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127.( 용산문화. 치우천왕. 와룡산. 삼천포. 사천시. )

donkyhote 2011. 2. 28. 03:47

용산문화.

 

 

 

전통적으로 남성 상위문화를 갖고있는 경상도 지역.

강력한 부계사회를 연 용산문화 영향인듯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남성 상위시대를 연 용산문화.


용산은 산동성(山東省) 룽산 진(鎭)에서 따온 것이다.
BC 3000~2000년 물레를 이용해 만든 난각(卵殼) 토기,

회도(灰陶), 사각 마제석기,
흙을 눌러 만든 벽돌 유물.

동물뼈를 가열해 생기는 균열을 보고 미래를 점치는 골점
하남성(河南省) 북부, 안후이성(安徽省), 산동(山東)반도.

'신석기시대 초기' 앙소문화 특징은 마제석기와 토기,
주식 곡식은 화북지방에서는 조와 기장, 강남에서는 쌀
돼지 개를 사육하고 사슴을 수렵, 어망과 낚시로 고기잡이.

'야생 과일과 조개류를 채집하였던 모계사회.'

중국 모계사회에서 부족사회 전환기는 B.C. 3000년경
이후 일부일처제로 진행되고 다시 일부다처제로 발전
부계 중심의 사유제 발생과 계급 분화라는 발전 단계.

용산문화에서는 돼지 개 소 말 양 닭 등의 뼈가 출토
수렵에도 호랑이 사슴 늑대 이리 맹수를 사냥한 흔적
가축사육 및 사냥기술도 발전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농업생산을 위한 도구로는 돌로 된 호미, 가래, 삽,
쟁기, 돌절구, 돌절구공이, 돌방망이 등이 사용되었다.
들에 불을 놓아 농사짓는 화전농법(火田農法)을 사용했다.

 

룽산문화의 특질을 요약하면, 검은간토기를 많이 사용한 점

간석기의 보급,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부엌용 반월형 돌칼

돌낫의 출현, 식칼 ·톱 ·낫 등 패기(貝器)의 사용, 골점(骨占)

 

그러나 이 문화기는 농경과 목축의 병용기로

양샤오문화기에 비하여 농경기술이 진보하고,

가축 수도 증가, 계급차이가 발달하지 못한 단계

 

이 문화는 보리·조를 주로 하는 농경 문화로서

돼지·개·염소·소를 사육, 사슴·멧돼지를 수렵

어로도 행해졌고 원형의 반 지하식 수혈(竪穴) 주거

그 바닥을 백회니 (白灰泥)로 포장하고 있다.


용산문화가 최초로 발견된 산동성 제남시 동쪽 용산진(龍山鎭).
<용산진>과 '용(龍)이 누웠다'는 <와룡산>은 바닷길 시작과 끝.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용산진>과 <와룡산>은 무관하지 않다.

시와라 환웅의 배달 신시 천도 후에 장당경에 남았다는 실위족.
실위족은 한인(桓仁) 후손이며, 치우(蚩尤)천황이 이끄는 종족.

치우천왕 한웅 한인을 삼신(三神) 또는 삼성(三聖)이라 한다.
치우천왕은 중국 유망과 그뒤를 이은 헌원과 탁록에서 결전하여
싸워 이기고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청구국을 열었다는 통치자.

갈로산에서 쇠를 캐고, 옹호산에서 야금을 했다는 치우천왕
치우천왕이 세운 청구국은 산동반도의 태산(泰山) 아래였다.

치우천황이 B.C 2700년경 산동반도에 옮겨와
청구국이 일으킨 문화가 용산문화(龍山文化).

B.C 2800년 치우천왕 용산문화는 녹인 구리 덩어리를 단조
두드려 펴서 치우천황의 투구를 만들었다는 주조기술 단계.
700년 후 하나라에서 대형 솥을 주조한 것보다 훨씬 앞섰다.

하북 백성들은 치우천황 신전을 모시고
치우천황이 3신을 데리고 북경으로 와서
탁록 벌에서 헌원을 물리친 사실을 믿는다.

B.C 4000년경 청동기시대를 열었던 슈메르인
B.C 3100년경 사자 독수리 사슴이 새겨진 청동기.
고구려 발해의 청동기 유물은 중국보다 4~5백년 선진.

청동기문화는 중국보다 가야 문명권에서 비롯.
한반도 청동기 철기 문화는 중국보다 선진수준.
와룡산은 중국 용산문화에서 비롯된 지명 같다.

'와룡산의 상사바위 전설'
'사량도의 근친상간 전설.'

'뱀사골 지명에 얽힌 전설.'
'용과 뱀에 관련된 전설들.
'거북선 뱃머리의 용 머리.'

'용산문화에서 비롯된 듯.' 

 

 

 

 

치우천왕 (蚩尤天王 )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왕이 건국한 배달국 (倍達國 )
 
제 14 대 천왕으로서 한단고기 ( 桓檀古記 )에 의하면
BC 2707 년에 즉위하여 109 년간 나라를 통치했던 왕
다른 이름으로는 자오지 ( 慈烏支 ) 환웅이라고도 한다 .
 
삼성기 하편에 의하면 신처럼 용맹이 뛰어났고
구리 머리와 쇠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키며
세상을 다스렸고, 철 주조 병기 제작술이 뛰어났다.
 
치우 =  '우레와 비를 만들어 산과 강을 바꾼다.'
 
 
중국인 학자 왕동령이 저술한 < 中國民族史 > 에 의하면
4 천년전 (?) 현재의 호북성 , 호남성 ,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들이 점령했는데 중국의 한족 ( 漢族 ) 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는데 ,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 (九麗 )
 
'구려의 군주는 치우이다 ' 라고 되어 있고 ,
같은 < 사기 > 를 송나라의 배인이라는 인물이
주해한 책에 따르면 ' 치우는 옛 天子이다 '
 
즉, 치우천왕는 동이족의 제왕
 
치우천왕은 고대 중원에서 군신, 병주 (兵主) 로 추앙
그의 등에서 붉은연기 같은 것이 깃발처럼 휘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고 전해온다 .
 
<사기> 봉선서에 의하면 한나라를 세운 유방 (劉邦 )
전쟁에 나가기 전에 치우에게 제를 올린 다음에 출전
그후 한나라를 세운 뒤 치우의 사당까지 세웠다 한다 . 

....한국 전통문양집 3 권 도깨비편.....
도깨비 기원 중 하나로 치우장수 기원설
치우는 본래 동이 ( 東夷 ) 계의 군왕으로
후세에 제(濟) 나라 군신으로 숭앙 되었다
 

이처럼 치우천왕은 전쟁의 신 , 군신으로
그 자체로 승리를 상징하는 신적인 인물
 
치우천왕의 모습이 다양한 형태로
고구려  백제  신라 역대 왕릉에 조각
그가 국가를 수호하는 군신이었기 때문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는 붉은악마 ,
그 자체로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치우천왕의 상은 바로 한국 축구의 승리를 상징
 
 
방패연 이미지도 공유하는
사면팔방 중심에 치우천왕 

 

 

 


와룡산.

 

 


경남 사천시 사천읍, 사남면 와룡산(臥龍山) 799m
한려 해상 국립공원 중심부에 있는 삼천포의 진산.
남해안에 위치한 이 산은 높이에 비해 웅장한 산세.

서부 경남, 이웃 전남과 부산 창원일대 클라이머들
즐겨찾는 곳으로 인기있는 삼남지방 산악인의 요람.

암릉으로 이루어진 새섬바위와 상사바위, 기차바위
억새 능선,소나무 숲길을 품은 여름 산행지로 적격.
민재봉과 새섬바위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조망이 일품.

와룡사, 백천사, 백룡사등 암자와 사찰.

백천사는 1300년전 신라 문무대왕 때 의선대사가 창건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물리친 곳.
이순신 장군이 수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진두 지휘한 곳

와룡산은 가락국 김수로왕 당시부터 불교의 성지.
김해에서 와룡산 거쳐 칠불사로 전파된 남방 불교.
그러므로, 와룡산은 지리산 이전부터 불교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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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산이 있는 삼천포 행정지명은 경남 사천시.
사천시는 중국 편서, 장강 상류 사천성에서 유래.
사천성은 약칭으로 천(川 chuan) 혹은 촉(蜀 shu).

'사천 지명은 촉 유민들의 한반도 유입 흔적.'

중국 사천성은 한반도 문화와 유사한 점이 많다.
마치, 같은 핏줄 조상이 아닐까 여겨질 정도이다.
그렇게 여겨지는 공통점을 한번 살펴 보기로 하자.

중국에서 제일 인구가 많고 유비가 다스렸던 촉한
중국 4대 요리 중 하나로 맵기로 소문난 사천요리
사천성과 사천시는 고대국가로부터 해상무역 권역.

사천은 분지로 공기 중에 습기를 머금고 있어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날씨가 혹독히 추워
땀내거나 열내는 고추, 마늘, 파를 많이 사용

대표적인 요리= 마파두부,
사천성의 수도 = 성도(成都)

'저지대 서해에서 함께 살았던 민족 아닐까?'

그후 오랜 세월 상호 문화적인 교류를 했던 흔적.
사천 지명의 공통점과 음식문화 등이 이를 뒷받침.
중국 사천성과 경남 사천시를 이어왔던 서해 바닷길.

'와룡산은 용산(龍山)문화에서 비롯된 지명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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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출생한 김수로왕은 허황후와 사이에 10남 2녀
허황후는 인도 갠지스강 상류 태양왕조 공주 허황옥.
김수로왕 큰 아들 거등(巨登)은 가락국의 왕위를 계승.

차남 석, 삼남 명 = 모후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 시조

일곱왕자는 허황옥의 오빠 인도스님 장유보옥 따라 출가.
가야산 3년 수도 후 수도산, 와룡산을 거쳐 101년 지리산.
반야봉에 운상원을 짓고 103년 음력8월 15일에 모두 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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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불교 전래 경로로 알려진 수도산 & 와룡산.'

경북 김천시 수도산은 가야산 북서쪽, 김천과 거창의 경계
수도산 (1,317m)은 가야산을 분수령으로 하는 일명 불영산
정상에서는 가야산, 덕유산, 황악산, 금오산이 손에 잡힐듯

수도계곡은 구비마다 절경이고,
정상인 신선대 부근에는 수도암
청암사 승가대학은 비구니 사찰.

수도산 청암사는 해인사의 말사.

삼천포항 약간 못미쳐 거대한 수문장같은 '와룡산'.
와룡산은 지리적 여건상 남방 불교 유입경로 입구.
당나라 불교는 와룡산을 경유해 한반도에 전래된듯.

지금부터 와룡산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와룡산 북쪽은 사천시 사남면 동쪽은 고성군을 경계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용(龍)이 누워있는 모습과 흡사

고려 제 8 대 현종이 등극하기 전 어린시절에
귀양살던 아버지와 같이 살았다는 전설의 고향.

옛날에 팔만구 암자(八萬九 菴子)가 있었다는 와룡산.
와룡산 기슭 백천골은 임진왜란때 승병들이 싸운 격전지
성문등(城門嶝) 파병산(派兵山) 난곡(亂谷) 퇴병산(退兵山)

와룡산은 섣달 그믐날 밤마다.. 산이 운다는 전설.

와룡산은 경사가 급해 쉽게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등산로는 와룡마을 뒤쪽 남양동(南陽洞)이 들머리.
짜릿한 암릉과 주변 그림 같은 다도해 풍경이 백미.


등산코스 : (4시간 반 거리. 매식 가능)

죽림동-돌담집-도암재-천왕봉(상사바위)-도압재-
새섬바위-와룡산(민재봉)-백천배-백천게곡-백천동


............상사바위 암벽등반 코스...................
경남 마산, 진주, 사천시 전문 산악인들의 요람.
1970년대 초모롱마(1972년창립)산악회가 첫 개척.
1883년 창립한 마차푸차레 산악회 본격적 루트 개발.
산우산악회, 비룡산악회, 맥산산악회 등 개척의 열기.

1980년~ 90년대 자유등반 루트가 추가로 개척
현재 삼천포의 대중적인 암장으로 우뚝 서있다.

찾아가는길

승용차로 남해고속도로에서 사천시 방향으로 진입
나들목을 빠져나가 사천시(삼천포)방향으로 계속간다.
사천시 조금 못 미쳐 남양에서 좌측 와룡산으로 집입

대중 교통을 이용할 때에는 진주에서 사천시행 버스
사천시 바로 못미쳐 남양에서 내려 예비군 훈련장 지나
남양 저수지 다리를 건너서 좁은 도로를 따라 용주사 방향

용주사를 좌측에 두고 우측 계곡 옆 등산로 따라 30분 거리
이곳 '도암재' 야영장에서 우측으로 5분 거리에.. 상사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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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바위 전설....................
와룡산 정상 민자봉 남쪽 용현면에 살던 처녀
동네 총각이 짝사랑하던 나머지 사랑병으로 죽어
그 혼이 상사뱀이 되어 처녀의 몸에 붙어 살았다.

처녀의 몸을 칭칭 감고 처녀의 눈을 마주보며
처녀 눈물만 받아먹고 처녀의 그곳에 보금자리.

그 처녀의 부모는 딸의 모습이 하도 안스러워
뱀을 딸의 몸에서 떼어내려고 온갖 처방을 동원.
결국, 상사바위 위에 딸을 세워놓고 뱀에게 애원.

“니가 안떨어지면 내 딸을 밀어 버릴란다.”

뱀이 그래도 딸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자
어머니는 딸을 바위아래로 밀어 떨어뜨렸고
자신도 그곳에서 뒤따라 몸을 던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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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섬바위 전설........................
옛날 대홍수에 새한마리 앉을 만큼 남았던 곳.
하여, 얼마전까지 굴껍질 흔적이 있었다는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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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



1995년 사천군과 통합되어 사천시가 되었다.
한려수도 중심 기항지이며, 서부경남 관문항구

지금의 사천시 벌리(閥里)·동(東)·서(西)·선구(仙龜)·
동금(東錦)·서금(西錦)·동림(東林)·좌룡(佐龍)·용강(龍江)·
와룡(臥龍)·봉남(鳳南)·이금(梨琴)·궁지(宮旨)·이홀(耳笏)·
사등(沙登)·향촌(香村)·대방(大芳)·실안(實安)·마도(馬島)·
늑도(勒島)·신수(新樹)·신벽(新碧)·백천(白川)·노룡(魯龍)·
대포(大圃)·송포(松圃)·죽림(竹林) 27개동이.. 옛 삼천포시

이조시대까지 조창 또는 진(鎭)이 설치된 포구
이 지역은 진주·사천·고성 등에 나뉘어 소속
진의 위치가 변화에 따라 행정구역도 변천했다.

대체로 신라시대에는 사물현(史勿縣:사천)에 속했고
고려시대 진주목 소속 말문향(末文鄕)과 각산향(角山鄕)
고려 성종 때 조세미를 수송하기 위한 통양창(通陽倉) 설치

992년(성종 11) 현종의 아버지가 유배
현종은 어린시절을 이곳에서 보내었다.

1360년(공민왕 9) 왜구가 각산성(角山城)에 침공
일찍부터 성이 있어 군사적 방어기지 역할도 한곳.

이조시대 진주 소속 말문리(末文里:뒤에 말문면)
진주의 남쪽에 위치했던 사천군의 행정구역을 넘어
월경지(越境地)였던 이곳 남쪽 중앙은 삼천진(三千鎭)

삼천진은 1488년(성종 19)에 진성(鎭城)을 새로 축조
1619년(광해군 11) 고성 우수영 서남쪽으로 이전했다.

1895년 진주부, 진주부 사천군, 고성군
1896년 경상남도 소속으로 편입 되었다.

1906년 진주 두입지였던 삼천포가 사천으로,
문선면·남양면·영현면·영이곡면·오읍면·
개천면은 고성군으로 이관되었다

1912년 남양면을 사천군에 편입함으로써
대부분 지역이 사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1918년 사천군 수남면과 문선면을 합하여
삼천포면으로 개칭하고 1931년 읍으로 승격

1956년 삼천포읍과 남양면을 합해 삼천포시
1965년 진주와 삼천포를 잇는 진삼선이 개통
연안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이 더욱 촉진
도로 교통 발달로 현재는 철도가 폐지되었다.

1995년 사천군과 통합되어 사천시가 되었다. 




사천시[泗川市] 



경남 남서부에 있는 삼천포시와 사천군 통합시
한려수도의 중심기항지이며, 서부경남 관문항구.

최근 최첨단의 항공산업단지로 변모하고 있다.
사천읍·정동면·사남면·용현면·축동면·곤양면·
곤명면·서포면·동동·서동·늑도동·신수동·마동·
선구동·동금동·서금동·동림동·좌룡동·벌리동·용강동·

와룡동·봉남동·이금동·이휼동·궁지동·사등동·
향촌동·대방동·실안동·송포동·죽림동·노룡동·
벽촌동·신벽동·대포동 1개읍 7개면 27개동이 있다.

시청소재지는 사천읍 수석리이다.
면적 395.99㎢, 인구 115,060(2003),.
1914년 옛 사천군과 곤양군이 통합된 곳.

사천군은 본래 신라의 사물현(史勿縣)으로,
포상팔국(浦上八國) 중 하나인 사물국(史勿國)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사수현(泗水縣)으로 개칭,
고성군 영현(領縣)이 고려초 940년) 사주(泗州)로 개칭.
1018년(현종 9) 진주 속현, 1172년(명종 2)에 독립했다.

1413년(태종 13) 이조시대 사천현, 별호는 동성(東城).
1895년에 진주부 사천군, 1896년에는 경상남도 사천군.
1906년 진주 두입지(斗入地)인 삼천포가 사천군에 편입

남양면은 이조시대 진주 소속,
1906년 고성군으로 편입되었고
1912년 남양면은 사천군에 통합.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수남면과 문선면은 그대로,
하가면·군내면·북면이 읍내면으로,
상주내면·동면이 읍동면으로,
상서면·근남면이 읍서면으로,
중남면·하남면이 읍남면으로 통합

이때 곤양군이 폐지되어 사천에 병합
곤양군의 가리면·동부면이 곤양면으로,
서포면·우포면이 서포면으로,
곤명면·소곡면·초량면·성방면이 곤명면으로,
진주군의 부화곡면·축동면이 축동면으로 폐합·편입

1918년 수남면과 문선면을 합해 삼천포면으로 개칭
1925년 읍내면이 사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31년에 삼천포면을 읍으로,
1956년 삼천포읍과 남양면을 합해 삼천포시

1931년 읍동면을 정동면으로,
읍서면을 사남면으로,
읍남면을 용현면으로 개칭.

1956년에는 사천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95년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합쳐 사천시


[자연환경]

소백산맥의 지맥이 뻗어 있는 지역으로
동남쪽 경계에 솟은 와룡산(臥龍山:799m)
흥무산(興霧山:455m)·이명산(理明山:570m)·
봉대산(鳳臺山:409m)·구룡산(九龍山)·남산(南山)·
성황당산(城隍堂山:210m), 남쪽에 각산(角山 : 398m)

남쪽 각산 줄기가 이어져 시 남쪽으로
조차(潮差) 심한 전형적 리아스식 해안에
사천만과 개섬·진도·월등도 등을 형성했다.

곤양천(昆陽川)·가화강(加花江) 등이 남동류하며,
사주천·길호강 등도 북동부를 지나 사천만에 유입.

와룡산과 주변산지에서 발원한 한내천·봉현천·좌룡천 등
바다에 유입되고, 하천유역과 서포면 해안일대에 평야가 분포.
연평균강수량은 1,322.9㎜ 정도이고 난대성 식물들 분포 지역.
대나무·동백나무·탱자나무·비자나무·팽나무 등이 자생한다.


[산업·교통]


총 경지면적 97.93㎢ 가운데 논이 70.72㎢, 밭이 27.21㎢
주민 30%가 농업. 쌀·보리·팥·녹두·콩·밀·감자 등
대표적인 특산물로 단감, 딸기, 포도, 마분말과 쥐치포 등

다솔사 부근에서 자생하는 죽로차,
용현면 선진리의 백합죽 등도 있다.
밤을 비롯 대추·섬유원료 등이 생산.

수산업이 전체 산업분야 중 14%를 차지
남해안 연안어업의 중심지로 어업 활발.

쥐치·멸치·갈치·전어·고등어
백합 굴·새꼬막 등의 조개류가 많다.

사천공항을 비롯해 삼천포항을 끼고 발달한
해상교통과 고속도로·국도·지방도 등 편리
첨단 항공산업단지 및 섬이 많은 관광 휴양지

남해고속도로가 진주·마산·순천으로 연결되고,
각지를 연결하는 국도와 지방도 등 도로망이 편리.
삼천포항에서 여수·부산까지 정기항로가 나 있다.

[유물·유적·관광]

매향석각문, 사천시 사천읍에 있는 산성공원
다솔사 전경, 곤명면 용산리 국가지정문화재
도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유물 유적이 많다.

서포면 구평리 조개더미에서 신석기말 유물 다량 발굴
늑도에서 늑도 패총(경상남도 기념물 제75호)이 발굴.
고인돌·석관묘·선돌 등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유적들.

......................늑도 패총.....................
1985년부터 발굴된 패총·무덤유구·토기류(중국계)
일본계(야요이 토기, 점토대 토기)·반량전·오수전·
한나라 거울 등 1만 여점 유물이 발굴된 선사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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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면 덕곡리 지석묘군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49호로,
남양2동의 신벽동 지석묘군은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곤명면 용산리 다솔사(多率寺)는 신라시대의 사찰로서
다솔사 대양루·극락전 응진전·보안암석굴 문화재 보유

곤양면 흥사리에는 1387년 이 지역 사람들의 안녕과
미륵보살의 하생을 축원하여 세운 사천매향비가 있다.

읍성으로는 사천읍성·곤양읍성이 있다.
이외에도 각산산성, 각산봉화대가 있고,
삼국시대의 토성인 사천읍의 성황산성과
용현면 선진리의 사천조명군성(泗川朝明軍城),
사천선진리성(사적 제50호) 등이 유명하다.

또한 곤명면 은사리에는 세종대왕태실지
단종태실지(경상남도 기념물 제31호),
대방진굴항(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5호)

유교문화재로는 사천읍 선인리의 사천향교
곤양면 송전리의 곤양향교 등이 있다.

그밖에 사천읍의 판소리 고법(鼓法), 판소리 〈수궁가〉
곤양면 성내리에는 비자나무서식지(천연기념물 제287호).

이 지역 일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
남일대해수욕장을 비롯한 많은 해수욕장들

사천만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 사용한 승전지
선진리에 그 승첩기념비가 있고 왜군이 축조한 선진리성,
왜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구축한 석성지인 산성공원 등

곤명면의 봉명산이 울창한 삼림과 기암괴석으로 절경
계곡에는 경상남도 최고(最古) 고찰인 다솔사가 있다.

.......................다솔사(多率寺).......................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와룡산 동남쪽 기슭.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
503년(신라 지증왕) 연기조사 개창 영악사(靈岳寺)

636년(선덕여왕 5) 자장(慈藏)이 증축., 다솔사(陀率寺)
의상(義湘)이 676년(문무왕 16)에 영봉사(靈鳳寺)로 개칭.
신라 말 도선(道詵)이 불당 4동을 증축하면서 다시 다솔사

고려 말 나옹이 중건, 임진왜란 때 소실, 숙종 때 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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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문화]


가산오광대, 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
이조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421년(세종 3) 향학당

1446년 향교로 바뀐 사천향교와 곤양면의 곤양학교
구암정사(九巖精舍)·구산사(龜山祠) 등이 있었다.

탈놀음인 축동면 가산리의 가산오광대
천룡제(天龍祭)와 지신밟기 등이 있다.

왜구의 침략과 관련된 호국설화가 많으며,
그밖에 〈용머리바위 전설〉·〈풍정숲 효자전설〉·
〈구부총전설 九夫塚傳說〉·〈오봉산전설〉 등이 유명
민요는 주로 〈모심기노래〉이며, 그밖에 〈상사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