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9 ( 삼장면. 추사 김정희. 삼장사. 南無. 불교. )|

donkyhote 2010. 5. 14. 01:19

삼장면(三壯面).




 




                                                                                    

                      
 

  중봉샘

 

 



                                                                                     


                                                                                                                              독바위

 


                                                                독바위

 


                                                                                                                         두류봉능선


                                          멀리 오른쪽 둥근 중봉..,오밀조밀한 왼쪽 써래봉 능선


  




                                                                             밤머리재에서 바라본 달뜨기능선.



천왕봉의 일출 방향 바로 아래 위치한., 삼장면.
수많은 옛 폐사지 사찰 터와 절골 흔적이 있는 곳.
옛부터 해뜨는 방향을 신성하게 여긴 우리나라 민족.

원래, 대원사는 삼장면 삼장사라는 사찰의 한 암자.
삼장사 옛터는 산청군 삼장면 석남리., 새터마을 터.
그곳엔 사라진 삼장사 옛터 임을 알려주는., 삼층석탑.

경남 유형 문화재 제31호로 지정.
원래, 오층석탑이었다고 전해온다.

삼층석탑과 함께 이곳에 있었다는., 비로자니불.
도굴꾼에 의해 사라진 후, 현재 내원사에서 소장.
1990년 보물 제1021호로 지정된., 비로자니불 1구.

앉은 키 108 cm, 무릎 90cm, 어깨 50cm, 머리 길이 33cm,
대좌(臺座) 높이 103cm, 상대석 지름 117cm, 하대석 117cm,
내원사 북쪽 900m 고지에 있던 것을 1953년 내원사로 이전.

옛 성모사 성모상 크기의 비로자니불.
비로자니불의 제작 연대는 영태 2년
영태 2년은 766년(신라 혜공왕 2년)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보면
혜공왕 대에 각종 천재지변

96명이나 되는 신라 각간(角干)이 난을 일으켰으며,
이미 100년 전에 죽은 신라 호국신 김유신의 혼령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희대의 괴변이 생겼던 신라 말기.

신라에서 가야계 화랑들이 몰락한 시기.
결국 산라에서 가야파는 제거되었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신라는 국력이 쇄약.

결국, 패망으로 치닫게 된., 신라.

혜공왕은 원래 여성으로 태어날 운명이었으나,
그만 남자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에 실린 구절.

"왕은 여자지만 남자가 되었기에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며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제37대) 선덕왕(宣德王)
김양상(金良相)에게 죽임을 당했다"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
혜공왕은 동성애를 즐겼던듯.

'신라 성풍속을 알려주는 기록.'

통일신라는 태평성대가 계속되자
군사적 사회적으로 기강이 해이해
국력이 서서히 쇠약해져 가기 시작.

화랑은 군사적인 요소보다 놀이집단으로 변질.
남사당패의 근원이 될만큼 남색도 성행했던듯.
하여, 혜공왕의 동성애는 흠이 되지 않았었던듯.

지명마다 보이지 않게 담겨있는 역사의 맥과 흐름.
그러므로, 지명 하나 하나 마다 소홀히 할 수 없다.

삼장면은 험준한 산에 둘러 싸였고 면소재지는 대포리.
삼장면 경계 따라 이방산 구곡산 국수봉이 솟아 있으며,
삼장면 북서부는 지리산 국립공원에 속한 오지 중 오지.

덕천강이 동부의 산간을 흐르고,
이를 따라 소규모 농경지가 분포.

쌀 보리 콩 송이버섯 오미자 당귀 등 생산.
특산물로는 대나무와 부채, 평촌리에 삼장사
이 절에는 철불, 3층 석탑 석등이 남아 있다.

대포(大浦)·내원(內源)·대하(坮下)·덕교(德橋)·
석남(石南)·평촌(坪村)·유평(油坪)·홍계(洪界)
8개 동리가 있고 면적 103.27㎢, 인구 1,981(2000년)

아직도 태고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곳
1㎢ 당 인구 20 명이 채 안되는 자연환경.
삼장면은 지리산에 방사한 반달곰들 서식처.

'삼장면은 지리산 야생동물들의 천국.'

삼장면(三壯面)은 석 三(삼). 장할 壯(장)
삼장사(三壯寺)는 3가지 보물을 보유한 사찰.
그렇다면, 3 가지 자랑할만한 보물은 무엇일까?

삼층석탑, 비로자니불, 그리고 남은 한 가지.
그것은 앞으로 풀어야 할., 베일 속 수수께끼.
삼장법사가 갖고온 경전..'반야심경'이 아닐까?

삼장법사가 경전을 구하러 다녀왔던 실크 로드.
그후 신라 고승들도 실크로드 따라 서역을 여행.
혜초 스님은 '왕오천축국전' 여행 기록을 남긴다.

삼장면은 우리나라 삼장보살 신앙의 진원지.
불교는 지리산 천왕봉의 천왕성모에게 의존.
불교정착 이후 반야봉으로 성지가 옮겨진듯.

삼장사 터 새터마을 입구에는 삼거리가 많다.
세번째 삼거리 검은색 비석의 윗길은 구사마을
그 검은색 비석 아랫길은 새터마을 가는 길이다.

구사마을은 대대로 문관이 태어난 고장.
마치, 붓끝과 닮아 붙여진.,필봉산 아래.

새터마을은 옛부터 무관을 배출했던 마을.
이 일대는 가야계 신라 화랑들 심신 수련장.
이 두 마을의 사이를 가르는 산이 필봉산이다

여성의 젖가슴 같다고 하여 일명 유방봉.
여성의 발기된 젖꼭지 산세인 필봉산 정상
왕산에서 필봉산으로 이어지는 호젓한 산길.

왕산은 가락국의 유물 유적이 많은 곳.

옛부터 유방봉을 명당터로 여긴 풍수지리설.
유방봉 일대는 조상대대로 명당 묘터 흔적들.
유방봉에서 흘러내린 골은 전국 어디나 무당골.

구형왕릉 -왕산 -필봉산 - 구형왕릉 3시간 거리.

필봉산 왼쪽 왕산은 가야 왕조의 마지막 무덤 터.
구사마을 새터마을은 벼, 배, 밤 양봉 고령토 산지.
고령토는 일본으로 수출후 가공 제품은 재수입 실정.

새터마을은 빗살무늬 토기 유적지.
인신공회 흔적이있는 무덤도 발굴.
이 일대 백무동은 무속신앙 근원지.

고려시대까지 무당은 천한 신분이 아니었다.
상류층에서 무당이 나오는 예가 적지 않았다.
상류층 여성 무당은 선관(仙官)이라고 불렀다.

삼국시대 신녀(神女)들은 무당들과 비슷한 역활.
그당시 신녀들의 직위는 왕에 버금갈 만큼 높았다.
왕에게 나라의 앞일을 예언하는 자문 역활을 맡았다.

하여, 신궁(神宮)에 기거했던 신녀들.
왕의 권세가 강성해질수록 약화된 지위
차츰 왕을 신봉하는 '왕의 여자들'로 전락.

신석기시대 무당은 모계사회에서의 통치자.
삼국시대 무당은 국가제사를 주관한 여사제.
통일신라시대 불교가 정착된 이후부터는 무당.

이조시대 유교관 정착과 함께 점점 쇠퇴한 무속.
왕실과 민중에게는 민간신앙으로서 명맥을 유지.
사대부 양반 유림에서는 천대했던 무속 민간신앙.

이조 후반 무당은 8천민 신분 중 하나로 전락.
'신내린 여자' 또는 '씨받이 딸'이 무당이 된 탓.
씨받이 딸은 보통 대물림 씨받이가 되어야 할 운명.

씨받이 아들은 그 가문의 대를 잇지만
씨받이 딸은 씨받이 어미가 키워야했다.
이조 후반부터 남존여비 사상이 빚은 비극.

하여, 무당의 딸로 팔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맺힌 한이 많아 굿 효험이 높다는 씨받이 딸.
씨받이 대물림에서 벗어나려 무당 딸이 되었다.

고대사회에서 통치자 신분이던 무당
이조 후반 8 천민으로 전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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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불교는 민간신앙과 결합된 흔적이 많다.
원래 우리나라 민간신앙은 신석기시대로부터 전래.
외래 종교인 불교는 초기에 민간신앙에 기대어 정착.

우리나라 초기의 불교는 무당과 스님의 결합.
무속 행사는 무당이 맡고 예불은 스님이 책임.
불교는 한반도 민속신앙에 기대어 뿌리내렸다.

'즉, 무당인 부인과 스님인 남편은 천생연분.'

차츰 민간신앙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 선 불교.
외래종교인 불교가 부흥하며 민간신앙이 쇠퇴.
하여, 사찰에는 토탬 민간신앙 흔적이 남아있다.

오늘날 사찰 안 칠성각과 삼신각이 그 사례.

화엄사,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를 창건한 연기조사.
지리산 곳곳에 사찰을 열어 화엄사상을 전파한 승려.
연기조사는 문수보살 화엄사상을 널리 편 인도 승려.

통일신라 때 국제도시 경주 황룡사에서 화엄경 설파.
어느날, 꿈속에서 만났던 성모산(지리산)., 문수보살.
꿈속에 문수보살을 본 곳에 암자를 짓고 화엄경을 설파.

그당시 지리산의 지명은 <성모산>이었던듯.
노고단 아래 연기암을 창건했다는 연기조사.
그곳에 어머니를 모셔 와 살았다는 연기조사.

연기암은 백제 사찰이었던 화엄사의 말사.
대원사는 통일신라 사찰인 해인사의 말사.

옛부터 삼장사는 화재가 많았던 사찰로 전해내려온다.
하여, 오늘날 삼층 석탑만 남아있는 삼장사 옛 사찰 터.
삼장사가 화마를 모면하려면 3층탑을 쌓아야 한다는 전설.

스님들은 사찰을 지키려 3층탑을 쌓다가 중도에 화재 발생.
결국, 화마로부터 사찰을 지키지 못하고 터만 남게 되었다.
삼장사 터는 현재 논이며 그곳 3층 석탑은 유형 문화재 31호

산청군 각처와 단성면 강루리는 선돌, 고인돌 유적지.
청동기시대에는 이미 산청군 일대는 마을이 형성된 곳.
특히, 강루리는 신석기시대 말 남강 따라 올라온 흔적.

삼국시대 생초면 어서리와 신안면 중촌리 고분군들
그 규모와 부장품은 5~ 6세기 가야 계열의 부족국가.

통일신라 이후 이 지방은 지품천현이라 하였고
단계지방은 적촌현, 단성 지방은 궐지군이었다.

757년(경덕왕 16) 궐지군을 궐성군으로,
지품천현을 산음현, 적촌현을 단읍현으로
산음 및 단읍 2현을 궐성군 소속으로 영현.

신라는 지리산을 오악의 하나로 숭앙하였으며,
신라말 선종이 성행하면서 단속사 삼장사 등등
사원을 산중에 건립해 불교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단속사(斷俗寺)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지리산 동쪽 옛 사찰터.
763년 신충 또는 748년(경덕왕 7) 이순(李純) 창건
금당 뒷벽에 경덕왕 진영(眞影), 솔거 유마상(維摩像)

현재 금당지(金堂址)로 추정되는 건물지에 들어선 민가
그앞 좌우에 2기의 3층석탑(보물 제72호와 보물 제73호)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쌍탑 가람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외 강당지(講堂址)로 보이는 넓은 건물지 초석들
신라 병부령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
1159년 입적한 탄연(坦然)의 대감국사비(大鑑國師碑)이 발견

근처에 최치원이 쓴 '廣濟門' 글씨가 새겨진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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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말기에 천령(함양)군수였던., 최치원.
하여, 지리산 곳곳에는 최치원의 발자취가 많다.
말년에 해인사로 귀의해 여생을 보냈다는 최치원.

쌍계사 일대에 유난히 많은 최치원의 족적들.
고운동계곡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
산청 양수발전소 건설후 사라져가는 고운동계곡.

지리산에는 사라진 옛사찰 터 흔적이 참 많다.
옛 문헌 기록상 500 여 사찰이 지금은 11 곳 뿐.
지곡사지 등 폐사지 몇 군데를 찾아가보기로 하자.

..............지곡사지............................
천왕봉 산줄기가 중봉과 하봉으로 이어져
쑥밭재-새재-외고개-왕등재-깃대봉을 거쳐
밤머리재에 이르러 다시 한번 치솟아 웅석봉
그 아래 가장 포근한 위치에 자리한 지곡사지.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지곡사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지당마을(확인)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세진교창건비가 위치한 계곡 아래
경사진 암반 위에 걸쳐진 무지개 다리로 오갔다고 한다.

1936(丙子)년 여름 장마에 떠내려가 버렸고
지금 그 자리에는 세진교(洗塵橋) 글자 흔적.

노인정(확인) 앞 우물가 덥개돌 2개
마을 민가 마당에 1개, 계곡에 여러개
세진교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전해온다.

"내가 죽으면 다리 중앙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것"

절을 창건한 스님이 어느날 홀연히 떠나며 남긴 말.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물방울 떨어지는 세진교를 보며 자랐다는 마을 노인들

세진교는 상부 보행로가 평평한 평교 형태가 아니고
창녕의 만년교와 유사한 아치형의 홍예교이었다는 것

지곡사지 입구의 마을로 들어오면서 느끼는 열린 공간
마을을 지나 세진교 창건비 방향으로 올수록 닫힌 공간
세진교 건너면 다시 지곡사지가 보이는 열린공간을 형성

근래 건설한 저수지의 제방이 열린 공간을 닫아 버려
저수지 오른쪽 길을 돌아가야 지곡사지 전경이 보인다.

세진교 창건비는 높이 165 ㎝, 폭 68㎝, 두께 20㎝ 화강석
비문은 풍화되고 얕게 음각되어 그 내용을 알기가 어려우나
다행스럽게 탁본을 떠놓은 글이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지곡사지 유구로 추정되는 민가 기단 디딤돌과 장대석은
당시 지곡사 건물 주 출입구 계단석 등의 것으로 추정된다.

지곡사 요사채 뒤편과 주차장 아래 머리없는 거북 2기
두 거북등 위에 진관선사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4개의 발은 띠를 두른 거북 등 껍질에 덮여 새겨져 있다.

비좌의 홈은 가로 97㎝, 세로 21㎝, 깊이 20㎝
비좌 양측 면에 마주 보는 잉어 두 마리를 조각.
인근 합천군 영암사지 부도와 공통점이 발견된다.

추파당 부도탑비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388호
한암당 부도탑비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389호
소재지 :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 779-1

고려시대 혜월과 진관 선사(912∼964)가 머물던 전성기
수백 승려들이 머물렀고 물방아간이 12개 있었다고 한다.
1845년(조선 현종 11) 이후에 폐허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목사 김시민이 진주성 전투에 대비해
이곳에서 170 점 조총과 화약을 제조했고
김성일도 정철(正鐵)을 가지고 조총을 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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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은 호국불교의 요람으로 사용된 흔적.
신라시대 절골은 화랑들의 군사훈련장인듯.
절골은 이조시대까지 산속 군부대같은 역활.

........................평원사........................
신라 진흥왕9년(548년) 연기조사가 창건한 평원사
삼장사 창건 전부터 그 모체가 된 사찰로 추정된다.
평원사는 소실된 후 무려 천년 동안 폐쇄되었던 사찰.

평원사는 이조 숙종 11년 운권선사가 천년만에 복원
옛 평원사를 대원암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새롭게 부활.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 제일의 강당.'

대원암은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해 모두 불타버렸다.
이조 숙종 11년(1685년) 운권(雲捲)이 새로 지었다.
당시 대원암이라 했다가 고종 27년(1890년)에 중창

대원사(大源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화재로 소실
1917년 중건되었으나 1948년 여순반란사건 당시 소실
1955년 법일(法一)스님이 비구니 선원으로 중창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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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지리산에서 사라진 폐사지를 찾는 답사산행이 붐.
대원사 유평마을 도로 따라 200m 올라가면 용소동 계곡
용이 백년 동안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의 고향'., 용소.

대원사 계곡에는 몸과 마음을 씻고 가라는 소(沼) 2 곳.
위는 세심탕(洗心湯)이고 아래에 있는 것이 세신탕(洗身湯).

대원사에서 1.2㎞ 거목 숲을 지나., 유평마을
1960년대 삼장초등학교 유평분교가 있었던 곳.
운동장에 늘 가랑잎이 쌓여 있기에 '가랑잎 초교'.

그만큼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환경.
그곳에 들렀던 모 기자가 명명한 예쁜 이름.
지금은 폐교가 되어 사라진 명성 '가랑잎 초교'.

지금은 청소년 수련원으로 바뀌어 그 자리에 있다.
인근 길가에 토종닭과 산채밥 등을 파는 민박집 20 곳
이곳에서 천왕봉까지는 10.7㎞로 약 7~8 시간 도보거리.

대원사 도로따라 끝까지 오르면, 새재.

'새재' 지명을 풀이하면 일반적으로 4가지.
새재(鳥峴)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 고개, 산과 산 사이 고개, 신(新) 고개.

여기서는 '억새 밭 고갯마루'라는 뜻.
새재마을'은 일명.,'하늘 아래 첫동네'
삼거리마을과 중땅마을을 거쳐 외길 끝.

새재 마을에서 천왕봉까지는 약 8.4㎞

새재마을 - 심밭골 -무재치기폭포 - 치밭목산장
새재마을 - 조개골 - 비둘기 능선 - 치밭목산장.
치밭목산장 - 샘터 -하봉 헬기장 - 중봉 - 써래봉.

.......새재마을 민박집......
비둘기 산장 972-8569
조개골 산장 972-7869
새재 산장 972-9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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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밭골(윗 새재)은 무재치기폭포 가는 길목.

써래봉(1.642M)은 논 써래질하는 쟁기를 닮은 봉.
쭈빗쭈빗한 암릉으로 이어져 조난을 겪기 쉬운 곳.
치밭목산장 갈 때 써래봉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유념. 



 


추사 김정희. 



유평계곡은 '한폭의 동양화' 같은 절경.
서예가이자 화가인 추사가 즐겨 찾았던 곳.
추사의 힘찬 필체가 돋보이는 대원사 요사채.

추사는 천자문 저자 한석봉과 쌍벽인 명필.
추사는 동학혁명의 사상적 중심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인 성향을 보면 연관이 있다.

추사는 함흥 황초령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해석.
1816년 북한산 비봉의 비문을 처음 판독해 냈던 학자.
궁중사찰 승가사에 묶으며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판독.

그전까지 무학대사가 세운 비로서 알려졌던 순수비.
그렇게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았던 추사.
청나라 유학파 경제학자이고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추사는 병조참판까지 관직에 올랐지만
제주 9년, 북청 2년 등 13년간 귀양살이.
말년에는 사찰을 오가며 여생을 보낸 인물.

추사(1786-1856)는 성리학이 점차 폐단을 드러낼 무렵
새로운 실학 학문을 요구하던 19세기 전반에 활동하였다.
서예, 그림, 경학, 금석학, 천문학, 불교학에 뛰어난 인물.

실학은 정권에서 소외된 사상가들이 농민의 어려움을 대변
전통질서 붕괴를 막고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개혁 사상.
이조 말 성리학의 폐단과 병폐를 바로 잡으려던 깨끗한 인품.

'추사는 정약용과 더불어 실학 사상가.'

금석학(金石學)과 고증학(考證學)에서 당대의 석학.
청나라 고증학, 금석학, 청조학(淸朝學)의 제 1인자.

일본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1879~1948)는
추사가 청나라 연경 학자들과 얼마나 깊이 교류했는지 고증.
추사는 한국인으로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정상을 차지한 위인.

1856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에서 71세로 생을 마감.
그곳 산등성이 넘어 앵무봉의 화엄사에도 걸려있는 추사 필체.
대원사 뒤편 차밭은 차를 몹시 좋아했던 추사를 떠오르게 한다.

백파스님, 초의스님은 추사와 40 여년 호연지기들.
초의스님과 추사는 다산서원에서 처음 만난.. 지인.
정약용의 실학사상 영향을 받았던 초의스님과 추사.

세 사람 모두 차를 좋아했다.

나무인지 풀인지 분간이 어려워
풀(艸)과 나무(木)를 합쳐 차(茶)

차는 당나라에서 유래되었다는 북방 전래설이 있고
인도에서 허황후가 갖고 왔다는 남방 전래설이 있다.
지리산은 한반도 차문화의 요람이자 시배지인 곳이다.

다성(茶聖)이라 불리우는 초의스님의 詩 '취금설.
대흥사 개울가에 사는 물총새를 차맛에 비유한 시.
초의스님의 저서 '동다송(東茶頌)'에 실려있는 시.

"새벽 이슬 촉촉이 머금은 찻이파리 물총새의 혀 같네"

동다송은 중국의 차문화, 약효 및 명품 차를 소개한 책.
초의스님의 詩들은 한반도 차 문화를 엿보게 해주는 유산.
그는 해남 땅끝마을 인근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에서 운명.

1997년 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초의선사
그의 출생지는 삼향면 왕산리 봉수산 자락
그 높은 정신을 기려 생가복원, 유물 전시관

초의선사 추모비 추모각 다도관 등도 건립

15세에 출가후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40년간 수행
선 사상과 차에 관한 저술에 몰두 큰 족적을 남긴 분.
특히 당시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선사

당시 명맥만 유지해 오던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
초의선사는 다산 추사 등 당대 최고 석학들과 교분.
불교 도교는 물론 유교 등 범서에도 능통한 분이었다.

무안읍에서 목포 방면으로 약 18km 정도 진행
목포 예술고교에서 우회전하면 초의선사 생가.
2006년 10월 전남도청 이전으로 활기찬 무안군.

'추사와 초의스님은 목숨걸 만큼 깊은 우정.'

초의스님은 제주도 유배지까지 추사를 찾아갈 정도.
그당시 제주도로 출항하는 배는 땅끝마을에서 출발.
이조 말기 제주도는 살아 다시 나오기 어려운 유배지.

'추사는 어떻게 그 유배지에서 살아 나왔을까?'

그의 족적을 되짚어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기로 하자.
추사가 말년에 마곡사에 기증한 불경 400 여권과 불상.
청나라 유학파인 그가 북경 사신으로 오가며 모은 소장품.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귀가길에 71세로 운명.'

이조 사대부로는 드물게 부인을 애도한 추사의 '망부가'.
그가 생전에 얼마나 부인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내용.
축첩제도가 성행했던 이조시대에 보기 드문 애처가 '추사'.


悼亡(도망) - 김정희 作

저승엘 가서 월하노인과 송사를 해서라도,
다음 세상에서는 부부의 지위를 바꾸리라.

나는 죽고 그대는 천리 밖에 살아 있어,
그대로 하여금 이 애통함을 절감케 하리.

1840년(헌종 6년) 제주 대정리에서 귀양살이 할때
한양에서 옥바라지하던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던 시.
제주 귀양살이로 아내 임종도 못본 애통함을 담은 시.

'월하노인은 남녀 간 부부 인연 맺어준다는 노인.'

8년 후 1848년(헌종 14년)에 제주에서는 풀려났으나,
3년 뒤 1851년(철종 2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이듬해 과천 관악산 기슭 초당에서 향년 71세로 별세.

'명필 문장가이자 시인이고 화가였던 김정희.'

불교에 관한 이해는 범인을 능가할 경지의 '추사'.
이조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준 화가 추사의 그림.
추사는 이조의 명필로 유명한 김한신의 증손자이다.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건축.'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한 왕의 사위.
화순옹주는 이조 왕실의 여인 중에서 유일했던 열녀.
명필인 증조부 재능과 열녀 증조모 절개를 닮은 추사.

화순옹주는 38세에 운명한 남편따라 10일 만에 운명.
물 한방울 입에 대지않고 통곡하다가 숨을 거둔 열녀.
병든 남편을 지극 정성 간호할 만큼 금술 좋았던 부부.

영조는 옹주에게 음식을 먹고 기운 차리라 일렀지만
이를 거부하고 죽자 딸에게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현재 추사 고택 열녀문은 영조 손자인 정조가 내린 것.

'추사가 살아 나온 이유를 알 것 같다.'

정조는 친청파 군왕이라 추사를 사면 복권한 듯.
추사는 청나라에서도 그 재능을 높이 평가한 인물.
불교를 탄압한 유림과는 적대관계지만 왕실과 인척.

영조는 이조 27 왕 중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던 군왕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
영조는 슬하에 공주는 없었기에 화순옹주를 애지중지.

'추사가 명문가문의 혈통 임을 알 수 있는 대목.'

왕의 딸을 지칭하는 용어로 공주(公主)와 옹주(翁主).
이조 초기에는 왕실 여인들의 호칭은 모두 공주였다.
성종 때부터 공주는 정실부인의 딸, 옹주는 후궁의 딸.

공주는 품계상 무계(無階)이며, 외명부에서 가장 상위.
옹주도 왕비 및 대비와 마찬가지로 품계를 초월한 존재.

'추사가 13년간 귀양살이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충남 예산 출생. 1809년(순조9) 생원, 1819년(순조19) 문과 급제
충청우도 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조참판을 역임.
24세 때 청나라 연경에 유학. 1840년(헌종6) 윤상도 옥사에 연루.

제주도 9년 유배생활 후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2) 헌종의 묘천 문제로 북청 귀양
이듬해 풀려나는 등 총 1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린 '세한도'는 추사 대표작.'

소나무는 허리를 굽혀서라도 빛을 추구하는 삶.
잣나무는 음지에서도 바르고 곧게 살아가는 삶.
즉, 송백(소나무, 잣나무)은 선비의 절개를 상징.

잣나무는 음지에서 살아도
소나무는 음지에서 죽는다.
소나무가 살 곳은 오직 양지.

음지(불의)와 타협조차 할 수 없는 소나무의 삶.
하여, 소나무 지조는 잣나무 절개보다도 선비답다.
송백은 옛부터 바람직한 선비의 마음 가짐을 뜻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늘 푸른 송백.
'세한도'는 곧은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그림.
제자에게 송백 같은 선비가 되라는 스승의 가르침.


....................................세한도.......................................
추사는 55세에 제주도로 귀양가 9년간 고통의 유배생활.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섬에서 혼자의 힘으로 살던 추사.
삭탈관직 스승을 유배지까지 찾아 온 역관인 제자 이상적

'청나라에서 귀한 책을 구해 계속 유배지로 보낸 제자.'

역관(통역관) 이상적은 청나라를 오가며 스승을 방문.
형벌 위험을 무릎쓰고 스승을 돕는 제자가 고마웠던 추사.
그 제자를 위해 추사가 그린 '세한도'는 <현재 국보 180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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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의 그림.
그곳까지 찾아온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송백에 비유.
추사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준다.

'날이 차가워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라는 말을 쓴 작품.
추사 연구가 후지즈카 소장했던 추사에 관한 많은 자료.
2차 세계대전 말 미군의 동경 폭격으로 대부분 타버렸다.

'하여, 그의 명성에 비해 전해오는 추사 유품은 희귀.'

1856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에서 71세로 생을 마감
그곳 산등성이 넘어 앵무봉의 화엄사에도 걸려있는 추사 필체.
대원사의 추사 필체는 그가 말년에 이곳을 즐겨 찾았다는 증거.

추사는 이조의 명필로 유명한 김한신의 증손자이다.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한 왕의 사위.
하순옹주는 이조 왕실의 여인 중에서 유일한 열녀이다.

재능은 재능을 낳고,
사상은 사상을 낳고,
명필은 명필을 낳는듯.

추사 필체가 돋보이는
대원사의 요사채 현판.

추사가 즐겨 찾을 여건을 고루 갖춘.. '대원사'
이조 말 화단에 큰 영향을 준 화가 추사의 그림.
불교에 관한 이해는 범인을 능가할 경지의 '추사'.

추사가 대원사에 머물렀던 이유는 무엇일까? 



삼장사. 




추사는 대원사에 머물며 불교에 심취했던듯.
원래, 대원사는 삼장면 삼장사 사찰의 한 암자.
삼장면은 삼장사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추정된다.

천왕봉의 일출 방향 바로 아래 위치한., 삼장면.
수많은 옛 폐사지 사찰 터와 절골 흔적이 있는 곳.
옛부터 해뜨는 방향을 신성하게 여긴 우리나라 민족.

원래, 대원사는 삼장면 삼장사라는 사찰의 한 암자.
삼장사 옛터는 산청군 삼장면 석남리., 새터마을 터.
그곳엔 사라진 삼장사 옛터 임을 알려주는., 삼층석탑.

경남 유형 문화재 제31호로 지정.
원래, 오층석탑이었다고 전해온다.

삼층석탑과 함께 이곳에 있었다는., 비로자니불.
도굴꾼에 의해 사라진 후, 현재 내원사에서 소장.
1990년 보물 제1021호로 지정된., 비로자니불 1구.

앉은 키 108 cm, 무릎 90cm, 어깨 50cm, 머리 길이 33cm,
대좌(臺座) 높이 103cm, 상대석 지름 117cm, 하대석 117cm,
내원사 북쪽 900m 고지에 있던 것을 1953년 내원사로 이전.

성모사 성모상 크기의 비로자니불.
비로자니불의 제작 연대는 영태 2년
영태 2년은 766년(신라 혜공왕 2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평촌리 새터마을에 있었던 삼장사.
그러나, 삼장사는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고 전해온다.

삼장면은 험준한 산에 둘러 싸였고 면소재지는 대포리.
삼장면 경계 따라 이방산 구곡산 국수봉이 솟아 있으며,
삼장면 북서부 일대는 지리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오지.

덕천강이 동부의 산간을 흐르고,
이를 따라 소규모 농경지가 분포.
임산물을 비롯 대나무 부채가 유명.

대포 내원 대하 덕교 석남 평촌 유평
홍계 등 8개 동리가 있고 면적 103.27㎢.
오늘날까지 지리산 야생동물들의 천국이다.

삼장법사가 서역에서 갖고온 경전..'반야심경'.
삼장법사가 경전을 구하러 다녀왔던 실크 로드.
삼장면 일대는 우리나라 삼장보살 신앙의 진원지.

.......................삼장보살.........................
삼장보살은 천장(天藏) 지지(持地) 지장(地藏) 보살.
경전에는 보이지 않아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불확실.

지장신앙은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사상(三神思想)
비로자나불이나 석가여래계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

'탱화를 통해 알려진.,삼장보살.'

천장보살은 상계교주(上界敎主)이고
지지보살은 음부교주(陰府敎主)이다.
지장보살은 天界, 地上界, 地下界 신앙.

삼장보살도를 보면 가운데 위치한 천장보살
좌우에 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한 그림.

구도는 삼존이 횡렬로 앉아 있고
그 좌우 아래에 권속(卷屬)을 배치.

삼장탱화(三藏幀畵)는 이조 후기에 성행.
지금은 전통사찰 외에는 보기 드문 탱화.
삼장탱화는 보통 주법당 측면 벽에 봉안.

중앙의 천장보살(天藏菩薩)은 주로 손에 경전을 들고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그리고 북두칠성 등을 거느린다.

좌측 지지보살(地持菩薩)은 지부(地部) 등을 거느리고
우측 지장보살(地藏菩薩)은 투명구슬과 육환장을 들고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10대명왕(十大冥王)을 지배.

각 탱화 상단에는 권속들에 둘러 싸여있고
구름을 경계로 하여 아랫단에는 지옥을 묘사.
사후세계 지옥은 염라대왕이 다스린다는 그림.

삼장탱화는 보통 한 폭에 그려진다.
하늘과 땅 지옥을 관장하는 세 보살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불교관.

지장보살은 망자의 혼을 천도해주는 존재.
인도 아리안족 바라문 지신에서 유래된듯.
인도 신화 가운데, 최고의 여인., 프리티.'

지장보살은 대지의 덕을 상징하는 신앙의 대상.
인도 지장보살 흔적은 450~650년 또는 700년대.
지장보살 신앙은 남방 불교에서부터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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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사는 삼장보살 신앙의 진원지로 보인다.
삼장사가 있었다는 옛터가 지금은., 새터마을.
새터마을 진입로는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삼거리.

새터마을 입구의 진입로에서 세번째 삼거리
비석 윗길은 구사마을, 아랫 길은 새터마을.

구사마을은 대대로 문관을 배출했던 고장.
새터마을은 옛부터 무관을 배출했던 마을.
두 마을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이., 필봉산

마치, 붓봉우리와 닮아 붙여진 산 이름.
높이는 왕복 3~4시간 소요 도보거리 정도.

그 산 왼쪽에 있는 왕산은 가야왕조 마지막 무덤.
이 두 마을은 벼, 배, 밤 양봉 고령토 등의 주산지.
고령토는 일본으로 수출후 가공 제품은 재수입 실정.

'새터마을은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 유적지.'

새터마을에는 '인신공회'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인신공회' 풍습은 신석기시대의 토속 민간신앙.
한반도에 불교가 정착하면서부터 사라진 옛 풍습.

새터마을은 신석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이곳 고령토와 빗살토기 유적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
지금부터 새터마을 인신공회에 관한 전설을 알아보자.

...........새터마을 처녀 인신공회 전설................
새터마을은 전국 어디를 가나 삼거리에 있는 당집.
삼거리는 우리나라 민족의 전형적인 3갈래 갈림길.
하동 북쪽 천반산 새터마을 당집에 전해오는 전설.

어느날 당집 건너 돌무더기가 점점 커지더니
산만한 수탉이 되어 주변 마을사람을 해치고
곡식까지 전부 먹어 사람이 살수 없게 되었다

하루는 스님이 마을로 와 비방을 알려주고 갔단다.
'예쁜 처녀를 제물로 바치면 환란을 면할 것이오."

그뒤 마을 처녀를 제물로 바쳐 환란은 면했지만
처녀 딸을 둔 집에서는 서둘러 마을을 떠나갔다.
하여, 그 마을에서 처녀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마을 처녀를 바치는 밤.'

마을 원로가 제물로 바치려 처녀를 데리고 가는데
별안간 당집이 훤해지며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났다.
구렁이는 수탉과 밤새 태산이 진동하듯 맞붙어 싸웠다.

밤새 으르렁대는 소리에 뜬 눈으로 지새운 마을사람들
이튿날 그 곳에 가보니 수탉은 부리가 잘린 채 죽어있고
구렁이는 전신에 상처를 입은채 사리를 틀고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여러날 걸려 흙으로 덮어 주었는데
오랜 뒤에 하나는 부리 없는 수탉산이 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용을 쓴 구렁이 산이 되었단다.

그런데, 수탉산의 부리가 자라나면 마을에 재난.
당집의 당할머니는 마을 수호신인 커다란 구렁이
수탉산의 부리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역활을 한다.

그후 마을사람들은 구렁이 동산에 당집을 짓고
매년 음력 정월 사흗날 밤에 당 고사를 지낸다.
백무동을 비롯해 지리산 일대에는 당집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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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동 당집은 신석기시대 새터에서 유래.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백무동은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근원지인 셈.

'당집은 저지대 남방 민족의 신앙인듯.'

개인의 액을 막고 복을 빌기 위한 무속신앙.
한반도 고대국가 역사와 더불어 발전된 미신.
첫 기록은 고려시대 현종 12년(1021)에 기우제.

고려 숙종 6년(1101)에 다시 무당들의 기우제.
고려 인종(1123) 이후 고려시대는 혼란과 쇠퇴기
이 무렵 무당들을 모아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빈번.

때로는 무녀 300명을 모아 국가에서 기우제.

고려 인종 9년(1131) 무당은 유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
굿판 남녀의 춤과 노래 행위는 유교적 안목에서 부정적.
그 후 도성 안 무당들을 성밖으로 축출하거나 굿을 금지

고려시대까지 무당은 천한 신분이 아니었다.
상류층에서 무당이 나오는 예가 적지 않았다.
상류층 여성 무당은 선관(仙官)이라고 불렀다.

신석기시대 무당은 모계사회에서의 통치자.
삼국시대 무당은 국가제사를 주관한 여사제.
통일신라시대 불교가 정착된 이후부터는 무당.

이조시대 유교관 정착과 함께 점점 쇠퇴한 무속.
왕실과 민중에게는 민간신앙으로서 명맥을 유지.
사대부 양반 유림에서는 천대했던 무속 민간신앙.

이조 후반 무당은 8천민 신분 중 하나로 전락.
'신내린 여자' 또는 '씨받이 딸'이 무당이 된 탓.
씨받이 딸은 보통 대물림 씨받이가 되어야 할 운명.

씨받이 아들은 그 가문의 대를 잇지만
씨받이 딸은 씨받이 어미가 키워야했다.
이조 후반부터 남존여비 사상이 빚은 비극.

하여, 무당의 딸로 팔려가는 경우도 많았다.
맺힌 한이 많아 굿 효험이 높다는 씨받이 딸.
씨받이 대물림에서 벗어나려 무당 딸이 되었다.

고대사회에서 통치자 신분이던 무당
이조 후반 천민으로까지 전락한 무당.
씨받이 풍습이 사라진 후 무당은 전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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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불교는 민간신앙과 결합된 흔적이 많다.
원래 우리나라 민간신앙은 신석기시대로부터 전래.
외래 종교인 불교는 초기에 민간신앙에 기대어 정착.

'오늘날 사찰내 칠선각 삼신각이 그 증거.'

우리나라 초기의 불교는 무당과 스님의 결합.
무속 행사는 무당이 맡고 예불은 스님이 책임.
불교는 한반도 민속신앙에 기대어 뿌리내렸다.

'즉, 무당인 부인과 스님인 남편은 천생연분.'

차츰 민간신앙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 선 불교.
외래종교인 불교가 부흥하며 민간신앙이 쇠퇴.
하여, 사찰에는 토탬 민간신앙 흔적이 남아있다.

오늘날 사찰 안에 있는 칠성각과 삼신당이 사례.
한반도의 불교는 민간신앙와 결합해 발전해왔다.
삼장사의 전설에서도 역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화엄사,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를 창건한 연기조사.
지리산 곳곳에 사찰을 열어 화엄사상을 전파한 승려.
연기조사는 문수보살 화엄사상을 널리 편 인도 승려.

통일신라 때 국제도시 경주 황룡사에서 화엄경 설파.
어느날, 꿈속에서 만났던 성모산 지리산의 문수보살.
꿈속 문수보살을 본곳에 암자를 짓고 화엄경을 설파.

'연기조사는 백제 말부터 통일신라 초기 인도승려.'

당시 지리산은 성모산이었음을 알수 있다.
노고단 아래 연기암을 창건했다는 연기조사.
그곳에 어머니를 모셔와 살았다는 연기조사.

연기암은 백제 사찰이었던 화엄사의 말사.
대원사는 통일신라 사찰인 해인사의 말사.

옛부터 삼장사는 화재가 많았던 사찰이었다.
하여, 오늘날 삼층 석탑만 남아있는 폐사지.
화마를 면하려면 3층탑을 쌓아야 한다는 전설.

삼장사 스님들이 3층탑을 쌓다가 중도에 화재가 발생.
결국, 화마로부터 사찰을 지키지 못하고 터만 남았다.
이곳은 현재 논이며 그곳 3층 석탑은 유형 문화재 31호

................삼장면 삼장사 유래......................
산청군 각처와 단성면 강루리는 선돌, 고인돌 유적지.
청동기시대에는 이미 산청군 일대는 마을을 형성된 곳.
특히, 강루리는 신석기시대 말 남강 따라 올라온 흔적.

삼국시대 생초면 어서리와 신안면 중촌리 고분군들
그 규모와 부장품은 5~ 6세기 가야 계열의 부족국가.

통일신라 이후 이 지방은 지품천현이라 하였고
단계지방은 적촌현, 단성 지방은 궐지군이었다.

757년(경덕왕 16) 궐지군을 궐성군으로,
지품천현을 산음현, 적촌현을 단읍현으로
산음 및 단읍 2현을 궐성군 소속으로 영현.

신라는 지리산을 오악의 하나로 숭앙하였으며,
신라말 선종이 성행하면서 단속사 삼장사 등등
사원을 산중에 건립해 불교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삼장면(三壯面)은 경남 산청군 서부에 있는 면.'

동부 산간을 흐르는 덕천강따라 소규모 농경지
'평촌리 유적지로는 삼장사 철불, 3층석탑 석등.'
특히, 산청군의 밤 수확 생산량은 1996년 8500 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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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골 유원지는 전국 어디를 가나 성풍속이 문란.
그 진한 꽃향기는 여성의 얼굴을 붉힐 만큼 강렬하다.
밤나무꽃 향기는 남성의 정액 체취를 물씬 느끼게 한다.

삼장면은 밤나무골 유원지를 연상하게 하는 자연환경.
수려한 산세에 둘러쌓여 있고 맑은 개울이 흐르는 곳.
피서지는 예나 지금이나 성풍속이 자유분방한 편이다.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9년(548년)에 연기조사가 창건
평원사라 명명하였는데 불탄 후 무려 천년 동안 폐쇄
이조 숙종 11년 운권선사가 복원 후 대원암으로 개창.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 제일의 강당.'

대원사는 이 후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전소되었다,
이조 숙종 11년(1685년) 운권(雲捲)이 새로 지었다.
당시 대원암이라 했다가 고종 27년(1890년)에 중창

대원사(大源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화재로 소실
1917년 중건되었으나 1948년 여순반란사건 당시 소실
1955년 법일(法一)스님이 비구니 선원으로 중창한 것.



나무(南無)



삼장면은 폐사지가 많은 고장.
신라 시대 불교의 성지였던듯.
불교를 한마디로 대변하는.,南無

‘돌아가 의지함’ 이란 의미.
즉, '절대적인 믿음'을 뜻한다.

나무는 보리수와 무관하지 않은듯.

보리수는 석가모니가 깨닳음을 얻은 나무.
염주(念珠) 즉, 생각하는 구슬 원료가 보리수.
석가모니는 중생을 구제하려 왕자 신분도 버렸다.

진리를 찾아 열대독충과 사막 뙤약볕에 시달렸고,
히말라야 설산을 맨발로 다니며 고행을 계속했다.

어느 날 마지막 고행 끝에 강가 큰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일어서지 않겠다.'는 일념 뿐.

깊은 명상에 들어간 그에게 마라라는 악마가 다가왔다.
악마는 온갖 유혹의 손길을 뻗쳤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그는 오히려 악마의 항복을 받아내고 중생의 과거를 본다.

악을 행한 자는 지옥에서 태어나고 선을 행하면 하늘나라
새벽엔 고통과 죽음의 원인을.. 동틀 무렵에 진리를 발견.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명상에 들어간지 1주일이 지난 뒤였다.

인도의 보리수는 고온다습한 열대지방에 사는 활엽수.
이러한 살인적인 더위라도 보리수 밑에 들어가면 시원.
인도의 사원에서는 보리수나 인도 보리수 밑에서 명상
명상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선(禪)의 세계를 넘나든다.

이러한 명상 문화는 불교에서 선으로 나타났고,
힌두교에서는 요가로 발전해 초월명상(超越暝想)
명상이든 선이든 본질은 자기 수련을 통한 깨달음

보리수, 인도보리수는 고무나무와 같은 뽕나무과 식물.
인도보리수 열매는 무화과 열매와 비슷하지만 훨씬 작고
천선과나무 열매보다 크고 붉은색이며 익으면 먹을 수 있다.

인도보리수는 거대한 나무이지만 씨는 깨알보다 작다.
한 나무의 가지가 퍼진 수역(樹域)이 100~200평을 차지
부처님께 올리는 보시가 큰 은덕으로 돌아오는 것을 상징.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에서 7일 만에 깨닳음.
다시 7일 간 가부좌 끝에 깨달음의 기쁨을 만끽.
그후 석가모니는 다시 무차린다수로 옮겨 7일 명상,
그 다음에는 라자야타나수 아래서 7일을 보내었다.

인도의 옛 경전에는 인도보리수를 반얀나무라 한다.
인도보리수는 주위의 큰 나무를 감아 타고 오르는 성질.
나중에는 그 나무를 옭아매 그 나무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보리수는 줄기에 기근이 생기지 않는다.
보리수의 열매는 새들도 좋아하고 잘 번식이 된다.
그러나, 보리수는 열대 우림에서만 살 수 있는 나무.

우리나라는 온대 지방이라 보리수가 살 수 없다.
앵두 같은 열매가 열리는 보리수는 또 다른 나무.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향나무 목재로 염주를 만든다.
또는 모감주나무 열매로서 108 염주를 만들기도 한다.

향나무는 제사와 상중(喪中)에 사용하는 향재(香材).
향나무는 정신을 맑게 하고 부정을 없앤다는 나무이다.
하여, 고려 말부터 불교에서 유래한 매향의식(埋香儀式)

계곡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 향나무를 묻는 의식
미륵에게 공양함으로서 앞날을 희망이 이루어지길 염원

석가모니 성지에는 지금도 큰 보리수가 살아 있다.
현재도 보리수 아래에는 세계각국 참배객이 붐빈다.
보리수는 인더스 문명 유적지에서도 신령스러운 나무

불교의 삼대성수(三大聖樹) = 사친나무, 보리수, 사라쌍수
마야 부인은 사친이라는 나무 그늘아래에서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가 자라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기에 사라쌍수.

'하여, 우리나라 사찰은 산속에 있는 것일까?'

보리수로 만든 염주(念珠)는 염불할 때 사용된다.
다른 잡념을 없애고 오직 전념 몰두 할 수 있도록
염불의 횟수를 기억하려고 108염주,1000염주를 사용.
인도 불교인 법구의 하나로 수주, 송주, 주주라 한다.

염주는 번뇌를 끊고 수행하는데 도움을 주는 법구.
염주 한 알을 굴릴 때마다 번뇌가 끊어짐을 상징.

또 염주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합일을 의미한다.
인간은 인연으로 얽혀 상대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

염주는 일념 20만 번이면 죽은 후 염마천에 태어나며
백만 번을 채우면 백팔번뇌가 끊어지고 열반에 나아가
최상의 보리를 얻을 것이라는 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

"백팔염주 머리는 석가모니를 상징하며 4개를 네 보살,
6개는 육바라밀, 8개는 팔금강, 28개는 이십팔사를 의미.
또 28개는 28수, 4개는 사대천왕, 2개는 토지신, 18개 지옥,
그리고 마지막 1개는 염주를 가진 제자니라" - 석가모니.

석가모니(붓다)는 2600년전 불교를 전파한 실존인물.
열반한 후 사리는 인도의 8 왕국에서 나누어 가져간다.
각 나라의 왕들은 사리를 보관하기 위해서 탑을 세웠다.

그가 불멸 후 수백년 지나 불교를 받아들인 여러 나라,
스리랑카, 미얀마, 중국, 티벳, 네팔, 한국, 몽고, 일본,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이 전통적인 불교권역.

불교권역은 거의 태평양 연안에 인접한 저지대 국가.
불교 모체는 동아시아 저지대 민족의 내면적 사고방식.
불교권역에서는 수인성 전염병 방지를 위해 화장이 성행.

불경은 석가모니가 불멸 후 500년 뒤 스리랑카에서 처음 발간.
불멸은 화장을 뜻하며 '불멸의 명작'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
한반도의 불교유입은 예수탄생 40년 즈음인 그 무렵인 듯 싶다.

"귀여운 아이들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미워서도 아니었다.
그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불성을 더 사랑했기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열 여섯 살 동갑내기 아름다운 야쇼다라 공주와의 결혼.
13년간 결혼생활을 하며 행복에 빠졌던 그가 선택한 고행.
아들의 출산 소식을 들으며 진리를 찾아 떠난 29세의 태자.
불교는 그로부터 그렇게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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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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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이동 경로를 한마디로 함축한 영화 제목.
한국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영화.
배용균(裵鏞均) 연출. 1981년부터 8년에 걸쳐 제작.

'수도승 내면세계 속에서의 치열한 갈등을 표현.'

우연히 산새 한 마리를 죽인 동자승이 겪는 생사의 고뇌
성불을 위해 속세를 버린 구도자의 갈등이 영화의 줄거리
달마는 6세기 경 인도 승려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약칭이다.

남인도 마드라스 인근 칸치푸람에서 출생했고.
520년 중국 광저우(廣州)에 도착한.. 보리 달마.
그해 10월 선행으로 명망높은 양나라 무제와 만남.

'선한 행위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달마.

황제를 당혹하게 했던 보리달마는 뤄양으로 가서
소림사(少林寺) 동굴에서 벽을 향해 9년 간 좌선.

보리달마는 부처로부터 28번째 조사(祖師).
중국 선종(禪宗)에서는 초조(初祖)로 간주.

보리달마는 선(禪)을 가르쳤기에 선종이라 한다.
그의 선 사상은 이(理)로부터 들어가는 것(理入).
행(行)으로부터 들어가는 것(行入)의 2가지로 귀결.

일상에서 여러가지 원망과 증오 및 고통과 번뇌
모두 자신의 전생 및 과거 업보에서 비롯된 결과
사람은 인연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게 된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업보의 인연에 의한 인연
그 인연이 다하면 모두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

중생이 모두 본래 청정하다고 여기는 이법(理法)
이법에 맞도록 쉼 없이 6바라밀(六波羅密)을 수행.
6바라밀을 닦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무소유를 추구.
끊임없이 수행하면서 수행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강조.

그의 가르침이 이처럼 비교적 뚜렷한 반면
그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설화적이다.

'그에 관한 일화 중에 차에 관한 이야기.'

선정 도중 잠든 그는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낸다.
그런데 그 눈꺼풀이 땅에 떨어지자 자라난 차나무.
그것이 최초의 차나무가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하여, 선사(禪師)들이 선정 중에 깨어 있기 위해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전통적인 근거를 알려준다.

달마는 '요가'를 선사들에게 최초로 전파한 인물.
채식만 하는 구도자의 단명을 안타깝게 여긴 달마.
참선하면서도 구도자가 운동할 수 있는 요가를 개발.

원래, 요가는 동남아 저지대 민족으로부터 비롯.
제 4빙하기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터득한 생존비법.
하여, 요가는 석가모니 탄생 전 불교의 근원적인 모체.

마사지 지압 경락 요가 등
제 4 빙하기를 극복한 비법.

지리산은 문수보살을 섬기는 불교의 성역이다.
마야부인, 천왕성모, 성도성모, 위숙왕후 포함.
원래, 고대사회로부터 지리산 여신은 마고 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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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 탄생을 경배한 동방박사 3人도..'마고'.
원래 4 人이 함께 떠났는데 중도에 뒤처진 알 타반
어려운 사람을 돕느라고 함께 경배하지 못하게 된다.

그후 예수가 있는 곳을 수소문해 찾아가면 이미 떠난 후.
그동안 건강과 재물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 다 쓴 알 타반.
그 무렵에야 알타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처음 만난다.

아무 것도 예수에게 드릴 선물이 없어
십자가 아래 무릎꿇고 그 발에 입맞춤.

그 순간 알타반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는.. 손길.
알 타반이 따듯한 주님의 품에 안기는 순간이다.
불교 역시 그 무렵 활성화 되기 시작한 것 같다.

동방박사 3 사람은 아라비아에서 온 마고이 3人.
마고이 = 마술사, 해몽가, 점성술가, 예언가 등.
마태복음에서 고귀한 신분을 지닌 선한 자로 묘사

3 박사의 이름은 "발다살", "메키오르", "가스파르"
아기 예수에게 바친 예물은 황금, 유향, 몰약이었다

불교와 기독교는 그 근본 뿌리가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천주교의 마리아는 불교에서의 문수보살 신앙과 공통점.

불교의 상징 卍., 천주교 기독교의 상징 十.,서로 유사한 점.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유적지

미얀마 바간은 세계 3대 불교 유적지.

 

11세기와 13세기에 5000 사원이 지어졌다.

몽고침입 후 쇠퇴해 2500 사원이 남아있다.

 

 

 

 

 

틸로민로사원.

 

 

 

 

아난다사원 주변

 

 

 

 아난다사원

 

 

 

 

아난다 사원 내부의 불상.

 

 

 

 

 

 

 

 

 

 

타바라문 옆., 톤발라 상.

 

 

 

 

마하보디사원

 

 

 

아예야와디 강변., 부빠야 사원.

 

 

아예야와디강변

 

 

고도빨린사원

 

 

 

밍카바지역 마누하사원 내부.

 

 

 

 

 

 

마누하사원 와불상.

 

 

 

 

 

미얀마에서 보기힘든., 벽돌 불상

 

 

로카난다사원

 

 

 

 

 

로카난다사원 옆 강변

 

 

 

 

 

 

담마야지카파고다.

 

 

 

 

 

 

 

 

 

담마얀지사원.

 

 

 

왕이 되기 위해서리 아버지와 형을 암살

왕이 되어 이 사원을 짓던 도중에 암살당해

미얀마 역사상 가장 나쁜 왕으로 손꼽히기에

후세 사람들이 복구를 하지 않았다는 사원이다.

 

 

 

 

 

담마얀지 사원의 내부의 모습....약간 습하고 이상한 냄새.

 

 

탓비뉴 사원.

 

 

 

쉐산도빠야~~석양.

 

 

 

 

 

 

 

 

 

 

 

 

 

 

 

 

 

 

 

 

 

미얀마 민속악기.

 

 

 

 

 

불교.



BC 6세기말에서 4세기초 동북 인도에서 창시된 종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
19세기 후반 서양세계에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rtha)에 의해 창시
'부처'(Buddha 佛陀),란 즉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칭호.
불교는 기본적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는 종교.


BC 6세기 인도의 브라만교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었다.
BC 1500년경 인도 원주민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아리아인
4성 계급(vara) 제도를 중심으로 한 사회질서를 구축했다.

브라만교는 4계급 중 가장 신성한 사제계급이 브라만
베다라는 성전에 근거한 다신(多神) 신앙을 지닌 종교.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중요시하고 계급 간 의무를 강조.

브라만교는 주로 인도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BC 6~7세기 갠지스강따라 북인도 중부와 동부로 전파.

농업생산을 기반으로 도시가 생겨나고 상공업이 발달
코살라와 마가다 같은 강력한 군주국가들이 출현한다.
이에 따라 브라만교는 약화되면서 새로운 종교를 요구

이때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니간타 나타푸타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가 새로운 길을 제시.

석가모니 본래 이름은 싯다르타(Siddhrtha)
석가족 출신 성자라 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족은 지금 네팔과 인도국경 부근 작은 왕국

석가는 BC 560년경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출생.
야소다라와 결혼 아들까지 두었으나 29세 나이에 출가
마가다국에 가서 각종 명상법을 배우고 선정(禪定) 체험

극심한 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으려는 노력도 했지만
몸만 쇠약해지고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고행을 포기.
수자타라는 처녀가 공양하는 우유죽을 먹고 몸을 회복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하고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의 수행자들은 그가 고행을 포기하자 그를 떠났고,
그는 홀로 보리수 밑에서 선정 도중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부모와 재회하고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고,
종형제 '데바닷타' '아난다'를 제자로서 받아들였다.
또한 그의 이모도 첫 비구니(比丘尼)로서 받아 들인다.

35세 때 성도(成道)한 후 입적하기까지 45년 동안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했다.
80세에 쿠시나가라로 가는 길에 병을 얻어 반열반

죽음을 앞두고 석존은 승가의 앞날을 염려하여 많은 유언
자신이 남긴 법과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할 것을 권고.

석존의 사후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고
유골은 중인도의 8 부족들에 의해 분배
각기 부족마다 사리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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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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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 후한 시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활발한 교역을 했다.
남북조시대(420~581)를 통해 북조에서는 융성

수(隋)에 의해 통일(589)되자 천태종(天台宗) 등장
당조(唐朝)에 현장법사(596~664)가 유식사상을 종합
현장의 법상종은 화엄종 새 종파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천태 법상 화엄에 이르러 인도를 능가한 중국 불교

선불교는 선정(禪定) 실천을 중시하는 불교로서
5세기 말 인도승려 보리달마에 의해 시작되었다.
선정(禪定) 불교는 송대 이후 중국 불교의 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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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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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전래된 것은 6세기초 백제를 통해서였다.
552년(긴메이 천황[欽明天皇] 13) 백제 성왕(聖王)
당시 일본 불교의 지식층은 고구려와 백제의 승려들

그중 혜총·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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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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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7세기초 손챈감포 왕 때.
8세기말 인도 승려뿐만 아니라 중국 승려도 포교 활동.
794년경 티베트 특유의 불교를 라마교라 부르기도 한다.

'라마'라는 말은 스승이라는 뜻이다.

티베트 대장경은 14세기 부퇸(1290~1364)에 의해 편찬
14세기 티베트 불교는 매우 세속화되고 도덕적인 타락
그후 '딜라이 라마' 등장으로 밀교 라마교는 정화된다.

달라이 라마 사후 49일 지나 태어난 아이들 중 후계자 물색
다음 달라이 라마는 그 전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보기 때문

제3대 달라이 라마(1543~88)는 몽골을 불교로 개종시켰으며,
제5대 달라이 라마(1617~82)는 티베트를 정치적으로까지 통치
라마교는 티베트 이외에도 몽골·시킴·부탄 등에도 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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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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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4세기 말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앙집권 군주국가로 도약
종래 씨족중심 가치관을 세계적 윤리관으로 대체

고구려 불교는 372년(소수림왕 2)에
중국 전진 왕이 승려 순도와 더불어
불상과 경전을 보내 오면서부터 시작.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 동진(東晉)에서
마라난타라는 승려가 와서 불법을 전했다.

신라는 눌지왕 때(417~458) 불교가 들어왔으나
국가 공인을 받지 못하다가 법흥왕 때 공인(527).

삼국 가운데 불교를 힘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은 신라.

법흥왕의 대를 이은 진흥왕은 백성들의 출가를 허락
스스로 말년에 법운(法雲)이란 법명으로 승가의 일원
왕비도 뒤따랐고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불교왕명시대

왕실은 백정, 마야, 승만 등과 같은 불교이름을 사용

진흥왕은 국가적 사찰인 황룡사를 건축
두 왕자의 이름도 금륜 동륜이라 지어서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대에는 화랑제도도 창시되었는데
화랑도는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김유신을 따르는 무리는 용화향도(龍華香徒)

용화수는 미륵불 출현 때 그 밑에서 성불한 나무

신라의 불교적 애국심 배후에는 원광(圓光)·자장(慈藏)
원광은 고구려가 침범할때 수나라에 군사도움을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작성했고 화랑을 위해 세속오계를 작성.

자장법사는 진골출신의 귀족으로
636년 당에 유학 9년후에 귀국해
대국통(大國統), 승려 총괄 중책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려고 했다.

신라는 8세기말 사회 혼란기에 불교계 침체
이무렵 중국 선불교가 신라에 들어오기 시작
신라 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구산선문(九山禪門)

고려를 세운 왕건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많은 사찰들을 창건.
훈요십조(訓要十條)는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

이조시대 배불정책에 따라 불교는 커다란 타격
많은 승려 환속, 불교종파 통폐합, 승과제도 철폐
백성들의 출가를 금지, 승려들의 도성 출입마저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