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49 ( 삼각고지. 반란의 역사. 4.3 제주항쟁. )

donkyhote 2010. 10. 29. 02:41

삼각고지.


.....................,,,..................↖............. ........촛대봉 ........도장골..길상사.
..................... ........................↖................세석 산장...음양샘~~.......거림
................................................................영신봉....한벗샘...........↗..삼신봉..... .........청학동.
.............................................................../................↘ ........↗
.......................................................... ..선비샘~~.......대성골
..........................................↙..............벽소령 산장.........↘
.................... ..................↙............. 형제봉......................↘
..............................광대골.............. 삼각고지.........무당골~~~원대성....대성리
.................................................~~연하천 산장..............↗
..........................................↖...... 총각샘~~............빗점골
.............................................↖..화개재...~~..


연하천에서 오른쪽으로 약 2km 지점의 삼각고지
해발 1,470m의 돌출봉으로 이곳은 숨겨진 전망대.
좌우로 탁 트인 백무동 계곡과 화개골이 보이는 곳.

백무동은 '100 무당 전설'의 요람.
화개골은 지리산 불교문화의 요람.

이곳에서 북쪽 능선으로 내려가면
영원재 삼정산 거쳐 실상사 가는 길.

삼각고지에서 종주능선 길목 왼쪽 위에 형제바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등을 맞댄 두 개의 석상이다.

이 석상에 얽혀 전해오는 '형제봉의 전설.'

지리산에서 두 형제가 수도를 하고 있었다 한다.
두 형제에게 반한 연하천 요정이 두 형제를 유혹
두 형제는 끝끝내 요정의 유혹을 물리치고 득도했다.

그러나 성불한 후에도 집요한 연하천 요정의 유혹
두 형제는 서로 등을 맞대고 부동자세로 유혹을 경계.
그만 몸이 굳어 그대로 두 개의 석불이 되고 말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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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고지는 지금까지의 지리산 지명들과는 또 다른 맛.
1950년 6월 25 동란을 전후한 '반란의 역사' 현장인 곳.
삼각고지라는 지명 만으로도 이곳 참상을 짐작하게 한다.

형제봉에서 연하천 가는 길목에 행정구역 3 면 만나는 곳.
<화개면, 마천면, 산내면>모인 삼각고지 남쪽이 빗점골이다.
3 도가 만나는 삼도봉 또는 형제봉과 지리적으로 혼돈되는 곳.

함양군 마천면 삼정마을에서 연하천 산장으로 이어진 직등 코스.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헌상이 신출귀몰하게 토벌군 괴롭히던 곳.
삼각고지 명선봉 벽소령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일명 '남부군 피의 능선'

지리산 곳곳을 피로 물들인 남부군 전사는 이제 묻혀진 전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산중을 방황하며 죽어갔던 삼각고지.
이름 모를 주검들이 흙이 되도록, 지금껏 한가닥 장송곡도 없었다.
그들의 사랑 미움 환희 분노 열정 희망 그 모든 것은 이미 사라졌다.

'남부군'의 작가 이태(李泰)는 자신의 회상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1949 년 이래 5 년간 1만717회 교전에서 2 만명 생명이 죽어간 곳.
경상남도가 뒤늦게나마 테마 여행 등산로로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고증을 통해 산청군 함양군 하동군에서 20 곳 빨치산 유적지를 발굴.

2005 년까지 3개 안내센터와 20 개 안내판을 설치, 공원으로 꾸밀 계획
안내센터 외 시설물 계획 없으며 기존 등산로를 보수 연결하여 6개 노선,
<34km 빨치산 루트를 등산로로 복원할 계획>으로 경남이 추진 중에 있다.

- '빨치산 및 토벌대' 참가자들이 밝힌... 옛 싸움터의 증언들.. -

노고단 반야봉 삼각고지 덕평봉 세석평전 삼신봉 천왕봉 왕동재
주능선 계곡마다 곳곳에 빨치산들의 흔적이 남아 있던 곳들을 회상.

인민재판과 즉결 처형이 이뤄졌던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하정계곡.
남로당 경남도당. 빨치산 야전병원, 암반굴 방아간이 있었던..유평리,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됐던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등이 그 예.

경남은 이들 유적지 발굴을 위해 2003 년 11월 군별 고증위원회를 구성.
빨치산 토벌대 참가자 증언을 듣고, 각 경찰서에 있는 관련기록을 조사 중.
당시 빨치산 부대에서 전사(戰史)편찬 임무를 맡았던 '남부군' 작가 이태 씨.
몇 년전 타계하며 딸에게 물려준 '빨치산 주요 인물 200 명 활동기록'을 활용.

유적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는 아이러니컬한 장면이 빚어졌다.
40년 전 '적'으로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빨치산 및 토벌대 참가자.
함께 옛 싸움터를 찾아다니며 피비린내 나는 기억을 더듬었던 사실.

한 빨치산 참가자는 이 현상이 최후를 마친 대성리 계곡의 돌 밭에서..
죽어간 옛 동료들 모습이 떠오르는 듯 상기되어 손짓으로만 장소 확인.
'빨치산 이건 토벌대 이건 무력하게 이쪽 저쪽을 오가며 싸웠던.. 이웃들'

"가슴이 뛰어... 더 이상은.. 차마 내 발로... 못 가겠다."

어쨌든 '빨치산 관광코스'는 역사교육의 기능은 해낼 수 있을 듯.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한 솔밭 아래엔 40 여기 무덤이 줄지어 있다.
빨치산이 양민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다음 집단 학살해 파묻었던 곳.

훗날 연고자가 나서지 않아 방치된 시신들을 마을사람들이 수습한 곳.
그러나, 무덤 바로 아래 사는 주민조차 무덤에 얽힌 사정을 알지 못했다.
군자리 삼정리 하정계곡도 수많은 주민들이 인민재판을 받고 죽어갔던 곳.
묻고 물어서 만난 진모 할머니(76)로부터 어렵사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계곡 바위 아래마다.. 송장들 썩는 냄새 때문에.. 코가 아팠다"

빨치산 유적지는 3개 군에 산재해 있고 대부분 등산로와 떨어져 있어
현재로서는 강행군을 해도 하루에 2~ 3군데 이상을 돌아보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가장 많은 유적지를 확보한 산청군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리산 90 리 빨치산 루트 '남부군 피의 능선' 역사교육장으로 조성 계획.>

"등산로 주변이나 별도의 장소에 유적들을 모형으로 복원해 놓고
그 가운데 관광객이 직접 가고 싶은 곳만 가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

삼각고지는 철원의 삼각지대 백마고지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삼각고지가 치열한 반란의 역사 현장이었음을 알 수 있는 이름.
따라서, 지리산의 삼각고지 이름은 1950. 6. 25 이후 붙여진 듯.
하여, 참고가 될만한 철원의 삼각지대를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
백마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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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새 도래지로 변한, 철원의 삼각지대.'

겨울 철새들을 볼 수있는 DMZ(비무장지대)의 '새바라기 축제'.
강원 철원군 동송읍 고석정 일대는 철새의 도래지로 유명한 곳.
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2호) 독수리(천연기념물 제243호) 철새

민간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던 중부전선 최전방 지역.
반세기간 인적 끊겼던 곳에 수만마리 철새들이 펼치는 군무.
석양 속을 나르는 수만마리 철새의 날개짓은 잊지 못할 추억.
독수리에게 닭 돼지 등등 먹이를 준 겨울철새 보호활동도 한몫.

평강, 철원, 김화를 잇는 삼각 지대는 6.25 당시 중부전선의 심장부.
북한군이 남침을 위해 중부전선 본부로 삼았던 곳이라 '천연적 요새'
국군이 공격하기 불리하고 북한군이 방어하기엔 최적의 지형적 특색
하여, 미8군 사령관이던 제임스 팬플리트 장군이 명명한 '철의 삼각지'.
1989년부터 민간인 출입이 허용되자 6.25의 참상을 보여주는 산 교육장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 옆에 누워있는 기차의 잔해.
열흘 동안에 고지의 주인이 무려 24번 바뀌었던 백마고지.
군민 수탈의 본거지였던 노동당사 등 곳곳에 전적지가 산재.

북한의 남침용 제 2 땅굴이 발견된 이곳은 안보 교육장.
6.25 당시 격전지 백마고지, 삼천봉, 오성산, 저격능선.

안보 견학코스 : 고석정(전적관) → 6통제소 → 제2땅굴 →
철의삼각전망대(월정리역) → 5통제소(소요시간 : 약 3시간)

952년 10월6일 중공군 대공세로 10일간 혈전이 벌어진 백마고지.
피아간 포탄 30만발이 작열했고 중공군은 1만 4천 여명의 사상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만 전진한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

'국군과 미군은 보도 듣도 상상도 못한, 중공군 전술이었다.'
'전우의 시체를 방패 삼아 밀려오는 무지막지함에 아연실색.

중공군 2개 사단이 전멸, 국군 제9사단은 대승을 걷웠던 백마사단.
흙먼지와 시체가 뒤엉켜 악취가 코를 찔렀으며 피아 간의 포격으로
산이 제 모습을 잃고 백마가 누운 형상으로 바뀌어 백마고지라 한다.

< 철의 삼각전망대>는 경원선 최북단 종착역 월정역 맞은 편에 위치
1988년 건축된 4층 건물 전망대에서는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비롯하여
이북의 평강고원과 선전마을, 김일성 고지, 피의 능선이 한 눈에 보인다.

< 제 2 땅굴>은 서울 북방 108km지점 1975년 3월 19일에 발견
기습 남침용 지하땅굴은 지하 50-160m 지점에 총 연장 3.5km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1.1km까지 들어 온 높이 2m의 아치형 터널
시간 당 약 3만 명의 중무장한 병력과 야포 등이 대규모 침투 가능

<노동당사>는 8,15 해방후 6.25까지 조선 노동당의 철원군 당사
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 때 1개 리(里)당 백미 200 가마 씩을 착취
강제동원한 인력과 장비로 건축한 후에 5년 동안 악명을 떨친 곳.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며 양민수탈
애국인사들의 체포, 고문, 학살 등의 소름끼치는 만행을 자행했던 곳.
한번 이곳에 끌려가면 죽거나 반송장이 될만큼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

<월정리역>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달리던 경원선 철마의 간이역.
현재, <비무장지대 남방 한계선> 철책의 최북단 종착 지점에 있다.
역사 바로 맞은 편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간판 아래 화물열차.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린 객차와 부서진 인민군 화물열차 전시.
원래 한일합방 이후인 1914년 8월 강원도에서 제일 먼저 부설되었다.
총 223.7km를 연결하는 철원 특산물을 수송하는 간선 산업철도 역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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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삼각고지 또한 철원의 삼각지대 같은 곳.
낮에는 토벌군의 점령지라면 밤에는 빨치산의 점령지.
삼각고지에서 빨치산과 토벌군 전사를 재조명해 보자.




반란의 역사.



지리산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장엄한 명산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민족사의 숱한 소용돌이 속
민중의 고난과 한을 품고 호흡을 같이 해 온 산이다.

때로는 '피의 전장'으로 변했던 비극적 무대였다.
1948년 10월부터 1955년 5월까지의 '반란의 역사'.
군경토벌대와 좌익 빨치산들 간에 치열했던 공방전.

'지리산은 7년간 피비린내 나는 절규의 세계.'

전쟁의 포화로 인해 처참하게 불타 그슬려져야 했다.
군경 토벌군과 빨치산 모두 합쳐 2만 여명의 희생양.
지리산의 이름 모를 능선과 계곡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
불합리한 전쟁의 와중 속에서 말 못할 희생을 치뤘다.
우리가 꼭 풀어야 할 지리산이 안고 있는 최우선 과제.

'동족 간 피비린내 나는 7년 전쟁터였던 지리산.

역사상 전쟁은 언제나 싸워야 할 명분으로부터 비롯.
결국, 패자의 명분은 스러지고 승자의 명분만 정당화.
패전국은 승전국에게 값비싼 전쟁부채를 취뤄야만 한다.

그러나, 명분조차 희미한 1950년대 '반란의 역사.'
우리 민족 간 승자도 패자도 없었던 참혹한 전쟁.
오직 살기 위해 표류해야 했던 지리산일대 주민들.

조상 대대의 삶터를 잃어버린 주민들.
처녀의 정조까지도 유린을 당하는 비극.
오직 살기 위해 윤리관마저 표류한 혼란기.

낮에는 토벌군이 지배하는 세상.
밤에는 빨치산이 지배하는 세상.
그 비극의 서막은 여순반란 사건.

여순 반란사건부터 시작돼 지리산 유격 투쟁까지.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 여수 주둔 제 14 연대
그 연병장에 때 아니게 울려 퍼졌던 비상나팔 소리.

제주도 폭동진압에 출동을 거부한 지창수(池昌洙) 상사
그가 주도된 군반란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며 점점 확산.
지방 남로당원들의 동조와 궐기로 점점 더 도시 폭동화된다.

약 3천여 명의 반란군은 일시에 여수 순천을 점령하고
학구와 광양, 벌교로 진격해 다음날 구례 곡성까지 점령
14연대 반란군은 광양 백운산과 지리산 문수골 화엄사골,
산청 근처의 웅석봉으로 숨어 들어 산악 근거지를 만든다.

원래, 남한 좌익 게릴라는 1946년 10월 인민항쟁 때 시작.
수배자와 동조자들이 소백산과 태백산에서 '산사람' 활동
그후 남로당 정치활동이 불법화되자 폭력 투쟁으로서 전환

특히 미소공위의 결렬 후 주요 핵심인물의 탄압과 검거 선풍
결국, 남로당은 무장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막다른 골목
UN 한국위원단 입국반대, 단정수립 반대, 남로당 2.7 구국투쟁.

사전에 철저히 조직되고 계획된 폭력적 투쟁이며 남로당 전술
제주 4.3 봉기와 5.10 단선반대투쟁은 본격적인 유격전의 시초
남로당은 서울에 행동대를 조직하고 지방당에 야산대 무장부대.

군사경험을 가진 당원을 파견, 지도 하고 몇 개의 블럭을 편성,
지구사령부를 설치하는 체계화된 모습을 갖춘 한 예가 구례군당.
1948년 4월 28일 반동숙청사건 이후 수배된 박종하 와 20 여 명.

유격대를 조직 지리산 피아골에서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야산대는 무장도 초보적이고 호남지역에 치중.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들어서자 정권전복 무장투쟁으로 발전.

이때 여순사건이 터지자 남로당은 이 현상을 파견하여 지원.
김지회 반란군이 구례읍에 나타낸 때는 1948년 10월 25일경.
2일 후 왕시루봉 아래 문수리에서 국군토벌대와 소규모 충돌.

그후 정규군간의 전투를 방불한 구례읍 기습공격 두 차례.
여순사건 주도세력 14연대 반란군은 지리산에서 유격투쟁.
한편, 반란 토벌군은 1949년 3월 1일 남지구 전투사령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로 확대 강화되어 토벌작전 수행.

1949년 4월 9일 뱀사골 반선에서 김지회, 홍순석 등 진압.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 유격대 지도부의 붕괴를 의미하지만
순수한 빨치산 아산대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 새로운 국면.

즉 이제껏 반란군 패잔병 1,000 명이 지리산에 입산,
지리산 유격대의 근간을 이루다가 투항, 사살되었다.
결국, 야산대와 좌익 동조자로 메꿔져야 했던 빨치산.

정부의 토지개혁과 미곡 강제공출에 대한 농민들 불만.
남로당 지도부는 농촌지역에서 잠재적 혁명성을 재인식.
이를 통해 지방 야산대로 재편성해 유격활동을 재개한다.

1948년 11월부터 1950년 3월까지 오대산, 태백산지역.
6.25 이후 유격투쟁 속 여러 차례 송치골회의 논란거리.
1949년 5월 9일 지리산 토벌대 철수후 빨치산 투쟁 활발.

그후 조선 노동당이 발족하고 6월에는 조국 전선이 결성.
남로당 지도부는 소위 '9월 총공세'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9월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평화통일 선언서'에 따른 호응.

총공세는 남한내 유격대 3개 병단 편성으로 준비된다.
오대산 제 1 병단, 지리산 제 2 병단, 태백산 제 3 병단
이현상을 병단장으로 한 지리산 제 2병 단 총병력 500 명.

제 5 연대(연대장 : 이영회)
제 6 연대(연대장 : 이 헌상) 동부 지리산 담당
제 7 연대(연대장 : 박종하) 지리산 총사령부 경호연대
제 8 연대(연대장 : 맹 모) 광양 백운산 조계산 순천, 하동 곡성, 구례
제 9 연대(연대장 : 정금모) 덕유산을 중심으로 무주 장수 일대 담당

- 9월 공세시 남한 유격전의 규모 -

1948년 9월 참가인원 77,265명 교전횟수 1,776회,
10월에 참가인원 89,924명 교전횟수 1,330회 (과장된 기록)

지리산 지구 중요사건으로 거창 경찰서, 군청, 재판소를 점거
좌익사범을 탈출시킨 사건(8월 28일), 합천읍 기습사건(9월 1일),
전라선 군용열차 습격사건(9월 15일), 광양 20연대 및 경찰서 습격

9월 총공세는 중국과 동남아 혁명 분위기에 일맥상통.
이승만 정부는 9월 공세가 거세지자 지리산 토벌 결정.

9월 22일 내무(김효석) 국방 (신성모) 내무차관(장경근)
총참모장(채병덕) 참모부장(정일권) 치안국 장(이호) 등
군경 수뇌부가 회동, 군경합동으로 대대적인 지리산 토벌전

9월 20일 남원에 '지리산 지구 전투경찰대 지휘 총본부' 설치
10월말부터는 군경 합동 토벌작전. 10월-11월까지는 호남지구,
12-1월 중순까지는 지리산 지역, 그 다음부터는 영남 및 태백산

결국 1949년 10월 해남군 전투에서 호남유격 사령관 최현 사살
지리산 지구 사령관 이현상은 종래 5개 연대를 3개 연대로 개편
3연대 박 종하, 5연대 이영회, 7연대 이현상 소조별로 활로 개척

박종하는 백아산, 백운산으로 빠져나가 예봉을 피하고
이영회 부대도 전북을 전전하다 쌍치 가마골에서 궤멸
유독, 이현상만 지리산에 근거를 두고 토벌군과 대치

군경 토벌군이 지리산 주민을 이주시켜 빨치산은 고립.
혹한과 굶주림 그리고 사기저하 속에서 겨울을 보낸다.
1950년 2월 5일 호남지역 계엄령이 해제되고 3월 해빙기
빨치산 유격대 숫자는 이미 150 명 정도로 대폭 준 상태.

1950년 5.30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유격대 조직.
5월 16일 함양지역의 지리산부대, 정읍지역의 전북부대,
5월 18일 전남 장흥지구의 전남 서남부대 등 소부대 조직)

1950년 6.25 동란은 고립된 지리산 유격대에게 활로.
이현상 부대는 전선에서 군사활동을 위주로 유랑한다.
이현상 부대는 미군 통신부대를 기습하고 후방을 교란.

그러나, 남한 빨치산은 수도사단과 8사단을 근간으로 한
백야전 사령부 토벌작전에 의해 점차로 고사(枯死)해간다.
UN군 북진으로 인민군 패잔병들은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백아산으로 속속 퇴각하여 입산해 유격대로 조직대열을 정비


- 1951년 1월말 현황. -

지리산 지구 무장 1,330명 비무장 370명
덕유산 지구 무장 2,702명 비무장 1,900명
전북 지구 무장 1,796명 비무장 1,848명
전남 지구 무장 1,330명 비무장 1,272명

국군 제11 사단이 1950년 10월 7일~ 1951년 3월말
지리산 지역에서의 토벌을 네 번에 걸쳐 시행한다.

전남에서 1951 년 2월 재귀열병이 발생
전북지역, 경남지역으로 차차 번진 일과
지리산 지역에서 11사단의 양민학살사건.

11 사단에 이어 8 사단이 교대로 내려와서,
1951년 4월 15일~ 5월 11일 금산과 부안 토벌
1951년 6월에는 빨치산 유격대 5천 명으로 감소.

덕유산 송치골에서 열린 '남한 6개 도당 위원장 회의'
남한 빨치산 투쟁 통일적 지도체계를 확립한 중요 회의.
당사업은 여운철, 군사적 지도는 이현상이 맡기로 결정한다.

1953년 8월 26일 제 5 지구당 해체를 결의한 '빗점골 회의'
송치골 회의 결과를 두고 이현상에게 모든 책임을 지운 회의.
여기에서 이현상이 평당원으로 강등되고 남부군이 내려오면서
7~11월 지리산 유격대에 분명 새바람이 분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빨치산 지도부는 8사단 철수 후 운봉, 마천, 하동 습격
1951년 11월 26일 백야전 사령부(백선엽)가 남원에 설치
수도사단(송요찬), 8사단(최영희), 서전사(김용배) 배속

제1기 작전은 12월 1일-15일 까지 지리산을 집중 공격
제2기 12월 19일-1952년 1월 3일에는 전남 북지역 토벌
제3기 작전은 1월 9 일-1월 31일까지 지리산과 기타 지역
제 4기 작전도 2월 4일-2월 27일까지 지리산과 인근 지역

빨치산은 6,911명(1951년 10월)에서 2,070명(1952년 4월)
백야전 사령부가 해체하고 서남지구 전투사령부가 담당
1952년 8월 5일에는 남부지구 경비사령부로서 개칭된다.

한편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지구당에 '111호 결정'을 지령.
경남도당 위원장 김삼홍이 1953년 12월 부산 지하당 재건

1953년 5월 1일 발족한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사령부'
전남북, 경남지역 의 1시 12개군을 관장하는 정예부대
빗점골에서 이현상이 9월 18일, 8월 20일 송관일 사살.

1953년 12월 1일부터 군경 합동 동계 빨치산 토벌전
이때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김선우 등이 사살되고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가 1월 18일 남덕유산에서 최후

1953년 가을 천여명 빨치산이 이듬해 4월엔100 명에 불과
빨치산이 완전 소탕되었다고 선포한 때는 1955년 5월 23일.

- 1960년 5월 19일과 21일자 부산일보 -
1949년 9-12월 사이에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7백명 주민들이 좌익단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덕산 농업창고에 수용되어 온갖 가혹행위 끝에 총살

-부산일보 1960년 5월 21일자 기사 -
비슷한 시기에 금서면 방곡리 가현부락 청년 40 명
국군 탄약운반 일에 징용된후 공동묘지에 끌려가 총살
1951년 2월경에도 역시 대량 양민학살 사건 잇달아 발생

1951년 2월 11일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9 연대(연대장 오익경) 3 대대(대대장 한동석)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5개 마을
부녀자, 노약자, 어린이 포함한 민간인 719명 학살

이 사건 바로 3일전에는(즉 2월 8일경, 음력설 이튿날)
위 부대에 의해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주민 500 명
속칭 '산청 함양 양민학살 사건' 정확한 사망자 수는 미확인.

1960년 5월 31일-6월 10일까지 당시 제2공화국,
국회내 '양민학살 진상 조사 특별위원회' 기록
1950-1951년 거창 719명, 함양 593명, 산청 506명

언제 누가 어떤 이유인지 자세한 사연은 모른다.
중군리 구진벌, 군자리 앞산, 시천면 신천국민학교.
산청읍 내외동 경호강변, 중기리 앞 섬진강변 모래밭
등지에서 양민들이 집단학살 당했다고 지금도 전해온다.

1951년 3월 12일 오후 2시
시천면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정 골짜기
피난시켜준다는 명목으로 11대 버스 양민 500 명
김종원 인솔하의 11사단 9연대 화랑부대에 의해 총살
(부산일보 1960년 5월 17일자 기사)

거창군 신원면 주민 300 명
시천면 외공리에 끌려와 떼죽음

마천면 추성리에는 '金明杓 頌德碑'
학살위기에 몰린 주민을 구한 이장
김명표 씨 은덕을 지금도 기리고 있다.

화개면 범왕리에서는 반란군이 인민재판을 열어
우익 청년단(대한청년단) 단장, 부단장 죄를 심문
마을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변호를 하여 처형을 모면
이 점 때문에 훗날 군경에 의해서 또다른 학살을 모면.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수시 지배자가 바뀌는 세상에 살던 주민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생명과 직결

지리산은 분명 풍요로움과 신령함을 간직한 명산.
그러나, 인간세계의 온갖 이념대결, 전쟁포화 얼룩.
지리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수천, 수만의 봉우리.
마치 거대한 역사의 무덤들을 연상하게 하는 자연의 모습.

화개면 서주리 양민학살 구덩이에 알토란과 아카시아 나무
아카시아의 날카로운 가시는 죽은 혼의 맺힌 혼을 떠올린다.
지리산에서 7년간 벌어진 빨치산과 토벌군과의 참혹한 비극.




4.3 제주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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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역사는 왜 시작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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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항쟁과 여순반란사건,
그리고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
마치, 산불처럼 번져간 비극의 역사.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 해방 이후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
당시, 남한은 미국의 대소 반공 전초기지

따라서, 남북 분단은 필수적인 전제조건
제주도에서는 남한정부 단독선거 반대투쟁


<1948년 4월 3일 새벽2시! 제주 항쟁.>

한라산을 비롯한 각지에서 무장투쟁을 알리는 봉화
승자도 패자도 없는 기나긴 싸움의 서곡이 시작된다.
1500명 민중자위대가 도내 20개 경찰지서 중 10곳 공격

초기 공세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인민유격대를 조직
미군정은 1700명 경찰을 제주에 급파하고 국방경비대 증원
계엄령 선포로 해안이 봉쇄되고 미군방첩대 활동이 강화된다.

미군정은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초토화작전을 계속 요구.
김익렬의 거부로 초토화 실패하자 유격대와의 협상을 명령.
이리하여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
72시간내 전투중지 합의로 4.3항쟁 참극을 막을 마지막 기회.

그러나, 미군정이 5월1일 경찰을 민중무장대로 위장시켜
오라리 마을 습격 사건으로 평화회담 합의안은 무산된다.
미군정은 오라리 마을습격 책임을 9연대 김익렬에게 전가.

미군정은 김익렬을 해임하고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
초토화 작전을 준비하자 제주도에서 5.10 총선거 무산.
제주도 전역에서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항거 시위.


'<4.3 제주 항쟁>과 <여순반란사건>.'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 여수에 주둔한 제14연대
제주도 폭동진압 출동을 거부하며 여수와 순천을 점령
지방 남로당원의 동조와 궐기로 반란의 역사가 시작된다.

약 3천명의 반란군은 학구와 광양, 벌교 등 3방면으로 진격
22일 아침에 지리산 가까이 구례, 곡성까지 모조리 점령한다.

'여순 반란사건'은 북한 남로당 침투공작도 원인.
2.7 구국투쟁, 5.10 단선 반대투쟁과 연관된 사건.
14연대의 반발은 사전 계획이 없었던 돌발적인 사태.

14연대 반란군은 토벌군에 의해 쫓겨 패잔병 신세.
이들은 백운산과 문수골, 화엄사골, 웅석봉으로 은신.
산악 근거지를 만들며 본격적인 유격투쟁에 들어가게 된다.

동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반발하였던 14 연대.
제주 4.3 민중항쟁 진압을 거부해 반란군이 된 그들.
이때 남한 동족에게 총을 겨눈 또 다른 이념의 빨치산.

피도 눈물도 없는.. 피비린내 나는 이념전쟁.'

토벌군과 빨치산 그 어느 편일 수도 없던 산골 사람들.
가족 따라 어쩔 수 없이 혹은 기꺼이 산으로 간 사람들.
먼저 산으로 간 지아비를 뒤쫓아 산에 올라갔던 지어미들

반란의 역사는 서서히 빨치산의 투쟁으로 변질되어 간다.
북한은 지리산 속 그들을 버렸고 남한은 그들을 섬멸한다.
하여, 쫓기던 그들은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덕유산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 무룡고개'

'춤추는 용’이란 뜻을 가진 무룡(舞龍)은 호남의 명당.
지지리 인근에는 이곳 외에도 내로라 하는 명당이 많다.
여성 빨치산과 토벌군의 사랑 이야기가 애틋한.. 지지리.

...........끝내 못 이룬 빨치산과 토벌군의 사랑..........
1950. 6.25 전란 이전에 소개시켰던 빨치산 거점 마을.
그곳 여성 빨치산과 토벌대 국방군 대위의 애틋한 사랑.
1951년 12월, 백야전 전투사령부 26연대는 장안산을 포위.

곱게 쪽진 여인의 가리마 같은 무룡고개를 오르는 길.
그곳에서 오양수라는 여성 빨치산을 만나게 된 김 대위.
김 대위 나이 24살이었고 오씨는 20살 꽃 다운 나이였다.

도피생활에 지쳐 눈밭에 쓰러진 그녀를 발견한 김 대위
김 대위는 그녀를 안아 일으키는 순간에 전율을 느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그렇듯이 두 사람의 운명적 첫 만남.

그녀의 씻지 못한 얼굴과 다 찢어진 옷.
동상에 걸려 퉁퉁 부어오른 그녀의 손발.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기 어려운 몰골이었다.

김 대위는 그녀를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그녀도 김 대위의 따듯한 마음에 끌렸다.

그녀의 건강이 회복되자 결혼을 결심한 김대위.
김대위는 그녀에게 군인가족증까지 만들어 준다.
그리고, 목포 자신의 고향집으로 그녀를 보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김 대위는 방첩대에 체포된다.
김대위이 빨치산 여성을 숨겨주고 빼돌린 죄목이었다.
김 대위 사상을 의심한 방첩대에서의 심문은 지독했다.

시부모가 될 어른들을 모시던 그녀 역시 체포됐다.
방첩대에 붙잡혀간 그녀에게 가해진 심문 역시 가혹.
그녀는 가혹한 심문을 받으면서도 오직 김대위만 걱정.

"그분은 괜찮으신가요?”

자신이 죽어야 김 대위가 무사할 것이라 생각한 그녀.
그녀는 심문병이 잠시 한눈 파는 틈을 타서 자살했다.
심문병 칼빈총을 자신의 목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김 대위는 약식재판을 통해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그러나, 당시 사단장 송요찬 장군의 사면으로 복권.
군에 복귀했지만 그의 군대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결국 중령으로 예편한 사랑을 후회하지 않은 김 대위
김 대위는 그후에도 오직 그녀만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백야전 전투사령부 백선엽 장군 저서 <실록 지리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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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울에서 인테리라 자처한 지식인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사상에 빠진 대학생들.
멋 모르고 공산주의에 동조하여 빨치산 투쟁.

여학생들까지 남자 대학생따라 지리산에 입산
마치, 농촌 봉사활동하듯 총들고 남부군에 가입.
공산주의에 잘못 이용 당하며 꽃다운 나이에 개죽음.


<지리산 반란의 역사 및 빨치산 투쟁.>

1948년 10월 25일. 구례에 타난 김지회의 반란군
이틀 후 왕시루봉 아래 문수리골에서 토벌대와 충돌
그후 정규군과의 전투를 연상케하는 구례읍 기습 공격.

이들은 월동준비를 하며 소조별로 분산을 꾀한다.
그러나, 혹한에 못견디고 비참하게 얼어 죽어간다.
하여, 14연대 반란군의 잔여세력은 유격 투쟁에 돌입.

한편 반란의 토벌작전을 지휘하던 호남방면 전투사령부
1949년 3월 1일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로 확대 강화되어
1949년 4월 9일 지리산 뱀사골 반선부락에서 반란군을 궤멸.

김지회,홍순석 등 반란군 유격대 지도부는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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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조선 해방 명분으로 남침
부분적으로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인민들로부터 지지
인민군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협동작전을 벌린 빨치산들.

1950년 6.25 사변 이후 1951년 1.4 후퇴.

국군이 낙동강 이남까지 후퇴한 2월 중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이끄는 빨치산
지리산 제 2 병단은 속리산에 이르게 된다.

1950년 11월초 강원 평강에서 유격부대 재편성 회의
그들은 회의에 참석 후 지령에 따라 지리산으로 남하.
동학 혁명군 집결지 보은군 마로면 갈평 산마을에 주둔.

2개월 남짓 머무르며 청주 문경 경찰서 기습.
이른바 '갈평 시절'은 남부군의 전성기였다.

그해 4월말, 남부군 예하 결사대 48명이 청주를 습격.
이들 빨치산은 충북도청.청주경찰서.청주형무소를 점령
수감중이던 좌익계 죄수들을 풀어내 속리산으로 철수했다.

빨치산들이 도청 소재지를 공격해,
한때나마 점거한 것은 이때가 유일.

6.25 전쟁 전 남한의 빨치산은 지리산 이현상 부대 100여명.
그와 모두 합쳐 460명이었던 것으로 국방부는 추정하고 있다.
제주 4.3항쟁과 여순반란 사건 초기진압으로 숫자가 줄어든 탓

1950년 10월 38선 이남에 1만명, 38선 이북 1만5천명.
낙동강 공세에 실패했던 인민군들이 압록강까지 후퇴
미처 퇴각 못한 패잔병이 많아 늘어난 남로당원 빨치산.

유엔군 총공세로 전세가 역전되자 북측은 유격대를 재편
1950년 11월 2일 강원도 평강군에 모여 인민 유격대 회의.
14연대 잔여 패잔병 200 여명과 합류하며 빨치산 무력투쟁.

'지리산 유격 전선에 새 바람을 일으킨 이헌상.'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 작전.
인민군 후방을 타격해 전세를 일변시킨 군사작전.
1950년 6·25 전쟁 후 남진을 계속해 왔던 인민군

UN군 참전으로 120 마일 낙동강 전선에서 교착상태
UN군은 인천상륙 작전으로 인민군 전열 허리를 단절

3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던 인천상륙 작전.

1단계는 월미도 점령(9월 15일 06시 한미 해병대)
2단계는 인천항 주변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탈환한다.
3단계는 미해병 1사단이 19일 한강도하후 서울 점령.

26일 정오 중앙청 태극기 게양으로 작전을 완료.

한미 UN군 연합군은 인민군 태백산맥 퇴로를 차단.
38선을 향해 퇴각하던 남부군은 한수 이남에 고립.
인민군 유격대 남부군은 덕유산 지리산으로 숨는다.

남로당 지령에 따라 지리산을 거점으로 유격투쟁.
적화 통일되기만 꿈꾸며 목숨 걸고 싸웠던 남부군.
북측 남로당으로부터 버림받고 지리산에서 죽어간다.

빗점골에서 이현상이 사살되고 전남도당 거물급들이 사살
1953년 12월 1일부터 국군 전투경찰대 합동으로 동계 토벌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반란의 역사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그들이 꿈꿨던 이데올로기 산제물이 된 남부군.
일부 생존자까지 끝내 버리지 못한 적화야욕 꿈.
포로로 잡혀 종신형 감옥생활 중에도 사상적 투쟁.

'지구 상 공산주의가 종말을 고한 시점에서도..'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