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97 ( 바이칼 호. 고조선. 한사군. 백두대간. )

donkyhote 2011. 2. 28. 01:52

바이칼 호.

 

 


 
 

 

자작나무 숲

 


 

 


 

숙소에서 앙가라 강으로 가는 길. 
 

 


 

아침 안개로 덮힌 앙가라 강.



 


 

가장 낭만적인 풍광의 쟈임카의  저녁 강가.

백야 현상으로 밤 9시가 다 되어 찍은 강가의 풍광.

열하루 달이 떠 있었고.낚시꾼이 한가롭게 즐기고 있었다.

말이 이끄는 마차가 숲길을 달리고 모닥불 피워 놓고

원주만들과 함께 노래와 츰으로 늦은 밤을 즐겼다.

 

 

                                    바이칼 원주민의 민속 춤.

 

 

 


 

원주민과 함께.

 


 
 

 

원주민의 민속춤.

 

저녁 무렵의 바이칼호는 황홀할 정도로 낭만적이다. 가랑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짙게 낀 흐린 날에는 푸근한 분위기를, 청명한 날에는 서쪽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저녁놀을 만날 수 있다. 한 편의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멋진

 저녁놀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바이칼호에서 흘러나오는 유일한 하천인

 앙가라강 주변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좋다.



 

 


 

물 속의 작은 돌맹이까지 환히 보이는 앙가라강.

바이칼 호수는 366 개 강에서 흘러들어오는 담수호.

 


 

 


 


 



 


 


 


 

 

 


 


 

햇빛에 은어떼처럼 반짝이는 바이칼 호

 


 


 



 










 



 

 




 










 


지금은 시베리아 설원 속에 있는., 바이칼 호.
제 4 빙하기 혹한기에 극소수 인류만 생존한듯.
당시 생존한 극소수 인류가 오늘날 우리의 조상.

바이칼은 알타이어로 '풍부하다'는 뜻의 지명.
제 4빙하기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살던 '유라시아’
우리 민족의 무의식 속에 이미 내재된 그 유전자.

몽골 초원을 달리는 말
민족의 자궁 바이칼 호수,
알혼섬 신성한 부르한 바위.

우리같은 작고 길게 찢어진 눈과 납작한 얼굴
외국인은 제대로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아리랑
우리 민요를 제대로 쉽게 따라 부르는 몽골인

백의 민족의 영혼을 품었던 백색 설원의 바이칼호수.
우리 민족을 품고 기른 어머니 자궁의 양수같은 호수.
바이칼 호수는 '시베리아의 진주’로 불리우는 담수호.

남한 면적의 1/3이며 벨기에와 같은 면적의 크기
지구 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오염 되지 않은 호수

바이칼호수 속에는 ‘네르파’라고 하는 담수물개,
철갑상어, 속이 보이는 투명한 물고기 골로미앙카
전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1,500 종 생물 서식처.

바이칼 호수는 곧 진화박물관이자 원시생명체 연구소
그곳 생물 중 75%가 다른 어디에도 없는 고유한 토종
하여, 그곳 자체를 '또 하나의 지구’라고 불리우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깊고, 맑고, 아름다운 호수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여행을 하면, 바이칼 호수 끝부분.
초승달 모양으로 이루어진 그곳을 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려, 그곳을 통과하는 시간이 자그마치 3시간.'

그곳 알혼섬은 바이칼에서 약 321km 북동쪽에 있다.
자동차로 4~5시간 달리면 알혼섬에 들어가는 선착장
32개 바이칼 섬 중 제일 큰 섬(제주도의 절반 면적)

알혼섬에서 바라보는 바이칼 호수 노을은 환상적인 풍경
저녁 9시면 전기가 끊어지기 때문에 섬 전체가 칠흙같다.
알혼섬은 윗쪽과 아랫쪽은 초원지대이고 중간은 숲 지대.

초원에는 많은 양들을 방목하고 있고
초원과 숲을 가르는 지대에는 모래 밭.
차를 몰고 달리다 빠지면 고생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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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이끼를 두른 부르한 바위 부근 사방팔방에
쌀알을 뿌리고 시베리아 대평원과 원시림을 넘어
20 여일 동안 3만리(1만2000㎞)를 달려온 원정대

한민족의 숨결이 그대로 녹아 있는 <아리랑>을 합창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둘러 서서 춤추는 강강 수월레.
백야현상으로 땅거미 깔릴 무렵 시작된 바이칼 천지굿.

들당산굿, 대동놀이, 한국·중국·몽골 무당의 전통굿
퍼포먼스와 길놀이를 벌인 뒤에 뛰어든 바이칼 호숫물.
한데 어울린 물춤은 만남과 씻김을 위한 천지굿의 절정.

"바이칼에 들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아온다는 전설."

모스크바 - 이르쿠츠크 - 부산을 잇는 험로 1만2000㎞
시베리아 대초원과 드넓은 원시림 구간의 비포장 험로
원정대는 무사히 유라시아 통로를 개척하는 목표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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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 일대는 만주족 몽고족 거란족 등의 근원.
현재 중앙 아시아, 몽고, 만주, 한반도, 연해주, 일본
서부, 또한 중국의 동부 해안지방까지 지배했던 민족.

중국의 고대국가인 은나라, 주나라 시대
그당시 동이족 영역에 고조선이라는 나라.
곧 백두대간의 한 민족이자 우리나라이다.

"동이족은 사람들이 장대하고 활을 잘쏘고
가무에 능하며 예의가 워낙 밝은 나라지만
아무리 강해도 이웃 나라를 침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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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방 부랴티야 자치공화국과
이르쿠츠크 주에 걸쳐 있는 바이칼호.
동 시베리아 남부에 자리잡은 바이칼호.

세계에서 가장 깊은 내륙호로 최고수심 1,620m
길이 636㎞, 평균너비 48㎞, 면적 3만 1,500㎢.
지표상에 있는 담수의 약 1/5을 수용하는 바이칼호

셀렝가·바르구진·베르흐냐야앙가라·투르카·
스네주나야 강을 비롯한 336개의 하천이 유입.

바이칼 호는 산들로 둘러싸인 깊은 구조적 와지(窪地)
이들 산 가운데 몇 개는 호수표면에서부터 2,000m 높이.
5억년 이상 된 변성암·퇴적암·화성암으로 이루어졌다.

호수 바닥의 퇴적층은 두께가 6,000m에 이른다.
호반 가까이 사화산들..지금도 지각변동이 계속
1862년 지진으로 셀렝가 강 삼각주 북부 123㎢ 침수

'프로발 만이 생겼고 계속 솟는 뜨거운 온천들.'

호수 바닥 서쪽 연안은 경사가 가파르고
동쪽은 완만한 형태로 약 8%는 48m 수심

길이 2,080㎞가량의 들쭉날쭉한 해안선에는
바르구진·치비르쿠이스키·프로발 등의 큰 만
아야야·프롤리하 등의 작은 만들도 형성되어 있다.

남동쪽 연안에는 스뱌토이노스 반도가 있다.
주기적으로 물에 잠기는 바이칼호의 5개 섬
27개 중 큰섬 올혼(448㎢), 볼쇼이우슈카니(4.8㎢)

주로 셀렝가 강 하수유입이 가장 크며
그밖에 유입되는 강수(降水)와 지하수.
유출은 예니세이 강 지류인 앙가라 강.

수위는 1년 동안 0.6~0.9m 정도 차이
8~9월에 가장 높고 3~4월에 가장 낮다.

바이칼 호의 기후는 주변지역보다 훨씬 온화해
1~2월 평균 -19℃이고 8월평균 11℃ 가량이다.

호수면은 1월에 얼고 5월에 녹는다.
8월 해안 얕은 곳 수면온도는 20℃.
파고는 4.5m 이상 되는 경우가 많다.

호수는 광물을 거의 함유하지 않아
수심 40m 까지 보이며 염도도 낮다.

바이칼 호의 동식물 생태는 풍부하고 다양.
수심에 따라 1,200종이 넘는 동물이 서식하고
600종에 가까운 식물이 수면 가까이에 분포한다.

이가운데 약 3/4은 바이칼 호의 고유종이다.
7개과(科) 50여 종(種)의 물고기가 있는데
이들 중 가장 많은 둑중개과 25종 물고기

연어류가 많이 잡히며 사루기와 흰연어류도 중요한 어종.
어류 중 가장 큰 철갑상어는 길이 1.8m, 무게 120㎏ 정도.
유일한 포유동물은 바이칼 물범이며 326종의 조류가 서식.

바이칼 호반 지역에서는 광업(운모와 대리석),
셀룰로오스와 종이 제조, 조선업, 어업, 임업 .

수많은 광천이 있으며 치료 효과 때문에
많은 인파가 찾는 고랴친스크와 하쿠시.
5~10월에 뗏목으로 호수를 건널 수 있다.



고조선.



조선 명칭은 우리나라 및 중국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檀君朝鮮 , 箕子朝鮮 , 衛滿朝鮮 , 樂浪郡의 朝鮮縣 등
그 결과 동일 명칭 때문에 역사 기록들이 혼란을 초래한다.

고조선은 첫째 壇君朝鮮 , 衛滿朝鮮 , 漢四郡의 朝鮮縣을 포괄
둘째는 衛滿朝鮮 이전 朝鮮 , 樂浪郡의 朝鮮縣 등을 포괄한 경우
셋째는 箕子朝鮮만을 의미하는 경우이고, 넷째는 壇君朝鮮만 의미

첫째와 둘째는 고조선을 근세조선 이전 '옛날의 조선'을 의미.
셋째는 중국에서 이주해온 箕子族에 의해 건국된 조선을 의미.
넷째는 壇君朝鮮만 인정하고 단군조선 만 고조선으로 본 견해.

壇君朝鮮은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된 나라

箕子朝鮮 . 衛滿朝鮮은 중국 망명인들에 의해 세워진 정권
箕子朝鮮은 壇君朝鮮의 거수국, 衛滿朝鮮은 檀君朝鮮과 대립
樂浪郡은 중국 西漢의 행정구역이므로 壇君朝鮮과 별개의 나라


고조선은 三國遺事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壇君朝鮮에서는 도읍을 아사달이라 하였다.

아사는 아침을 뜻하고 달은 땅(곳)을 의미
아사달은 '아침의 땅'이란 뜻이 바로 국명
이 명칭을 한자화하면서 朝鮮이라고 했던듯.

고조선을 세우는데 중심이 된 고을나라의 이름은 아사달
이 고을나라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여러 고을나라를 복속
고조선을 건국한 후 그들의 중심지인 도읍을 아사달이라 한듯.

'아사달이 한자화되며 아침의 땅 朝鮮이 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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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의 고대국가는 고조선 3 국.
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시베리아 바이칼호에 살던 환족.
추위를 피해 만주로 이주해온다.
만주에는 이미 정착한 곰족과 범족

곰족 또한 환족처럼 이주민.

원주민 범족은 지배계층이 되고
이주민 곰족은 피지배층이 된다.
이때 환족이 들어와 곰족과 연합.

노비처럼 살아왔던 곰족과 갓 이주한 환족
연합해 범족을 쫓아낸 9환족이 세운 고조선.
이때, 공을 세운 거발단환웅 아들, 환검(단군)

기원전 2333년 9환족을 연합국..고조선.

환검은 후세 단군의 목에 청동거울을 달도록 하게 하고
도읍을 아사달(중국 창려)에 짓고 조선을 5개 행정구역
<예,속진,개마,청구,남국>으로 나눠 부족장을 임명한다.

그는 백성을 관심하여 움집을 만들도록 권장한다.
그후, 환검은 재위93년만에 죽고,아들 부루가 즉위.

이때,남쪽에 우나라가 세워졌다.
단군 조선에서 부루가 즉위하자
불만세력 호족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틈을 타서 우나라가 단군조선을 처들어온다.
단군조선은 이미 반란군을 사막으로 내몬 이후
단군은 지형을 모르는 우나라 군대는 늪으로 유인.

결국 우나라를 평정후 그 영역인 남국까지 통치.
그후 단군조선은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하여 온다.
집집마다 문을 열고도 잘 살 수 있을 만큼 태평성대.

갸륵 단군은 슬기로워 가림토문을 만든다.
(산동성에서 발견된 훈민정음의 전신이다)

청동기 시대가 열리자 단군조선은 위기에 봉착.
청동 무기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단군조선을 침략.
이때 내란을 평정한 은나라가 단군조선을 침공한다.

제 21 세 소태단군은 욕살고등이라는 무장을 시켜 방어.
욕살고등은 은나라 군사를 골짜기로 끌어내 몰살시킨다.
이 공로로 욕살고등은 단군조선에서 우현왕으로 책봉된다.

한편 전쟁에 패한 은나라왕의 폭정에 못견딘 신하 기자
조선으로 도주해 단군조선 변방에 세운 나라가 기자조선.
욕살고등이 죽고, 그 손자 색불루가 우현왕으로 즉위한다.

조정에서 자식없이 늙은 소태단군의 후계자를 정하려 할때
공을 세운 무신(색불루 지지파)과 세습귀족(서우여 지지파)
두 파로 갈라진 것이 최초의 단군조선 당파싸움으로 보인다.

조정이 서우여 파로 기울자, 색불루 파가 반란
서우여와 소태단군을 쫓고, 제22세 단군으로 즉위
그러나, 색불루는 정통성이 없어 제후들이 등돌린다.

단군조선은 큰 어려움에 부디친다.

이때 선진문화를 가진 기자 무리
기원전 1122년에 기자조선을 건립

기자조선을 피해 단군조선은 할빈으로 천도
단군조선은 더욱 더 혼란기에 빠져들게 된다.

그동안 기자는 민심을 얻고
단군이란 칭호를 왕으로 바꾸고
아사달 도읍지를 왕검성으로 개칭.

기자조선 역대 왕들은 민심을 얻기 위해
힘이 없는 단군조선을 그대로 존속시킨다.
결국, 고열가단군의 퇴위로 사라진 단군조선,

기자조선 부왕은 기뻐 주색에 빠져든다.
이때 동방의 새 세력 연나라가 쳐들어와
기자조선이 찾이했던 요동땅을 빼앗는다.

하여, 많은 부족들이 한강을 건너 진국으로 이주.
기자조선은 요동을 잃었지만 철기문화를 접수한다.
그러나, 널리 보급해 쓰일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부왕이 죽고 기자조선 마지막 왕(준왕)이 즉위
이때 연나라는 진나라에, 진나라는 한나라에 복속되었다.

이때 불만을 품은 연나라 옛 신하들
노관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실패하자
연나라 사람 위만을 따라 준왕에게 간다.

준왕은 위만의 지혜와 뇌물에 감격하여
위만을 청천강-압록강 수비대장으로 임명

그후 위만은 실력을 키워 27년만에 반기를 들고
왕검성을 점령해 준왕을 내쫓고 위만조선을 창건.
한편, 쫓겨난 준왕은 진국을 건립하고 한왕이 된다.

옛 구혼이 있는 한왕은 위만조선과 적대관계.

그동안 위만조선은 철기문화로 진번을 정복하고
우거왕에 이르러 한나라를 압도할 만큼 성장한다.
진국에서 한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 통행료를 징수.

이에 분노한 한나라 무제는 섭하를 보냈지만,
섭하가 오만하게 굴자 우거왕은 섭하를 죽인다.
한무제는 수차례 조선을 공격하지만 번번히 패배.

한나라는 화해하는 척하며 내실을 든든히 정비하고
태자를 보내 육군 6만,수군 7천으로 다시 공격한다.
이때 위만조선은 위성도시를 잃고 왕검성에 고립된다.

얼마 안되는 군량으로 1년을 견디다가
한나라에서 뇌물을 받은 삼이 우거를 죽이자 멸망.
충신 성기가 마지막으로 반항했지만 물거품이 된다.
이에 따라 한반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식민지가 된다.

비록 '한단고기' 기록은 다 믿기 어렵지만
최소한, 고조선의 역사는 사실에 가까운듯.




한사군(漢四郡)



고조선 멸망 후 고조선과 예맥 영토에
한나라가 설치한 4개의 군현이..한사군.

[성립과 전개]

약 1년에 걸친 전쟁 끝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
BC 108년 고조선에 낙랑 진번 임둔의 3군(郡)을 설치
BC 107년 20년 전 점령한 예맥 영역에 현도군 설치했다.

하여, 4군을 유주(幽州) 관할 아래 두고
한은 4군을 중앙정부에서 직접 다스린다.
군태수·현령·속관을 한나라에서 직접 파견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토착세력 저항이 격렬
한은 BC 82년 4군 가운데 진번과 임둔을 폐하고
진번은 낙랑군에, 임둔은 현도군에 속하여 관할

따라서, 조선현(朝鮮縣)을 비롯
염한(邯)·패수(浿水)·점제(蟬)·
수성(遂成)·증지(增地)·사망(駟望)·
둔유(屯有)·누방(鏤方)·혼미(渾彌)·
탄열(呑列) 등 11현으로 출발한 낙랑군

진번군의 속현 15개를 추가로 관할해
외형상 군세(郡勢)가 크게 증대되었다.

그러나 토착세력의 반발은 계속되었으며,
특히 예맥 땅 현도군에서의 저항이 심했다.

결국 BC 75 현도군은 고구려족의 반발에 밀려
고구려현을 압록강 서북 흥경 노성으로 옮겼다.

현도군은 옛 임둔군 관할권을 낙랑군에 넘기고
크게 위축되었고 현도군은 고구려 중심부가 된다.

한편 낙랑군은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소명(昭明)·대방(帶方)·함자(含資)·열구(列口)·
장잠(長岑)·제해(提奚)·해명(海冥) 7현으로 구성.

2차에 걸친 군현 통폐합으로 중국 군현세력은 약화
고조선 중심부를 차지한 낙랑군 세력은 오히려 증대.
그러나 고구려 토착세력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반발.

현도군은 고구려의 강해진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푸순 방면으로 군치를 옮겨 예맥 통제 상실.
후한 광무제가 평정하려하자 낙랑 토착세력이 반발.

반란세력은 태수 유헌을 죽이고 후한의 지배를 거부했다.
지방세력의 평정을 끝낸 후한은 30년 왕준을 태수에 임명
낙랑의 한인 속관들은 반란을 진압했으나 한의 통치력 약화

낙랑군 주변의 고구려·옥저·동예·백제 등의 성장은
낙랑군의 약화를 재촉해, 토착민이 한·예로 대거 이주

그러나 후한말 혼란을 틈타 랴오둥을 지배한 공손씨
현도군뿐만 아니라 낙랑군도 지배 아래 두게 되었다.
낙랑군을 비롯한 중국 군현세력은 잠시 세력을 회복

공손씨 멸망 후 낙랑군과 대방군은 위의 군현이 되어
위의 지원을 받으며 고구려 영향권 동예를 정벌해 복속
백제와 통혼관계를 맺으며 주변세력에 대해 영향력 행사.

그러나 후한의 군현축소정책으로 지방관리 파견이 불가
이로 인해 낙랑·대방 군현관리는 점차 토착인들로 대체
결국, 중국 군현으로서의 성격과 기능을 점차 잃어갔다.

후한대부터 본격화된 고구려·백제 등의 국가성장
낙랑군·대방군의 토착인들이 고구려·백제로 이주
4세기에 들어와 북중국이 5호16국시대라는 대혼란기

고구려는 313년 낙랑군을, 314년 대방군을 점령.
한반도 내의 중국 군현은 소멸되고 삼국시대 개막.
고구려 광개토왕은 랴오둥 경략시까지 점령하게 된다.

 

 


백두대간.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제 1 구간이다.
지리산이 나무라면 백두대간은 숲이다.
하여, 백두대간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대간(大幹)이란 큰 줄기를 뜻하며,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우리나라 영역의 등뼈이며 골격이다.

백두대간에서 장백정간과 13개 정맥
백두산을 뿌리로 1대간 1정간 13정맥
나무의 줄기와 가지처럼 펼쳐진 산맥.

백두대간은 약 1625km에 달하는 거리.
남북 관통후 영호남을 가로막는 장벽

백두대간 개념은 언제부터 알려졌을까?
이조 후기 여암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
1769년 영조 45년 총 102쪽으로 발간된 책.

산줄기 이름은 백두대간, 장백정간 등등 두 개이고
나머지 11개는 강이름에서 따와 남북으로 위치표시
산줄기 순서는 북쪽으로부터 가지친 차례대로 표기

대간에서 가지친 산줄기는 1정간 13정맥 총 14개.
이것들은 한반도 열 개의 강을 구획하는 울타리들.
그런 연유로 정맥 이름은 강에서 따온 것이 대부분.

따라서, 정맥은 산줄기의 높이, 규모, 명산 등과 관계없이
아무리 낮고 미약한 김포평야의 낮은 구릉지대라도 한남정맥.
즉, 한강 유역을 가르는 능선이므로 중요한 '한남정맥'의 줄기.

1개의 대간과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
여기에서 가지친 산세가 생활영역의 경계
취락형성과 발달, 식생활과 주거양식 구분,
언어 분포, 옛보부상의 상권과 5일장의 권역

국토의 70%가 임야인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산을 인식하는 출발이자 끝이라 할 개념이다.
우리 조상들은 산을 강과 같은 맥으로 보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산은 물을 낳고, 물은 산을 가르지 않는다
하여, 비록 높은 두 산이 이웃하여 있어도
사이에 물줄기가 있으면 산줄기는 돌아간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산이 그 고저를 가리지 않고
나무의 가지 줄기처럼 이어진 국토 인식을 뜻한다.

덕유산 북사면은 이른 봄에도 눈꽃이 피어 있다.
이 땅의 산줄기가 백두산과 통한다는 전통적 개념
일제하에서 백두대간의 개념은 뒷전으로 사라지고
마천령, 함경, 태백, 소백 등의 이름이 공식적 개념

1900년과 1902년에 일본의 조선 침략정책의 일환

백두대간은 다섯으로 토막나고 산맥은 강을 건너고
적유령, 마식령 등의 고개가 산맥 이름으로 붙었다.
사장된 백두대간이 다시 알려진 시기는 1980년대 초.

지도를 만드는 이우형씨 등이 '산경표'를 발굴
옛 개념을 되살리고 대간 종주가 진지하게 시작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 49명의 대학생 종주기

직장인들이 1달에 두 번 정도 주말을 이용해 완주
전국 산악회 中 절반이 주말 백두대간 종주대 운영
백두대간은 반만년 역사가 이어져온 한민족의 터전.

'통일 조국의 미래를 향한 산줄기의 기본개념.'


백두대간을 54 구간으로 나눈 도포.
(1시간에 1km 산행하는 것으로 기준)

01 천왕봉----벽소령 15.5km
02 벽소령----성삼재 22.5km
03 성삼재----고기리 11.0km
04 고기리----여원재 8.0km
05 여원재----사치재 12.0km

06 사치재--복성이재 6.5km
07 복성이재----중재 11.5km
08 중재----무령고개 8.5km
09 무령고개--육십령 11.0km
10 육십령----동엽령 16.2km

11 동엽령------빼재 13.5km
12 빼재------덕산재 11.5km
13 덕산재--삼도봉안부 14.0km
14 삼도봉안부--우두령 11.0km
15 우두령-----궤방령 12.0km

16 궤방령-----추풍령 9.5km
17 추풍령--용문산안부 14.0km
18 용문산안부--회룡재 9.3km
19 회룡재-----지기재 13.3km
20 지기재-----화령재 13.0km

21 화령재--갈령삼거리 11.0km
22 갈령삼거리--밤티재 14.0km
23 밤티재----갓바위재 7.5km
24 갓바위재-버리미기재 10.5km
25 버리미기재-지름티재 14.0km

26 지름티재----이화령 13.0km
27 이화령---조령3관문 8.0km
28 조령3관문---하늘재 8.2km
29 하늘재-----대미 12.0km
30 대미산------벌재 12.0km

31 벌재------싸리재 9.5km
32 싸리재------죽령 15.5km
33 죽령----늦은맥이 14.5km
34 늦은맥이--마구령 12.0km
35 마구령----박달령 13.0km

36 박달령---곰넘이재 13.0km
37 곰넘이재---화방재 15.0km
38 화방재---두문동재 9.5km
39 두문동재--건의령 9.3km
40 건의령------댓재 19.0km

41 댓재-----연칠성령 10.3km
42 연칠성령---백복령 17.2km
43 백복령----삽당령 16.5km
44 삽당령----닭목재 12.5km
45 닭목재----대관령 12.0km

46 대관령----진고개 23.5km
47 진고개----구룡령 21.5km
48 구룡령---쇠나드리 17.5km
49 쇠나드리---단목령 12.0km
50 단목령----한계령 12.5km

51 한계령----마등령 17.5km
52 마등령----미시령 10.7km
53 미시령----대간령 6.0km
54 대간령----진부령 9.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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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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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진 산줄기.
동해와 서해로 흘러가는 강을 구분하는 대간(정간).
대간에서 강을 경계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을 정맥.

백두대간이 허리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 태백산.
태백산에서 서남쪽 지리산까지 뻗은 산줄기가 백두대간 정간.
백두대간 삼신산은 백두산(2744m) 금강산(1638m)·지리산(1915m).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린 산맥은
한마리의 호랑이 골격과 같다.

백두산은 호랑이의 머리 형태,
낙동정맥은 호랑이의 꼬리 형태.
청북, 청남 정맥은 호랑이의 앞발
금북, 금남 정맥은 호랑이 뒷발에 해당.

우리나라 지도를 최초로 그린 고산 김정호 ( ? - 1867 ).
청구도,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등을 만들어 지리학에 공헌

'한성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하나?'
'평양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나?'

'전국을 다니며 우리나라 지도를 만들어야지.'
'산줄기와 강물들이 뻗어나간 우리나라의 지도.'

1843년 '청구도' 지도 2첩, 1861년 '대동여지도' 완성.
'대동' 이란 한반도, '여지도'란 땅 전체를 뜻하는 말.

김정호는 삼십년간 노력끝에 '대동여지도'를 완성.
1864년 지도를 그린지 50 년만에 대동지지 32권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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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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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거친 들판 가운데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부른다"
그뒤 단단대령, 개마대산, 도태산, 태백산, 백산으로 불리웠고,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성종 10년(981년)부터 백두산이라 불렀다.

장군봉(2,749.2m), 망천후(2,712m), 비류봉(2,580m), 백암산(2,670m)
차일봉(2,596m), 층암산(2,691m), 마천우(2,691m) 등등 7개의 봉우리.

중국측에서는 우리의 장군봉을 백두봉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롯해
삼기봉, 고준봉, 자하봉(2,618m), 화개봉, 철벽봉(2,560m), 천활봉,
용문봉, 관일봉, 금병봉, 지반봉(2,603m), 와호봉(2,566m), 관면봉
16개 봉우리에 모두 명칭이 있고 1900년대 초에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측에 있는 장백폭포(높이 68m)가 가장 높고 큰 규모.
밀림 속에 있는 악화폭포(높이 50m)는 경치가 참 아름답다.

백두산은 여러 번 화산 폭발(1413년,1597년,1660년,1702년,1900년)
5차례 화산 폭발이 있었고 지금도 화산활동 후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백두산 내 온천은 해발 1,756 m 이상 되는 곳에 모두 30 여곳이 있다.
그 가운데 천지 내에 두 개의 분수구가 있고, 장백폭포 북쪽에 13 개.

최고 수온은 82도에 달해 달걀도 삶아지는 곳.
아직까지도 관광지로서 투자 개발이 미흡한 곳.

백두산은 7천만년전 백악 말기에 융기되어 산체를 이뤘다.
그 뒤 유구한 세월동안 침식작용으로 낮아져 지표면은 평탄
3천만 년전부터 히말라야처럼 솟아 1,900만 년전부터 다시 상승

1,500만 년전 북서쪽 산맥을 형성하였고, 4백만 년전 북동쪽 융기.
55만 년 천지에서 용암이 흘러 나와 화산 분화구 주위에 화산 형성.
44만 년 전 천지 분화구에서 화산폭발후 또 다시 용암이 흘러 나왔다.

그 뒤 백두산은 사화산으로 변했다가 21만 년전 다시 분화구 폭팔
이 화산 활동의 말기에 용암 분출구가 함몰되면서 현재의 천지 형태
8만 7천 년전 다시 화산활동을 하면서 여러 개의 화산 분출구가 형성

백두산 화산체가 일정하게 형성된 다음 백두산 화산 활동은 잠시 정지.
1만 년전 기온이 내려가며 해발 고도가 높은 백두산은 빙하로 덮혀졌고
백두산의 산봉우리들이 뾰족하게 되었고, 천지 주변도 빙하의 침식 작용
백두산 북쪽 이도백하(二道白河) 하곡에는 U자형 골짜기를 형성하였다.

5,100 년전·1,915 년전·1,150 년전 ·880 년전 등등 5 차례의 화산폭발
서기 1702년, ·1903년 두 차례에 걸쳐 화산 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

백두산에서 가장 더운 달은 7월로 평균기온 섭씨 8.7℃
가장 추운 달은 1월로 월평균 기온이 영하 23. 3℃ 이다.
바람이 가장 센 곳은 높이 2,690m 지점에 있는 풍구(風口).
일년 중 청명한 날씨는 40 여일 정도이고 나머지는 눈과 비.

식물 1,400 종, 동물은 400 종, 약용식물 900 종(한약재 보고)
동물은 백두산 호랑이, 자초, 꽃사슴, 수달, 표범, 조류 130 종.

백두산은 200∼300년을 주기로 분출했던 휴화산
통일신라, 고려시대는 백두산의 영역 외곽에 위치
거란, 여진족 등등 주로 북방 이방 민족의 활동무대.

1434년(이조 세종 16) 북방 침범을 막으려고 두만강 일대에 6진 설치.
1443년(세종 25) 압록강변에 4군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
1677년(숙종 3) 궁정 내무대신 무목납(武木納) 등 4인을 백두산에 파견
1712년(숙종 38) 5월에 청 요구에 따라 백두산 분수령에 정계비(定界碑)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완봉선(安奉線) 부설문제로 청나라와 흥정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댓가로 간도 지방을 청에 넘겨줘 연변을 넘겨 준다.

현재 우리나라 동포가 180만명이나 살면서도 중국 영토.
'길림성은 역사상 우리나라 영토이면서도 잃어버린 영토.

백두산의 연평균 기온은 -7.3도이고 극단적인 최저 기온은 -47도.
첨단 과학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사람이 살기 어려운 자연환경.
옛날부터 그 정상 접근조차 어려워 민족의 영산으로 여긴, <백두산>.

...........................천지.........................
백두산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지대에 자리잡은 휴화산
총 면적은 8,000 평방km이고, 남북한 통털어 가장 높은 산
백두산 천지는 여러 번 화산폭팔에 의해 이루어진 칼데라호.
수면(해발 2,189m)은 전세계 화산호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

천지는 원형 분화구 안쪽을 내륜, 바깥 쪽을 외륜이라고 한다.
내륜(內輪)은 경사가 급하고 외륜(外輪)은 내륜보다 완만하다.
천지 동서 3.51km, 남북 4.5km, 해발 2,500m 이상 16개 봉우리
백두산은 천지 서 북쪽은 중국 길림성, 동 남쪽은 북한의 양강도.

백두산 산정과 천지 일대의 겨울은 9월 ~ 이듬해 6월(10 개월).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기간은 7~8월, 연평균 기온은 섭씨6~8도,
연중 최고기온은 섭씨 18~ 20도, 최저기온은 섭씨 영하 44도 정도.

여름에 서풍 또는 남서풍, 겨울에 북서풍. 최대풍속은 초속 60m,
연평균 강수량은 1500~2500㎜ (우리나라 최다우) 강풍일수 270일

백두산 등정(중국 길림성)이 가능한 시기는 6월 20일~ 8월 10일.
백두산 등정 적기 7월 성수기에도 비바람막이 옷과 방한복은 필수.

천지 연평균 강우량은 1,340.4mm, 비오는 날은 209일 쯤.
우기는 7~8월로 거의 매일 비가 내려 맑은 날은 불과 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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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민족의 기원.................
우랄산맥에서 유래한.. 우랄 알타이어 족.
바이칼 호수 지역은 농토가 비옥한 자원의 보고.
수만개 지류가 모여 엘바강으로 흘러나가는 호수.

호수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빙하기를 넘긴 옛 조상.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자 동쪽으로 끊임없이 이동
만주에서 농사짓고 유목생활을 하다가 한반도에 정착.
삼면의 바다에 가로 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기 때문.

한편, 중국 베트남으로도 이동.

그 이동경로를 알수 있는 악기들
징과 꽹과리 장구 등등의 전통악기.

베트남 사물놀이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음악과 유사.
아울러, 춤의 율동 또한 민족 이동경로를 알려준다.

에스키모인 인디언 잉카인 또한 몽골리안.
몽골리안은 세계를 여러 차례 정복한 민족.
언어, 춤, 악기, 음식, 풍습, 옷 또한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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