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36. ( 운조루. 중대마을. 두지바우. 사도세자. )

donkyhote 2010. 10. 18. 01:34

운조루.


 

문수사 가는 길 입구에 있는
이조시대 99칸 양반가옥 운조루.
운조루 이름 속에 담겨진 숨은 뜻.

'구름 속으로 새가 숨은 듯한 누각.'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글귀 중 구름 雲, 새 鳥.를 따., 운조루
8대에 걸쳐 가보인 돌거북은 1989년 도난

영조로부터 박호장군 호칭을 얻은 유이주
그가 잡은 호랑이 가죽을 영조에게 바쳤고
호랑이 뼈는 운조루 홍살문 위에 걸려 있다.

원래 호랑이뼈는 잡귀 침범 방지용

민간에서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고
남편 바람기를 잡는데 효험이 있다하여
방문객 여인들이 긁어가 수난을 겪고 있다.

원래 1776년 무관 유이주가 지은 가옥 사랑채가 운조루.
현재 70 평(옛날 99칸) 가옥과 1000평 대지 전체를 운조루.
하인들이 거처하는 일(一)자형 24칸 행랑채는 대문을 겸한다.

운조루 사랑채는 T자형으로 지었고,
손님을 맞는 내사랑인 귀거래정이 6칸,
주인이 거처하는 외사랑인 운조루가 16칸.

정남향 사랑채 툇마루에 앉으면, 기와지붕 너머 오봉산
처마 깊숙이 스며든 겨울 햇살이 따사롭게 느껴지는 곳,

운조루 대청과 누마루는 궁궐건축의 영향.
한옥이 갖는 소박한 멋을 잃지 않고 있다.

...................................................
...................................................

'앞으로는 선짐강 뒤로는 지리산'
'배산임수(背山臨水)' 산세의 명당.
구름 속을 나르는.. 새가 산다는 집.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다 지치면 둥지로 돌아올 줄 아네' -도연명.

축성에 남다른 조예가 깊어,
말년에 수원 유수를 지내며
수원 화성을 축조한 공로로
정 2 품 자헌대부까지 특진.

유이주(柳爾胄,1726~1797))

1776년에 지은 아흔 아홉칸 전통 양반가옥.
현재 중요 민속자료 8 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조루를 더욱 빛내주고 있는.. 뒤주 하나.

유이주 8세손 건축공학자 전북대 유응교 교수
그가 지은 시 他人能解 속의 '운조루의 뒤주'.

조선조 아흔 아홉간 옛 주인은
백미 두 가마니 닷 되가 들어가는
나무 쌀통에 쌀을 담아놓고/

끼니를 끓일 수 없는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빼 갈 수 있도록
쌀독 아래에 구멍을 낸 뒤에
그 마개에 他人能解라고 써 놓고

타인이라도 누구나 마개를 쉽게 풀 수 있다 하였으니
그 음덕 입지 않은 이 없었네/… 중략…

운조루 중문간 헛청에
석양빛만 가득 보듬고
외로이 서 있네

11대 200여년을 그대로
지키는 종부를 맞이하면서…

-시 <他人能解> 중에서-


유이주는 한 달에 한 번씩 뒤주에 쌀을 채웠다.
그의 농지에서 수확되는 이백여 석의 소출 중에
매년 삼십여 가마가 가난한 이웃을 위한 식량.

또 이 뒤주를 주인이 안 보이는 헛청에 놓아두어
얻으러 오는 사람들의 자존심까지 배려했던 것이다.

이조 후기 영정조 시대로 노론 소론 등의 당쟁이 극심
임금이 탕평책을 쓰고 심지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이십 팔 세 나이에 죽임을 당할 만큼 나라가 어지러웠다.

기록에 나와있는 것은 없지만
유이주는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운조루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한듯.

운조루 이름에서 그렇게 느껴진다.

사도세자와 같은 시대의 살았던 사람으로서
뒤주에 구멍뚫어 숨통을 트게 하고 빈민 구제
사도세자의 원혼을 조금이나마 달래려 했던 듯

운조루는 만석꾼 사돈 후원으로 건축하게 되었다
유이주 음덕으로 동학란 여순 반란사건에도 건재.
그리고 6,25전쟁 등의 회오리 바람에서도 무사.

이웃 사랑을 실천했던 아름다운 뜻이 더욱 빛난다.

고위직에 있을 때 더 많은 부를 축적해서
자손만대까지 영화를 누리겠다고 혈안이 되어
동분서주하는 이들에게 보이고 싶은 운조루 뒤주.

현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윤리가 이러한 선비정신
운조루를 지은지 230년 세월이 흐른 동안 집은 쇠락.
그러나, 천왕봉보다 높고, 섬진강 물빛보다 고운 기품.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명당
........


풍수지리에서는 혈장(穴場) 부근이 길지.
혈(穴)은 생기(生氣)가 결집하는 곳이다.
이 생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간 길지가 명당.

흔히, 명당(明堂)을 명당(名堂)으로 잘못 표기
이름난 곳이 아닌 밝은 기(氣)를 가진 곳이 명당.

음냉하고 습한 곳은 좋지 못한 땅이며,
밝고 따뜻한 곳이 좋은 곳이고 곧 명당.
남향집 선호는 곧 풍수지리적 사고방식.

한반도에서 명당을 이루는 근원은 백두산.

따라서 백두대간 기의 흐름이 원활해야 명당.
명당은 혈로 비유되는 여성의 젖꼭지 중심 산세.
아기가 안겨 젖을 빨고 잠드는 어머니 품이 명당.

따뜻하고 포근한 산세가 명당의 기본.

흔히 좌청룡, 우백호는 명당 조건의 대명사
그러나, 땅의 기운에 생기가 있어야만 명당.

한양은 주산인 북악산을 중심으로
동 좌청룡 낙산, 서 우백호 인왕산,
안산으로 남산, 조산으로는 관악산.

경복궁은 혈처(穴處), 4대문 안은 내명당(內明堂),
4 대문을 둘러싼 강북지역은 외명당(外明堂)이 된다.
또한 명당은 산뿐 아니라 물도 산에 조화되어야 한다.

서울 4대문 안을 흐르는 청계천은 명당수
한강은 명당 밖을 감싸 흐르는 객수(客水)
한양은 산수(山水)가 조화된 밝고 따뜻한 곳.

'사람의 삶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곳이 명당.'

운조루 집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환락지(金環洛地)
사랑채는 4칸 몸채에 뒤쪽으로 꺾여 이어진 2칸의 날개.
몸채 왼쪽 끝 1칸은 내루형(內樓形)으로 기둥 밖으로 난간

사랑채는 궁전 침전에서와 같이 완전한 누마루 형식
여기에 대청이 있고 안채 통로를 겸한 큰 부엌이 마련
더구나 전체 살림을 한 눈에 관찰하도록 되어 있어 특이.

운조루의 건축적 특징은 누마루방이나 누다락방
궁전 형식이지만 소박한 멋을 잃지 않고 있는 점.

운조루 = 지리산 미녀 + 금환락지.

풍수지리에 의하면, 한반도는 절세의 미인 형국
구례는 무릎꿇고 앉은 미녀의 옥음(玉陰)에 해당.
그녀가 금가락지를 풀어놓은 명혈(名穴) = 금환락지.

금가락지는 여성들이 늘 간직하고 있는 정표.

성행위를 할 때나 출산할 때만 벗는 것이 상례
가락지를 풀었다는 것은 곧바로 성 행위를 상징.
금환락지는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곳.

원래,토지면(吐指面)은 금가락지를 토해 냈다는 뜻.
현재, 토지면(土旨面)은 풍수지리에서 비롯된 지명.

지리산 선녀가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 감으려다가 금가락지를 떨군 금환락지
그때 비녀도 떨어뜨려.. 금잠락지(金簪落地).

노고단에서 흘러나오는 신령스러움
월령봉을 타고 내려온 노고단의 용(龍)
왕시루봉과 어우러져 섬진강을 품은 모습.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이고
안산으로는 오봉산이 춤추듯.

이곳은 우리나라 풍수지리가 태어난 탯자리.
구례에서 금환락지를 찾아가기 바로 전 마을.
상사리(上沙里)와 하사리(下沙里)는 장수마을

도선국사가 풍수지리 이치를 깨우쳤다는 곳.
도선국사가 모래밭에 그림그린 사도리(沙圖里)

금환락지는 다섯 가지가 아름다워 오미동(五美洞)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의 산들이 다섯 별자리가 되어 길하고,
물과 샘이 풍족하며, 풍토가 윤택한 아름다움.

구례 오미동에 금환락지와 더불어 3대 진혈(眞穴)
금구몰니(金龜沒泥)와 오보교취(五寶交聚)가 있다.
유이주 집터는 금거북이가 진흙에 묻힌 금구몰니 명당.

집터에서 어린아이 머리 크기만한 돌거북이가 출토

그래서 집을 앉힐 때 습한 곳에 부엌을 배치.
거북이가 말라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

오보교취는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5 보물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명당.

오미동 구만리 들에서 상대 중대 하대
주민들은 자기네 고을이 명당터라 주장.

상대 : 금구몰니 = 운조루 안채 터
중대 : 금환락지 = 운조루 행랑채 밖 연못
하대 : 오보교치 = 토지면 소재지에 있는 돌탑

한편, 환동(環洞) 박 부자 집터 역시 금환락지라고 주장
원내리(垣內里) 주민들도 마을을 하대 오보교취라고 생각
금내리(金內里) 주민들은 금환락지가 금내리라고 생각한다.

오미리 일대는 모두가 풍수촌 명당 마을.
관청과의 거리도 멀어 횡포로부터도 안전
난세에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몸을 숨길 곳.

두마리 학이 춤추고 있는 쌍학지지(雙鶴之地)
하여, 옛부터 청학동으로 알려지기도 했던 곳.
동학혁명에 실패한 농민들이 이상향을 찾던 곳.

'화전을 일구며 이상향을 건설하려 했던 문수골.
14연대 반란군이 토벌군에 쫓겨 들어왔던 문수골.
현재 문수골은 방사한 곰을 비롯한 야생동물 천국.

문수골에서 명당터로 알려진 운조루.
금환락지 명당터로 알려진, 중대마을.
지리산녀가 살던 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중대마을.



백제 개로왕이 사냥 왔다가 여인의 미모에 반한 곳.
<지리산녀>가 살았다는 '전설의 고향' 곧 중대마을.

옛부터 '금환락지' 명당터가 있다고 전해오는 마을.
전설 속 지리산 미녀가 금가락지를 풀어놓은 명당 터.
여인이 금가락지를 풀면, 몸을 허락하겠다는 의사 표시.

'과연, 전설 속 '지리산녀'가 그곳에 살았을까?'

문수리 첫 번째 상대마을을 지나 오른편으로는 계단식 논밭
계단신 논밭이 그림 같은 중대마을엔 아직도 초가집과 샛집들.
본체는 초가이고 까대기(행랑채의 사투리)는 샛집으로 되어있다.

이곳 주민 조씨는 하대에 살지만, 밤밭과 논밭은 중대에 있다.
하여 농번기가 오면 주로 중대에 있는 초가집에서 생활을 한다.

'농번기에만 잠시 머물다 보니 집 관리는 엉망인 편.'

잡초 무성한 마당에는 토종 벌통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70 통 한봉과 더불어 밤농사는 3천평 한해 70∼80가마 수확.
한창 밤을 주울 때는 어두워져서 밤이 안 보일 때까지 줍는다.

해발 1천 미터에서 채취한 맑은 물, 고로쇠 수액

밤나무와 함께 부를 가져다 준 것은 고로쇠 수액과 토종벌.
마을 곳곳에서 노란 꽃을 피우는 산수유나무가 흔히 보인다.
밤재에 사는 10여 가구 주민 주소득원은 고로쇠 수액을 채취

중대마을을 떠나 밤재 마을에 이르면
마을 초입에 있는 거대한.. '두지바우'.

'운조루 뒤주와 관련이 깊을 법한..두지바우.'

운조루 뒤주 쌀로 굶주림을 모면한 마을사람들.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두지바우라 불렀던걸까?

해발 1천 미터 산중 깊은 곳에서 자라는 고로쇠나무
지리산과 백운산, 곧 구례에서 채취한 수액이 최상품.
기온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적은 곳이라여 수액이 많다.

고로쇠 수액은 많이 마셔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
고로쇠 수액 한 말에 보통 4만5천 원 가량 받는다.
옛날 노고단 화랑들이 고로쇠 수액을 마셨다고 한다.

문수골은 마치 흑백 필름에 담겨져 있는 옛날 풍경.
문수리에는 주인이 없는 귀틀집도 간간이 눈에 띤다.
오지 마을의 옛 주인들이 도시로 떠나가 버려진 폐가.

젊은이들이 떠나가 고령화된 문수골 오지마을들
버려진 폐가 귀틀집은 문수골의 현실을 대변한다.
도시의 이방인에겐 낭만의 대상으로 보이는 귀틀집.

'전설 속 지리산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노고단 산신 할머니, 노고 할미, 마고.
남녀 양성을 한 몸에 지녔다는 문수보살.
문수골에서 금환락지 명당 터라는 중대마을

'지리산녀가 살았다는 전설의 고향.'


찾아가는 길

구례에서 토지면까지 군내버스 수시운행(15분 소요)
화개방향 버스 타고 중도 하차 또는 택시로 7 분소요.




두지바우.



1776년에 지은 아흔 아홉칸 전통 양반가옥..운조루
현재 중요 민속자료 8 호로 지정되어 있는..운조루.
쌀 두 가마 닷 되가 들어가는 뒤주가 있던.. 운조루

뒤주에 쌀을 담아 굶주린 이웃에게 나눠준 만석꾼.
존경받는 사대부 다웠던 유이주(柳爾胄,1726~1797)
그의 선행은 오늘날까지 부자들에게 본보기가 된다.

'뒤주바위 전설은 그의 선행에서 비롯된듯..'

....................뒤주바위 전설........................
문수리 밤재 입구에 여러갈래로 갈라진 바위의 이름.
이 바위가 갈라진 데에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
뒤주바위 근처에 늙은 부부가 아들 하나와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만 아들..'

갑자기 불행을 당한 부부는 아들이 죽은 뒤 이레가 되도록
그 시체를 땅에 묻지 않았는데 깜박 잠든 사이에 이상한 꿈.
꿈속에서 낯선 이가 찾아와 배 고프니 밥을 한술 달라는 것.

나그네는 차려 준 밥을 먹고 부부에게 슬퍼하는 연유를 물었다.
외아들이 죽었다고 하자 나그네는 시체를 보자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의 무덤을 큰 바위 위에 만드시오.
그러면 저 세상에서 큰 복을 받게 될 것이오."

꿈에서 깨어난 부부는 나그네의 말대로 묘를 만들었다.
뒤주바위에 아들의 시체를 올려놓고 흙과 잔디를 덮었다.
묘를 만들고 돌아가려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고 그 틈으로 아들 무덤이 내려앉으며
푸르스름한 안개가 퍼져 나왔고 그속에서 백마가 뛰쳐나왔다.

부부는 그 백마를 아들처럼 여겨 데려다가 극진히 길렀다.
뒤주바위 한 귀퉁이에는 말발굽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고,
이후 바위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뒤주바위 전설은 사도세자 원혼을 달래기 위한 것 같다.
사도세자 사후에 뒤주바위 전설과 유사한 전국의 전설들.
사도세자에 관련된 비극적인 역사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사도세자. 



이조 21대 영조는 42년간을 나라를 다스리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탕평책으로 당쟁을 조정하고 세금 균역법을 써서 민생을 돌보았고
신문고를 대궐 문루에 매달아 백성들이 억울함을 하소연하게 했다.
영조는 세자가 차기 왕이 되었을 때 옳바른 정치를 하도록 가르쳤다.

당시 권세를 잡고 있는 노론 일당과 세자의 친누이 화완옹주
영조의 젊은 후궁 문소의 간계로 왕과 세자 사이가 벌어졌다.
세자는 부왕 영조를 쫓아내고 왕이 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았다.
세자는 울며 결백을 아뢰었으나 영조는 세자를 뒤주속에 갇운다.

윤 오월 뒤주 안은 더웠고 물 한 모금, 밥 한 숟갈 주지 않았다.
세자는 피맺힌 한과 절규를 남기고 7일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뒤늦게 세자를 죽였던 것을 후회해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주었다.

사도세자는 죽은 뒤 융능이라하여 경기도 수원에 묻혔지만
그 혼이 안주할 수 없었던지 무안군 운남 동암땅에 나타났다.

무안읍에서 40리, 운남에서 10여리 거리에 있는 갯마을.
40년 전까지도 해안 2km에 백사가 깔리고 해당화가 만발

명사십리라 부른 이곳에 현재 김해김씨, 김해허씨 40 가구
2백여년 전에는 성씨와 박씨, 이씨가 주로 살았다는 곳이다.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던 1777년
이 마을 앞에 배 한 척이 닿더니 귀공자가마을 뒷산에 올랐다.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마을사람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사도세자다. 원한이 뼈에 사무쳐 나라를 섭렵하다가
이 곳 풍광이 아름다워 내 영혼이 머무를 것이니 그리 알라."

이튿날 마을사람들은 꿈 이야기를 나눴는데 저마다 같은 꿈이었다
주민들은 마을 회의를 열고 뜻을 모아 초혼 후에 단을 모시고 제사.
매년 음력 정월 상순 정일에 올렸는데 소홀히 한 후로, 가뭄 돌림병.
마을 사람들은 연유를 몰라 한숨만 쉬면 꿈에 사도세자가 나타났다.

"너희가 내 영혼하나 위로할 줄 모르니 재앙을 당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여, 버려진 단을 다시 쌓고 잘못을 빌고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 해가 1873년으로 고종 11년이었고 제사를 손없는 한식일로 바꾸었다.
1918년 묘당을 지어 위패를 모신 마을제가 면제 지금은 군제로 바뀌었다.
........................................................................................................

사도세자는 미친 인물로 역사에 씌여 있지만 권력의 희생물.
절대권력 앞에서는 부자지간이라도 비정하다는 사례의 본보기.

문수리는 여순 반란사건의 14연대가 지리산으로 들어간 경로.
그리고, 남부군(빨치산)으로 불리며 반란의 역사가 시작된 곳.
지금도 이 마을엔 남부군과 토벌군간의 전흔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 반란의 역사 애환을 대변하는 듯한 뒤주바위 전설.'

지리산 전설을 살펴보면, 남성 존재에 관한 내용은 유명무실.
남성을 영웅적인 존재로 부각시킨 전설은 우투리 전설에 불과

지리산 산골마을에서 아기 장수 우투리가 탯줄을 억새로 끊고 탄생.
지리산과 바다를 오가는 자기 수련과정을 거쳐 군사와 식량을 모아
세상을 평정할 꿈과 힘을 키우다가 어머니의 고발로 인해 좌절과 죽음

'이것이 고작인데 여기에서 '우투리'는 '우두머리'란 뜻.'

지리산은 '아버지의 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지리산 자체가 남성의 상징인 때문.
천신의 정기를 방장신이 수호한다 하여, 방장산.

하여, 아버지의 산이라고도 불리우는 지리산.

여순 반란사건은 권력 사상다툼이 빚은 소산물.
이 승만 정권은 민주 세력, 김일성은 공산세력,
양대 세력 간의 부딪침이 빚어낸 민족적인 비극

당시 우리나라는 어느 한 세력을 잡아야 할 입장.

어느 한쪽을 잡지 않으면 국가존립이 어려운 시기
따라서,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민족주의는 희생물.
반란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

이제 지구촌에서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사상전쟁은 종말.
아직도 사상전쟁후 분단의 후유증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
그 분단의 후유증은 38선 휴전선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

이제는 그 후유증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 줄 시기.
그리고, 서로 손 잡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할 시기.
사도세자 원한을 달래주는 전설이 가슴에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