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西山大師)
'눈 내린 들판을 밟아갈 때에는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 - 서산대사 -
임진왜란 당시 73세 나이로 승병을 모집
한양을 탈환하는데 큰공을 세웠던 서산대사.
유교 불교 도교를 하나로 합치려 노력한 인물.
1520(중종
15)~1604(선조 37). 이조 중기의 승려 승병장.
속명 최여신(崔汝信). 본관 완산(完山).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묘향산인(妙香山人)
'보통 서산대사(西山大師)라 하며, 휴정은 법명.'
아버지는
향관을 지낸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안주목사의 양자.
서울로 옮겨
12세 때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히고
15세 때 과거에 낙방한 후 동료들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화엄동
청학동 칠불동(七佛洞) 등을 유람하다 불교에 입문.
5년간 전등록, 염송, 화엄경, 능엄경, 반야경, 원각경 탐구
1540년(중종
35) 일선(一禪)에게 구족계를 받고 수도에 전념.
그뒤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인정받은 후 팔도유람.
1549년(명종
4) 승과 합격, 대선(大選) 거쳐 선교양종판사
1556년 벼슬을 버리고 금강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유람.
선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하다가 1589년(선조 22)에 투옥된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명을 쓴 탓.
선조의 직접 신문에
의해서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되었다.
이때 선조와 휴정이 주고받은 시가 그의 문집에 실려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선조의
명을 받고 승군 궐기를 호소.
자신은 순안 법흥사에서 문도 1,500명으로 승군을 조직,
평양탈환작전에 공을 세워
팔도십육종도총섭에 임명되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제자 유정(惟政)에게 물려준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승군을
이끌고 호위한 후
승군장의 직에서 물러나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정2품 당산관 벼슬을 하사.
'직위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
(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은 채로 입적했다.
당시, 사림의 등장으로 성리학적 질서에 의해 사회체제 재편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자 산간총림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
휴정은 이러한 때에 불교교단의 존립과 국가 전체의 안위를 의식
그는 선종 가운데서도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가장 중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을 강조하고 능엄경과 반야경을 비판.
유(儒) 불(佛) 도(道)는 명칭만 다를 뿐 근본은 같다고 주장.
그의 제자는 1,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사명유정(四溟惟政)·편양언기(鞭羊彦機)·
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
4대 제자가 이조 후기의 불교계를
주도한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 淸虛堂集〉을 비롯
선교석(禪敎釋)〈선교결 禪敎訣〉〈심법요초 心法要抄〉·
〈삼가귀감 三家龜鑑〉·〈설선의 說禪儀〉·〈운수단 雲水壇〉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탑이 세워졌고
해남 표충사(表忠祠), 밀양 표충사, 묘향산 수충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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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 국란을 당하자 창칼을 들고
왜적을 퇴치.
그래서 선조의 총애를 받아 당상관 벼슬에 이르렀다.
'서산대사비결'은 이조 후기 정감록의 일부가 되었다.
서산대사는 왜 서산대사라고 불리웠을까?
그는 오랫동안 관서 지방의 묘향산에 머물렀기 때문.
대사는 묘향산에서
멀지 않은 평안도 안주(安州) 출신.
타고난 운명이 기구했던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사춘기엔 방랑을 떠나 멀리
남부지방까지 떠돌았다.
그는 지리산에 매료돼 숭인장로 고승의 문하에 입문.
선승으로 이름을 떨치던 중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
온갖 고초 후 결백이 입증되 국왕 특명으로 석방된다.
국왕 선조는 서산대사의 충성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친필 시와 묵죽(墨竹) 그림을 선물.
서산대사의 마음을 위로한 얼마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팔도를 유린했고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
국운이 위태롭자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승병모집을 부탁한다.
서산대사는 5000
승병을 조직후 명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
임진왜란 중 서산대사의 처신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들.
"그는 자신의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해
행궁 어문 밖에서까지 말을 타고 횡행.
심지어는 대궐 출입까지 허락받기도 했다.”
평소 불교계를
배척해온 유학자들로서는
서산대사 궁궐출입이 무척 못마땅했던 듯.
그러나 서산대사가 방자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는
이미 나이가 80에 가까워
도보로 궁궐 출입이 불가능했다.
하여, 왕의 특별 배려였던듯 하다.
선조가 자신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자
서산대사는 불교를 중흥할 꿈을 키웠다.
그러나, 유림의 벽에 부딪쳐 꿈이 좌절.
그는 고대 호국불교
전통을 따랐던 고승.
두류산 신흥사 능파각기.
1564년 휴정 서산대사
씀.
세상에서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삼신산이 있는데
두류산이 그 하나다라고 한다.
두류산은 우리 동국의
호남과
영남의 두 남방 사이에 있다.
그 산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신흥사라 하고
절이 있는 골짜기는 이름을
화개동이라 한다.
골짜기는 협착해서
마치 사람이 병 속을
드나드는 것과 같다.
동으로 바라보면
蒼漭(창망)한 골짜기가 있으니
청학동이라 푸른 학이 살고,
남으로 바라보면
강 위에 있는 두어 봉우리는
백운산이니 흰 구름이 난다.
골짜기 가우데 한마을이 있어서
네댓 집이 사는데
꽃과 대나무가 어지러이 비치고
닭 울음과 개 짓는 소리가 서로 들린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의관이 순박하고 모발도 예스러우며
생계는 다만
밭 갈기와 우물 파는 것뿐이요,
서로 찾고 만나는 사람은 다만 늙은 스님뿐이다.
골짜기에서 절의 문으로 가려면
남으로 수십 걸음쯤 되며
동.서의 두 시내가 합해
한 골짜기의 물이 되었다.
맑은 물은 돌에 부딪쳐
굽이치면서 소리를 내는데
놀란 물길이 한번 뒤치면
설화가 어지러이 날리니
참으로 기관이다.
시내의 양쪽 언덕에 돌소[石牛]와 돌염소[石羊]가 누웠으니
이 물건은 처음 하늘이 험한 곳을 만들면서
반드시 그
靈府를 숨기려한 것이다.
겨울에 얼음이 얼고 여름에 비가 오면
양쪽 사람이 서로 왕래하지 못하므로 깊이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가정 신유년 여름에
그 산의 德士 玉崙이 道友 祖演에게 부탁하여
시냇가에 누워있는 돌 소와 돌 염소를
채찍질하여
기둥을 만들고 한 층의 긴 다리를 놓았다.
다리 위에는 다섯 칸의 높은 누각을 짓고
붉은 빛으로 곱게
단청을 한 뒤에
그 다리 이름을 紅流라 하고
그 누각 이름을 凌波라 하였다.
그 형상됨이 밑으로는 黃龍이 곁에
누워있고
위로는 붉은 鳳이 하늘로 날으니,
형세는 端禮(단례)와 黿閣(원각)같으나
張儀(장의)와 龜橋와는 아주 다르다.
산승이 이곳에 이르면 禪定에 이르고
騷客(소객. 떠들소 손님객)이 이르면 시에 고민하고,
도사가 이르면 뼈를 바꾸지
않고 바로 가벼운 바람을 탄다.
그리하여
윤·연(崙·演.옥륜과 조연)의 두 사람은
마음을 먼 하늘에 붙이고
몸을 뜬구름에 맡기어,
때로는 지팡이를 짚고 나와서
그 사이에서 한가히 읊조리기도 하고,
혹은 차를 마시기도 하며,
혹은 기대어 눕기도 하면서
장차 늙음이 오는 줄을 모른다.
또 그 누각됨은 높아서 백 척 위에 올라서
별을
따는 정취가 있고 눈이 천리에 트여
하늘에 오르는 정취가 있고
외로운 따오기와 떨어지는 노을은 藤王閣의 정취가 있으며
(등왕각.초당의 시인 왕발의 등왕각 서문에
[떨어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난다]는 구절이 있음)
하늘
밖의 삼산은 鳳凰樓의 정취가 있으며,
맑은 내와 꽃다운 물은 黃鶴樓의 정취가 있으며,
떨어진 꽃이 물에 흐름은 도원의 정취가
있고,
가을은 비단에 수놓은 듯한 단풍으로 적벽의 정취가 있으며,
좋은 손님을 맞고 보냄은 虎溪의 정취가 있다.
또
짐을 진 사람이나 짐을 인 사람이나 밭가는 사람,
고기 낚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목욕하는 사람,
바람 쏘이는 사람, 시를 읊는
사람······,
그리고 나아가서는
고기를 구경하는 사람이나
달을 감상하는 사람,
누구나 이 누각에
오르면
모두 그 즐거움을 즐기게 되니
이 누각이 사람의 흥취를
돕는 것이 또한 적지 않다.
그뿐이
아니라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나
얼음이 얼고 눈이 올 때에도
물을 건너는 사람의 옷을 걷어 올리는 수고가 없으니
내를 건너게 하는 그 공도 또한 크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각 하나가 이루어짐으로써
온갖 즐거움이
갖추어져 있으니
어찌 반드시 현자라야만 이것을 즐긴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옛날 하늘이 영부를 숨겼던 것을
한탄하였더니
지금 이 두 사람이 구름을 꾸짖고 그것을 열어 내어
드디어 산과 절과 골짜기와 시내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이름을 숨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維摩詰(유마힐)의 수단을 얻어
이 누각을 넓히어 천 칸 만 칸,
심지어 끝이 없는 칸 수의 큰 집을 만들어
널리 천하 사람들을 두루 수용하게 할 수 있을 건가.
가정 갑자년 봄에
적는다.
......................유미힐.....................................
부처님 때의 거사 유마힐이 문병을 온 사람들을 위해
그 방장을 넓히어 무수한 사람들을 다 수용하였다함
..................................................................
출
처 : 역경원刊 박경훈 譯 <청허당집>
해설.
1561년 신응사(신흥사) 주지 스님이 주위의
도움을 받아
쌍계사와 칠불사의 통로 인 절앞 계곡에 설치했던 다리(홍류교)와
누각(능파각)을 관람하고 느낌을 적은 글인바.
그 문체의 수려함이 서산대사가
스님 이전에
뛰어난 문장가임을
느끼게 해 준다.
절앞 계곡에 기묘한
형상으로 널 부러진 자연석을 이용하여
다리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만든 정황을 서산대사
“시내의 언덕위에 수천의 돌소와
돌염소가 누웠는데
그 돌소와 돌염소를 째찍질하여 다리기둥을 만들었다."
다리가 얼마나 아름다웠어면 황룡이 누운자태 같다고
했을까?
능파란 계곡의 물굽이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모습을 뜻하며
능파각은 불가나 선가에서는 속세를 벗어나
도량으로 들어서는
문을 뜻 한다고 한다.
서산대사가 저토록 예찬했던,이름도 아름다운
"홍류교"와 "능파각"이 탄생후 30여년 만인
임진왜란 때 소실된 안타까운 역사를,
1616년 진주선비 성여신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방장산선유일기"에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중략.......모두 말에서 내려 외나무다리를 건넜다.다리의 머리에는 받침돌이 있었다.
절의 문에 이르렀다.옛날에는 凌派閣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불태워버려 주춧돌만 남아있다"
지금의 우리는 그저 신흥
다리껄이라 부르며
무심히 지나치는 신흥마을 삼거리
(의신과 칠불사 갈림길)에 있는 신흥교의 역사를 ,
그리고 石牛 와
石羊을 째찍질하여 만들었다는
"홍류교"와 "능파각"을 가슴에라도 담아 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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