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45. ( 화엄사상. 의상대사. 우리나라 고승들. )

donkyhote 2010. 10. 29. 02:33

 

화엄사상[華嚴思想]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은 의상대사로부터 시작되었다.
당나라에 가서 법장과 함께 지엄 밑에서 화엄을 공부
귀국후 화엄교학을 널리 펴서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다.

화엄사상의 정수가 담긴 법계도(法界圖)를 지었고
독창적 법계이론으로 화엄사상(화엄종)을 널리 폈다.

고려시대에는 균여(均如) 의천(義天) 등.
고려 중기 지눌(知訥)은 화엄사상을 연구
선종과 교학을 함께 닦는 정혜쌍수를 주장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모든 종파가 통합

화엄교학은 쇠퇴했으나 유정(사명대사)
성총(性聰) 상언(尙彦) 유일(有一) 등이
꾸준히 화엄학을 연구하여 명맥을 이었다.

하여, 불교의 3요소 = 염불. 참선. 화엄사상.

대승경전 화엄경에 근거하여 성립된 불교사상.
대표적인 것으로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교학.

화엄종의 종파적 기초를 닦은 사람은 두순(杜順)
교학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지엄(智儼)이며,
최종 집대성한 사람은 현수대사 법장(法藏).

화엄종의 교판(敎判)은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


.........오교........
① 소승교(小乘敎):부파불교,
② 대승시교(大乘始敎) 공(空)사상
법상종(法相宗)의 유식(唯識)사상,
③ 대승종교(大乘終敎) 천태종(天台宗),
④ 돈교(頓敎):〈유마경 維摩經〉의 교설,
⑤ 원교(圓敎):〈화엄경〉및 화엄종의 사상

여기에서 원교는 앞의 4교를 모두 포섭하고
동시에 가장 궁극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십종

①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독자부(犢子部)의 사상,
② 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사상,
③ 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대중부(大衆部)의 사상,
④ 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설가부(說假部)의 사상,
⑤ 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설출세부(說出世部)의 사상,
⑥ 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일설부(一說部)의 사상,
⑦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오교의 대승시교,
⑧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오교의 대승종교,
⑨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오교의 돈교,
⑩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오교의 원교 .


앞의 5종은 모두 오교의 소승교에 속한다.
십종판은 법상종의 팔종판(八宗判)을 개정


...화엄종 중심사상..
삼성동이의(三性同異義)·
연기인문육의법(緣起因門六義法)·
십현연기무애법(十玄緣起無法)·
육상원융의(六相圓融義).

법장은 서까래와 집의 비유로 이것을 설명.
집은 총상이며, 서까래 등의 각 부분은 별상
서까래가 서로 합쳐 집을 형성하고 것은 동상

그것들이 서로 다른 것은., 이상.

서로 다른 서까래가 집이 이루는 것은 성상
이들이 각각 자신의 모습을 지닌 것은 괴상.
이상의 연기사상과 연관된.. 성기(性起)사상

그것은 현상계 그대로 참된 성품의 드러남
그러므로 현상 외 진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절대적으로 긍정함을 뜻한다.





의상대사.




신라에 불교가 공식 전래된지 1백여년 당시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상가이자 학자
大·小乘, 性·相, 頓·漸 대립적인 교의를 융회

불교의 종파의식을 떠나 뭇 경전을 통합한, 원효
원효와 같은 시대 고승으로 화엄경을 전파한, 의상.
오늘날까지 원효와 의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승

의상은 진평왕 47년(625) 진골 귀족의 후예로 출생.
스물에 출가해 섭론(攝論), 지론(地論)등 교학 탐구
출가 사찰 황복사(皇福寺)는 황실과 관계가 깊은 사찰

현장이 인도에서 들여온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고자
교유를 가진 원효와 함께 26세인 650년 중국 유학길
육로로 중국에 들어 가려다가 고구려 국경에서 좌절

그대신 구구려 열반의 대가 보덕(普德)에게
대승교학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된, 원효 의상.
의상은 37세에 661년 해로를 통해 당나라 유학.

662년 의상은 장안(長安) 남방의 종남산(終南山)에서
당대 교학을 집대성한 지엄 문하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644년(선덕여왕 13) 황복사에서 승려가 된 의상
661년(문무왕 1) 당에서 화엄종 연구, 671년 귀국.
676년(문무왕 16) 왕명에 따라 부석사(浮石寺)를 창건.

화엄종을 강론, 해동(海東)화엄종 창시자., 의상.
전국에 10여 화엄종 사찰 건립, 화엄 교종을 확립

문하에 오진(悟眞) 지통(知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의상십철(義湘十哲)’10대 고승이 배출된다.

고려 숙종 때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 시호를 받았다.
저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 백화도량발원문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 소아미타경의기 등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는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 개조(開祖).
성은 김씨이고,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의상 이전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이 있었지만,
화엄사상이 크게 유포된 것은 의상에서 비롯

중악 팔공산 미리사 (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 (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 (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등을 창건

의상대사(625~702)는 원효대사와 함께
신라때 가장 존경 받았던 유명한 고승.

의상은 귀국 후 관세음보살님이 머문다는
양양 낙산사 앞 바닷가에서 목욕 재계하고
절벽에 있는 굴 입구를 향해 7일 동안 기도.

7일째 새벽, 의상대사 방석을 물 위에 뛰우자
불법 수호 신장들이 의상대사를 굴 속으로 인도

관세음 보살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벌만 의상에게 하사 하였다

의상대사가 수정염주를 받아 굴 밖으로 나오려는데
동해 용이 나타나 여의보주 한개를 바치는 것이었다

정성이 부족해 관세음보살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듯.
이렇게 생각한 의상대사는 다시 7일을 더 기도한 뒤에
굴 안으로 들어가 3일 동안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려 기도

그러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의상대사를 향해 말씀

"그대가 서있는 위 산 꼭대기에
대나무가 두 그루 솟아 있을 것.
그 곳에다가 절을 짓도록 하라."

이 절이 바로 관음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지금의 강원도 양양 낙산사(落山寺)이다

의상대사는 낙산사를 창건한 후
관세음보살님 소상(塑像)을 조성
법당에 모셨는데 살아 움직이는 듯

그러자 대나무는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뒤, 원효가 관음진신을 친견하려 낙산사 방문

처음 원효대사가 남쪽 동구 밖에 이르렀을 때였다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농담삼아 그 여인에게 벼를 달라고 하자
그 여인도 흉년이 들어서 쭉정이 밖에는 없다고 답변
원효는 그곳을 지나, 낙산사 인근 시냇가에 이르렀다

다리 밑에서 한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원효는 그 여인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였다
그런데 그 여인은 빨래헹군 물을 떠 주었다

원효는 그물을 버리고 위에서
다시 맑은 물을 떠서 마셨다
그 때 푸른 새가 지저귀었다.

"제호(훌륭한 음료수)를 버리다니,
화상은 관음보살 친견은 단념하시오,"

원효대사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다보니
새는 간 곳이 없고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새가 울던 나무아래 벗겨진 신발 한짝

원효대사는 이상하다고 여기며 낙산사에 도착
법당으로 들어가 관세음보살님께 합장하고 절
관음보살상 좌대 아래에 있는 또 한짝의 신발

원효는 비로소 앞서 만났던 두여인이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임을 알게 되었다
하여, 새가 울던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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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화엄종을 처음 도입한 신라 의상대사(625-702)
왕족으로 경주 황복사에 출가해 20세에 불문에 귀의
진덕여왕 4년(650년) 26세 때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

처음 당 유학길은 고구려 요동반도 국경 루트
고구려군 검문을 받아 첩자혐의로 체포되어 고생
이들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시도

의상이 36세 되던 해에 원효와 함께 서해안 당항성 도착.
남양(경기도 화성군 해안 추정)에서 무역선을 기다렸다.

의상이 귀국한 시기는 46세가 되던 해이고
처음 세운 사찰이 양양 낙산사, 영주 부석사.
신라 삼국통일 완수하던 해에 당나라 유학길.

백제가 멸망하며 서해 바닷길이 열렸으나
아직까지 고구려는 건재하였던 때였으므로
뱃길을 택하여 중국 산동반도 등주로 떠났다.

산동반도 황해 연안은 신라방이 있었고
의상이 잠시 머문 곳이 적산 법화원이다.

경도 근처 고산사에는 아름다운 신라 여인상

이 여인상은 당나라 처녀 선묘라고 보고 있으며,
이 절에는 화엄연기라는 불교서적이 전해오는데
이 책에 의상과 선묘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의상이 원효와 함께 도착한 서해안 당주계(당시 당항성)
배를 기다리다가 산중에서 노숙하며 비를 만난 두 사람.
어둠 속에서 민가를 찾지 못하고 움집에서 밤을 지냈다.

의상과 원효는 갈증을 느껴
가까이 고인 물을 달게 마셨다.

먼 여행길에 지쳐 불편을 잊고 단잠을 잔 뒤
이튿날 자신들이 잠잔 자리에 놓여있는 해골
그들이 하룻밤을 보낸 곳은 피폐해진 무덤 속

의상은 해골 물을 마신후 더러움을 느꼈으나
원효는 태연작약 오히려 환희에 젖어 있었다.
이튿날도 비가 멎지않자 무덤 속에서 보냈다.

원효는 이틀동안 무덤 속에서 크게 깨달았다.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고 갈파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뜻.

"나는 깨달았으니 경주로 돌아가겠다." - 원효.
한편, 의상은 홀로 험한 뱃길로 중국을 향했다.

699년 산동반도 등주 불교신자 집에 도착한 의상.
아름다운 처녀 선묘가 의상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의상이 적산에 있는 법화원으로 옮겨 머무는 동안
아침 저녁으로 탁발을 나설 때 선묘가 멀리서 흠모
선묘가 마음을 전하려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던 의상.

얼마 후 의상은 이곳에서 당 수도 장안으로 떠났으며
종남산 지엄 문하에서 10년간 삼장(경 율 논)을 배웠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려 등주 항구에 다시 나타나자
선묘는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고자 바닷가로 갔으나
안타깝게도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그리워하는 의상에게
법복이 전달되도록 선묘가 마음 속으로 빌자
그 법복은 놀랍게도 의상의 품안으로 날아갔다.

선묘는 독실한 불교신도로써 의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의상이 득도하고 무사히 귀국하도록 부처님에게 기원.

의상이 떠나자 함께 따라갈 수 없게된 선묘 낭자
스스로 용이 되기를 기원하며 황해에 몸을 던졌다.
하늘도 감읍해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호위

이 사실을 모르고 신라까지 도달한 의상
나중에서야 선묘의 보살핌을 깨닫게 된다.

의상이 귀국 후 처음 세운 절은 양양 낙산사
그 다음 태백산 근처 봉황산 아래 지은 부석사.

문무왕 10년(676년)에 이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미 5백여명의 다른 종파의 불승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의상은 마음 속으로 부처님에게 어려움을 호소
이때 하늘에서 나타난 선묘낭자 용이 돌로 변해
3일 동안 반대하던 불승들을 향해 내리칠듯 위협

그들은 두려워 달아나고 굴복해 절을 짓는데 협조
선묘의 넋이 의상을 보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용
선묘가 땅에 내려와 돌로 변한 곳에 지은 사찰 부석사

현재 부석사에 부석, 선묘각, 선묘정, 석룡.
절 동쪽에 선묘정 서쪽에 기우제처 식사용정
부석사 무량수전 아래 묻힌 석룡은 절의 수호신

아미타불 불상 아래에 용머리가 묻혀있고
절 마당 석등 아래 꼬리가 묻혀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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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 - 의상대사.

한티끌 속에 시방세계 담겼어라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나니
모든 법이 움직임이 없어 본래부터 고요하다

이름 없고 모양도 없어 온갖 경계 끊겼으니
깨달은 지혜로만 알 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참된 성품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나
자기 성품 지키잖고 인연따라 이루더라

하나 중에 일체 있고 일체 중에 하나 있으니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담겨있고
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다시 그러해라

끝이 없는 무량 겁이 곧 일념이요
일념이 곧 끝이 없는 겁이어라

구세 십세가 서로서로 섞였으되
잡란 없이 따로따로 이뤘어라

처음 발심 하온 때가 정각을 이룬 때요
생사와 열반이 서로 서로 함께 했고
이와 사가 그윽히 조화하여 분별할 것 없으니
열 부처님 보현보살 큰 사람의 경계더라

부처님의 해인 삼매 그 가운데
불가사의 무진 법문 마음대로 드러내며

보배의 비로 생명을 이롭게 한 일 허공에 가득 차니
중생들이 그릇 따라 갖은 이익 얻음이라

이 까닭에 수행자들이 마음자리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망상을 쉬지 않곤 얻을 수 없네

인연 짓지 않는 좋은 방편으로 마음대로 잡아 쓰니
마음자리에 돌아가매 분수 따라 양식 얻네

이 다라니 무진 법문 끝이 없는 보배로써
온 법계를 장엄하여 보배궁전 이루고서

영원토록 법의 중도 자리에 편히 앉아
억만 겁에 부동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하느니라.

 

 

 


우리나라 고승들 



우리나라 불교의 전통과 사상의 맥을 이어온 승려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몇 분들.

고구려 때 삼론학을 체계화 삼론종(三論宗)을 세운 승랑
일본에 불교를 전했던 혜편, 혜자, 담징, 혜관 등이 있다.
의연은 불교를 확장시키고 불교문화 토대를 확고히 하였다.

백제 겸익은 인도에 가서 원문 경전을 가지고 와 번역
신율(新律) 72권을 완성했고 담욱과 혜인이 주소(註疏)
백제율전으로서 완벽을 기하였음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백제의 일라, 관륵, 도장 고승들과 기술자, 건축가, 예술가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을 전파하고 문화향상에 큰 공헌을 했다.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한 신라에도 세속오계를 설한 원광법사
황룡사 9층탑 건립한 자장율사, 대중교화를 한 혜숙, 혜공, 대안
통일 신라 원효와 의상, 경흥, 태현, 원측, 명랑, 진표, 혜통 등

특히 원효는 의상과 함께 신라가 낳은 가장 위대한 승려
사상가. 저술가. 교육자. 문장가로서의 큰 업적을 남겼다.

혜초는 인도 성지 순례기 왕오천축국전 저술.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걸쳐 선이 들어오며
도의 홍척 무염 혜철 범일 등은 구산선문을 이룩.

고려시대 대표 승려 대각국사 의천과 보조국사 지눌

대각국사 의천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 11세 출가
통도사의 난원왕사에게서 화엄교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0부 300권을 편저술, 천태종을 이 땅에 개종.

그후 불일 보조국사 지눌이 나와서 선의 경지를 개척
지눌은 定慧結社 실행을 통해 교화법문을 크게 떨쳤다.
그의 뒤를 이어 진각국사 혜심을 비롯한 조계산 수선사
(지금의 송광사)를 중심으로 16명의 국사가 배출되었다.

숭유억불 이조시대에도 법맥은 끊이지 않아
서산과 사명, 부휴, 만해를 거쳐 이어져왔다.

서산은 임진왜란 때 제자 사명과 함께 승의군을 조직
구국에 앞장섰으며, 이후에는 전국 명산 사찰을 왕래
약 1,000명의 제자를 배출하였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쳐 불교중흥을 위해 활약한 스님
만해 한용운, 석전 박한영, 전진응, 경허, 방한암, 백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