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17 ( 고래잡이. 귀신고래. 연오랑과 세오녀. 장생포. )

donkyhote 2011. 2. 28. 03:19

고래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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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경(捕鯨)은 기름이나 고기를 얻기 위한 고래잡이.
음경 포피를 잘라 귀두부 드러내는 포경(包莖) 수술.
서로 다른 말이지만 모양이 유사해 같은 의미로 쓴다.

'선사시대부터 고래를 잡아왔던 우리나라 민족.'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고래고래 악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 등 고래에 관한 말이 많다.
심지어 남성 포경수술까지도 고래잡이로 표현한다.

한반도, 일본, 알래스카 에스키모인, 북미 인디언.

선사시대 고래잡이에서부터 항해술이 발달된듯.
풍성한 사냥감, 고래잡이로 골격이 굵어진 인디언.
사냥감, 고래 포획량이 줄자 골격이 작아진 일본인.

옛부터 태풍 지진 천재지변 등이 심했던 일본.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공동체 의식.
일본인의 단결성 충성심은 자연환경에서부터 기인.

사냥감, 고래 따라 북극에 정착한 에스키모인.
극지생활의 외로움 때문에 손님을 반기는 풍습.
옛부터 자기 부인과 이방인 손님을 동침시킬 만큼.

알래스카를 거쳐 북아메리카 인디언으로 정착.
풍부한 사냥감 덕분에 지구 상 마지막 유목민.
몽골리안은 남아메리카 잉카 문명까지 건설한다.

고래가 급격히 줄자 농업으로 전환한 잉카인.
농사를 위한 천문학, 각종 인신공회 기원의식.
식량을 지키고 이민족 침략을 막는 축성술 발달.

'몽골리안이 전세계로 퍼진 원동력은 고래잡이.'

1세기 경 에스키모와 북미 인디언이 최초 고래잡이.
식량, 연료, 연장을 만들려고 고래를 잡았다는 기록.
유럽은 중세 말 비스케이 만에서 체계적으로 고래잡이

16 세기 초 고래를 쫓아 뉴펀들랜드 아이슬란드 행.
대서양 횡단 항해는 137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7세기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은 대규모의 포경선단
네덜란드는 300척 배로 년간 1만 8,000명이 고래잡이.

18세기 초 포경선단은 그린란드 데이비스 해협까지 진출
18세기 미국 식민지의 포경선은 대서양에 등장하기 시작

고래기름 정제소라 불리는 벽돌로 만든 가마를 배에 설치.
배에서 고래기름을 만들어 무려 4년간 저장할 수 있게 된다.
포경 선단이 장기간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19세기 고래잡이는 태평양과 북극해로 확산되었으며
미국의 포경선이 세계의 포경산업을 주도하게 되었고
19세기 중반 뉴잉글랜드에서 출항하는 포경선이 700척

19세기말 석유산업 발달로 고래기름 시장을 점유
포경업은 쇠퇴했다가 20세기에 고래 산업이 발달
포경산업은 되살아나기 시작해 고래는 멸종 위기.

에스키모인은 작은 배에서 작살을 던져 고래잡이.

보통 6명 선원이 8.5m 길이 배에 작살과 밧줄을 장치
작살로 고래를 맞추면 고래가 지칠 때까지 끌려다닌다.
지친 고래가 수면에 떠오르면 고래를 긴 작살로 죽인다.

죽은 고래를 배의 측면에 붙잡아 매고서
창으로 기름을 떼어내고 나머지는 버렸다.

목숨걸고 고래와 사투를 벌린 선사시대 고래잡이.
음경 큰 남성이 힘도 강해 큰 고래도 잘 잡았을듯.
남성의 큰 음경은 선사시대부터 동경과 숭배의 대상.

'선사시대 고래잡이에서 유래된 관습이 아닐까?'

고래기름은 마가린, 조리용, 양초, 비누, 화장품, 향수.
고래고기는 식용, 고래 심줄은 질긴 끈, 고래뼈는 비료.
1985년부터 과학적인 목적 이외에는 고래잡이 전면 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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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남인수를 배출한 풍류문화의 산실이다.
아울러, 진양호는 옛날부터 고래잡이를 하던 곳.

............1979~80년의 진양호 포경선 항해일지....................
그당시 울산지역 포경선 제 5 진양호(98t) 선장 김수식씨 일지
출항부터 고래를 추적과정, 작살을 쏴 명중시킨 시간.위치 등등.

1980년 2월 28일 오전 10시 울산 장생포항을 떠난 포경선
다음날 오전 8시 부산 태종대-통영 욕지도- 전북 어청도 앞
작살을 맞은 고래는 바다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도망치다 포획.

'포획한 밍크 고래의 몸길이는 24척(7.27m)'

제 5 진양호는 매일 한 두마리를 잡았다.
많이 잡은 날은 1980년 5월 7일 다섯 마리.

밍크고래를 잡은 해역이 3월과 4월은 서해 어청도 부근,
5월과 6월은 울산 동구 화암추, 7월은 경북 죽변,
8월은 경북 울릉도, 9월은 경북 포항시 구룡포,
10월과 11월은 서해 홍도와 흑산도

한반도 동.서해 전역이 밍크 고래의 어장이었던 셈.
특히 울산 근해에서 화암 앞바다 일대가 주무대였다.

제 5 진양호는 75년 3월 방어진 철공조선에서 건조
길이 28.7m, 폭 5.38m에 700 마력 디젤기관 장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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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식 포경선이 처음 등장한 울산포(장생포 용잠동 대곡).
러일전쟁이후 장생포는 연간 800 마리 고래를 포획했던 포경기지.

우리나라에서 86년 1월 1일 포경이 전면 금지된지 20년이 되었다.
장생포 등지에는 20 여개 고래전문 음식점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울산시 남구 장생포는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던 곳.

.......................한반도에서 고래의 유래...............................
약 6천 5백만년전 쥐만한 크기의 '메소니쿠스'라는 포유동물
육지를 걸어다니며 강 하구의 물고기나 조개류를 먹고 살았다.
육지보다 먹이가 많은 바다로 나가 어류나 새우를 먹으며 진화.
현재 모습의 거대한 몸집인 고래는 약 200 만년 전에 출현했다.

한반도 화산폭팔로 약 6천 5백만년 전 자취를 감춘 공룡.
2천 5백만년 방황 끝에 중동지대에서 9 천만년전에 전멸.
지금은 중동이 사막지대로 변했지만 당시에는 열대우림지역.
한반도 주변의 고래는 약 6천 5백만년 전에 쥐 만한 포유동물.

오늘날 도마뱀으로 작아진, 공룡
오늘날 고래로 진화된 그 옛날, 쥐.
오랜 세월 진화된 두 동물이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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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세월 속에 담긴 자연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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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가난했던 서민들의 희망.
우리나라는 옛부터 큰 고래가 많이 잡혔던 증거.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 속담.
한반도에 고래먹이 새우가 많다는 증거.

한반도는 삼면의 바다와 대륙붕이 있어 새우와 프랑크톤이 많다.
고래의 먹이감이 풍부한 지역이고 생태환경도 살기 좋은 곳이다.
하여, 한반도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고래사냥을 한 흔적들의 유물.

<신석기∼청동기시대>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
반구대 암각화에는 귀신고래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지질학자들은 울산이 바다였던 BC 3000 년 경의 유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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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진주 진양호 일대의 포경 역사는 약 5천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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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에는 물을 뿜는 고래와 새끼를 등에 업은 고래,
작살을 맞은 고래, 그물에 걸린 고래, 잡은 고래를 끌고 가는 배
고래의 해체와 분배에 관한 그림, 고래에 얽힌 사람에 관한 기록
비록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사실적으로 낱낱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포경은 고래를 해변으로 몰아서 잡거나
밀물에 밀려 와 썰물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고래를 생포했다.
고래는 부위별로 해체해 대구까지 지계에 짊어지고 가서 팔았다.

우리나라 말에는 옛날부터 고래와 관련된 말이 많다.
고래고래.- 골골거리다.-골고루. -고루고루.-고래심줄.
홍익인간의 정신은 고래를 잡아 나누는 풍습과 유사하다.

'진시황의 아방궁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2500년전 고래기름으로 만든 촛불은 '하, 은, 주'에서 유래.
진나라는 물론 중국의 고대국가들도 고래기름 촛불을 사용.
한반도에서 고래잡이 역사는 반만년이라 보아야 할 것 같다.

한반도에서는 특히 삼한시대의 '변한. 진한' 조상들.
그후 가락국, 신라, 고려, 이조에 이르기까지 고래잡이.
고인돌은 코끼리보다 수십배 무계의 고래를 다루던 솜씨.
충무공의 학익진 전법은 고래를 포획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새우 먹이감에 정신팔려 밀물 타고 들어온 고래.
썰물 갯벌에 갇힌 고래가 골골 거릴 때 고래잡이.
조류를 이용한 고래잡이에 익숙한 어부들의 전법.

힘으로 제압할 수 없는 왜군을 고래잡듯 혼낸 충무공.
왜선을 밀물 때 끌어들여 썰물때 퇴로를 차단한 학익진.
왜군이 오도가도 못할 즈음 공격해 바다에 수장했던 전술.

'왜적을 물리친 뱃사람을 이조는 얼마나 무시했던가?'

뱃놈, 가파치, 불쟁이, 백정, 무인, 상인을 천민 취급한 이조.
여성을 무시하고, 농민을 상민 취급하며 착취만 일삼던 양반.
17세기~19세기에 이조의 무능한 정권은 나라를 망치고 만다.

'한반도에서 포경이 근대화된 시기는 19세기 말.'

1849년 한반도 연안에서 조업한 미국 포경선의 포경일지.
‘많은 고래들이 보인다. 수많은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가 사방팔방에서 뛰어 논다. 셀 수조차 없다.’고 기록
그당시 일본과 미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의 포경선이 몰려들었다

장생포가 근대적인 고래잡이항으로 부상한 것은 1891년부터였다.
당시 러시아의 황태자 니콜라이 2세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장생포 앞바다에서 고래떼를 보고 귀국해 태평양어업주식회사 설립.

이조로부터 포경권을 얻어 본격적인 고래 사냥에 나선 기록이 있다.
당시 포획한 고래의 해체 장소이자 포경의 전진 기지가 장생포이다.

1899년 러시아가 태평양 연안에서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기지였다.
1986년 IWC 포경금지 전까지 포경선 50 척, 국내 소비량 80% 충당.

장생포동 김영학(54·선박 수리업)씨는 고래 해체용 도구 41점을 기증.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고래칼을 비롯한 고래도끼, 고래포경용 작살 등
길이 2m 고래 해체용 톱과 대형 고래칼, 도끼는 김씨가 사용했던 도구.

남구청 관계자는 포경도구와 생태, 학술자료, 사진 200 여점, 유물을 수집
국내 유일의 장생포 고래박물관은 관광객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할 전망.
울산시는 장생포동 해양공원 내 2000평 대지에 연면적 240평 건물을 건립.
현재 95% 공정률을 보이고 있고 2005년 4월 개관을 앞두고 전시자료 수집.

‘한국귀신고래(쇠고래)를 동해안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1914년 미국학자가 한반도 동, 남해안을 2년여 조사한 뒤 논문발표.
겨울철 동해안을 따라 남하해 출산한 뒤 봄부터 북상했던 귀신고래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울산 장생포 앞바다 등 동해안에 풍부했다.

1960년대부터 각국 포경선박이 남획하자 회유 항로를 바꿔버린 듯.
현재로선 한국 귀신고래가 돌아오기에는 자연환경 조건이 어려울 듯.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연평균 150 마리, 2003년엔 280 마리 발견.

지구역사 45억년 동안 장구한 세월을 생존해 온 고래의 멸종위기
인간 다음 지능, 임신 1년, 60년(향고래)∼100년(수염고래류) 수명.
여러 모로 인류와 닮은 고래는 생태계 보전차원에서 중요성이 크다.

“고래도 살고 사람도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고래잡이보다 고래 관광에 역점 둔 호주의 사례를 본받아야 할 듯.
고래가 살지 않는 곳의 고래박물관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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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반구대 바위 그림 속에 비친 ‘바다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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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짐승과 들짐승 300 여점 그림 가운데 40 여점의 고래
10명 혹은 20명씩 탄 두 척의 배가 고래를 사냥하는 장면
고래를 잡기 위한 작살, 일종의 부표인 뜨개, 그물 그림들.

20 여명이 타고 고래잡이 할 수 있는배를 만드는 조선기술
또한 작살을 발사하는 뇌기와 뜨개를 사용한 고래잡이 기술.
울산만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기지이자 바다도시

'선사시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산업이 융성한 지역.'

하늘을 향한 고래 떼 위쪽에 커다란 성기의 남자가 서 있고,
고래 떼 제일 아래에는 무당으로 보이는 사람의 신명난 모습.
이러한 것을 보면 이 그림들이 풍어굿을 하는 모습을 담은 듯.

고래 떼 우두머리가 있다는 고래 생태를 알고 있다는 뜻.

신석기시대 조상들이 고래 우두머리를 향해 풍어굿을 한듯.
제일 위에 새끼를 품은 커다란 고래는 고래의 신 '대왕고래’
그 옆에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는 것은 신의 전령인듯 보인다.

그 다음으로 큰 고래는 작살을 맞은 고래.
그 뒤를 따라 굿판을 벌리는 듯한 고래들.
그당시 고래잡이 풍습을 알 수 있는 그림.

'과연, 한반도 문화가 중국에서 유래된걸까?'

전 세계 7만 고인돌 중 한반도에 집중 분포된 3만기.
선사시대 고인돌 문화와 무관하지 않은 고래잡이 기술.
지리산 일대에 집중 분포된 수많은 사찰들의 장구한 역사.

'서해 속 잠겨있을 것만 같은 선사시대 유적지.'

울산 반구대 바위 그림은 신비를 간직한 미스테리.
한반도 선사시대의 앞선 문명을 풀수 있는 실마리.
진주 진양호 또한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를 했던 곳.

진주는 울산 장생포와 아울러 고래잡이 거점 도시.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가 성행했던 곳으로 보인다.
앞으로 집중 재조명되어야 할 한반도 고래잡이 역사.

오늘날 우리나라의 첨단 조선기술 및 원양 어업.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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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년 유구한 잠재력이 그 원동력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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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고래 



귀신고래는 귀신고랫과에 속하는 단 한 종의 고래이다.
몸길이 15m, 몸무게 36톤까지, 평균 수명은 50-60년이다.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 나오는 움직이는 바위가 귀신고래.

태평양에는 두 개의 귀신고래 무리가 있다.
하나는 오호츠크 해와 한반도를 오가는 무리

알래스카와 멕시코 바하캘리포니아를 오가는 무리.
한때 멸종 위기였으나 현재 이만여 마리 이상 증가.
대서양 귀신고래 무리는, 남획으로 300년 전에 멸종. 




연오랑과 세오녀. 



신라 제 8 대 임금인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丁酉)해.
경주 동쪽 영일(迎日) 동해 바닷가 일월지(日月池) 연못
그 인근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았다.

이들 부부는 물고기 잡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서 해조(海藻)를 따던 중,
갑자기 바위 하나가 물위에 떠오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게 여긴 연오는 신발을 벗고 그위에 올랐다.

그랬더니, 그 바위는 바다로 점점 들어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 검은 바위는 귀신고래였던 것인듯 싶다.

귀신고래 등에 타고 일본에 도착한 연오.
그곳 사람들은 그를 그 지역의 왕으로 추대
한편 오지않는 남편을 찾아나선 부인 세오녀

남편이 일하던 곳에는 신발만 남아 있었는데,
역시 검은 바위 하나가 물위에 떠있는 것이었다.
세오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바위 위에 올라앉았다.

그 바위는 일본으로 건너가 부부는 극적인 상봉.
부인을 다시 만난 연오는 세오를 귀비(貴妃)로 삼고
연오와 세오는 그 나라를 잘 살도록 다스리게 되었다.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 신라에서는 큰 이변
해와 달이 모두 없어지고 온 나라가 암흑천지가 되었다.
하늘의 변화를 보고 점을 치는 일관이 신라왕께 아뢰었다.

우리나라 해와 달의 정령이 일본으로 갔기에 생긴 변괴
신라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의 귀국을 권유

신라 사신을 만나 그 말을 들은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돌아갈 수 없소.
그러나, 신라의 해와 달이 없어진 것도 딱한 일이오.

나의 왕비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신라에 가져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신라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다시 생길 것이오.

연오가 말한 대로 그 비단을 제물 삼아
제사를 지냈더니 세상이 다시 밝아졌다.

신라 왕실에서는 그 비단을 국보로 삼았고,
비단을 넣은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고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했다.

연오와 세오 이름에 모두 까마귀를 나타내는 오(烏)
태양숭배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라인들의 염원
까마귀는 태양 속에 산다는 신령스러운 동아시아 태양신

연오와 세오가 일본에 건너간 곳이 오키
오키(迎日)는 태양과 관련된 신왕국의 명칭
연오랑 세오녀는 태양을 숭배하던 종족의 조상. 




장생포. 



울산 고래 축제를 관광자원으로
2005년 5월 행사때 소득 370억원

울산시가 '공해도시'라는 오명을 벗고
국제적인 '고래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2005년 국제포경위원회 회의를 울산에 유치

자동차·조선 공업이 밀집한 산업도시의 명성에다
자연과 함께 숨쉬는 '고래도시'라는 이미지를 정착.
전 세계에 울산을 알릴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고래도시 울산의 기원은 1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태평양 연안 고래를 해체하는 러시아 포경기지 장생포

IWC가 고래보호를 위해 상업포경을 금지한 1986년까지
87년간 고래에 관한 한 우리나라의 중심이던 장생포항
50여척 포경선이 국내 고래 소비량의 80% 이상을 충당

고래고기 식당만 30여곳이 성업했던 곳이 울산 장생포.
2005년 5월 제 10회 울산 고래축제는 옛 모습을 재연.

'장생포항 일대에선 개도 입에 지폐를 물고 다녔다'

하지만, 포경이 금지되고 울산이 공업화로 발전되며
고래 명성은 장생포항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다가 1995년 울산 '고래축제 추진위원회'를 구성

고래의 옛 명성이 '고래축제'로 되살아나기 시작.
이 무렵 울산 앞바다에 고래도 한 두마리씩 출몰.
2005년 5월 제 10회 울산고래축제에 1만명 관광객

2005년 세계 52개국 800여명 고래전문가가 참가한
IWC 연례회의를 울산시가 유치하는 경사가 겹쳤다.
370억원 소득증대 효과는 고래도시 울산의 브랜드화

고래잡이의 전진기지였던 장생포항 일대에
지상 4층 규모 고래전시관 건립을 완공했다.

고래전시관에는 고래생태 체험관을 비롯해
포경역사관,귀신고래전문관,포경유물복원관 등
고래와 포경유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관광자원.

고래전시관 옆에 고래연구센터도 건립하기로 했다.
부산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 등이 옮길 예정
울산이 우리나라 고래연구의 메카로 자리잡게될 것.

이와 함께 BC 3000년경 선사인들의 고래잡이
50여 마리 고래를 바위에 그린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285호이자 천연기념물 제126호 귀신고래

회유해면 등 고래관련 문화유산도 관광 상품 개발중.

울산시는 '1986년 IWC 총회 결정으로 상업포경이 금지후
울산 앞바다에 많은 고래가 다시 찾아오고 있어 길조'라며
울산은 이미지 개선 및 주민 소득증대까지 연결해 나갈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