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99. ( 에스키모인. 이글루. 인디언. 메소포타미아. )

donkyhote 2011. 2. 28. 01:59

에스키모인 



'어제는 나무,

오늘은 불꽃,

내일은 잿더미.'

에스키모 인의 생활 풍습을 대변해주는 속담.
과거나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극지 생활.
당장 추위를 이겨내야 살아남는 현실이 최우선.

감기 바이러스조차 살수 없는 추운 극지.
하여, 감기를 모르고 살았던 에스키모인
북극은 그만큼 오염이 되지 않은 청적지역

3억 8천만년 전 '4발 달린 물고기' 화석
4발 달린 물고기는 육지 동물로 진화한듯.
진화론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민중보다는 영웅
또한 정복 당하는 민족보다는 정복한 민족.

알렉산더, 징기즈칸은 광활한 영토의 정복자.
콜럼버스, 마젤란,등 탐험가는 자연의 정복자.
현재, 지구상에서 마지막 처녀지는 남극과 북극

1911년 남극점에 첫발을 딛은 노르웨이 아문센.

1909년 로버트 피어리가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
동상으로 발가락 일곱 개를 자른 로버트 피어리.
북극점 도전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현재,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혀있는 피어리
'불굴의 의지' 대명사로 알려져왔던 탐험가.
1세기 세월이 흐르며 그에 관해 달라진 시각.

'과연, 그는 순수한 탐험가였을까?'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
(Give me my father’s body)라는 책의 제목.

피어리가 북극 탐험에 나선 시점은 1891년 그린란드.
그린란드 서해안 해군기지를 세울 무렵 빈번하게 왕래.
1897년 피어리는 그린란드에서 잡아 온 에스키모인 6명

뉴욕에 퍼진 털가죽옷 에스키모에 관한 소문
피어리는 1인당 25센트 관람 입장료를 받았다.
에스키모를 데려올 것을 요청한 자연사 박물관

에스키모인들은 박물관 지하실에서 살았다.
그러나 대도시의 질병들을 이겨내지 못했다.

네 명의 에스키모들이 사망한 후에
한 명은 그린란드로 되돌려 보내졌다.
뉴욕에 남은 에스키모인은 오직 한 사람.

끌려올 당시 예닐곱 살이던 소년 미닉 뿐.
미닉은 낯선 뉴욕 생활에 그럭 저럭 적응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 직원에게 입양되어
영어를 배우고 고등학교와 초급대학도 졸업.

1907년 미닉은 충격적인 신문기사를 접하게 된다.
아버지 시신이 자연사 박물관에 연구 목적으로 보존
자연사 박물관에서 치룬 아버지 장례식과 무덤은 가짜

비밀리에 에스키모들의 시체를 해부하고
그 뼈들을 보관해 두었던 자연사 박물관.
이 때부터 미닉은 박물관과 힘겨운 투쟁.

박물관은 시신을 돌려주지 않은 채 거짓말로 일관한다.
미국 사회에 환멸을 느낀 미닉은 그린란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뉴욕에서 성장한 그에게 그린란드는 낯선 타향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미닉은 뉴욕 사회, 백악관에 탄원
벌목꾼이 된 미닉이 독감에 걸려 피츠버그에서 끝내 사망.
박물관 측과 투쟁을 벌이던 미닉의 '더 월드' 잡지 인터뷰

.....................................................
“어머니가 죽고 난 뒤 아버지는 내게 유일한 혈육.
어느 날 이글루 주위에 나타난 산같이 큰배와 백인들
그렇게 끌려온 아버지 시신은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안

사람들이 그 광경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마구 쏟아집니다.
왜 나는 아버지를 땅에 묻어줄 수 없나요?”
....................................................

뉴욕으로 끌려간지 100년 만에 귀환한 시신.
북극 지역의 사학자 켄 하퍼가 쓴 책의 제목.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

1980년대 출판된 뒤 에스키모들은 시체 반환을 요구.
마침내 1993년 그린란드 교회 묘지에 묻힌 그 시신들.
피어리의 북극 탐험정신을 재평가하게 된 사건이었다. 




이글루. 




이글루는 눈과 얼음으로 만든 에스키모의 집이다.
목재 석재, 잔디, 짐승가죽으로 만든 천막도 있다.
이글루라는 말 자체는 이러한 집들 모두를 의미한다.

그러나 눈과 얼음으로 만든 집 만이
이방인의 시선을 끌어 널리 알려졌다.

에스키모들이 전통적으로 살았던 이글루
반은 땅속에 있고 반은 땅위에 둥근 형태.
현대문명의 발달로 요즘은 보기 어렵단다.

이글루는 짐승의 지방을 태워서 조명과 난방
공기를 머금은 두터운 얼음벽이 외부 공기 차단.
영하 40℃ 바깥 날씨에도 실내온도는 25℃를 유지.


 

 


인디언.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은 아시아 몽골 수렵민족.
빙하기(약 2만~3만 5,천년전) 베링 해협 육교 건너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불을 사용하고 개를 기른 민족.

특수한 의식과 치료법 등은 당시 아시아 문화와 유사.
예를 들면 목축, 특정 식물 경작, 바퀴와 쟁기의 이용.


[북아메리카 인디언]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서로 약간의 문화적 차이
주요 식량원은 고기였으며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
도살장 유적지에서 수렵사회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가장 독특한 형태의 발굴물 가운데 하나

뉴멕시코 클로비스 도살장 유적지의 화살촉.
BC 9000년 경 세로 홈이 팬 클로비스 화살촉
작살 모양의 도구는 맘모스를 도살하는데 이용.

사막문화 부족들은 오리건에서 멕시코 북부지역,
태평양 연안에서 로키 산맥 동쪽 미국의 서부지역
이들은 대부분 유랑 수렵생활을 하며 동굴에 살았다.

씨앗을 가는 맷돌과 같은 유물을 통해
원시농업 기술의 발달 등을 알 수 있다.

BC 6000년 무렵 해안과 강가에서 살게 되었다.
주요 사냥감은 들소였기에 북극 툰드라로 이주.

BC 2000년 무렵 미국 남서부 부족들은 옥수수 농사
농업이 인디언 문화에 영향을 끼친 시기는 1세기 이후.
700~1200년 남서부, 애리조나에 관개시설을 이용한 농사

1100~1300년 건조기에 문화발전이 멈췄고 인구 격감
1000년 경 돌과 벽돌로 공동주택을 짓는 기술이 발달.
작물로는 섬유가 긴 목화와 여러 종류의 옥수수 농사.


[중앙 아메리카 인디언]

니카라과에서 멕시코에 이르는 중앙 아메리카
BC 4500년 무렵 인디언은 농사기술이 발전한다.
옥수수·콩과 같은 주요작물의 재배기술이 발전

BC 2000년 무렵 농경사회가 확립되었다.
1000년까지 고전기 동안 마야와 같은 문명.

마야족은 제의를 통해 사제계급의 지배를 받았다.
사제는 농사주기에 풍년이 들도록 하는 일을 한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일반적 종교의식이었다.

중앙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는 소규모 사회를 구성
개별 가족이 기본 사회단위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남성과 연장자가 사회를 지배하며, 상속은 부계

멕시코와 과테말라의 식민지 태생 스페인인들과 혼혈
1821년 혁명을 통해 유럽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선언.


[남아메리카 인디언]

BC 10000년 이후 북아메리카로부터의 이주민들
중앙 아메리카를 거쳐 수렵 채집민족들의 이동.

열대림 지대의 농경민과 마찬가지로
이들 수렵 채집민들은 친족관계 집단
집단마다 연령과 성을 기준으로 서열.

BC 2300년경 남아메리카 원주민 문화 가운데
가장 발전한 문화가 안데스 중부지역에 정착
1000년 무렵 (치무·티아우아노코·잉카 왕국)

16세기 초 스페인이 침략할 때까지 번영을 누렸다.
페루에서 칠레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잉카 왕국
국가에서 관리하는 식량생산·저장·배급 제도가 발달

'절정기에는 350만 인구를 살릴 규모의 왕국.'

세습 왕족, 귀족과 장인계층, 평민인 농민 계급사회
잉카 문명은 사회 법률제도와 수준높은 금속세공 예술
16세기 유럽의 정복으로 인해 주민들의 전통문화가 파괴

 

 

메소포타미아.



그리스어로 '두 강 사이에 있는 땅'이라는 뜻.
서아시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사이.

[개요]

터키 산악지대에서 페르시아 만에 걸친 지역.
터키 남동부 평원과 이라크 전역도 포함한다.

넓은 뜻 메소포타미아.

북쪽은 터키 산악지대,
남동쪽은 페르시아 만,
동쪽 티그리스강 건너
이란과 경계 자그로스 산맥,
서쪽은 유프라테스강 건너 시리아 사막.

좁은 뜻 메소포타미아

두 강의 유역 만을 뜻한다.

중세와 근대, 현대사 부분,
특히 오스만 제국 시대 말기
이라크로 된 지역은 넓은 뜻.
그러나 고대사 부분은 좁은 뜻.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결정한 큰 정치세력
남부의 바빌로니아, 북부에 있던 아시리아.
그러므로 메소포타미아 역사자료의 대부분은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중심부에서 발견된다.


<선사시대>

BC 3000년대 경 하수나 시대와 텔할라프 시대
메소포타미아 북부 전역에 퍼져있던 촌락문화.
바그다드 북쪽 티그리스강가 사마라(Samarra)
대표적인 유적으로 하므로 사마라 문화라 한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중류의 사마라 문화
텔할라프 문화와 함께 채색토기가 탁월하게 발달.

BC 3000년대 후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바빌로니아처럼 우바이드 문화가 꽃피고,
모술 부근의 테페 가우라에서는 신전이 발굴.
BC 3000년대말 슈메르인들이 문화를 더욱 발전

시리아 사막에 개방되어 있는 메소포타미아

초기 주민은 아라비아 반도 셈 언어권 유목민들.
마리(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있는 현재 텔엘하리리)
셈어 계통 아카드어로 쓴 가장 오래된 비문이 발견.

이 비문은 왕조 초기(BC 2000년대 중반)에 속한다.
BC 2350경 셈족은 바빌로니아에 아카드 왕조를 건설
BC 1000년대 초반 가나안인이 메소포타미아에 살았고
BC 12 ~ BC 9세기RUD 아랍인이 메소포타미아에 나타났다.

현재 모술지역 주변 아시리아인 방언은 아카드어
이들은 고도로 발전한 바빌로니아의 문명을 공유.

BC 2000년대 후반부터 BC 1000년대 중반까지
메소포타미아에 살았던 비(非)셈계 후르리족

BC 1500년경 아리아족 왕조를 이은 후르리족
북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여러 왕국을 건설했다.

BC 1200년 이후 후르리족은 아람인에게 흡수
또는 아르메니아 산지로 쫓겨들어 숨어살았다.

당시 아르메니아 산지에 우라르투왕국이 있었다.
수메르 왕 루갈자게시가 지중해까지 제국을 건설.
그러나, BC 2350년경 아카드 사르곤에게 정복된다.

우르 제3왕조(BC 2130~2030경)는 아시리아까지 차지
우르 제국이 붕괴할 즈음 아시리아는 독립한 듯하다.
아시리아 왕조 초기는 이신 라르사 왕조 중기(BC 1900년)


<셈족의 활약>

아시리아는 BC 1800년 이전에 쇠퇴했는데
그즈음 셈어족이 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정착.
이 민족에 관한 많은 사료가 마리에서 나왔다.

BC 1900경 바빌로니아로 들어가
이신 라르사 왕조를 타도하고
바빌론 제1왕조를 창건했다.

BC 1820년경 메소포타미아 왕국을 건설한 '샴시 아다드'
이어 북으로 향해 아슈르를 정복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마리에는 둘째 아들 야스마크 아다드이 부왕(副王).

샴시 아다드 만년 10년 = 바빌론 함무라비 최초 10년

함무라비는 샴시 아다드가 죽자 곧 북쪽영토를 확장,
BC 1770년경 마리를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지배.
바빌로니아 전체, 유프라테스 강 중류, 아시리아.


<카시트족 후르리족 아람족>

함무라비 사후 바빌로니아의 권력과 영토은 축소.
아시리아는 독립, BC 1600경 카시트족이 권력 장악.

바빌론 함락(BC 1650경)전 60년 동안 후르리족
안티오키아 평원이나 북(北)시리아 각지에 살았다.
바빌론 함락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분산.

이무렵(BC 1500경) 소수의 아리아족이 후르리족에게 협력.
아리아족은 고대 인도의 언어를 썼고 베다 신들을 숭배했다.
(인드라·바루나·미트라·나사티아 등)을 숭배한 아리아족

이동 도중 부족에서 떨어져나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
이들은 후르리족 지배 계급이 되어 여러 왕국을 건설
그 가운데 중요한 왕국이 미탄니(BC 1500~1360년 존속)

북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 중류 유역 왕국으로서,
서쪽으로 지중해부터 동쪽의 누지(현재 키루쿠크)까지.
미탄니 왕국은 봉건제이고 전차 모는 전사가 귀족 계급

미탄니 최고 지배자는 사우샤타르(BC 1480경)였다.
이집트 왕 투트모세 3세의 시리아 원정은 그 이후
그뒤 미탄니 왕녀들이 이집트 왕들과 결혼을 한다.

이크나톤 왕비 네페르티티도 미탄니 왕가 출신

그뒤 히타이트 왕 수필룰리우마스
후르리왕 아르타타마와 동맹하고
카불로 남하해 미탄니 수도 약탈.

미탄니 왕 투슈라타가 그의 아들에게 살해당하자
후르리와 미탄니의 싸움은 얼마 동안 계속되었다.

투슈라타 아들 마티와자는 수필룰리우마스 딸과 결혼
미탄니의 통치자가 되는 동시에 히타이트 봉신이 된다.

그후에 미탄니는 히타이트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그뒤 부상한 아시리아는 히타이트의 위험한 인접국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 1세(BC 1275경~1245 재위)
유프라테스강 동쪽을 정복후 아들이 대를 이어 통치
BC 1245~1208 메소포타미아는 아시리아 제국의 일부분.

투쿨티 니누르타 이후 아시리아는 쇠퇴했고
메소포타미아에는 아람인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BC 1116~1076 재위)는 세력을 만회
아람 부족 등을 격파하고 터키 남동부에서 지중해까지 확대.
그러나 티글라트가 통치한 뒤부터 아시리아는 다시 쇠퇴했다.

한편, 아람인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일부에서 세력을 확립
BC 10세기 시리아에 있던 과거의 많은 히타이트 도시들을 점거.

BC 900년경 아시리아의 여러 왕은 새로 영토 확장.
아시리아와 유프라테스 강에서 아람인을 몰아낸다.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시대>

메소포타미아는 아시리아의 영토였는데,
아시리아는 정복지역 주민을 강제로 이주
이러한 정책은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BC 626년 신바빌로니아 왕국 아람인이 융성
아시리아 몰락해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로 분할

BC 539년 페르시아 왕이 바빌론을 정복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까지 존속.

<셀레우코스 왕조>

마케도니아가 식민화된 메소포타미아
알렉산드로스 통치 당시에 시작된 듯.

BC 140년경과 130년경 셀레우코스 왕조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바빌로니아를 잠시 탈환
그뒤 파르티아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약했다.

그리스 여러 도시들은 파르티아 여러 왕과 교섭하게 되었고
주변의 사막에서 정착지대로 이동하는 아랍인이 점점 많아져
그리스인과 원주민과 혼혈이 이루어져 그리스도교 시대 개막.

<파르티아와 로마 >

BC 124경~87 때 메소포타미아는 확고한 파르티아 영토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의 죽음을 기회삼아 로마의 영토.

6세기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새로운 격전이 벌어졌다.
카바드 1세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군이 시리아로 침입.
그러나, 로마는 다시 과거의 국경을 회복했다(591).


<아랍의 정복과 칼리프 국가>

메소포타미아는 예언자 마호메트 시대 이전에도
아랍화 되었지만 634년 아랍 정복군에게 점령후
이슬람 제국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650~750년은 메소포타미아 문화 사회의 변혁기였다.
750년 아바스 왕조 창건은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개막.

아바스 왕조는 역대 칼리프 왕조의 전통을 지키고,
약 5세기 동안 독특한 반종교적 위엄을 유지했으며,
아랍 문명이라고 칭할 학술·문화·문학의 꽃피웠다.

메소포타미아 정치 군사력 행사는 칼리프의 이름
10세기 알레포와 모술을 중심으로 한 함단 왕조,
11세기 우카일 왕조, 12세기 이라크 마지아드 왕조

<몽골의 침입>

1258년 몽골 침략으로 바그다드와 메소포타미아 남부 파괴
도시가 붕괴했고 농업이 쇠퇴하자 사막 민족이 대규모 침입
1258~1534년 3세기 동안 메소포타미아 역사는 무기력한 모습

처음 80년은 몽골족이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렸으나,
이들 중 칸(1295~1304) 이외에는 모두 행정에 무능
1401년 몽골 티무르는 훌라구보다 심한 파괴를 자행.

몽골이 물러간 뒤 이란 북부에서 일어난 투르크멘족
카라 코윤루('검은 양') 왕조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34년 메소포타미아는 오스만 제국에 귀속되어
이후 약 4세기에 걸쳐 투르크의 한 지방이 된다.
오스만 터키 제국은 고려와 가까운 '형제의 나라'. 

터키는 서아시아로 이주한 옛 돌궐(투르크)족.
1950. 6.25 전란때 1만 5천 UN군을 파견한 우방.
"코레아"를 일방적으로 무조건 좋아하는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