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144 ( 불교 탄압. 교단 통폐합. 폐불정책. 춘화. )

donkyhote 2012. 5. 3. 20:02

불교 탄압.



이조시대에서 가장 불교를 탄압했던., 성종
유생들이 정업원 불상을 태워도 처벌 안했다.
부녀자 사찰 출입금지, 사대부 여자 출가 엄금

사찰 창건 중창금지, 초파일 연등도 금지

이조시대 불교는 태종과 세종 대에 위축되었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되어
세조 재위 14년간 불교 진흥책이 실시되어 융성

수양대군 때 신미(信眉)와 수미(守眉) 고승과 두터운 친교
"불교는 유교의 도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하늘 땅과 같다"
어머니가 별세하자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한글로 발간

조카 단종을 폐위한 인간적 번민을 씻기 위해
더욱 불교를 숭상해 '조선불교대호왕'의 존칭.
그후 성종 대 신하들 권한이 커지며 불교 탄압.

이조 초 왕실의 신앙적 중심이었던 내불당(內佛堂)
성종 원년 궁밖으로 옮기고 성안 염불소를 엄금한다.
이후 계속적으로 불교 신행을 제한하는 정책들을 실시

그 결과 성안의 비구니가 거주하는 사찰이 철거되고,
부녀자가 절에 가는 것과 사대부 여자들 출가가 금지
이런 조치들은 세조의 흥불 정책을 위축시키려는 정책.

성종은 자신의 나이 20세가 되던 즉위 7년부터 친국
성종의 친정으로 배불을 막던 두 대비의 영향력 소멸.
유생과 대신들 주장대로 배불정책이 진행되어 불교탄압

성종은 태조 이래 왕의 탄일축수재(誕日祝壽齋) 금지
성종 9년 도성 내에서 사월 초파일 연등을 금지시켰다.

성종이 도성 안 비구니 사찰들을 철거할 때
인수대비의 보호로 정업원(淨業院)만은 무사

그후 인수대비는 조성한 불상을 정업원에 안치
성균관 유생들이 정업원 불상을 태워버리는 사건.
인수대비가 유생들을 처벌할 것을 아들 성종에게 청

성종은 유교적 이념 위에 국가를 통치하고자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어 불교를 배척

이조 억불정책으로 우리나라 고승에 관한 기록은 드물다.
그반면, 이조의 숭불정책으로 유교에 관련된 기록은 많다.
무학대사는 이조 불교의 근원이라고도 할수 있는 고승이다.

'지리산 일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조 억불정책.'

지리산을 이해하려면 '이조 불교'에 관해 알아야 할듯.
수많은 지리산의 사찰들은 언제 어떤 이유로 사라진걸까?
이조시대 사찰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산속으로 숨은걸까?

무학, 사명대사, 초의, 경허로 이어진.. 이조 불교.

1392년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 제34대 공양왕을 폐위
구데타로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성계는 명(明)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정책.
일본과 여진족을 견제하려 주변국과 우호정책.
농본주의(農本主義) 유학장려와 함께 억불정책

이들 3대정책 중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숭유억불 정책'
조선 건국 초 11개 불교종파를 태종 때 7개 종파로 통합
세종대왕 시기에는 선(禪), 교(敎) 두 종교로 통합하였다.

왕과 왕실 내부에서는 여전히 불교를 믿었고,
제 9 대 성종 때까지 공인 종교로서 인정했다.

그러나, 연산군과 중종을 거치며 과거에서 승과를 폐지
승려로서의 등용의 길을 막고 양종 종단마저 없애버렸고
심지어는 사찰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폐찰.

승려들을 강제 환속시켜 관노와 궁방비(宮房婢)로 삼는 등
정책적으로 불교탄압을 위한 패륜적인 행위가 극에 달했다.
관노란 관의 노비란 뜻이고 '궁방비'란 궁궐 또눈 왕실 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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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비구니들은 몸을 지키려 깊은 산속으로 피신.
하늘 아래 첫동네 나무꾼과 선녀 전설 속 여주인공.
'형제봉의 요정' 벽소령 부자바위 전설을 잉태한 듯.

비구니들은 무당 또는 '남원 진주'의 관기가 된듯.

지리산 일대의 이조때 사라진 사찰들과 폐찰들.
고려 때 영원사에 기대어 산 삼정마을의 주민들.
이조의 억불정책에 의해 폐허로 변한 듯 추정된다.

'옥황상제의 시녀' 선녀들의 전설만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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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탄압이 극에 달할 무렵 인종이 즉위 1년 만에 서거
뒤를 이어 제13대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1545년 어린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실권 왕후는 경기도 광주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하여
주지에 보우를 임명하고 양주 봉선사를 교종 본사로 하여
주지에 '수진'을 임명해 양종, 승과, 도첩제도 부활시켰다.

그러나, 명종 21년(서기 1565) 문정왕후가 돌아가자
유학자들은 왕후 신임을 받던 보우를 주살하라고 상소
명종은 어머니의 신임을 생각해 제주도로 귀양 보냈으나

결국 보우는 제주목사에 의해서 사살되었고
이듬해 양종 승과 도첩제도는 폐지되고 만다.
승려 지위가 땅에 떨어지자 산속에 숨은 사찰.

명종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제14대 선조(1567~1608년)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같은 인재를 중용하며 유학을 장려
불교를 심하게 탄압하지 않았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
선조는 의주로 피신하며 서산대사에게 국난 타개를 부탁한다.

서산대사는 당시 73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전국 사찰에 격문을 발송해 침략자 타도를 호소
전국 각지에서 승군이 일어나 왜적들과 싸워 공로.

이때 승군을 통솔하는 승려에게 도총섭이나 부총섭 지위
후방에서 승려를 소집훈련 동원하는 승려는 총섭의 칭호.

임진왜란후 선조는 도총섭 사명대사에게 재상을 당부
사명은 사양하고 통신사로 일본에 가 포로송환에 기여.

이조의 불교정책은 평상시에는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
국란 위기때마다 승군이 필요할 때는 강제 동원령 선포.

구한말 고종 35년(서기 1897년) 법회와 포교활동을 허용
승려지위도 인정되었으나 한일합방으로 모든 것은 물거품.




교단 통폐합.



이조시대 불교 교단은 사찰과 종단이 통폐합되었고
국가가 인재등용 승과 등용문 과거시험도 폐지된다.

국사(國師)와 왕사(王師)제도를 없애버리고
능을 관리하던 능사(陵寺) 제도도 금지하고
승려들 도성출입마저 통제 당하는 온갖 수난

산승불교(山僧佛敎)로 겨우 명맥을 유지.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국란에서 목숨걸고 싸웠고
남한산성 축성, 경복궁 건축 역사(役事) 때 강제노역.


1) '무파 무종(無派無宗)'의 수행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모두 11개 종파의 종단
태종 때 7개, 세종대왕 때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
사찰 수까지 제한하여 선종 18사(寺)와 교종 18사
36개의 사찰로 통폐합되고, 연산군 이후 무파무종.

산승교단(山僧敎團)으로 전락하게 된 불교.

산속으로 쫓겨나 종파와 종단 구분도 없는 불교.
간경방과 참선방, 염불방 삼문수업(三門修業) 수행.
조계종 임제종 계통 '휴정' '부휴' 선종만 불교의 맥.


2) 이판승과 사판승

천대와 멸시 속에 수많은 사찰과 암자는 문닫을 위기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불교를 지킨 이판승
사찰 재산을 지키며 폐찰을 막은 승려들을 가리켜 사판승

'이판사판'이란 고사숙어는 이판승 사판승에서 유래.


3) 승직과 승계

조선 초 승직과 승계는 고려시대와 같이 국가가 관장
국사와 왕사 제도를 두고 있었으나 태종 5년 폐지하고
도첩제로 통합된 7개 종파에 한해 3년에 1회 승과 실시

세종대왕 때에는 선교 양종에 한해 3년에 1회씩 승과 실시
종파 별로 30명씩 선발해 대선(大選)이란 승계를 부여했다.

제14대 선조 이후에는 승계제도가 승직제도로 변경
서산대사 휴정은 임진왜란 때 팔도 도총섭으로 임명
전국 승려들의 통수권자로서는 사명대사와 벽암선사

훗날 석왕사, 법주사, 유점사, 해인사 주지 = 총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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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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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서 조선초까지 불교는 모두 11개의 종단
각 종단마다 많은 업적을 남긴 고승 대덕들이 배출
이조 후반 억불정책과 한일합방 후 역사 말살 정책.

그로 인해 이조시대에 불교 서적이 많이 사라졌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승들에 관한 기록도 미미하다.

이조시대 대표적인 우리나라 고승을 꼽는다면 무학.

그러나, 무학에 관한 기록 역시 미미.

무학대사 자초, 매월당 설잠. 벽송 지엄.

부용 영관, 허응당, 서산, 사명, 초의. 경허.

9 고승에 관한 기록 일부 만 전해오고 있다.


1) 무학대사 자초.

고려 제27대 충숙왕 14년(서기 1327)에 출생
조선 제3대 태종 5년(서기 1405) 입적한 스님

경남 합천 출신으로 나이 18세에 출가하여
송광사 소지선사(小止禪師)를 찾아가서 삭발
용문사 혜명국사 법장국사로부터 법을 배웠다.

무학은 부도암(浮圖庵)이 불타고 있는데도 참선
대중으로부터 법을 크게 일으킬 재목이라는 찬사.
묘향산 금강굴 새벽 범종소리에 깨달음을 얻은 무학.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왕사(王師) 책봉을 극구 사양
그해 7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그해 10월 왕사에 책봉
태조 3년(1394) 조선왕조 한양천도는 무학의 영향력 때문이다.


2) 매월당 설잠


설잠(1435~1493년) 속명은 김시습(金時習)이고
자는 열경, 호는 동봉, 청한자, 매월당(梅月堂)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양주 수락사와 경주 용장사 등에 머물러 있었는데
높은 학식 때문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으나
광기 어린 태도와 기이한 행동으로 모두 떠났다 한다.

설잠은 성종 13년(서기 1481) 47세 나이로 환속
결혼했다가 부인이 죽자 스님이 되어 두타행(頭陀行)

성종 25년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입적하였는데,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다시 파보니 살아있을 때와 꼭 같은 모습.

설잠은 단종이 폐위된후 생육신 중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저자.

선조(宣祖)는 이율곡을 시켜서 그의 전기를 쓰게 했고,
중종은 이조판서에 추증, 정조는 청간공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매월당집과 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華經別讚),
화엄일승법계도주(華嚴一乘法界圖註), 조동오위요해 등.


3) 벽송 지엄

(1464~1534년) 속성은 송씨, 호는 야노, 거실은 벽송당.
어려서부터 글 읽고 칼 쓰기를 좋아하고 병서에도 능통
북방 여진족과 싸워 무공을 세웠으나 탄식후 스님이 된다.

'마음을 닦지 못하고 싸움터만 다니는 것은 헛된 이름뿐'

계룡산 조징대사를 찾아가 삭발
연희법사로부터 능엄경을 배웠다.

중종 3년(1508) 금강산 묘길상암(妙吉祥庵)에서
대혜선사와 고봉선사 어록을 통해 선지를 깨닫고
1534년 수국암에서 법화경 방편품을 강의하다 입적.

'제법의 적멸상은 말로는 설명 할 수 없다'

세수 71세, 법랍 44세, '부용영관' '서산대사' 스승
우리나라 불교의 많은 분들이 대부분 스님의 법손들.


4) 부용 영관

(1485~1571년) 호는 은암선자 또는 연선도인 당호는 부용당
경남 사천(현재 : 삼천포)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출가.
덕이산 고행선사 밑에서 3년 동안 공부하다가 삭발하고 승려

신총법사에게는 교학을, 위봉대사에게 선을 배운 뒤
초암을 짓고 9년 동안 좌선으로 용맹 정진했던 스님.

중종 4년 24세에 용문산 조우대사에게 참선을 배우고
청평산 학매선사와 금강산 조운대사에게 법을 배웠으나
만족을 얻지 못하여 미륵봉 내원암에서 9년간 묵언좌선

지리산 벽송지엄(碧松智嚴)을 만나 법(法)을 물어
출가후 20년간 가지고 있던 의문을 풀고 득도했다.

스님은 지엄(智嚴)을 3년 동안 모시다가
스승이 입적하자 스승 대신 대중을 제도
이후 40년 동안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면서
영남과 호남 일대 대종사(大宗師)가 되었다.

선조 4년(서기 1571) 고성 연곡사에서
세수 87세 법랍 7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스님은 태고보우(太古普愚)의 법통을 계승

청허휴정(淸虛休靜)에게 법(法)을 전함으로서
우리나라 불교의 정통적인 법맥을 이었던 고승.


5) 허응당 보우


보우(普雨, 515~1565년)스님의 호는 나암, 또는 허응.
종교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참선과 경학에도 뛰어났다.
15세에 출가하여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에서 삭발

장안사 표훈사 등에서 수행 법력을 얻고 주역도 능통.
그에 관한 기록은 드물고 좋지 못한 행적만 전해온다.

그는 재상 정만종과 친분으로 문정왕후 신임으로
백담사에 있을 때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되어
그동안 폐지되었던 선교, 양종, 승과를 부활시켰다.

승려 자질을 향상시키고 호국정신을 길러
훗날 휴정 유정 같은 승장이 나오게 했다.

그러나 능침에 침입한 유생 황언징을 문정왕후에게 고발.
봉선사와 봉은사에 방을 부쳐 유생들 출입을 금지시키자
성균관 유생들이 일제히 반기를 들고 일어나 보우를 배척.

명종 21년(1565) 문정왕후가 별세하자 제주도 유배.
유생들의 사주를 받은 제주목사 변협이 보우를 살해.
이듬해 양종과 승과도 폐지되어 불교는 또다시 핍박

'승려 지위도 떨어지며 산속으로 숨어든 불교.'


6) 서산대사 휴정

휴정(休靜 1520~1604년) 호는 청허(晴虛), 속성은 최씨
평남 안주 출신으로 묘향산에서 오랫동안 살아 서산대사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홀어머니 마저 돌아가시자

그 지방 목사 도움으로 한성으로 가서 12세에 공부를 시작
15세에 진사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숭인장로(崇仁長老)를 만나 21세에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그 뒤 부용영관(芙蓉靈觀)을 만나서 법을 얻고
33세가 되던 해 선과(禪科)에 응시해 급제한 후
36세에 전법사가 되었고 그해 여름 교종판사가 되고
가을에는 선종판사(禪宗判事)의 직을 겸하게 되며
선교 양종을 관장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2년 뒤에 두 가지 판사직을 물러나
금강산, 오대산, 묘향산 명산을 순례.
마음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친 고승.

선조 22년(1588) 그가 지은 시(詩) 한 수 탓에
정여립 사건에 관련되어 제자 사명과 함께 투옥
얼마 후 결백이 드러나자 선조는 왕명으로 석방된다.

선조는 오히려 그 시를 칭찬하고 상까지 내렸으며,
대사는 옥에서 풀려나자 산사로 들어가 후학을 지도

선조 26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은 의주로 피난
왜군이 북진을 계속하자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도움을 요청.

서산대사는 73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구국을 위해 팔도의 승군을 모집한다.

그는 제자 사명대사와 5천 승군을 이끌고
평양과 한성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환도후 제자 유정에게 도총섭 자리를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들어가자 선조는 최고 존칭으로 치하.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

대사를 따르는 제자들이 천명이 넘었고
사명(四溟)과 같이 우수한 제자들만 70명.
선조 38년(1604)에 묘향산 원적암에서 운명.

세수 85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는데,
방안에는 21일 동안이나 향기가 가득.

땅 끝 마을 전라남도 해남 대둔사에는
유품인 금란가사와 생전 유물들이 전시.

법조 벽송지엄과 스승 부용영관으로부터 이어받은 선.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주장하면서도 때론 염불을 권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예불의식과 교(敎)를 가르친 독특한 가풍

저서 : 선교석(禪敎釋)과 선교결(禪敎訣), 청허당집(淸虛堂集)


7) 사명대사 유정


(1544~1610년) 속성은 풍천 임씨(任氏),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또는 사명, 탑호는 종봉.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고 경남 밀양사람이다.

어머니가 해산하던 전날 밤 꿈에 황건을 쓴 불상(佛像)
함께 하늘로 올라가 신선에게 절하고 돌아와 낳은 아들.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로부터 유학을 배웠는데,

13세에 밀양 영남루 소년 백일장에서 장원.
황유촌 여헌에게 맹자를 배우다가 삭발 승려.

18세에 승과에 합격한 다음 직지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선조 9년(서기 1575)에 '선종 본사' 봉은사 주지에 임명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서 휴정 휘하에서 공부.

오대산에 있을 때 정여립 사건에 관련된 모함을 받고
서산대사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무고가 밝혀져 석방된다.

유정이 금강산 유점사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 격문을 보고 승군을 조직해 휴정 승군과 합세
그곳 승군의 대장이 되어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우고
개성과 한성의 왜군을 물리치는데도 크게 역할을 하였고,
환도후 영남으로 몰린 왜적까지 소탕 위세를 크게 떨쳤다.

정유재란 때 왜장 가등청정 본거지 울산 서생포를 포위
수 차례 적진을 드나들면서 정세를 탐지한 후 평화회담.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산사로 들어가서 수도생활 하다가
스승의 부음을 듣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으로 가던 도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상경해 일본과 강화를 위한 특사로 파견.

서울을 떠난 것은 선조 38년(1604) 7월이었으나
대마도에서 3개월 지내고 일본 경도 도착은 12월.
왜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경도까지 마중을 나와
대사를 후시미성에 있는 본법사로 영접하고 회담

대사의 인격에 감복해 허리숙여 존경했다고 한다.

일본에 잡혀간 포로 3천 5백명을 데리고 귀국하여
선조가 내린 재상 직위를 사양하고 다시 묘향산 행.


광해군 2년(1610) 세수 67세 그해 8월에 입적하였는데,
왕은 대사에게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약호를 하사.

비문 글씨는 홍길동의 저자 허균이 썼다고 하며,
암자 이름도 스님 약호를 따서 홍제암(弘濟庵).

그 후 제19대 숙종 41년(1715) 표충사에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시고 유물을 전시하고 세웠던 사명당 표충비
갑오동란,한일합방, 6. 25동란 때 땀흘리는 신비한 현상.


8) 초의 선사


초의(草衣 1786~1866년)선사는 조선후기 대선사(大禪師)
자는 중부(中孚), 호는 초의이고 당호는 일지암(一枝庵).
탁류에 휩쓸려 죽을 고비에 스님이 구해주며 출가를 권유

16세에 출가 남평 운흥사에서 민성을 은사로 득도하였고
해남 대둔사 완호선사(玩虎禪師)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24세(1809) 때 스승 완호선사와 가깝게 지낸 다산 문하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3년간 수학하며 추사와 만난다.

말년에 대둔사 동쪽 계곡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년간 다선삼매에 들며 서른 한 수 동다송을 지었다.


9) 경허 선사

(1849~1912년) 법호는 경허(鏡虛)이고 법명 성우(惺牛).
구한말 암울한 시대에 근대선(近代禪)을 중흥시킨 고승.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때 어머니와 관악산

청계사(淸溪寺) 계허스님을 은사로 삭발하고 스님이 되고
타고난 영민함으로 인해 23세 때 동학사(東鶴寺) 강원 강사

31세 여름 옛 스승을 찾아 한양으로 가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으나
온 마을이 돌림병으로 문을 굳게 닫고 있어 부득이
마을 큰나무 밑에서 밤새도록 죽음 위협에 시달리며
문자 속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직접 체험하고
동학사 선방으로 들어가서 용맹정진 수도에 들어갔다.

창문 밑으로는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 구멍을 뚫어 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받쳐놓고서 정진.

'소가 되더라도 고삐 뚫을 콧구멍이 없는 소가 되라'

석 달째 되던 날 그 말뜻이 무엇이냐는 제자의 물음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고 천장암으로 자리를 옮겨 오후(悟後)의 수행.

7년간 오후수행(悟後修行)후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는데,
문둥병 여자와 수개월간 동침하고 여인을 희롱하다가 몰매
술에 취해 법당에 오르기도 하는 등 파격적인 행적을 남겼다.

만년에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과 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른 서당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다.

................
불교 종파.
.................

이조 억불정책으로 강제로 통폐합되었던 불교종파.
오늘날 다시 되살아난 헤일 수 없이 많은 불교 종파.
이조시대 당시 억불정책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

현재, 우리나라 불교 종파는 참 다양하다.
한반도 민속 신앙과 결합한 흔적들도 많다.
특히, 신석기 모계사회 토템과 뒤섞인 흔적.

'불교가 많은 종파로 나뉜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에서 한반도까지의 다양한 유입 경로.
오랜 세월간 다양한 역사적 시대적인 배경.
경전과 불상, 스승과 제자에 따라 형성된 듯.

지리산은 우리나라 불교 종파들의 요람.
불교 종파를 알면 지리산을 이해하기 쉽다.
지리산은 신라 백제 고구려간 불교영역 전쟁.

고려와 이조에 걸쳐 불교와 유교의 종교전쟁.
한반도의 많은 불교 종파간 치열한 영역 다툼.
하여, 우리나라 불교 종파를 여기에 소개한다.

우리나라 역사 상 큰 영향력을 끼친 불교 종파.
지리산을 이해하려면 알고 넘어가야 할듯 싶다.

우리나라 어느 불교 종파도 한 시대를 풍미.
시대적 배경에 따라 되풀이 되어온 흥망성쇄.
현재 융성한 우리나라 불교종파 순서대로 소개.


1.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주불: 석가모니불
종조: 도의국사
소의경전: 금강경(金剛經), 전등법어
총본산: 조계사
주요사찰: 조계사, 불국사, 통도사, 화엄사, 범어사, 수덕사 등


2.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

주불: 석가모니불 
종조: 태고보우국사
소의경전: 금강경, 화엄경
창종연도: 태고보우국사가 원융부를 설립한 1356년 
주요사찰: 선암사, 봉원사, 백련사, 안정사, 태고사외 2952개 사찰


3. 대한불교천태종 [ 大韓佛敎天台宗 ]

주불: 석가모니불
종 조: 중국 천태산 지자대사  
소의경전: 묘법연화경
주요사찰: 구인사, 관문사, 삼광사 외 206개 사찰


4. 대한불교진각종 [ 大韓佛敎眞覺宗 ]

주 불: 비로자나불
종 조: 회당 손규상 대종사
소의경전: 대일경, 금강정경, 대승장엄보왕경, 보리심론, 종조법전
주요사찰: 울릉도 금강원, 최정심인당, 불승심인당, 밀각심인당 등


5. 대한불교관음종 [ 大韓佛敎觀音 ]

주불: 석가모니불
종조: 대각국사(大覺國師)
소의경전: 법화경
주요사찰: 묘각사, 원정사, 성보사 등
가사: 금란황색, 황색


6. 대한불교총화종 [ 大韓佛敎總和宗 ]
주 불: 석가모니불 
종 조: 태고보우국사
소의경전: 화엄경
주요사찰: 전국 950개 사찰
가사: 주황색 금란가사(7조, 25조) 


7. 대한불교보문종 [ 大韓佛敎普門宗 ]

주 불: 석가모니불 
종 조: 마하파사파제
소의경전: 묘법연화경
주요사찰: 보문사외 34개 사찰(해외사찰 4개사)
가사: 밤색(25조)


8. 대한불교원융종

본존불: 석가모니부처님.
소의경전: 금강경(金剛經), 기타 경전.


9. 불교총지종 [ 大韓佛敎總指宗 ]

주불: 비로자나불
종조: 苑淨 大聖師
소의경전: 대일경, 금강정경, 대승장엄보왕경,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주요사찰: 부산 황령산 자석사, 실지사, 만보사 등
가사 - 기로스승 : 은색, 종령 : 황금색, 일반승직 : 보라색


10. 대한불교원효종

주불: 석가모니불
종조: 원효성사
소의경전: 화엄경, 미타경, 금강경, 금강삼매경론,
기실론소, 법화경 종요, 발심수행장,대승법만경
가사: 황색


11. 대한불교법화종 [ 大韓佛敎法華宗 ]

주불: 석가모니불
종조: 의천 대각국사
소의경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주요사찰: 안정사외 1천2백여 사찰
가사: 지황금색, 전통가사 25조(최상)


12. 대한불교조동종

주불: 석가모니불
종조: 동산양개선사(洞山良价禪師)
소의경전: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전등법어
가사: 황장삼, 홍가사 회색장삼, 괴색가사


13. 대한불교염불종 [ 大韓佛敎念佛宗 ]

산중불교에서 도시 대중불교로 생활불교
주요사찰: 대흥사


14. 대한불교법상종 [ 大韓佛敎法相宗 ]

주불: 미륵세존
소의경전: 미륵 삼부경
주요사찰: 개태사(고려 태조 왕건이 건립한 사찰


15. 대한불교진언종 [ 大韓佛敎眞言宗 ]

주불: 비로자나불
종조: 신라 혜통국사
소의경전: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
가사: 밤색(전수, 정사), 노랑(대정사, 대전수) , 주황(대종사)


16. 대한불교용화종 [ 大韓佛敎龍華宗 ]
17. 한국불교법륜종 [ 韓國佛敎法輪宗 ]
18. 대한불교본원종 [ 大韓佛敎本願宗 ]
19. 대한불교일붕선교종
20. 대한불교대승종 [ 大韓佛敎大乘宗 ]
21. 대한불교삼론종 [ 大韓佛敎三論宗 ]
22. 대한불교열반종 [ 大韓佛敎涅槃宗 ]
23. 대한불교미타종
24. 한국불교여래종
25. 대한불교일승종 [ 大韓佛敎一乘宗 ]
26. 대한불교대각종
27. 대한불교미륵종 [ 大韓佛敎彌勒宗 ]
28. 대한불교정토종 [ 大韓佛敎淨土宗 ]
29. 대한불교화엄종 [ 大韓佛敎華嚴宗 ]

■가지산문 [ 迦智山門 ]
■교종 [ 敎宗 ]
■오교구산 [ 五敎九山 ]
■오교양종 [ 五敎兩宗 ]


.................................
인도, 중국, 일본, 티벳 종파
...................................


■경량부 [ 經量部 ] 인도 소승불교의 부파(部派).
■남산종 [ 南山宗 ] 인도불교 소승 20부 중 일파.
■라마교 [ Lamaism , 喇敎(나마교) ]
■선종 [ 禪宗 ]인도 대승불교의 한 학파.
■임제종 [ 臨濟宗 ] 당나라 도선이 세운 율종(律宗).

■남종선 [ 南宗禪 ] 당나라 혜능이 설립한 선종 일파.
■니치렌종 [ 日蓮宗(일련종) ]송 원 시대의 한 종파.
■법안종 [ 法眼宗 ] 중국 선종(禪宗)의 한 파.
■북종선 [ 北宗禪 ] 선종(禪宗)의 한 주류.
■삼론종 [ 三論宗 ] 용수(龍樹)의 《중론(中論)》

■상좌부 [ 上座部 ] 불교종파 중 하나.
■섭론종 [ 攝論宗 ] 중국 불교 13종(宗)의 하나
■십삼종 [ 十三宗 ] 중국불교의 13종파.
■열반종 [ 涅槃宗 ] 중국 불교 13종파 중 하나.
■오가칠종 [ 五家七宗 ]중국 남종선(南宗禪) 제파의 총칭.

■유식학파 [ 唯識學派 ] 중국 불교 선종(禪宗) 5가(家)의 한 파.
■조동종 [ 曹洞宗 ] 중국 오가 칠종(五家七宗) 중 선종(禪宗)의 일파.
■조사선 [ 祖師禪 ] 불교 선종에서 달마(達磨) 계통의 남종선(南宗禪).
■중관파 [ 中觀派 ] 중도(中道)를 지향하는 인도 대승불교의 중요한 학파.
■진언종 [ 眞言宗 ] 중국 밀교를 통해 전래된 일본불교의 한 종파.

■창가학회 [ Soka Gakkai International , 創價學會 ]
■천태종 [ 天台宗 ]중국 수(隋)나라 불교의 한 종파.
■화엄종 [ 華嚴宗 ] 당(唐)나라 때에 성립된 불교의 한 종파.
■황모파 [ Shva ser pa , 黃帽派 ] 라마교의 한 파(派).
■성실종 [ 成實宗 ] 중국에서 성립한 불교 종파의 하나.

■삼계교 [ 三階敎 ] 중국 신행(540∼594)이 일으킨 한 종파.
■임제종삼봉파 [ 臨濟宗三峰派 ] 명대에서 청대 선종의 한 파.
■홍주종 [ 洪州宗 ] 당나라 때 도일이 창시한 선종의 한 종파.
■황교 [ 黃敎 ] 라마교의 한 파.
■홍모파 [ 紅帽派 라마교의 일파. 일본의 불교종파.

■다문부 [ 多聞部 ] 티베트 불교.
■백운종 [ 白雲宗 ]


<기타 불교종파>

■소승불교 [ 小乘佛敎 ]사람들을 인도 해탈을 얻도록 하는 유파(流派).
■상좌불교 [ 上座佛敎 ]석가모니 입적후 18 부파 중 하나인 대승불교.
■남방불교 [ 南方佛敎 ] 남아시아 여러 지역의 불교.
■대승불교 [ 大乘佛敎 ] 대승 교리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종파의 총칭.
■대중부 [ 大衆部 ] 소승불교의 대표적 종파.

■공종 [ 空宗 ] 공(空)사상을 종지(宗旨)로 삼는 불교 종파 통칭.
■구사종 [ 俱舍宗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경전 불교종파.
■금강승 [ 金剛乘 ] 밀교(密敎)의 한 종파인 진언종(眞言宗).
■독자부 [ 犢子部 ] 불교에서 소승(小乘) 20부 중 하나의 부파.
■정토종 [ 淨土宗 ] 아미타불(阿彌陀佛) 정토를 믿는 대승불교 일파.

■율종 [ 律宗 ] 불교에서 율장(律藏)을 근본 종지(宗旨)로 하는 종파.
■법성종 [ 法性宗 ] 중생은 성불할 성품이 있다는 불교의 한 종파.
■계율종 [ 戒律宗 ] 불교 종파의 하나.

폐불정책.

북한산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에 있는., 부왕동 암문

의상봉 1km 삼천리골 2.9km 부왕사지 0.3km 이정표.

백제 개루왕 5년(132년) 성을 최초로 쌓았고

고려 고종 19년(1232년) 몽고와의 전쟁터였다.

부왕동 암문에서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원각사지

원각사지는 임진왜란 당시승병 사령부.
약초 재배지였기에 아직도 희귀 약초가 많다.
서산대사 사명대사가 전국의 승병을 지휘한 곳.

<원각사>는 연산군 시절 황음의 장소였던 곳.
승려를 몰아내고 그곳에 궁중 장악원을 설치하고
3천 기생을 두었는데, 후에 장악원은 계방원(繼芳院)

.......................흥청망청..........................

정사를 뒤로 하고 놀이에 열중했던 연산군.
채홍사 채청사를 파견 팔도 미녀와 말을 뽑고
각 고을에서 미녀와 기생들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 기생 명칭을 운평(運平)으로 바꾸고
마음에 드는 운평은 대궐로 불러 들였다.
궐로 들어간 운평은 신분이 높아지면, 흥청

흥청이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 천과(天科)흥청

그렇지 못한 흥청은 지과(地科) 흥청에 머물렀다.

흥청들을 태운 가마를 벼슬아치들에게 메게한 연산군
자신도 말이 되어 흥청들을 등에 태우고 기어다니거나
반대로 흥청들의 등에 올라 타 말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유부녀도 이쁘다는 말만 들으면 불러다 겁탈하고
심지어 큰 아버지 월산대군의 부인까지 성추행했고
향락에만 빠져들다 중종 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났다.

연산군이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고 해서
백성들 간에는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다.

원래, 흥청(興淸)이란 '맑음을 일으킨다'는 뜻

'나쁜 기운을 씻어 없애다는 의미가 곧 흥청이다.

즉 마음 속에 쌓인 나쁜 기운을 씻어낼 수 있는 제도

고상한 명분까지 애써 부여하며 흥청망청 놀았고
그 결과 자신은 물론 나라마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망청의 '망'은 별 의미가 없이 후렴처럼 붙은 말이다.

따라서 망청은 한자로 표기되지 않는다.
'흥청거린다' '흥청망청한다'는 등의 표현

연산군 시절 흥청망청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

흥청망청으로 인해 민심을 잃었던 연산군

성종의 억불정책에 이어 연산군의 폐불정책.

그는 사냥후 정업원에 들러 비구니까지 겁탈.

결국 중종반정으로 권좌에서 쫓겨난다.

강화도에 유배된지., 2달 만에 운명한다.

가장 불교탄압을 극심하게 했던., 연산군.

원래, 배불숭유 정책으로 출발한 이조.

불교신자 태조, 정종은 소극적인 억제책

태종대에 와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세종은 정치 경제적 이유로 더욱 불교를 탄압

태종 때 남은 7개 종파 마저 선교 양종으로 통합

36개 사찰로 축소하고 사찰토지와 노비를 환수했다.

훗날 세종이 성군으로 칭송 받을 만큼

국가 기틀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실상

불교 탄압을 통해 이루어낸 경제적 기반

중종에 이르러서는 승과제도마저 완전히 철폐하여

선교 양종의 종단마저도 존립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하여, 불교가 쇠퇴하였는데도 절과 승려는 늘어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는 동안 호국불교가 부흥.

휴정과 유정 같은 승려는 고위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정은 아예 승군을 부역에 동원하였다.

산성축성과 수비, 궁궐 건축과 수리, 왕실 무덤 조성

부역에 동원된 승려가 먹을 양식까지도 부담시켰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이 팽배해지자 미륵신앙이 팽배.

낡은 세상을 뒤엎고 새 세상을 연다는 미륵신앙

민중 속에 파고들며 칠성, 무속 민간 신앙과 결합.

이때부터 사찰 내 칠성각, 독성각 전각이 세워졌다.

신도들의 신앙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존 차원

왕실이나 권력자를 유치해 혹독한 세금징수를 피하고

토호들의 수탈과 피폐에서 벗어나려 원당 건축이 성행.

큰 사찰들은 대개 원당 유치를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솟을 삼문, 태극. 봉황 문양 등이 있는 건축물

의성 고운사 만세루,

통도사의 개산조당 ,

고양 보광사 만세루

영정조대에도 배불정책 유지

다만 왕실에 충성을 바쳤거나

호국 불교 사찰만 보호 받았다.

따라서 사찰은 대중적인 모든 신앙들이 종합 수용

영정조 이후 불교의 융성이 어느 정도 용인되었지만

사회 지배사상은 유교였고, 불교는 아녀자 서민들 종교

승려는 여전히 도성 출입이 제한된 불가촉민 신분

조선말 관청이나 양반들의 사찰 수탈은 더욱 심하여

사찰의 농지출토 경작산물에 대한 과중한 세금착취,

부역에 동원되느라 경전 한 줄 못읽는 승려가 수두룩

토호양반들, 특히 서원 같은 곳에서는

사찰에 종 신발 등을 생산하게 하였고,

이들 생산물의 판매 수익금까지도 착복

사찰내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음주가무

착취와 핍박 속에서 산속으로 들어간 사찰.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수도 생활을 하거나,

왕실이나 권력자의 원당이 되는 길 밖에 없었다.

평지 사찰들은 아무때나 불쑥 말 타고 들어왔던 양반들.

온갖 피폐를 끼치던 양반을 누각이라도 세워 막으려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후기 승려는 경전을 익힐 여유가 없었고,

대개 문맹인 까닭에 교리에 어긋나는 일들이 많이 발생했다.

하여, 승려는 8천민에 해당하는 신분으로까지 떨어지게 된다.

춘화(春畵)

억불 정책으로 윤리가 무너진 .,이조 말.

불교는 원래 왕실과 서민, 아녀자들의 종교.

불교가 무너지자 사회 전반적으로 미신이 성행.

그나마 윤리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였던, 불교.

불교가 탄압을 받을수록 윤리 기강이 무너져갔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더욱 무너진 사회기강.

그러한 사실을 대변헤주는 그당시 춘화들.

이조 말 당시 문란해진 성풍속을 보여준다.

남녀 간 성희 장면을 소재로 그린 그림.
춘화도(春花圖) 운우도(雲雨圖)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춘궁화(春宮畵)라고 불리어 왔다.

'남녀교합지상'(男女交合之狀)이나
'남녀상교지형'(男女相交之形)을 묘사
춘흥 성욕촉진 최음(催淫) 목적으로 사용.

채색과 담채를 사용해 그려졌고 판화로도 제작
BC 2세기 경 한대 재상 진평, BC 1세기경 광천왕
그당시 처음 향락 용도의 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

즉, 내밀한 침소에서 '운우의 정'을 돋구는 용도.
사대부 양반도 두루마기 소매에 넣고 다녔다는 춘화.

당대(唐代) 창가(娼家)의 병풍으로 많이 그려졌으며,
원대(元代)에는 몽골풍의 춘화가 유행되기도 했으나,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된 시기는 명대(明代) 후반인듯.

그당시부터 호색문화(好色文化)가 크게 성행한듯.

우리나라에서는 이조 영조 때 현감을 지낸 박양한(朴亮漢)
〈매옹한록 梅翁閑錄〉에 의하면 이조 중기 인조연간(1623~49)
그 기록에 의하면 상아 조각품의 형태로 처음 전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나라 왕실과 밀접했던 관계를 고려하면
고려 말기부터는 왕실 중심으로 사용되었던듯 싶다.

본격적인 춘화 유입은 숙종 때 중국 '춘희자'(春戱磁)
소설류를 비롯한 명대·청대의 호색문화가 들어온 시기.
이조 후기부터 19세기 여항 문인들을 중심으로 도입된듯.

그러나 강한 유교적 윤리의식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성행하지 못했다.

이조 후기 유품들은 대부분 낙관을 하지 않은 작자 미상
일본처럼 성기 부분을 과장했거나 노골적 장면도 드문 편.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가 큰 주류.
김홍도의 〈춘화사계첩 春花四季帖〉(덕원미술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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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전통정원 담장은 왜 높았던 것일까?

이조 후기 성풍속을 그린 김홍도 신윤복의 춘화.
그림의 배경에는 사대부 가문의 후원 안이 대부분
높은 담 안 사대부들의 성애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

'사대부와 기생 의녀들 간의 은밀한 연회.'

당시 계곡가에서의 '운우의 정' 춘화도 많다.
달 밝은 밤에 개울가에서 기녀를 희롱하는 춘화.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몰래 엿보는 그림.

절에 불공드리러 간 여인과 중과의 불륜 장면.
당시 춘화의 단골 배경과 주인공은 사찰과 승려

오늘날의 춘화와 거의 다를 바 없는..수준의 춘화.


이조시대 춘화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춘화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기능.
토우로 제작되거나 동경, 별전 등에 새겨져 활용
남녀 생식기관을 그려 무속 제의적 성격으로 사용.

중국과 일본에서는 화재를 예방하고
좀벌레를 막는 벽사용으로도 쓰였다.

생식행위의 숭배를 통해 생산력을 높이고
왕성한 번식력을 염원했던 음양사상 의식
우주만물 생성의 불변의 법칙인 음양의 결합

불멸을 추구하는 장생 사상과 밀착된 방중술

남녀의 조화로운 성적 교합을 통해 질병을 제거하고
장수를 누리기 위한 이론과 기교적 지침을 담은 방중술
여기에 다양한 성 체위를 도회한 삽화들이 함께 수록된듯.

이러한 그림들은 성 학습의 교본으로 활용되면서
중국과 일본의 춘화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듯 하다.

당대 도교와 밀착되어 신라에 유포된 춘화
통일신라 왕실, 당 유학생을 중심으로 전래

불로장생을 추구했던 방중술은 원대 이후 쾌락용으로 변질
명대 말기 호색문화 발달과 더불어 춘궁화판각본으로 발전
최음 목적인 향락용 춘화들은 한대부터 왕실 주변에서 사용

일반인들에게 까지 보급된 시기는 17세기 전후
채색 판화로 대량 제작되어 널리 유통된듯 싶다.

................김홍도의 운우도첩................
운우는 신농의 세딸 중 하나인 요회를 말하는데,
요염한 미인 그녀는 불행히도 처녀 귀신이 되었고
그녀가 죽은 산중턱 그 자리에는 노란꽃은 피웠다.

가련히 여긴 옥황상제가 그녀를 운우의 신으로 격상.
그녀는 낮에는 구름이 되어 산과 강 물위를 거닐었고,
밤이면 쓸쓸한 욕구불만을 달래며 비로 변한다고 한다.

하여, 남녀지간의 육체적 사랑을 '운우지정'

김홍도의 운우도첩은 도색물이라기보다
음양 사상에 기반한 예술성이 높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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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園 김홍도 ‘月下戀人’..............
달 밝은 밤에 두 남녀가 야외정사를 벌리는 그림.
아름다운 한여름 밤의 풍경화를 그린듯한 뒷 배경
인간의 성을 자연과 결합시킨 외설을 예술로 승화.

상체나 둔부에 비해 다리가 유난히 가녀린 여인.
한 편의 시가 읊어질 듯한., 서정적인 성애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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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申潤福]........................
1758(영조 34)~? 이조시대 후기의 화가.
김홍도와 함께 풍속화의 쌍벽을 이루었다.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夫), 호는 혜원(蕙園).

아버지는 화원(畵員)이었던 한평(漢枰)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단지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벼슬은 첨절제사

그의 풍속화는 소재선택, 구성, 인물 표현 등에서
김홍도의 풍속화와는 현저히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김홍도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생활을 주로 다룬데 반해,
그는 한량과 기녀 중심으로 남녀간 춘의(春意)를 주로 그렸다.

김홍도와의 차이는 인물 묘사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데,
대체로 얼굴이 갸름하고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인물을 묘사.
섬세하고 유연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적절히 사용한 춘화.

그러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전개한 풍속화
석법(石法)이나 준법(法)·수파묘(水波描) 등
간혹 김홍도의 영향인듯한 남녀간의 애정 춘화.

무속(巫俗)이나 주막 서민사회를 그린 풍속화
산수화는 담묵(淡墨)과 담채(淡彩)를 주로 사용

신윤복은 대부분 작품에 짤막한 찬문(贊文)을 쓰고
자신의 관지(款識)와 도인(圖印)을 덧붙이고 있는데,
유교관념이 강했던 시기에 속된 그림을 자기 작품이라
떳떳이 밝히는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사회적 인식

신윤복의 화풍은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쳐
작가 미상 풍속화에 그 화풍을 따른 작품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연당야유도 蓮塘野遊圖〉〈미인도 美人圖〉·
〈단오도 端午圖〉〈무무도 巫舞圖〉〈산궁수진 山窮水盡〉·
〈선유도 船遊圖〉·〈산수도 山水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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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당야유도〉

신윤복 풍속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연못이 있는 뜰에 잘 차려 입은 세 쌍의 남녀
사대부 양반들과 기녀들 간에 풍류를 즐기는듯.

한쪽에는 한 여인이 거문고를 타고 있고,
긴 담뱃대를 물고 음률을 감상하는 남녀

또 한편에는 탕건은 벗어 둔 채 포옹한 남녀.
기생을 무릎 위에 앉혀놓은 남자의 묘한 손놀림
이를 못볼 광경인듯 바라다보는 한 사대부의 모습.

'온갖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남녀 시선들.'

유려한 선과 세련된 색감이 시각적 즐거움을 더해준다.
잔디밭 광경을, 담너머 훔쳐보듯 운치있게 굽은 소나무.
옛 사대부들이 높은 담장을 선호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단오도>

그림 상단에 그네 뛰는 여인을 묘사하여 화면의 초점,
오른쪽 위에서 사각(斜角)으로 흘러내리는 개울과 둔덕
거의 빈틈없는 구도는 신윤복의 그림 중에서도 백미이다.

큰 타래머리 여인들과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반라의 여인들,
그리고, 바위 틈으로 숨어 엿보는 승려의 모습 등을 그렸다.
유려한 색채로 독특한 해학과 에로티시즘의 경지를 그린 그림.

일년에 한번 여인들의 외출이 허용된 이조시대 단오날.
여인들이 개울에서 머리감는 것이 흠이 되지 않았던듯.
단오날은 여인들이 남정네를 유혹하는 날이기도 했던 듯.

'이조 후반 성풍속을 알려주는 신윤복의 단오도.'


<유두탐닉(乳頭耽溺)>

신윤복의 이 그림은 애무하는 장면을 표현했지만,
남녀의 몸이 달아오른 흥분 상태가 강하게 느껴진다.

여성을 애무하고 있는듯한 남성의 은밀한 손길,
여성의 흐트러진 머리가 유난히 강조되어 있다.

두 눈을 지긋이 감은듯한 여성의 두 볼에 핀 홍조.
어떻게 해달라고 호소하듯 늘어뜨린 여인의 두 손.
참을 수 없을 만큼 고조된 춘정을 감추지 못하는 듯.

반쯤 벗겨진 치마 깊숙히 들어가 있는 남성의 왼손
그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야릇한 생각마저 든다.
반쯤 드러난 젖가슴 위에 꽃핀듯 붉게 달아오른 유두.

그 곁에는 방바닥에 그냥 놓여있는 남자의 오른손.
방금 전 어떤 은밀한 일이 벌어졌을지 느끼게 한다.
은밀한 느낌을 부추기는듯 자극하는 신윤복의 춘화.

혜원 신윤복은 궁중의 도화서 화원
춘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중인 출신인 그는 가문에 역관 의관 화원 출신이 많다.
그는 이조사회에서 가장 자유로운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신윤복은 궁에서 쫓겨난 이후, 동가숙 서가숙하며 지냈다.

그러한 그에게 무엇이 가장 절실했을까?

화가로서 살 수 있는 최소한 경제적인 여유.
그의 춘화는 춘정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
하여, 얼마간 엽전을 얻기 위해 춘화를 그린듯

그의 춘화 속에 보이는 화분에 담긴 열대 관엽.
당시 이조사회에서 상당한 부를 누린 계층인듯.
여자는 기녀인듯 하고, 상대는 귀티 나는 젊은이.

할아버지와 그 집안의 노비인듯한 동녀와의 정사.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손으로 입가리고 웃는 동녀.
회춘할 목적으로 동녀를 품었지만 뜻대로 안되는듯.

춘정을 못이겨 문열어 놓은 채 벌리는 애정행각.
중에 대한 해학적인 분위기를 담은 춘화도 보인다.
신윤복은 말년에 명성에 비해 몹시 생활고를 겪은듯.

예술성보다는 부유층 남정네 춘정을 부추기는 춘화.
하여, 그가 사망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은 듯.(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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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정화(春情畵)·춘의화(春意畵)·운우도(雲雨圖)
춘화를 학술적으로 정리한 기록은 보기가 어렵다.

춘화는 일반적으로 남녀간 성애 및 성행위를 묘사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은 그림인 경우가 거의 주류.

춘화의 기원은 기원 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한대(漢代) 한 왕자는 접견실을 춘화 병풍으로 장식
벌거벗은 남녀가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그려놓은 병풍.

한나라 재상 진평(陳平) 역시 향락용으로 춘화를 그렸고,
당대(618~906)에는 기방의 머리 병풍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도교에서는 여러 여성과 성행위가 젊음의 비결로 인식.

'6, 7세기경 인도에서 풍미하던 밀교의 영향인듯.

당대의 많은 문학작품들이 성희를 소재로 집필되고
그 속에 담긴 삽화는 남녀 성관계를 사실적으로 묘사
그림의 채색 또한 화려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13세기 유교정립 후 성애소설과 춘화가 거의 사라진다.

그대신 바늘에 실을 꿰는 여인을 돕는 연인
이처럼 성행위를 은유하는 그림들이 유행한다.

호색문화가 크게 성행했던 명대(明代:1570~1640)
채색목판화 기술 발달로 춘화 보급이 다시금 활발.

이 시대의 유명한 화가인 당인(唐寅)과 구영(仇英)은
여러 체위로 남녀가 성행위를 벌리는 그림을 그렸는데,
훗날, 솜씨가 빼어난 장인들에 의해 채색목판화로 모사

1606년 간행된 《풍류절창(風流絶暢)》은 24개의 채색판화
《춘투도(春鬪圖)》를 모본으로 제작했다고 서문에 밝혔다.

당대 풍류문인들은 춘화첩에 시를 겻들이기도 했으며,
이 화첩은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은밀하게 유통되었다.

성행위를 끝낸 남녀가 침대에서 일어서고 있는 그림.
치마끈을 묶는 여성을 위해 웃도리를 들고 있는 남성
남녀의 성기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 춘화도 발견된다.

성문화가 개방적이었던 명대에 제작된 춘화첩들.
1642년 간행된 채색목판화집 '원앙비보(鴛鴦秘譜)'

청대(淸代)에는 검열에 의해 춘화가 엄격하게 통제
과거에 이미 발간되었던 많은 춘화첩까지 파손되지만
20세기기까지는 신혼부부 성교육 목적의 화첩들이 유통

아편전쟁 기간 중에는 이 춘화첩이 서방에 전해져
새디즘과 같은 변태 성행위를 위한 최음용으로 사용
명대 후반 춘화첩은 우리나라와 욀본에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헤이안시대(794~1185)에 중국 춘화집이 소개
의학 교재로 사용되었을 뿐 춘화로 사용되지 않았다.
에도시대[江戶時代:1615~1867]에도 중국 춘화가 유입

당시 일본춘화는 중국 표현양식을 일본식으로 번안
일본의 춘화는 우키요에 화파의 등장과 더불어 활발
일본에서는 나체가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춘화는 옷을 반쯤 걸친 반라의 상태
그러나 성기가 과장되거나 채색이 화려하다는 점

한반도에서는 고려시대 성행했던 자유연애
속요(俗謠)를 보면 춘화 또한 유통되었을듯.
원 왕실을 통해 고려왕실에 춘화가 전해진듯.

그러나 춘화는 이조후기 성애소설과 더불어 유입
특히 춘화는 18세기부터 일제시대까지 크게 유행
이조 후기 성행한 풍속화 발달과도 무관하지 않다.

특히 당대에는 뛰어난 풍속화가들이 춘화를 제작
이조시대에는 풍속화가 김홍도 신윤복이 춘화 제작.
단원 뒤를 이은 신윤복은 성 심리묘사가 탁월한 작품

마당에서 교미하는 개를 보고 있는 기생과 몸종
단오날 멱을 감는 아낙을 훔쳐보고 있는 수좌승
남녀간의 성행위에 관련된 에로티시즘을 담은 작품

그 후 성행위를 보다 노골적으로 묘사한 춘화첩들.
서명이나 낙관이 없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누가 언제 그린 것인지 확인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