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47. ( 실상사. 백장암. 해우소. 삼정산 7 암자 길. )

donkyhote 2010. 10. 29. 02:37

실상사 [實相寺]

 

매표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참 살가운 풍경 하나 다가온다

 

 

사찰로 들어가는 문 앞

오른쪽 잘 자란 야채밭

 

 

 

종각 앞에 깨어진 기왓장들로 만든.,낮은 탑

 

 

 

천년을 우뚝 서 있는.. 탑.

 

 

대웅전 앞을 지키는 석등

 

 

실상사., 노을

 

 

 

 

 

실상사 억새밭

 

 

은행나무 한 그루

 

 

수확이 끝난.,논위에서 빛나는 햇살.

 

 



우리나라에서 '구산선문' 탯자리로 알려진., 실상사
실상사로 들어가려면 우선 해탈교를 건너가야만 한다.
해탈교는 실상사와 세상을 이어주는 끈과 같이 보인다.

실상사는 지리산으로부터 흘러오는 만수천을 보듬고
옆구리에 장엄한 천왕봉을 끼고 있는 평지 사찰이다.

실상사의 미덕은 근처 금대암이나 상무주암처럼
높고 험한 산자락에 있지 않고 평지에 있다는 점.

9세기 귀족과 왕실이 결탁하여 타락할 대로 타락한 교종불교
반기를 든 신진 지식인들이 여기에다 선종불교 선문을 열었다.
지리산 일대에서는 구산선문 가운데 첫번째로 선문을 연 사찰.

당시 실상사는 하늘을 나는 새도 찾아오기 힘든 오지.

험한 길을 넘고 넘어 여기까지 왔던 나그네가
다시 산을 되올라야 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마 절을 창건한 홍척 증각대사는 이 점을 고려해
산지가 아닌 평지에다가 실상사를 세웠는지 모른다.
실상사가 방문객을 배려하는 보이지 않는 미덕이다.

그러나, 이 미덕은 세월이 흐르며
도리어 독이 된 측면이 없지 않다.

지금의 실상사는 만수천에 바짝 붙어 도로가 뚫려
방문객들이 너무 쉽게 닿을 수 있는 사찰이 되었다.
쉽게 찾아올 수 있으면 점점 경의를 상실하게 된다.

'누가 쉽게 올 수 있는 곳에 경의를 품겠는가?'

증각대사는 왜 사찰의 이름을 실상사라 했을까?
실상이란 모든 존재의 참된 본성을 일컫는 말.
선종에서는 사물 본래의 진면목을 일컬어.. 실상

사찰 이름 속에다 선종사찰이란 걸 못박은 것.
실상사는 교종이 아니라 선종이란 정체성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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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교 건너 두 장승이 있는 실상사.
장승은 우리나라 고유의 토착신앙이다.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기능을 하던 장승

사찰 입구에 장승이 선 것은 이조 후기.
사찰에서 민간신앙을 수용하면서부터였다.
원래 이곳 돌장승은 4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기가 홍수에 떠내려 가
현재는 실상사에 3기만 남아있다.

검은 줄이 눈과 코를 지나 입으로 흘러내리고 있고,
눈썹조차 치켜 올라가 괴이하고 무서운., 대장군 장승.

요즘 신세대 유행어로 표현하자면 '비호감'이다.
상주원장군 장승은 왕방울 툭 튀어나온 눈에 주먹코
벙거지 쓰고 약간 삐딱하게 서 있는 모습이 익살스럽다.

마을 입구를 지키는 일반 장승과는 격이 다른듯.

장승 옆 오미자, 산초 등 열매파는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
만일 앉아있는 장승이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장승.
장승 얼굴이 이 분들 얼굴이고 이 분들 얼굴이 장승의 얼굴.


보광전 앞 삼층석탑과 석등

보광전은 실상사의 중심이 되는 전각이라 할 수 있다.
보광전은 마당 가운데 동탑과 서탑을 품고 왼쪽에 칠성각
오른쪽에 약사전, 여러 갈래 반송이 가리고 있는 명부전 등

보광전은 왜소하다고 느껴질 만큼 규모가 작고 소박하다.
이조시대 중건된 사찰은 대부분 석탑과 석등 규모가 왜소.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동탑과 서탑(쌍탑)은 통일신라 석탑.

사찰이 2탑 1금당 형식을 갖추기 시작 통일신라시대
쌍탑 상륜부가 우리나라 어느 탑보다 잘 보존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국사 석가탑을 보수할 때
실상사 탑의 상륜부를 참고로 했다고 한다.

석등은 장중하고 비례미가 돋보인다.
석등에 불밝힐 때 올라서는 돌계단
석등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된다 한다.

간주석이 장구 모양으로 생겨 고복형 석등이라고도 불린다.
가까이 가서 두드리면 정말 장구 소리가 날 것만 같은 느낌.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

보광전 안에 모셔진 범종의 종을 치는 자리엔
마치 일본 지도를 연상케 하는 그림이 있는데
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있어
일제 말 주지가 왜경에게 문초를 당했단다.

실상사를 노래한 시가 여러 편 있다.
그 중 이산하 시인의 <실상사 가는 길 1>
그리고, 신용목 시인의 <실상사에서의 편지>.

..상처도 없이 낙엽은 섬돌에 걸려 넘어지고
석탑의 그림자만 희미하게 얼어가는
이 거역 없는 佛心(불심)의 뜰 안에 서서

<여기 鐵佛(철불)로 支脈(지맥)을 잡아
새나가는 國運(국운)을 막으리라>

정녕 그대를 사랑한 것은
내 생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은빛 시린 서리처럼
오랜 세월 말없이 견디는
계절의 눈빛마나 속 졸이며
현상되는 기억을 대웅전 연꽃무늬 문살에
새기다가 사람의 가슴에도 깊이가 있다면
그대보다 멀리 있는 그대의 그리움 또한
아득히 잠기겠지요.... (후략)

- 신용목 시 <실상사에서의 편지> 일부

이 시는 한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대웅전 연꽃무늬 문살' 부분이 그것.
실상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보광전 뿐.


맨 땅 위에 모셔진 철불과 보광전 범종

실상사는 9세기 통일신라 흥덕왕 때
남원 출신 증각대사 홍척에 의해 창건

개산조 홍척국사가 중국에 유학하여
마조선사의 법통을 이은 서당선사에게
인가 받고 돌아와 지리산에 도량을 열고
뒤이어 수철화상이 실상산문 2대조사가 된다.

이때가 실상사 가장 번성했던 시기인데
약사전에 모셔진 철불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 불상은 수철화상이 4000근이나 되는 철을 녹여
만들었다는데, 2.7m 가량이나 되는 거대한 철불이다.

광배는 없어졌으며 대좌가 아닌 흙바닥에 앉아있다.
철불은 두 발을 양 무릎 위에 올려 놓은 결가부좌 자세
동남쪽 천왕봉을 바라보는 이 철불은 약사전에 모셔져있다.

수인을 보면 아미타불이다.
철불의 손가락이 반질반질하다.
불상을 만지면 복받는다는 속설 탓.


<문화재가 집중돼 있는 극락전 영역>

극락전은 실상사에서 가장 호젓한 곳에 있다.
'뜰 앞의 잣나무'란 찻집 옆으로 난 길을 지나
뒷간 지나 작은 연못을 거쳐 경내에서 소외된 곳

가장 중요한 문화재가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

실상사 극락전 입구에 있는 증작대사응료탑비는
몸돌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았다.
머릿돌 중앙에 '응료탑비'라는 비 명칭이 새겨있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있는 증각대사응료탑
몸돌은 기둥 모양 모서리 각 면에 아치형의 문들.
그곳 문을 지키는 사천왕상을 새겨놓은 점이 특징.

극락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수철화상능가보월탑
몇 발 더 가면 보물 제34호인.. 수철화상 부도비.

수철화상은 실상사의 두 번째 창건주.

생태 뒷간 밖과 안 구석 통에는 톱밥이 들어있고
그 위에는 '톱밥 한 바가지를' 이라고 쓰여 있다.

실상사는 어느 절보다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절
실상사가 아름다운 건 실천적 불교 운동의 중심이라는 점.
실상사는 공동체 활동과 환경운동이 늘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2001년에 문을 연 '작은 학교'라 불리는 중학교 과정
대안학교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운영되고 있으며
실상사가 운영하고 있는 귀농학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

그 중심엔 전 주지인 도법 스님이 자리하고 있다.
생명의 갯벌인 새만금 살리기 삼보 일배를 한 스님.

생태 뒷간의 안내판에 적혀있는 글이 인상적.
'온갖 채소는 똥, 오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백장청규(百丈淸規)가 살아있는 절
실상사는 그렇게 오랜 실천불교의 도량.

보물 제36호 실상사 부도는 어디에 있는걸까?

실상사 천왕문을 나와 300m쯤 걸으면 숲속에 부도 2기
다시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고사리 밭 가운데 부도 2기
실상사가 부도 위치를 표시해 놓치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약수암으로 가는 옛길은 인근 주민들도 잘 모를 정도
실상사와 동떨어져 산길 길목에 있는 약사전과 보광전
그곳에서 바라보면 종이배처럼 둥둥 떠가는듯한 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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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지리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원래, 실상사는 인도 불교에서 비롯된 사찰로 알려졌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
삼거리 왼쪽 마천방면으로 가다보면 만수천 변에 호국사찰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

'산내면 면소재지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 삼거리 부근.'

이 삼거리에서 동쪽을 보면 천왕봉이 손에 닿을듯 하다.
그 아래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진 곳에 실상사.
입석리 들판은 통일신라시대를 연 김유신의 격전 전쟁터.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
남으로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

'수청산에 병풍처럼 싸인채 흐른..천년 세월.'

동쪽 천왕봉을 향해 지은 사찰과 관문인 천왕문.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중요시한 건축양식이 특징.
사각이 반듯반듯한 뜰악 연못 건물 시설물이 특색.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있는데 비해
지리산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있는 절은 이곳 실상사와 단속사.

단속사는 석탑만 남은 사찰터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로서 건재.

천년 호국사찰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 지장의 문하에서 유학.
선법(禪法)을 배운뒤 귀국했다가 현재의 자리에 창건.

증각대사가 구산선종 가운데 최초로 고향에 세운 절
흥덕왕이 지원했고 왕은 태자선강과 함께 이 절에 귀의.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을 일으켜 실상학파를 설립.

그 문하 제자로 제 2 대가 된
'수철 화상'과 '편운(片雲)스님'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

이조시대에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 중수 복원
세조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
정유재란때 왜구에 의해 불탔다는 설이 전해온다.

화재 이후 실상사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이나 백장암에서 기거했다고 한다.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때 300여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 중건.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제 2차 중창했고
고종 21년(1884)에 월종대사가 중창후 지금의 모습.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
번갈아 점거하는 등 수난을 겪었지만 전화는 모면했다.
실상사에는 일본,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온다.

정유재란 당시 사찰이 불에 탄것은 왜구에 의한 것이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 있다.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부흥한다"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같은 말.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범종에 그려진 일본 지도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그 일본 지도를 때린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 암자가 있다.
이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국보급 문화유산들이 산재.
국보 제10 호인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의 공예탑

실상사의 보물급 유적은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 증각홍척국사응료탑(38호 861이후),
증각홍척국사응료탑비(39), 백장암석등(40·9세기 중엽),
철조여래좌북(41·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1584),

'약수암목조탱화(421·1782)등 11점이 보존된 실상사.'

이곳 장승은 만수천 양쪽에 원래 4기.
1936년 홍수때 떠내려가 현재 3기 만.

잡귀를 막기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모자를 쓰고 손에 창든 모습
실상사는 신라불교문화의 문화재가 잘 보존된 천년고찰

진입로는 논 가운데, 절은 들판에,
수목들에 둘러싸여 소박한 분위기.

절 입구에서 반달 모양 돌다리 해탈교
그곳을 지나면 보이는 돌장승이 인상적.

개관 - 여름(3월~ 10월) : 오전 9시 ~ 오후 6시
겨울(11월~ 2월) : 오전 9시 ~ 오후 5시


찾아 가는 길.

1)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무동계곡행 버스 이용(1일 4회 운행)
2) 인월이나 함양에서 마천 또는 백무동행 버스 이용, 실상사 앞 하차
3) 열차는 전라선 남원에서 백무동행 직행버스 이용 / 1일 9회 운행
4) 전주공용버스터미널에서 백무동행 직행버스 5회 운행
5) 대구 서부 시외버스정류장에서 거창, 함양 경유 백무동 버스 직행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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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탐방 3박 4일 산행코스

실상사 - 약수암 - 삼불사 - 문수암 - 상무주 - 헬기장(1박)
삼정산 - 영원사 - 연하천(2박)
벽소령 - 세석 - 음양수 - 삼신봉(3박) -불일폭포 - 쌍계사

산중 곳곳에 밝혀진 촛불이 별빛처럼 흔들리는 밤.
누군가의 염원이 담겨 밤새 꺼지지 않고 타는 향불

이조시대 역사 지리서 <신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지리산의 사찰은 약 38 개 정도라고 기록되어 전해온다.
1472년 지리산을 찾은 김종직의 기록은 무려 400 여 사찰

지리산의 조용한 사찰과 암자를 불교 탐방 산행코스
실상사에서부터 시작되는 항내음 진동하는 암자 순례.
새벽 실상사에서 수통 가득 물채우고 출발해도 좋을 듯.


2. 사찰 순례 당일 코스

삼정리-영원사-비티재-삼정산-상무주-문수암-삼불사-
도마마을-약수암-실상사(도상 9㎞, 5시간 30분 소요)

하정, 양정, 음정 세개의 마을이 있어 삼정리라 부른다.
양정 마을 입구에서 광대골 주계곡을 버리고 오른쪽 도로
낮은 다리 하나 건너 왼쪽으로 틀어 오른쪽 길은 영원사 행.
영원사 뒤로 이어진 산길은 상무주암과 삼정산까지 계속된다.

상무주 삼거리에서 왼쪽은 삼정산 정상,
상무주 삼거리에서 오른쪽은 상무주암.

여기서 북쪽 산허리를 돌아 내리막길 지나 천인굴과 문수암.
내리막 능선 따라 삼불사 여기서 30 분 내려와 만나는 견성골.
그 계곡따라 내려오면 도마마을, 왼쪽 마을뒤로 오르면 약수암

그곳부터 잘 다듬어진 길따라 걸어가면, 실상사.
삼국시대부터의 한일 관계를 알 수 있는 실상사.

실상사의 설립 배경을 알려면
먼저 당시 일본을 알아야 할 듯.

....................삼국시대 일본은 어떤 나라였을까?.......................
550년 경 일본(왜) 나라 시대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의 삼국과 교류.
특히, 백제는 멸망 후에 일본에 임시정부를 수립할 만큼 일본과 밀접.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그곳에서 한학, 유학, 불교 및 회화, 불상.
사찰건축, 생활용품 제조기술, 관개시설 축조기술을 일본에 전수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인은 체격이 크고, 용모 단정하며,
예의를 중요시하고, 머리칼이 길고 아름답다'라고 씌여있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는 백제의 학자, 왕인 비석이 세워져 있다.

"박사 왕인은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어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쳤다."
"그 위업은 크고 위대해 끝이 없다. 노래와 도자기 기술을 가르쳐 준 이."

왕인은 아직기와 더불어 '아스카 문화'의 기반을 닦은 사람.
아직기는 일본왕과 신하에게 말 다루는 법을 가르친 백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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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 전까지 한반도에 왜적 침입은 거의 없었다.
왜의 국력이 한반도와 싸우기에는 역부족인 탓이었다.
왜적 침입이 빈번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이다.

'통일신라 시대부터 왜침이 잦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백제 패망세력이 왜로 건너가 국력이 강해진 탓.
그 다음 이유로는 일본 열도의 잦은 화산폭팔, 지진, 태풍.
후지산 화산폭팔, 생성과정 전설과 무관하지 않은 듯 보인다. 



백장암. 



남원 실상사 백장선원
산내면 대정리 산 28 번지
백장선원(百丈禪院) 가는 길.

무명(어둠)을 떨치고 깨달음(밝음)으로 나아가듯한
백장선원 앞 대나무 숲길을 걷는 수행자들의 발걸음.
을유년 동안거 기간 중 방부(房付)들여 정진한 스님 10명.

산 중턱에 위치한 암자의 선원 치고는 적지 않은 숫자.

백장선원에 온 김에 〈백장청규〉를 알아보자.
총림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생활규칙이 ‘청규’

중국 백장회해 선사가 지었다고 〈백장청규(淸規)〉
이 책의 정식 이름은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

선종이 독립된 사원.제도.의식 등을 갖지 않았을 때
법당(法堂).승당(僧堂).방장(方丈) 등 제도를 정하고,
동서(東序).요원(寮元).당주(堂主).화주(化主) 소임 규정

백장청규는 일종의 ‘선문규율서(禪門規律書)’

법당 옆 대나무숲 지나 올라가니 선원이 나타났다.
'백장선원' 힘찬 글씨가 일품인 선원은 직사각형이다.
댓돌 위에는 신발이 놓여있고,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단촐하다. 그것이 선원의 힘인지 모른다.

화두(話頭) 하나에 모든 힘을 집중하는 수행자처럼.
단순함이 선원의 저력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선원은 ‘조사의 관문’을 뚫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건물은 간단하다. 복잡할 필요가 없다.
이런 저런 생각에 끌리면 일념집중은 사라진다.

그러면, 관문을 어떻게 뚫어야 할 것인가?

“혼신의 털구멍을 의문의 덩어리로 뭉쳐,
밤낮을 가리지 말고 성성(惺惺)히 여일하게
화두에 매달려야 한다. 시뻘건 쇳덩이를 삼키듯.
아무리 토하고 뱉어도 나오지 않는 의문의 불덩이로
그릇된 지식, 잘못된 공부를 말끔히 떨쳐내야 한다”-〈무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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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절(高節)한 정진 장소이고,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선사와
연관된 암자 이름도 마음에 드는 백장암.

백장선사 그는 누구인가?

중국을 밟은 ‘한 마리 망둥이’
마조도일(馬祖道一. 706∼786)선사의 제자.
8세기 중국 선종은 하택신회(684∼758)선사 활동을 계기로
북종(신수 계열), 남종(신회 계열), 우두종(시조 : 홍인문하 법지)

세 파가 정립되어 가다가 북종과 우두종은 점차 쇠퇴해 갔다.
하택신회가 이끈 하택종도 특별히 내세울 사상이 없었던 때문.

이즈음 두각을 나타낸 선사 2人
남악회양(677∼744) 계열 마조도일 선사
청원행사(?∼740) 계열 석두희천(700∼790)선사.

마조도일은 유력한 제자들(139명)을 길러
선의 흐름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만들고,
신회를 대신해 정통의 지위에 올라섰다.

서당지장(735∼814), 백장회해,
대매법상(752∼839), 대주혜해,
남전보원(748∼834), 방온 거사(?∼808)
등이 마조도일 선사가 길러낸 제자들이다.

‘평삼심이 도’ ‘마음이 곧 부처’ 등을 주창하며
초월적인 것들을 단번에 가치 없는 것으로 물리치고,
진실로 일상생활에 철저할 것만을 요구한 이른바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선사상’에 힘입어
마조선은 중국의 정통이 됐다.

“단순명료하고 활동적인 주장이 현실에 입각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을 사로잡았던 것”
〈새롭게 다시 쓰는 중국선의 역사〉

실제, '마조 문하' 홍주종(洪州宗) 발전은 눈부셨다.
제자들이 전국에 흩어져 각기 많은 제자들을 길렀다.

〈경덕전등록〉(1004년 편찬)에 이름이 전하는 제자 만도 117명.
백장회해 제자 30명, 남전보원 제자 17명, 장경회휘 제자 16명 등.

특히 백장스님은 선원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스님 활동에 힘입어 율원에 속해있던 선원이 독립적 체계
상당(上堂)하여 공개적으로 설법하는 설법당(說法堂)이 마련.
대중운력, 10가지 소임 등 선원생활을 규율하는 청규(淸規)가 발달.

9세기 중반 당나라 무종(재위 840∼846)이 일으킨
회창폐불(廢佛. 845∼847)은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
중국 전역에 철저하게 파급됐다는 점에서 전무후무했다.

스님들은 환속되고, 사원은 파괴됐으며, 삼장(경율논)은 사라졌다.
이로 인해 많은 종파들이 쇠퇴했지만 선종은 착실히 기반을 구축했다.

선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백장청규’의 힘이 컸다.
엄격한 규율과 대중운력을 통한 경제적 자립이 백장선의 특징
백장스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산 중턱 공간에 겨우 붙어있는듯한 백장암.
대중운력이 없으면 유지되기 어려운 절 같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마라’ - 백장청규.




해우소.




일본 사찰과 유사한 느낌이 드는 실상사.
백제의 건축 양식이 피부로 느껴지는 사찰.
한가지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재래식 화장실.

똥을 거름으로 사용할수 있도록 구조를 개선.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 생명까지도 배려한 흔적.
마치, 옛 농촌마을 뒷간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곳.

엉성한 문위로 들여다 보이는 화장실 내부.
출입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쓸 수 있는 장점.
복도를 오가며 뒷간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단점.

풍요롭고 거룩한 냄새인듯 하기도 하고
곰삭은 홍어회가 톡 쏘듯 진동하는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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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문화에는 고대사회의 숨은 역사가 있다.
우리나라 농촌에서는 집에서 떨어진 가건물 뒷간.
유목민의 후예들은 지금도 언덕위에서 볼일을 본다.

볼일보는 동안에도 가축을 감시하는 생활습관.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제주도 농촌 화장실.
볼일보는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대화를 나눌 정도.

지금은 거의 사라진 유목민 시대의 풍습.
제주도 뒷간에 키우는 똥돼지는 그 흔적.
긴 막대기로 똥돼지를 쫓으며 볼일을 본다.

똥돼지가 귀에 묻은 오물을 털면 옷이 버린다.
하여, 똥돼지를 쫓으며 볼일보려면 무척 바쁘다.
제주도 뒷간에서 볼일 볼때 필요한, 똥치는 막대기.

옛 우리나라 농촌 뒷간 한구석엔 으례 긴 막대기.
볼일보며 바로 바로 오물을 치워야 날벼락을 모면.
'똥치는 막대기'에 관한 우리나라 옛 속담들이 있다.

'사람을 똥치는 막대기 취급하면 경우가 아니다.'
'볼일보고 나서 똥치는 막대기는 필요가 없는 법.'
볼일 보기 전과 후의 태도가 다른 것에 관한 속담.

'어린 시절 개구장이들이 짓궂은 짓을 하던, 뒷간.'

한참 볼일 볼 때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얼레리 꼴레리"
놀랬거나, 뒷간이 무서우면 "씨껍했다." "을씨년스럽다."
짖궂은 장난을 치고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면 "노가리 깐다."

'얼레리 꼴레리'는 어린 벼슬아치를 놀렸던 말에서 유래
그 표준말 ‘알나리깔나리’는 ‘알나리’와 ‘깔나리’의 결합어.

알나리 = 알 + 나리 = 나이가 어리고 새로 부임한 나리’라는 뜻.
어린 나이의 벼슬아치라 경험이 없다 하여 놀릴 때 썼던 ‘알나리’
능구렁이가 다된 하위 직급 벼슬아치들이 어린 상전을 일컫는 말.
깔나리 = 앞으로 알에서 깔려면 아직 멀었다는 조롱의 뜻이 담긴 말.

시껍하다 = 식겁하다 = 겁을 집어먹는다 = 혼나다 = 경상도 방언.
시껍묵다 = 크게 놀라다. = 경을 치다. = 혼쭐나다. = 고생하다.

시껍하다의 유래는 십겁(十劫)과 식겁(食怯) 두 가지로 정리.
불교에서 십겁(十劫)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아주 긴 세월.
<식겁(食怯) = 겁을 먹다.>는 뜻밖에 놀라 겁을 먹는 다는 뜻.

<을씨년스럽다.>는 을사년(乙巳年) 역사의 뼈아픈 기억.
1905년 박제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내세운 을사조약
역사적으로 사실상 우리 나라가 일본의 속국이 된 해이다.

"노가리 깐다."는 이런 저런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을 말한다.
명태가 알을 까서 새끼 치는 과정이 우리말로 ‘노가리를 까다’.
명태 알이 많기 때문에 한 번에 부화되는 ‘노가리’의 수도 많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가 잦고 그 말의 진실성도 떨어진다.
하여, <노가리 =거짓말> + <까다, 풀다, 치다.>가 합친 말.
요즘은 생맥주 한잔의 의미, 예전엔 뒷간에 얽힌 귀신 이야기.

동떨어진 뒷간갈때 간담 서늘하게 한 귀신담 = 노가리 깐다.
농촌 뒷간에서 볼일 중 흔히 마주친 능구렁이도 공포의 대상.
능구렁이는 '상사병으로 죽은 처녀의 환생'이라는 전설도 있다.

'혹시, 볼일 볼때 나타나 몸을 칭칭 감지 않을까?'

........................뒷간 귀신에 관한 설화.............................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뒷간에 귀신이 있다는 설화가 많았다.
뒷간 각시, 정낭 각시, 뒷간 장군, 뒷간신 등등 주로 처녀 귀신.
처녀가 억울하게 죽어 맺힌 한을 풀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악귀.

'산발한 머리카락을 내밀며 한올씩 세라고 강요하는 처녀귀신'.

사람이 뒷간에 올 때 갑자기 처녀귀신을 놀라게 하면
처녀귀신이 긴 머리카락으로 뒤집어 씌워 죽게 한단다.
뒷간갈 때 인기척을 유도하기 위한 칙간 귀신으로 보인다.

'어두운 밤에 멀리 떨어져 있는 뒷간은 곧 두려움의 대상'.

인기척 없이 갑작스럽게 문열고 들어가는 것을 방지할 방편.
특히, 여성이 볼일 볼때 민망함을 방지하려는 귀신 설화인 듯.
능구렁이와 같은 치한의 음흉한 미소도 방지할 목적이 아닐까?

옛날엔 뒷간을 지으면 길일을 택해 밤에 불켜고 제사.
아이들, 신발, 사람이 빠지면 떡과 메를 장만후 고사.
노한 칙신을 달래는 풍습은 사고의 위험성 예방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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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유래.....................
세계 최초 화장실 유적은 BC 3,000년~ 1,400년 사이
인도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수세식 화장실 형태.
물이 흘러가도록 시설하여 그 위에 배설하게 했다는 점

'수메르 문화 중심지'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 하류
바빌로니아 유적지에서도 BC 2,200년 수세식 변기를 발굴.
하수관 통해 분뇨와 물이 함께 모래땅으로 스며들게 한 방법

크레타섬 크넷소스 궁전
지중해 미노아 문화의 중심지

BC 1,700년 변을 받는 도기 수세식 변기가 발굴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집에서 대변을 보고 집밖에서 식사를 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남긴 기록에 쓰여있다.

'요강을 세계 최초로 발명한 나라는 고대 그리스.'

1950년대 우리나라 뒷간은 남녀 공용 가건축 시설물.
수거 요령은 지게로 퍼서 운반해 농사용 거름으로 사용.
화장지는 신문지 짚, 풀잎 등이고 공중화장실은 없었다.

1960/70년대 남녀 구분 화장실이 등장했거
수거요령은 똥지게로 퍼서 마차 또는 분뇨차

최초 수세식 변기는 만년전 메소포타미아로 추정된다.
용변이 개울로 떨어져 흐르는 물에 씻길 정도의 시설.
고대 조상들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산이나 강에서 배설.

농경사회에는 강물에 흘려보내거나 논밭 비료로 사용.
3,000년 전 도시유적에서 화장실과 항아리 변기가 발견.
고대 그리스인들은 집에서 용변보기 위해 만들었던 요강.

수세식 공중 화장실은 고대국가 로마가 최초였다.
볼일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가 거추장스러운 때문.
하지만, 요즘처럼 위생적인 배설물 처리 역사는 짧다.

'1184년 여름 창가에 있던 프랑스 국왕 필립 2세.'

짐수레가 길 위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수레바퀴와 말발굽 똥오줌 냄새에 왕은 실신.
그후에 왕은 파리의 도로를 포장하라는 명령.

'파리가 최초로 도로포장을 시작하게된 유래.'

베르사이유 궁전은 아예 화장실이 없던 때도 있었다.
의심 많은 왕이 외부의 침입자를 막기 위한 궁여지책.
궁전 뜰 나무도 외부인이 숨을 장소가 없도록 다듬었다.

'지금도 관광객이 불편한 점은.. 하나뿐인 화장실.'

18세기 초 파리 경찰은 동성연애자를 잡기 위해 분뇨 유인책
경찰들은 센 강의 강둑에서 똥을 누는 척 하며 그들에게 접근.
생식기를 드러내고 동성연애자를 유인하여 현장에서 덥쳤단다.

'19세기 중반 유럽의 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화장실.'

당시 유럽인은 거리에서 볼일 보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1843년 파리에서는 대낮 길가에 볼일 보는 사람이 흔했다
그들은 전혀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가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17세기에 출현한 하이힐도 오물 길거리 때문에 생겨났다.
귀부인들 드레스 자락에 오물에 묻지 않게 하려는 덧신발.
하이힐 굽 높이는 거리를 뒤덮은 오물의 높이와 비례했다.

'비버리 코트는 뒤집어쓸 오물 방지용 덧옷.'

거리의 오물에 골머리 앓던 유럽은 수세식 화장실을 개발.
1847년 영국은 하수 시설로 모든 분뇨를 방류하게 만든다.
하여,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1/3이 죽은 것도 거리의 오물 탓.

환자를 방문할 때 꽃을 들고 간 이유도 악취 때문이었다.
신사의 높은 모자나 바바리 코트도 오물에서 비롯된 유행.
창밖으로 투척되는 오물을 뒤집어쓰지 않으려는 수단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왕은 사용했던 좌변기는 '매화틀'이라 했다.
매화틀 안에 매화 그릇이 있어 그것을 내다 버릴 수가 있다.
서양은 좌변기에 등돌려 앉고 일본은 마주보고 위에 앉는다.

'낚시배 후미에 손잡이 막대기는 바다 화장실.'

일본 변기는 고기잡이 배에서 유래된 듯 보인다.
고기잡이하는 어부는 거기에 매달리듯 앉아 볼일.
고기잡이 배안에서 바다는 수세식 화장실이 되는 셈.

하여, 옛부터 고깃배에는 여자를 태우지 않는 관습.
그 전통은 배가 커진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전해온다.
선박 이름은 대부분 여성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

배타고 풍랑과 싸우다가 돌아오지 않는 어부도 많았다.
하여, 옛부터 남자 숫자가 여자보다 훨씬 귀했던 일본.
옛부터 남존여비 사상이 정착될 수 밖에 없는 자연환경.

예나 지금이나 해안가 마을사람들에겐 기자신앙이 팽배.
풍랑 헤치고 배를 몰 수 있는 남성이 여성에겐 곧 하늘.
잦은 전란에 남성이 귀했던 이조시대에도 남존여비 팽배.

우리나라에서는 이조시대 환경에 관한 법이 엄격했다.
하여, 뒷간에서 볼일보고 짚과 재를 섞어 거름으로 사용.
한양 4대문 안에서는 인분 농사를 짓는 것도 법으로 금지.

재를 버리면 곤장 30도, 똥을 버리면 곤장 50도를 맞았다.
하여, 노상방료, 똥을 버리는 환경오염 행위는 꿈도 못꿨다.
우리나라 양반 마님들은 병풍 뒤 요강에 앉아 볼일을 보았다.

볼일 보는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요강 안에 솜.
따라서 병풍과 요강은 지체 높은 사대부 안방마님의 상징.
요강이 시집갈 때 혼수감 제 1 호인 관습도 여기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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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찰 해우소는 탐방객을 고려해 개선된 편이다.
예전에는 아예 화장실 출입문이 없는 사찰도 있었다.
우리나라 사찰 해우소는 불교 종주국의 영향이 큰 듯.

해우소 문은 고사하고 칸막이가 없는 사찰도 있었다.
불교문화가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비롯된 탓도 있는듯.
1994년 무렵까지는 북경 공항의 화장실도 비슷한 실정.

지금도 북경을 벗어나면 화장실 문이 없는 곳이 많다.
화장실 문은 고사하고 아예 칸막이조차 없는.. 화장실.
볼일 보는 옆 사람과 칸막이 넘어 눈길을 마주 칠 정도.

그것보다 줄줄이 선 사람들과 마주보는 것이 고민거리.
문 없는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줄선 사람들과 마주보기.
빤히 마주보는 사람들에게 뒤돌아서라 할 수 없는 노릇.

그렇다고, 혼자 만 돌아 앉아, 볼일 볼 수도 없는 난처함.
현지 사람들은 볼일을 보면서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지만.
중국 화장실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난감한 편.

마주보고 줄선 사람들을 고려해 볼일도 서둘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마음만 급하고 볼일이 늦어지면 더욱 더 민망하다.
성의껏 노력 중이란 제스추어라도 보여야 할지 혼돈스럽다.

'유목민들의 초원에서 볼일보는 관습에서 유래.'

우리나라 사찰 화장실에서는 인기척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인기척 없이 이용하면, 본의 아니게 낭패 볼 경우가 있다.
뒷간 안 문고리가 손에 잡히지 않을만큼 멀리 떨어진 경우.

아예 화장실 문 안쪽에 잠금장치가 없거나 고장이 난 경우.
또는, 활짝 열려져 있기에 무심히 들어가면, 마주치는 눈길.
특히, 여성에게는 고의 아닌 실수를 사과 하기에도 민망하다.

우리나라 사찰 해우소는 거의 대부분 재래식 구조.
출입문이 허름해 해우소 안쪽이 보이는 곳도 있다.
볼일보며 힘주는 소리는 옆칸에서 듣기 민망할 정도.

도심의 사찰 화장실은 수세식으로 바뀌는 추세.
그러나, 산중의 해우소는 전통식인 재래식 구조.
해우소(解憂所)란 사찰에서 화장실을 일컫는 말.

'근심을 푸는 곳.'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란 뜻.
옛부터 사찰 해우소에서는 지켜야 할 사항들이 있다.
해우소를 이용할 때 유념해야 할듯 해 여기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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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지 말아야 한다.
둘째, 낙서하거나 침을 뱉지 말아야 한다.
셋째, 힘 쓰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넷째, 외워야 할 게송이 있다면 외운다.
다섯째, 용변 후 옷차림을 고치고 나온다.
여섯째, 손씻기 전 다른 물건을 만지지 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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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산 7 암자 길.



지리산은 우리나라 불교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남방불교와 북방불교가 만나 불교 문화가 꽃핀 곳.
삼정산 7 암자 길은 그 역사적인 경로를 대변해준다.

'선종 불교 종파의 산실인 실상사와 7 암자.'

...................선종 불교...........................
인간 본래 성품이 부처임을 깨달을 때 성불한다는 교리.
선종 불교는 좌선을 중시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강조한다.
유교 불교 도교를 일관해 민족사상을 재편한 선 문화 창출.

517~527년경 인도 승려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파.
당송에 걸쳐 임제·조동·위앙·운문·법안 5가 형성.
다시 임제로부터 황룡(黃龍) 양기(楊岐) 2파가 나뉜다.

이를 모두 합해 5가 7종(五家七宗)이라고 한다.
이후 선종은 원나라 명나라에도 그 위세가 유지.

선종이란 당나라 중기부터 종풍이 융성하며 유래.
8세기 말 티벳 왕에게 초청되었던 중국 승려 마하연.
인도 승려와 대론하며 돈오선종이라 칭한 것에서 유래.

중국 선종의 사상적 배경에는 노장사상(老莊思想),
특히 장자(莊子)의 사상적인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인도 불교의 반야 공 사상이 중국적으로 변형되어 정착

우리나라에서의 선종은 법랑(法朗)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했다가 선덕여왕 무렵에 귀국했다.
법랑이 신라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당에 유학해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한 신행(神行)
제자인 삼륜선사에 의해 신라 중앙에 알려진 선종.
826년 귀국한 '자장법사 문하' 홍척이 실상사 건립

'이조시대 서산대사에 의해 다시 꽃핀 선종.'

901~918년 고려 태조 원년 후고구려왕 궁예
신라 47대 헌안왕과 궁녀 사이에 태어난 아들
왕실에서 버림받고 유모 손에서 성장했던 궁예

세달사(世達寺) 스님이 되어 선종(善宗)이라 이름.

당시 지방 호족들이 일어나 극도로 쇠약해진 신라왕실.
국고가 바닥 나 889년(진성여왕 3) 과도한 세금을 독촉
전국적으로 백성들의 항쟁이 심해지고 초적(草賊)이 발생.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두 인물이 기훤과 양길이었다.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이듬해 양길의 부하

궁예는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해,
주천(예천) 내성(영월) 울오(평창) 어진(울진) 등 성을 정복.
894년 명주(강릉) 저족(인제) 금성(金城)·철원(鐵原)을 점령

양길과 결별하고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 세력을 형성.
896년 송악(개성)의 왕건(王建) 부자가 궁예에게 투항.
898년 평안도와 한산주 30 성을 공략하고 양길군을 격파.

899년(효공왕 3) 왕건을 시켜 양주 견주를 복속케 하고,
이듬해에는 광주·춘주(春州)·당성(화성시 남양)·청주
괴양(괴산)을 평정해 소백산맥 이북 한강유역 전체를 지배.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
이때 광평성(廣評省)을 설치하고 관원을 갖춘다.

이듬해 청주사람 1,000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을 도읍지로 정하고 연호를 성책(聖冊).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
이해에 왕건이 바닷길로 금성(나주)을 점령
서해 상권을 장악하고 견훤(甄萱)을 견제한다.

914년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로 고쳤다.
궁예는 세력이 강해지자 신라를 멸도라 호칭.
신라에 반발하는 세력을 모아 신라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이념이 뚜렷하지 못했고
세금을 무겁게 하고 궁궐을 크게 짓는 등 가혹한 수탈.
이때문에 민심을 잃자, 918년 왕건이 왕위에 등극한다.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
왕건을 추대한 호족 세력들은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궁예는 도망치다가 백성들에게 잡혀 죽자 선종은 쇠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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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은 중국 동진을 통해 백제에 먼저 유입.
통일신라에서 호국불교인 선종은 활짝 꽃핀다.
신라에서 선종이 융성하며 붙잡혀간 백제 석공.

신라시대 창건한 사찰의 불상과 석탑은 백제양식,
백제 석공은 물론 고승까지 통일신라로 흡수된다
아사달과 아사녀 전설은 잡혀간 백제 석공 이야기.

.............아사달과 아사녀 전설.......................
아사달과 아사녀는 신라 불국사 창건 당시의 실화 전설.
그곳 석가탑은 뛰어난 석공 백제의 후손 아사달의 작품.
아사달이 탑에 온 정성을 기울이며 흘러간 한 해 두 해

남편이 돌아올 날만 고대하며 그리움을 달래던 아사녀
그리움을 참지못한 아사녀는 불국사로 남편을 찾아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에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천리 길을 달려와 남편을 만나지 못했던 아사녀
날마다 불국사 앞을 서성거리며 남편을 기다렸다.
이를 보다 못한 불국사의 스님이 지혜를 빌려준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빌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 그림자가 비칠 것.
그러면 못에 비친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못을 들여다보며
탑 그림자가 못에 비치길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나 못 수면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숨진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못으로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 바윗돌에 겹쳐졌다.
웃는 듯 하다가 사라지고 또 웃는 부처님 모습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마친 아사달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아사달에 관해서는그후 전해오는 이야기가 없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 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탑은 '무영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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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산은 기슭마다 7개의 절과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실상사 문수암 상무주암 영원사 삼불사 약수암 도솔암.
산행 초반은 삼정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오른다.

'물소리와 시원한 바람이 일품인 도마마을에서 20분.'

포장도로 끝에 문수암 삼불사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다.
5분쯤 가다 임도 왼쪽에 문수암과 삼불사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문수암까지 1.3㎞는 머루 다래가 익는 오르막 길.

문수암엔 스님 혼자 수행하는데 등산객들 때문에 애로사항.
비 바람 피한다고 암자를 비운 사이에 창문 부수고 들어가기.
힘들게 해놓은 겨울 땔감을 아낌없이 불피워 없애버리기 일쑤.

문수암 오르는 길에는 산악회 리본이 거의 없다.
도봉 스님이 눈에 보이는대로 떼어내기 때문이다.
문수암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상무주암

상무주(上無住)란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 (上),
'머무름이 없는 자리'라는 뜻으로 무주(無住)라고 풀이한다.

상무주를 지나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삼정리 영원사로 빠지고,
오른쪽 오르막길로 치고 오르면 삼정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정상에서 마천 방향 오른쪽이 삼정리 벽소령으로 오르는 계곡

'왼쪽은 뱀사골이고 전망대 내려서면 급비탈 위험구간.'

2006년 9월 현재 영원사까지 갈수 있는 시멘트 차도.
영원사에서 삼정산 능선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

지리산 남쪽 전망대가 삼신봉이고, 북쪽 전망대는 삼정산.
삼정산에서 바라보면 천왕봉과 지리 주능선이 여인의 치마폭
삼정산은 실상사 영원사 등 산사의 적막함이 세속을 씻어 준다.

삼정산은 산 아래 3 마을인 하정 음정 양정
3 마을 이름을 합쳐 삼정마을에서부터 유래.

'하정은 벽소령 부자바위와 연계된 전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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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북부능선은 삼각고지에서 '삼정산'을 잇는 가지능선.
<선비 샘 - 삼정마을 - 삼정산> = <불교문화 탐방 코스>

지리산 고찰만 염주에 꿰듯, 원형 종주코스로도 가능하다.
지리산 등산로를 거대한 S字 형태에서 8 로 바꿀 수도 있다.
삼정산-삼정마을- 덕평봉은 S자에서 끊긴 부분을 이어준다.

지리산의 주능선은 거대한 S 자 형태의 태극 무늬.
지리산은 한반도의 등뼈 S 자 형태 백두대간 축소판.
태극기의 태극 문양은 백두대간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거대한 S자 주능마다 가지 능선을 품은 지리산.

그 중 대표적인 두 능선은 '남부능선'과 '중북부능선'.
두 능선은 주능선과 달리 각각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하여, 두 능선은 각각 지리산 주능선이 보이는 전망대.

'남부능선'은 잘 알려져 있지만
'중북부 능선'은 비교적 생소하다.

오히려, 중북부 능선의 '삼정산'은 널리 알려진 편이다.
하여 '중북부 능선'은 삼정산 능선 또는 삼정산이라 한다.

설악산은 내설악과 외설악으로 구분하지만
지리산은 내지리 외지리의 개념 조차도 없다.
지리산은 주능선 동남쪽과 내륙 북서쪽으로 구분.

중북부 능선의 특징은 천년 역사를 간직한 사찰이 이어져 있다는 점.
남북으로 트인 화개동천과 만수천, 임천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삼각봉
그곳부터 영원령 삼정산을 거쳐 남원의 실상사 앞 만수천까지 보인다.

한쪽은 망대골을 빚고 또 다른 쪽은 와운골과 뱀사골로 흐른다.
중북부능선은 삼정산(1,225m)을 품은 경남과 전북의 경계선이다.
들머리는 마천면 삼정마을과 마천면 도마마을, 전북 남원시 실상사.

................<삼정마을> 들머리 산행 코스.......................
1. 삼정마을 - 벽소령- 도솔암-<삼각고지> - 연하천 산장.
2. 영원사 - 상무주암 - <삼정산>- 문수암 - 견성골- 도마동.
3. 도솔암, 영원사,·상무주암,·문수암,·삼불사,·약수암,·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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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사.......................................................
영원사(靈源寺)는 예사롭지 않은 창건일화를 품은 첩첩산중 정남향 사찰.
남부군 토벌 때 불타 70년대 후반에 복원했지만 사찰 면모만 유지하고 있다.
예전엔 9 채 건물에 100 칸 규모였고 신라 경문왕에 영원대사가 창건한 사찰.

'서산, 청매, 사명, 지안, 설파, 상언, 포광 스님들이 수행했던 고찰'

영원대사가 젊은 시절에 입산하여 토굴을 파고 8 년을 참선 수도한 곳.
그곳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해 수도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나선 스님.
산길을 터벅 터벅 내려오다가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을 만나게 된다.

" 여기서 8년을 살며 낚시질을 했는데..,
2 년만 더 있으면 큰 고기가 낚일 것이다. "

그 말을 남기고 노인은 표현히 사라졌다.
그 말을 듣고 스님은 다시 토굴로 돌아온다.
그리고, 2년 더 수도한 끝에 득도한 영원스님.
그곳에 영원스님이 세운 사찰이 영원사가 되었다

'영원대사의 하산을 막고 깨달음을 준 그 노인은 누구일까?'

그후 이곳을 찾아 수도한 스님들은 그가 문수대성이라 여겼다.
하여, 득도를 하려는 스님들이 모여드는 참선 수도장이 되었다.
영원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맥을 잇는 109명 고승을 배출한 사찰.
영원사는 화재로 소실된 후 경내에 청매스님의 '방광사리탑'만 있고,
산마루에 조실 스님들의 부도와 각운대사의 필단사리 3층 석탑만 있다.


찾아가는 길.

함양읍에서 삼정리 양정마을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하루에 3~4 회 운행.
백무동행 버스를 타고 벽소령과 백무동 갈림길 강천리 앞 실덕마을 하차

실덕- 양정 버스 정류장의 거리는 도보로 약 30분 정도 걸린다.
택시를 이용할 경우 마천에서 대절하면 양정마을까지 갈 수 있다.
민박하려면 양정마을보다 시외버스 정류소 앞 벽소령 상회가 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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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마을에서 영원사까지 꼬불꼬불한 도로가 닦여 차로 접근이 가능하다.
인근 영원사 속암인 도솔암은 청매스님 수도처이자 방광 사리탑이 있는 곳.

...................................상무주(上無住)암..................................
영원사에서 삼정산을 오르다가 정상 못미쳐 삼거리 오른쪽에 있다.
영원사에서 1시간 거리며 삼정마을에서는 곧바로 오르는 길도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수도했던 사찰인 상무주암은 호젓한 별장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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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과 혜심·무기스님의 불심 깃든 상무주에서 20분 거리의 <문수암>
암자 뒤 커다란 바위 서쪽엔 임진왜란 때 1000 명이 피난했던 <천인굴>
문수암에서 10분 거리 삼불사(三佛寺)는 산골 고향과 같은 비구니 사찰.

삼불사에서 견성골과 아래 도마마을 지나 약수암을 지나면 <실상사>.     
실상사는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곳.
      

........산정산에서 사라진 옛 사찰 들...........
4월 14일 안양사(현 법화사)에서 출발
양정으로 들어가는 4월 18일까지 군자사,
금대암, 안국사에서 머물며 벽송암, 서암 방문

두타암 무량굴(상무주암과 무량굴 사이에 위치)
묘적암(무주암과 가까운 곳에 있던 그당시 초막)
천인암(현재 문수암 석굴이 천인굴이고 그 인근 암자).

상고대암 (고대암은 상무주암에서 실상사 가는 길에
천인암에 들렀다 상고대암으로 올라갔다 실상사 도달)
견성암(실상사에서 10리 올라 천인암과 1리 떨어진 암자)

도솔암(상무주암이나 묘적암에서 멀지 않는.. 도솔암)
지자대(삼정산 정상 부근에 동대와 서대 두개의 암자)
서동고암(상무주암에서 묘적암 갔다가 인근 서동고암)
..............<산중일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