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계곡.
<마야계곡>은 중봉 골짜기에 있어 일명 중봉골.
마야계곡은 용소폭포가 있어 용소골로도 부른다.
즉, 마야계곡 중봉골 용소골은 모두 다 같은 지명.
마야계곡에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전설
마야계곡 지명의 유래를 대변해 주는듯 하다.
........'마야 부인'의 전설.......
'마야 부인'은 석가모니 생모.
인도 구리성주인 '선각'의 딸.
'정반' 왕의 아내가 되어 실달태자를 낳고 7일 후 운명.
옥황상제를 만나 지리산 수호신 명령을 받은..'마야부인'.
그녀는 철마 2필과 사자 2 마리로
지리산 일대 잡신과 맹수들을 통솔.
마야부인은 신라왕 꿈에 나타나
지리산 천왕봉에 사당을 지어서
경주의 옥석으로 자기의 상을 조각
사당에 모시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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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고향' 마야계곡은 어디에 있을까?
...................찾아가는 길...................
법계사 가는 길따라 출렁다리 건너 5분 더 가면
왼쪽 비탈면에 작은 통나무로 만든 계단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무속행위 금지 안내판 옆 작은 소로길
그길을 따라 가면 순두류 아지트 안내판이 보이고
계곡 곁에 20명이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가 보인다.
'이곳이 '신선너덜'이고 마야계곡 들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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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두류 계곡에서 중봉을 오르는 직등 루트가 마야계곡.
정식 등산로로 지정되어 있지 않아 찾는 이가 거의 없다.
계곡을 따라 줄곧 가파른 오르막에 크고 작은 소와 폭포.
하산길 : 중봉 - 치밭목 - 써리봉 남릉 - 마야계곡
이 길은 매우 험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위험한 곳.
중산리 버스정류소에서 매표소까지 20분 도보 거리.
매표소 지나 포장도로 따라 올라가면 갈림길 이정표.
법계사 쪽과 자연 학습원 쪽으로 나뉘어지는.. 갈림길.
법계사 출렁다리 건너 10분 더 가면 '순두류아지트 0.7㎞'
그 표지판에서 10분 더가면 '순두류아지트 800m'표지판
'등산로 아님' 표지판 = 순두류 빨치산 아지트 관광지 초입.
이 계곡 곁 너럭바위에 도착하면 순두류아지트 유적지.
빨치산 지휘본부가 있던 큰바위에 덮인 지형과 풍부한 물
바위에 탄흔이 남아있는 이곳 유적지는 「역사기행」코스.
이 루트로 산행하려면 계곡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길만 35분 정도 걷다 가파른 계곡사면
수풀이 웃자라 인적끊긴 길따라 50분 더 올라가면 '신선너덜'
여기에도 옛부터 전해져오는 옛 전설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잊혀지고 사라져가는듯.
지금은 무속인들의 제단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신선너덜.................................
신선이 천왕봉을 우러러 보며 거닐었다는..'신선너덜'.
신선들이 공기놀이하다가 버리고 갔다는 공기돌 무더기,
이 너덜에 있는 돌들은 크기가 엇비슷하고 동글동글하다.
그냥 무너져 내린 모난 너덜이 아니고
오랜세월 구르고 굴러 모인 듯 보인다.
계곡을 건너 잘 나있는 넓은 길따라 20m쯤 가면
암벽 앞에 근래 조성한듯한 큰 규모 제단이 있고
그 옆에는 오래된듯 보여지는 조그만 제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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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너덜은 신선사상에서부터 비롯된 지명인듯.
신라 말 학자 최치원 무렵부터 일어났던 신선사상.
지리산에는 곳곳에 최치원이 남긴 흔적들이 남아있다.
거의 대부분, 신선화 된, 최치원의 발자취.
최치원은 신라 말., 상림 숲을 만든 천령군수.
상림 조림 숲이 있는 함양
신라 시대 옛 지명은 천령.
마야계곡은 지명 자체부터 성역화한 느낌이 든다.
하여, 마야계곡으로 들어가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로타리산장에서 50분 정도 내려가면 순두류 아지트
법계사에 본부를 둔 빨치산들이 이곳 아지트에서 경계.
순두류 아지트 계곡물에서 땀을 씻고 목욕했다는 휴식처.
순두류 아지트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자연학습원.
이곳부터 중산리 주차장까지 3km는 시멘트 포장도로.
마야계곡은 그 지명 자체부터 신비감이 물씬 풍기는 곳.
원시세계 속으로 빠져든 신비감에서 오는 쾌감일까?
내 안에 숨어있는 내면적인 본능의 몰염치한 희열일까?
신선하고도 추악한 삶의 양면적인 짜릿함에서 비롯된걸까?
'전인 미답의 계곡에서의 마운틴 오르가슴.'
'지리산 최후의 비경' 또는 '전인 미답의 계곡.'
토벌군에게 쫓기던 남부군에게는 최후의 은신처.
남부군이 토벌군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던 탈출로.
'칵테일' 영화속 여자 손님이 바텐더 톰 크루즈를 유혹
칵테일 '오르가즘'을 주문하는 장면은 무척 인상이 깊다.
마야계곡은 잘못 빠져들기 쉬운 유혹에서 탈출이 어려운 곳.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 여인 외 2인의 활동무대.
13년간 도피생활을 하며 들짐승처럼 살았던 곳.
그녀들은 오직 살기 위해 지리산 처녀림을 방황.
1950년 6.25 전란 이후 1951.9.28 국군이 수복.
인민공화국에 부역했던 주민들이 산속으로 입산.
정순덕 여인은 1950년 당시 16세의 어린 새색씨.
17세 신랑은 결혼 직후 인민군에게 부역을 제공.
그후 국군이 덕산을 탈환하자 부역 사실이 두려워
결혼 6개월 신부를 두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남편.
그후 남편 겨울옷을 챙겨 지리산으로 들어간 그녀.
남편과 만난지 20여일 만에 남편을 잃어버린 새색씨.
1963년까지 무려 13년간 지리산을 누비며 살게 된 것.
'인적 없는 험한 산세가 그녀들에겐 생명줄.'
남북 분단이 빚어낸 사상과 이념의 희생자.
그당시 대부분 마을 주민들도 비슷한 입장.
그 비극적 역사현장이 지금은 빨치산 관광지.
<마야 계곡>은 중봉에 있는 중봉골의 옛 지명.
용소폭포가 있어 용소골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신라시대의 용은 왕을 상징하는 토템신앙의 대상.
용소골의 용은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듯 하다.
즉, 용소골은 선덕여왕에서 유래된 지명인듯.
하여, 마야계곡 또는 용소골이라 불리우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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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전설의 고향' 마야계곡으로 들어가보자.
마치, 타임머쉰을 타고 수천년전 먼나라 여행인 듯.
문명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적없는 마야계곡.
'마야계곡은 하산길 조난사고 빈번한 곳.'
겨울에는 지리산에서 가장 적설량 많은 눈사태 지역
장마철 폭우를 만나면 빠져나갈 곳이 없는 위험 지대.
일년 4 계절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
처음에 완만한 하산길이 내려갈수록 급경사
하산길 가까울수록 큰 폭포가 진로를 막는다.
하여, 높은 산에서 계곡따라 하산은 위험천만.
요즘은 관리공단 직원이 계곡 초입에서 지킨다.
길잃은 등산객이 잘못 빠지지 않게 하려는 배려.
이곳은 출입 통제구역이라 일인당 벌금 오십만원
순두류 들머리에서 올라오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
벌금 오십만원을 물더라도 안전이 보장된다면 행운.
답사 목적이 분명하지 않다면 출입 삼가 함이 바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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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는 중산리 순두류 도로 끝에.. 경남 자연학습장.
'순두류 1km, 법계사 3km' 표지판 오른쪽 '등산로 아님'
그 통행을 금지하는 그 철조망을 넘어야 중봉골 가는 입구.
또 다른 길은 안내판 조금 못 가서 철다리를 건너자마자
등산로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넓적한 바위와 함께 골짜기.
천왕골과 중봉골 합류지점이 바로 철다리 아래 50m 지점
'이곳이 '신선너덜'이고 중봉골(마야계곡) 들머리.'
'신선너덜'은 그 옛날 마야부인이 장독간에 모래를 깔려고
치마에다 싸갖고 가던 중 구멍이 뚫려 모래가 흘러내렸는데
이 모래가 바위로 변해 신선들이 노닐었다 하여..' 신선너덜'.
그곳 계곡 물길을 따라 용추폭포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폭포 300m 위에 한 사람이 목욕하기 알맞는..'마야 독녀탕'
마야부인이 혼자 목욕하던 전용 목욕탕이라는 전설이 있다.
순두류 1km지점-능선-용추폭포-마야독녀탕-윗용소-
용추폭포-신선너덜-순두류 등산코스 = 3~4시간 거리.
용추폭포는 청학동의 관문인 폭포이지만 그 규모가 초라하다.
높이 5m 폭포와 깊은 소, 큰 바위틈 사이를 흐르는 작은 물줄기.
그 바로 위에는 신선들이 노닐 수 있을 만큼 운치가 풍기는 비경.
그곳에서 다시 300m 오르면 제법 넓은 또 하나의 소..'윗용소'
그곳부터는 폭포의 낙폭이 커서 접근할 용기가 나지 않는 산세.
하여, 마야계곡을 '지리산의 마지막 비경'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이곳부터 폭포를 거슬러 오르면.., 극락세계 같은 비경의 연속.
계곡 좌우엔 하늘을 찌르는 절벽으로 막혀 빠져나갈 곳이 없다.
계곡을 거슬러 끝까지 올라가면 중봉 또는 천왕봉으로 이어진다.
폭포를 헤치고 이끼 덮혀 미끄러운 바윗길 등반.
폭포 수압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옷벗는 것이 안전.
어차피 폭포에 옷 젖을 바엔 벗는 것이 뱃속 편하다.
'폭포를 거슬러 오르내리는.. 샤워 클라이밍.'
쏟아지는 폭포 물줄기에 휘말려 떨어지면 위험천만.
샤워 클라이밍에서 폭포의 마찰력 줄이기가 최대 관건.
물보라 속을 헤치고 폭포를 거슬러 오르기란 쉽지 않다.
마야계곡은 샤워 클라이밍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연적 조건.
마야계곡은 지리산에서 알몸 산행을 피할 수 없는 유일한 곳.
배낭만 메고 계곡을 올라가는 뒷모습이 우수꽝스럽긴 하지만.
아담과 이브가 누렸던 자유로움이 피부에 와 닿는 듯.
알몸 구석구석 파고드는 감미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
평소 드러낼 수 없는 곳까지 일광욕을 즐기는 맛이 짜릿.
소나무 반그늘 아래 개울물에 깎인 넓은 바위.
알몸으로 누워 있다가 뒹굴어 개울속으로 첨벙.
낮잠을 청하며 누워 뒹굴다 보면 바람은 자장가.
'마치, 구석기 시대 원시인이 된 느낌.'
천왕봉에서 중산리 하산길에 잘못 들어온 마야계곡.
지리산 종주로 인한 피로와 땀을 씻고 가기 적당한 곳.
이곳은 워낙 산세가 험하고 동떨어져 인적이 그리운 곳.
하루종일 알몸으로 쏘다녀도 사람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
물길 따라 떠내려 온 듯한, 1.8 리터 플라스틱 음료수 용기.
인기척인 줄 알고 황급히 알몸을 숨기면 주위에 아무도 없다.
'사람은 옷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아프리카에는 아직도 알몸 원시인들이 살고있다.
아프리카는 200만년 전 인류의 조상이 살았던 곳.
우리 조상은 그곳부터 해뜨는 동쪽으로 계속 이동.
제 4 빙하기에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주변으로 대피.
그곳 온천지대에서 혹독한 빙하기 추위를 견디어냈다.
그후 지구 온난화로 인해 지구 상에는 환경의 변화 극심.
그곳 빙하지대에서 탈출하려 동쪽으로 꾸준히 이동.
해 뜨는 방향을 신성히 여기며 따듯한 남쪽으로 이동.
동쪽으로 가다가 길이 막히면 남쪽으로 내려왔던 민족.
실크 로드를 따라 중앙 아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이동.
또는 황하문명의 발상지인 인도를 거쳐 한반도로 이동.
불교 발상지인 인도와 우리나라는 조상의 뿌리가 같다.
우리나라 민족의 특징은 본능적으로 동남향 주택을 선호.
바이칼호로부터 반만년간 동남쪽으로 민족 대이동한 때문.
삼면의 바다가 진로를 가로막아 이동을 멈췄던 곳이 한반도.
빙하기를 거치기 전까지 인간은 알몸으로 살아왔다.
혹독한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옷을 입기 시작.
그 전까지 다른 동물과 다름없이 알몸으로 살아온 인류.
'원시사회 느껴지는 마야계곡 알몸산행.'
연인끼리의 산행 장소로도 좋을 법한 에덴동산 같은 곳.
먹지 않고 입지 않고도 견딜 수 있다면 지상낙원 같은 곳.
문명사회로부터 동떨어져 자연을 만끽하기 더 없이 좋은 곳
간혹, 골짜기 깊숙한 낙엽 밑에 버려진 음료수 용기 페품.
그 쓰레기만이 그곳을 오르는 동안에 만날 수 있는 인기척.
그곳에 비양심으로 버려진 해묵은 폐품만 아니면 지상천국.
하지만, 그 것 조차 없으면 길찾기 어려워 두려움이 몰려온다.
탁월한 체력과 등반력을 갖춘 산악인조차도 접근이 쉽지 않다.
천왕봉에서 하산길에 잘못 마야계곡으로 빠지면, 위험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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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 가까울수록 점점 낙폭 큰 폭포가 진로를 가로 막는다.
중산리 지름길 같아, 계속 내려가면 엉뚱한 방향으로 꺽어진다.
계곡 중간지점부터 방향이 꺾여 순두류 쪽으로 흐르는 때문.
폭포를 내려가기엔 위험하고 돌아가기엔 이미 지쳐있는 상태.
폭포와 폭포 사이 극락세계 비경속에 갇히면 오도 가도 못한다.
폭포 물살에 깍인 바위는 잡을 곳이 없다.
물 이끼라도 잘못 밟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
잡을 곳도 없고 밟고 딛을 곳도 마땅치 않다.
폭포 사이에 갇혀 탈출 방법을 찾다보면,
눈앞에서 아른거리며 춤추는 저승사자들.
마야 계곡을 빠져나오면 죽다 살아난 기분.
워낙 인적없어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곳.
순두류 자연학습장이 보이기 전까지 지옥 같은 험로.
지리산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참 많이 전해 내려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야부인의 전설이다.
하여, 마야부인에 관한 전설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
마야부인의 전설.
...................
지리산 천왕봉에 살고있던 천신의 딸, '마야부인'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던 도사' 반야를 만나 결혼.
그녀는 반야와 함께 천왕봉에 살며 딸만 8명 낳았다.
'그러던 어느날. 득도를 위해 반야봉으로 떠난 반야.'
그러나,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야속한 남편 반야
그녀는 나무껍질로 남편 옷을 지으면서 그리움을 달랜다.
그리고, 8딸을 팔도로 보내고나서도 마냥 남편을 기다린다.
남편 반야 옷을 늘 품에 안고 그리움을 달랜 그녀.
그녀는 산중턱에 앉아 오지 않는 반야를 기다린다.
그 때 꿈속에서도 그리던 반야가 손짓하며 다가왔다.
그녀는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의 물결 속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그립고, 보고싶고, 기다렸던, 님인가?'
반야 품에 안기려 허우적거리다가 제 정신이 든 그녀
그녀 손에 잡힌 것은 달빛 아래 흐느적거리는 쇠별꽃 뿐.
그곳 초원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쇠별꽃만 가득 피어 있었다.
쇠별꽃의 하얀 물결을 반야 모습으로 착각한 그녀.
그녀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한없이 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반야가 그리워 헛것을 본 그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리움에 지친 그녀
그녀 마음 속엔 남편 반야에 대한 증오심 뿐.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는 삶의 전부를 잃은 듯.
천신이나 다를 바 없던 천신의 딸 마야부인.
사랑 앞에서는 한낮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다.
그녀는 쇠별꽃이 다시는 피지 못하게 없애버린다.
매일 얼굴을 비춰보던 산상 연못도 메꾸어버린다.
품속 반야 옷도 갈기갈기 찢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
결국, 신통력마저 잃고 그녀는 그리움에 지쳐 죽는다.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곳을 반야봉이라 불렀다.
반야와 그녀 사이에 난 8딸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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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반야봉 운해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하려는 하늘의 배려.
하여, 반야봉 불꽃노을 위로 안개 구름이 자주 낀다고 한다.
이 '전설 속의 주인공' 마야부인은 일명 마고할미라고도 한다.
'지리산에서 눈비가 제일 많이 오는 반야봉.'
하늘마저 그녀의 슬픔을 위로해 비를 뿌린다는 민간신앙.
비는 그리움에 지쳐 죽은 그녀를 위로하려는 천신의 정기.
여성의 음기가 비를 부를것이라는 기우제의 산실., 반야봉.
여성의 둔부 같은 쌍곡선 산마루., 반야봉.
무릎꿇고 엎드려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자태.
천신의 정기를 쏟아내게 할 만큼 고혹적 산세.
하여, 천신을 유혹해 비를 기원하는 기우 풍습.
'훗날, 다양한 우리나라 기우풍습으로 정착.'
부녀자들이 산상에 앉아 일제히 '쉬이' 하는 방료기우.
부녀자들이 강물을 키에 떠 담고 백사장을 달리는 기우
쌍둥이 딸을 낳은 부녀자가 비싼 품삯을 받고 하는 기우.
알몸 속치마 차림 여인들이 방망이로 땅을 두드리는 행위.
애통한 마야부인 대신 반야를 유혹해 하늘도 울게 하는 행위.
속바지까지 벗은 미모의 무당들에게 집단으로 춤추게 하는 행위.
'여성의 음기가 강할수록 효험이 있다는 믿음.'
오늘날 선녀같은 여인들의 알몸 퍼포먼스.
옛 고대국가에서 행한 일종의 기우제 풍습.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선녀탕 전설이 그 사례.
고대국가에서는 천관녀가 국가제사 주도.
신녀(神女)는 그 나라 왕 다음 가는 권력자.
불교정착 이후 신녀, 천관녀는 기생으로 전락.
이조시대 들어와 무당은 8천민으로 전락.'
전설 속 마야부인은 왕에 버금가는 신분.
하여, '마야부인의 전설'이 전해져 오는듯
장터목 전설 속 산희샘 = 마야부인이 메꿔버린 샘.
마야부인이 갈기갈기 찢어 버린 반야의 옷 = 풍란.
소나무에 실오라기처럼 기생하는 풍란 = 환란(幻蘭).
...........................풍란.........................................
풍란은 난초목 난초과 상록성 여러해살이풀.
소나무 또는 나무줄기 바위에 붙어 자생한다.
줄기는 여러 개가 모여 자라며 뿌리는 끈 모양.
풍란은 그 잎이 2줄로 마주 안고 달린다.
길이 5∼10㎝, 넓이 6∼8㎜ 넓은 선 모양
뒤로 젖혀진 모양으로 실처럼 가늘게 자란다.
7월에 순백색 꽃이 피며 꽃줄기 끝에 3∼5개의 꽃
총층이 꽃 피면, 하얀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간 듯.
바람 결에 흩날리 듯 피어나기에 풍란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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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부인 전설은 '지리산 유래'의 핵심 골격을 이루는 전설.
모계사회가 무너지고 불교가 정착하던 시점의 전설로 보인다.
'마야부인의 전설'의 시대적 배경은 고려시대.
원래, 패국의 역사는 승국에 의해 왜곡되기 마련.
통일신라 시대의 마야부인 위상을 약간 폄하한듯.
그러나, 이 전설은 철기시대로부터 유래된듯.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점인 철기 시대.
아비 부(父)는 철기시대 상징., 쌍도끼 상형문자.
'아버지= 쌍도끼 = 힘의 상징 = 가부장적 권위.'
고인돌 시대엔 족장 또는 지도자가 부족을 다스렸다.
그러나, 철기시대에 들어와 강력한 고대국가들이 형성.
부족 통치자 역시 무녀에서 남자 제사장으로 뒤바뀐다.
'불교의 정착을 뜻하는 마야부인 전설.'
즉,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가 토속 민간신앙과 결합.
새로운 토착신앙으로서 자리매김한 과정의 전설 같다
전설 속 여주인공 마야부인은 <마고할미>라고도 한다.
'마고할미는 불교 전래 이전부터의 한반도.. 대모신.'
우리나라 8도 곳곳마다 마고할미(대모신)에 관한 설화.
마고할미 설화는 한반도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상한듯
...............
마고할미 설화.
................
반야에게서 버림 받은., 마야부인.
신통력마저 잃고 죽어간다는 전설.
이 '마야부인의 전설'은 고려 때 전설인듯.
패국의 역사는 승국에 의해 왜곡되기 마련.
통일신라의 마야부인 위상을 약간 폄하한듯.
'불교의 정착을 뜻하는 마야부인 전설.'
즉,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가 토속 민간신앙과 결합.
새로운 토착신앙으로서 자리매김한 과정의 전설 같다
전설 속 여주인공 마야부인은 <마고할미>라고도 한다.
'마고할미는 불교 전래 이전부터의 한반도.. 대모신.'
우리나라 8도 곳곳마다 마고할미(대모신)에 관한 설화.
마고할미 설화는 한반도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상한듯.
............... 마고할미에 관한 여러가지 설화....................
선문대할망은 제주도의 한라산을 창조한 대모신을 일컫는다.
노고할미는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낳은 창조 여신을 칭한다.
마고할미는 단군의 박달족과 맞서 싸우다가 투항한 마고족 족장.
단군이 9장수를 거느린 마고할미를 극진히 맞이한 곳이 구빈마을
마고할미가 항복하려고 마고성으로 돌아오며 넘던 재가 왕림고개
평양시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마고할미는 노고할미, 선문대할망과 같은 한반도의 대모신
한반도에는 마고할미가 치마로 돌을 날라 쌓았다는 성이 많다.
바닷물을 마시고 산과 동식물, 인간을 낳은 여신이 마고할미.
한라산을 베개 삼고 다리는 제주도 앞바다 관탈섬에 걸친 몸집.
한반도 고대사회로부터 숭배해온 민속신앙의 대상이 <마고할미>
제주도에서는 출가한 자녀와 떨어져 혼자 사는 노인이 많다.
병들어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이면 자녀가 정성껏 모신다.
그것은 제주도에서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풍습이기도 하다.
홀로 사는 노인은 할아방보다 할망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것은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훨씬 더 길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아직도 모계 사회의 풍습이 남아있는 듯 하다.
특히, 생활력이 강한 해녀들이 많이 사는 마을들.
<선문대할망> <노고할미> <마고할미>는 한반도의 성모사상.
그 이름이 각각 달라도 견우 직녀설에서 비롯된 뿌리는 하나.
마고(MaGo)는 스메르어로 '남성의 성기' 즉 남근이란 뜻.
한반도 동해안의 남근 숭배사상은 남자가 부족하다는 의미.
<마고할미>는 모계사회에서 남성 중심사회로서 전환을 상징.
'중국 전설속의 늙은 선녀 또는 노파 = 마고할미.'
폐경기 부인을 썰매에 태워 버렸던 에스키모 풍습.
혹독한 빙하시대를 거치는 동안 전래된 풍습 같다.
북극을 향해 버렸던 늙은 부인이 곧 <마고 할미.>
'일처다부제에서 마고 부인 = 모계사회 통치자.
'일부다처제에서 망령든 늙은 부인 = 마고 부인.'
요염한 여인으로 변신해 남자들을 홀리던 마귀할멈.
낚시코에, 긴 손톱 앙상한 몰골은 구미호 같은 존재.
숭배 대상에서 밀려나 전설 속에서도 사라진 마고할미.
모계사회에는 한반도 민속신앙의 대상이었던 마고할미.
남성 중심사회로 바뀌며 숭배대상에서 멀어져간 대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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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며 여성 지위도 떨어진다.
모계사회 난혼 관습은 부계사회 정혼 또는 일부다처제
부계사회에서의 여성의 간통은 살인 못지 않은 중 형벌.
부인 간통죄는 남편이 죽이거나 귀 코를 잘라내도 무방.
간통 유부녀는 돌을 몸에 묶어 물에 빠트려 침살(沈殺)
또는 돌로 때려 석살(石殺) 시킨다. - 하므라비 법전-
일부 아랍권에서 간통 유부녀는 돌로 때려죽인다.
후백제의 궁예는 부인 강씨가 간통을 했다는 죄로
숫불에 달군 쇠몽둥이를 강씨 국부에 꽂아 죽인다,
이조시대 평민이 간통하면 곤장 100 대에 3 년 유배
양반 가문 유부녀는 목을 매어 자결 하도록 강요했다,
특히, 우리나라 이조시대에는 남성 우월 사상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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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모계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는.. 소서노.
소서노(召西弩) : 칼을 입에 물고.. 西쪽에서 온.. 무당.
西는 마고에서 왔다는 뜻이고 마고를 계승한 나라가 고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태조가 밝히고 있지만,
고려 백성들은 대부분 마고의 후손이 백제라 믿었다.
(견원의 후백제가 고려의 모체인 사실이 이를 뒷밭침)
소서노는 백제 위례성에서 5호의 침입을 받아 전사한다.
5호란 5 호족의 추장을 5마리의 호랑이에 비유한 뜻이다.
즉, 소서노는 곰족 여자 추장이고 호랑이 족과 싸워 진 것.
곰족을 상징하는 작은 곰 별자리와 큰 곰 별자리(북두칠성).
인디언 추장 '7마리의 곰'이란 이름은 북두칠성을 상징한다.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며 청동기 시대부터는 남신 등장.
모계사회의 실세가 남자로 바뀌면서 여신도 남신으로 바뀐다.
마고 여신 신웅이 마고할미로 바뀌고 신웅은 남신으로 바뀐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배달국을 세운 한웅천왕(桓雄天王).
마야 부인.
마야계곡 지명은 석가모니 생모 '마야' 이름과 같다.
불교가 억압받던 이조시대에도 마야계곡으로 불리웠다.
요즘은 마야계곡을 중봉골로 불러야 한다는 논란도 있다.
역사적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마야계곡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중봉골이라 불러야 마땅.
上, 中, 下에 봉우리 봉(峰)을 사용한 시기는 근래.
옛날에는 봉우리 이름이 없었던., 중봉과 하봉.
중봉과 하봉이라는 지명을 사용한 역사는 짧다.
중봉과 하봉 지명은 일제 치하에서부터 사용한듯.
마야계곡은 언제부터 사용한 지명일까?
신라시대 불교가 융성할 무렵인듯 싶다.
신라 성골 골품제도에서 비롯된 지명인듯.
당시 성골제도에 관해 좀 알아보기로 하자.
...................성골(聖骨)................
신라시대 여러 골품 가운데 최고의 왕족 신분층.
제28대 진덕여왕 때 소멸 후 진골이 왕위를 계승.
진한 12국 중 하나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한 신라
주변국을 병합하며 그 지배층을 경주에 옮겨 살게 했고,
그들을 포함한 왕경인(王京人)을 골품제로서 신분 구분
박혁거세로부터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28명 왕을., 성골
성골은 부모 양쪽 모두가 순수한 왕종(王種)의 혈통
성(聖)은 부모 양쪽 혈통이 신성하다는 의미로 사용.
신라 왕실이 불교를 수용하며 성골 신분이 등장했다
진평왕은 석가의 아버지 이름을 본따 백정(伯淨)
왕비도 석가 생모 이름을 본따 마야부인(摩耶夫人)
진평왕의 아우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의 이름도
각각 정반왕의 아우 백반과 곡반(斛飯)에서 본딴 것.
진평왕의 왕실은 인도 카빌라국의 석가 왕실을 모방
이로써 신라 왕실은 불경에 나타나는
찰제리(刹帝利) 진종설을 그대로 모방.
스스로의 골품을 불교적으로 성화(聖化)
이때부터 왕실은 자신들을 신성한 골족이라 하여
다른 귀족과 구분, 성골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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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과 마야부인............
신라의 제26대 왕(579~632 재위)과 첫째 부인.
신라 진평왕릉, 사적 제180호, 경북 경주 보문동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이 곧 진평왕,
마야부인 김씨(摩耶夫人 金氏)와 결혼한다.
후비(後妃)는 승만부인 손씨(僧滿夫人孫氏).
불교 진흥에 힘써 지명(智明)·원광(圓光)·담육(曇育) 등
당나라에 유학을 보내 호국불교를 확립하고 불사를 적극지원
한편, 재위기간 동안 삼국간의 항쟁이 격화되어 전쟁이 빈발.
629년 대장군 김용춘, 김서현과 부장군 김유신으로 하여금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해 승리했고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강화
594년 수(隋) 문제로부터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 왕으로 책봉.
608년 원광에게 수나라에 청병하는 글을 짓게 하고,
611년 양제에게 사신을 보내 군사원조 허락을 받았다.
624년 당 고조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에 봉해졌다.
632년에 죽자 한지(漢只)에 장사 지냈으며
당 태종으로부터 좌광록대부에 추증되었다.
진평왕과 마야부인 슬하에 딸만 셋 있었다.
첫딸이 천명공주 둘째 덕만공주 셋째 선화공주.
첫째 딸 천명공주과 용춘 사이의 아들이 김춘추.
용춘과의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했던 천명공주.
둘째 딸 덕만 공주가 진평왕 대를 이은 선덕여왕.
원화 출신으로 어머니에 이어 신라 미륵보살의 상징.
선덕여왕이 운명후 그 뒤를 이은 미륵화신이 진덕여왕.
진평왕의 아우 국반(國飯)의 따님인., 승만(勝曼) 공주.
승만 군주 역시 공주일때 '미륵선화' 원화로 뽑혀 활동.
진평왕은 마야부인에 이어 후비로 들인 승만부인.
왕통을 이을 왕자를 낳지 못하고 선화공주를 잉태.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서동요의 여주인공.
백제 무왕에게 시집간 후 백제국 미륵보살의 상징.
신라와 백제 간에 우호관계를 위해 정략결혼을 한듯.
백제 무왕은 역사상 신라를 가장 많이 침공한 인물.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세자 이름이 의자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당나라로 압송 중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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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골품제.........................
혈통에 따라 관직진출·혼인·복색(服色)을 규정한 신분제
인도 카스트 제도 및 일본 씨성(氏姓) 제도와 유사한 제도.
신라의 박(朴)·석(昔)·김(金) 3성씨 집단은 경주에 정착
사로국(斯盧國)을 형성하고 이들 성씨 집단은 상호간에 혼인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배타적인 신분적 특권을 누렸다.
이들에 의해 형성된 혼인집단 골족(骨族)이 곧 신라의 지배신분층
특히 내물왕 이후 김씨 집단이 왕골로서 왕위세습 확립
신라는 주변 여러 소국들을 정복해 복속시켜 나갔다.
음즙벌국(音汁伐國)·실직국(悉直國)·압독국(押督國)·
소문국(召文國)·감문국(甘文國)·골벌국(骨伐國) 등
이들은 신라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지배 받거나,
원래 거주지로부터 집단적으로 이주되기도 했다.
속국 지배층을 경주의 중앙 지배체제 속에 편입
골제 아래에 차별적으로 편제한 것이 두품제이다.
피정복 세력 중 가야 왕족은 직접 진골에도 포섭
대부분 두품제에 편제되거나, 원거주지 촌주(村主)
골품제는 자비마립간 이후 법흥왕 대에 완성되었다.
469년(자비왕 12) 경주 방리(坊里) 이름을 정했고,
487년(소지왕 9)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했으며,
490년(소지왕 12) 경주에 시장을 열어 물자를 유통
신라의 관료조직 일원화와 행정구획 정리
골제와 두품제의 결합에 의한 골품제를 완성
골품제는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골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
성골은 직접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신분.
진골 아래 6~4두품은 중앙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신분층
3~1두품은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하급 신분으로 일반 백성
6두품은 '득난'(得難)으로 불릴 만큼 얻기 어려운 귀성(貴姓)
6두품은 사로국이 통합한 주변 소국의 큰 지역 지배층
6두품은 종교와 학문분야에서 특히 뛰어난 활동을 전개.
원효대사는 신라 6두품 출신 사상가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이 골품제 제약 밑에서 진골출신들과 겨루면서
관직에 나가는 길은 학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어 덕만공주가 신라 여왕으로 등극.
덕만공주는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서 선덕여왕으로 즉위.
선덕여왕은 신라 미륵보살의 상징으로 여왕 위상을 확립.
선덕여왕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가 일찌기 운명.
그 뒤를 이어 승만공주가 신라 진덕여왕으로 등극
진덕여왕은 동륜태자의 아들 진안 갈문왕의 딸 진덕.
진덕이 결혼 여부를 떠나 왕궁에 살았기 때문에
선덕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여전히 성골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두번째 여왕은 이렇게 탄생했다.
진덕여왕 역시,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여왕의 위상을 승계하여 신라를 통치.
그러나, 그녀는 신라 통치에 한계성을 절감.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 김춘추가 왕위에 등극.
미륵보살 신앙이 쇠퇴하고 미륵신앙이 일어난다.
즉, 김춘추는 살아있는 '신라 미륵불의 상징.'
진덕여왕 운명 후 성골은 씨가 말랐던., 신라.
하여, 김춘추 이후부터는 진골이 왕위를 계승.
그후 통일신라는 당의 비호 아래에서 태평시대.
통일 신라시대 후기에 성행했던 미륵보살도 쇠퇴.
통일신라시대 말기에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부흥.
통일신라 왕실은 국가통치의 기능을 상실.
후 삼국 시대가 여리며 통일 신라는 혼란기.
이 때, 후백제 견훤은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건한다.
그후 미륵신앙은 오늘날까지 혼란기마다 성행.
역사상 혼란기마다 큰 영향을 끼쳐 온 미륵신앙
천왕봉은 옛부터 한반도의 민간신앙 성지.
외래종교인 불교는 천왕봉 천왕성모와 결합.
그 결과 오늘날까지 일명 마야계곡인 중봉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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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천왕봉 성모상 실존 인물은 위숙왕후.
천왕성모와 마야부인을 나란히 모셨던 옛 향적사.
고려시대까지 모계사회 성모신앙이 뿌리 깊게 정착.
'이조 때 남존여비 유교관에 억눌린 성모신앙.'
이조때 천재지변으로 제 수명을 다 못한 사람들.
이조시대에는 유난히 잦았던 흉년, 전쟁 풍토병.
하여,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씨받이 축첩제도 성행.
이조시대 전까지 모계사회에서 성모사상이 팽배.
이조시대에 들어와 남존여비 유교관념이 차츰 성행.
모계사회 일처다부제가 사라지고 이조 때 일부다처제
모계사회에서는 한 지붕 식구도 아니던 남자
홀대받던 남자의 위상이 이조시대에는 가부장.
이조 후반에 한반도에서 가부장 제도가 정착한다.
아울러, 남근 숭배사상이 한반도에 뿌리내리게 된다.
임진왜란 7년 전쟁 및 병자호란으로 남자가 귀해진 탓.
'이조 후반 가부장 제도가 엄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남자는 여자보다 수명이 짧고, 위기극복 능력이 약하다.
양반 가문일수록 대를 이을 아들 선호 사상이 팽배한 탓.
하여, 가문의 장손 또는 장남은 무조건 예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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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유두류록에도 마야부인 이야기가 나온다.
고려시대에 마야부인 전설 속 여주인공은 위숙왕후.
위숙왕후는 고려를 창건한 왕건의 어머니를 성모화.
'고대국가 창건자 생모 =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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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마야는 석가모니 생모.
마야는 산스크리트로., 언어.
'마술' 또는 '환상'이란 뜻.
(환상을 믿게 하는 신의 힘)
.................... 석가모니 생모, 마야부인 (摩耶夫人)........................
마야부인은 자매 마하파자파티(Mah Pajpati)와 함께 정반왕과 결혼.
그녀는 석가모니의 어머니답게 5계(五戒)를 범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흰코끼리로 변한 보살이 연꽃을 가지고 그녀의 겨드랑이로 들어오는 꿈.
임신 중에는 4 수호신이 돌봐줬고,
뱃속 아이가 밖에서도 보였다 한다.
(4 수호신이 오늘날 사찰의 4천왕)
10개월 후 출산 무렵 친정으로 가다가
보리수 나뭇가지를 잡고 석가를 출산.
그녀는 산후 7일 만에 운명했고
도솔천(兜率天)에서 남자로 환생.
(양성을 갖었다는 문수보살의 유래.)
석가는 일주일만에 어머니를 잃고
이모인 마하파자파니 손에서 성장.
(석가모니 이모가 곧 최초의 비구니)
<석가모니>는 불교의 창시자. (BC 463∼BC 383년 또는 BC 563∼BC 483년 설).
네팔 남부 인도 대평원 카필라성(Kapila城) 사카족 국왕 정반왕(淨飯王)의 장남
<석가>라는 호칭은 종족 이름에서 유래되었고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
사카족은 네팔계, 따라서 몽골계 인종
인도-아리아 문화 영역내 거주한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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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비니 동산....................................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운 아늑한 희망의 솟음터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 동산은 현재 네팔에 위치.
수백년 고목과 아쇼카왕의 석주가 방문객을 반긴다.
햇빛이 따사로워 꽃들이 몸단장하고 새들이 노래할 때
마야부인은 이 동산에서 봄날 정취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때 ‘바라차라’(無憂樹) 나무 마야부인 발길을 유혹.
‘바라차라’는 그 자태가 공작의 목과 같았고
꽃이 향기롭고 오묘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마야부인이 그 가지를 잡자
밝은 빛이 온누리를 비추고
만물에 서응(瑞應)이 감돌았다.
곧 산기를 느껴 옥같은 태자를 낳으니
제석천이 흰 꽃단으로 태자를 받아내고
아홉 마리 용이 정수를 뿜어내 관정했다.
태자는 어머니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나와
사방으로 7보를 걷고나서 한손으로 하늘을 가르키고,
또 다른 한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소리 높이 외쳤다.
“이 세간 가운데 내가 가장 높구나.
나는 오늘부터 목숨받는 일이 끝났네.”
사해중생(四海衆生)의 구제자이자 대성자
석가는 이렇게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셨다.
'기원 전 566년 음력 4월 8일'
'룸비니’는 마야부인의 친정어머니 이름이다.
'제바타하성' 왕이자 마야부인 아버지 선각장자.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어 부인 이름을 따 '룸비니’
룸비니는 곧 '평화와 행복의 상징'
따라서 경전과 옛 문헌에는
룸비니가 매우 아름다운 동산
더욱 더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온갖 새와 꽃들과 맑은 샘이 솟는 룸비니
현재, '천국의 화원' 룸비니는 시골의 동산
히말라야 만년설(萬年雪)을 항상 머리에 이고
순례객들을 아늑한 분위기로 몰고 가는 룸비나.
봄에 겨울을 가까이 서서 볼 수 있는 오묘한 성지.
석가탄생 직후 하늘에서 32가지 서응이 내렸다는 곳.
몇가지만 소개하면 더러운 냄새나는 곳에 향기 진동.
동산에서 저절로 온갖 기이하고 단 과일이 주렁주렁.
온 나라의 마른 나무나무에서 꽃과 새 잎이 돋아났다.
해와 달과 별이 서서 가지 않고 탄신을 축복했으며,
귀머거리·소경·벙어리·곱사 온갖 질병이 나았다.
인류의 대스승이 오신날에 우주만물이 하나로 화답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한다.
룸비니는 이처럼 희망과 평화와 행복을 상징하는 동산.
하여,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중생의 희망,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의미한다는 '불교의 교리'.
하지만, 룸비니 동산은 부처님에겐 시련의 출발지.
어머니 마야부인이 7일 만에 운명한 때문.
바람은 불지 아니하나 파도가 일어나는 이치’
어머니 죽음은 무상을 절감하게 했던 큰 가르침
부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 계기가 된 셈.
룸비니의 마야데비 템플(마야부인 당)
지하실에 대리석으로 새겨놓은 탄생상
마야부인이 오른 손으로 ‘바라차라’가지를 잡고
옆구리에서 시타르타가 태어나는 모습을 새긴 조각.
행복했지만 불운한 한 여인의 단면을 보는 듯 보인다.
마야데비 템플의 발코니에서 사방을 보면
석가 탄생 당시를 회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석가탄생후 용이 나타나 목욕을 시켰다는 연못
네 귀가 반듯해 맑은 물이 찰랑찰랑거리고 있다.
아름다운 대평원의 잔디밭을 중심으로
옛 카필라국의 농경사회가 전개되는 듯
멀리 소달구지 소리가 정겨운 룸비나 동산.
카필라성이 있는 서북쪽, 60리 거리 숲과 논길
만삭의 마야부인이 코끼리 수레를 타고 왔던 길.
그후 룸비니 동산은 한번도 번창했던 일이 없던 곳.
불교의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들었을 적엔
룸비니 동산은 아예 밀림으로 덮여있었다.
1896년 발굴단에 의해 마야데비 템플 뒤쪽에 있는
아쇼카 석주(石柱)가 발견되면서 부터 알려진 성지.
아쇼카 석주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이 새겨져 있다.
“신들에게 사랑받는 인자한 왕(아쇼카를 말함)은
즉위 20년 몸소 이곳에 와서 예배드렸다.
이곳은 석가모니께서 탄생하신 곳이므로
돌을 깎아 마상(馬像)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곳은 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므로
세금을 감면, 생산의 8분의 1만 부과한다.”
1967년 미얀마 출신 우 탄트 UN 사무총장
이곳을 순례 중 보존상태가 엉망인 것에 충격
각국에 호소해 기금을 모으며 개발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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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문명.
고대 아메리카 대륙의 3 왕국 = 마야, 아스테카, 잉카.
건축물이나 종교 의식은 비슷했지만 말은 서로 달랐다.
아메리카 인디언이 부족마다 말이 다른 것과 같은 맥락.
잉카는 글자가 없었고, 아스테카는 역사 기록이 없고
마야는 문법을 갖춘 그림문자로 모든 기록을 대신했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거의 돌에 새겨진 것뿐.
마야 문명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수학과 천문학.
0 개념을 알고 막대기와 점 모양 숫자, 20진법 사용.
뛰어난 수학 실력으로 세계 최고 천문학을 발전시킨다.
건축물 이마에 생년월일을 복잡하게 써놓는 마야 문명.
그들은 피라미드와 건축물을 역법이 정해진 날에 세웠다.
5년, 10년 또는 20년마다 합당한 생일 날짜를 지닌 건축물.
한옥 석가래에 건축물 년월일을 기록하는 풍습.
길일에 고사를 지내며 착공하는 우리나라 풍습
마야인의 풍습은 우리 민족의 전통과 유사하다.
'신관의 지시에 따라 건축활동을 멈추는 마야인들.'
어느날 한사람도 남김없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기도 한다.
수만명이 400㎞가 넘는 밀림 속을 이동 새로운 터를 잡고
신관들이 시키는 날자에서부터 새 도시를 건설하기도 한다.
마야인의 복잡한 역법과 건축 설계술은 신관들만 알았다.
그들은 일식과 월식 따위를 예언해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
천체를 관측, 역법을 계산하면서 시간의 비밀을 풀고
그 해의 길흉을 점치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린 신관.
신관들은 노예나 평민을 신에게 산채로 제물로 바쳤다.
인신공회 제물로 받쳐지면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돌칼로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신에게 바치는 의식
신관들은 제물로 쓸 포로를 구하려 전쟁을 자주 부추겼다.
마야 전쟁 기록엔 사람 제물을 얼마 만큼 잡았다는 기록뿐.
어떤 도시나 어느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아무데에도 없다.
마야문명은 잉카 문명과 마찬가지로 쇠붙이를 쓸 줄 몰랐다.
마야인은 복잡한 그림문자를 돌칼로서 돌에 조각했다.
짐수레나 쟁기 또는 가축도 없이 맨손으로 돌을 날랐다.
밀림속에 피라미드를 쌓고 도시를 건설한 노예와 평민들.
'건설한 도시를 하루 아침에 버리곤 했던 마야.'
오늘날까지 마야인들은 여전히 옛날방식으로 살아간다.
화전으로 농사를 계속 연작하면, 수확이 몹시 떨어진다.
하여, 마야인은 자주 옮겨다니며 화전을 일군듯 추정된다.
오늘날 마야의 문자와 유적은 80%쯤 밝혀졌다고 한다.
밀림과 땅속에 묻혀진 마야문명 신비는 아직도 베일 속.
마야문명을 일궜던 마야인은 우리 민족과 같은 몽골리안
기원전 100∼600년 아메리카 과테말라 고지에서
유카탄 반도에 걸쳐 나타난 고대사회 마야 문명.
'몽골리안이 어떻게 남미까지 흘러갔을까?'
제 4 빙하기 전에 지구의 육지는 하나로 연결된 흔적.
아프리카- 유럽- 중동- 아시아- 한반도- 일본 쿠릴열도
-캄차카 반도, 알류산 열도,알래스카, 북아메리카. 남미.
인류의 선사문명은 바닷가 큰강 유역따라 발전.
인류 4대 문명 발상지 또는 신,구석기시대 유적.
인류는 저지대로부터 차츰 고지대로 이주한 흔적.
제 4빙하기 말기 지구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
한반도에서 분리된 일본은 고립되고 쿠릴열도는 징검다리 섬.
따라서, 몽골리안은 남미까지 가서 기원전 마야문명을 일군다.
남미에 있어야만 그 이름이 어울릴 법한 마야계곡.
지리산에 마야계곡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비하다.
중봉골보다 마야계곡으로 알려져왔던 사실이 흥미롭다.
중국 부여, 한반도 백제, 일본은 동일한 고대국가 설.
비류 백제 계열이 근초고왕 당시 일본을 창건했다는 설.
부여 백제 일본 몽골리안은 남미 마야와 무관하지 않은 듯.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그 신비가 드러난 잉카문명
잉카 문명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잉카 문명...................
15세기, 유럽이 중세의 암흑에 잠들어 있을 때
인더스의 잉카 문명은 초고도 문명을 이룩했다.
최전성기 1,100만 인구에 금이 넘쳐 흘렀던 곳.
태양을 숭배한 잉카의 종교 건축은 황금 장식.
어느 집이든 수세식 화장실과 주방이 달린 건축
호화스런 궁정에 장미, 루비, 에메랄드, 순금장식
은모래깔린 정원에 우유와 벌꿀의 작은 강
태양 신전에 신의 제물이 될 100명의 미녀들
향료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신전에서 대기상태.
소문을 전해들은 유럽인에 의해 멸망한 잉카제국
1532년 잉카제국을 찾아간 스페인 탐험가 피사로
불과 180명 부하를 데리고 범선으로 대서양을 횡단.
파나마에서 남하 도중 에코도르에서 조난
나무뿌리를 갉아 먹으며 정글을 헤치는 강행군
1년반 후 굶주림과 병과 싸우며 정글 남쪽에 도착.
깊은 계곡 건너 황금탑이 우뚝 솟은 잉카제국에 도착.
불과 180명으로 수만 명의 잉카군을 격파하고
수도 쿠스코에 침입해서 황제 아타왈파를 체포
그들은 말타고 온 피사로군을 신으로 여겼던 탓.
체포된 황제 아타왈파는 살려달라고 간청.
그 대신 태양신전에 있던 황금을 내놓는다.
1520년 잉카제국 정복자 페르난도 코르테스
황금 약탈과 아울러 들어왔던 천연두
아즈테카 인구의 절반이 그것으로 사망.
그후 잉카 제국은 스페인의 식민지 페루
태양신전의 보물과 처녀들의 행방은 묘연.
피사로군 침입 전 비밀 도시로 숨은 잉카인
그 어떤 고문에도 그 위치를 자백하지 않았다.
1911년 미국의 고고학자 빈감 박사
페루 오지로 탐험 중 잉카 고도 발견.
광장 정원 저수지 수로를 갖춘 계단식밭
태양신전 황금 신상 주위에 140 처녀들 미이라
모두 하얀 신부 의상을 입고 뺨을 쥐어뜯는 모습.
스페인 군을 피해 지하도로로 도망쳐 자살한 처녀들.
그때 보물은 남쪽의 티티카카 호수에 던져
오늘날까지 영원히 건져올릴 수 없는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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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제국 태양신전에 발견된 140 처녀들 미이라
황금 신전에서 흰옷을 입고 뺨을 쥐어뜯는 모습
갓 결혼한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연상하게 하는듯.
그렇다면, 왕의 시신과 함께 산채로 묻힌듯.
우리나라 가야 고분의 순장 풍습과 흡사하다.
남편따라 죽지 못한 여인을 미망인이라 한다.
마야 아스텤 잉카 우리나라 모두 몽골리안.
제 4 빙하기 같은 문화를 공유했던 민족들.
특히, 공통된 순장풍습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
마야계곡은 마야부인의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
마야부인은 마고 노고(老姑) 천왕성모 같은 인물.
마야부인은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고는 '견우와 직녀 전설' 속 인류의 조상.
직녀는 땅으로 내려와 인류의 조상 아만이 된다.
그 아만이 다시 태어나서 마고(늙은 할미)가 된다.
하여, <마야부인의 전설> 뿌리가 되는 인물은 '마고'.
인류조상이 견우와 직녀란 전설은 옛풍습에도 남아있다.
즉, 마고를 인류의 조상으로 보고있기에 성모신앙의 대상.
마야부인 전설은 '지리산 유래'의 골격을 이루는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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