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143 ( 무학대사. 밀교. 탄드라. 미륵신앙. 서동요.)

donkyhote 2012. 5. 3. 19:51

무학대사.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장악하자 이성계는 낙향.
태종 이방원은 부왕을 한양으로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러나, 사신을 부왕이 계신 함흥에 보낼 때마다 함흥차사.
태종은 마침내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내 부왕을 모셔온다.
그만큼 이성계는 무학을 존경했고 인간적으로 신뢰했던 사이.

'그러나, 태종의 눈에 비친 무학은 한낱 평범한 승려.'


무학은 말을 잘 못해 설법에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태조는 무학이 머문 회암사에 가서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에게 계를 받고 무학을 본 따서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기록을 검토해보면,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전문적 지식.
이성계는 계룡산 천도를 검토했지만 당시 무학이 반대했다.
그 뒤 한양이 새로운 도읍 후보지로 떠올랐고 무학도 찬성

무학이 미래의 도성 풍경을 조망한 곳은 북한산 만경대
거기서 한양이 만 가지 모습으로 보인다하여 만경봉이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터로서 살폈기 때문에 국망봉(國望峰).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左靑龍),
목멱산(남산)을 우백호로 삼으려 했지만 정도전이 반대.
북악이 주산이 되었고 무학은 정도전과 함께 일등 공신.

무학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풍수지리학의 대가.
무소유를 실천하고 이조의 500년 미래를 예언한 고승이다.
무학의 일생을 통해, 그가 추구했던 숨은 뜻을 재조명해 보자.

“대사, 오늘 대사의 얼굴은 돼지 같이 보입니다.”
“전하의 용안은 제 눈에는 부처님 같아 보입니다.”

“한번 웃자고 그랬는데 과인을 부처님 같다니요?”
“부처 눈에는 부처님,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지요."

'특별한 지혜를 간직한 異人이 많은 산. =지리산.'

지리산이 배출한 두 인물이 주고받은 농담.
무학대사는 불일폭포 인근의 토굴에서 득도.
이성계는 지리산 자락 운봉에서 왜구를 격퇴.

이성계가 몇 번 물어야 소신을 밝혔던 무학.
아는 것 없다고 늘 겸손해하는.. 무학(無學)
그와 가까워지려고 농담을 제안했던.. 이성계.

무학 인품으로는 파격적인 농담이었다.
하여, 이성계가 더욱 더 기뻐했다는..후문.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 임을..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학은 이성계를 섬기고 훗날 그의 아들인 방원도 돕는다.

'무소유론 주창자, 무학이 이성계를 섬긴, 숨은 뜻은...?'

무학은 '오백년 도읍지 한양' 천도설을 주장한 풍수지리학 대가.
그가 스승 청학거사를 만나 풍수지리학 기초를 닦은 곳은..지리산.
'무소유론'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섬긴 목적는 불교 중흥에 숨은 뜻.

그러나, '라이벌 이자 법술가' 정도전에게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조선왕조 500 년 운명, 200 년후 국란을 예언하고 물러난 인물.
당시 이조의 창건 세력은 유림이었으므로 무학이 설 자리가 없었다.

'조선왕조 500 년 세월 동안, 무학대사의 예언은 적중.'

200년 후 국가환란=임진왜란) 및 (조선왕조 후반 = 불교 탄압)이 例.
지리산의 전설을 수집해 보면, 이해 안되는, 잘못된 역사 흔적이 많다.
역사적인 사실들이 시대적 가치관에 따라 왜곡되고 흔적조차 사라졌다.

'무학은 정도전과 더불어 지리산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미래를 보는 혜안은 있었지만 신이 아니라 인간 한계를 드러낸다.
즉, 이조 미래를 예견한 혜안으로도 불교중흥 뜻은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500 년 전에 '백두대간'을 꿰뚫은 그 혜안은 놀랍기만 하다.

..........' 무학대사!.....어떻게 살다가 갔을까? '.............
이조 국사였던 무학대사는 한양 500년 도읍지설 주창자.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한반도의 골격.
그 대간 사이 산과 물에 맥과 혈을 기본으로 한 풍수지리설.

백두대간은 간룡(幹龍), 그곳에서 갈라진 산줄기는 지룡(枝龍)
원래 백두대간과 간룡은 산을 나무에 비유한 줄기(幹)와 가지(枝)
나무는 줄기에서도 열매가 맺히지만,대개는 가지에 열매가 맺힌다.

같은 이치로 풍수지리에서도 간룡보다는 지룡에 혈(穴)이 생긴다.
따라서 백두대간이 비록 큰 산줄기이지만 명당은 가지에서 생긴다.
지리산 북쪽 지역에도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가지에 명당터가 있다.

주촌리에 구룡부주(九龍負舟 또는 黃龍負舟) =대명당 <‘남기록에 기록>
황룡부주라는 명당은 용이 배를 등에 지고 간다는 생김새의 명당이란 뜻.
실제로 황룡부주의 명당은 광복 전에 이곳에 묘를 쓴 자손들이 크게 번성.

용이 배를 등에 짊어지고 항해를 하면,
무게중심을 잃고 배가 등에서 떨어진다.
하여, 정신집중하여 무게중심을 잡는다.
그러면, 배가 뒤집히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런데, 황룡부주의 명당에 석물(石物)을 설치하면
배가 중심을 잃고 뒤집혀 피해를 보게 된다고 여긴다.
이것이 명당터에 관한 풍수지리 이론의 기본 골격이다.

'지리산 불일폭포 뒤의 토굴에서 3년간 몰입했던 무학.'

그 후 조계산 송광사 소지선사 앞에서 머리를 깎고 이름을 무학.
그 후 경기도 용문사 혜명국사 지도로 선정닦는 법을 배우고 득도.
무학은 18 세에 불일폭포 인근 토굴에서 지리산과 인연을 맺게 된다.

무학대사(無學大師) 박 무학(朴 舞鶴) 행장기(行狀記)를 살펴보면
충청도 홍성과 서산 사이의 서해안 천수만(淺水灣)에 간월도(看月島).
6백년 전 관청의 돈을 빌어쓰고 갚지 못해 관가(官家)로 끌려가던 여인.
학돌재(鶴石峴, 현재 충남 서산군 인지면) 고개 마루에서 산고 끝에 출산.
포졸들은 아이를 버려둔 채 그 여인을 서산 관아로 끌고 가 원님 앞에 대령.

"에끼, 인정머리 없는 포졸들아! 누가 애 낳는 여인을 끌고 오라더냐!
당장 저 여인에게 먹을 것과 아이에게 입힐 것을 주어 집으로 보내라.
산모와 신생아에 드는 돈은 모두 내 월급에서 탕감하라." -원님의 판결-

무학의 어머니인 이 여인의 운명은 15 살 때에 도사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첫 아기를 가질 때까지 말을 하지 않으면 큰 인물을 잉태할 상이라는 말을 듣고,
그날부터 십년간 벙어리 시늉하다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굳게 닫았던 입을 연다.

왜구들 출몰이 잦았고 임신을 했던 그해 현해탄 건너 일본으로 갔다.
그 배안에서 왜놈들이 여인을 능욕하려 하자 남편의 눈에서 불이 났다

"에라, 이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들아! 애 밴 여자를 탐하다니...!"

박안일은 난투 끝 어깨에 중상을 입으며 왜구들을 물 속에 처넣었다.
그 배가 바람따라 조류따라 정처 없이 흘러 표류한 곳이 간월도였다.

그 아이의 특이했던 골상(骨相), 머릿 가운데 정수리가 산같이 솟았고,
양쪽 눈섭 꼬리가 유난히 치겨올라갔고, 콧머리는 세봉오리가 우뚝하고,
얼굴은 4각형으로 거북이 등판 같아 골상학에서 말하는 '학머리 거북얼굴'

부친은 할돌재 출생 아들을 무학이라 이름짓고,

마음대로 살 수 있도록 간섭 말고 키우라고 유언.

다섯에 글를 읽고,

여섯에 4서를 읽고.

 

열에 사기(史記)와 열전(列傳)을 통독.
열 하나에 3경 춘추(春秋) 주역(周易) 통달,

 

열 다섯에 혼담이 오갔지만 여자를 탐하지 않았고,

열 여덟에 입신양명(立身揚名) 위해 과거 길에 오른다.

"자네가 여기에 올 줄을 알았지..나를 따라오게."

과거를 보러 개경 가려고 화개(花開)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만난 도승.
그를 따라 쌍계사 뒤 불일폭포(佛日瀑布) 인근 조그마한 토굴에 당도.

"인간사에는 두 가지 시험이 있다.

하나는 과거이고, 다른 하나는 도가(道家)

과거는 속(俗)스러워 합격을 해도

10~ 20년 후 판서 참판 되기 힘드나,
도가의 과거에 입문(入門)하여 득도하면,

임금보다 더 높은 왕사(王師)가 되느니라.

나는 29년 전에 너의 어머니를 만났고,

그 때 이미 네가 태어날 것을 알았느니라."

청오경 금낭결 옥룡자결 삼한산수비기

천문 지리 음양 5행 운기 금단 옥급 수리
백련거사비기 책을 내민 청학동 청학거사


이리하여 무학은 풍수 도참(圖讖) 비기(秘記)를 공부하고

사미승 비구승을 거쳐 이성계의 건국공신 국사가 되었다.


무학은 스물 셋에 진주 길상사에 가서 수도를 한다.
스물 넷에 모향산 금강굴에 들어갔다가 원나라 유학.

서른에 귀국하여 다시 지리산에 10년 만에 돌아오자
청학도사는 세상을 떠났고 무학에게 남겨진 유서 한통.
그 유서는 늘 스승이 사용했던 향나무 목침 안에 있었다.

'네가 이 글을 볼 때는 고려의 왕운이 다하였으니
새 왕을 도와 500년 국조(國祚)를 열라' -청학-

이 글을 본 무학은 큰 일을 앞 두고 고향을 찾아간다.
삼기현의 어머님을 뵙고, 비구니가 된 애인도 만났다.
무학이 출가 전에 사랑했던 두 여인들과 무학의 어머니.
다음 해에 어머니와 두 여인이 안거할 고향 절이 무학사.

아버지가 타계한 간월도에 지은 절이 간월암,
500 년 후 한국 불교계 고승 경허(鏡虛) 배출.

그후 세상을 순례하다가 원주 고달산에 암자를 짓고 정진 중
신돈이 왕정을 어지럽힐 무렵 함경도 안변 설봉산에 토굴에서,
고려가 멸망할 즈음 무학은 꿈 해몽을 부탁하는 이성계를 만난다.

닭이 "꼬끼요"하고 우는 것은 '고귀위(高貴位)'
즉 높고 귀한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라 해몽한다,

서까래 세 개가 빠진 것을 모아 보면 임금 王자.
이성계가 왕이 될 징조라는 의미라고 풀이한다.

무학의 해몽대로 이성계는 최영과 맞서 위화도 회군을 감행
개성에 와서 왕으로 등극후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 고심한다.
새 도읍을 '한양' 아니면, 공주 계룡산 '신도안'으로 할 것인가?

무학과 더불어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신도안 도읍설.
무학은 한반도의 중심인 한양 도읍을 각각 주장한다

신도안은 계룡산 정기를 이어 받은 대전 인근이고,
한양은 북한산 정기를 물려받은 현재 서울 인근이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들어 도읍지를 한양,
정도전의 말을 들어 궁궐터를 백악산(현재 북악산)...청와대 뒷산.

훗날 무학은 국사를 사직하고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권력을 장악한 방원의 부탁으로 이성계를 찾아간다.
태상왕이 된 이성계를 회유해 함께 한양에 들어온다.

당시, 권좌에서 물러난 이성계를 만나러 갔던 신하들.
모두 이성계가 쏜 활에 맞아 죽어 유래된 말 '함흥차사'.

'무학대사와 이 성계' 두 인물이 얼마나 두터운 사이인지
무학이 방원에게까지 신뢰 받은 인물 임을 알수 있는 대목.

훗날, 이성계는 무학의 영향으로 불교에 귀의.
무학은 나이 79, 법랍(法臘) 61 세에...열반한다.

무학이 열반한 곳은 금강산의 금강암.
이성계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권한 무학.
무학은 왕실 발전을 위해 4 사찰을 세웠다.

동쪽에 동불암, 서쪽에 진관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
....................................................

이성계는 죽음에 임박해 불교에 귀의한다.
그러나, 훗날 이조에서는 불교를 탄압한다.

........................회암사.........................
경기도 양주군의 경복궁 구조와 같은 사찰.
이성계의 제2의 왕궁이자 이조 최대의 사찰.

천보산의 회암사 터는 3년에 걸친 발굴작업
사찰보다는 왕궁을 닮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회암사를 창건 중창한 인물은 승려 나옹이다.
그러나 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1376년 입적.

나옹의 친구 무학은 이성계의 건국동지이다.
회암사 주지 무학이 있어 이성계는 늘 찾던 곳.

다른 사찰들이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할 때
회암사는 승려 250명이 머무는 사찰로 성장.
이곳에서 선대왕의 제사를 모셨기 때문이다.
종묘를 세우고도 불교풍습을 버리지 못한 이조.

그곳에서 발굴된 목이 잘린 불상들의 유물.
이조의 불교 탄압정책 흔적임을 뒷받침한다.
이성계가 세상을 뜬 뒤부터 사찰을 탄압한 듯.

회암사가 사라진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회암사는 불교의 마지막 불꽃인 듯.
...............................................................

'이성계가 창업한 이조 500년의 역사.'

백두대간에서 건국신화가 없는 유일한 국가이다.
이조창건 당시에 민심을 얻지 못한 이유는 불교 탓.
하여,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부른 것은 아닐까?

무학은 출생 전부터 왜구의 만행을 겪었던 인물.
그가 왜적 침략을 경계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무학은 200년 후에 닥칠 임진왜란을 예언했다.
그것은 그가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던 충언이다.

이조의 '한양 도읍지 500 년 설'에 관한 주장
경복궁 궁궐터 결정 후에, 무학이 했던 말이다.
나라 앞날이 걱정되었던 구국 일념의 충언이다.

'정도전의 숨은 야심을 이미 간파했던 탓일까?'

역대 왕조의 흥망성쇄 역사를 꿰뚫었던 무학대사.
그로서는 당연히 이조의 국가 미래를 예견했을 듯.
하지만, 집권 유교세력과 맛서기엔 역부족이었을 듯.

이 성계가 무학에게 몇 번 묻고 나면,
소신을 밝힐 만큼, 사려가 깊었던 인품.

이성계 심중을 알면서도 유교세력을 의식
그만큼 무학은 사려 깊은 속마음의 소유자.
이조 정권의 바탕 지지기반은 유교세력이다

이성계가 그들을 멀리할 수 없음을 아는 무학
무학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스스로 물러나는 것.
불교 중흥의 숨은 뜻을 품고도, 그 뜻을 접었던 무학.

종교와 사상의 벽을 넘어, 국태민안 무소유의 실천.
무학이 정치에서 물러나자 이조에서 불교문화는 쇠퇘.
훗날, 지리산 자락의 수많은 사찰들이 점점 사라져 간다.

유교사상이 꽃필수록 불교국가들로부터 고립되는 이조.
국제사회 고립, 당파싸움, 쇄국정책으로 구한 말에 패망.
500 년이 지난 후에야 무학의 혜안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가 궁궐터를 인왕산 기슭에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상권의중심 한강 하구 마포나루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국제정세와 교역의 중심에 도읍지을 정하려 한 듯 싶다.
무학은 한반도 백두대간을 꿰뚫은 당대의 풍수지리학자.

정도전은 책을 벗한 학자일 뿐, 현장감은 부족한 듯 싶다.
그가 주장한 경복궁 터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듯.

'경복궁은 명나라로 가는 길목에 놓여 있는 위치.'

사대주의 사상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위치이다.
민생을 보살필 수 있는 마포나루와 근본적 차이.
한반도 주변국들과 폭넓은 외교활동이 어려운 곳.

결국, 이조는 중국을 향한 사대주의 사상만 고수한다.
무학이 200년 후 임진왜란 및 500년 국운을 내다본 혜안
왜구에게 시달리며 성장한 무학이기에 예상 할 수 있던 일

무학이 득도한 화계골을 보면, 한양의 먼 미래가 보였을 듯.
즉, 화개골은 화개장터 일대가 중심이 되듯 한양은 마포나루.
500 년전의 주위 여건을 살펴보면 무학의 주장이 현실적이다.

 



밀교.



불교 중의 비교(秘敎), 곧 비밀 불교.
탄트라 불교, 금강승, 구생승, 시륜승 등
각 명칭엔 각기 역사적 배경과 내용의 차이.

인도 비밀불교의 가장 일반적인 호칭은 금강승.
그러나 금강승과 탄트라 불교를 동일하게 취급
후세의 타락한 형태의 불교로 이해하는 입장

이 두 말이 가리키는 것은 똑같지 않다.

'금강승'은 분명히 후세의 인도 불교,
후세의 비밀불교를 가리키는 일반적 호칭
금강승은 7~8세기 경 중국의 대승 밀교승.

밀교는 불교의 출발 당시부터 힌두교와 공통
7세기 이후 불교의 실천과 의례과정에서 태동
밀교의 기원은 불교의 기원과 궤도를 같이한다.

비밀불교가 하나의 체계로 성립된 7 세기 중엽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 경전이 형성


475년 서유럽 제국의 멸망은
인도와 서방세계 무역을 위축.

인도양, 페르시아만, 홍해 일대는
예부터 동서양의 상업활동의 무대.

그러나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인도와 로마 제국과의 교역이 끊기고
5세기말 강력한 굽타 왕조가 쇠퇴하며
흉노의 침입과 지방왕조의 분립이 계속.

상인계층 지지를 받던 불교와 자이나교는 자연히 쇠퇴
반면 브라만교와 힌두교는 발전을 계속하여 민간의 신앙
4세기말 중관, 유가행유식, 여래장 대승불교 경전들이 완성

사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인도 사회에 넓고 깊게 침투
그러나, 후기 중관학파나 유식학파는 기울어지기 시작
대승불교와 논란을 주고받던 소승불교가 쇠퇴의 징조

그무렵 인도의 종교 조류 속에 잠재해 있던 밀교
7세기경부터 서서히 분명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석가모니 자신도 세속의 주문을 금지하면서도
치통의 주문, 복통의 주문, '뱀에 물렸을 때 주문'
등은 예외로 허용했기 때문에 밀교의 출발점이 된다.

밀교는 파라 왕조가 몰락하며 지방종교로 전락.
후기 밀교는 8세기 이후 티베트와 네팔에 전파
오늘날 라마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삼국시대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수용된 밀교.
신라에서는 7세기 초부터 밀교 요소가 보이기 시작
8세기 대일경 금강정경 경전 전파로 널리 유포된다.

밀본(密本) 안홍(安弘) 명랑(明朗) 혜통(惠通)
등 신라 밀교 초기의 대표적인 승려들이다.

안홍은 신라에 본격적인 밀교를 수용한 승려로서
611년(진평왕 2년) 혜숙(惠宿)과 함께 당에 건너가
서역(西域) 승려 3인과 중국 승려 2인을 대동하고 귀국
황룡사에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 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

명랑은 〈관정경>으로 당나라 침공을 물리쳤다고 한다.
혜통은 진언(眞言)으로 신문왕 등창을 낫게 했다는 기록
신라시대 밀교는 여타 무속신앙까지도 흡수하여 매우 성행

그 대표적인 예가 오대산신앙과 사리탑신앙 등.

고려시대 밀교 수행의식은 호국불교의 형태
왕실의 적극후원을 받으며 연등회와 팔관회
고려 왕실행사로 수용되며 불교의식으로 변모

왕의 즉위식도 밀교적인 작법(作法)에 의거 거행
고려시대 80여 각종 법회가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이 가운데 밀교 성격이 강한 불교 의식이 많았다

2차례 고려대장경에도 밀교 경전들이 다수

이조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탄압
이 과정에서 밀교의 세력도 많이 약화.
태종 때 11개의 종파를 통폐합하면서
총지종과 신인종은 그 명맥이 끊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민간의 신앙으로 널리 유포된 밀교

태조는 재위기간 동안 14회에 걸친 소재도량
1395년 총지사 현성사에서 대규모 불사를 개최
그 자신 불교탄압을 강행했던 태종도 각종 법회

이조시대 오히려 더 많은 밀교서적이 간행

진언집 眞言集〉〈오대진언 五大眞言〉
천수경 千手經〉<제진언집 諸眞言集〉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비밀교 秘密敎〉

우리나라 밀교는 사상이나 교리적인 측면보다는
진언·다라니의 염송과 의식을 통한 소망의 성취
세속적 성격이 강했고 의례 전반에 걸쳐 스며들어
그것을 여타 신앙체계와 뚜렷하게 구분이 어려웠다.



탄드라(인도 불교)

 

만다라 탄드라불교의 도상, 18세기, 티벨

 




신라 시대 격변기에 융성했던 인도불교 탄드라.
인도불교는 가락국 김수로왕 허황후 때 처음 유입.
김수로왕의 12대 손 김유신 때 통일신라에 꽃 핀듯.

한반도 선진 문화와 지배층 사회의 초석이 된 불교.
인도, 서역, 중국, 만주, 한국, 일본과 동남아 제국.
그 연결선상에서 역사적 시대별 관점이 달랐던 불교관.

특히, 동아시아 판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불교문화

인도불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되고
일단 중국화된 불교가 다시 한반도로 전래되었다.

일본 불교는 몇 단계 변형을 거친 한반도불교의 영향.
하여, 동아시아에 전래된 불교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불교는 금욕적 성격을 띠고 있어 성에 대해 부정적 견해

불교에서 쾌락은 괴로움의 시작이라고 설파
음욕을 금하는 불교에서 가장 부정적인 성욕.
탄드라 밀교에서는 性에 대해서 또 다른 해석

한반도 장례의식은 불교보다 풍수지리학의 영향
이 점은 불교와 도교 사상이 혼합된 한반도 사상.
재래 민속 신앙과 불교 요소가 혼합되어 있기 때문.

한반도 불교 의례는 무속과 혼합된 현상이 많다.
모계사회, 부계사회, 농경 목축 사회 변화와 밀접.
한반도 불교문화도 시대에 따라 새로운 인식을 도모.

성에 대해 폐쇄적인 전통을 지녀온 한반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있는 `성 문화 박물관`
동양 성문화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해를 돕는다.

한국, 중국, 일본, 네팔, 인도, 티벳 유물 200 점.

티벳 불교에서 지혜와 자비는 종교의 필수적인 요소.
지혜와 자비는 남성과 여성을 표상하는 추상적인 본질
그 완벽한 결합은 남신과 여신의 성적 교합으로 상징화.

탄드라 수행은 신과의 성적인 교합.
요가 수행에서는 눈을 중요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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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그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눈은 내면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열쇠.'

'하나의 그릇을 볼때 전체를 보라,
그것의 표면이나 재질을 보지 말고
그릇 전체의 형태만을 보라. 머지 않아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리라.'

-오쇼라즈니쉬- (시각명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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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우리 몸에서 가장 비육체적인 부분이다.
만약 물질이 비불질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다면,
눈은 바로 거기에 해당되는 경우이다.

눈은 그대와 그대의 육체가 만나는 지점.
육체 속에서 눈 만큼 깊이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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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대가 다른 사람의 눈을 드려다 볼 줄 안다면
그대는 그의 깊이를 들여다 볼수 있다. 그는 거기에 있다.
그는 육체의 다른 어떤 부분에도 없다. 오직 그 눈동자 속에 있다.

사람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면 화 낸다.
그것은 내면을 관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락없이 눈동자를 계속 쳐다보는 것은
초대하지 않는 집을 쳐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
타인의 눈을 3초 이상 똑바로 응시해서는 안된다.

눈은 얼굴의 빛이다. 눈은 살아있는 의식을 반영.
장님에게뭄 비밀을 말해도 쉽사리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가진 사람에는 비밀이 감춰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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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트라는 7세기 경 최초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샤크티파 탄트라는 여신 샤크티(akti)를 인격화한다.
탄트라에서는 쿤달리니(kualin)를 척추와 동일시한다.

쿤달리니는 요가에 의해 척추 위쪽으로 올라가는 에너지
성스러운 주문과 요가 수행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성교 행위와 같이 좌도(左道)적인 수행 방법을 다루는 의례

'전희를 거쳐 절정에 이르는 순간..무아지경.= 해탈.'

탄트라는 그 성립 시기가 7세기 또는 그 이전으로 추정
9세기 경부터 티베트어와 한자로 번역되어 퍼져 나간다.
산스크리트 원본이 사라져 번역본으로 만 전해진 탄드라.




미륵신앙.



우리나라 불교에서 뿌리 깊은 미륵신앙.
미래의 부처님을 기다린다는 '희망의 신앙.’
진표율사가 창건한 금산사는 대표적 미륵도량

미륵신앙 만큼 사회적 영향을 끼친 신앙은 드물듯.

후삼국 궁예를 비롯 스스로 미륵이라 자칭한 인물들.
이조 민란, 정감록, 갑오농민전쟁 뒷배경은 미륵신앙.
미륵 신앙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시아 구세주같은 존재.

'빈곤한 민초들에게 새 세상을 열어준다는 미륵.'

옛부터 한반도 민초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일.
봉건사회에서 근대로 바뀌며 나타난 많은 신생종교
대부분 미륵신앙을 표방하며 민심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러나, 통일신라 이후 미륵사상 종파는 거의 없었다.
미륵정토에 왕생하는 인연은 과거에 지은 죄업을 참회
생전 사후의 죄업까지도 청산하는데 있다던.. 원효대사.

'원효대사는 구도를 강조하는 정통 미륵신앙.'

미륵(자비.우정이란 뜻)은 57억 7천만년 후 부처.
석가모니불이 구제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사상에 근거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 바라문 가문의 자씨.
미래 부처이지만 아직 부처가 되기 이전 단계 보살.
미륵이 오면 수명이 8만4천세로 늘어나며 행복한 삶.

말세론과 구세주 개념으로 사회혁명을 주도한 미륵신앙.
백제 때 융성해 강력한 왕권 국가를 건설하게 한 원동력.
미륵신앙은 인도에서 중국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

현재, 미륵신앙이 존재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고구려 때 전래한 미륵신앙은 신라 백제의 국가통치 이념
백제 무왕은 연못에서 솟는 미륵삼존상을 보고 미륵사 창건

미륵사상은 우주적 이상인 미륵불, 정치적 이상인 전륜성왕,
이상향 용화세계 3가지로 고구려 아미타 신앙과 혼재된 신앙.

신라시대 미륵신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화랑.

신라 화랑을 호칭하는 용화향도는 미륵신도란 뜻이다.
화랑 김유신에게 보검을 준 도인 난승은 미륵의 사자
백제 미륵신앙은 왕권중심, 신라는 불교 이념의 구현.

금산사는 지금도 한반도의 대표적인 미륵도량.

미륵을 자처했던 궁예가 죽자 미륵신앙도 약화된다.
고려 때 화엄종 세력에 밀려나 거의 사라진 미륵신앙.
미륵신앙은 왕실 또는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간다.

이조 숙종 14년 승려 여환의 역모사건과 미륵신앙.

당시 신흥종교인 증산교와 용화교가 대표적인 사례.
증산 강일순은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할 것이라 예언.
서백일이 세운 용화교는 금산사를 본거지로 교세 확장.

지금도 금산사 주변 용화동은 용화교 신도들의 마을.

십선행(十善行)을 실천하면 도솔천에 왕생한다는 믿음.
지상불국토인 용화세계를 구현하려는 용화사상의 모태.

중국 미륵신앙은 도교와 불교가 융화된 흔적.

다나라 포대화상은 봉화현 사람으로 법명은 계차(契此).
뚱뚱한 몸집에 얼굴은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 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으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메고 다닌다.

자루 속에는 별별 것 다 들어있어 포대스님이라고 불렀다.
무엇이든 주는대로 받아먹고 땅을 방바닥으로 삼고 뒹굴고
구름을 이불삼아 어느 곳이든 벌렁 누워 코를 골며 잠잤다.

'이마을 저마을 떠돌다 게송을 남기고 앉은채로 입적.'

“하나의 바릿대 천 집에 밥을 빌며
고고히 몸은 만리를 노닌다
알아보는 이 별로 없어라.

떠도는 흰 구름에게 길을 묻노라
미륵 참 미륵이여 천백 억의 몸으로 나투어
때때로 세속 사람들에게 보이나
세속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

나에게 한 포대가 있으니
허공도 걸림이 없어라
열어 펴면 우주에 두루 하고
오므려 들일 때도 자재로움을 보노라”





서동요.










선화공주가 숨을 거두기전 무왕에게 한 마지막 소원.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하며 미륵사를 지어달라고 부탁

무왕은 사비(부여)에서 도읍을 익산으로 옮겼다는 설
익산에는 도읍을 뜻하는 왕궁 등의 지명들이 남아있다.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 전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 삼존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예불.
부인이 왕에게 이르되 이곳에 큰 절을 지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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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무왕의 아버지는 백제 29대 왕으로 법왕
법왕의 이름은 선이고 선이 왕자일 때였다.

그가 평민들이 사는 마을로 놀러 나왔다가
큰 못가에서 놀고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서로 눈이 맞아 관계를 맺어 낳은 아들이 장.

무왕의 어머니는 처녀로서 왕자의 아이를 낳자
그녀가 평민이라 아들에게 법왕의 신분을 숨겼다.
또한 이웃 사람들에게도 아들의 신분까지 숨긴 채
과부인 양 부모님 집 곁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무왕은 어릴 때부터 풍채가 크고 도량이 넓었다.
무왕이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은 서동(薯童)이었다.
서동이란 '마를 파는 아이'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그 무렵 진평왕 셋째 딸 선화공주가 미인이란 소문
신라에서 온 장사꾼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들은 서동.
어머님께 잠깐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서라벌로 갔다.

서라벌로 간 서동은 서라벌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자기가 지은 노래를 부르도록 했는데 그 노래가 서동요.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얼려 두고
맛동방(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동요가 아이들을 통해 신라 곳곳에 퍼졌고,
드디어 신라 대궐까지 소문이 들어가게 되었다.

대신들은 왕에게 선화공주에게 벌주도록 청하니
신라 진평왕도 어쩔 수 없이 멀리 귀양을 보낸다.

누명쓴 공주가 유배의 길을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선화공주가 유배지로 가는 길에 만난 서동
서동운 공주를 모시고 호위하겠다고 나섰다.
공주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어쩐지 미덥고 즐거워 자신을 수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둘은 몰래 정을 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공주는 서동이란 이름을 알고
그 동요가 사실로 실현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백제로 왔다.
선화공주는 모후가 주던 금을 꺼내어
앞으로 함께살아갈 계획을 세우려하자
서동은 크게 웃으면서 공주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물건이오?"
"이건 황금입니다."

"내가 마를 캐던 곳에 이런 것들이 흙처럼 쌓여 있소."
"그 보물을 부모님 궁전으로 실어 보내면 어떨까요?"

서동은 그 황금을 모아 들였다.
둔덕만큼이나 황금을 쌓아 두고
용화산(익산 미륵산)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에게 황금수송 방책을 물었다.

"내가 신통력으로 보낼 수 있다. 금을 가져 오너라"

선화공주는 편지를 금과 함께 지명법사에게 맡겼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금과 편지를 신라 궁중에 옮겼다.
진평왕은 경이로와, 편지로 서동의 안부를 묻곤 했다.

서동은 이후 인심을 얻고 왕위에 올랐다.
무왕은 왕비 선화와 함께 사자사로 거동
용화산 아래 못가에서 나타난., 미륵 3존

두 사람은 수레를 멈추고 경배를 올렸다.
선화 왕비는 그곳에서 무왕에게 부탁했다.
"이곳에 큰 가람을 세우는것이 소원입니다"

무왕은 선화 왕비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지명법사에게 그 못을 메울 일을 물었다.
하루만에 신통력으로 못을 메워 만든 평지

그곳에 미륵상 셋과 회전 탑 낭무들을
세군데에 세우고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해설...................
백제 제 30대 무왕(武王, ? - 641)
당에 의해 대방국 백제왕에 책봉되고,
신라에 잃었던 땅을 찾고 왕흥사를 창건

서동의 탄생은 '주몽신화' '탈해신화'와는 다르다.
고구려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와도 차이.
서동요는 당시 민중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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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요'에는 백제 부흥의 꿈이 담겨있는듯.

설화의 내용대로 백제 무왕은 천한 신분이었을까?
아니면, 기상이 걸출하고 기품이 수려한 인물일까?
정말, 선화공주와 신분과 국경을 넘은 사랑을 했을까?

무왕 즉위 50년 전 신라와 전쟁을 벌이던 '성왕'
목이 잘린 채 머리만 신라의 저자거리에 묻혔고,
이미 가야지역과 한강유역 영토를 빼앗긴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눈치를 보며 겨우 목숨을 연명.

백제는 국내적으로도 신라와의 전쟁에 진 뒤 왕권은 약화
좌평을 중심으로 대성8족(大姓八族)이 나라의 권력을 장악.
무왕 즉위 전 혜왕과 법왕은 재위 2년을 넘기지 못하는 정국

600년 무왕의 즉위는 이조 말 철종을 연상하게 한다.
강화도에서 땔나무 하던 철종을 선택한 안동김씨 기문,
당시 왕권이 권세가문 안동김씨보다 힘이 미약했던 시기.

'상갓집 개'로 불리며 목숨을 보존했던 흥선 대원군
고종 즉위 후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과정과도 같다.

무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 사연은 삼국유사 기록대로
선화공주를 연모한 서동의 '서동요' 퍼트리기 공작과
선화공주의 내쫓김, 그리고 둘의 극적인 만남과 사랑,

진평왕이 황금 뇌물을 받고 서동을 사위로 맞는 과정뿐.
그러나, 즉위 이후 무왕의 행보는 이전의 설화와는 판이.

신라를 12번 침공, 황룡사보다 두 배 규모 미륵사를 세워
무왕은 신라를 공격하는 정치, 군사적 전초기지로 삼았다.
신라와 백제는 전쟁 중에 왕실간 혼인을 한 사례가 있었다.
그렇지만 무왕 만큼 신라를 끈덕지게 공격한 왕은 없었다.

서동은 왕이 되기 힘든 조건에서 출발해 왕위에 올랐고
국운이 다해가는 백제를 되살리려 온 힘을 기울인 임금.

그는 의도적이던 아니던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통해
서민 계층에게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주었으며
미륵사 창건해 그가 미륵세상 통치자 전륜성왕 임을 암시.

그는 이를 통해 기득권 세력 귀족들을 견제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는 무력 이외에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활용한 전략가
대중 선동가였던 그 중심에 금마(현재 익산)와 미륵사
김정호 대동지지에 금마가 무왕의 별도(別都)임을 기록

그것은 왕의 또 다른 거처이기도 하거니와
유사시 임시수도 기능을 할 수 있었음을 뜻.

익산은 그의 든든한 정치적 지지 기반이자
신라와의 전쟁을 염두에 둔 전략요충지였다.

그러나 웅장했던 미륵사의 위용은 세월 속에 흩어지고
몇 개의 돌덩이만 남아 서동요 사랑 이야기만 전해준다.


'미륵사를 지나며'- 詩

옛날의 크나큰 절 이제는 황폐했네
외로이 피어난 꽃 가련하게 보이도다

기준왕 남하하여 즐겨 놀던 옛터건만
석양에 방초만 무성하구나

옛일이 감회 깊어 가던 걸음 멈추고
서러워 우는 두견 쫓아 버렸네

당간지주 망주인 양 헛되이 솟아 있고
석양의 구름 아래 저물음도 잊었어라

-이조 문인 소동명(1590~1673년) -


................미륵사......................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이르렀을 때
못 가운데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무왕은 수레를 멈추고 경배했다.

왕비가 그곳에 절을 세워주길 원해 왕이 허락.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산을 헐고 못을 메워
미륵삼존 상을 만들고 전각과 탑, 낭무를
세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도솔천 미륵보살이 앉아있는 칠보대 안,
'사자사'는 마니전 위 사자좌를 가리키며,
용화산은 미륵이 법회를 하는 용화수를 상징.

세곳 전각과 탑과 낭무는
세 번의 미륵 법회를 상징.

미륵은 석가모니 입적 후 도솔천에 올라가서
천중(天衆)을 상대로 설법하다가 56억7천만년 후
성불하여 용화수 아래로 하생하여 세 차례의 설법

석가모니가 구제못한 96억, 94억, 92억 중생을
차례로 교화한다는 것이 미륵하생경의 내용이다.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미륵사탑.
용으로 변한 미륵을 맞이한 사찰
이 세상에서 가장 컸다는., 미륵사.

미륵사는 힘을 잃어가는 백제를 일으키려는 무왕의 야망,
무왕은 미륵사를 통해 어떤 승부수를 던지려 했던 것일까.

오래 전부터 황량한 절터를 홀로 지키고 있는 미륵사탑
돌로 만든 최초의 탑이자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

삼국유사 기록상 미륵사의 창건설화.

'하룻밤 만에 못을 메우고 미륵삼존과
회전,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

건물터 5만 평에 창건기간 36년으로 추정되는 미륵사.
거대한 연못을 메워 3 개 탑과 3 개 금당을 세운 사찰,

‘선화 공주님은 밤마다 몰래 서동을 품에 안고 잔다’

서동과 선화 공주의 결혼을 가능하게 했다는 서동요
당시 백제와 신라의 정략적인 화해가 담겨있는 노래.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은 거대한 사찰 미륵사를 창건

미륵사에서 발굴된 '용수’가 새겨진 기와.
‘용수(龍水)’는 늪에 사는 용을 의미한다.
용의 화신이 미륵을 기다리는 간절한 염원인듯.

미륵사가 세워진 익산에 있는 쌍릉.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무왕에게 익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백제 역사상 가장 신라를 집요하게 공격한 무왕.
익산은 신라를 12번 침공했던 공격의 전초 기지.
신라공격 전초기지에 무왕은 미륵사를 창건했다.

백제 30대 무왕(AD600~641)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예배

부인이 왕께 아뢰기를 '나의 소원은 이곳에
큰 절을 세웠으면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知命에게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삼상과 전(殿), 탑(塔), 낭무를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니 진평왕이 여러 공인을 보내 도와주었다.

건축, 공예 등 백제미술의 역량이 최대한 발휘
삼국문화가 결집되어 모든 문화를 집대성한 곳.

가람의 배치가 3원 이루고 있어 동, 서, 중앙이
서로 연결이 되어 있으며, 동서의 길이가 172m
백제 때 5,500 평, 통일신라에 와서 만 평 규모.

중앙에 목탑이 있고 양편에 9층 석탑이 있다.
하중 기단의 한 변이 12.5m, 상층 기단이 10.5m
비면에서 상륜부까지 총 높이는 27.8m 거대한 석탑.

신라 화엄사상 황룡사
백제 미륵신앙 미륵사.
1600년 전 폐사된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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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바 람 - 김 남 조.
..................................

바람 부네
바람 가는데 세상 끝까지

바람따라
나도 갈래

햇빛이야
청과(靑果) 연한 과육(果肉)에
수태(受胎) 를 시키지만
바람은 과원(果園) 변두리나 슬슬 돌며
외로운 휘파람이나마
될지 말지 하는 걸

이 세상
담길 곳 없는 이는
전생이 바람이던게야
바람이 의관(衣冠) 쓰고
나들이온게지

바람이 좋아
바람끼리 훠이훠이 가는게 좋아
헤어져도 먼저 가 기다리는게
제일 좋아

바람 불면
바람 따라 나도 갈래
바람 가는데 멀리 멀리 가서
바람의 색시나 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