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39. ( 원효대사. 설총. 경주 최부자집. 요석궁. )

donkyhote 2010. 10. 18. 01:39

원효대사.



원효(617-686)는 한반도 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聖師).
세계 불교사에 있어서도 원효의 위치는 찬란하게 빛난다.

이름 그대로 민족의 첫 새벽을 열어간 원효
그의 저술은 100 여종 240여권(또는 86부 180권)
법화경종요, 대승기신론, 화엄경소 등 수많은 불전.

그는 거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고
석공들의 쇠칼과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고,
<화엄경>에 대한 해설서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하기도 하는 등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태도가 없었다.

신라의 승려인 원효는 617년 진평왕 때 경북 경산 출생.
남달리 총명해 10세 출가 때부터 스승따라 경전을 배웠다.
15세에 불교의 진리를 담고 있는 삼학에 능통하게 되었고
화랑으로서 여러 전투에 참가하며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삶에 대한 반성과 속세의 허무감 때문에 승려가 되기로 결심
29세에 황룡사에 출가 불교통합과 실천을 통한 대중화에 심혈.

34세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 요동까지 유학갔다가 실패.
현장 법사와 규기 화상에게 유식학을 배우려다 첩자로 몰려
여러 날 옥에 갇혀 고생하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돌아왔다.

10년 후 45세 때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 시도.
백제 항구로 가는 도중에 비를 만나 산속 토굴에서 하루 밤
토굴속 고인 물로 갈증을 해소했는데 물맛이 달고 시원했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묘지.
물을 떠서 마시던 그릇은 해골이고 마신 물은 인골 썩은 물.
이 때 해골에 괸 물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깨닳음.

"모든 깨달음은 마음속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유학을 포기
그가 깨달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주려고 애썼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중생을 구제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불교는 대중에게 널리 전파
신라가 삼국통일하는 정신적인 기둥이 되었다.

그는 항상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로 노력하여
유학, 불교, 도교에 대해 많은 지식을 쌓았다.
성인이 되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
원효는 경학뿐 아니라 유학도 당대 최고의 선지식.

한 때 파계하여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았고
'무애가'를 지어 부르며 대중속에 파고들어 불교 전파.
당나라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하여 존경
우리나라 불교사상 가장 훌륭한 승려로서 추앙 받고 있다.

원효의 사상에는 일심사상, 화쟁사상 그리고 무애사상.
일심사상이란, 모든 진리는 결국 하나의 진리로 통한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화쟁사상이란 두 가지 이상의 다른 견해가 있을 때
서로 다른 견해를 융섭의 이념에 의하여 화해시키고
회통시켜 큰 법의 바다로 귀납시키는 것이 화쟁사상.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이 아닌 하나로서 보았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 자유인이 되었으며,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한 독자적인 사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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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대서문 방향에서 오르면 왼쪽이 원효봉이다.
대서문 오른쪽 의상봉과 좌청룡 우백호처럼 마주본다.
원효와 의상이 어린 시절 동문수학하며 수도를 하던 곳.

원효봉은 원효의 서민적인 사상세계를 깨닫게 하는 산세.
의상봉은 의상의 학처럼 고고한 기품을 깨닫게 하는 산세.
원효는 의상과 더불어 한반도 불교 역사상 최고의 고승이다.

원효의 관념에서 보면 유교 불교 도교는 셋이 아닌 하나.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이조 초반까지 그 맥은 이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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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는 차를 즐겨마신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신라시대에 차 문화가 성행했음을 알수 있는 증거.
우리나라에 차가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김해 김씨 후손들은 가락국 시대에 들어왔다고 믿고있다.
차 잎이 움트는 3월 가락국 왕궁에서 제례에 사용했단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661년 신라 30대 법민왕
수로왕 제사때처럼 술과 단술을 만들고, 떡, 밥, 차 과자
따위의 제수로 제전을 거르지 않게 했다는 기록에 근거.

이 기록을 보면 이미 가락국에 차가 존재했다는 증거.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차씨.
우리나라 최초 차 문화는 가락국에서 시작된 듯 싶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와
왕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고 이때부터 차문화가 성행했다는 기록.
신라의 차는 떡차, 가루차, 잎차가 있었는데 떡차를 많이 마셨다.

서기 640년 선덕여왕은 화랑들과 다유회를 즐겼다.
떡차를 마시면서 화랑들과 담소를 나누었다는 기록.
차는 신라 사회 깊숙이 중요한 문화로 자리잡은 듯.

신라 화랑들은 경포대 하송정에서 차를 끓였다는 기록.
<남행월일기>에 원효대사와 사포스님에 관한 차이야기.
원효대사를 모시던 사포 스님이 원효 스님께 차를 공양

신라에서 차를 즐긴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로는 원효대사,설총,
지장법사, 보촌과 효명태자, 최치원, 충담사, 월명스님 등이다.
오늘날 스님들이 차를 즐겨 마시게 된 유래는 신라시대부터 인듯.




설총.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
아버지는 원효, 어머니는 요석공주.

태종무열왕 때인 654~660년 출생.

천성이 명민(明敏)했으며
경사(經史)와 문학에 능통.

〈삼국사기〉열전 제6에
설총이 신문왕의 요청으로
우화를 지어 들려 준 내용.

"국왕에게 아첨하는 여인의 애교보다
정직한 신하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것"

전제정치 하에서 유교적인 도덕정치 이념을 주장
설총은 6두품 출신으로서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총애와 신임을 얻어 정치적 진출을 이루었다.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의 장인 경(卿)이 설치되자
국학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정식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설총은 이러한 국학의 설립과 교육에도 크게 공헌한 듯.

그는 구경(九經)을 우리말(方言)로 읽어
학생들에게 강론해 유학 발전에 기여했고,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을 만들어서
당시 중국 학문 섭취에 도움을 주었다.

후세, 특히 고려 말기에서 조선시대로 들어와
설총이 우리말로 경서를 읽는 방법을 발견했다.
하여 이를 이두(吏讀)의 창제로 보는 견해가 대두.

그러나 이두 기록이 이미 그전부터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설총은 이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정리 집대성한 듯 하다.
글을 잘 지었다고 하나, 비명(碑銘) 몇 점 외 남아있지 않다.

'오늘날 그의 저서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719년(성덕왕 18)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를 지었다.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경상남도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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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유교학자.
신라 때 이두문자를 집대성해 한글이 있게 한 학자.
원효대사는 어떤 사연이 있어 설총을 낳게 되었을까?

두 사람의 사랑은 우리나라 역사 상 10대 로멘스.
원효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위는 아픔을 겪었다.
남다르게 정 깊은 심성이라 전투와는 거리가 먼 원효.

'화랑의 길을 택했다가 중도에 황룡사 행.'

불교에 심취하며 승려가 되며 이름도 원효로 바꾸게된다.
고승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고 많은 것을 배우려던 원효.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동굴 속에서 하룻밤을 잔다.

동굴에서 달게 마신 샘물이 다음날 보니 인골 뼈속의 물.
인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유학을 포기한다.

그후 어려운 중국 불경 서적들 해석에 일가견
무열왕은 그 높은 인품과 실력에 감복하게 된다.
하여 국가적인 행사에는 꼭 원효를 부르게 되었다.

때로는 먼발치에서
때로는 가까이에서
원효를 본 요석공주.

공주는 사모의 정이 나날이 깊어가지만
원효가 승려였기에 애달픈 심정만 가득.
마침내 원효에게 모란꽃과 승려복을 선물.

원효는 공주의 속마음은 읽었지만
승려라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공주는 고민끝에 연모의 정을 아버지 무열왕께게 토로.
만약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고 싶다고 고백한다.

무열왕은 딸인 요석공주의 고백을 듣고서 난감한 입장.
한편, 원효도 공주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려 답답함
거리를 방황하며 뜻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다닐 정도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나.
하늘을 바칠 기둥을 찍어 내려네."

거리의 사람들은 원효의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원효의 뜻모를 말은 얼마 후 무열왕에게도 전해졌다.
무열왕은 그 말을 듣고야 원효의 속마음을 짐작한다.

'혹시, 원효가 아들을 낳으려는 뜻 아닐까?'

'나라에 큰 인물을 얻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으랴.' -진평왕.

무열왕은 신하에게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라 명.
신하는 남천 다리에서 만난 원효를 개울에 빠트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까운 요석궁으로 원효대사를 인도.

일찌기 남편을 백제 전투에서 잃고 홀로 지낸 공주.
남천에서 가까운 요석궁은 요석공주가 홀로 사는 곳.
원효는 그곳에서 젖은 옷이 마르기까지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젖은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던 원효.

원효의 젖은 옷을 벗게하고 새옷을 내민 공주.
그동안 서로의 마음속 연민의 정이 봇물 터지듯.
꿈과 같은 3일 동안을 요석공주와 함께 보낸 원효.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설총.
그후 하늘을 떠받칠 재목이 된 설총.
하루밤 사랑이지만 역사에 남는 로멘스

그후 원효대사는 어디로 떠난 것일까?

소요산 계곡의 바위벽 석굴 옆 원효폭포
그곳에서 속리교 건너 오른쪽 정상 공주봉

그후 원효는 속복으로 바꿔 입고 소성거사라 자칭.
많은 중생을 교화하며 불교를 대중화시키는데 전념.

그후 원효대사는 소요산에 와서 은둔
그 은둔처가 자재암 앞 석굴인 나한전.

요석공주는 공주봉 밑 별궁에서 살면서
설총으로 하여금 매일 일주문에 나아가
원효대사가 은둔하고 있는 석굴을 향해
절을 하게 했다는 봉우리가 바로 공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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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요석궁은 어떤 곳으로 변했을까?

이조 말엽에 경주 최씨 가문에서
옛 요석궁 자리에 저택을 지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람을 하며,
나라 잃은 울분을 달래며 경주를 찾았을 때,
이들은 대부분 최씨 집을 방문하여 머물렀다.

최씨 집에 머물며 대접받은 전통요리.
그 맛과 멋으로 입소문이 나게 되었고
그 솜씨는 더욱 더 유명해지게 되었다.

고종황제의 아들인 이강 왕자는
훌륭한 음식을 즐기며 머물렀단다.

지금은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멋이 배인 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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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요석궁의 뜰악의 운치있는 소나무
그 아래에 앉아 여름날 먹는 팥빙수 한그릇
그것만으로도 경주 여행에서의 커다란 즐거움.

이조시대 300 년간 만석꾼 최부잣집 경주 고택.
그 요석궁 터는 원효가 공주와 만나 사랑을 나눈 곳.
남천 개울을 지나다 빠진 원효가 젖은 옷을 말리던 곳.

그 공주가 신라 진평왕의 둘째딸인 요석공주.
평소 원효를 흠모했고 불심이 깊었던 요석공주

원효는 젖은 옷을 말려주던 공주와 사랑.
그곳에서 3일간 머문후 요석궁을 떠난 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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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 시원한 팥빙수의 맛과 같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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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신라 경덕왕 때 학자.
6두품 출신에 관직은 한림. 신라 십현(新羅 十賢),
경주 설씨의 시조이고 출생시기는 태종 무열왕 대.

삼국통일 전후 무학은 왕실, 귀족 서민도 인도할 대상
원효는 설총을 낳고, 승복을 벗고, 小姓居士라고 자처.
그러나 그 파계의 소생이 우리나라 최초 유교학자 설총.

공자에서 유래된 유교 이념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상.
석가모니로부터 유래된 불교는 중생을 잘 제도하는 종교.
신라 왕실에서부터 불교와 유교가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더럽고 깨끗함이 둘 아니고,
진리와 세속이 본래 하나이다."

이미 그것을 깨달은 원효에게 성(聖)과 속(俗)의 구별은 무의미.
당시의 승려들은 대부분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귀족생활.
그러나,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 시장 뒷골목을 세속인 모습으로 다녔다.

'누가 그런 원효를 국사로 알았을까?'

그는 겸손한 성자였고 민중의 벗이었다.
천민, 부랑자, 거지, 어린이까지 따랐다.
그는 아직도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국사상.
그 새벽을 열어 놓은 인물로 여전히 살아있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다.
무릇 중생의 마음은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바다
모두가 다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

그는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있다고 보았고,
그는 어느 한편의 종파에도 치우친 적이 없었다.
통일신라 불교의 대중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
원효대사는 의상대사와 쌍벽을 이루는 고승이었다.

태종이 궁리(宮吏)에게 내린 왕명(王命)을 기록한 칙(勅)'
설총은 7세기 650 년경 경주 요석궁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던 요석궁이 오늘날., 최부자집




경주 최부자 집.




최씨는 우리나라 역사 상 가장 오랜 씨족 중에 하나
최씨는 역사상 많은 인재를 배출한 전통있는 명문가문.

최씨 특유의 '기개, 신념, 절조, 최고집'을 비롯
"최씨앉은 자리에 풀도 안난다 " 등 애칭도 낳았다.

최씨 원조는 신라 전신인 사로 6촌 중
돌산 고허촌 사량부 촌장 소벌도리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57년경 유민들이
여러 산골짜기에 살며 여섯 마을을 이루었다.
신라 3대 유리왕 9년(32년)봄, 6부를 개정한다.

알천 양산촌장 알평에게는 이씨[李氏].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에게는 최씨[崔氏],
무산 대수촌장 구례마에게는 손씨[孫氏],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에게는 정씨[鄭氏],
금산 가리촌장 기타 에게는 배씨[裵氏],
명활산 고야촌장 호진 에게는 설씨[薛氏]

각각 성을 내려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엔 6촌장이 하늘에서 내려온 기록.

그러나 실제 시조는 소벌도리의 24세 손이며,
신라 말기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을 주축
선대 및 후대에서 분파되었다고 보면 정확하다.

문헌에 의하면 최씨는 387본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거의가 지명이고 실제 시조가 확인된 것은 43본이다.

소벌도리 24세손 최치원 윗대에서 분파된 본관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군옥파)가 있고,

최치원의 후대에서는 함양, 청주,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탐진, 전주(순작,균)
분파 기록으로 보아 거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 후손

경주 최씨를 원조로 하는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최씨 후예가 틀림없다.

신라시대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3이 당나라에 유학
최치원 같은 문장가는 동양사에서 보기 힘든 지성(至聖)
고려사를 보면 서기 1196년~1258년까지 60여년간 군벌정치

한때 최씨 왕국을 방불케했고 명장 최영 장군이 그 한 예.
국내 혼란기마다 평정하여 시련을 극복하고 나라에 공헌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은 최씨 가문의 특성이다.

경주시 교동 최부자집은 12대 만석군, 10대 진사로 유명.
문공부가 1969년 신라의 집으로 선정하고 보존하기로 했다.
마지막 만석군 최준은 이조 청백리 정무공 최진립의 11세손

상해 임시정부에 100억원(현재 기준)을 보내어,
백범 김구선생이 제일 먼저 만나보고 싶어했다.

당시 최준은 조선총독들이 문교부장을 요청했으나
끝내 거절하였고 특히 육영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 예로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였고
보성전문(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 건립 등등의 업적.

이조 명종, 선조, 인조 등이 내린 전교.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 이학 시조
그의 자손들은 귀천을 불문하고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마라"

이렇게 대대로 나라에 공헌하고
근대사회 발전에 앞장선 최씨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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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푸는 삶.'을 실천한 참다운 부자.. 최부자 집 가문.
전란 위기마다 가난한 이웃이 앞장서 보호했던 최부자집
최부자집의 전통을 통해 부(富)의 참 가치를 조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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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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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3대를 못 간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경주 최부잣집 만석꾼 전통은 무려 300년
1600년대 초에서 1900년 중반까지 12대로 이어졌다.
1950년 전 재산을 영남대 전신 ‘대구대학’에 기증

미래 한반도 역사에도 길이 남을 본보기..전통.
300년 넘게 부를 유지한 비결은 최부잣집..가훈.
황금만능주의 현대사회에서 가슴에 손을 얹게 한다.


최부자 집 가훈

절대 진사(제일 낮은 벼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높은 벼슬은 당쟁에 휘말려 가문이 화를 당한다는 뜻.

재산은 1년에 1 만석(5천 가마니) 이상을 모우지 말라.
지나치게 재산을 모우다 보면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뜻.'

1 만석 이상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하라.
2. 나그네가 찾아오거든 누구이든 후하게 대접하라.
3. 흉년에는 어려운 이웃들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흉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남이 싼값에 내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

4. 며느리가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새 며느리 스스로 어려움을 겪고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는 뜻.

5. 사방 100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양식을 풀어라.
결국, 그로 인해 동학란 여순반란 사건에서도 무사.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 최준(1884-1970)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시대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노스님에게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은 때문.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나누어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이조 말 활빈당조차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는 최부잣 집.
일제 때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댄 백산상회.
해방후 김구 선생이 최부자 가문에 고맙다고 치하할 정도.

부산 백산상회가 부도위기에 몰릴 만큼 독립자금 지원.

일본 식산은행 총재조차 부도처리하지 못했던 백산상회.
우리나라 민족의 신망을 받을만큼 민족기업이었던 때문.
백산상회가 부도나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욕먹기 때문

최부잣집은 해방 후 전재산을 교육기관 설립에 투자.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이 훗날 '영남대학교'.
교수들에게 무척 많은 월급을 주는 학교로 유명

훗날 영남대학교은 이병철 회장이 인수한다
그후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박대통령에게 기증.
하여, 설립자를 박정희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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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교동 69번지 경주 최씨., ‘교촌가(校村家)'
10대에 걸쳐 만석 재산을 유지해 온 경주 최씨 일가

18세기 요석궁터에 지었던 99칸 고택에 대지 2000평,
후원 만평에 달했으나 해방 후 대지1000평에 건물 5채
그나마 1970년 원인 모를 불로 별당과 사랑채를 잃었다.

2006년 복원으로 옛 모습을 되찾은 사랑채 36평

구한말 영덕 출신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피신 왔었고,
최익현(崔益鉉)이 의병 수백 명과 함께 며칠 묵었던 곳.
일제시대 스웨덴 구스타프 국왕이 왕세자 시절에 묶었다.

의친왕이 엿새 머물고 집주인에게 준 '문파'(汶坡) 호
이 고택의 집주인 최준은 최치원(崔致遠) 28세 손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은 말라’,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 재산을 늘리지 말라’,
‘사방 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의 가훈을 받들어 일제 때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제공하고,
광복 후에는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의 설립에 전 재산을 기부.
영남대는 교촌가 고택을 한국 전통문화 교육의 장으로 쓸 방침.

 

 

 

요석궁.

 

 

 

신라 29대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거처하던 요석궁터,
300년 된 경주 최부자 집 99칸의 일부에 있는 한정식집.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연이어 만석을 한 가문.
 
반월정식(점심 2만원)은, 물김치와 북어보푸라기, 밥식해,
가자미조림, 두부선, 표고찜, 홍어삼합, 밀쌈, 떡갈비 등이
한차례 나오고, 마늘장아찌와 멸치볶음, 장떡, 콩잎장아찌,
무장아찌 등 20여 가지 반찬이 다시 나오는 전통음식 표본.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부자집의 전통음식과 가풍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음식점.

 

 

 

 

 

 

 

 

 

입구에 들어서자 고가의 풍취와 들어

열개문이 반갑게 맞아주는것 같다.

 

 

 

 구절판 - 신선로와 더불어 전통 한정식집에선 빠지지 않는 메뉴이지만 사실 맛은 그닥...

 샐러드

 삼합 - 전라도가 아닌 곳에서 삼합은 의외.

          홍어의 삭힘 정도가 약해서 홍어를 잘 못먹는 내가 먹기엔 매우 좋았음

 도미찜

 물김치와 나물

 김치

 김치

 멸장, 집장, 육장 - 최씨 집안에서 조선시대 때부터 먹었다는 반찬

                          

 

 장어구이 

 

 전복 조림 

 

 저거 이쑤시개만 꽂으면 꼬치구인데...

 가오리찜

 튀김 

 

 약선주 -  찹쌀에 상황버섯, 여러가지 한약재로 담은 술

 

 

  신선로

 

 문어 고추장 볶음

 

 메로 구이 

 

 밑반찬들

 잡채

 갈비찜

 역시 밑반찬들

 파전

 굴무침과 아마도 돌나물

 간장게장 - 먹을 만은 했는데 마산게낙찜보다 약간 더 짜고 비림

 초생강과 명란젓

 고등어 우거지 찌개

 된장찌개

 밥과 미역국

 해삼창자 젓갈.

 

  영광굴비

 

 누룽지

복분자 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