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44. (화엄사. 올벚나무. 화엄사계곡. 연기암. 연기조사. )

donkyhote 2010. 10. 29. 02:03

 

화엄사.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남쪽 산자락의 화엄사.

지리산하면 떠오를 만큼 크고 이름난 사찰.
노고단 자락이 흘러내리다 멈춘듯한 길상봉
그 아래 자리한 화엄사의 건축미가 일품이다.

특히 일주문에서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진입공간에 있는 건축물들
사찰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듯한 진입로의 느낌

사찰 경내 마당에 이르러 고개를 들어 보면
웅장한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바라보이고
그 산세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당당한 건축물

다음으로 빠뜨릴 수 없는 화엄사의 성보는
효대(孝臺) 언덕에 있는 4사자 3층석탑이다.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한 탑
불국사 다보탑과 함께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이형석탑
각황전 뒤뜰 백팔계단 위로 올라 송림에 둘러싸인 이 탑

천년 세월의 벽을 뛰어 넘은 4사자 3층석탑

네 마리 사자가 다소곳이 앉아
머리 위에 탑을 이고 있는 형상
4 사자 얼굴에 새겨진 희노애락

사자는 우리나라에 없는 동물이다.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어 '백수의 왕'
아시아에서 사자가 살 수 있는 곳은 인도

그러므로, 연기조사는 인도 승려
4사자 3층탑이 그 사실을 알려준다.
그로부터 백년후 지눌이 들여온 화엄경

.................화엄경...................
동아시아에서 화엄종을 대성시킨 법장(643~712)
60권본을 바탕으로 〈화엄경탐현기 華嚴經探玄記〉
4세기 중엽 중앙 아시아에서 그 완본이 이루어졌다.

많은 보살이.,가르침을 베푼다는 경전.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명을 만나 도를 추구
선불교와 신유학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선불교 지눌의 선교합일에 결정적인 기여

일본에서도 화엄종은 크게 성행했는데,
동대사(東大寺) 대불(大佛)은 그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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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일대에는 여행할 관광 명소가 많다.
남해대교, 충렬사, 남해 금산 보리암, 해금강
외도, 거제 포로 수용소, 충무공 유적지 등등.

'2박 3일 승용차 여행지로서 환상적 코스.'

예전에 화엄사는 지리산 종주의 들머리 지점.
성삼재 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더욱 그랬다.
화엄사는 백제에서 호국불교의 목적으로 건립.

삼국통일후 통일신라 사찰이 된.,화엄사.
하여, 화엄사 창건연대를 신라 연호에 둔다.
그러나, 근본 뿌리는 백제 불교에 있는 사찰.

중국 왕조들은 불교부흥을 통해 통치권 강화.
백제 역시 왕실 통치권 강화를 위해 사찰 건립.
백제는 국력에 비해 무리할 만큼 화엄사를 건립.

.....................찾아가는 길...................................
노고단 산장 -1Km- 무넹기 -2.5Km- 집선대 -1Km- 중재 -4Km-
제3야영장 -1.5Km-화엄사( 총10Km, 하산 2 +1/3, 등반 3 +2/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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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진주행 밤기차를 타고
다음날 새벽 구례구역에서 내려
역앞에서 국밥 한그릇 사먹는다.

역앞 택시를 타고 화엄사 입구에서 하차.
그곳부터 노고단을 향해 올라가는 새벽길.
화엄사를 지날 무렵이면 떠오르는 시 한수.


낙 화(落花) - 조지훈(趙芝薰) 作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선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 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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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는 지리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
544년(백제 성왕22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
화엄경의 두글자를 본따 지은 사찰이 화엄사.

화엄경은 대승불교 사상의 근간이다.
석가모니불 本佛 = 비로자나불 變化身
화엄사상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초월된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 서로 하나.
서로 원인이고 대립을 초월해 융합된 일즉일체(一卽一切),
즉 하나의 티끌 안에도 우주 시방세계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찰나도 영겁을 품는다는., 화엄경 사상.

하여, 비로자나불은 천엽(千葉) 연화좌에 백억(百億)의 석가
그 변화신(變化身)이 설법한다는 세계관을 부처님이라고 한다.

화엄사는 처음에 해회당과 대웅상적광전만 건축.
그후 643년(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
875년(신라 헌강왕1년)에 도선국사가 또 다시 증축.

임진왜란 때 소실 1630년(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재건.
그로부터 7년만인 인조 14년(1636년)에 복원공사를 완공.

사찰 내에는 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 등과 20동 부속 건물

일주문 지나 약 30˚꺽어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
문수, 보현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르게 건물 배치
천왕문은 금강문과 달리 서쪽으로 빗겨 배치한 것이 특징.

천왕문을 지나 올라가면 보제루에 이르고
보제루 옆을 돌아 대웅전 가는 길이 독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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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물인 각황전
뛰어난 건축술과 조형적인 아름다움
그 앞에 서면 압도 당하는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석등이 있고,
대웅전 마당에는 5층 석탑이 좌우에 있다.
각황전 뒤 동백이 울창한 곳으로 올라가면
사자 네마리가 탑을 바치고 있는 4사자탑.

전설에 의하면 화엄사를 창건했던 연기스님이
어머니를 위해 이 탑과 석등을 조성했다고 한다.
화엄사 뒤로 보이는 웅장한 봉우리는 노고단이다.

지리산 도로를 따라 성삼재휴게소까지 올라가
거기에서 30/40분 걸어가면 노고단의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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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은 지리산 종주 들머리이자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다.

우리나라 10대 사찰, 화엄사(華嚴寺)
백제 성왕 22년(544년) 연기조사 창건.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증축.

그후 의상(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두며
화엄사는 많은 대중이 모이는 큰 사찰이 되었다.

화엄사는 정유재란(1597년) 때 왜병의 방화로 전소
이때 장육전과 화엄경 80권을 새긴 석경(石經)도 파괴.

30년간 폐허가 된 후, 벽암선사가 1630년에 복구하였고,
숙종 25년(1699년)에 계파선사가 각황전을 재건하였는데.
6.25 전란에 부속암자는 폐허로 변했는데 화엄사만 모면.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으뜸인 각황전
각황전 석등, 국보 35호 4사자 3층석탑
일본 벚꽃 원조 올벚나무(천연기념물 38호)

'조선 왕자' 李珖이 쓴 '智異山 華嚴寺'
화엄사-국수등 -중재- 코재-노고단 7km 




올벚나무. 


 

올벚나무

 

 외과수술을 한., 뿌리 부분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 경내에 있다.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175㎡ 1 그루. 정수령 310년. 지정사유 노거수.

올벚나무는 꽃이 매우 아름다운 장미과에 속하는 수종이다.
약 80년 전만 하더라도 2그루가 있었는데 1그루는 베어서 이용. 
벚나무는 칼자루 마구 등 무기의 장식에 쓰이는 귀중한 자원이다.


이 나무를 피안앵(彼岸櫻)이라 하며 벽암선사가 심은 것이라
사홍목(四弘木)이라고도 하며 이 근처에는 여러 수종이 자란다.
서어나무, 동백나무, 팽나무, 갈참나무, 수리딸기 등의 수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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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선사가 불교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을 표시하려 심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세상의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한다."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20의 1 번지 '올벚나무'.
나무높이 15m, 가슴높이 줄기둘레 5m, 가지퍼짐 동쪽 4m,
서쪽 5m, 남쪽 7.5m, 북쪽 2m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

면적 175㎡ 수량 1그루. 정수령 310년.
화엄사 옆 시냇가 근처 암자 앞 바위틈.

올벚나무는 꽃이 매우 아름다운 장미과에 속하는 수종이다.
꽃은 산방꽃차례이며 잎보다 먼저 피고 열매는 6∼7월에 결실

현재 있는 올벚나무는 무기제조 원료로 쓰려고 심은 것.
벚나무는 칼자루·마구 무기 장식에 쓰이는 귀중한 자원.
하여,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벚나무는 무기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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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벚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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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봉개동 산78-1 천연기념물 159호
<지정일 1964.01.31>인 그것은 '왕벚나무'.
올벚나무와 같은 이유로서 천연기념물 지정.

왕벚은 장미과에 속하는 나무로 일본의 국화이다.
꽃은 4월경에 잎보다 먼저 피는데 백색 또는 연홍색
높은 곳에서 자라는 산벚나무와 낮은 곳의 올벚나무

왕벚나무는 우리나라 제주도와 전북 대둔산이 원산지.
왕벚나무는 한 때 일본의 국화라 하여 베어지는 수난
일본에는 왕벚나무 자생지가 없고 우리나라 향토수종.

봉개동 왕벚나무는 제주시 동부산업도로변에 위치.
동서로 100m 쯤 떨어져, 15m 높이 두 그루가 자생.
왕벚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지고 매우 희귀종이다.

왕벚나무는 앵두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 교목

수피가 평활하며 회갈색이고 어린가지에 털이 있다.
꽃은 4월에 피며 담홍색 꽃이 점점 흰색으로 변한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이 7-8cm로서 6-7월에 검게 익는다.

1900년초 프랑스의 타케 신부가 한라산 왕벚나무를 채집
독일로 보내어 왕벚나무 원산지가 제주도로 판정 받았다.
왕벚나무는 해발 500m 쯤 되는 곳에 분포하는 것이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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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화인 왕벚나무는 제주도가 원산지이고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 벚나무는 그 사실을 입증.
무기를 만드는 목재는 가벼워야 하기에 왕벚이 적격.

왕벚은 일본의 세계정복의 야욕을 충족시켜 주는 나무.
일본은 단순하게 왕벚나무의 꽃을 즐긴 나라가 아니었다.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향토수종 올벚나무가 한그루도 없다.

'화엄사의 올벚나무'와 '제주도 봉개동의 왕벚나무.'

일본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우리나라 임을 알리는 나무.
일본의 세계정복 야욕을 우리에게 항상 일깨워주는 나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두 벚나무는 우리나라의 자존심이다. 




화엄사계곡 


 

 


투명한 화엄사계곡

 


 


화엄사계곡 = 화엄사 - 국수등 - 중재 - 코재.
불교문화 최고 탐승지이자 지리산 종주 시발점
성삼재 도로 개통 후 조용한 산행 코스로 변모.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9km는 4시간 도보 거리.
거의 일자로 뻗은 계곡은 굴곡이 심하지 않아,
코재(무넹기고개) 근처부터 숨가쁜 돌밭 비탈길.

'코가 닿을 듯 급경사라., 코재!!!'

중재에서 집선대 거쳐 코재 오르는 돌밭길.
소가 달구지 끌고 오르듯 거세게 품는 콧김
80리터 배낭메고 돌밭길 오르다 보면 힘들다.

중재를 지나면 멀어졌던 계곡이 가까워진다.
이곳부터 투박한 돌길이 열리며, 가팔라진다.
등산로 오른편 자그마한 폭포 집선대는., 샘터.

집선대에서 눈썹바위에 이르는 2㎞의 돌밭길.
그 탓에 코재는 '덜거덕골'이란 또 다른 이름.
앞 사람 궁둥이가 코에 걸린다 하여 '궁둥이 골.

'코재 = 덜거덕골 = 궁둥이골.'

이 힘든 길을 오르면 전망 좋은 휴식처 눈썹바위.
볼일보는 등산객 뒷모습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곳.
눈썹바위에서 좀 더 비탈길을 오르면 무넹기 고개.

경사 급해 힘든 너덜지대라.. 집선대.
코가 땅에 닿을 듯 가팔라 힘든.. 코재.

무넹기는 노고단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
원래, 심원계곡으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개울 물줄기를 화엄사계곡으로 넘겨 무넹기

무넹기 넘어 성삼재 도로와 마주치는 곳
그 길 따라 걸으면 노고단 산장이 나온다.

요즘, 천은사 - 성삼재 - 달궁 도로가 개설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사람이 더 많다.
화엄사계곡 등산로는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실제로 화엄사 입구에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코재 가파른 비탈지나 무넹기 고개에 올라서면
성삼재에서 노고단가는 길을 만나면 허탈해진다.

'성삼재까지 노고단까지 40분 도보거리.'

성삼재 주차장에 주차하고 산책하는 젊은 여성들.
미니스커트 차림에 양산 든 모습도 마주치게 된다.
화엄사부터 묵직한 배낭을 멘 등산객과 비교가 된다.

어느 산이든 걸어 올라야 느낄 수 있는 산행의 묘미.
화엄사계곡 코스 독특한 경관은 한번쯤 찾아 볼만 하다.
이 코스의 산행기점은 화엄사 집단시설지구가 있는 황전리.

구례읍에서는 군내 버스로 10분 만에 닿는 위치.
황전리 지구는 지리산에서 가장 정비가 잘 된 곳.
상가, 식당, 콘도, 민박업소, 야영장이 조성돼 있다.

매표소 안쪽에는 지리산 유일의 프라자 호텔도 있다.
원래, 여관촌은 사찰 입구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아래.
현재는 '시의 동산'이라고 하여 시비들이 세워져 있다.

여관촌은 매표소 바깥쪽의 집단시설지구로 끌어내고,
예전에 없던 호텔과 콘도 건물은 매표소 안쪽에 신축.
그 뜻 이해 어렵지만 산행은 황전리 버스종점에서 시작.

화엄사 절 옆에서 운영하는 반야다원(061-782-0096)
계곡 따라 왼쪽으로 반듯하게 자연석이 깔린 등산로
취사 야영 금지 조치로 폐쇄된 야영장 지나 된 비탈.

국수등 지나 중재에 이를 즈음 가파른 계단길
이 계단을 올라서야 노고단 능선이 좀 보인다.
그러나 이도 잠시, 다시 숲의 터널로 접어든다.

중재에서 멀지않은 집선대폭포 지나 코재 급경사
몇 번 쉬며 오르면 성삼재에서 노고단 가는 도로
능선과 만나는 곳에 목조로 지어진.. 넓은 전망대.

화엄사주차장→(2.0km)→화엄사→(2.0km)→
연기암사거리→(0.5km)→참샘터→(1.0km)→
국수등→(2.0km)→눈썹바위→(0.2km)→코재→
(1.0km)→노고단대피소→(0.36km)→노고단고개




연기암.




화엄사 일주문 앞에서 오른쪽 화엄교 지나
4km 쯤 오르면, 노고단 연기암이 나타난다.
멀리 아련하게 흐르는 섬진강이 보이는 암자.

해저물고 구례읍 불빛들이 보석처럼 빛날때
밤하늘에도 별빛이 쏟아져 내릴듯 반짝인다.
연기암 풍경소리에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른다.

'연기암을 창건한 인도의 승려.. 연기조사.'

연기조사가 지리산에 처음 자리잡은 곳이 연기암.
그후 화엄사,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을 창건.
지리산 곳곳에 사찰을 열어 화엄사상을 널리 폈다.

연기조사는 문수보살 화엄사상을 널리 편 인도 승려.

당시 국제 도시 경주의 황룡사에서 화엄경을 설했다.
그러던 어느날, 성모산 지리산에서 본 문수보살 모습.
예전에 꿈속에서 만났던 그 후덕한 부인의 모습이었다.

결국 연기조사는 그 부인 형상을 본곳에 암자를 짓고
고향의 어머니를 모셔와 지리산에 자리잡은 곳이 연기암.
그후 연기조사는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아 화엄경을 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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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 삼천 제자가 가르침을 이어 꽃핀 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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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조사 



신라 진흥왕 5년(544) 연기조사가 창건한 화엄사.
연기조사는 범승(梵僧), 즉 인도 스님이라고만 기록
그에 관한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도리가 없다.

연기암에 인연을 세웠다고 하여 <연기(緣起)>로 쓰지만
<연기(烟氣)> 혹은 <연기(烟起)>라고 쓴 기록도 없지 않다.
화엄사를 창건할 때 해회당과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지었다.

연기조사가 창건 당시 화엄사는 소규모 절 집이었을듯.
화엄사 창건 100년 후 신라 선덕여왕 11년(642) 크게 증축.

자장율사가 연기조사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사사자탑과 함께 석등을 세운 것이 창건 당시 기록의 전부.

연기조사는 왜 신라 경주에서 백제 구례로 왔을까?

문수보살께 화엄을 널리 펴겠다는 원을 세운 때문.
하여, 멀리 타국으로 건너와 경주 황룡사에서 설법.

그러던 어느날 문득 비몽사몽간 한 모자를 만났는데,
후덕해 보이는 여인의 손을 잡고 온 귀여운 동자 왈.

"본디 스님께서 제 앞에서 세운 원(願)은
널리 화엄의 가르침을 펴는 것이었는데,
어찌하여 새 인연처를 찾지 않으십니까?"

그말을 남기고 난 후 홀연히 사라진 두 모자.
연기조사는 새 인연처를 찾아 지리산에 입산.
아름다운 지리산 경치에 취해 있던 연기조사

멀리 보이는 봉우리들이 한 부인의 모습과 같아
자세히 보니, 예전에 황룡사에서 만난 부인 모습.

그때서야 연기조사는 그곳이 새 인연처임을 깨닫고
어머니를 모셔와 그 부인의 형상을 보았던 산등성이에
조그만 암자를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연기암이다.

그후 직접 친견했던 지리산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아,
널리 화엄일승지도를 펴며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 지리산 곳곳에 사찰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