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46 ( 박경리. 소설 토지. 평사리. 쌀. 노비. )

donkyhote 2012. 5. 3. 20:31

 

박경리(朴景利)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결혼했으나,
6·25전쟁 때 남편이 납북된 후 딸과 함께 생활했다.
시인 김지하는 그녀의 사위이다.

1970년대 후반에 강원도 원주시로 거처를 옮기고
창작활동에 전념 1994년 8월 대하소설 〈토지〉완결.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 計算〉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黑黑白白)이 〈현대문학〉에 발표

이어 〈현대문학〉에 단편 〈군식구〉·〈전도 剪刀〉·
〈불신시대〉·〈영주와 고양이〉·〈반딧불〉·〈벽지 僻地〉
·〈암흑시대〉 등의 문제작을 계속 발표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단편을 쓰다가
1959년 〈표류도〉(현대문학, 1959. 2~10)를 발표

1963년 단편 14편을 모아 소설집 〈불신시대〉를 펴냄.
〈암흑시대〉가 〈불신시대〉를 잇는 작품임을 암시했다.

두 작품은 여주인공의 형편이나
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 체험과
심적 변화 등의 면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불신시대〉가 종교와 병원을 중점적으로 비판한 반면에
〈암흑시대〉는 무책임하고 경박한 의사와 간호원들의 횡포에 초점.

이어 장편 〈시장과 전장〉(1964)을 발표했는데,
6·25를 소재로 한 각종 소설 유형을 종합한 듯.
전쟁, 이데올로기 소설, 지식인, 빨치산 소설 등

주인공 '하기훈'을 중심으로 그와 석산(石山) 선생,
그와 장덕산 사이의 갈등은 이데올로기 소설에 가깝고,
제2부만 따로 보면 빨치산 소설에 가까운 성격을 띠고 있다.

그녀 소설에서 중요한 주제는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대표작 〈토지〉에서 최씨 집안의 중심인물이 두 여성인 것
〈김약국의 딸들〉〈시장과 전장〉〈파시 波市〉주요인물도 여성.

〈김약국의 딸들〉에는 한 가정에서 운명과 성격이 다른 딸들
〈파시〉에는 6·25 직후 부산과 통영을 무대로 살아가는 여성들

주로 전쟁 미망인을 등장시켜 악몽같은 전쟁으로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모습을 그린 초기의 작품들을
작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 또는 사소설.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간 쓴 대하소설
1890년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를 배경으로 했다.

이 작품에 등장인물들은 실존인물이 아닌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가공의 인물들이다.

이 작품은 몇몇 제한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고,
'평사리'와 '간도' 주민들 전체를 다 주인공으로 썼다.

작가의 시점이나 화법이 자유롭고 선악관에 의해
인물이나 상황 및 사건을 저울질하지 않는다는 것

유방암 선고와 사위 김지하의 투옥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토지〉의 집필을 계속하여 그녀는 윤씨부인-별당아씨-서희,
그리고 그 자식들 세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인물들을 통해
민중의 삶과 한을 부각시켰고, 이로써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소설집으로 〈표류도〉(1959)·〈김약국의 딸들〉(1962)·
<가을에 온 여인〉(1963)·〈파시〉(1965)·〈박경리단편선〉
(1976)·〈박경리문학전집〉(1979)·〈토지〉(1989) 등이 있다.

1957년 현대문학상, 1959년 내성문학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등을 받았다.


 

 

소설 토지.

 

1969년 8월부터 1994년 8월까지 25년에 걸쳐 쓴 전 5부 16권 소설

구 한말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장구한 민족사의 흐름을 배경으로,

'최 참판' 일가를 중심으로 민족적 수난과 민중들의 삶을 그린 장편 소설

구한말에서 일제 시대, 해방 직후에 이르는 장구한 시간

하동 평사리 작은 마을에서 시작하여 경성과 간도 지방을 잇는

멀고 먼 공간적 역정, 그리고 수없이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이 엮어내는 파란만장한 민족적 삶의 흐름이 감동을 던져준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생존과 긍지를 잃지 않게 해주는

공동체적 삶의 뿌리를 이루는 전통

집안 다스림의 법도, 위아랫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예절,

이웃과 정을 나누면서 각기 그들 존재의 존엄성을 지켜주며

마음의 거리 지키기, 집짓기와 음식 만들기, 사랑의 법도 등

공동체가 모여 살면서 가꾸고 이루어진 생활 방식의 총체.

평사리 마을 사람들이 주고받는 투박하면서도 순수한 대화는

우리 민족 구성원들이 살아온 삶의 역정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그 삶 속에 간직된 고유의 풍속과 생활 습관은 물론,

그 안에서 분출되는 건강한 생명력과 끈질긴 삶의 의지

'한스런 삶'으로 대변되는 민중들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1부>

구한말 안동 평사리 최참판댁의 정신적 지주 윤씨 부인

청상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절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훗날,

동학당의 접주로 사형당한 김개주에게 겁탈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아들 환을 낳고

평생 죄의식 속에 살아간다.

아버지 따라 동학당에 참가한 환

몸을 숨기려 최참판 댁을 찾아든다.

이복형인 최치수의 부인 별당 아씨와의 사랑으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두 남녀는 지리산으로 도망친다.

최치수는 어머니를 감싸고 도는 비밀을 알려고 몸부림친다.

재종형 조준구와 함께 방탕한 생활로 성적 무능력자가 된다.

그는 조준구가 구해 준 총으로

구천과 별당 아씨를 찾기 위해

지리산을 헤메나 결국 실패한다.

별당 아씨는 환의 품속에서 숨을 거두고

환이는 연곡사 우관 스님에게로 돌아간다.

자신의 신분상 제약에 큰 불만을 품고 있던 귀녀

최 참판 댁의 씨를 얻으려 최치수에게 접근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김평산과 음모를 꾸며 임신한다.

귀녀는 칠성이와 강포수에게 몸을 허락하여 씨를 받지만,

최치수가 성불구자 임을 몰랐던 귀녀는 강포수의 출현으로

일이 틀어지자 김평산으로 하여금 최치수를 살해하게 하고

자기 몸의 씨로 최씨 집안의 대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에 의혹을 가진 윤씨 부인은

침모 봉순네의 귀띔으로 귀녀의 자백을 받아낸다.

김평산, 칠성은 함께 죽음으로 죄값을 치룬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평산의 아내 함안댁은 자살

칠성의 아내 임이네는 마을을 떠나게 된다.

한편 용이는 무당의 딸 월선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

그러나 질투심이 많은 아내의 행패로 월선은 떠난다.

그리고 용이는 강청 댁과의 성적 관계가 불능이 된다.

그는 마을로 돌아온 임이네로부터 아들 홍을 얻게 된다.

집안의 기둥을 잃어버린 최 참판 댁에 찾아든 조준구 일가.

조준구는 부인 홍씨와 꼽추인 아들 병수와 함께 들어와 산다.

김평산에게 최치수의 살해를 시사하고 떠났던 조준구.

최참판댁의 재산을 노리지만 윤씨부인에게 저지 당한다.

하지만 마을을 휩쓴 호열자와 흉년으로 인해

윤씨 부인과 김 서방, 침모 봉순네 등이 죽는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조준구 일가는 최참판댁을 차지

할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서희는 어린 나이에 고아신세.

그러나 그녀는 타고난 총명함과 지혜로움으로 위기를 극복

윤씨부인을 닮은 강한 성격으로 조준구 일가와 맞서 나간다.

하지만 서희를 돌보던 수동이 죽고, 노일 전쟁이 터지고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조준구에게 이롭게 돌아간다.

조준구의 행패에 불만이 쌓인 마을 사람들은

의병을 일으켜 최 참판 댁으로 들이치게 된다.

그들은 조준구 내외를 죽이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틈에 서희는 길상으로 하여금 토지 문서를 찾게 하여

일시 힘을 회복하지만 조준구 내외를 죽이는 데 실패한

그들은 고향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서희는 할머니 윤씨 부인이 남겨 준 재물을 지니고

이들과 함께 고향을 버리고 간도로 떠나게 된다.

<2부>

간도 용정촌에 정착한 서희는 가문을 되찾으려는 일념

그녀는 두류(豆類)와 토지 거래에 성공하여 거부가 된다.

그녀는 아버지 친구 이동진의 군자금 요청을 거절하고

친일적인 운흥사 공사에는 기부금을 내며 친일도 불사

그녀는 이동신의 아들 상현을 사모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이루지 못하고 길상과 결혼

그 사이에서 환국과 윤국 두 아들을 얻는다.

길상은 결혼 전에 만났던 옥이네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는 서희와 허물 수 없었던 신분적 벽 때문에 고독을 느끼지만

환의 출현으로 그 비밀을 알게 되고 그와 함께 독립 운동에 투신.

환은 별당 아씨가 죽은 후 의병 활동에 참여한다.

방법론상의 견해차로 윤도집, 지삼만 등과 대립하여

간도로 건너간 그는 길상과 만나 자신의 비밀을 밝힌다.

서희와 길상의 결혼으로 충격을 받은 상현은 서울로 돌아와

서의돈, 임명빈, 황태수 등과 사귀며 일본으로 유학까지 한다.

그러나 길상에 대한 패배감, 아버지 이동진과 가족에 대한 죄책감,

스스로의 무력감 때문에 정신적 방황을 계속한다.

한편, 서희 일행과 헤어지고 기생이 된 봉순은

기화라고 이름을 바꾸고 미모와 소리로 날린다.

그녀는 간도로 건너가 서희, 길상, 고향 사람들을

만나 보기도 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다.

월선, 임이네, 홍이와 함께 용정에 정착한 용이는

월선과 함께 잠시 국밥집을 하지만 임이네의 욕심

그리고, 자신이 장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 그는 홍이를 월선에 남겨 두고 임이네와 함께

영팔이가 정착한 퉁포슬에서 청인의 소작인이 되어

농사를 지으며 겨울에는 벌목꾼으로 일한다.

임이네는 월선 몰래 가로챈 돈을

용정의 불로 모두 잃게 되지만

탐욕은 갈수록 심해진다.

한편 월선은 용이가 떠난 후

홍이와 살지만 암으로 죽는다.

김평산의 아들 거복은 성장 후 김두수로

이름을 바꾸고 일제의 밀정으로 활약한다.

그는 금녀의 옛 애인 윤이병을 미끼로 금녀를 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윤이병을 살해하고 길상을 짝사랑하던 송애를 농락.

귀녀의 아들을 데리고 사라졌던 강포수

그 아들에게 두메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또한 그가 성장하자 교육을 받게 하려고

송장환에게 두메와 돈을 맡기고 떠나간다.

조준구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정한조의 아들 석이는

송관수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고 조준구에게 복수하려

조준구의 하인으로 가장하여 조준구의 집에 잠입한다.

서희는 공 노인을 앞세워,

조준구에게 빼앗긴 재산과

토지 문서를 전부 되찾는다.

<3부> <4, 5부 생략>


평사리.



평사리는 상평과 하평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지금은 상령과 외둔을 합쳐서 평사리라 하고,
하평과 대촌을 합쳐서 봉대리로 행정지명 개편.

평사리는 박경리 대하소설『토지』의 배경무대.
상평마을은 악양들판을 바라보는 산자락에 위치.
돌담길과 어우러진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정겹다.

마치 고향에 온 듯 편안함이 우러나는 상평마을.
구한말엔 악양 들판의 섬진강까지 배가 들어왔다.

상평마을 가는 길목에 높이가 약 27m 되는 팽나무.
이조시대 부사 전천상이 위민정(慰民亭)이라 명명
아직도 마을사람 쉼터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토지는 구한말에서부터 시작해 8·15광복까지,
민족의 일대 혼란기를 담아 내고 있는 대하소설
평사리를 배경무대로 하고 있는 사연은 따로 있다.

박경리의 딸이 탱화 수집차 동행했다가 발견한 평사리
'토지'의 배경무대로 점찍은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평사리는 토지 소설의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먼발치에서 평사리를 스쳐나갔을 뿐
정작 평사리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당시 큰 부잣집 최참판댁이 인근에 있었는데,
역병으로 식솔들을 잃어 추수하지도 못한 채
넓은 들판의 곡식을 버려 두었다는 말을 듣고
토지 소설의 작품 구상에 도움이 되었다 한다.

작가가 당시 전해들은 부잣집은
악양 면소재지에서 2km쯤 떨어진
상신마을의 조부잣집이라고 한다.

150년 전에 지은 집이지만,
네모 돌담 안 대지가 천 평
뒷곁의 대나무 숲, 앞뜰 연못

토지속의 최참판댁과 흡사하다.
평사리가 작품의 무대라 하지만
정작 소설속 평사리와 다른 정감

토지 소설에 등장하는 평사리는 꾸며낸 공간.
그러나, 실화인 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많은 사람을이 문학기행 삼아 그곳을 찾을 만큼.

 

 


쌀.




최참판댁은 지리산 일대의 대표적인 만석꾼 부자
만석(萬石)꾼은 일년에 벼 만섬 가량 수확하는 부자.
쌀은 옛부터 화폐를 대신하는 물물교환의 기본적 잣대.


쌀은 삼국시대 백제에서부터 제일 먼저 대중화.
벼농사의 발달로 빈부 격차가 심화된듯 보인다.
아울러, 막걸리는 벼농사의 소산물로 추정된다.

 

.....,......벼(나락)와 쌀의 어원..............
인도말 '브리히'가 벼, '니바라'가 나락의 어원
인도어 '사리' 퉁구스어 '시라' 우리나라에서 '쌀'

이조 후기 '동이록'에 벼를 '라록'이라 기록
이는 신라시대 관리 급료를 벼로 주었기 때문
신라 봉록이란 말에서 '나록'이 '나락'으로 변천
........................................................

쌀은 동남아 저지대 국가 민족들의 주식.
쌀은 불교처럼 오랜 세월간 동쪽으로 전파
쌀과 불교와는 밀접한 문화적인 관련이 있다.

'즉, 동남아 저지대 민족들의 주식인 쌀.'

쌀 미(米) 한자는 벼이삭을 본뜬 상형문자
八十八로 파자하면 노동집약적인 벼의 특성
(생산하는데 88번의 손질이 필요하다는 뜻).

노동집약 특성 때문에 마을 공동체가 형성
계급사회가 형성되고 빈부격차 발생의 요인
지주층과 소작층의 분화로 노비제도 원동력.

우리나라에서 쌀과 관련된 사건으로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

그해 6월 5일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
구(舊)훈련도감 군병에게 급료로 지급한 쌀
선혜청 고직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고
양도 절반밖에 안되 분노한 병사들이 이에 항거.

쌀은 혁명 폭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한반도 문화의 밑바탕을 형성해 온 원동력.

........벼농사에 관련된 말들...........
못자리는 '볍씨를 뿌려 모를 기르는 곳.'
모는 옮겨심기 위해 가꾸어 기른 어린 벼.

못자리 밖에 난 모는 '벌모’
나중에 쓰려 더 키우는 '덧모'
못자리에 난 어린 잡풀 ‘도사리’

모내기를 위해 모판에서 모를 캐는 일 ‘모찌기’
이 모를 심기좋게 서너 움큼씩 묶은 단은 ‘모춤’
모 심을때 일정한 간격마다 표시를 한 줄을 ‘못줄’

일하다가 잠깐 쉬면서 먹는 음식을 ‘새참’또는‘참밥’
농부가 끼니 밖에 일하면서 때때로 먹는 음식을 ‘곁두리’
논밭에서 김을 맬 때 집에서 가져다가 먹는 밥은 ‘기승밥’

밥먹기 전에 첫술은 떼 귀신에게 바치는 음식‘고수레’
모를 옮겨 심은지 4~5일후 파랗게 생기 띤 상태‘사름’
모내기후, 잡초 ‘김’을 뽑는 일을 ‘김매기(논매기)’

특히, 논에 난 피를 뽑는 일은 ‘피사리’라 하고
벼 이삭이 나오려고 대가 불룩해지는 현상을 ‘배동’
벼가 알이 들 무렵‘배동바지’에 패어난 이삭‘패암’
배동바지와 패암 때 논에 대는 물을 ‘꽃물’이라 한다.

익은 벼를 거두어 타작하는 일은 ‘볏가을’
곡식의 이삭털기‘타작’‘마당질’ ‘바심’
아직 덜 익은 벼를 '풋나락’(남부지방 사투리)

가을에 농작물이 잘되고 못된 상황을 ‘작황(됨새)’
그해 쌀은‘햅쌀’이고 찧기 위해 말리는 벼를 ‘우케’
..................................................................

현재 인류의 주식 중 밀, 쌀, 옥수수가 3대 주종
옥수수 원산지는 아메리카이고 대부분 가축 사료용
옥수수를 제외한다면 밀과 쌀이 세계 주식량 2대 맥

지구 육지가 한 덩어리일 때 벼는 습열대에서 시작
인도대륙은 마다가스카르와 남극에서 9천만년 전 분리
인간은 야생벼를 화전이나 원시적 천수전(天水田)에 재배

기원전 3000년대 양자강 중류에서 하류로
기원전 3000~2400년 용산문화 시대에 발전.
기원전 2000년대 홍수제어(洪水制御)가 시작

주(周) 시대(B.C.1122~255) 말기 철제 농기구
황하 유역에서 대규모 관개공사가 추진되었다.
동주(東周)시대(B.C.255~249)에는 쌀이 주식화.

경남 김해패총 탄화미(炭化米)는 1~2세기 것인듯
충남 부여 부소산 것은 백제말기(1300~1400년 전)

벼는 아프리카, 남아메라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그리고 오세아니아(대양주)의 습지대에 널리 분포
벼의 재배는 고대 인도에서 기원전 1500~2000년경

중국 동남아(말레이지아, 필리핀, 인도네시아)로 파급
재배 기술은 중국에서 발달해 동남아로 전파되었다 한다.
인도, 부탄, 네팔, 미얀마 북서부, 라오스 등을 통해 전파

한반도 벼 재배기술은 중국 대륙으로부터 유래.

황하지역에서 출발해 만주를 거쳐 들어오는 경로,
양자강 하구에서 한반도의 남부로 상륙하는 경로.
일본 규슈를 거쳐 한반도 남단의 김해 지구로 진입

북방설은 산동반도에서 평안도 황해도로 유입설
남방설은 김해와 신라 고분에서 탄화미 출토 근거
벼는 불교처럼 동쪽으로 이동하며 전파된듯 추정된다.

쌀과 벼에 관한 고대 인도의 명칭은 '살리'와 '브리히'
이것이 티베트, 몽고, 만주를 거쳐 우리의 고어인 브살
'브살'은 '베' 또는 벼와 살의 합어(合語)일는지는 모른다.

한편으로 찹쌀의 차는 '차울'(벵골·아샘의 말),
멥쌀의 메는 중국 강남 '미'(粳米갱미)에서 유래
'입쌀'은 '브살'이 '읍쌀 입쌀 닙쌀'로 전와된 것

나락은 곡식 옛말인 낟에서 낟알, 날, 나락으로 변화
또 제삿밥은 '메'이고, 옛말에 진지(밥)를 뫼라 한다.




노비(奴婢)



전근대 사회에 존재했던 최하층 신분의 하나.
오랫동안 가혹한 조건 하에서 살았던 신분층

노(奴)는 남자종, 비(婢)는 여자종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여자를 천시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노(奴)는 어미에 딸린 남종이란 뜻도 있었다.

노비를 사고 팔때 주고 받는 약정서가 노비문서.

 

제483호 지정14년노비문서 (至正十四年奴婢文書)

 

조선 초 노비수는 성종(成宗 1457∼1494)때
전국의 호구가 100만호에 340만 명이며,
노비도 총 150만에 이른 것으로 추산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
공노비 = 공천(公賤)
.................노비의 값......................
조선시대, 노비 값은 말보다도 못했다
1398년 태조에게 올린 보고에 "노비의 값은
비싸봐야 오승포 150필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 값은 4, 5백 필에 이르므로 노비의 값은
남녀 가리지 않고 15~40세까지는 400필,
14살 이하나 41세 이상인 자는 300필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당시에는
말 1마리와 노비 10명을 바꿨다.

임진왜란 때 말 1마리가 은돈 10냥이니
노비 1명이 은돈 1냥에 불과했던 것이다.
19세기 동학농민운동 때도 소 1마리와
노비 5명(예쁜 계집종 1명 포함)을 바꿨다
여자 종이 남자 종보다 비싼 이유는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주인 소유.

주인은 사노비를 죽일 경우 관청에 보고
나머지는 어떤 형벌도 가할 수 있었으며,
노비는 주인을 관청에 고발할 수 없었고,
고발할 경우는 노비가 교살(絞殺)되었다.
..............................................................

 

노비를 소유한 사람이 그 운명을 좌지우지

생사여탈권까지를 인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사형(私刑)으로 생사를 좌우한 때가 있었다.

노비란 같은 사람이면서도 계급이 낮아서

정상적인 인격체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여

보수도 없이 그저 간신히 먹고 사는데 만족

 

대대로 이어 주인으로 모시는 집안의 종복

 

노비는 원시 공동체사회의 붕괴 과정에서 발생
적대적 집단 또는 전쟁 포로를 노예로 부린 것.
고조선의 범금팔조(犯禁八條)에 있는 노비 규정.

물품을 훔친 자는 그 피해자 집의 노비로 삼는다
그 신분에서 벗어나려면 막대한 돈을 물어야 된다
부여의 법률에서도 살인자의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삼국시대에는 중범죄자 채무자 극빈자가 노비로 전락
그러나 구체적인 노비가 존재한 시기는 고려시대 이후.
노비의 증가는 집권층에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이조시대 노비는 고려 때처럼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
공노비는 의무부담이 선상 또는 납공 2가지로 구분된다.

선상은 일정기간 관아에서 신역을 제공하는 것,
납공은 신공(身貢)으로서 면포 등을 상납하는 것

한편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된다.
솔거노비는 상전 가족의 일원으로 생활하는 하인
인격과 몸까지 모두 상전의 소유물로 간주되었다.

외거노비는 상전으로부터 독립된 가호와 가계를 유지
행동의 제한을 크게 받지 않는 등 그 예속도에서 차이
그대신 상전에게 매년 신공 또는 소작료를 받쳐야 했다.

노비는 사회적·법률적으로 극히 낮은 처지였다.

초기에 노비는 상전에게 살해되거나 순장되기도 했다.
즉 상전이 노비를 지배했고 생살여탈권도 존재했던 것.

고려 이조시대 부모의 어느 한쪽이 노비인 경우
그 자손은 대대로 노비신분으로 규정되는 세전법
양천제 하에서 노비에서 면제는 원천적으로 차단

그러나 16세기 이후 양인으로 신분상승도 가능했다.
1801년(순조 1) 6만 6,067구 공노비 혁파가 있었다.
1894년(고종 20) 갑오개혁으로 공,사노비제가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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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노비는 사대부 가문 사유재산이었다.
노비는 신분제 사회의 최하층 집단으로 흔히 종.
노비 제도는 전쟁포로, 채무, 형벌에 의해 생겼다.

이조시대 외국에서의 이민 또는 귀화한 유민,

이조시대에 잦은 사화로 인한 역적 가문의 후손.
신분상 사회혼란을 막으려 삼족을 멸하기도 했다.
이조 때 노비 신분은 대를 이어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이조시대 노비는 국가나 개인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조세 부담이나 국방 의무는 없었고 주인에게만 복종
주인을 위해 각종 신역과 노동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국가 소속의 공노비는 소속된 관아에서 일했고
16에서 60세까지 1년에 6개월간 육체노동 의무
이조 후기로 갈수록 노동력 제공보다 면포 납부

노비는 대부분 농업을 생업으로 하였으므로
6개월간 노동력을 빼앗기면 노비 가정은 파탄.
노비의 경제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면포 대납제도.

'노비가 돈을 벌어 국가에 바칠 포(布)를 마련.'

따라서, 노비들은 양인 신분으로 신분적인 상승
경제적인 여건의 개선을 가능하게 했던 제도였다.

사노비는 국가에서 통제할 수 없는 사대부 소유믈
이조 초기에는 국가에 대한 권리도 의무도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자 사노비에게도 군역이 부과.

사노비에게 군역이 부과된 시기는 속오군 설치 이후.
속오군은 양인도 있었으나 거의 노비로 이루어진 군대.
사노비는 군대 업무는 물론 쌀과 포까지 납부하게 된다.

사노비는 사대부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상태에서
또 다시 군역을 바쳐야 했기에 공노비에 비해 불리했다.
임진왜란 국가 위기에서는 노비 신분제도의 폐단을 보완.

노비라도 국가 유공자는 양인으로 신분을 격상하고
관리로 임용될 신분상승 기회가 일시적으로 주어진다.
하여, 농민 노비 기생 중 천민 계층이 목숨걸고 싸웠다.

'그러나, 이조는 엄격한 신분제도로 운영된 사회.'

노비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해도
양인이 되어 하급직 벼슬 이상의 신분상승이 불가능했다.
양반층이 고위 관직을 장악했기에 움치고 뛸 곳이 없었다.

노비는 사회적으로 출세가 불가능했고 대대손손 노비일뿐.
여자 노비 자식은 아버지 신분과 관계없이 노비가 된 폐단.

따라서 어릴 때 주인집 자식과 함께 놀던 노비의 자식들
성장하며 겪는 정신적 갈등은 육체적 고통보다 컸던 폐단.

노비에게는 결혼이란 말보다 동거란 말이 합당했던 폐단.
혼례를 치룰 수도 없고 주인이 혼례를 치뤄줄 리도 만무.
단 둘이 보름달 달빛 아래 정한수 한그릇 떠놓고 혼례식.

노비 주인들은 노비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여자 노비를 양인이나 사노비와 결합시켰다.

만일 주인이 노비를 첩으로 삼는다 해도 그 자식은 노비.
노비는 주인 의지에 따라 한 지붕 가족조차 될 수 없었다.
노비는 노동력 만큼 배부르게 식사를 하기조차도 어려웠다.

노비는 옷을 제대로 입기도 힘들고 살림장만도 어려웠다.
좋은 가재도구를 장만해도 수탈 당해 개인 재산이 없었다.
집안살림이라고는 의식주에 관계된 것을 빼고 거의 없었다.

게다가 농사일 외에도 주인집의 모든 잡일을 맡았으므로
어른은 물론 아이까지 나무를 하거나 물을 길어와야 했다.

노비신분 굴레에서 만족감을 찾고 사는 경우는 소수.
하여, 이조 후기로 갈수록 도망치는 노비가 늘어갔다.
좋은 주인을 만나 인간 대접을 받는 노비는 드문 때문.

훌륭한 주인도 노비 신분을 벗어나게 해주지는 않았다.
하여, 이조시대 노비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노비가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깊은 산속이나 외딴 섬.


< 노비의 세습제도. >

노비제도 폐단을 보완한 것이 이조 말 양인제도.
노비가 많은 재산을 국가에 바쳐 양인이 된 경우.
국가 공로자가 되어 노비 신분이 수직상승되는 경우

그러나, 대부분의 노비는 물건과 같은 재산으로 취급
재산 분배에 따라 언제든 가족과도 헤어질 수 있었다.

설령 노비가 돈을 바치고 신분을 벗어났다고 해도
옛주인들은 2~3번에 걸쳐 노비에게 몸 값을 요구.
이미 문서 상 노비가 아니어도 옛 주인이 주인행세.

따라서, 노비를 면했어도 양인 대접 받기가 어려웠다.
사회적 관행 상 양반은 양반이고 노비는 여전히 노비.
노비는 개인 재산이라 소유자 폭력에 무방비 상태였다.

물론 노비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일은 국법으로 금지.

문제는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
한번 노비가 되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노비는 주인이 죄를 범하면 체벌까지도 대신 받았다.

'이조 노비 세습 불합리성을 지적한, 성호 이익.'

“우리나라의 노비법은 천하고금에 없는 법으로
한 번 노비가 되면 백세 토록 고역을 면치못한다.

노비 제도 폐지가 어려우면
노비 매매 만이라도 금지하고
노비 자손의 신분 세습을 금하라”

이조 지식층들도 점진적인 노비제의 폐지를 주장했다.
국가이익과 결부된 주장이라 점차 노비의 양인화 정책
이조 후기로 갈수록 노비 숫자는 점점 더 줄게 되었다.


< 자유를 위하여..>

노비신분에서 해방되는 지름길은 도망가는 것이었다.
변방의 섬이나 깊은 산속 등 인간의 발자취가 드문 곳.
도망은 개인보다 한가족 전체가 야반도주하는 형태였다.

노비는 도망을 가서도 생업을 마련해야 했으므로
여러 방법으로 그 지역에서 생활의 터전을 닦았다.
소극적 방법으론 세도가나 관가에 몸을 맡기는 것.

주인이 찾아와도 노비를 잡아갈 수 없는 공권력.
노비가 가족을 남겨둔채 도망가는 경우에는 승려.
반면 적극적으로 번 돈을 내고 양인 신분을 샀다.

노비가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호적에서 빠지거나
국가 보충대와 같은 특수 병종에 자원하기도 했다.

도망간 노비를 국가에서 법으로 보호하기도 했다.
노비 양인화는 국가 입장에서 새로운 조세 수입원.

노비의 사적인 형벌을 가하지 못하게 하여
노비의 권익이 점진적으로 개선되기도 했다.


< 이조시대 노비 신분정책 >.

노비가 양인이 되었어도 노비 대우를 받던 이조 말.
이조는 적극적으로 노비를 양인화하는 정책을 추진.
양인 숫자가 늘어날수록 정부 조세수입이 많기 때문

이조는 공노비 뿐만 아니라 사노비도 적극 양인화
기존 노비종모법(從母法)을 종량법(從良法)으로 전환

종모법은 모친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법.
반면, 종량법은 모친이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 신분.

이조 조정의 적극적인 노비 양인화 정책에 의해
노비 중에는 어느 정도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어
양인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는 노비도 있었다.

농업 경영 변화, 상공업 발달, 사회 경제적 변화

노비들은 주인 토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토지를 빌려 재산을 증식.

노비는 신분만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을뿐
경제적으로는 독립하여 독자적인 경제활동.

노비제가 완화될 수 있던 가장 큰 배경은
중인과 서얼 등의 신분 해방운동 때문이다.

종래에는 양반 지배층만이 관직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츰 중인 계층이 차츰 하위직 관직에 진출
노비들의 신분 해방도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이 마련.

결국 이조는 노비 신분제도를 전면 폐지하게 된다.

공노비를 1801년, 사노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
이조 말기는 대지주 계층과 소작인으로 신분이 나뉜다.

대지주 착취로 살기 어려워진 소작인 농민들
노비제도 폐지로 노동력을 잃어 몰락한 양반들.

몰락한 지식인 계층 양반들
살기 어려워진 소작 농민들.
이조 말 사회 혼란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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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해방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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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원년 정월 을사일, 왕이 글을 내렸다.

 

"우리 나라 내수사와 각 관청이

노비를 소유하고 물려주는 것은

기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

임금이 백성을 볼 때는 하나같이 적자.

 

'노'이니 '비'이니

구분하는 것이

어찌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는 뜻이겠는가?

 

왕실 노비 3만 6974명과

(중앙)관청 노비 2만 9093명을

양민이 되도록 허락하라.

 

승정원에 명을 내려 노비 문서를 모아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