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92 ( 덕평봉. 선비샘. 의신마을. 의신골. 三神寺 )

donkyhote 2011. 2. 28. 01:34


덕평봉(德坪峰 1,651m)



.......↖.......................세석 산장...음양샘~~.....<거림>
................................../
................................영신봉....한벗샘...........↗..삼신봉..... .........청학동.
.............................../................↘ ..........↗
<삼정마을>...덕평봉*선비샘~~...대성골 ........<의신마을>
............................/
..........................칠선봉.
<군사도로>........./
.......................벽소령 산장.............↘


덕평봉은 1680년경 남원 덕평리에서 유래된듯.

.........남원군 사매면 월평리 덕평...................
1914년 남원군 월평리에 편입된., 덕평(德坪)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사동면(巳洞面) 덕평리(德坪里)
모사정(模沙亭, 莽巳亭) 또는 덕평(德坪)이라 했었다.

1680년(숙종때) 남양 홍씨가 구례군 토지면에서
서울로 올라가던 중 덕평마을 경치가 좋아 정착
그후 김해 김씨, 경주 김씨, 남원 양씨 등 정착.

월평리는 수월, 덕평, 손율 3개 마을을 합한 지역.
마을 뒷산은 모사, 마을어귀는 사두선(뱀머리 모양)
마을 어귀 큰 바위는 뱀이 개구리를 잡아 먹는 형상.

하여, 모사정이라 했다가 덕평으로 바뀌었는데
그당시 지명을 바꾼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춘향전 중 춘향눈물 방죽이 있는 곳이 오리정
이도령이 춘향과 백년가약을 맺고 남원을 떠날때
춘향이 애절하게 이도령과 이별의 정을 나누던 곳.

옛 지명은 수헐(愁歇)로 불렀는데
동네 앞 수구(水口)막이가 막혀있어
풍수지리학적으로 물속에 달의 명당

이 마을의 형국이 음풍영월 수중반월형(水中半月形)
하여, 약 150년전부터 수월(水月)이라 불렀다고 한다.
약 450년전 괴질로 몰살한 남원 양씨 몰 무덤이 있다.

그후 광해 8년 장수 황씨가 정착해 자작일촌(自作一村)
그후 정조13년(1789) 수월마을은 전주 이씨 집성촌 지역.
구한말 사동방 행정의 중심지, 1910년 대홍수로 하천 범람

냇물이 두갈래로 되어 전답이 황폐화되었으나
주민들의 복구로 옥토화되어 현재 미곡생산지.
1728년(영조4) '무신의 난' 때는 의병의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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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는 산행의 묘미를 만끽할 무명 코스가 많다.
대개 산 아래 마을과 연결되어 현지 주민들만의 루트.
덕평봉과 선비샘 거쳐 화개동천 의신마을 코스가 그렇다.

화개동천 안 버스종점 있는 의신마을에서 시작되는 등산로
덕평봉까지 7km 남짓 호젓하면서도 가파른 산세를 하고 있어
산행의 참맛을 만끽하기에 손색없는 500 년 경 형성된 의신마을

의신마을은 여러 갈래 등산로의 출발점이다.
대성동 가는 길, 빗점골 거쳐 연하천 가는 길,
벽소령 가는 길의 시발지가 바로 의신마을이다.

의신마을 한가운데 의신분교 뒤편 덕평봉 가는 길
진주 산꾼들이 남모르는 묘미를 즐기고 있는 루트.
깎아지른 듯한 험준한 산세에 때로는 평탄한 오솔길.

의신마을 뒤편의 가파른 길을 잠시 오르면
상수원 집수장까지 이어지는 넓고 평탄한 길.
이 길은 의신마을 주민들의 삶의 길인 셈이다.

덕평봉에서 여기저기 흘러내린 다랑논과 밭뙈기들
산간마을 화전민들의 삶과 애환을 느낄 수 있는 곳.
상수원 집수장 뒤 등산로는 하늘로 오를 듯 된 비알.

체력소모가 심하지만 양탄자처럼 부드러운 흙길.
3시간 30분 가량 오르다보면 덕평봉 아래 선비샘
'세석평전, 벽소령'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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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가 완만하고 토질이 비옥해 화전민들이 살았던 곳.
악천후 폭우에도 인근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는 산세.
선비샘 일대 상덕평봉은 옛부터 청학동 후보지로 거론된 곳.

'덕이 많은 땅을 품은 봉우리'로 알려진..덕평봉.

그 무엇이든 마다 않고 품어안는 산세와 걸맞는 이름, 덕평봉.
화개동천, 의신마을에서 덕평봉 선비샘으로 곧장 오르는 등산로.
<선비샘 직등 루트>인 이 산길을 편의 상 <덕평봉 코스>라 부른다.

덕평봉은 주능선 준봉이지만 이곳을 목표로 오르는 사람은 없다.
현재, 덕평봉은 별도의 안내판 표시도 없는 단순한 통과 지점이다.
그만큼, <의신마을 - 덕평봉 - 선비샘>코스는 잘 알려지지 않는 곳.

보통, 군사 작전도로 따라 <의신마을 - 벽소령 군사도로 -삼정마을>
<덕평봉 코스>는 그와 나란히<의신마을 -선비샘. 덕평봉 -삼정마을>
연계한 산행코스가 숨어 있어 겨울엔 '마의 구간'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의신-선비샘 코스>는 덕평봉 일원 초막 구도자들의 길.
'대성골에서 주능선 밑 부채꼴 지역은 구도자들의 은신처.
오솔길은 잘 다져져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할 훌륭한 코스.

'된비알과 평탄함이 번갈아 이어지는 의신마을 - 선비샘 코스'
지리산 주능선 조망이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점이 매력적인 코스.
처음부터 끝까지 부드러운 흙길이라 비상탈출할 때 안성맞춤 코스.

대성골 은둔자들이 조난객을 구조한 댓가로 식량을 얻는 코스.
굿판 음식, 기도객과 등산객을 도운 댓가로 연명하는 은둔자들.
이 코스는 은둔자들의 '알쏭달쏭한 삶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곳.

'지리산 등산 개념을 바꿔놓을 수 있는 덕평봉 코스.'

선비샘은 옛 야영장 터가 있고 취사가 가능한 곳.
선비샘은 지리산 종주 통과지점으로 이용하는 곳.
의신-선비샘 코스는, 부산 경남에서 당일 등반 가능.

'지리산 등산로를 다양하게 뒤바꿀 덕평봉 선비샘.
선비샘은 다양한 코스 개발 잠재력을 품고있는 위치.
지금까지 지리산 종주 개념은 동서 양끝 들머리에 국한.

선비샘은 지리산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도 종주가 가능.
벽소령에서 세석까지 '마의 구간' 한가운데 위치한 선비샘.
덕평봉 선비샘은 등산객들의 조난 위험을 해소할만한 탈출구.

<덕평봉 - 의신마을 = '마의 구간' 탈출로.>

의신마을에서 작전도로 따라 오르면 벽소령.
마을 한가운데를 질러 뒷산으로 오르면 덕평봉.
다랑이 논밭의 가파른 사잇길이 가장 큰 결점이다.

쌀 한톨이라도 더 생산하려는 삶의 치열함이 보인다.
주민들은 지게 짐을 가득 지고서도 이길을 오르내린다.
의신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엿볼 수 있는 산길.

논밭지대가 끝나면, 숲사이 오솔길이 잘 이어져 있다.
20분 정도 힘을 들이면 휴식하기에 안성맞춤인 고개마루.
고목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끄는 곳부터 완만한 길로 바뀐다.

전답에 물을 대는 수로 따라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이 길 곁에 비닐 파이프가 계속 연결된 것도 보인다.

평탄한 길로 10분 정도 걸으면 작은 계곡,
다시 5분 뒤 큰 계곡을 건너면, 맑은 개울.
계곡의 깨끗한 개울에서 수통을 채워야 한다.

이곳 지나 선비샘까지는 물을 구할 수 없다.
계곡 건너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 참나무 숲

넓고 완만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벽소령에서 내려온 군사도로와 마주친다.
바로 이 곳이 덕평봉 코스에서 유의할 곳.

대부분 군사도로와 만나면 벽소령으로 오르게 된다.
선비샘 가는 길은 이곳에서 오른쪽 오솔길이 들머리.
군사도로가 벽소령으로 꺾어지는 바로 그 지점 오른쪽.

선비샘으로 오르는 오솔길의 들머리는 동쪽에 숨어있다.
길 입구 찾기가 어렵지만, 몇 걸음 지나면, 넓은 오솔길.
오솔길 따라 20분 가량 오르면 덕평봉 정상이 보이는 능선

헬기장 지나 10분 더 오르면 선비샘이 나타난다.
<의신마을-선비샘 코스>는 3시간 반 정도이면 충분.

덕평봉 코스를 따라가면 지금은 옛터만 남은 덕평마을.
덕평마을 원래 이름은 영신마을이고 정확한 위치는 미궁.
선비샘 아래 상덕평 분지 또는 영신사 가까운 음양수 부근

'선비샘 남쪽에 헬기장 조금 못미쳐 넓은 터.'

놀랍게도 물가에서 자생하는 수초가 무성한 평지.
이곳은 임걸년 두목이 배를 띠우고 놀던 연못 터.
의적 임걸년의 본거지는 반야봉 아래 편., 임걸령.

의신마을 주민 말로는 못터 주변 산죽밭을 뒤져보면
배를 매달았던 두 개의 돌기동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곳과 가까운 선비샘에도 임걸년의 일화 전해오고 있다.

선비샘에서부터 세석고원 방향으로
활 쏘고 애마를 타고 달렸던 임걸년.

목표지점에 도착해도 화살이 보이지 않자
화가 난 임걸년은 애마의 목을 칼로 베었다.
그러나, 그 직후에야 날아온 '자신이 쏜 화살'

자신이 쏜 화살보다도 빨리 달렸던 애마.
임걸년이 대성통곡하며 후회했다는 일화.

이와 유사한 전설은 경북 희양산 外 여러 곳에 있다.
이조 후기 국정이 혼란했던 시절의 설화로 추정된다.

'의신마을에서 선비샘까지 7Km 거리의 직등 루트.'

표고 1,500m, 벽소령 4Km, 연하천산장 10Km, 세석고원 6Km'
선비샘 동쪽은 세석고원과 천왕봉, 서쪽은 벽소령과 노고단 행.
'마의 구간' 에서 비상탈출 해야 할 경우에는.., <생명줄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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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샘의 전설' 무덤 주인이 살았다는 덕평마을.
원래 영신마을이었고, 마을터는 현재 흔적도 없다.

의적 임걸년이 배를 띄우고 놀던 터라고 할 만큼 습지가 많은 곳.
임걸년이 말 타고 세석까지 달렸다면, 세석은 가락국 군사 훈련장.

가락국 시대에 말 타고 훈련했다면, 신라시대에도 마찬가지.
덕평봉은 국경을 의미하거나 남녀를 상징하는 지명과는 무관.
옛부터 덕평봉 일대 주민들은 웃어른에 대한 공경이 지극했다.

'선비샘의 전설' 만으로도 덕평봉 지명에 담긴 유래를 알 것 같다.
덕평봉 일대는 지리산 속 산간마을에서 토양이 가장 비옥한 지역이다.
덕평봉과 연계된 <중북부 능선>의 주변 산세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벽소령 산장과 세석산장 사이는 가장 힘든 구간.
지리산 종주를 하다보면 탈진사고가 빈번한 구간.
벽소령산장과 세석 산장 사이는 3~4 시간 도보 거리.

세석산장에서 벽소령 산장의 중간 지점에 위치.
벽소령에서 세석 갈 경우 이곳은 피로회복 휴식처.
덕평봉을 등진 남쪽 상덕평 능선에 있는 샘터 이름.

지리산 주능선 산장들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다.

연하천 산장에서 벽소령산장까지.. 1시간 반거리.
벽소령 산장에서 세석산장까지는..약 4 시간 거리.
세석 산장에서 장터목산장까지는..1시간 20분 거리.

하여, 탈진 조난사고가 많은 선비샘 부근.

악천후 속에서는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힌 조난자들.
벽소령에서 세석까지는 험로의 연속인 '마의 구간.'
눈보라에 허리까지 빠지는 겨울이면 특히 위험하다.

.......지리산 종주할 때 유념사항..............
지리산 종주 전에 산장간 도보 시간거리 파악.
산장 간에 간격을 잘 모를 경우 탈진하기 쉽다.
산장에 늦게 도착하면 자동으로 예약이 취소된다.

탈진 상태에서 잠잘 곳 마저 없으면 난감.
지리산에서의 밤은 도시보다 한계절 더 춥다.
한여름에도 새벽 무렵에는 얼어죽을듯한 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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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샘.



온 몸에 힘이 빠질 무렵 나타나는 선비샘.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 만난 듯.
옛 야영터가 넓게 자리잡은 흔적이 있는 쉼터.

'무인 대피소' 시설이라도 있었으면..

북한산 북한산장 터에.. 무인 대피소.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적인.. 사례인듯.
전국으로 차츰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램.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사례..............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 면적은 지리산의 5배.
그 드넓은 요세미티 공원 내에 산장은 하나 뿐.
그곳 공원을 자연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뜻.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공식방문을 사절할 정도.
수행원들과 기자들 차량이 공해를 유발할까 우려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수행원 없이 사적인 방문.

요세미티 국립공원 내에 있는.. 오토 캠핑장.
차안에 음식물을 곰이 탈취할 정도의 자연환경.
늘 적정 방문객 수준을 유지를 위한 사전 예약제.
...................................................

선진국에서 입산할 때 라면 10 봉지 갖고 가면
하산할 때도 빈봉지까지 10 봉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산속(산장 포함)에 버리면 무거운 벌금 부과.

요즘 청소산행 붐을 선도하는 민간 모임들
지리산에서는 '지리 99'의 활동이 돋보인다.

...............지리 99..................
'지리산 아흔아홉골'의 분기 별 청소산행.
마산 창원, 전남 동부, 서울, 광주 팀 참여
선비샘 합류 후 하산길에 청소산행으로 마무리.

'지리 99'은 지리산에 관한 지명 탐구 및
역사적인 유적 답사 등에 활동이 많은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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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지리산 국립공원 내 산장 시설은 과도한 편.
방문객을 위한 편리 시설은 산장에 비해 부족한 편.
탐방객을 위한 편의 시설들이 외국에 비해 부족한듯.

...............미국 국립공원 편의시설...............
-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그랜드캐년 국립공원 -
김덕기·한국관광연구원 책임연구원·

국립공원은 자연생태계나 자연풍광이 우수한 지역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하는 전통적인 관광활동 지역.
미국은 1872년 세계 최초로 Yellowstone 국립공원 지정

현재까지 총 48곳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미국.
국립공원은 원시적, 야생적 자연풍경을 지닌 지역보존
그곳 이용을 위해 국가가 관심과 책임을 져야하는 지역

국립공원 시설물은 공원자원과의 조화,
생태 천이과정 부합, 미적 즐거움 제공,
기능적 효율성 확보, 시설에 대한 접근성,
에너지보존형, 비용 절감형 원칙 하에 설치.

장애인에게도 완전한 접근성을 부여하도록 설계, 조성
접근에 필요한 도로, 주차장, 교량, 헬리포트·숙박시설
공공·업무 및 의료시설 관리사무소, 매표소, 시설자재창고,

연구소, 교육센터, 순찰자사무소, 기상관측소, 직원숙소,
자료보관실, 정수장, 자원봉사자 사무실, 발전기, 가스탱크
휴양편익시설 야영장(시설, 자연), 피크닉장, 대피소, 산막,

공예품판매소, 장비임대소, 화장실, 급수시설, 미니골프장,
세탁소, 오토캠핑장, 수영장, 야외극장, 보트장, 탐방 안내소,
등산로, 보행로(자연 관찰로, 역사 관찰로, 산책로), 승마로,

장애자 관찰로, 암벽 등산로, 환경/경관/역사 해설판, 안내판,
출입구표식시설, 전망(관찰)대, 박물관(자연·역사), 보트장,
야생 조류 및 동물 관찰대, 어류전시장, 어린이동물원, 온실
환경 기초시설 쓰레기 처리장, 하수종말 처리장 등등.

국립공원 내 상업 시설은 특허사업자가 정비하는게 원칙
특허사업자는 국립 공원국이 정하는 규칙과 지침을 수행.

그랜드캐년 국립공원 탐방객은 년간 500만명(45% 외국인)
인근 라스베가스(Las Vegas)를 통하여 그랜드캐년을 탐방
라스베가스에는 경비행기와 헬리콥터를 이용한 프로 그램

그랜드 캐년은 비수기(11월∼2월) 폭설기에 일부 시설 폐쇄
약 천년 전 원주민 마을은 약 100여년 전부터 건축된 것이다.

주요시설로는 도로 720㎞, 등산로 1,280㎞, 주차장 3개소,
비지터센터 3개소, 야영장 20개소(공원내 13, 공원 인접지역 7),
박물관 1개소(인디언 및 원주민 역사자료 보관), 숙박시설지 5개소,

피크닉장 4개소, 자연안내센터(5월말∼9월초 ) 및 병원,
야영장관리소, 캠프장, 스키장(Badger Pass Ski Area) 등
연간 탐방객은 350만명 5∼10월은 성수기, 11∼4월은 비수기.

비수기에는 공원 관통도로와 일부 숙박시설을 폐쇄

요세미티 국립공원내에서는 5종의 특허사업
(호텔, Lodge, 식당, 기념품상점 등을 운영),
호텔, 캐빈, 텐트, 바베큐 시설이 있는 캠프장

그랜드캐년 국립공원 내에서는 셔틀버스를 무료 운행
이용객 편의도모 및 교통 체증 및 환경파괴 감소 목적.
탐방객 관광활동 만족도와 교육적 효과 등을 제고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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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샘 위에 외로이 자리잡고 있는 초라한 옛 무덤.
무심코 지나치면 그곳이 무덤인지도 모를 작은 봉분.
그 무덤 주인의 소박한 꿈이 담겨있는 '선비샘의 전설'.

..................선비샘의 전설........................
옛날 지리산의 한 기슭인 덕평마을에 사는 이씨 노인.
조상 대대로 화전민으로 태어나 글을 배우지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얼굴 마저 추해 사람들에게 홀대 받았다.

항상 가난에 찌든 자신의 운명이 너무 서러웠던 이씨.
단 한번만이라도 사람 대접 받으며 살고 싶은 것이 꿈.
그러나, 아무도 찾는 이 조차 없을 만큼 추한 이씨노인.

그러던 중 이씨 노인은 처지가 비슷한 여인을 만난다.
이씨 노인은 결혼 후 두 아들을 낳고 목에 풀칠할 정도.
평생 가난을 면치 못해 언제나 냉소와 천대 속에 살았다.

평소 사람 대접을 한번 받고 싶었던 이씨 노인.
그러나, 그 소박한 꿈 한번 이루지 못하고 운명.

"내가 죽으면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 -유언 -.

샘물 마신 사람들이 샘터에 인사하는 광경.
생전에 그 광경을 늘 보며 부러웠던 이씨 노인
죽어서나마 그렇게라도 인사받고 싶은 마지막 꿈.

두 아들은 이씨 노인이 남긴 유언대로
상덕평 샘터 위에 묘를 쓰고 장사지냈다.

그후 상덕평 샘터를 지나치던 지리산의 길손들.
그 샘을 마시며 그 샘에 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샘을 마시려면 무릎 꿇고 엎드려야야 하기 때문.

마치, 지체 높은 선비 앞에서 무릎 꿇고 조아리듯

이씨 노인은 생전의 꿈을 무덤 속에서 이루게 되었다.
훗날, 그 이씨 노인의 불우했던 생전을 위로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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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그 무덤도 사라졌고 샘물도 파이프로 연결
서서 받도록 고쳐져 선비샘의 옛 모습은 전설로만 남아있다.
샘터에 축대를 쌓아 그 축대 허리에서 삐죽 내민 샘물 파이프.

'선비샘의 전설'을 소중히 여겨, 옛모습 되찾았으면.
다소 이용하기 불편해도 등산객들은 원상회복을 바란다.
이곳 샘에서 절하듯, 마셔도 불평할 등산객 별로 없을 듯.

'선비샘의 전설'을 음미하며..

선비샘 주변 넓다란 공터는 옛 야영터 흔적.
생전에 찾아오는 이 없어 쓸쓸했던 이씨 노인.
이곳 야영객이 무덤 속 이씨 노인에겐 귀한 손님.

........'선비샘의 전설'이 품은 3가지 사실.............
1, 옛부터 덕평봉 아래 덕평 마을이 있었던 사실.
2, 무덤의 위치로 보아, 그 마을은 멀지 않은 곳.
3, 무덤 주인이 절받고 싶을만큼 인적이 있던 샘.
................................................................

1. 선비샘 아래에는 옛부터 상덕평마을이 있었다.
2, 옛부터 그곳은 지리산 청학동 후보지 중 하나.
3. 당시 청학동을 찾는 선비들 왕래가 빈번했던 듯

'하여, 이씨노인은 그 선비들이 부러웠던듯.'

유두류록을 쓴 김종직은 피아골을 청학동으로,
김일손은 불일폭포 인근, 유운용은 세석평전을
청학동이라 짚어보긴 했지만 확신을 갖지 못했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 알맞다.
청학이 그곳에 서식하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
아마도 옛날 세상에서 숨어든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그곳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

선비샘이 있는 덕평봉은 청학동 후보지로 적격.
이조시대 신선 사상이 성행할 무렵의 전설 같다.
당시 지리산 유람은 고명한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

...............옛 덕평마을 터 찾아가는 길......................
대성동에서 작은세개골 다리를 건너 한시간 정도 오르면
큰세개골로 들어가는 이정표 구실을 하는 다리가 나온다.
세석으로 가는 길목이자 영신대로 가는 길목인 큰세개골.

큰세개골 입구에서 한시간 반쯤 오르면 대성폭포
의신마을 주민들이 소풍온다는 일명 선유동 폭포
3단으로 물줄기가 연결되어 쏟아지는 거대한 폭포.

그 왼쪽에 일명' 천국을 오르는 계단' 영신대 가는 길.

534년전 김종직이 함양군수 시절에 쓴 유두류록
영신대를 거쳐간 산행 내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영신대에서 선비샘까지는 등산로가 뚜렷하게 있다.

선비샘에서 의신으로 내려가는 산죽과 낙엽송 길.
덕평마을 터에는 이끼낀 주축돌과 논밭의 흔적들.
의신마을은 도로포장 후 현대식 깨끗한 민박집 동네

예전엔 쌍계사부터 비포장도로로 달려가던 오지.
이젠 승용차가 신나게 달리는 부자 동네가 되었다.

대성교-대성마을-큰세개골 다리-큰세개골-대성폭포-영신대-
-칠선봉-선비샘-덕평-덕평능선-의신 (원점회귀 산행 10시간)
.............................................................

선비샘 전설에 나오는 대대손손 화전민 마을.
지금은 옛 터만 남아있는 선비샘 전설 속 마을.
1950년대 빨치산 소탕 작전 일환으로 내린 소개령.

덕평마을 주민들은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이곳 주민 일부는 의신마을로 이주했다는 설.
일부 주민은 삼정마을로 이주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덕평봉은 옛부터 청학동 후보지로 꼽히던 곳.
이상향 건설을 꿈꾼 농민들이 화전을 일군 곳.
화전민 마을은 전국 어디를 가도 육지 속의 섬.

죽음을 두려워 않는 구도자처럼 살아가는 화전민

이곳은 선비샘의 전설처럼 화전민들 마을 터.
지리산의 인간 개산 역사는 화전마을에서 비롯.
불과, 반세기 전 화개장터는 우리나라 7대 시장

황포돛배들이 하동포구 팔십리를 거슬러 닻을 내린 곳.
광양 남해 여수 등지는 물론 멀리 부산에서 온 황포돛배
지리산 화전민들의 두릅 더덕을 가득 싣고 되돌아 갔었다.

화개장터 뒤로 국도따라 남쪽 이십 리에 악양벌.
이 들녘 한쪽에 있는 평사리는 소설 토지의 무대.
평사리는 이름대로 넓고 평평한 모래밭을 낀 마을.

섬진강 재첩은 다 자라더라도 몸길이가 2∼3cm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하구 모래에 사는 조개.
강물이 오염되면 금새 자취를 감춰버린다는 재첩.

하동 읍내를 돌아 흐르는 섬진강은 호수처럼 잔잔.
하구가 멀지 않은 광양 인근 섬진마을이 매화골이다.
먼 옛날 신라와 백제 사신들이 군사동맹을 맺었던 송림.

3월 중순 섬진강가 매화마을은 매화꽃으로 뒤덮인다.
화전마을, 섬진마을, 해안마을를 하나로 잇는 섬진강.
지리산, 섬진강, 해안 도서 오지를 이어주는 화개장터.

화개장터 상인들이 찾아와 외롭지 않은 화전민들.
등짐지고 화개장터를 오가기도 했던 옛 화전민들.
원래는 섬진강변 일대에 살던 주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왜 옥토를 버리고 화전민이 되었을까?'

18세기 말~ 19세기 초, 사회체제 모순이 대두될 무렵
서학과 동학 사상이 유교관 보수세력과 갈등 및 대립
순조 즉위후 60년 세도정치로 농촌생활이 극도로 피폐

탐관오리들 권력남용 사리사욕으로 농민들은 더욱 궁핍.
가난에 몰린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산간 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국경넘어 간도나 연해주로 떠나야했다.

이조 후기 담배 인삼 면화 등 특수작물 재배법이 발달
농민들 특수작물 중 소득증대에 큰 도움을 준 것은 담배
그 밖에 면화 배추 마늘 고구마 등을 상업 작물로서 재배

산간 오지 화전마을이 삼남지방 곳곳에 생겨난듯.

화전마을 특성은 외부와 단절된 자급자족 농사법.
화전은 옥수수 3년, 콩 3년 경작후 특수작물 재배.
깊은 산속 야생동물들과 싸워가며 외부와 단절된 삶.

마치, 성벽을 방불케 하는 가시나무 울타리.

창문마다 겹으로 설치된 두터운 통나무 덧문.
폭설을 치우기 쉽게 고안된 낮고 견고한 지붕.
멧돼지 공격도 막아주고 눈치우기 용이한 구조.

'현재 화전민 터만 남아있는 덕평마을.'


덕평마을은 지리산에서 가장 기름진 덕평봉 자락.
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험한 산세 속에 숨겨진 곳.
청학동과 더불어 이상향으로 손꼽히던 곳이 덕평마을.

덕평마을은 지리산 북쪽 삼정마을과 멀지 않은 위치.
또한, 덕평마을은 지리산 남쪽 의신마을과 가까운 위치.
하여, 지리산 남쪽과 북쪽을 잇는 위치에 있었던 덕평마을.

'지금은 전설 속으로 사라진 옛 마을터 덕평마을.'

........1934년 4월 1일 유두류산록(김택술 作).......
원래, 20 가구가 넘던 곳인데 7가구만 남고 모두 하산.
감자농사 말고는 안될 만큼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이다.
처음 오는 사람은 너무 높고 차가워 오래 머물지 못한다.

왜인이 정권을 장악해 백성들은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리저리 흘러다니다가 산을 개간해 감자농사.
사는 모습이 짐승과 같은데도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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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신마을.



의신마을은 지난날 의신사(義神寺)가 자리했던 곳.
원래 임진왜란 당시 전란을 피해 찾아들어왔던 사람들
한때 130 가구였으나 현재 40 가구 170 여명이 살고 있다.

대성교∼의신마을 진입도로는 2차선으로 확장 포장.

주민들은 지리산의 거미줄과도 같은 옛 오솔길을
손금 보듯이 훤히 꿰뚫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운해 산장의 조봉문, 지리산 산장의 우정용,
산악인의 집의 정용환, 그리고 정근수가 그들.

의신마을에 솟대가 서있는 곳이 대성골 코스 들머리.
산비탈 따라 비스듬히 돌아가는데 과수를 심어놓은 밭
평탄하게 몇차례 산구비 돌아 샘물이 솟았던 능인사 터.

현재는 공터 안쪽에 묻혀 있어 샘물을 구할 수 없다.
절터에서 대성동 가게집까지 초막이 띄엄띄엄 보인다.
현재는 등산객들 상대로 음식을 팔고 민박도 열고 있다.

대성동 문바위에서 작은세개골, 큰세개골 5㎞ 숲길
앞과 뒤가 꽉 막혀 빨치산이 전멸하다시피 했던 곳.

1952년 1월 17일 온 골짜기를 메워버릴 것같은 함박눈
날이 저물며 빗점골, 거림골, 신흥에서 몰려든 빨치산들
의신부락 뒤쪽 토벌대 야포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한 대성골.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훤히 내려다보며
토끼몰이 하듯 포위망을 좁히며 포격을 퍼부어대니
당시 성골은 밤낮으로 닷새 동안 불길에 휩싸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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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의 '하늘 아래 첫 동네'
지리산 현대 역사가 살아있는 마을.
옛부터 청학동 후보지로 꼽혔던 이상향

옛날 북동쪽으로 삼남을 잇던 벽소령 도로.
의신마을은 교통의 요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최근 고사리, 각종 산나물, 고로쇠 수액이 유명

특산품 고사리는 40여 가구 주민들 주요 수입원
토종닭 흑염소 요리와 각종 산나물 반찬과 동동주
그밖에 고구마, 옥수수, 감자 등으로 만든 먹거리.

옛 선조들 유두류록에 자주 나오는 신흥마을.
의신마을에서 약 4km 정도 아래 위치한 마을.
'선비샘의 전설' 속 덕평마을이 곧 의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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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샘에서 의신마을로 내려가는 산죽과 낙엽송 산길
덕평 옛 마을터에는 이끼 낀 주축돌과 논밭의 흔적들.
의신(덕평)마을 옛 영신사터 초막에서 수도하는 스님

"스님! 전기없는 곳에서 혼자 무섭지 않나요?"
"그냥 세월을 허비하면서 사는 거지요. 허허허."

간이 상수도 파이프를 따라 내려오니 의신 마을 밭.
의신마을은 도로포장 후 민박집도 있는 깨끗한 동네

예전엔 쌍계사부터 비포장도로에서 털털거리던 버스
지금은 승용차가 신나게 달리는 부유한 마을로 변모.
지리산 오지마을은 순환도로 개통후 급하게 변해간다.

지리산에는 산과 더불어 살아 가는 산골마을이 참 많다.
섬진강과 지리산이 만나는 화개천 따라 올라오면 의신마을
의신마을은 옛날부터 삼신동(청학동)에 얽힌 전설이 깃든 곳.

특히, 의신마을은 전란에 휩싸일 때마다 역사적 현장
한때는 마을 일대가 사찰이라 '불교문화의 산실'이었다.
왜구 침입, 이념의 대립현장, '불교문화 산실' 의신마을.

'남서쪽 남해와 섬진강 물길을 끼고 있는 의신마을.'

북동쪽 삼남 지방의 대로였던 벽소령을 끼고 있는 요충지.
해안과 내륙지방을 연결하는 지리적 여건 탓에 수많은 시련.
그로 인해 한자 지명이 여러 차례 바뀌어야 했던 수난의 역사.

원래 依神 또는 義神이었으나 지금은 義信
경술국치 이후 의병 활동의 근거지라 수난.
의신마을 神자 유래는 삼신동 개념에서 비롯.

의신마을 4km 아래에 있는 神興(신흥)
덕평봉 일원의 靈神(영신)등 神자 지명.
따라서 의신마을도 神 자 지명을 썼던 듯.

삼신동은 신라 최치원 선생의 친필 휘호에서 비롯.
삼신마을은 전란으로 수난을 겪을 때마다 개명한다.

의신(依神 또는 義神)은 의신(義信)으로
神興, 영신은 덕평(德平)으로 각각 바뀐다.

경주 정씨는 하동 함양 남원 벽소령을 넘어 의신마을에 안착
그후 단양 우씨와 전주 최씨가 입주 안착한 후 큰 마을을 형성.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문들 전체가 깊은 산속으로 피난.

'이조 후기 동성동본 집단들의 거주촌이 유행.

동족마을인 집성촌은 집단 행동하는 것이 특징.
여러 성씨들이 살더라도 특정 성씨가 마을을 주도
대부분 17세기 이후 크게 확대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혈연 결속을 통해 경제력을 집중하고 촌락을 지배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 타 성씨에 비해 우위 점령.
결국 타 성씨들이 못 견뎌 이주하는 과정을 밟는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동족마을 고장 = 진도.'

50호 이상의 동족마을로 의신면 칠전리, 고군면 오산리,
진도면 포산리, 군내면 세등리, 고군면 석현리 등이 있고
특이한 동족마을로 칠전리, 동외리, 포산리, 석현리, 도론리

'지리산 빗점골 아래 의신마을 역시 동족마을.'

의신마을 연혁을 살펴보면 이곳에는 의신사란 절이 있었다.
서산대사가 이 절에 들어와 암자인 철굴암에서 수도를 했단다.
서산대사가 15살 때 초시에 낙방하고 남쪽지방 산천을 유람 중
화개동천에 이르러 의신마을의 의신사에서 불교에 입문했단다.

'탐관오리를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외치던 동학군.'

1908년 이곳에서 교전을 벌였으나 일본 신무기에 밀려 30 명 전멸
얼마 전까지 그 의병들의 공동묘지가 도로공사로 지금은 사라졌다.
마을 주민들은 동학 의병대의 위령비라도 건립했으면 하고 바랜다.

1950년 전란을 전후해서는 빨치산과 토벌대와의 격전장.
그러나, 의신마을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동족마을 집성촌이기에 마을사람끼리 분열되지 않았기 때문.

의신마을 위로 올라가면 빗점골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의 최후 격전장.

1945년 이후 130 가구였던 의신마을
1948년 여순 반란과 한국전쟁으로 전소
수복 후 80여 가구였다가 현재 40여 가구.

의신마을에 의신사가 있었다는 기록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나와있는 내용.

30명 승려가 범패를 부르며 정진했고
절벽에 김언신, 김미의 제명이 있는 곳.
의신사는 신라 시대의 사찰인듯 추정된다.

임진왜란 즈음 형성된 집성촌 의신마을.
동학운동과 경술국치, 여순반란, 6.25 전란
의신마을은 전란때마다 화마에 휩싸이게 된다.

하여, 수백년 전부터 마을 앞 당산신이 수호신.

해마다 음력 섣달 그믐날이면,
목욕재계한 제주가 올리는 동제.
주민들은 당산제의 전통을 고수.

설날 새아침의 당산제 덕분에
평화롭게 사는 것으로 믿는다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을
제주로 선출하는 것이 전통 관습.
의신마을의 전통은 잘 지켜지고 있다.




의신골.



지리산 화개동 의신골
의신골 끝동네 염소목장.
7가구가 살고있는 삼정마을.

그곳 왼쪽에 벽소령 가는 작전도로.
관리공단에서 설치한 출입통제 철문.
그 철문 지나, 중도에 빗점길 가는 길.

골바람 타고 단풍잎 흩날리는., 빗점골 합수부.
예전에 주민이 많이 살았다지만 지금은 빈 초원.
빨치산 영웅 이현상이 생을 마친 곳으로 유명하다.

1948년 가을 이현상은 의신골로 들어가서
고독한 전투를 펼치다 1953년 가을에 사살.
이현상이 물레방아를 돌려 전기를 일으켰던 곳
하여, 빗점골은 발전소골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화개동 계류의 주류는 의신골에서 내려온다.
신라 말 최치원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신골.
이조시대 서산대사가 15세 나이에 찾아간 의신골.

화개동에 꽃이 지는데 /
청학의 둥지에 학은 돌아오지 않네 /
잘 가거라. 홍류동에 흐르는 물이여 /
너는 바다로 돌아가고 /
나는 산으로 돌아가려네.”

- 서산대사의 입산시 -.

스님은 화개동의 의신골에서 출가했다.
그가 남긴 글에서, 원적암을 제외하면
전부 화개동 의신골 안에 있는 사찰이다.

“삼철굴(三鐵屈)에 들어가 세 여름 안거를 지냈고,
대승사(大乘寺)에 들어가 두 여름 안거를 지낸 다음,
의신·원통·원적(圓寂) 등의 여러 암자에서
두서너해를 수도했다”

“의신골은 ‘의신사(義神寺)’절 이름에서 유래.
김일손(1464∼1498)이 정여창과 지리산을 산행하며 쓴
『속두류록(續頭流錄)』에 의신사의 모습이 잠깐 나온다.

“의신사는 평지에 있었다. …
도량에 들어서니 30여명의 승려들이
범패를 부르며 정진하고 있었다.

이 곳의 주지 법해(法海)는 학식이 높았는데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얼마 동안 쉬었다.”

지금 의신사 터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의신마을 뒤켠 풀섶에 원통형 부도 한기
부도 주인은 김일손과 담소를 나눴다는.. 법해스님




삼신사(三神寺).



삼신봉 아래 옛 사찰들.
영신사. 의신사. 신흥사.
세 사찰을 삼신사라 한다.

삼신봉은 지리산 三神이 살았다는 전설의 고향.
음양수 전설 속에 나오는 산신령이 살았다는 곳.
영신에게 세석평전의 철쭉을 가꾸게 했던 산신령.

결국, 영신은 촛대봉의 바위로 변하고
호야가 바위로 변했다는 곳이., 영신봉.

영신이 음양수를 마신 사실을 산신령에게 말한 호랑이
그 공로로 인해 '백수의 왕'으로서 임명되었다는 전설.
그래서인지 대성골 인근 사찰의 부처 아래 호랑이 조각.

연곡사 천은사를 비롯한 남방불교 계통의 사찰들.
불교종주국 인도에 곰이 없고 호랑이가 있기 때문.
지리산 주능선의 북쪽은 북방불교 계통 선종 사찰들

'음양수 전설' 의미가 새롭게 느껴지는 삼신사.

화개동 물은 세석평전 영신사(靈神寺)에서 발원해,
의신사(義神寺)를 거쳐 신흥사(神興寺) 앞을 지난다.
의신골에 있었던 신(神)자 돌림 세 절 = 화개동 삼신사.

삼신사는 의신골 물가에서 번창한 절들이다.
의신골 계류는 쌍계사 지나 섬진강으로 합류,
쌍계사 위로는 이미 수많은 절들이 즐비했었다.

민가는 없고 절만 즐비했던, 깊고 깊은 골짜기.
지금은 선조들 산행기에만 남아있는 사찰 이름들.
요즘 옛 <산중일기>를 통해 옛 사찰 찾는 산행이 붐.

대성골은 1950년대 빨치산 토벌작전 때 초토화.
비행기에서 휘발류 통을 낙하시킨 후에 화공작전.
하여, 옛 사찰들의 흔적조차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

의신마을 민가 뜰 안 작은 불상 정도가 고작.
지리산 화개동천의 의신골 끝지점이 삼정마을

2006년 10월 현재 7 가구.
흑염소 키우는 목장이 있다.
그곳 왼쪽에 벽소령 가는 도로

그 작전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빗점골
남부군 사령관 이헌상 지휘소가 있던 곳.

골바람 타고 낙엽 흩날리는 빗점골 옛 마을 터.
예전에 주민이 많이 살았다지만 지금은 빈 초원.
빨치산 영웅 이현상이 생을 마친 곳으로 유명하다.

1948년 가을 이현상은 의신골로 들어가서
고독한 전투를 펼치다 1953년 가을에 사살.
이현상이 물레방아를 돌려 전기를 일으켰던 곳

하여, 빗점골은 일명 발전소골.

화개동 계류의 주류는 의신골에서 내려온다.
신라 말 최치원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신골.
이조시대 서산대사가 15세 나이에 찾아간 의신골.

스님은 화개동의 의신골에서 출가했다.
그가 남긴 글에서, 원적암을 제외하면
전부 화개동 의신골 안에 있는 사찰이다.

지금 의신사 터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의신마을 뒤켠 풀섶에 원통형 부도 한기
부도 주인은 김일손과 담소를 나눴다는.. 법해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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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동 물은 세석평전 영신사(靈神寺)에서 발원해,
의신사(義神寺)를 거쳐 신흥사(神興寺) 앞을 지난다.
의신골에 있었던 신(神)자 돌림 세 절 = 화개동 삼신사.

삼신사는 의신골 물가에서 번창한 절들이다.
의신골 계류는 쌍계사 지나 섬진강으로 합류,
쌍계사 위로는 이미 수많은 절들이 즐비했었다.

민가는 없고 절만 즐비했던., 절골.

서산대사가 32세 나이에 불가 최고직 선교양종판사 직책.
그러나, 그 직책을 사임하고 되돌아온 곳이 화개동 신흥사.

불후의 명작 『선가귀감』은 신흥사 암자 내은적암에서 완성.
내은적암터는 신흥마을 왕성분교 뒷산 중턱에 있고 당호는 청허원.
서산대사는 내은적암을 중수해 청허원(靑虛院)이라 하고 스스로도 청허.

신흥마을 왕성분교가 <신흥사> 터.

신흥사터에는 큰 푸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고운 최치원 선생(857∼?)이 심은 지팡이라 한다.
신흥사 연못 가운데 바위를 세이암(洗耳岩)이라 명명.

“이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고,
이 지팡이가 죽어 있으면 나도 이 세상에 없느니라”

그 신흥사터 푸조나무 지팡이가 현재 천년 고목.
최치원은 신선이 되었거나 청학동에 산다는 설화.

김일손은 신흥사 스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황당무계하지만 적어둘 만한 일”라고 덧붙였다.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는 4km 아스팔트 길.
마을은 계곡의 몸통 부분에 선반처럼 얹혀 있다.
마치 단풍산이 그들의 축제를 위해 마련한 객석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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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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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도교의 시발은 624년(영류왕 7)
당 고조가 고구려에 도사(道士)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

643년(보장왕 2) 연개소문이 도교를 들여와
천하의 도술을 다 갖춰야 한다는 건의를 해
당으로부터 숙달(叔達) 등의 들여온〈도덕경〉

도교를 유교 불교보다 우위에 두어
고구려의 지배적인 종교로 부상했다.
이로 인해 승려 보덕이 백제로 이주 등
불교 측의 거센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김유신(金庾信)이나
그의 증손 김암(金巖) 등이 능통

도교가 극성하던 당에 유학 간 신라 말 지식인들
도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져 도맥(道脈)을 형성했고,
고려시대 왕실의 복덕을 비는 국가의례 도교가 성행.

가장 성행한 시기는 예종 때 송나라 제도를 거의 도입
예종의 대표적인 도교숭상 사례가 복원궁(福源宮) 건립
고려시대 도교는 국가왕실 및 국가의례 중심이었던 종교

이조시대 초기에 왕실의 비호아래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
성리학 이념과 의례를 절대시하는 유림 득세후 쇠퇴의 길
天地에 대한 제사를 거행할 수 없다는 조광조에 의해 혁파.

이조시대 도교는 민간신앙 의학 풍습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교가 민간신앙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성수신앙(星宿信仰)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신앙으로서 고려시대의 팔성당(八聖堂)

도교적 성수신앙과 산악숭배가 결합된., 신앙을 형성.

민간에서 숭배한 칠성신이 곧 도교적 성수신앙.
수련적 도교는 원래 예방 의학적인 양생법이기에
이조시대 성리학자들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허준의 동의보감 도교적인 양생법에도 영향을 끼쳤다.

도교 위경 옥추경(玉樞經)은 질병을 낫게 해준다는 내용
민간은 물론 불교에서도 널리 읽혀져 유 불 도 3교를 배합
선행을 권장하는 선서(善書)가 이조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도가사상은 유교사상과 더불어 2,000년 동안
중국과 그 주변국 사상을 형성해온 종교철학

도가사상은 실용주의적인 유교사상과는 달리
현실세계에 대한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적 이론

도교의 모든 이론은 노자에 의해 마련되었다.
노자에 대해서는 〈장자〉에서 처음 나온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체계적인 전기를 썼다.

도교의 '도덕경'은 군주에 대한 지침서.

"성인(聖人)만이 군주가 되어야 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야만 성군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