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95. ( 장터목 산장. 천왕샘. 산희샘. 기자신앙. )

donkyhote 2011. 2. 28. 01:45

장터목 산장.



삼남 지방에 뿌리를 내린 백두대간의 시발점.
천왕봉에서 출발하는 백두대간 첫 고개 장터목
삼국시대부터 물물교환 장터가 들어섰다는 고개.

'하필, 산꼭대기 고개마루가 장터였을까?'

지리산 북쪽과 지리산 남쪽을 잇는 고개마루.
북쪽 함양 마천과 남쪽 산청 시천을 잇는 지름길.
등짐 지고 몇백리 돌아가느니 고달파도 산넘어 왕래.

지금은 '천왕봉 일출' 캠프., 장터목 산장.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매표소에서 칼바위 거쳐 2시간 반.
유암폭포에서 다시 1.7㎞ 한시간 남짓 걸으면 장터목 산장.
장터목 1750m) 고갯마루는 설악산 대청봉(1708m)보다 높다.

'기상변화가 극심하고 일교차가 큰 장터목.'

산은 고도 100m 당 0.65도 씩 기온이 떨어진다.
따라서, 장터목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추운 곳.
더구나, 천왕봉 그늘이 늘 드리워져 일조량이 적다.

비바람 부는 날이면 체감온도가 급격하게 강하.
한여름 무더위에도 저체온증 안전사고 빈번한 곳.
땀흘리며 이곳까지 올라와 땀식히다 동사하기 십상.

예전에 산장이 붐비면, 야영이 허용된 장터목.
산장의 잠자리를 못 구하면 밤새 추위에 떨던 곳.
바위틈이나 바람불지 않는 곳에서 밤새워 동동걸음.

추위를 견디다 못한 낯선 등산객끼리도 포옹.
시집도 못 가보고 얼어죽으면 억울하다는 처녀.
청년보다 아버지 같은 남자 품속에 안겨들었다.

'연인보다 부녀지간 오해가 마음 편한 듯.'

특히, 멋내느라 옷을 얇게 입은 처녀 등산객들.
장터목 야영장 텐트마다 다니며 재워달라고 애원.
텐트 안 낯선 남자 침낭속에 함께 들어가기도 했다.

낯선 처녀들에게 잠자던 텐트와 침낭까지도 양보.
밤새 추위에 떨던 신사다운 남자들도 더러 있었다.
하여, 야영이 허용되던 시절 추억거리도 많았던 곳.

텐트와 침낭까지 양보하고 나면 후회막급.
기나긴 밤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새벽추위.
양보한 잠자리 되돌려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

'한여름에도 견디기 힘든 장터목의 추위.'

지금도 장터목산장 주변에는 무수한 야영터 흔적.
장터목에서 물물교환하던 시절부터 야영터였던 듯.
옛날 등짐 상인들도 이곳에서 추운 밤을 지새웠을듯.

'지리산 산장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장터목산장.'

지리산 주능선 백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같은 산장.
세석평전, 반야봉 거쳐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주릉 전망대.
장터목은 화개재와 더불어 등짐 상인들에게 사랑받던 고개.

지리산 남쪽 산청에서는.. 소금 해산물.
지리산 북쪽 함양에서는.. 종이 곶감.

등짐지고 장터목으로 올라와 물물교환
지금도 마천면 백무동에 사는 노인 가운데
시천 장날 소금을 사서 장터목을 넘던., 추억.

숨가쁜 현대사를 거치며 사라진 장터목 상인들.
장터목까지 소금가마를 져 나르지 않아도 된 탓.
장터목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1971년.

지리산 국립공원 1호로 지정후 지어진 장터목산장


천왕봉가는 길목 장터목은 그때부터 산꾼들로 북적.
지리 산장은 그후부터 장터목산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1997년 통나무집 단장후부터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직영.

'조난을 당하거나 악천후를 피하기 위해 머무는 곳'

그런 뜻에서 대피소라 부르지만 산꾼은 산장이 친숙.
천왕봉까지 1.7㎞.. 장정 걸음으로 40분 남짓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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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아래 제석봉과 연하봉 사이 고갯마루가 장터목.
백무동과 중산리를 잇는 최단거리 위치에 있는 산장이다.
옛부터 백무동 일대와 중산리 일대 주민들 간 물물교역터.

시천(矢川)과 마천(馬川)주민들 물물 교역터.. 장기정(場基項).
그 장터의 길목이라 <장터목>이라 명명된 곳에 있는..장터목 산장.
지리산 종주를 하며 천왕봉 일출을 감상하려는 인파로 늘 붐비는 곳.

'이곳은 언제부터 물물교환 장터가 형성된 것일까?'

...........................장터의 유래.....................................
몽골리안 유목민은 객지를 유랑하며 장막생활을 하는 특징.
장막이 모이는 곳이 장터가 되고 그곳에서 물물교환을 했다.
생필품 교환을 위해 3일 또는 5일에 한번씩은 모였을 듯 싶다.

유목민은 짐이 가벼워야 이동이 손쉬워 정기적인 장터를 형성.
한반도에서 유목생활이 농사 위주로 바뀌자 농산물 매매 교환터.
장막을 치고 농수산 특산물을 매매 교환하는 곳이 장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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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옛 조상 몽골 유목민이 장터목을 형성한 듯 싶다.
하여, 삼국시대 이전부터 장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예전에는 일출봉의 숲길을 내려오면 5방향으로 등반로가 연결.

'천왕봉 전초기지라 야영터가 많았던.. 장터목.'

1971년 9월 지리산장 33 평방미터, 반지하 콘크리트 건물(40명 수용)
1986년 9월 새로 개축한 산장 82 평방미터 목조 2층 마루방(80명 수용)
1997년 325평방미터,1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장터목 산장이 들어섰다.

야영하기 어려운 기상조건이면 더욱 붐볐던 장터목 산장.
야영객까지 산장으로 몰리는 휴가철엔 더욱 인파 붐빈 곳.'
2003년 6월 250 명 수용 시설로도 여전히 인파 붐비는 산장.

난방시설이 잘 되어 있어 겨울에 얇은 침낭으로도 견딜 수 있다.
취사장이 같은 건물 내에 위치한 것이 장점, 화장실 먼 것이 단점.
<천왕봉 일출>맞이 하려는 등산객들 많이 이용해 사전 예약 바람직.

1997년까지 이곳 산장은 일출을 감상하려는 인파로 북새통.
지리산 산꾼들에게는 이곳의 ' 악명 높은...칼잠'도 감지덕지.
혹한기 인파가 몰리면, 침상에 두 줄로 마주보고. 모로 누워 칼잠.

옆 사람 발을 코 앞 가슴에 품고 칼잠.
새우등 웅크릴 공간도 없는 기나 긴 밤.
밤새 소변도 참고 뜬눈으로 지새웠던 밤.

화장실 다녀오면 누울 자리가 없어지는 탓.
그나마 그 잠자리 사수하려 필사적 안간 힘.
장터목의 악명높은 악천후 일기변화는 살인적.

'산장밖 악천후 하룻밤은 생사의 갈림길.'

인파가 몰려들면 산장 복도 바닥에 쪼그려 앉아 날밤.
가로 세로 줄 맞춰 앉은 채로 꼬박 밤을 지새워야 했다.
쪼그려 앉은 무릎이 저리다 못해, 감각조차도 없는 고통.

소변을 참다 못해, 화장실 다녀오면 사라진 잠자리.
그때문에 산장 안에서 티격태격하는 시비도 많았다.
산꾼들에게는 고생스러운 추억이 많았던 장터목 산장.

요즘은 현대식 시설라 이용하기 편하다.
예나 지금이나, 산장 직원이 잠자리 배정.
사전예약 없으면 산장에서 잠자기 어렵다.

숙박료 7000원.
침낭 대여 2000원.
담요 대여 1000원.




천왕샘.



천왕샘은 천왕성모를 상징하는 샘물이다.
지리산의 천왕봉은 천왕성모 전설의 고향.
중국 전설에도 천왕성모 같은 여신이 있다.

..................서왕모 전설............................
견우와 직녀를 갈라놓은 전설의 여신 서왕모(西王母)
중국고대 신화 속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신선 서왕모
서왕모는 천상계와 인간계의 여러 일에 일찍부터 개입

서왕모의 노여움을 샀던 애정 깊은 견우와 직녀
아직까지 멀고 먼 은하계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매년 7월 7일 까치가 놓은 오작교에서 서로 상봉.

서왕모의 장생불로 선약(仙藥)을 훔쳐 먹은 상아
달의 궁전에서 영원히 외롭게 살았던 여신이었다.

삼황오제 황제가 치우와 중원을 놓고 다툼을 할 때,
치우가 비바람 안개를 불러 황제 군대는 길을 잃었다.
황제는 할수없이 군대를 물려 태산지방으로 후퇴했다.

이때 서왕모는 여우 갑옷을 입은 사자를 파견하여,
푸른 옥돌을 황제에게 주어 난국을 타개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머리에 까마귀 몸을 한 구천현녀를 파견
황제에게 각종 음양술과 기관조종술을 가르쳤다 한다.
서왕모의 도움으로 황제는 치우와 전쟁에서 승리한다.

서왕모는 천하를 다스린 요에 이어 순 임금까지 지지
사자를 파견해 순임금에게 백옥환과 백옥피리를 하사.
그리고 지도를 내려 구주 중심 12주 영토 확장에 도움

우 임금 대홍수 때 운화부인(雲華夫人), 요희를 파견
홍수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주어 성공하였다고도 한다.
서왕모는 삼천년에 한번 곤륜산에서 신선모임을 개최

선도복숭아를 신선들에게 대접하며 치하하였다고 한다.
서왕모는 국가나 민간에 재난이나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기복(祈福)을 비는 가장 중요한 신들 중 하나로 정착했다.

수나라 때 방화로 정형현 전체가 산불에 휩싸였을때
백성들은 두려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정형현 관리들은 서왕모 사당에 예를 올리며 고했다.

"백성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지금 이러한 큰 재난을 만났습니다!
신령하다면 비를 내려 구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자 곧바로 구름이 몰려들며
소나기가 내려 큰 산불이 꺼졌다고 한다.

그후 서왕모 귀부인상으로 그려 제사를 지내고
복과 수명을 빌거나 각종 재앙을 없애도록 기도
이것이 널리 유행하여 민간에서는 풍속이 되었다.

서왕모에게는 많은 자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여인이 운화부인(요희)
그리고 태진(太眞)부인 그 이름이 완(婉)이다.

운화부인은 서왕모의 23번째 딸이며 태진부인의 동생
서왕모의 아홉번째 아들이 현수이며 진인이라는 기록

서왕모는 주나라 목왕과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이별
그러나, 목왕이 죽자 요지(瑤池)에서 재회도 물거품
그 당시 늙은 서왕모의 신통력은 대단하지 못했던 듯.

전국(戰國)시대가 지나고 한나라 때가 되자,
신선가의 방사(方士)들의 활약이 커지게 되며
서왕모의 지위와 신통력은 자꾸만 높아져 갔다.

장생불사약을 장악한 신령스러운 여신.

도교가 성행하자 서왕모는 도교진영의 주요인물
도교와 불교가 세력을 다툴 무렵 천상의 높은 신

한 무제 유철은 일심으로 신선의 도를 구했던 사람.
동쪽 어느 군에서 한 무제에게 소왜인(小矮人)을 조공
한 무제는 소인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장난하면서 즐겼다.

어느날 동방삭이 궁궐에 들어 왔다가 소인을 만났다.
동방삭은 한 무제에게 소인에 관한 이야기를 말한다.

"이 아이는 세 번이나 서왕모 선도복숭아를 훔쳐
그 벌로 이곳 인간세계에 귀양살이 온 왔습니다."

한 무제는 동방삭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소인이 한 무제에게 말했다.

"서왕모가 도를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라 했읍니다.
마음은 오직 청정하고 마땅히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오년이 지나면 서왕모가 당신을 만날 것입니다."

소인은 그렇게 말한 후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오년후 서왕모가 7월 7일에 강림하겠다는 전갈.
한 무제는 향을 사르고 물청소 하고 장막을 쳤다.

7월 7일 밤 하늘이 자주색 구름으로 덮이며
서왕모가 구름수레를 타고 궁전으로 내려왔다.
이때 서왕모 얼굴은 절세가인으로 30 세 여인

서왕모는 한 무제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도복숭아를 한무제에게 맛보게 하였다.

서왕모가 사는 곳은 선경 요지(瑤池)
그곳에서만 자라난다는 '선도 복숭아'.
하나 먹으면 천년을 살 수 있다는 반도.

요지는 이상향을 찾는 이들이 동경하는 곳.
역대 이를 노래한 시인들이 수없이 많았다.
당나라 때 이태백은 양귀비를 노래한 청평조사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
春風拂檻露華濃 춘풍불함로화농
若非群玉山頭見 약비군옥산두견
會向瑤臺月下逢 회향요대월하봉

구름에서 의상을 생각하고 꽃을 보면 그 모습이 떠오른다.
봄바람은 난간을 스치고, 이슬 머금은 꽃은 더욱 무르녹는다.
만약 그대(양귀비)를 군옥산에서 만나지 못한다면
요지(瑤池)의 달빛 아래서 만나리다.

우리나라 이조 순조의 아들 익종(翼宗)
모후 축수연에서 읊었던 자작시 시조.

“요지에 봄이 드니 벽도화 다 피도다.
삼천년에 맺은 열매 옥반에 담았으니
진실로 이 반 곧 받으시면 만수무강 하오리다.”

두 편 시에 나오는 군옥산(群玉山)과 요지는
서왕모가 연회를 베풀던 곤륜산에 있는 장소.

곤륜산의 옥황상제 거처와 사닥다리로 연결.
모두 옥으로 되어 있다는 군옥산은 곤륜산 서쪽
서왕모의 궁전이 이곳에 세워져 있다고 전해온다.

군옥산이 둘러싼 서왕모의 정원 연못인 요지(瑤池)

이름 그대로 연못 물이 깊고 넓고 맑아
마치 투명하고 빛나는 아름다운 옥과 같다
요지 주변에 선도복숭아 꽃 등 온갖 기화요초

서왕모는 한무제에게 선도복숭아를 하사했다
서왕모가 3개를 먹고, 4개를 한무제에게 하사

한무제가 천도복숭아의 씨를 받아 심으려 하자
서왕모가 삼천년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다며 만류.
한무제는 천도복숭아 씨앗심기를 포기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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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왕모가 살았다는 곤륜산의 선경 요지(瑤池).
전설 속에서 만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이상향.
전설 속 곤륜산은 우리나라 지리산이라는 학설.

서왕모는 지리산 천왕성모라고 하는 구전.
전혀 근거없는 구전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천왕샘은 천왕성모 음부를 상징하는 샘 이름.

'천왕성모의 상징 천왕샘은 어디에 있을까?'

천왕봉에서 중산리 방향으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천왕샘
바위틈에서 나오는 석간수라 가뭄에 자주 마르는 게 흠이다.
식수는 장터목 산장 또는 로타리 산장에서 보충하는 것이 좋다.

지리산은 신라 5악 명산으로 화랑들의 심신수련장
일제시대에는 징집을 피하려는 젊은이들의 은신처.
6. 25 전후에는 동족 상잔의 비극 반란의 역사 현장 .

평균 고도 1천m 주능선마다 군데군데 샘물이 솟는다.
하여, 종주 중 물 때문에 골짜기로 내려갈 일이 없다.
선도샘, 임걸령샘, 총각샘, 뱀실샘, 선비샘, 장터목샘,
천왕샘 등등 주능선 상에서 무려 10 개 정도의 샘이 있다.

지리산을 출발한 백두대간은 덕유산(1614m)에서 깊어진다.
하여, 덕유산은 지리산과 더불어 빨치산 반란의 역사 현장.

무주구천동의 긴 계곡을 비롯해 33경을 간직했다는 덕유산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삼았던 나제통문, 청금대, 층암절벽.
마치 금강산을 축소판 같아 소금강이라 부르기도 하는 수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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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은 무려 110 준봉을 거느린 웅장한 산세를 지녔다.
뿐만 아니라 연하선경 원시림 골마다 용솟음치는 물 안개.
행정구역상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의 경계선이다.

천왕봉은 함양 방면으로 칠선계곡을 빚어 물줄기를 토하고
산청 방면으로는 통신골, 천왕골(상봉골)을 이뤄 중산리계곡.

천왕봉 물줄기는 세 갈래로 흩어졌다가 진양호에서 다시 모여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며 경남 사람들에게는 젖줄이 된다.

천왕봉 정상에 1.5m 높이의 '지리산 천왕봉 1,915m'란 표지석.
예전에는 남명 선생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 글귀가 있던 곳.
천왕봉 정상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했던 성모사

1489년 천왕봉 성모사를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어 담암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허물어진 뒤 노천암대만 남아있다.

나무도 제대로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한 바위 틈새의 샘물.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한 천왕샘이다.
천왕봉 명산을 찾는 등산객들의 인파로 인해 자연환경이 파괴된 곳.

대대적인 자연보호 덕분에 천왕봉 주변 쓰레기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천왕샘 주변엔 가끔씩 수북히 쌓인 쓰레기가 눈에 띄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세운 천왕샘 안내 간판 뒷편에는 어지러운 낙서들

533년전 유두류록 원시림 풍경과는 사뭇 다른 황폐한 풍경.

천왕봉은 정상의 신비함과 수려함을 만천하에 자랑하던 곳.
'천하 제 1경' 천왕봉 일출은 천지개벽을 연상하게 하던 곳.
천왕봉은 동쪽으로 개천문, 남서쪽으로 통천문 두곳이 관문

옛부터 경건한 마음을 갖어야 만 관문을 통과할 수 있던 곳.
특히, 천왕샘은 천왕봉의 정기를 상징하는 샘물이기도 하다.
요즘 천왕봉 인파가 버린 쓰레기가 가끔 눈에 띄어 안타깝다.




산희((山姬)샘 (장터목샘)




산희샘은 '뫼山 아가씨 姬' 산 아가씨라는 의미.
지리산악회 회원 안기호씨 딸 이름 산희에서 유래.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산희(山姬)샘.
명명한 주인공은 구례의 '지리산악회' 회원들.
여기에는 흥미롭고 신선한 사연이 담겨져 있다.

'지리산이 개방된 직후 구례 산악회가 이곳을 답사.
산행 전 출산할 아이 이름을 미리 '산'이라 지었다.
아내가 아들을 낳으리라 믿고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

그러나, 하산 후에 태어난 그의 아기는 딸이었다.
딸 이름을 산(山)이라고 부를 수가 없게 된 안 씨.
생각 끝에 산 뒤에 계집 희(姬)자를 붙여 산희(山姬)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 지리산 산악회 회원들
그때까지 이름없던 장터목샘을 산희샘으로 명명.
안기호씨에게는 잊지못할 귀한 선물이 된 것이다.'

....................찾아가는 길..........................
산희샘(장터목샘)은 중산리 쪽 20m 아래 위치
식수를 받으려고 줄서 기다리는 인파가 인상적.
이곳 동쪽 20분 거리에 옛 향적사가 있던 곳이다.

고려때 천왕봉 성모사에 향화를 올리던 곳.
이조 때 사라진 향적사는 그 옛 터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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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장터목 산희샘은 갈증을 풀어주는 샘.
물물교환 등짐 남정네들에겐 '산 아가씨'같았던 존재.

제석봉 아래 고갯마루 장터목 산장 인근에 있는 산희샘.
백무동, 중산리, 세석 방향에서 온 인파로 항상 붐빈다.
그곳 산장 바로 아래 샘은 수량이 적어도 마르지 않는다.

요즘은 워낙 찾는 이가 많아 주말엔 길게 줄서야 한다.
산희샘은 등산객의 타는 갈증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물.
아울러, 그 못지 않게 짜릿하고 감미로운 전설들이 있다.

....................전설 - 1.............................................
약초를 캐러가 돌아오지 않은 총각을 기다리다 찾아나선 처녀.
며칠 동안 산중을 헤메다가 갈증을 못 이겨 이곳에서 숨졌는데
총각이 뒤늦게 오자 그 혼이 눈물로 반기듯 솟았다는 전설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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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일대의 지리산 자락은 2400 여종 약초 자생지.
약초꾼들이 캔 한약재 약초를 장터목에서 거래했던 듯.
약초꾼 총각을 찾아나선 처녀가 숨진 전설의 고향 산희샘.

산희샘은 예나 지금이나 물이 많은 곳.
백무동도 가깝고 중산리도 멀지 않은 곳.
옛 약초꾼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샘물 같다.

.................전설 - 2........................
마야부인이 멀리 떠난 남편 기다리며
거울 삼아 몸 단장했던 전설 속의 샘.

결국,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며
메꿔버린 샘이 장터목 인근에.. 산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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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부인은 신라 진평왕의 첫째 부인.
승만(僧滿)부인은 진평왕의 둘째 왕비.
성은 손씨(孫氏)이고 후사(後嗣)가 없다.

이 전설의 주인공은 승만부인인듯.

산희샘의 풍부한 물이 장터목 옛 장터의 원동력.
오늘날 산장까지 들어선 그 원동력은 바로 산희샘.
'마야 부인과 반야의 비련'이 애닲은., 전설의 고향.

여성에게 거울이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리 속상해도 산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물.
샘물을 메꿔야 할 숨은 사연이 있는 듯 하다.

천왕봉에서 법계사 쪽으로.. 500m 아래
너덜지대 깔딱고개 위에 있는.,'천왕샘'.

'천왕성모 위력을 상징하는 통신골'은 거대하지만,
그 거대한 계곡이 품은 천왕샘은 가뭄에 자주 마른다.
그에 비해 산희샘은 언제나 변함없이 샘물이 솟아난다.

천왕샘보다 훨씬 맑고 깨끗한 산희샘.

산희샘은 높은 곳에 있어 오르기 힘들지만
물 맛은 천왕샘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
반가운 님을 반기듯 펑펑 눈물처럼 쏟는 산희샘.

<천왕성모의 천왕샘>과 <장터목의 산희샘>
둘 다 여성에 비유한 샘물이란 공통점이 있다.
천왕성모 영원한 젊음도 산아가씨보다 못했을 듯.

'마야부인이 산희샘을 메꾼 이유는 무엇일까?'

남편을 기다리다가 거울인듯 들여다 보았다는 산희샘.
여성이 거울을 들여다 보기를 포기했다면 죽음을 의미.
마야부인은 남편을 향한 사랑이 삶의 전부였던 듯 싶다.

이조 사대부 안방마님이라도 첩은 얄미웠을듯.
40대 여인네의 질투심을 제라늄 꽃에 비유한다.

질투란 뜻의 '제라시'는 제라늄에서 유래.

........................제라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원예식물이고 중 하나.
영국에서는 19세기의 빅토리아 왕조시대에 크게 유행.
제라늄의 생태적 특성을 보면, 여성의 질투심과 흡사.

제라늄은 주변식물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옆으로 퍼진다.
제라늄은 꽃이 지더라도 해충도 접근 못할 향기를 풍긴다.
제라늄은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끊임없이 꽃들을 피워낸다.

다른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꼴을 시기하고 시샘하는 듯.
그 꽃이 40대 여인의 질투심 어린 정열같다 하여 제라늄이다.
화장실에 두면 방향제이고 베란다에 두면 해충을 쫓아버린다.

부엌에 두면 그 근처에 바퀴벌레 조차 얼씬거리지 못한다.
베란다에 두면 다른 꽃나무가 제대로 꽃을 피우기 어렵다.
제라늄의 독특한 꽃향기가 주변 벌 나비를 쫓아 버리는 탓.
...................................................................

하여, 제라늄 주변에는 다른 종류 식물이 서식하기 어렵다.
제라늄은 정성들여 가꿔주지 않으면, 곧 산만하게 흩어진다.
마치, 40 대 여인의 모습과 같은 특성을 갖고 있는 원예식물.

깨끗한 샘물을 펑펑 쏟아내는 젊음에 대한 마야부인의 시샘.
산희샘은 아직도 장터목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듯 눈물 쏟는다.
깊은 산속 산희샘은 마야부인과 더불어., 지리산 전설의 산실.

산희샘은 '산아가씨의 젊음을 상징하는 샘물이다.
사랑하는 총각을 반기며 혼이 눈물로 반겼다는 전설.
산희샘은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재에 위치한., 옹달샘.

장터목은 일기변화 극심하고 높아 오르기 힘든 곳.
찬바람 불듯 도도한 매력을 지닌 산세를 처녀에 비유.
그 샘물을 마시기가 쉽지 않다는 뜻으로도 풀이가 된다.

여성을 상징하는 샘은 대부분 높은 곳에 있다.
두 봉우리 사이의 깊숙한 계곡 안에 숨어있다.
'처녀바위' 이름 붙은 곳은 오르기 까탈스럽다.

일명 '장터목샘'이라 불리우는., '산희 샘.'

지리산의 샘물은 저마다 색다른 전설을 품고있다.
그러나 공통점은 생명체의 젖줄이자 산실이라는 점.
산희샘을 산 아가씨에 비유한 전설 내용이 흥미롭다.

마야부인이 산희샘을 메꿔버린 행위는 궁형
옛날 중국에서 시행되던 5가지 형벌 중 하나.

중국의 5형은 사형, 궁형, 월형(발꿈치를 자르는 형벌)
의형(코를 베어내는 형벌)·경형(얼굴에 문신하는 형벌)

5 형벌 중 궁형은 사형에 버금가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질을 폐쇄시켜 자손생산 불능
도요새 궁형 치욕을 감래하고 <사기>를 저술했던 사마천

<사기>는 사명감을 목숨보다 중히 여긴 그가 쓴 중국역사.
사기는 상고시대 황제부터 진한 무제까지 약 2천 수백년 사.
사마천은 죽음 만큼 고통스러운 세월을 책을 쓰면서 보냈다.




기자신앙(祈子信仰).



나무가지 사이에 있는 여성의 성기같은 구멍.
구멍 주변이 도톰하게 솟아있으면 더욱 흡사.
그 구멍에 돌을 끼워넣는 우리나라의 옛 풍습

일명 '나무 시집 보내기'
과수원에서 주로 한다.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하는 행사로서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넣기.
일명 '대추나무 시집 보내기'라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단옷날
<화수신재>에는 단옷날 오후
도끼로 가지치기 하는 풍습이 있다.

영동 지방은 대보름날 감나무,
영서 지방에서는 대추나무에,
경기 지방은 배나무와 호두나무
'접붙이기 또는 돌 끼우기' 풍습.

전남 에서는 나뭇가지에 옷을 입히고 '시집 보내기'
많은 수확을 기원하는 풍습으로 풍작을 바라는 풍습.

과일 나무 가랑이 사이에 돌 박아 끼우는 풍습.
물이 오른 과수나무 가랑이를 처녀 성기로 보고
여기 박아 넣는 돌은 우뚝 선 남성의 성기를 상징.

과수나무 가지가 낮게 양쪽으로 갈라져야
열매가 많이 열린다는 사실에 기인한 풍속
풍성한 생산과 결실을 기원하는 바램인듯.

정월 초사흘 날에 복숭아 ,대추, 살구, 밤나무
암 수가 따로 떨어져 늘 애만 태우는 은행나무
암나무에는 여성의 성기와 유사한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꼭 맞는 수나무 토막을 끼워 넣는다

'나무시집 보내기'는 기자신앙 풍습.

자연을 남녀 생식기에 비유한 민간신앙.
기자신앙에는 그러한 사례들이 참 많다.
우리나라 기자신앙은 어디서 유래된걸까?

.................기자(箕子)조선.........................
기자(箕子)는 고조선 시대 기자조선 시조(BC 1122년).
기자는 고대중국 은(殷) 주(周) 교체기의 현인(賢人).

주나라 무왕에게 패망한 은나라
은나라 기자가 기자조선을 건국
범금 8조(犯禁八條)로 다스렸다.

무왕에 의해 조선왕에 봉해진 기자
단군조선을 교체했다고 전해져 온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즈음
기자를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받들었고
고려 시대에는 왕실에서 제사를 행했다.

또한 이조시대에는 기자를 성현으로 숭배하는 풍조가 유행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기자동래설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기자동래설은 진(秦) 한(漢)대 이후라 현실성 희박.
1102년(고려 숙종 7) 건립되었다는 기자묘중수기적비
당시 기자동래성은 사대사상에 의해 조작된 듯 보인다.

기자조선은 동이족 계통인 기자족의 세운 나라.
기자족이 평양까지 와 고조선 변방에 세운 나라.
즉, 기자조선은 '은나라 소국' 기자국이 세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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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신앙(祈子信仰)은 이조시대 19세기 말에 성행.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 이씨 조선은 고조선을 계승
고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에 이어 계승된 이씨조선

기자신앙(祈子信仰)은 기자(箕子)조선과 다른 한자.
기자신앙은 고대국가 이전 민간 신앙에서 유래된듯.
지금부터 한반도의 기자신앙 관습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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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적인 토속 민간신앙은 참으로 다양하다.
결혼한지 여러해 된 부부가 아들을 기원하는 기자주술
부처·산신(山神)·삼신할미·서낭신 등에게 비는 행위.

바위 나무 우물 자연물에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행위.
민간에서는 수명이 긴 것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앞에서 정성드리면, 신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

'아들 많은 집안의 금줄을 훔치는 기자 주술.'

아들 많이 낳은 여인의 진 자리옷을 가져 와 입는 풍습.
아들 많이 낳은 여인의 생리대를 훔쳐서 몸에 차는 풍습.
고추를 주머니에 넣어 갖고 다니는 등 다양한 풍습이 있다.

이 밖에도 바위에 구멍을 내거나
문관석 돌부처 코를 갈아 마시기.

아들이 많은 집안 식칼을 훔쳐
작은 도끼를 만들어 속옷에 차기.

여자가 임신하면 해산할 때까지
삼가야 할 금기사항들과 먹거리

부녀자가 자식을 낳기 위해 벌리는 여러가지 형태의 신앙.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기록된 전통적인 토속적 민속신앙.
특히, 이조시대에는 아들 선호 유교사상으로 인해 발달했다.

신앙의 대상은 산과 개울가의 성기형태의 기암괴석이며
자식을 기원하는 부녀자 행위에 따라 5가지로 나눠진다.

1. 영험이 있다고 믿는 자연 석물에 치성을 드리는 유형
2. 동식물에서 축출한 약물 복용 또는 음식을 먹는 유형
3. 특정 물건을 몸에 지니거나 은밀한 곳에 숨겨두는 유형
4. 남녀 성기 모양 돌 나무에 잉태와 출산을 기원하는 유형
5. 생전에 남에게 후덕한 일을 많이 하여 공덕을 쌓는 유형.

기자신앙은 생명을 존중하고 남아선호사상에 대한 강한 애착
아들을 낳지 못한 불안과 초조감을 해소하려는 심리적인 믿음.

'아들 선호 풍습은 언제 어디에서 비롯된걸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아들을 기원하는 풍습이 많았다.
동부여 해부루왕이 산과 강에 제사 후 얻은 아들이 훗날 금와왕

신라 경덕왕은 아들 못 낳는 왕비 '삼모부인'를 쫓아내고
새 왕비 '만월부인'을 맞아 표훈대사를 불러 아들을 청한다.

고려 명종은 태자가 없자 사신을 보내 백마산에서 제사
고려의 의종 임금도 왕비와 함께 사찰에서 득남을 기원.
득남하면 금과 은으로 된 화영경 네권을 만들겠다고 발원

고려태조 왕건이 나주를 공략하고 부인 오씨를 만나 하루밤
오씨(장화황후)가 임신 할까봐 돗자리에 사정하니 부인이 흡입
아들을 낳아 그 이마에 돗자리 자욱이 난 아이가 고려 2 대 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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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부자 집의 딸 이름은 섭섭이 끝순이 꼭지 후남이 순남이.
딸을 내리 다섯 낳고 다섯째 딸 이름을 꼭지라 짖고서 득남.
특히, 강릉 일대는 아들을 선호하는 사상이 뿌리깊은 곳이다.

신혼부부가 아들을 기원하며 방문한다는 강릉의 명소.
보물 제84호 신복사지 석불좌상, 보물 제87호 3층석탑.'

이 석불좌상 옆에는 여성 생식기를 상징하는 음석(陰石).
아들 낳으려는 여인들 탓에 돌부처 코가 남아나질 않는 곳.
음석이 있는 숲속에는 사람들이 하도 들락거려 반질반질하다.

주문진 소돌마을에는 남자 생식기를 닮은 버섯바위(아들바위)
여성을 상징하는 달에 얽힌 '전설의 고향' 경포호는 자궁 형태.

용꿈 꾼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은 오죽헌 몽룡실.
대관령 박물관에 있는 남근석은 기자신앙의 상징.

'다산을 기원하는 성기에 관련된 풍속신앙들.'

남근바위 , 처녀바위, 미륵바위, 옥문바위는 고상한 이름.
공알바위, 암탑, 수탑, 자지방구, 소좆바위, 이름은 노골적.
마을 어귀에 세워놓은 남근석은 처녀를 낯 뜨겁게 할 모양새.

하지만, 동네총각이나 여인네들은 신주 모시듯.
정월에는 새끼를 감아 제를 올리며 풍년도 기원.
남근 숭배는 일본을 거쳐 동해안에 정착한 남방풍습

동해안 수신제 또는 해신제 풍습은 흥미롭다.
남근 나무조각이 동해 물결타고 출렁이는 모습.

파도가 거칠면 거친대로..
파도가 잠잠하면 잠잠한대로
파도 따라 출렁거리며 껄떡댄다.
.
"철석 철석~" 살 섞는 듯한 파도소리
"끼룩 끼룩~" 갈매기떼들의 울음소리.

비릿한 바다 바람과 파도를 헤치고
수평선을 향해 떠가는 남근 나무조각.

......................동해안 수신(해신)제 풍습...........................
옛날에 시집 갈 나이가 된 어부의 딸이 사공인 청년과 약혼했다.
어느 날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간 청년은 풍랑을 만나 조난당한다.
처녀는 사랑하는 청년이 풍랑과 싸워 이기고 돌아오기만 기다린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 바다를 바라보며 청년이 무사하기만 염원한다.

사랑하는 청년이 돌아오지 않자 처녀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 후에 마을에 좋지 않은 일만 생기고 물고기도 씨가 마른다.
마을 어부는 물론 젊음이들까지 조난을 겪고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마을사람들은 시집도 못가고 죽은 처녀의 넋을 위로하여
사당을 짓고 향나무로 남근을 깍아 단오절마다 해신제를 올렸다.
그후부터 고기도 많이 잡히고 풍랑 조난사고도 많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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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 숭배는 풍요와 안녕을 바라는 우리 민족의 풍습.
선사시대부터 가장 신성시 여겼던 남근 성기숭배 문화.
인류의 생산능력 상징물로서 잉태와 연관시켜., 신앙화.

그래서 큰 선돌이 있으면 그 근처에 여근석을 마련.
여근석이 있으면 남근석을 결부해 당산돌로 삼았다.
서울 연희동 봉원사 뒤 안산 능선에 우뚝 선 남근석

이화 여대 방향을 내려다 보고 있는 거대한 남근석
옛부터, 남근석 앞에는 여인들이 많이 꼬이게 마련
지금도 자식을 원하는 여성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옛 선비들이 쓰던 여성의 무릎을 닮은 연적
여체를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몸매의 불상
경북 포항 왕룡사에 삼신할머니를 모신 사당

전북 고창의 당산 옆에 있는 남근석,
전북 남원부근 지리산 자락의 음바위

청동기시대 선돌이나 솟대는 남근석의 초보적 형태
이들을 매개로 마을 또는 부락 공동체 문화를 형성,
우리나라에서는 남근석과 여근석을 마주보게 놓는다.

....................처녀바위와 총각바위 전설....................
전설의 고향 중 한 곳인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당산.'
옛날 청남마을에 담 하나 사이에 두고 살았던 처녀 총각.

처녀는 양반 부잣집, 총각은 가난하지만 예의가 엄격한 집안
어느날 처녀는 담장 너머 옆집 총각이 글을 읽는 모습을 본다.
남녀칠세 부동석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때라 마음속으로만 흠모.

처녀는 잠못이루던 끝에 몸종을 통해 편지를 총각에게 보낸다.
다음날 정오에 소당산 깊은 산속 큰 바위 앞에서 만나자는 내용.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 처녀는 나물 캐는 바구니를 들고 나선다.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반한 두 남녀는 그곳에서 자주 만났다.
이런 소문이 동네에 퍼져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고 잘못 와전
사태를 수습하려 총각은 처녀 아버지를 찾아 뵙고 청혼한다.

처녀 아버지는 가문을 욕되게 한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거절.
그 후에도 총각은 몇번 간청을 했지만 처녀 아버지는 요지부동.
두 남녀는 운명을 한탄하며 처음 만났던 바위 위에서 동반 추락.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저승에 가서 이루자고 다짐하며 죽는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며 큰바위가 반으로 뚝 갈라진다.
마치, 두 사람의 애달픈 소원이 이루어지 듯 마주보고 선 바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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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막사의 남근석과 여근석..................................
677년(신라 문무왕 17년)에 원효, 의상, 윤필 고승이 정진한 사찰.
서울 관악산에 있는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도 이때 명명되었다.
삼막사 칠성각 앞에 자연암석 남근석과 여근석은 토속신앙의 대상.

자식을 원하면 출산, 일가의 번영 무병 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단다.
4월 초파일과 칠월칠석날 전국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치성
성기숭배 사상은 다산 및 풍요를 기원하는 선사시대부터의 민간신앙
동남아와 일본은 물론 한반도 전역에 분포된 남방 지역의 풍습이다.

찾아가는 길.

전철은 1호선을 타면 관악역에서 하차후 관악산
시내버스(1, 51, 99, 103, 103-1, 104-1, 499,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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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바위에 얽힌 전설이 유난히 많다.
그중 처녀바위라 불리우는 곳은 위험한 곳이라 알면 된다.

...............................처녀 바위......................................
바위의 모양새가 옴푹 패이고 찢어진듯 서있으면 처녀바위.
그 찢어진 듯 패인 바위 틈이 처녀 음부를 닮아 붙여진 이름.
순결한 처녀인 듯 접근 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까탈스럽다.

'우격다짐으로 오르면 거칠게 밀어내는 처녀바위.'

마치 거친 사내를 거부하는 처녀처럼 앙칼지게 할퀸다.
몸무계 실린 등산화가 바위 틈에 꽉 물리면 잘 안빠진다.
처녀바위 바위 틈에 낀 발은 용쓸수록 점점 꽉 조여 온다.

'한번 발목 붙잡히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

하여, 처녀바위는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발목 꺽이기 쉬운 곳.
무리하게 오르면 떨어져 죽지 않을 만큼, 다치기 쉬운 처녀바위.
처녀바위라 불리는 곳은 좀 멀더라도 우회하는 습관이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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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 음양사상의 궁극적 원리는 성(性)에 있다.
남근석이나 여근석도 숭배의 대상으로 여긴 우리 조상.
풍요와 다산은 地力을 비롯한 주술적 힘에 있다고 신봉.

좌청룡, 우백호 묘자리 터는 여성의 국부(局部) 형태
산줄기의 철부(凸部)에 잡은 터는 성교(性交)의 형상.
여성의 심볼처럼 움푹 패인 바위를 농바우, 두덩바위

마을에 음풍(陰風) 바위가 바라보이면
옛부터 여성들이 바람 난다고 여겨왔다.

총각들이 몰래 두덩바위를 작대기로 쑤시면
여성들이 잠 못 이룬다고 하여 금기시 했다.

그래서 여근석 근처에 남근석을 세우고,
제를 지내 음풍을 다스리는 풍습이 있다.
원래 심볼석 숭배 근원은 기자(祈子)습속.

즉, 크고 우람한 남근은 성적 쾌감이 높고,
좁고 단단한 여근은 수태를 잘 한다는 믿음.
하여, 남성은 대물, 여성은 명기를 꿈꿔왔다.

'우리나라 기자신앙은 언제 어디서 비롯된걸까?'

중국학계는 고조선 역사까지도 중국 역사 범주에 포함
고대 중국 은나라와 주나라 교체기의 기자조선(箕子朝鮮)
은나라의 후예인 기자는 실존하는 철학가이자 정치가이다.

기자조선은 주(周)와 진(秦)을 황제의 나라로 섬긴 속국.
위만조선은 한(漢)의 속국이었다가 한 무제 때 한의 변방.
중국학계는 고대 동북지구 3대 종족을 숙신 예맥 동호로 구분
한국학계의 단군 -고조선 - 부여 -고구려 -발해 역사관과 상반

조선이란 명칭이 중국의 신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
중국의 태양숭배 신화인 탕곡부상십일신화에 근거한 것.
10개 태양이 탕곡(湯谷)에서 목욕후 서쪽에 도착해 하루

탕곡은 중국의 동쪽인 현재의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지역
중국학계는 단군신화가 중국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

중국 사서에 동이(東夷), 북적(北狄) 등은 외국인의 개념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공간에서 제외된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한반도는 진나라의 만리장성 변방에 있는 고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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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 이후 인간의 성문화는 성기숭배신앙이 기조.
고고학계에서는 남녀의 성기를 결합한 조각 유물의 발굴.
이러한 유물은 생존, 풍요, 다산을 기원하는 종교적 염원
한반도 선사시대 유적에서도 남녀 성기 유물들이 다수 출토.

청동기시대에 새겨진 울산반구대의 바위에 새겨진 그림
여러 종류의 물고기와 짐승 맨 윗 부분에는 남성의 성기
맨 아랫 부분에는 팔과 다리를 벌리고 드러 누운 인물상
여러 물고기와 짐승이 많이 잡히기를 바라는 사람들 염원

신석기시대 함북 경원 농포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여체상
흙으로 빚은 것으로 가슴부위가 크고 허리가 잘룩한 모양
당시 사회는 보통 모계사회지만 실상은 부계와 부권사회

삼국유사 기록에는 지증왕의 성기가 한자 다섯치(45cm)
마땅한 배필이 없어 사자를 파견해 수소문 끝에 찾는다.
모량부 상공의 딸로 키가 일곱자 다섯치(2m 25cm)라 왕후
성기 크기와 체격이 힘과 세력의 상징으로 인식한 듯 하다.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남근 목제조각과 성애 토기.
토기에는 노골적으로 남녀가 성기를 드러내 놓고 교접
안압지는 신라 왕족과 귀족들이 모여 연회를 즐기는 연못
당시의 왕족과 귀족들의 성윤리를 단적으로 알수 있는 유물.

화랑세기 기록에 나오는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성생활은 문란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동생 입종갈문왕과 결혼한다.
그 아들이 진흥왕이지만 상대등(국무총리)이사부(태종)와 사통
숙명공주, 세종, 만호태후를 낳았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진흥왕은 어머니 지소태후의 이복동생 숙명을 부인으로 맞는다.
숙명은 4세 풍월주(화랑 우두머리) 이화랑과 정을 자주 통한다.
결국, 진흥왕에게 발각되어 숙명후를 폐하려 하자 어머니가 만류.

숙명후를 폐하지 않았으나 숙명후는 이화랑과 도망쳐 아들을 낳는다.
진흥왕은 어머니와 둘째부인의 간청으로 이화랑과의 결혼을 허락했다.
숙명후와 이화랑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 장성해 원광법사와 보리.

화랑세기에는 지소태후보다 한술 더 뜨는 자유분방한 여자
그녀는 2세 풍월주 미진부와 묘도부인사이에서 태어난 미실.

미실의 어머니 묘도부인은 원래 법흥왕의 후궁이었다.
법흥왕이 죽자 법흥왕 외손자 미진부에게 시집을 간다.
미실이 지소태후의 허락을 받아 결혼한 사실이 놀랍다.

미실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진흥왕의 태자와도 동침
그 뿐아니라 5세 풍월주 사다함(4촌 오빠)은 미실의 첫사랑.
지소태후의 아들이자 6세 풍월주였던 세종은 그녀의 남편이고
7세 풍월주 설원랑은 그녀의 정부였다고 밝힌 화랑세기의 기록.

이렇게 남성 편력이 심한 미실의 애정행각에도 남편 세종은 담담.
오히려 세종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과 왕후, 태자에게도 충성
미실에게도 정조를 지킨 화랑중 화랑이라고 화랑세기에 극찬했다.

신라왕족과 귀족은 적자혈통을 왕권계승에 우선으로 적용.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발해시대는 일부 일처제를 준수했다.
일정한 사회 경제적 지위 상류층은 둘 이상의 처첩을 두었다.

고조선의 8조금법에 여성의 간음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부인은 정신(貞信)하여 음탕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부여에서는 남녀가 음란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특히 질투하는 여인은 그 시체를 산에 버려 썩게 했다고 한다.

고구려의 혼인제도(서옥제도)는 신부집 처가살이 제도를 말한다.
신랑은 혼인 약속을 받으면 신부집 뜰 뒤에 서옥을 짓고 혼인식
신랑은 신부집 문에서 엎드려 절하며 신부와 자게 해달라고 간청

신라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가계상속권과 재산상속권
선덕여왕을 비롯한 3 여왕이 신라에서 배출된 당시 법적인 배경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왕족이나 귀족은 아들을 서열에서 우선시
아들과 딸에게 차별없이 가계상속과 재산상속의 권한을 인정했다.

우리나라는 신석기 시대부터 족외 혼인을 강조했다.
같은 씨족끼리 배필을 구하려다 싸움까지 일어난 탓.
근친 혼인도 도덕적으로나 관습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고대사회 권력자들은 일반 평민과 달리 성을 가지고 있어
권력계승과 상속문제로 아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늘어 났다.
이 때문에 왕실은 권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근친혼이 많았다.

여성의 정절문제도 당시 사회에서는 귀감이 된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백제 개로왕의 숙청을 거부한 도미의 처
개로왕이 그녀의 남편 도미의 두눈을 뽑아 강에 버린다.

그러나, 도미의 처는 남편과 함께 고구려로 피신한다.
그녀는 장님이 된 남편을 변함없이 보살피며 살았단다.
'지리산녀'는 오늘날까지 정절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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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바위는 아들 기원하는 임산부들이 많이 찾는다.
아들 욕심에 위험 감수하고 오르다가 다치기도 한다.
지리산에는 남근바위로 알려진 곳이 없다는 것이 특징.

'지리산(방장산) 그 자체를 천신의 정기로 여기는 탓..'

...............천신의 정기...........................
백두대간 정기를 몸에 담고 탄생한 神人이 단군.
백두산 영주, 금강산 봉래, 지리산 방장,..3 수호신.
백두대간은 3 면의 바다에서 솟아오른.. 天神의 정기.

백두대간 머리인 백두산을 다스리는 산신령은 영주
백두대간 뿌리인 지리산을 수호하는 산신령은 방장.
백두대간 허리인 금강산, 황홀경 지킴이 산신령 봉래.

백두산은 정상 주위가 흰눈에 덮여 있어 유래된 이름.
이름 그대로, 백두(百頭)산의 산정호수는 천지(天地).
천신의 정기가 백두를 통해 분출된 산정호수 천지(天地)

금강산 수호신 '봉래'는 무릉도원 황홀경을 지키는 산신령.
지리산 수호신 '방장'은 그곳에 있는 불로초 지킴이 산신령.
'천신의 정기'가 이곳에서 만들어진다는 숨은 뜻으로도 해석.

'하여, 백두대간은 3 신이 수호할 만큼 천신의 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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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신앙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백두대간 그 자체를 '천신의 정기'로서 여겨왔던 믿음.
하여, 기자신앙은 고대국가 이전부터의 토속 신앙인 듯.


덧 말.

기자신앙은 중국 은나라에서 유래된듯.
중국의 商나라와 은나라는 같은 고대국가.
일찌기 상업이 발달한 은나라가 곧 商나라.

은나라 탕왕은 하나라 걸왕을 쓰러뜨렸지만
도읍을 다섯 번이나 옮긴 후에 은허에 정착.

BC 16세기 낙양에 도읍을 정한 하(夏)왕조의 걸왕
중국 최초의 폭군으로 무자비한 학정과 여색만 탐닉
탕왕은 백성들과 함께 폭군을 추방하고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탕왕이 수립한 은제국도 5백년후 점차로 타락.
제 17대 주왕은 주지육림 고사성어를 유래할 만큼 학정.

숯불 위 구리기둥을 걷게하는 포락지형
애첩 달기와 함께 구경하길 즐겼던 폭군.
반란이 일어나자 불속으로 뛰어들었던 주왕.

은나라 당시 기후는 현재보다 2~4도 더웠고
동식물 번식에 적합한 기후 조건을 갖추었다.
하여, 농사짓기 적합해 상당히 농업이 발달했다.

당시,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노동력의 동원
개, 소 가축을 길렀고 관개, 농업기술 발달.
분뇨를 비료로 쓸 만큼 농업기술이 발달한듯.

당시 주요농작물로는 수수, 고량, 밀, 조, 쌀

은 왕조 멸망 원인은 잉여농산물로 주조한 술(酒)
가축을 기른 목축업이 농업과 함께 중요 경제활동
그당시 잉여 농산물은 상업 및 무역을 촉진시켰다.

청동기 문화가 일어나기 전이었던 석기시대.
석기 농기구를 사용했고 생필품 대부분 석기.
기자신앙은 신석기 시대에 유래된듯 추정된다.

은나라 당시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한반도.
한반도는 은나라 곡창지대였을 듯 추정된다.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은 연결된 하나의 대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