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15 ( 진주성. 진주 검무. 진주 민란. 강일순(姜一淳) )

donkyhote 2011. 2. 28. 03:13

진주성. 



진주성(晋州城)은 삼국시대 거열성(居列城),
고려시대 촉석성(矗石城)으로 불렀던 곳이고
이조시대에 이르러서는 진주성으로 개칭되었다.

석축된 성의 둘레가 약 1,760m(4,359척)이고,
높이 약 5m~8m(15척), 성안 우물과 샘이 3개
고려 우왕 5년 (1379) 진주목사 김중광이 축성.

성밖 서쪽으로 청천(靑川) 남쪽에는 남강이 흘렀으며,
북쪽에는 못이 있는데 성과 못 사이에는 참호를 팠다.
고려말 왜구방어 보루였고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는 관문

임진왜란 3 대첩 중 하나인 제1차 진주성 싸움
3800 여 군사로 10배 왜적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이 성을 사수해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킬 수 있었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는
민관군 7만명 대 왜군 12만명
11일간 전투 끝에 모두 다 순절.

이 때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
성내는 촉석루, 김시민 전성각적비, 의기사, 서장대, 북장대,
창열사,국립진주박물관, 호국사, 야외공연장 등이 있다.

주변명소 : 향토 민속관, 인사동 골동품거리, 남가람 문화거리,
경남문화 예술회관, 진양호 전망대, 전통예술회관, 물문화관 




진주 검무. 



경남 진주(晉州)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 민속칼춤.
8명 무희가 전투복을 입고 남띠를 두르고 전립을 쓰고
서로 마주 서서 두 손에 나눠 쥔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

진주감영 교방청 무원으로 있던 최순이(崔順伊)

1906년 서울 진연도감청(進宴都監廳)에 소집되어
궁중검무를 배운 후 고종황제 앞에서 펼쳐 보이고
하향하여 오늘날까지 전습된 것으로 춤사위가 화려.

'진주 검무 = 중요 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 검무는 본래 궁중에서 연행되던 춤
우리 나라에 궁중 무용 중 가장 오랜 역사.
신라시대(서기 660년경) 발생한 것으로 본다.

신라 황창랑이라는 7세 소년이 나라를 위하여
백제에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죽이고
자기도 그 자리에서 죽은 그 소년을 애도하는 춤.

'다산 정약용의 시 속에 진주검무를 찬미한 구절.'

한말의 시인 매천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도
진주 명기 산홍이 검무를 잘 추었다는 기록.
진주교방에서 가무를 배우려면 검무는 필수였다.

진주에서는 논개 및 삼장사(三壯士)의 제향
여러 애국행사에서 반드시 진주검무를 헌무

진주검무에서 한가지 감출 수 없는 수수께끼.
8명이 무희는 천왕성모의 8 딸을 상징하는 듯.
진주검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유래된듯 보인다.

.......................................................
.......................................................
'진주검무는 천왕성모 전설과 무관할까?'
........................................................
........................................................ 




진주민란 




진주는 옛부터 국가적 위기마다 의병이 일어났던 고장
1862년 진주민란은 철종 13년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봉기.
진주민란은 그 이후 '갑오경장(동학 혁명)을 일으키게 한다.

이조 말기(19세기 중엽∼일제강점기 전)는 격동의 시기였다.
김대건 신부 순교(1846년), 지석영 우두 종두법 전래(1855년),
진주민란(1862년), 대원군 섭정 시작(1863년), 병인양요(1866년),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 동학 농민운동(1894년) 등

1862년 임술년 단성에 이어 2번째로 발생한 민란,
본격적으로 전개된 후 여타 지역 농민봉기를 선도.

진주에서는 농민 간 소유와 경영을 둘러싼 계층분화 극심
1846년 진주 나동리는 6% 토지소유자가 44% 농지를 소유
63%에 달하는 빈농층은 약 18%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845년 가서리 경우 1결 이상 경작하는 부농은 3.6%,
경작면적은 29.6%, 빈농은 72.5% 경작면적은 27.3%
10부 이하 극빈농층이 있었고 부세를 이용한 수탈이 심각

진주농민들은 한층 더 궁핍해졌고 관속들 횡령은 극심.
그 횡령분을 농민부담으로 전가시키자 진주 농민들 반발
진주목사 홍병원이 주도한 도결, 백낙신이 주도한 통환(統還)

진주농민항쟁은 발생 시기별로 4단계.
제 1 단계는 2월 14~17일 봉기가 발발

이 단계에서 몰락양반 유계춘과 이계열(李啓烈)이 활약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명윤도 관의 개입을 막는 큰 역할

제2단계는 2월 18~20일에 읍내 공격
농민들이 무력봉기로 읍내를 점거했다.
이 과정에서 부세수취 담당 이서들 살해.

제3단계는 20~23일 무력봉기를 지역적으로 확대한 시기
각지의 양반, 무단토호, 보수적 요호부민 등을 집중 공격

이 시기에는 주로 빈농·초군 등 항쟁과정에서 부각된 인물들
농민군을 편성해 주도권을 장악하고 지주제 모순을 문제삼았다.
4일 동안의 공격을 끝내고, 23일 밤에 일단 자발적으로 해산했다.

그러나 그후 농민군은 완전히 해산하지 않고
재차 봉기했는데, 이를 제4단계로 보고 있다.

진주민란에서는 국가 대 농민 조세의 모순 시정을 요구
그후 점차 지주제 등 봉건적 모순에 항거로 목표가 전환
정부는 박규수, 암행어사 이인명, 이참현을 파견하여 수습

박규수는 항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삼정(三政)의 문란,
특히 환곡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한 삼정 개혁을 촉구.
진주민란은 기본적으로 반봉건 투쟁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개항 이전의 시대적 한계로 지주제 개혁과
농민적 토지 소유의 실현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는
반봉건 투쟁의 전반적인 강도와 수준에 비해 미약. 


 
강일순(姜一淳) 



수많은 지리산 이인들을 배출한 진주.
강일순은 진주가 배출한 그 중 한 사람.
지리산 일대에 큰 영향을 주었던., 증산교.

강일순(姜一淳)은 증산교의 창시자이자 교주.
본관은 진주. 자는 사옥(士玉), 호는 증산(甑山).

............................................
............................................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어리가 내려와서
몸을 덮으니 온천하가 광명하여지는 꿈을 꾸고 잉태
13개월 만에 어머니 권씨가 그를 낳았다는 잉태 설화.

출산 때 두 선녀가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보았다는 아버지.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그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로 뻗쳐오르는 현상이 7일이나 계속되었다는 출산 설화.

태어난 아기의 용모에는 위의(威儀)가 서려 있고
양미간에는 불표(佛表), 왼손바닥에는 별 무(戊)자,
아래 입술에 붉은 점이 있었다는 그는 몰락한 양반집안

14, 15세 때 타향으로 가서 머슴살이와 나무꾼 생활
21세에 절름발이 부인과 결혼, 처남 집 서당 훈장생활
그의 학문은 높은 경지에 올라 한학은 물론 유·불·선
여러 경전과 음향·풍수·복서·의술 등에 막힘이 없었다.

1894년 동학혁명 농민군을 따라다녔으나
싸움에는 참여하지 않고 싸움을 만류했다.
동학혁명이 실패할 것을 이미 예견했기 때문.

동학혁명의 사회적 참상과 혼란을 목격한 그는
국가민족과, 인류를 구원할 대도를 얻고자 결심
1897년부터 3년간 세상 실상을 알려 전국을 유람.

이 기간에 충남 비인(庇人) 김경흔으로부터
증산교 주문이 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연산에서 김일부를 만나 주역 지식을 얻게 된다.

특히 김일부는 〈정역〉을 저술
후천개벽의 이론적 틀을 세운 사람
그의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듯.

증산은 이처럼 여러 종교의 교리에 몰두하는 한편
이보(耳報)와 영안(靈眼) 등 초능력을 배우기도 하고,
先後天 천기변화를 가늠하며 국제정세와 동서 문화 파악.

이러한 구도기간중 그는 전혀 직업을 갖지 않고 방랑하며
이따금 기이한 능력을 보여 광인이나 기인 취급을 받았다.

..............................................
..............................................

그는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얻지 않고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31세(1901) 때 전주 모악산
동편 대원사에서 수개월 간 송주(頌呪)하며 이적을 행했다.

그러던 중 6월 선정(禪定)에 들어가 9일 만인 7월 5일
홀연 오룡광풍(五龍狂風)하는 가운데 탐음진치(貪淫瞋癡)
사종마(四種魔)를 물리치고 광명혜식(光明慧識)이 열리며
현법(現法)을 깨달은후 1909년 화천(化天)할 때까지 포교.

7년간 모악산 중심으로 여러 차례 천지공사 수행.
천지공사란 그가 스스로 구천상제(九天上帝)인 것.
우주의 운행 질서를 고쳐 후천선경의 토대를 마련

강일순이 화천할 때까지 그를 따르던 종도(宗徒)는
최초의 종도인 김형렬(金亨烈)을 비롯하여 모두 64명
1909년 자신의 화천을 미리 예언한대로 그해 8월에 화천.

그후 그는 교단의 창시자로서 뿐만 아니라
절대자 또는 상제로서 신앙의 대상이 된다.
저서로 후천세계를 예언한 〈현무경 玄武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