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4년 지리산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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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1월 정유재란 중 전국에 대기근 발생
전국적으로 굶어죽은 백성이 부지기 수였다.
임진왜란 7년 중 가장 극에 도달했던 비참함.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난중일기.'
지리산에 관한 부분만 일부 발췌.
읽기 편하도록 본문을 필자가 편집.
조경남은 남원시 주촌면 사람으로
그당시 운봉현의 서기로 재임 중
직접 정유재란에 참가한 인물로
그가 기록으로 남긴 전란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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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선조 27년 1594년 5월
전라 병사 이시언(李時言)이 산음으로부터 남원에 이르러
다음날 전주로 향해 그 뒤 영남으로 5월 27일에 들어갔다.
기근으로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이 극에 이에 이르러
골육 부자형제 간에도 분리되어 서로 길가는 사람 보듯 했다.
내가 마침 성중(城中)에 이르렀을 때에
명 나라 병사 한 사람이 취하고 배가 불러
마을을 지나가다가 길 가운데서 구토를 하자,
굶주린 백성들이 일시에 달려가서
머리를 모아 주워 먹는데 약한 자는
달려들지 못해 물러서 눈물만 흘렸다.
독부(督府) 유정(劉綎)이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쌓인 것을 보고
참혹히 여겨 진소(賑所)를 동문 밖에 설치하니,
굶주린 백성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백 명의 무리가
거기 힘입어 조금 연명하다가 그 뒤 모두 그 옆에서 죽었다.
8월 6일
적선이 나아와 악양(岳陽)에 정박했는데,
영남 앞 바다 5~60리까지 배가 가득 차서
마치, 바다에는 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척후 정탐이 이미 끊겨 소식을 알 수 없어서
남원부에서 하인 양제 등 다섯 사람을 시켜서
달려가 적의 경계 상태를 탐지하게 하였다.
삽암(揷岩)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고는
곧 돌아와 적의 형세를 상세히 보고했다.
통제사 이순신이 원수의 진중으로부터 출발하여
진주 서로를 거쳐 구례로 가다가 정박한 적선을 보고
곡성을 거쳐 서해로 향해 간 이때 배설이 배 12척 퇴각.
진도의 벽파정 밑에 있었는데, 이순신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정유년 만력 25년, 선조 30년(1597년)
9월2일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 여러 명
같이 도로 은신암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왕래하는 왜적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
식량이 텅 비어 어쩔 수 없이 향로봉 경유 은신암.
하루를 머무르니 왜적의 형세가 약간 멎게 되었다.
이공직의 형 등은 운봉으로 나갔다가 연상산으로 내려갔다.
우리들은 밤에 황류천을 건넜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밤새도록 겨우 정령성에 도달하여 잠깐 쉬고,
아침에 서운암(瑞雲庵) 터에 내려가 매복하여
날이 저물자 올라왔던 산적들이 모두 내려갔다.
수색하는 왜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월운령(月雲嶺)을 달려 지나가 노숙하고,
아침에 파근산(波根山)에 올라가 정찰하다가..
처음으로 한 동리 사람을 만나서
왜적 형세와 고향 소식을 들었다.
그대로 숲속에 숨었다가
저녁 때 경덕사로 내려가 유숙했다.
인솔한 늙은이와 어린이도 아직 탈이 없었다.
보는 사람마다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ꡒ본촌 사람으로 왜적에게 죽은 자가
백여 명에 이르렀고, 유아들을 모두 내버렸다.” 했다.
며칠을 머물면서 왜적의 형세를 염탐하여 보고
노복을 본촌에 보내 벼를 베어 오게 하여
비로소 조석 끼니를 잇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사로운 일은 기록할 만한 것이 못 되나
이런 사실을 예로 들면 다른 일을 알기 때문이다.
10월 9일
원천의 왜적은 구례로 향해 가
화정(花亭)에 이르러 유둔하고,
호산(虎山)의 왜적은 함양으로 가
인월에 이르러서 결진하여
사면의 산골짜기를 밤새 수색.
이날 나는 정령성으로 향했는데,
월운령에서 인마가 달려와 고하길
"적병이 벌써 산과 들에 가득 찼고,
살상과 노략질이 한창 혹심하여
우리들은 피해 달아나왔습니다.”
나는 즉시 돌려서 무산(毋山)으로 향하니
적병이 또한 가득하므로, 판왕령으로 올라가
부운령(모두 지리산 서쪽 기슭의 재 이름)을 지나
도로 고촌으로 내려왔다.
이튿날 용추의 산막으로 돌아오니
본촌 사람으로 화패(禍敗)를 입은 자가 많았다.
인월(引月)의 왜적은 다 영남으로 들어갔다가
이어서 좌도(左道)의 옛 소굴로 돌아갔다.
11월24일
나는 왜적을 함양 음리까지 추격해 17ㆍ8명 사살
데려온 사람과 짐승이 20 여 구(口)나 되었다.
이때 내 수하에 한 사람의 병사도 없었다
내가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10 여명 부하들
구례에서 김식에게 전부 이속시켰기 때문이다.
산음과 사천의 왜적이 함양 운봉을 분탕질하고
찾아다니며 살생 노략질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맨주먹을 흔들어 봤자 어찌할 수 없이 분한 마음
그리하여, 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히 몇 명의 하인을 데리고 운봉으로 향하니,
양ㆍ박 두 선비도 또한 위험을 무릎쓰고 나를 따랐다.
길을 떠나 함양 산내(山內)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훌쩍 날듯 뒤에서 걸어왔다.
앉아 기다리니 바로 고향 친구 안선달 사제
부모가 모두 오차산(於差山) 싸움에서 죽었기 때문에
항상 왜적을 죽여 조금이라도 원통함을 풀려 하던 차에
내가 왜적과 싸우려 나간다는 말을 듣고 뒤따라 온 것이다.
그래서 피차에 기뻐하고,
그와 동행하여 당벌촌에 이르니,
마을이 텅 비어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두울 녘에 한 사람이 내게 와서 알리기를,
"왜적 50여 명이 오늘 낮에 두류암으로 들어와
이내 흩어져 산을 뒤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나는 인원을 나누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망을 보게 하였더니,
저녁 때 정탐한 사람이
알리기를,
"왜적은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마천곡으로 들어가고,
한 패는 음리(陰里)로 향하였습니다.”
이날 밤에 이동하여
등구현(登丘縣)에서 잤다.
함양의 남면 산내에 창고가 있다.
산음 사람 배의중은 날래고 건장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병란을 피하여 이곳에 와
향도가 되기를 자원하므로 나는 기꺼이 허락하였다.
이튿날 출발하니 근처 사람이 모두 괴이히 여겨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몇 개의 활을 가지고
50여 명의 적을 당할 수 있겠는가?
어찌 경솔하게 적과 싸우러 나간단 말인가? 운운.”
음리(陰里) 건너편의 냇가에
얼음이 살짝 얼어 붙어
군사가 건너갈 수 없었다.
앉아서 망을 보니,
왜적 20여 명이 음리로부터
사람과 짐승을 몰고 군막을
불사르고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군사를 시켜 고함을 치게 하면서
계속 이어서 그들을 추격하여 탄구지에 이르니,
개울은 좁고 산은 험준한데,
우리와 놈들과 거리가 가까워
개울을 사이에 두고 교전하였다.
적은 대부분 총을 소지하여
그칠 사이 없이 연달아 쏘아대므로,
나와 안선달ㆍ박군이
돌을 의지해 마주 항전.
연달아 6명의 왜적을 맞추니
왜적은 사람과 가축을 버리고
엄천촌(淹川村)을 향하여 달아났다.
그후 나는 사람들을 시켜
화살을 거두어 오게 했다.
돌아오다 등구현 앞에 당도하니,
포성과 고함소리가 가까이 들려,
급히 달려가 보니 본현 사또 남간
내가 왜적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
지원군을 수십 명을 보내어 왔는데
마천곡(馬川谷)에서 나온 왜병 30 명을
의탄(義灘)에서 만나 접전하는 중이었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합세하여 싸웠다.
날이 저물자 우리와 왜병은 각각 동서로 후퇴.
황현촌에서 자려하다가 적의 야습이 염려되어
그보다 뒤로 물러나 백장사(白丈寺)로 올라갔다.
그러나 화살이 다 떨어졌기에
더 머물러 있어봐야 무익하므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집에 돌아왔다.
그날 밤에 왜병은 수백명 군사를 합하여
곧 황현에 이르러 수색하며 약탈하고 불지르며
우리편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의병이 떠난 곳을 물었다.
운봉 지나 남원의 동촌 번암 견천을 거쳐 장수(長水)에 이르렀다.
병사 방어사와 원수부 별장 조신옥ㆍ홍대방 등이 진으로 돌아왔다.
운봉에서 왜적이 처들어온다는 경보를 듣고서 군사를 이끌고 온 것
선조 31년 1598년 무술
4월10일
곤양(昆陽)의 왜적 4백여 명이
하동(河東)ㆍ악양(岳陽)을 경유하여
지리산의 쌍계 칠불 연곡 등 사찰로 들어가
수색하며 도둑질하다가 반야봉(般若峯)을 넘어
14일에 몰래 남원의 황령 운봉의 대암(臺嵓) 등
사찰에 이르러 함부로 살육 약탈하고,
여러 왜적이 다시 칠불사로 집합하여
먼저 몇 놈의 적을 보내어 석주성(石柱城)을 밀탐하였다.
구례의 원 이정남이 적이 산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가서
석주성(石柱城)을 정탐하다가 길에서 정탐하는 적을 만나
추격하여 잡으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이정남이 그대로 석주성에 있으면서 망을 보는데
왜병 수백 명이 돌진하여 성 밖에 이르러 오니,
정남이 후퇴하자 적병이 용두까지 추격했다.
평안도 군사가 본도 병사와 같이 막아 싸우는데
명군이 계속하여 이르니 군세가 매우 성하였다.
적은 벌려서서 시위하다가 저녁 때 물러갔다.
무술년 만력 26년, 선조 31년(1598년)
사천의 적 5백여 명이 진주를 경유하여 지리산으로 난입하여
두류(頭流)ㆍ금대(金臺)ㆍ안국(安國) 등의 절을 뒤지고
살육과 약탈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방위는 군사를 보내 공격하여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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