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46. ( `싯다르타`의 고행. 청담스님. 묘엄스님. )

donkyhote 2010. 10. 29. 02:34

 

 


'싯다르타'의 고행.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의 뼈만 남은 앙상한.. 싯다르타
극심한 고행으로 몸은 말랐지만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다.
종교의 목적 실현에 필요한 육체적 정신적 실천’ =수행(修行)

깨달음을 위한 단지, 단식 등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

‘번뇌(煩惱)의 주체’인 육체를 철저하게 괴롭히는 고행
사흘에 한 끼를 먹거나, 다리 하나로 발돋움하여 선 고행.
티끌 있는 땅이나 가시나무 위에 누워 견디기도 하는 고행

현재 인도에도 고행하는 사람들이 5백만 명 이상.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욕망과 반야(지혜)
‘무명(無明)’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행’주의(苦行主義)
‘수정’주의(修定主義)라는 두 방편이 인도에 유행하는 고행.

고행주의자들은 사람의 ‘영혼’은 본래 청정하지만
욕망에 가득찬 ‘육신’은 온갖 다툼의 근원이라 파악.
집착을 끊고 욕심을 억제하려 육체에 극단적 고통을 준다.

수정주의자 역시 육체와 정신은 대립되는 것으로 분석.
육체를 정신에서 멀리 떼어 놓으려는 고행주의와 달리,
선정을 닦아 독특한 정신상태에 들고자 하는., 수정주의.

싯다르타의 고행은 다른 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

“태자는 바르고 참된 도를 닦으려
마음을 깨끗이 하고 계율을 지켰다.

하루에 깨 한 톨과 쌀 한 알씩을 먹으며,
만약 구걸하는 이가 있으면 역시 보시했다.”

고행한 결과 태자의 몸은 육신이 소진하고
뼈와 살가죽만 남아 배와 등이 납작해졌다

특히 손으로 배를 만지면 등뼈가 닿았다.
등을 만지면 배가 만져 질 정도로 말랐다.
대소변을 보려면 앞으로 버티고 서야 했다.

손으로 팔다리를 문지르자 빈약한 영양섭취 때문에
뿌리가 썩은 몸의 털들이 빠졌다(맛지마니까야 12).”

그러던 어느날 가장 맹렬한 고행을 결심한 싯다르타
단식으로 극도로 피로해져 황금빛 몸은 검게 되었고
80세 노인 같아졌고, 등뼈가 굽어 네 발로 기어야했다.

앉으려면 벌렁 자빠질 정도였고 눈은 움푹 파이고,
가슴뼈나 혈관이 피부 위로 솟아올라 쓰러질 정도.
태자의 가혹한 수행은 다른 고행자들의 모범이 됐다.

주변의 모두가 그를 흠모하며 따랐다.
시체가 널린 들판에 잠자리를 만들었다.

들판의 목동들이 싯다르타에게 침을 뱉기도,
그에게 오줌을 누기도, 풀줄기로 귀를 찔렀다.
몸에는 나무 껍질과도 같은 때가 층층이 쌓였다.

6년 동안의 온갖 수행으로 피골이 상접한 싯다르타
그런데 고행상의 싯다르타는 처참해 보이지 않았다.

“검은 돌의 아름다운 윤기,
앙상한 얼굴에 감도는 고요한 법열(法悅)의 미소,
단정하고 위엄 있는 모습 등에서 대각 직전 해탈의 모습”

고행은 싯다르타 일생에 중요한 전기가 됐다.
애욕과 고통을 떠나 고행이 주는 메시지는 컸다.
쾌락 안일(安逸) 망상에 따라, 욕망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고행상은 크게 각성하게 한다.

 

.................고행(苦行, tapas).....................
'열기 열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apas.
육체의 욕망을 끊으려는 고통스러운 행위.

힌두교에서는 정신적 청정함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행하는 금욕적인 행위를 고행.

후기 힌두교 고행은 해탈(解脫 moka)이 목적.
엄격한 정신수련 방법 중에 하나가 요가이다.

힌두교 성전에서 언급한 고행으로는 단식,
힘들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자세를 유지하기,
뜨거움이나 극도의 추위 속에서 밤을 새우기,

자이나교 고행은 과거의 업(業)을 제거하고
새로운 업을 막아주는 방법으로서 믿고있다.

자이나교도들의 단식(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음),
식사의 제한, 명상, 은둔, 외적 고행과 정신집중,
참회, 죄의 고백 등의 내적 고행으로 구분한다.

불교에서도 자비(慈悲)와 무소유(無所有) 실천
금욕적인 삶을 해탈에 이르는 방법으로 여겼다.

아직 깨달음에 이르기 전, 석가모니.
하루 삼씨 1알과 보리 1알 먹는 고행.
누구보다도 심한 고행을 행한 석가모니

'고행은 득도의 바른 방법이 아니다.'

스스로 깨닫고 제자에게 고행을 권하지 않았다.
대신 쾌락과 고행을 벗어난 중도의 가르침을 설파
하여, 불교에서 고행은 궁국적 득도의 길이 아니다.

고행은 남을 이롭게 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제거하기 위한
일시적인 수단으로서 인정될 뿐
궁극적으로는 거부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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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스님.



10년간 맨발 고행 감내한 인욕 보살.
청담 스님은 한국불교 정화운동 화신.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성불을 한생 미루더라도
불교정화만은 꼭 이루겠다.”

1902년 경남 진주 출생
진주농업학교를 마친 후
2차 출가 시도에 실패한다

친구 박생광 화백의 도움으로
일본 송운사에서 6개월간 수행.
귀국, 25세 경성 연화산 옥천사

남경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
순호(淳浩)라는 법명을 받게된다.

그후 박한영 스님 문하에서 수학
이어 만공선사 문하에서 수행하고,
금강산을 거쳐 묘향산에서 깨달음
스승 만공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해방 후, 한국 불교정화운동에 뛰어들었고
기어이 청정비구종단 기틀을 확고히 세웠다.

한국불교 대표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종회의장, 장로원장, 동국학원 이사장, 종정
1971년 11월 15일, 세수 70세, 법랍 45세로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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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가에 홀어머님과 아내, 딸 하나를 두고 출가
훗날 깨달음을 얻은 ‘도인스님’으로 알려지자
고향인 진주의 불교신도들이 스님을 찾아뵙고 간청,

진주의 연화사 초청 법회에서 설법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날 밤, 아들의 설법을 들으러 온 어머니
그 손에 이끌려 옛 속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늙은 어미의 유언을 들어 달라.”

어머니의 그 말씀을 차마 거역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오늘 밤, 이씨가문 대를 이을 씨 하나만 심고 가거라.”

늙으신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에 고개를 흔든 스님.
마지막 유언은 절규에 가까웠고, 결국 절망적 통곡.
결국, 지옥에 갈 각오로 옛 부인이 자는 방문을 연다.

'그러나, 그 하룻밤 파계를 참회하는 10년 고행,'

엄동설한에도 맨발의 고행을 감내한 청담스님.

“지옥에 갈 각오로 파계했던 몸,
이 만한 고통이야 달게 받아야지.”

지옥에 떨어질 각오로 했던 마지막 효행(孝行)
그 하룻밤의 파계로 태어난 아이는 또 딸이었다.
청담 스님의 참회 고행은 처절하고 냉혹할 정도.

아들을 파계까지 시켜 대를 이으려 한 어머니.
또 딸을 낳은 며느리를 원망하고 미워한 어머니
속가의 이런 소식은 바람 결에 실려 퍼지기 마련.

청담 스님은 진주 속가로 가서
늙으신 어머니를 직지사로 모셔
삭발 출가시켜 드려서 매듭지었다.

“그동안 쌓으신 전생의 업장,
염불공덕으로 씻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비구니 스님이 된 어머니.
며느리와의 화해 끝에 열반하신 어머니.

그 하룻밤 파계로 얻은 둘째 딸
성철스님의 권유로 삭발 출가해
한국 불교 비구니계 거목이 된다.

수많은 중량급 후학들을 길러낸
수원 봉녕사 노 비구니 묘엄스님.

그리고 청담 스님의 옛 속가 부인
청담 스님 열반 후 묘엄이 모셔다가
삭발 출가해 결국, 네 식구 모두 출가

“인욕제일 청담 스님”

1950년대 한국불교계에 정화운동
그 가운데 청담 스님은 초강경파.

이 무렵 한국 불교계에서 유행어.

"설법제일 하동산, 정진제일 이효봉,
인욕제일 이청담, 지계 제일 정전강.”

어떠한 어려움, 어떤 수모, 어떤 고통도
기꺼이 잘 견뎌 내고, 감수했던 청담스님.

하나에서 열까지 참고 견디고,
견디고 참아내면서 인욕바라밀

“만약 청담 스님이 인욕을 실천하지 않았더라면
자체 반목이 일어나 불교 정화운동은 실패했을 듯.”

불교계 후학들의 이러한 증언은
그 인욕보살 고행을 대변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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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청담 스님이
옛 아내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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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그 동안 염불공부 잘하셔서
죽을 때에 귀신한테 끌려서
삼악도로 가지 아니하고
극락세계의 아미타불님 회상으로 가실
자신이 섰습니까?

모진 병 앓고 똥이나 싸버리고
정신없이 잡귀신들에게 끌려가서
무주고혼이 되어서 밤낮으로 울고
천만겁으로 돌아다니면서
물 한 그릇도 못 얻어먹는
불쌍한 도가비 귀신이나
면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다 늙어서 서산에 걸린 해와 같이
금방 쏙 넘어가게 될 형편이 아닙니까?
살림걱정, 아이들 걱정 이 걱정 저 걱정
다 해봐야 보살에게는 쓸데없는 헛걱정이오,
죄업만 두터워질 뿐이니 다 제쳐놓고
염불공부나 부지런히 하시오.
앞날이 급했지 않습니까?

내나 보살이나 얼마 안 있어
우리들이 다 죽어서 업을 따라서
제각기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 아닙니까?

부디 쓸데없는 망상은 다 버리시고
염불만 부지런히 하셔야 하지요.
곧 떠나게 된 인간들이
제 늙은 줄도 모르고 망상만 피우고
업만 지으면 만겁의 고생을
어찌 다 감당할 것이오?

극락세계만 가 놓으면
우리가 만날 사람은
다 만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다 집어치우고 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
급했습니다.
부탁입니다.
절하고 빕니다.

늙은 중 합장


조계종 통합종단 초대 총무원장과 종정을 지내며
청정 승단의 재건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던
청담 순호(1902~1971). 1954년 식민지 불교의 청산

본격화된 정화운동 중심에는 그가 있었고,
불가능해 보이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도
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청담의 위법망구.

잇따른 승려대회를 비롯해 데모와 할복사건,
유혈충돌, 법정투쟁 등 숱한 희생과 우여곡절.
그 속에서 종단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청담은
바쁜 와중에도 문득 문득 옛 아내를 떠올렸다.

남편과 막내딸을 불문(佛門)으로 떠나보내고
온갖 번민과 근심을 끓이고 산다는 그녀 소식
모래 위 물처럼 아픔이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자물쇠도 열쇠도 없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괴로워할 그녀 모습이 눈에 선했던 탓이다.

"목마름이야 물로 다스릴 수 있지만
마음이 탈 때 무엇으로 끌 수 있느냐?"

진주 호국사에서 벌컥벌컥 물을 들이킨 그에게
한 노스님이 한 말을 듣고 시작된 출가의 의지.

대를 이어야할 2대 독자가 삭발 출가하려 하자
아버지는 서둘러 '청담과 차점이'를 혼인시켰다.

열아홉 나이에 넉넉지 못한 농가로 시집 와
소처럼 일하고 양처럼 순종했던 여인..차점이.

청담이 구름처럼 떠돌 때에도 그저 지켜만 보고,
일본에서 출가자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그저 다소곳하게 고개만 끄덕이던 착한 여인..차점이.

고성 옥천사로 출가한 청담이 고향을 찾아가
이혼수속 얘기를 꺼냈을 때 그렁그렁 고인 눈물
야윈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기왕지사 출가했으믄 스님다운 스님이 되셔야지예.
지야 뭐, 당신이 하자는대로 해드리겠심니더.”

1930년 봄, 고향 낙성법회에 법문 왔다가
매달리는 어머니에 이끌려 다시 찾은 고향집.

“가문 이을 씨앗 하나만 심어 놓고 가라”

마지막 소원이라는 어머니의 한 맺힌 절규
청담은 목건련을 떠올리며 마음을 굳혔다.

‘저 분을 위해서라면 지옥엔들 못가랴.’

첫 닭이 울기도 전 버선도 신지 않은 채
속가를 뛰쳐나온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아! 수행자인 내가…
이 죄업을 어찌 씻을고.’

가혹하리만치 매서운 청담의 참회와 인욕수행
이 때부터 홑옷에 눈길을 걸을 때에도 늘 맨발

‘눈 위에 피묻은 발자국은 그가 다녀간 자리’

오랫동안 괴롭혀오던 마음의 갈증이 해갈된 청담.
그에게 들려온 속가의 얘기는 그를 안타깝게 했다.
옛 아내가 또 딸 아이를 낳았기에 혹독한 시집살이

청담은 어머니가 더 죄업을 지어서는 안된다고 생각
홀어머니를 직지사 서전암으로 모셔와 출가토록 했다.
비구니 성인(性仁)은 묵은 한을 내려놓고 열심히 염불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며느리에게 용서를 구했으며,
며느리도 사찰에 머물며 임종까지 시어머니를 돌봤다

청담과 차점이 다시 만난 건 몇 해 뒤인 1943년 여름.
안거수행하다가 사월초파일날 상주경찰서로 연행됐다.
기미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청담에게 두달간의 고문

결국 실신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사경을 헤메었했다.
이 때 멀리 진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차점이.

“시님, 시님…. 이게 뭔 일이란 말입니꺼.”

그녀는 마지막 남은 땅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청담을 경찰서에서 빼내 상주포교당으로 옮겼다.
차점이는 청담 곁에서 24시간 지극정성으로 병구완

청담은 흰머리가 돋기 시작한 그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성껏 들려주었다.
무뚝뚝하던 그에게 처음 느낀 따뜻함.

지아비가 아니라도 좋았다.
그냥 이렇게 세월이 멈췄으면.

그러나 그는 이미 남편이 아니라
바람과 구름이 되어 떠도는 수행자.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이 보살이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보살이요,
남을 살리는 것이 보살입니다.
좋은 일 많이 하시고 염불도
지극정성으로 하도록 해요.”

“예, 시님…. 알겠심니더.”

몇 해가 흘러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이른 1945년 초,
둘째 딸을 스님이 되게 해달라는 옛 아내 부탁이었다.
절친한 도반 성철의 도움을 얻어 머리를 깎도록 했다.

차점이는 수시로 딸이 있는 곳을 찾았고
청담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늘 안타까워 '대도성'이란 법명을 주었다.

조계종 종정직을 사퇴한 이듬해인 1968년,
청담은 옛 아내에게 간절한 편지를 띄웠다.
1971. 11. 15. 청담은 홀연히 열반에 든다.

대도성은 삶을 지탱한 대들보가 무너지는듯.
십수 년 간 조석으로 기도하고 염불도 했건만
가슴 한 켠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허전함

몇해뒤 보다 못한 묘엄은 대도성을 절로 모셔와
손수 머리를 깎아 출가토록 한 뒤 함께 생활했다.
대도는 절에서 생활하며 옛 남편의 뜻을 따라 염불

'세상사가 꿈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다’- 청담 -

그말을 비로소 가슴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1988년 5월 12일 마침내 대도는 눈을 감았다.


 

 

묘엄(妙嚴)스님.

 

 


대표적인 비구니 강원인 경기도 수원 봉녕사
그곳 주지이자 승가대학장인 묘엄(妙嚴)스님
일반인에겐 청담스님의 둘째 딸로 알려져있다.

1947년 비구니로는 드물게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기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인물

청담 스님의 탄생(음력 10월 20일) 1백주년이 되는 해,
묘엄 스님 개인적으로 고희(음력 1월 17일)를 맞는 해
묘엄 스님은 <회색고무신> (시공사.윤청광 엮음) 출판.

청담 스님 탄생 1백주년 행사는 서울 도선사 주관
묘엄 스님의 스승들을 보면 면면이 참으로 화려하다.
청담. 성철. 경봉. 운허스님 등 대표적인 큰스님 스승.

'그녀는 아버지에게 특별한 정을 느꼈을까?'

"예전엔 다 똑같은 분인 줄 알았는데
혈육의 정이란 건 역시 있는 것 같아요.
그걸 정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청담스님을 추모하는 일은 머리에 감돌게 됩니다."

"수행과 깨우침은 운허. 성철. 청담스님 모두 같은 위치.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성격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같은 법대에서 학위를 받아도 그 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는
각자가 서로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4년 과정인 봉녕사 승가대학에서는 현재 1백30여명이 공부
1학년 때는 한문을 익혀 승려 생활의 사상 체계를 세운다.
2학년은 '서장' '도서' '절요' '선요' 등 4권을,
3학년은 '능엄경'과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4학년은 '화엄경'을 뗀다.

이 과정을 묘엄 스님은 1952년부터 4년 동안 배운 끝에
56년 경봉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아 비구니 강원 강사
철부지 열네살에 삭발한 후 11년 만의 일이었다.

그 후 운문사 등을 거쳐 봉녕사에는 71년에 들어왔다.
묘엄 스님은 99년 율장 등 불교 계율을 고취하기 위해
율원을 세웠지만 지원하는 학생이 적어 좀 아쉬워한다.

"율원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어려워서도 그렇겠지만,
뭔가에 매이는 걸 싫어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이들
배우고 지키지 않을 경우 허물이 더 커지는 법이니까요."

...................- 당나귀 우화 -.................
당나귀에 안장을 얹어 부처님을 모셨더니
길가던 사람들이 당나귀를 향해서 모두 절.
당나귀가 자기가 훌륭한줄 알고 착각했지요.

당나귀 맘속에 무거운 짐이 필요없다는 생각.

하여 마부가 고삐를 끌어도 움직이지를 않는 겁니다.
마부는 다른 당나귀에 부처님을 옮겨 싣고 가버렸지요.
그래서 분수를 모르면 버림받은 당나귀 꼴이 된다지요."

그러므로 늘 자신을 알고, 겸손하게 살자는 뜻.
......................................................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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