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선봉.
..................산행할 때 주의사항......................
서울역 밤기차가 구례구역에
도착하면 다음날 새벽.
역 앞 국밥집에서 이른 아침 식사 후 택시로 성삼재.
첫날 지리산종주 산행계획은 성삼재부터 세석산장까지.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세석산장에서 새벽 4시에 출발.
천왕봉에서 백무동 또는 중산리로 하산해 당일에 귀경.
일요일
밤늦게라도 귀가해야 월요일에 출근이 가능하다.
하여, 지리산 종주 성공 여부는 체력안배가 판가름.
밤기차에서
새벽까지 설레임으로 꼬박 지새우는 밤.
성삼재에서 출발해 벽소령에 도착하면 지치게 된다.
벽소령에서 지친 몸으로 세석산장까지
강행하면 탈진.
금요일 밤기차에서 밤샘 후부터 누적된 피로.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못 견딜 정도.
산행하다
보면 마음만 앞서고 따라주지 않는 몸.
벽소령에서 세석산장까지는 힘겨운, '마의 구간.'
허리까지 눈길에 빠지는
적설기에 특히 탈진하기 쉽다.
바위지대 급경사 구간마다 폭설 밑에 숨은 살얼음도 위험.
딛은 발이 미끄러져 나무 뿌리 올가미에
걸려 다치기 쉽다.
지리산 능선 상에서 조난사고 다발지역.
벽소령에서 세석산장까지.. 칠선봉 구간.
몹시 지치면
한걸음 한걸음마다 천근만근
특히, 찰선봉 구간은.. 일명 '마의 구간'.
...............................................
덕평봉 남사면 넓다란 평지 가운데
있는 선비샘.
선비샘에 도착하면 7 암봉들이 조화로운 칠선봉.
마치, 그 암봉들은 일곱 선녀가 놀고 있는 자태.
특히 칠선봉은 들쭉날쭉 오르내리는 암릉 험로
오르막 내리막도 심해 무척 체력이 소모되는 곳.
칠선봉에서 두어 암봉을
넘으면 급비탈 암릉지대.
나무뿌리를 부여잡고 지친 몸으로 영신봉을 오르면
조망이 탁트인 세석평전이 시야에 가득 차고
넘친다.
폭설에 덮힌 세석평전에 어둠이 내리면, 달빛이 곱다.
'눈보라에 갇히면 세석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다'
한치 앞도 안보이는 어둠속 눈보라에 갇혀 환상방황.
세석산장의 불빛이 손에 잡힐 듯 해도 사막의 신기루.
정신은
말짱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논앞에는 헛 것.
환상방황에 빠지면 칠선녀가 춤추는.. '칠선봉'
지리산 종주 도중에 가장
유념해야 할 구간이다.
여성을 상징하는 지명이 이곳 난이도를 대변한다.
칠선봉 험로는 7선녀처럼 넋과 혼을 쏙 배놓는다.
험로에서는 바짝 긴장되어 젖먹던 힘까지 다 쓴다.
영신봉에 이르러 세석평전이 보이면 풀리는 긴장감.
그러나,
눈앞까지 다가왔다가 물러서는 세석평전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설수록 끝내 뒤로 물러난다.
세석산장 불빛은 사막의 오아이스 신기루와
같다.
세석산장 아래 500 m 지점의 샘물 역시 그렇다.
산장에서 멀고 줄선 인파도 많아 지치게 하는 곳.
음양샘까지 가봐야 할지, 포기해야 할지도 고민거리.
'지친 몸을 끝까지 고민하게 하는 세석 음양수.'
산세가
까탈스러운 곳은 보통 여성을 상징하는 지명.
영신봉을 올라야 세석평전은 숨긴 아름다움을 뽐낸다.
지리산 봉우리들 중 여성에 비유한
유일한 이름 칠선봉.
이름 값대로 일곱번 정도는 고비를 넘겨야 하는..곳.
'음양샘의 전설' 수수께끼 열쇄를 간직한
듯한..칠선봉.
선녀탕을 품은 칠선계곡과 칠선봉은 어떤 관련이 있을듯.
'여기에 오면 가락국 수수께끼가 좀 풀리는 듯.'
7선봉은 7선계곡과 비슷한 지명을 쓰고 있다는 점.
즉, 가락국 영토 임을 알려주는 이름이라 여겨진다.
화개골
칠불암 경내 바위벽에 새겨진 성불한 7 불상.
'칠선봉은 '허황후와 7불암' 전설과 관련된 지명.'
신라 백제
가야에 쫓긴 마한의 효왕은 달궁에서 항전.
결국, 마한은 백제에게 패망 후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그당시 가야는 백제 연합세력
일원으로서 마한을 공격.
'삼한시대 이후 가락국의 영역이 된 지리산 일대.'
세석평전은 통일신라시대에 화랑들의 심신
훈련장
그전까지는 가락국의 군사 훈련장일 가능성도 있다.
칠선봉 지명은 가락국의 베일속 역사를 간직한 단서.
마야부인이 갈갈이 찢어버렸다는 '반야의 옷'
바람에 멀리 날아가 '반야봉의 전설' 속 풍란.
가락국의 흩어진 역사
자료들을 좀 더 찾아보자.
.....................가락국의 흩어진 역사
자료........................
520년간 존재했던 고령가야국 16 나라 중 하나 가락국.
가락국(금관가야)은
490년(532~ 42)간 존속한 고대국가.
고령군(高靈郡) 대가야국(大加耶國) 시조는 이진아시왕
16 대에 걸쳐 520년간
존속하다가 신라 진흥왕 때 패망.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가락국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 19년에
백성을 거느리고 와
항복하였기에 금관군으로 만들었다 한다.
김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는 42년에 가락국의 북쪽 구지봉에
6개의 황금알이 하늘에서
떨어져 반나절만에 모두 사람으로 변해
6 가야국의 왕이 되었고 그 중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기에..'수로'
김수로왕은
가락국을 창건, 국가 기틀을 확립한 인물.
인도 아유타 국의 공주인 허황옥을 왕비로서 맞이했다.
199년까지 158세를 살며
업적이 많았고 왕릉은 경남 김해.
가야국은 변한 땅에 세워진 연합국을 통칭하는 국호.
기야는 신라와 백제 틈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제 4국.
가락국은 중국과 일본을 잇는 동남아의 해상 무역국.
기원 전후부터 해상무역을 통해 문명이 발달한
나라.
가락국 전통악기 가야금은 우륵이 신라에 전수할 정도.
6세기 당나라 쟁을 본 딴 악기이고 우륵이 12곡을 작곡.
가락국은 왕실의 성풍속이 문란했다는 구전.
단지 구전일 뿐 근거 있는 역사기록은 없다.
..............................................................
<선녀탕> <한신계곡>은 가락국 전설 속 지명.
한신의 풍악대는 계곡에서 폭우를 만나 숨진듯.
한신계곡 알몸 속치마 차림 기우제는 가락국 풍속.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해상 무역왕국.. 가락국.
옛부터
유곽문화가 발달된 세계적인 항구 도시들.
목숨 건 항해를 하다보면 유곽은 뱃사람 오아시스
우리나라에서 공창 역사는 100
년,
부산 완월동, 인천 옐로우하우스 등.
한반도 국제무역 항구 도시의 유곽들.
'왕년에 한가락 놀았다.'는 속담
혹시 가락국 성풍속을 뜻하는걸까?
'흥청망청'은 경복궁 경희루에서의 주연.
궁녀들과 혼욕도 즐겼던 연산군에서 유래.
연산군의 천여명 흥청들에 비해
구형왕의 7선녀는 '새 발의 피'.
칠선봉은 가락국 역사를 품고 있는 듯.
지리산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칠선봉
지리산은 봉우리 지명 하나에도 숨겨진 역사
'참으로 신비롭고
경이로운..칠선봉.'
작은 세개골.
작은세개골 초입 다리 건너 큰세개골 등산로.
작은세개골은 초입부터 산길이 전혀 없는 구간.
작은세개골 암반과 와폭지대
지나 2단의 수직폭포.
계속해서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하늘이 활짝 터지는 지점을 지나
지계곡이 갈라져나가는 곳에
이른다.
덕평봉 계곡과 칠선봉 계곡.,갈림길
해발 1000m 이곳은 거의 산사태 지역
개울이 스며들어 물줄기도 간혹
보일 뿐.
계곡 막바지 잡목숲 지나면
칠선봉 서쪽 능선에 올라선다.
2단 수직폭포 지나 약 2시간 소요.
큰세개골
대성골 민박집.
대성골 첫번째 다리에서 300m 쯤 가면 칠성봉 능선 초입.
대성폭포및 영신대 모습..큰세게골 모습..
큰 세개골.
대성동에서 큰세개골 경유하여 세석 오르는 곳
대성동 문바위, 작은세개골, 큰세개골 5㎞ 숲길
지리산 등산로 가운데서도
아주 독특한 구간이다.
산길은 평지를 지나가듯 편편하게 이어졌는데,
바른편 대성계곡은 급경사 아래 쪽에 위치한다.
또한 참나무 숲이 빼곡하게 골짜기를 메우고 있다.
계곡을 건너는 길은 작은세개골과 큰세개골 두 곳.
큰세개골은 기암괴석, 작은 폭포까지 있는 넓은 골.
큰세개골은 물이 넘칠 때는 건너는데 위험이 따른다.
대성동 -
큰세개골 5㎞는 앞뒤가 꽉 막혀 적막한 느낌.
이 골짜기가 안고 있는 적막감은
빨치산 토벌 때 상황과는 대조적.
.............................................
'1952년 1월 17일 골짜기를
메울듯한 함박눈.
날이 저물며 대성골로 몰려들기 시작한 빨치산.
빗점골, 거림골, 신흥 등지에서부터 모여들었다.
다음날 새벽 눈덮인 대성골은 빨치산들로 인산인해.
토벌대가 눈보라속에서 공격하리란 예상을 못한 탓.
토벌대가
코 앞에 나타나자 밤새 대성골로 쫓긴 것.
의신부락 뒤쪽에 언제 야포를 끌어다 놓았는지
대성골로 포탄이 스무발 이상씩
날아들기 시작.
포탄이 동시에 터지자 희생자는 산더미 같았다.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며
토끼몰이
하듯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포격했다.
대성골은 밤낮으로 닷새 동안 불길에 휩싸였다.
정순덕은 시뻘건 불바다 속에서 정신 못
차리고
갈팡질팡하다가 어느 절벽 틈새로 비집고 들어갔다.
정순덕은 몇날 며칠을 바위 틈에 갇혀
선채로 생쌀을
씹으면서 버티어야 했다.
......................................
이상은 백야전(白野戰)
사령부 3기 토벌작전 때
대성골 빨치산이 궤멸적 타격을 입는 상황을 묘사
'실록 정순덕'에서 당시 상황을 발췌해 요약한 것.
정순덕은 빨치산 1만명이 이곳에서 궤멸했다고 증언
그녀의 증언은 과장된 얘기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
그러나,
빨치산이 치명적 타격을 입은 것은 틀림없다.
작은세개골 초입을 지나면서부터
계곡의 수량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계곡의 바위들도 큰 책상 정도 크기.
남부능선으로 오르는 두갈래 길
그곳 야영장을 지나면 큰세개골.
큰세개골은 바위도 없어 대성골보다 오르기 쉽다.
큰세개골 중단부터는 거대한 바위벽, 봉, 긴 와폭.
대성마을에서
이곳까지는 3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큰세개골은 대성계곡의 본류이다.
이 계곡을 게속 오르면 대성폭포
그리고 나서,
영신대에 닿게 된다.
그러나, 큰세개골 - 영신대는 정상적인 산길이 없어
길을 아는 사람과 동행하지 않으면 길을 찾기
어렵다.
큰세개골에서 영신대를 찾을 때
계곡을 치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세석가는 산길을 200m 가량 오른뒤
왼편 숲 속으로 들어가 지류를 건넌다.
한동안 숲 속을 헤치고 나가면
계곡따라 무난히 오를 수 있다.
야영장에서 1시간 반 올라
해발 1200m 지점에 이르면
약 150m 4단폭포가 보인다.
'대성폭포
또는 선유폭포.'
규모로 본다면 지리산 제 1 폭포.
폭포 중간에 쉴 만한 반석이 있다.
의신마을 주민들이 즐겨
찾는 폭포.
대성폭포가 지도에 나타나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비경은 숨겨놓는 것도 바람직하다.
.......선유동 폭포............
위치 : 경남 산청군 신안면 안봉리
선유동(仙遊洞)이란 선녀가
내려와 놀던 곳.
선녀가 술을 빚어 담아 두었다는 술독 형태.
폭포 물줄기에 오랜 세월 패인 반석위 웅덩이
소나무
그늘 아래 선녀가 누워있을 듯한 반석.
그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수는 선녀의 속치마 폭.
주변 소나무 숲이 울창해 더욱 신비감을
자아낸다.
특히, 폭포수가 흘러가는 반석 위에는 용의 흔적.
오랜세월 폭포의 물줄기 흐름에 패여져 나간 자국.
선유동 계곡은 폭포에서 다시 1km 더 올라가야 한다.
선녀들이 빚은 술을 담았다는 바위 웅덩이 반석.
그곳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무더위를 식힌 풍류.
도학사상 풍류문화에서 빚어진 전설로도 추정된다.
....................................................
한반도 계곡 곳곳에 있는
선유동 폭포.
이곳에서 선녀의 모델은 기생이었을 듯.
하여, 선유동은 도학사상에서 유래된 지명.
대성폭포 - 영신대
코스를 바문할 때에는
의신마을 주민의 길안내를 받는 것이 좋다.
폭포 왼쪽에 있는 희미한 길 흔적
그곳따라 가면
폭포 위로 올라선다.
폭포 위에서 1시간 10분이면 영신대.
세개골의 발원지인 영신봉 서남쪽 일대는
바위가 병풍처럼
서있어 '병풍암'이라 한다.
진주와 삼천포 산꾼들의 암벽등반 연습 코스.
영신대는 도학과 역학공부를 하는 사람들
무당들 사이에서 신비하고 영험한 기도처.
기가 힘차게 뭉쳐 수도하기 좋은 장소란다.
세석평전 코밑에 깜쪽같이
숨어있는 영신대는
일반인은 험한 곳이라 알아도 피해갔던 곳이다.
영신대 음양수는 대성골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에서 평생을 보내고
지리산에서 사라졌다는 우천 허만수 선생
이 곳에서 살았고, 이곳은 옛부터
피난처.
동학 농민군과 일제치하에서의 의병들
일제때 징병을 거부한 사람들의 은신처.
애를 못 낳는 남녀가 이
음양수를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의 샘 음양수
하여, 이곳을 찾는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영신대에서
세석산장까지는 30분 소요.'
대성골 코스는 전체 거리가 약 12㎞ 정도
오를 때 5시간, 내려올때 3시간 30분 소요.
대성골은 협곡으로 좌우편이 산비탈에 꽉 막혀
일몰 시간 이후부터는 아주 깜깜한 어둠의 천국.
창불대.
영신봉과 영신대,
영신대와 창불대
정상이 가까운 곳.
작은세게골 쪽에 산사태 모습.
키가 넘은 산죽밭.
옛부터 창불대에 올라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옛 기도처.
............김종직
〈유두류록〉에서.................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50리쯤 내려간 곳에 있는 부처바위.
"해가 기울었을
무렵 창불대(唱佛臺)에 올랐다.
위태롭게 솟아 밑을 볼 수 없고
위에는 풀은 없는데도
철쭉 몇 포기가 있을 뿐이다.
이런 곳은 고라니나 사향노루가 화살을 피하여 숨을만한 곳이다.
(…) 돌부처의 북쪽에는 두 바위가 높이 솟았는데 소위
창불대다.
한쪽 바위의 아랫 부분은 패이고 튀어나
매우 울퉁불퉁한데 위는 날카롭고 쭈뼛했다.
그 위에는
네모꼴 평평한 돌을 얹어
넓이가 겨우 한 자쯤 되었다.
스님이 말하기를, 소원을 이루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그 위에 올라가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
534년전 8월 14일 김종직의 유두류람 첫날 기록은
덕봉사(德蜂寺)의 승려 해공(解空)의 길안내로 시작.
나중에 합세한 법종(法宗)에게서 들은 자세한 지리 설명과
지장사(地藏寺) 선열암(先涅庵)의 독녀바위에 얽힌 전설,
의론대(議論臺)의 유래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15일, 멀리서 바라본 의탄촌(義呑村) 풍광은 가히 무릉도원.
영랑재까지 가파른 산행, 소년대에서 목격한 농민생활의 곤궁,
성모묘에서의 산신제와 그곳에 얽힌 일화 등의 기록이 있다.
16일, 날씨가 좋지 못해 주변 풍광을 감상하면서 하루.
17일, 다시 성모사에 가서 잔을 올리고
북루에
올라 주변 풍광을 감상한다.
중봉의 경치, 저여원(沮汝原 :세석평전) 매 잡는 기구,
창불대(唱佛臺)의 경관, 각 골의
내력 등에 대한 기록.
그날 저녁 영신사(靈神寺)에서 하룻밤 보내고 다음날 하산.
유두류록 말미에 두류산의 웅장함을
예찬하는 글.
고을 수령으로 도중에 만난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보고
꼼꼼히 천착하는 모습에서 목민관 정신이 엿보이는 기록.
.....................................
.....................................
창불대 산행코스 : 13.3km(8~10시간)
길을 잃거나 조난자가 많은 등산 코스.
백무동 → 작은 세개골(1.1km) → 선비샘600m 지점)(4km)→
칠선봉(0.9km)→영신대(1.1km)→영신봉헬기장(0.4km)→창불대→
음양수샘(1.0km)→거림
옛길→북해도교(1.6km)→거림(3.2km)
작은 세개골 입구 까지는 정규등산로로 30여분 소요
우측 계곡으로 내려와
상수도 파이프가 계곡건너 작은새골 진입
30여분 작은 폭포가 연속되는 비경지대를 통과하고 이후로도 계곡길,
계곡을 벗어나 잠시
옆으로 가는 등 70 ~80m 암반지대 지나 계곡 초원지대
(이곳까지 작은 세개골 입구에서 3시간 정도 소요됨)
- 이후
30여분 오르면 주능선에 도착
- 주능선 도착후 좌측 900m 지점에 칠선봉
- 칠선봉에서 900여m 세석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 등산로 아님으로 들어서서 260 여m 가면
커다란 바위밑에 공터가 있는 영신대임(주의 1).
- 영신대를 지나
350여m 오르면 영신봉 헬기장에 도착
- 헬기장에서 좌측으로 몇십미터 가면 정규 등산로이나
우측으로 내려서면 숲속 길이 열리고
음양수 까지 1.1km(주의 2.)
- 내려오던 방향에서 음양수 샘을 지나
02-15표지판과 확둑을 지나 좌측 길로 가면
거림 옛길임(주의3)
- 산죽길 좌측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건너면 너덜길이고
다시 우측계곡을 건너 내려오다 좌측계곡
건너 북해도교
- 북해도교부터 지정 등산로로 거림까지 내려가면 알탕코스
- 칠선봉을 지나 영신대 가는길을 놓쳤을때 :
등산로 따라 철계단 지나 영신봉 표지목 줄 넘어
헬기장을 지나 계속 내려가면 음양수 샘이 나온다.
영신대.
.
꼭 꼭 숨어 있는 영신대를 찿아 가는길.
음양수는 대성골 계곡 물줄기의 발원지.
음양수의 전설 속 여주인공 이름은 영신.
의신마을에서 유래된 듯한 음양수의 전설.
음양수는 아이를 갖고싶은 여인들의 기도처.
영신대는 지리산에서 가장 인기 높은 기도처.
지리산은 옛부터 모든 생명을 품어주던 곳
예로부터 ‘어머니의 산’으로서 일컬어져 왔다.
하지만 50년 전 이곳 산자락은 그러하지 못했다.
이념이란 굴레에
옥죄어진 생명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공포와 절망의 나락에 빠지며
결국, 모두 다 스러져간 곳이다.
특히 대성골은 빨치산들이 궤멸적 타격을 입은 곳.
그 슬픈 역사를 지닌 대성골 깊숙히 자리잡은 영신대.
들머리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에서 시작.
버스 정류소에서 도로따라 내려와 마을 입구
벽소령산장 간판이 서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다시 오른쪽으로 신작로 같이 넓은 산길이 열린다.
대성마을∼작은세개골∼큰세개골∼남부능선∼음양수샘
주능선의
세석고원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주 잘 나 있다.
현재 2가구가 살고 있는 대성마을까지 1시간 정도 걸린다.
2 가구 모두
민박을 치며 음식도 판다.
계곡 오른쪽 숲길 원대성마을 이정표를 지나
작은세개골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고 나면,
계곡 물소리 숲향기에 취해 걷다 또 다리를 건너
짙은 그늘 속으로 빨려들듯한 왼쪽 계곡은 대성폭포,
영신대가
은밀하게 들어앉은 큰세개골.
대성마을에서 도보로 1시간 소요 거리.
이제 산길은 왼쪽 방향을 틀며 가팔라지고
바윗길도 많아 무척 힘든 오름길로 이어진다.
가쁜 숨을 쉬며 1시간20분 정도 올라 남부능선
능선상에 올라 왼쪽은
세석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은 삼신봉을 거쳐 청학동으로 내려 가는 길.
남부능선은 영신봉에서 시작 낙동강에서 산줄기 마감
즉, 낙남정맥 마루금이 곧 남부능선.
능선에 접어들면 어느 쪽으로 걷던 길이 평탄하다.
정면 오른쪽 촛대봉,
왼쪽의 영신봉이 가까워지고
그 사이 세석산장 건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산꾼들에게 감로수를 제공하는 음양수샘을 지나면
편안한 숲속길로 이어져 곧 거림 갈림길이 나오면
세석고원과 세석산장이 지척이고 촛대봉이 보인다.
세석에서 주능선
너머 북쪽, 폭포의 왕국 한신계곡
그곳으로 하산하면 백무동 - 동서울 직행버스가 운행.
의신마을에 차를 두고 원점회귀
산행을 할 경우.
벽소령으로 이동 후, 삼정마을∼의신마을로 하산.
.............................................
.............................................
영신봉 아래 영신대는 지리산 10대
기도처
그중에서도 기가 가장 센 곳으로 알려졌다.
절벽으로 가로막힌 아래에는 샘터와 야영터.
지리산 산꾼들 간에
은밀하게 이용되는 곳.
..........영신대 찾아가는 길............
영신대(靈神臺)는 은자(隱者)처럼
숨어있는 곳.
이름처럼 신령스러워 俗氣의 범접을 저어하는 곳.
영신대는 등산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고
아는 사람도
드문 전설의 고향 같은 곳.
하동 화개장터 - 대성골 의신마을 -작은 세개골 -
- 큰 세개골 구름다리 건너 세석평전 가는
등산로 -
‘등산로 아님’표시판을 찾는 것이 첫번째 열쇠이다.
주위에 눈 여겨둘 만 한 지형지물이 없으니
다시
온다고 해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이 길은 대성골 주류‘큰세개골’들머리
등산로가 아니라고 하지만 산죽 숲 사이
좁은 길.
한참 가다보면 끊어질듯 말듯 이어지는 희미한 길.
어느 지점에서는 아예 길 흔적조차 묘연해 지는 길.
이곳에 여러번 왔어도 겨우 찾아낼 수 있는‘길 없는 길’
큰 세개골에서 여러 차례 계곡탐사 후에 만나는 대성폭포
아직도 그곳에서 영신대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늘도 없는 험한 계곡 바윗길을 위로 오르다 보면
계곡이 끝나 갈
무렵 오른 쪽 능선 고개 너머 영신대
영신봉 남쪽 절벽 바로 아래 가파른 언덕을 뒤로하고
조그만 암자 하나가 앉을 만큼의
평지가 바로 영신대.
앞쪽으로 바라보면 삼신봉 능선을 왼편으로 두고
대성골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장소.
영신봉1600m)에서 100m 아래인 고도 1500m 지점.
이곳은 옛 영신사 터이자 지금은 10대 기도처.
누구인가 커다란 돌로 단을 쌓고 치성을 드린 흔적들
태백산 천제단이나 마니산 첨성단처럼 무속인들 기도처
영신대에서
30분 정도 올라가면 지리산 주능선 상 영신봉.
세석평전과 세석산장이 눈 아래로 보이고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인 세석
철쭉 군락지
하산은 한신계곡을 거쳐 백무동계곡 가는 길.
한신계곡은 지리산 북쪽 응달진 골짜기로
늦은 봄까지 눈과
얼음이 녹지않는 곳으로
겨울철 빨치산 비트가 있던 곳으로도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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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가섭대'라고
불리웠던 영신대.
'음양샘의 전설'속 두 연인 보금자리인 듯.
대성골 의신마을일까? 아니면, 영신대일까?
영신대는
영신사 사찰터였던 '10대 기도처'.
'일명 <영혼의 안식처>라 불리우는 곳..'
영신과 호야의
보금자리로 추정되는 영신대.
영신대에서 음양샘까지는 거리 상 멀지 않다.
영신대는 지리산 제1의 기도처로 각광받는 곳.
칠선봉 영신봉에서 조난당한 등산객들.
누구의 도움이 절실할 때 나타난 구도자.
그들의 도움 받아 정신 차리는 곳이
영신대.
우천 허만수 씨가 숨진 곳으로도 추정되는 곳.
지리산의 달인 상락건씨가 그의 유해를 찾던 곳.
허만수 씨가
기거한 세석 움막과 가까이 있기 때문.
노고단 산장의 함태식 씨, 로타리 산장의 조재영 씨.
한결같이 우천의 말년이 아주
불행했다고 증언했었다.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정신을 가누지 못할 때도 있었다.
당시 세석고원 일대에는 도벌꾼과 단속반의
갈등이 빈번.
주먹장이’들의 무차별적인 횡포도 빈번하게 빚어졌었다.
당시 살벌한 상황과 결부해 불행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
그렇지 않다면 우천의 영면 장소는 영신대일 가능성도 높다.
세석평전에서 가까운 영신대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을듯..
'영혼의 안식처'로 알려진 영신대에서 영면했을지 모를 우천.
'산꾼들에게 은밀히 알려진 비박 명소.'
눈밭에
빠져 온몸이 얼면 동상이 무섭다.
체온으로 언 몸 녹이기가 최선의 응급처치.
비상수단으로는 침낭 하나에 둘이 들어가기.
'연인 사이라면 좁지 않은 한 침낭 속.'
낯선 사이라도 하룻밤 지나면 미묘한 감정.
영신대 일대에 사는
영신과 호야 같은 연인.
조난자와 구조자 사이로 맺어진 인연도 있다.
나무꾼과 선녀처럼 살아가는 연인들.
여름이
오면 큰세계골에서 함께 목욕.
봄가을에는 산과일과 약초를 캐며 생활.
때론 등산객 기도객 길안내 아르바이트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에게는 도피처.
영신대는 아직도 신비의 베일에 쌓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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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을 보면 해유령 길가에 있는 선암.
배바위는 전국 어디를 가나 유명한 기도처.
망망대해 풍랑 속에 흔들리는 마음 묶는 곳.
법종이 그 바위의 유래를
점필재에게 설명.
점필재는 법종에게 웃으면서 답변하는 대목.
"아주 옛날 바닷물이 땅을 뒤덮었을 때
이 바위에다
배를 붙들어 매었다는 전설.
게가 이 고개를 기어서 넘어갔기 때문에
<선암 : 배바위> 이름이 붙여졌답니다."
"그대 말을 믿는다면
그때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부둥켜 잡고 살았을 것이 아니냐?"
중봉에 오르자
흙으로 덮혀 있는 봉우리.
판판하고 넓어 말을 달릴 수 있었다는 곳.
바위에 마실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었던 곳.
가뭄이 드는 해 이곳 주민들이
이 바위에 올라 발을 구르며 돌면
반드시 천둥 치고 비가 내린다는 곳.
이륙도 시험해보니 효험 있었다는 곳.
지리산에는 기도처로 알려진 곳이 많다.
영신대는 '지리산의 10 대
기도처'이다.
불교를 배척한 이조시대에 사라져 버린 영신사터.
유두류록을 보면 그당시 영신대를 가섭대라 했다.
가섭대 지명은 이곳이 제 1 기도처 임을 알게한다.
'가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제 1 수제자.'
어느날 석가모니는 설법 대신에 꽃을 들고 있었다.
모여 있는 제자들 중에 아무도 그 뜻을 이해 못했다.
이때
가섭(迦葉)만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 앉아 있었다.
“나의 바른 법과 해탈의 마음이 가섭에게 전해졌다.”
염화미소(拈花微笑) =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잇는 선종
석가모니보다 나이많은 가섭 존자는 두타 제일로도 불린다.
'두타(頭陀)'= '흔들어 털어버린다' ‘번뇌를 털어버린다’
두타행의 기본은 누더기만 걸치고, 지붕 밑에서 머물지 않고
산과 들에서 자며, 걸식 이외에는 어떤 음식도 먹지 않는 생활.
석가모니는 2,600년 전에 몸소 실천한 행동이 염화의
소식.
모든 생명은 절대 자유이고 누구도 막고 유린할 수 없는 것.
사람이나 짐승이나 개미까지도 평등하다는 것이 불교의 교리.
생은 사의 근본[生者死之本]이요,
사는 생의 근본[死者生之本]이라,
생과 사는 연기(緣起)의 양면(兩面).
과거는 깬 꿈이요,
현재는 깨는 꿈이며,
미래는 깨어날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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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맥은 마음을 깨우친 제자가 스승의 계통을
잇기.
석가모니 10 대 제자 중 다문제일(多聞第一)인 아난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에는 마음을 깨치지 못했지만,
석가모니
입멸후 도를 얻어 가섭으로부터 법맥을 전수.
하여, 석가모니는 아난에게 계를 준 스승인 득도사가 되고,
가섭은 그 법의
스승이 되어 법을 잇고 등불을 전했던 시초.
법맥을 밝힌 전등보(傳燈譜) 기록엔 제1조 가섭, 제 2조 아난.
근세에
편양(鞭羊)은 서산(西山)의 제자인 현빈(玄賓)에게 출가
그의 노스님되는 서산스님으로부터 법을 받았기에 서산의 법제자
이처럼
가섭과 아난은 계를 받은 형제이지만 법을 이은 부자(父子)
현빈과 편양은 계를 받은 부자이지만 법을 이은 형제가 되는 것이다.
이는 출가하여 계를 받는 것은 득도의 계보와는 전혀 관계없이,
도를 이루어 법을 전해받은 인연으로 결정되는 사법전등의
철칙.
이 원칙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법칙으로 지켜져 온다.
불법을 전승하는 것은 몸소 수기함(기별)을 이어받아
마음과 마음으로서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생명.
이는 법을 주고받는 당사자 사이에서만 결정되는 일이요,
제3자가 인정하거나 상관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혈맥을 서로 이어받음(血脈相承)이라고 한다.
이는 마치 아버지의 피가 아들에게 전하여짐과 같이
스승과 제자가 주고 받아 불교의 법맥을 전하기 때문.
그러므로
혈맥을 이어받은 법맥은 절대 바꾸지 못한다.
하여, 기도처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법맥의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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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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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 지리산 유람록에 기록된 영신사지 기록
이륙, 김종직,
남효온, 김일손, 유몽인 이상의 5편 외
약 4편이 더 있어 모두 10여 편 정도에 소개된, 영신사.
대부분 천왕봉을
출발하여 영신사에서 일박
또는 영신사를 거쳐 갔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영신사 창건 연대는.. 어느 시대일까?
신라 사찰에 등장하는 가섭불 운운한 것.
좌고대에 최고운의 각자가 있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면 신라시대의
사찰인듯.
1611년 유몽인이 영신사에 다녀왔던 기록
그 이후로 영신사를 보았다는 기록이 없다.
“옛 영신사
터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다만 우물터만 남아서 흐르고 있었다.”
1752년, 시천면 남사부락 선비 박래오.
기록을
보아 폐사 시기는 17세기 후반 쯤.
박래오 이후 그 곳을 다녀온 선비들의 기록
영신사 고허지(古虛址), 혹은
유허지(幽墟址)
한편, 기록 속 영신사에 상주하는 스님은 두어 사람
아니면, 없다고 하였으므로 영신사는 암자 수준인듯.
영신사 기록에 등장하는 좌고대, 창불대, 가섭전 지명.
<좌고대>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1472년 유두류록 -
2006년 현재 좌고대 최상단 부분은 붕괴된 흔적이 있으며,
실제로 그위에 올라가 보면 세석평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섭대>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
세조 대왕 때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 1472년 유두류록 -
가섭대는 가부좌한 부처를 대좌에 안치한 형상
영신사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가섭대.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라고 표현을 한 본문의 대목에서 알 수가 있듯이
영신사지의 가섭불은 부처를 닮은
바윗덩어리이다.
<창불대>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
여기에서 두원곶, 여수곶, 섬진강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1472년 유두류록 -
남부능선 상에 위치한 일명 병풍바위라고 부르는 곳이다.
창불대와 영신사지와의 거리는
직선으로 약 300m 정도로
영신사지에서 이곳까지 길이 뚜렷하고, 이 곳에 올라서면
영신사지는 발아래 펼쳐져 섬진강 물줄기가
조망된다.
<옥청수와 우청수>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도 이보다 낫지 못할
듯.……"
- 1472년 유두류록 -
절터 양 가장자리 부분에 아직도 샘터 흔적이 있으며,
샘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영계(靈溪)와 옥천(玉泉)으로,
지금도 작은 내를 이루어 명경같은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영신사 산 아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6.25 전까지는 여섯 가구 화전민 마을터.
농사를 짓고, 약초를 캐며 살았다고 한다.
기온이 너무 차고 바람이 심해 오직 감자 농사 뿐.
6.25 전쟁이 일어나 그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단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가섭불 아래에는 작은 당집이 있어
멀리 산 아래에서 찾아오는 기도객 들이 있었다고 하며,
세석
군데군데 살던 주민들이 치성을 드렸던 곳이라 한다.
현재 영신사지로 추정되는 수천평 터는 화전 흔적
아직도 화전민들의
세간살이 흔적이 나뒹굴고 있다.
천년 가람터 '영신사지'는 옛 기록속에만 존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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