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48. ( 1643년 박장원 유두류산기. )

donkyhote 2012. 5. 3. 20:35

1643년 박장원 유두류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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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원(朴長遠, 1612~1672)은 1636년에 과거 급제
불행히도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1639년에 선조실록의 수정본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말년에 개성 유수로 재직하다가 세상을 등진 인물.

이 글은 박장원의 문집인 [구당집]에 실려 있다.
1643년 음력 8월 20일부터 29일까지 지리산 등반
천왕봉 일출 등 아름다운 경관을 기록한 산행기.

[지리산에 가련다] 김양식 지음 - 도서출판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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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코스 : 함양 - 백무동 - 제석봉 - 천왕봉 - 백무동
산행 시기 : 1643년 (음력) 8월 20일 ~ 26일


남쪽지역 큰산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지리산이 으뜸이라고 들었다.

대개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산이 제일이며
백두산이 뻗어내려 지리산을 만들었다 한다.
그래서 지리산은 일명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이 유명한 것은 당연한 일.
지리산은 영호남 9개군에 걸쳐 있다.
맑고 청명한 기운, 염험한 자취, 웅장한 모습
넉넉한 볼거리는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이다.

하여, 그곳에 가고픈 생각이 절실했으나,
벼슬살이에 얽매어 뜻을 이룰 수 없었고
지리산과 인연없는 것만 한스럽게 여겼다.

금년 봄에 나는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지방직을 자청
다행히 그것이 받아들여져 안음현감으로 발령 받았다.

안음현(현 경남 함양군 안의면)은 덕유산의 기슭에 있고
자연경관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진 곳.
주위는 모두 산이라 산동성 나부산 세 고을에 비해 손색 없었다.

더욱이 지리산과의 거리는 겨우 수십 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해 고을에 가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굶어 죽는 백성들이 많아 모두 다 돌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되었다.
그러니 밥을 대한들 어떤 마음이겠는가.
지리산에 가려는 나의 생각은 희망사항일 뿐.

마침 가을에 큰 풍년이 들었다.
백성들의 형편도 조금 나아졌다.
드디어 지리산에 갈 준비를 했으나
막상 떠나려 하자 같이 갈 사람이 없었다.

사근역의 찰방 이초로는 자가 도경으로
우리 집안과 대대로 교류가 있었으며
예전부터 나와는 친숙한 사이었다.

마침 타향인 이곳에서 만나
더욱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글을 보내 초대하였다.
우리는 만나서 지리산에 같이 가기로 약속.

그밖에 서울 출신인 예안현감 양원(자 군실)과
진사 신찬연(자 영숙)도 같이 가기로 하였다.

세 사람도 같이 가기로 예정하기 힘든데,
하물며 네 사람이 동행하기로 하였으니
나로서는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8월 20일

드디어 산행을 떠났다.
고현교에서 온 신영숙과 나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시내 따라 내려갔다.

잠시 쉬었다.

이리저리 얽키고 설켜 휘감긴 고개들이
마치 하나의 띠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고,
쓸쓸히 서있는 큰 대(절벽)를 감싼 것은
그곳을 구비구비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었다.

시냇물에서 몇 리쯤 떨어진 언덕 위에
높고 견고하게 우뚝 선 것은 일두서원.

시냇물 동서에는 누렇게 익은 벼이삭이
구름처럼 넓은 들판위에 펼쳐져 있었다.

진실로 좋은 시절이었다.

겨우 공적인 사무를 접고
홀가분하게 벗어날 생각으로
이곳에 오니 날아갈 듯한 기분.

그러나 날개가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저녁에 사근역 정자에 도착하였다.
정자 주인은 뛰어나와 반갑게 맞이

"어떻게 이렇게 늦어졌습니까.
양군실 어르신은 와 계십니다"

양군실 집은 사근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
여기에 나보다 훨씬 더 빨리 올 수 있었다.
네 사람은 같이 저녁식사 후에 술을 마셨다.

술을 주고 받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8월 21일

네 사람은 집 앞 시냇물을 건넜다.
고개 몇 개를 넘어 20리 정도 걸었다.
큰 시냇가 옆에는 한 정자가 있었는데,
함허정(경남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이었다.

1597년에 진주성이 함락될 때
순절한 의병장 최변이 세운 것.

당시 노래와 춤을 즐기던 곳
지금은 정자가 퇴락해 있었다.

그러나, 푸근한 산 사이로
시냇물이 꼬불꼬불 흐르고 마을마다
노랗게 익은 감과 밤이 주렁주렁 달렸다.
꼭 한 폭의 그림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정자 옆 조팽수라는 서자 출신 노인.
그는 부잣집이면서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위해 정자 위에 음식을 차렸다.

진수성찬이었다.

우리들은 마음껏 술을 마시면서 환담.
그러는 사이에 해가 지는 것도 몰랐다.
드디어 초가집 안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초가집 대들보와 서까래는 우산 모양이었고
지붕은 흰띠로 이었고 벽은 흰흙을 발라 놓았다.
집 벽과 창문이 매우 정감어려 운치가 돋보였다.


8월 22일

시냇가를 출발해 올라갔다.
이곳은 용유담의 하류이다.
이곳과 용유담은 이십 리 정도

그 사이에는 간간이 조그마한 마을.
마을마다 반드시 기름진 논이 있고
물이 얕이도 고기가 살아 살만한 곳.

"귤주의 논밭은 기름지고 물은 맑아도
물고기가 많다"고 했다는 '두보'의 시.

그것은 진실로 무릉도원을 모르고 한 말이다.
사람이 먹고사는 이치는 그와 같지는 않은 듯.

나는 여기에 이르러 시 한 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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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하니
다른 산과 전혀 같지 않는 비경.

지리는 험하고도 웅장하니
기색은 하늘에 가까이 있네.

땅은 모두 벼 심기에 알맞고
샘의 근원에 고기가 살고 있네.

어찌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움막짓고 살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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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용유담에 도착해 말 안장을 풀었다.
용유담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고
용유담 그 위에는 모두 하얀돌이 깔려 있었다.

물에 잠긴 돌빛이 깊고 맑았다.
높고 낮은 돌 위에 수백 명도 앉을 듯.
네 사람은 돌위에 앉아 술잔을 주고 받았다.

악사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는데,
그 소리가 돌을 쪼개고 구름을 뚫는듯
마치 깊은 물속 용이 신음하는 소리인듯.

그렇게 한참 쉰후 다시 길을 떠났다.
산길 옆에는 엄천강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마을 안에 폐허가 된 성이 있었다.

옛 노인들의 말로는 방호성이라 하였다.
그 성은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
훗날 박호 장군이 다시 축성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성 이름은 두 가지로 불리는 것.

저녁 때 군자사에 이르렀다.
(현재 함양군 마천면 군자동).

이 사찰의 본래 영정사였었는데,
신라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아
사찰 이름을 군자사로 고쳤다고 한다.
사찰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했다.

서쪽에 있는 삼영당은 새로 지은 건물인데,
노란 빛과 푸른 빛을 곱게 발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청허, 사명, 청매 3 대사의 초상화.

촛불을 들어 비추어보니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는 듯.
그 중 사명대사는 머리가 길었다.

정말로 잘 생긴 남자였다.
이날 밤 네 사람은 폭음후
밤이 늦어 잠자리에 들었다.


8월 23일

며칠째 맑았던 날씨가 연일 비가 올 것만 같았다.
기온은 매우 따뜻하였으나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이날 천왕봉에 오르려 하자, 노승들이 모두 만류.

"저희들은 천왕봉에 오르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습니다.

비록 쾌청한 날일지라도
중봉에 닿기도 전에 번번이 구름이 일고
비가 쏟아져 진퇴양난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하물며 오늘처럼 이 절을 떠나기도 전에
구름이 이미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오니 원컨대 헛걸음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 네 사람은 "이번 산행을 결코 중지하기 어렵다.
우리들이 신선과 인연이 있고 없고는 오늘 결정될 뿐"

이내 말을 몰아 십리 떨어진 백무당에 이르렀다.
이 당집은 음란한 사당으로 무당들이 모이는 곳.

이곳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당직으로 불리는 자에게 복종
그것은 용유당도 마찬가지였다.

당 안에서 잠시 쉬었다.

그런 다음 말을 버리고 가마를 타고 하동바위에 도착.
곁에 있던 중이 우리 일행에게 이곳 유래를 알려줬다.

"옛날 하동군수가 이곳에 이르러
비를 만나 길을 잃고 헤맸기 때문에
이 바위를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곳부터는 산이 더 험준하고 길이 위험하고 좁아졌다.
그래서 네 사람은 죽 늘어서서 걸어 옛 제석당터에 도착.

비로소 좌우가 탁 트였다.
수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붉은 단풍으로 타오르는 듯.

노란 빛 소나무와 회나무가 섞여 있었다.
구름과 안개가 물결치며 갖가지 형태로 변신
그것이 괴산이 만든 괴이한 현상이라 할지라도
몰래 와서 구경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게 있었다.

제석당에 이르렀다.

당집과 천왕봉은 겨우 10리인 만큼
제석당이 위치한 높이를 알 만하다.

잠시 가마를 쉬게 하였다.
중들이 흰떡을 나눠주는데,
제석당 당직이 제공한 음식

천왕봉에 이르렀을 때도 떡을 제공했다.
제석당에 도착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하늘은 높고 넓었으나, 바람이 매우 세찼다.

곁에 있던 중이 근심어린 조언.

"이곳에서 만약 바람을 걱정하시면
정상을 올라가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해가 지는 것을 굽어보고
급한 마음에 일행을 재촉해
제석당 뒤쪽으로 걸어 올라가니,
멀리 남해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영호남 바닷가와 고을이 줄지어 선듯
그 마을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윽과 배바위를 지나쳤다.

스님이 이르기를,
이 산이 바다에 있을 때
배를 정박하던 곳이라 했다.

문암에 들어갔다.
돌문(통천문)이 있고
문에는 긴 나무 사다리.

천왕봉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이 문으로 들어가 사다리 건너
천왕봉 정상에 다다를 수 있는 문이었다.
그래서, 문암이라는 이름을 붙인 곳이었다.

이내 바위를 잡고 기어올라 곧바로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 위에는 또 하나의 사당이 있었는데 성모사였다.

그곳 외에는 몸을 보호할 곳이 없었다.
천왕봉에서는 위로는 별을 딸 수 있고,
아래로 드넓은 산하를 굽어볼 수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있는데,
단지 한 기운만이 하늘과 땅 사이에
마치 흰 비단이 펼쳐져 있는 것 같다.

눈 아래 산하는 모두 흙덩이 같고 실 같아
밝은 눈이 아니면 자세히 볼 수 없을 지경.

그러나, 나의 눈과 글재주는 궁색하여
경관을 만에 하나 밖에 형용할 수 없다.

잠시 둥근 해가 바다에 지는 것을 보니,
괴기한 자색과 붉은 색의 온갖 형상들.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놀라워했다.

"저 경이로운 색상이 무엇이냐.
저 장관이 무엇이길래 나로 하여금
이 높고 험한곳까지 오게 한 것인가?"

석양 노을을 본 뒤 성모사로 들어가
서로의 몸을 베개 삼아 함께 누웠다.

바람이 노한 듯이 휘몰아쳐
판잣집을 날려 버릴 것 같다.
성모사를 지키는 사람이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바람은 바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익숙해지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람은 진정되었다.

달이 뜨고 별자리도 초롱초롱,
반짝반짝하는 별빛이 촛불로 변해
하나의 은색 세계를 만드는 듯 했다.

피리 부는 사람이 사당 뒤편 일월대로 나와 앉아
한곡조 연주하니 몸이 차지만 혼이 맑아지는 기분.

그리고 두 어깨가 들썩이는 듯하니,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도 부럽지 않다.

어느덧, 달도 지고 바람도 가시었다.
앉아 맞는 새벽 찬기운이 무르익었다.
붉은 해가 떠오르면서 세상이 밝아진다.

가마를 메는 중들이 무려 70 여명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해돋이를 보고 감탄하며 이구동성

"우리들이 지금까지 어깨에 가마를 매고
여기에 오른 횟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허나 해지고 달뜨고 일출을 본 것은 한두 번
우리 어르신이 신선의 기술을 터득한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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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은 하늘나라 출입문에 닿아 있어
머리 위의 별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네.

두 눈으로 아무리 보아도 막히는게 없으니
어느 곳이 곤륜산인지 도통 알지 못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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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4일

아침 일찍 하산하였다.
제석당과 백무당에 조금 머문 뒤
저녁에 안국사(현 경남 휴천면 가흥리)에서 잤다.
이날 하산할 때 하늘에서 싸리눈이 조금씩 휘날렸다.


8월 25일

늦게 출발하였다.

가마타고 안국사로 가는 도중
5리 떨어진 금대암을 지나쳤다.

지세가 홀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산 전체가 초목으로 우거져 있었다.
마치 금강산의 정양남루와도 같았다.

그저께 잠을 잔 천왕봉을 바라보니,
거대한 기둥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듯
구름과 무지개가 밝아졌다 사라졌다 한다.

참으로 옛사람들이 말한,
신선 사는 곳에서 노니는 듯.
꿈을 꾸고 있는 것 만 같았다.

오후에 함허정에 이르렀다.
정자 뒤의 높은 대에 오르니,
지난 번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저녁에 사근역 정자에 도착, 하룻밤 묵었다.


8월 26일

도경과 작별한 뒤 일찍 출발하였다.
양군실과 신영숙과 함께 말을 타고
운고정에 올라 일행과 술한잔 나누며
이번 산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술자리를 끝낸 뒤 관사로 돌아왔다.

문득 예전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가을날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고향 생각에 잠기며 어느덧 세속에 찌든 나.

그래서 한번 지리산을 유람하고자 해도
일행이 마음을 맞추기가 무척 어려웠고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만은 되지 않았다.

이번에 지리산을 같이 다녀온 우리들은
모두 남쪽에 떨어져 있는 같은 고향 사람.

비록 나이는 같지 않을 지라도
서로 기쁨을 나눌 수 있던 사이.

우리들은 지리산을 등반하는 7일 동안
흉허물을 털어놓고 농담을 주고 받았다.
이는 실로 세상에서 두 번 다시 없을 인연.

우리들이 지리산을 등반한 동안
조금도 신의 미움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조물주는 우리들이 오자,
괴이한 것을 멀리 떨어지게 하고
중국 강남에 있는 구름을 펼쳐 준듯.

또한 천왕봉에서 달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우리들이 품었던 뜻을 모두 이룰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처음부터 내가 바랐던 일이 아니겠는가?

여러 사람들이 이번 일을 기록하자 하여,
나로 하여금 두류산 기행문을 쓰게 했다.
나처럼 글을 짓지 못하는 사람도 없을 것.

다만 여러 사람들이 주고받은 것을 주워모아
먼 훗날 누워서도 유람할 수 있도록 할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