.

1596년(선조 29) 선조의 명으로 허준·정작(鄭)·
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
정예남 등이 실제 의술에 필요한 의서 편찬하기 시작

1597년 정유재란에 중단된 의서
1610년 허준 혼자 다시 편찬 완성.

1613년 훈련도감에서 만든 목활자로 인쇄
그로부터 115년 뒤 일본에서 완질을 출판
1763년 중국 출판(일본과 중국에서 모두 7번)

1610년(광해군 2) 16년 연구 끝에 25권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중국 청나라와 일본의 의학에도 영향.
주목할 것은 증상을 중심으로 기술되었다는 특징.


.......
허준.
.......


1546(명종 1) 서울~1615(광해군 7).
이조 시대 선조·광해군 때의 명의.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출생.
아버지 허론(許) 어머니 김(金)씨 둘째 아들.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때 산청으로 이사해
성장하며 의사 수업을 시작했다.

서자로 태어났기에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의학의 길을 택해 20대에 유명한 의사가 된다.

1569년 6월 24세에 부제학 유희춘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

[내의원 생활]

허준이 내의원 취재에 등과한 것은 1574년(선조 7)
그의 나이 29세 때로 상당히 늦은 나이에 궁중의사

그러나 내의원에 들어간 다음해부터 어의로 선임되어
안광익(安光翼)과 더불어 임금으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1590년에는 허준이 왕자를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살상되고
왕은 의주까지 피난 갔을 때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6년 동궁인 광해군의 병을 고친 공로로 허준은 가자되고
선조는 허준에게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하라고 일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에게 혼자 새 의서를 만들라며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6년 임금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양평군 정1품

1607년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는 일로 논의가 복잡했으나
선조가 벌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고 막아섰다.

1608년에 마침내 선조의 병세가 급박하다가 돌연히 사망했다.
이미 어쩔 수 없는 병이었지만 사헌부나 사간원이 문제 삼았다.

광해군 즉위초부터 연일 계속되는 계청에
허준을 보호하던 광해군도 견디지 못하여
허준의 직책을 면하고 거처를 제한하는 벌.
그러나 그해가 가기 전에 내린 벌을 해제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허준은 〈동의보감〉을 찬집
1610년(광해군 2) 완성했고 1615년에 사망했다.
광해군은 생전에 보류된 보국승록대부를 추증.

「동의보감」은 그 학술적 가치 뿐만 아니라
실용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도 지니고 있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 가치가 임상적으로 높다.


....................
소설 속의 허준.
.....................


1610년(광해군 2) 16년의 연구 끝에 완성한 동의보감(東醫寶鑑)
현재까지 각국에서 인정받을 만큼 한방의학에 획기적인 공헌도.
자는 청원,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천(陽川). 유의태의 외손.

'산청 명의 유의태(柳義泰)는 허준의 스승.'

1546년 경기도 양천(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태어나
1615년 8월 70세에 운명한 그의 묘소는 비무장지대 내에 있다.
경기 기념물 제 128호 지정(위치: 경기도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

문학 속의 허준은 양반가문 서자 출신이라 의관을 결심.
그는 경상도 산음의 유의태 문하에서 의술을 연마한 다음
과거(잡과)에 합격하여 주로 혜민서에서 의술 활동을 한다.

훗날, 선조 광해군 연간에 어의가 되어 왕실에 봉사하면서
말년에 동의보감을 저술하고 사후에 정일품까지 추증되었다.
서자 출신으로 신분 차별을 극복한 점에서 입지전적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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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은 유의태 문하에서 배운 적이 없는 듯 하다.
1575년(선조 7) 내의원 취재시(取才試)에 장원 급제
종 8품 봉사 의관으로 봉직을 첫 관직으로 내의원 의관

당상관 거쳐, 선조 39년에 가장 높은 숭록대부에 봉해졌다.
그 밖 역사 기록은 그가 서얼 출신이었던 까닭에 거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호종(扈從)하는 공로를 인정

의관 출신 중 가장 높은 숭록대부에 봉해졌고,
사후에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 추증 됨으로써
이조 역사상 허준은 최고위직에 오른 의관이다.

여러 의관들과 함께 왕의 명을 받아 「동의보감」을 편찬하였다
1592 년부터 1595년까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토는 황폐해지고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는 백성을 위해 많은 약초들이 알기쉽게 분류.
선조 29년(1596년) 양예수, 이명원, 정작, 김응택 등과 의서를 편찬

정유재란 때 중단된 의서 편찬을 허준이 단독으로 완성한다.
궁중 의서 500 권을 참고해 광해군 2년(1610년)에 25권 완성.
동의보감은 학술적 가치 뿐만 아니라 실용적 가치가 뛰어나다.

현대의학은 크게 양의학과 한의학으로 구분한다.
양의학은 독일과 일본의 생체 실험이 발전에 한 몫.
한의학은 중국과 한국이 뿌리 깊은 역사를 갖고있다.

중국인 95%를 차지하는 한족의 의학.
삼한 시대부터 전해온 한반도 한의학.

우리나라 민족은 몽골리안의 체형을 갖고 있다.
우리민족의 체형을 사상의학으로 구분한 이가 허준.
허준의 사상의학을 보다 진일보 완성한 이가 이제마.


..........
이제마.
...........


..................19세기 이제마의 사상의학........................
이제마(李濟馬)는 1838∼1900년 (헌종 4∼고종 37)의 인물.
1888년(고종 25) 군관 등용 후 사퇴, 1992년 경남 진해 현감
1993년 사직후 서울로 돌아와 사상의서 '동의수세보원' 저술.
과거 한방의학의 전통을 깨뜨리고 임상학적 치료방법을 제시.

사상의학(四象醫學)은 사람의 체질적 특성을 4가지로 구분.
그에 따라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한국의 독특한 체질의학
사상의학은 이제마(李濟馬)에 의해 19세기말 체계적인 완성.

각 체질의 성격, 심리, 내장 기능과 이에 따른 병리, 생리, 약리.·
양생법과 음식의 성분에 이르기까지도 분류하여 놓은 사상의학.
원래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예방의학과 인간의 윤리적인 면에 치중

첫째는 윤리적 문제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의 수양이 중요하고
다음은 식생활에서 체질에 맞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예방의학.

소양인 : 보통 체격에 여윈 몸집, 튼튼한 상체, 약한 하체.
굵은 목, 넓은 가슴, 작은 엉덩이, 마른 피부, 탄력적인 근육,
날카로운 얼굴 모양, 민첩한 동작, 정기어린 눈빛, 엷은 입술,
급하면서 쾌활한 성격 등과 비장이 크고 신장이 작은 것이 특징.

배추·오이·보리·밀·녹두·해삼·돼지고기와 찬 음식을 좋아하고,
덥고 기름진 음식 싫어하고 신장, 방광염, 불임증, 소갈병 주의.

소음인 : 작은 체격, 약한 상체, 튼튼한 하체, 굵은 다리, 작은 키,
둥근 얼굴, 희고 부드러운 피부를 들 수 있고 성격은 온순하고 조용.
땀은 보통 정도로 흘리고 신장이 크고 비장과 위장은 허약한 편이다.

고추·파·마늘·감자·미나리·닭고기·명태·개고기·대추 덥고 매운 음식 선호.
찬 음식을 싫어하고 비위허한증, 기허증, 양허증, 망양증 등이 잘 생긴다.

태음인 : 비대한 체격, 약한 상체, 튼튼한 하체, 굵은 허리, 큰 키,
거칠고 땀구멍이 보이는 살갗, 약간 검은 얼굴, 짧고 가는 목덜미
동작은 느리며 참을성 있고, 땀 많이 흘리며 간이 크고 폐는 작다.

밤·배·사과·잣·콩·호박·미역·들깨·쇠고기 뜨겁고 매운 음식을 선호.
풍한표증, 폐질병, 중풍이 잘 생기며, 녹용··우황·사향 등으로 치료.

태양인 : 폐실간허(肺實肝虛)한 체질이며, 큰 체격, 여윈 몸집,
튼튼한 상체, 약한 하체, 큰 머리, 굵은 목, 넓은 가슴, 가는 허리,
작은 엉덩이, 약한 다리, 윤기있는 살갗, 근육질, 잘생긴 얼굴모양,
붉은 얼굴색, 정기어린 눈, 활달한 성격에 조급하고 화를 잘 내는 편.

날것 찬것 담백한 음식 및 포도·앵두·감·다래·메밀·붕어·조개류를 선호.
허리병·위장병·다리병이 잘 생기며, 오갈피,·칡,·모과·다래덩굴이 보약.
..................................................................................................

사상의학은 우리 민족을 4 체질로 분류한 점이 특징.
오늘날까지 사상의학 체질 분류는 폭넓게 공감대 형성.
19세기 이제마는 허준의 사상의학을 보다 더 발전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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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의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는 임진왜란.

7년간 임진왜란 끝 정유재란 때 한반도에 계속된 흉년.
농사 지을 겨를도 없는 전란에 굶어죽어간 수많은 인명들.
당시 명군이 토한 것까지 서로 주워먹으려 난리였다는 기록.

"...지나가는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었고
혈육 간에도 음식 앞에서 남남처럼 외면..."

거리에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과 이미 죽은 시신들이 즐비.
전쟁 통에 각종 돌림병과 질병을 치료할 명의가 절실했었다.
특히,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돌림병.

'하여, 명의 허준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승승장구.'

임진왜란 때 의녀는 관비 또는 기생과 다를 바 없었다.
임금이 신하 또는 외국 사신에게 베푸는 주연에도 참석
의녀는 본의 아니게 혼외 정사도 감수해야만 했던 신분.

그 시대적인 배경이 인체도 완성에 도움된걸까?

허준은 어의에 올랐기에 사상의학 인체도 완성이 가능했을 듯.
그의 직책으로는 충분히 의녀 관비를 인체도 모델로 삼았을듯.
당시 의녀는 사신에게 숙청 들거나 사대부의 첩이 되기도 했다.

'의녀 정기 건강진단은 어의 허준의 막중한 임무.

외국 사신이나 대감이 성병에 감염되면 그 책임이 막중.
왕의 화류병 감염을 예방하는 것도 어의 허준이 해야할 일.
이조시대 궁궐 내에는 궁녀 이외에도 궁중 기생이 많았던 탓.


이조시대 성병으로 한창 나이에 운명한, 왕들.
성군인 세종대왕의 사인도 매독으로 알려졌다.
하여, 어의에게 건강검진을 받았을 왕의 여인들.

그녀들이 사상의학 신체도 누드모델 아닐까?

'왕의 여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은 어의.
소설 속의 예진 아씨처럼 옷을 벗었을 그녀들.
그녀들 신상 정보를 누구보다 많이 알았을 어의.

'허준이 동의보감을 집필한 당시 시대적 배경.'

동의보감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완성도가 더 높아진 듯.
병세 증상을 중심으로 기술된 내용이 골격을 이룬 때문.
동의보감은 청나라와 왜까지 번역판이 퍼질만큼 높은 수준.

이조 500년 국운은 임진왜란을 고비로 쇠퇴의 길.
7년 전쟁과 질병 돌림병으로 의학은 눈부시게 발달.
허준은 오늘날까지 불세출의 명의로 명성을 얻게된다.

임진왜란 당시 각종 돌림병,
부상자들 임상 실험도 한 몫.

허준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진하면 하포리 민통선 내
유의태 동상과 허준 가묘는 산청군 금서면 구형왕릉 내.

2001년 문화관광부와 경상남도로부터 9만여 평의 부지조성계획 승인
2004년 10월 준공식을 가진 한방휴양 관광지에 '한의학박물관' 건립.

이조 500년 국운은 임진왜란을 고비로 쇠퇘의 길.
그러나, 7년 임진왜란 동안에 의학은 눈부시게 발달.

산청은 옛날부터 약초의 고장으로 알려진 곳.
기원전에 진시황이 지리산 불로초를 찾을 만큼
물 맑은 산청은 우리나라 한의학의 고향 같은 곳.




왕산(923m),



...............찾아가는 길..............
덕양전, 구형왕릉, 유의태 약수, 왕산.

<대전-통영 고속도로> 생초IC→금서면 화계리→왕산·필봉산
<국도3호선> 생초면→금서면 화계리→왕산·필봉산


김유신장군 사대비, 왕산사지, 망경대, 지막계곡,
오봉계곡, 생초 국제 조각공원, 생초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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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구형왕릉이 있는 산.
김수로왕이 신라에 정권을 넘기고 휴양을 하던 곳.
구형왕과 김유신이 활쏘기를 했던 사대가 있는 곳.

왕산의 옛 이름은 태왕산(가락국의 궁궐 = 태왕궁)
왕산은 가락국 왕과 많은 사연이 있음을 알려주는 곳.
즉, 왕등재, 국골, 깃대봉, 각종 기록이나 문헌의 왕산.

여우고개에서 보이는 필봉은 여성의 젖가슴 모습.
필봉산은 붓끝을 연상해 필봉(筆峰) 또는 문필봉.
또는 여인의 젖가슴을 연상해 일명 유방봉(유두봉)

금서면에 있는 필봉산은 선비의 고장을 상징한다.
이웃 왕산보다 75cm가 낮지만 산의 모습이 인상적.
정상은 뽀족하고 가팔라 여우고개 쪽에서 접근가능.


등산 코스

1. 덕양전→왕릉→바람재→왕산→필봉산→향양마을
2. 팔봉산→왕산 →망경대→왕릉→덕양전(1km)
3. 덕양전→왕릉(1km)→류의태약수터(2km)→왕산(2.5km)→
망경대(1km)→왕릉(2km)→덕양전(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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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주변에는 가락국의 체취가 풍기는 지명이 많다.
특히, 산청군 이웃인 거창군에 있는 산 이름이 그 예.

갓봉, 무룡산, 백암봉, 단지봉, 탈의산, 두무산, 미인산,
숙성산, 오도산, 유방봉, 별유산, 장군봉, 보해산, 북덕유산
삼봉산, 삼봉산, 수도산, 단지봉, 두리봉, 가야산...등등.

거창군 가조면, 합천군 봉산면 미녀산이 특히 그렇다.
미인산(930m) 산행코스는 지명 하나 하나가 색다르다.

음기마을 - 정자나무 - 유방샘 - 전망바위 - 눈섭바위
- 유방봉 - 헬기장 - 미녀봉 - 오도재 - 수포대

양물샘에서 유방봉 능선까지 가파른 산길로 이어진 미인산.
산행 클라이막스는 조망이 한없이 좋은 유방봉에서 입술부분.
자연이 빚은 걸작품 미녀산에는 옛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옛날에 바다였던 이곳에 장군이 탄 배가 포류하자,
이를 본 옥황상제가 딸을 지상으로 보내 장군을 구했다.

딸과 장군은 연인이 되어 돌아오지 않자 화난 옥황상제.
마주 누워 사랑하는 모습대로 두 연인을 산으로 만든다.
하여, 지금도 미인산은 연인이 누워있는 듯한 형상의 산세.

또 다른 전설은 어머님의 병환을 고치려는 어여쁜 처녀.
약초를 캐다가, 뱀에게 물려 죽게 되자 가련히 여긴 산신
죽은 처녀 모습으로 만든 산이 미녀산이라 전해오고 있다.

들머리에 양기마을과 음기마을이 마주있고
오르는 길목에 유방샘, 정상 능선에는 배봉,
유방봉, 눈섭바위, 머리봉. 동쪽 아래 양물샘,

제 위치에 있는듯한 여궁샘
특히, 여궁샘의 물맛은 일품.

가락국 성풍속을 짐작케 하는 미인산의 지명들.
성풍속 문란으로 쇠퇴했다는 가락국에 관한 구전.
왕산은 가락국 흥망성쇄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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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 기슭 구형왕릉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 번지 왕산사지

약 200년전 산위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던 주민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왕산사에 들러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커다란 나무궤

누구도 그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냥 손댈 수 없는 것으로 전하여 왔다.

그 속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왕산사기 등이 나와 왕능을 찾게되었다.
왕산사지는 수정궁과 같은 부지에 있었던 것인듯.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화계마을 덕양전
가락국 제10代왕 양왕 양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 향례와 삭망 향화를 드리는 덕양전이다.

532년 신라 법흥왕19년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으로 이어하여 5년후 돌아가셨다

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다.
1898년 숭선전(김해수로왕 능침)을 덕양전으로 개칭하였다.
1930년 현재 위치로 이건, 1991년 문화재 정화사업으로 중건.

그후 지리산 동부에 흩어져있던 구형왕에 얽힌 사연들.
지리산 동쪽 끝자락 아담한 높이의 왕산에 모이게 된다.

하늘의 임금을 상징하는 천왕봉
인간 세상의 왕을 지칭하는 왕산

가락국 5백년 최후의 왕이 잠들고 있는 입곱층 돌무덤
가락국 왕조의 별궁등 유적들이 남아있는 역사의 숨결

하봉~쑥밭재~왕등재~밤머리재~웅석봉 능선 가운데 왕등재
그 부근에서 다시 지능선을 만든 지리산의 동쪽 끝 봉우리
엄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가락국의 별궁인 태왕궁(太王宮)

태조 수로왕이 기름진 김해벌판에 나라를 세우고
근 5백년 역사의 왕조로 번성해 오다 제10대 구형왕이
왕위에 오른뒤 재위 11년인 532년 신라에게 나라를 양위.

그때가 신라 법흥왕 19년(가락국 기원으로는 491년)
구형왕은 나라를 넘겨준 왕이라 양왕이라 불리웠다.

구형왕은 밀양의 이궁대에서 신라 법흥왕에게 선양
낙동강을 지나 이곳 왕산의 태왕궁으로 들어와 은거
5년후 세상을 떠난 것으로 가락국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의 후손인 김유신장군이 신라에서 삼국통일
구형왕의 아들 무력장군은 삼국통일 과정에 큰 공로
창녕 '진흥왕 척경비'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을 정도.

구형왕의 손자이며 무력장군의 아들인 서현은
경주의 길목 양주(지금의 양산 울산 동래)도독
그 부인은 진흥왕의 조카 만명으로 전해져 온다.

<서현>과 <만명>이 바로 김유신의 아버지 어머니.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은 청년시절 화랑도를 이끌고
증조부 왕능을 지키며 무예를 닦고 호연지기를 키웠다.

구형왕은 5년 간 지리산에서 칩거 생활후 최후를 맞고
왕산 기슭의 돌무덤의 주인공이 됐다고 전해오고 있다.

구형왕릉 100여m 아래 길가에 김유신이 활을 쏘던 사대
마천의 국골, 왕등재 일원의 토성 등에 얽힌 옛 전설들
6세기 당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며 융성했던 가락국

18세기 무렵에야 그 주인공이 구형왕이라고 제시된 의문점
가락국릐 유적들은 덕양전을 비롯 왕산 기슭에 흩어져 있다.
덕양전은 구형왕과 왕후의 영정을 모시고, 향례를 드리는 곳.

가락국 최후의 왕에 얽힌 전설과
가락국의 숨겨진 역사를 되새기며
왕산을 산행한다는 것은 즐거움이다.

왕산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광활함
왕산 필봉산 산행은 5시간 도보거리.
약 1천 5백년 전 가락국 역사 체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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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옆 문필봉은 왜 선비의 고장을 상징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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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과 거창군은 옛부터 경상도 '보리 문둥이' 고장.
매우 다정한 경상도 말투 "이런 문둥이 가스나를 봤나?"
곱디 고운 여학생끼리도 생글거리며 서로 문둥이로 지칭.

'도대체 경상도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문둥이라 부를까?'

이조 후기에도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농산물은 보리였다.
추수한 쌀이 떨어지는 음력 4월에서 6월까지는 보리고개.
산이 많은 경상도는 주식으로 쌀 대신 보리를 많이 먹었다.

'양반 규수도 혼인 전 쌀 두말 먹기 어려웠던 영남.'

영남은 정치적 소외를 받았던 문동(文童)이 많았던 고장.
이조후기 숙종때까지는 유명한 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했다.
그러나, 숙종 때 당쟁에서 남인이 실각후 서인이 권력장악

정치적으로 실각한 영남 남인들은 집단상소로 권력에 대응.
당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유생 즉 문동이 많았던 고장.
이조는 원래 유림(사림)의 공론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체제.

'유림의 집단행동에는 학생이라 여기고 관대했던 이조.'

이런 관행에 따라 18세기 영남 남인들은 상소를 많이 올렸다.
하여, 한 번의 상소에 만명이 서명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이렇게 만인소를 올리는 경상도 보리 문동이 한양을 활보했다.

“영남의 보리 문동(文童)들이 또 상소를 올리러 왔구나”

이런 횟수가 잦아지며 영남 양반을 일컫게 된 '보리 문동이’
근대사에서 영남이 정치권에서 득세하자 보리문둥이 일체감
정치적 소외에서 벗어나려 했던 문인들이 원래 '보리 문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