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시리봉.
왕시루봉은 정상부에 넓은 초원이 형성돼 있다.
그 산세가 마치 큰 떡시루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
산이 높고 그 아래 섬진강 청류가 흐르고 있는 조망.
그뿐만 아니라 백운산을 마주 보고 있는 위치.
가을철 정상 초원릉 억새풀과 갈대가 아름답다.
수만평 광활한 남사면 억새천국 아래 쪽에는 밀양 박(朴)씨 묘소 6기.
왕시루봉 자락에는 기이하게 무덤들이 즐비하여 하산하다가 20~30기.
헬기장에서 바라보는 구례평야와 산야를 감돌며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
건너편 백운산(白雲山)의 웅장한 산세.
그 어느 것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절경
억새밭을 지나 잣나무와 소나무 숲 아래
진달래 군락 사이로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바짝 마른 개울건너 오른쪽 소나무숲 터널을 지나
진달래 철쭉 군락, 기암기봉 지나 전망이 트인 초원
능선길을 버리고 오른쪽 내리막길 한시간 즈음 논배미
토지면이 시야에 다가오고
단산리 다리 건너 농협창고
그 앞이 구례행 버스 정류장.
.........토지면(土旨面).......
전남 구례군 동부에 있는 면.
토지면 면소재지는 구산리이다.
서남부의 용두리·금내리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높고 험준한 산지를 이룬다.
노고단(1,507m)·황장산(942m)·월령봉(750m) 등
면내 곳곳에 문바우등(1,198m)·왕시리봉(1,212m) 등
면 북쪽에서 발원한 연곡천·덕은내가 섬진강으로 합류
무·배추 등의 고랭지채소 재배와 토종꿀 생산이 활발하다.
지리산 8경 중 하나 피아골계곡이 있으며,
왕시루봉 일대는 지리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유물·유적으로 연곡사동부도(국보 제53호)·
연곡사북부도(국보 제54호)·연곡사3층석탑·
연곡사서부도(보물 제154호) 등이 있으며,
그밖에 석주관7 의사묘. 운조루 등이 있다.
구산(九山)·파도(把道)·오미(五美)·용두(龍頭)·
금내(金內)·송정(松亭)·외곡(外谷)·내동(內東)·
내서(內西)·문수(文殊) 등 10개 동리가 있다.
면적 96.46㎢, 인구 2,97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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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시리봉은 어떻게 찾아가면 좋을까?
노고단 - 문수대 - 질매재 - 느진목재.
문수대.
노고단 운해를 보며 기암 절경 문수대로 향해
노고단산장에서 남쪽 도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얼마 후 구례와 화엄사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초원
노고단산장 부근 야영장에서 일박 후 새벽 산책길
섬진강 물안개가 피어오르면 사방이 구름에 잠긴다.
때론 봉두산, 조계산, 모후산, 무등산이 작은 섬인듯
노고단 남쪽 산기슭 잡목 우거진 돌밭 숲길 20분
문수대에는 50m가 넘는 병풍처럼 애워싼 기암절벽
그 절벽 밑 공터에 산죽으로 지붕을 엮은 암자 한 채
'바위 절벽 밑에서 샘물이 솟는 전망 좋은 곳.'
약 190년전 화엄사 승려 초운대사가 창건한 문수암 터.
질매재 방향으로 가다보면 또다른 옛 암자 터가 보인다.
문수대 뒤로 더 가면 샘물이 또 하나 솟는 야영터 흔적.
노고단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곳인데
여기부터 산죽과 참나무 숲길로 완만한 내리막길
그 사이로 문수리 계곡, 피아골 등이 내려다보인다.
'문수암은 언제 어떤 연유로 사라진걸까?'
질매재.
풍도목(風倒木)이 처참하게 나뒹구는 평탄한 길
얼마 후 경사가 급한 미끄러운 흙비탈 내리막 길
좌우로 벙커 흔적이 보이다가 잘룩한 안부 질매재.
'마치, 질매(길마) 같은 산세라 붙여진 지명.'
...............질매(길마)......................
소 말 노새 등에 걸쳐놓고 짐을 나르던 도구.
거지게·길마·옹구·걸채·발채·달구지 등
길마는 말등 양쪽에 물건을 싣도록 만든 도구.
말굽쇠 모양 구부러진 나무 2짝을 나란히 놓고
안쪽 양편에 2개의 막대를 고정시켜 놓은 도구
말등에 직접 닿는 길마 안쪽은 짚으로 촘촘히 짜서
말이나 소의 잔등 살갗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천을 대어서 부드럽게 해주는 경우도 많다.
장터, 장거리 다닐 때 길마는 긴요한 도구.
걸채와 발채라는 명칭은 그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이것들은 길마 위에 얹어 벼나 보릿단을 나르는 도구.
옹구는 길마 위에 얹는 자 모양의 나무틀에 의지해
새끼로 촘촘하게 가마니처럼 짜서 붙인 부대기이다.
거지게는 지게와 비슷한데 길마 위에 덧얹어
중량이 무거운 나무나 돌 등을 운반하는 도구.
달구지는 말이 끌면 마차라 하고,
소가 끌면 우차(牛車)라고 하는데
긴 널판으로 몸채를 짜고 양쪽에 챗대를 달아
소나 말에 연결해 곡식 나무 등을 실어 나른다.
지금은 현대문명에 밀려 거의 사라진 농기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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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삼거리와 문수리 계곡으로 길이 훤히 난 사거리.
질매재에서 좀더 오르막길을 오르면 질등에 이르게 되고
능선 서쪽 사면길 따라 각종 기암들을 구경하며 가게 된다.
굴곡이 심한 오르막 내리막길을 가다보면 잡목 숲.
그 양쪽이 급경사 칼날 능선길이 문바우등(1,198m)
문수리 방향 헬기장이 있는 초원지대 앞이 왕시루봉
좌측을 바라보면 우유 빛깔처럼 희뿌연 섬진강
피아골 입구가 보이고 남부능선 자락이 보인다.
왕시루봉을 향해 싸리나무를 헤치며 걷다보면
산죽터널 갈지(之)자 길 따라 무덤 하나 있고
피아골 쪽 헬기장이 보이는 밉고 지루한 내리막길
느진목재.
왕시루봉에서 느진목재까지는 가파른 내리막.
위험한 곳은 없지만 미끄러짐에 주의해야 한다.
40분 정도 걸으면 느진목재까지 내려설 수 있다.
이곳에서 피아골 내동리,
문수리로 하산할 수 있다.
느진목재에서 30분쯤 된 비알을 오르면
왼쪽 사면을 가로질러 '문바우등' 가는 길.
문바우등에서 질매재까지는 굴곡 없는 능선.
질매재에서 다시 오르막 길이 시작이다.
한시간쯤 오르면 텐트 1동 칠만한 야영터
왼쪽으로 작은 돌무더기와 고사목이 있다.
'노고단산장과 돼지령으로 가는 갈림길.'
갈림길에서 노고단 정상까지는 40분쯤 걸린다.
너덜길 중간에 문수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빈산에 잠들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는 재.
해발 1,000m도 채 안되는 느진목재에 오면
토지면 내서리 남산마을로 가는 길과 만난다.
느진목재에서 잡목 우거진 오르막길을 서서히 오르면
한숨 돌리란 배려인지 평지길이 잠시 나타나며 잡목숲.
좀더 가다보면 기억(ㄱ)자형 바위와 병풍 같은 바위지대
그리고 두 쪽의 바위가 연이어 서 있기도 한데
산죽밭 경사도 높아지다가 능선 위에 양갈래길
우측길은 전망 좋은 바위에 오르는 막다른 길.
좌측길을 택해 평탄한 능선길로 걸어가면 된다.
남쪽 편한 길이 계속되다가 무덤 지나 억새물결
얼마간 내려오면 우측(서쪽) 잣나무 숲 넓은 길.
여기를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외국인 별장촌
공공건물과 관리인 사택이 넓은 연못이 나온다.
현재 왕시루봉에는 외국인 개인별장 11여 채
테니스 코트 2동, 간이 풀장, 교회, 창고 1동
호텔과 공회당, 자가 발전기, 젖소를 사육하여
생유까지 보급했다는 옛 노고단 시절보다 축소
개인별장 건물은 서북쪽 야트막한 산등성이 넘어
마치, 백설공주 동화속 세계에 나오는 통나무집들
숲속에 아담하게 자리잡아 이국적 냄새가 물씬난다.
선교사 수양관촌.
해발 1506m 노고단에 40평 단층 무인산장이 세워진 1971년
1967년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은 구례 연하반산악회 등의 결실
무인산장을 고쳐 함태식 관리인이 입주한 시기는 1972년이었다.
노고단 선교사 수양관은 1920 ~25년에 지은 무려 49동 건물
일제(日帝) 강점기, 도로도 없던 그 시절에 어떻게 지었을까?
당시 사인교 타고 산을 오르내리던 서양인 모습은 어떠했을까?
품삯을 벌기 위해 사인교를 멘 우리 백성들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무렵 지리산 사람들은 석유 호롱불을 켜고 살았는데,
노고단에서는 발전시설 전깃불 아래 예배보고, 영화 감상.
그들이 이곳에 오를 때는 대나무 들것을 타기도 했고,
들것은 두 사람이 메고 가야 했고 짐은 지계를 이용한듯.
당시 사흘 품삯이 되는 1원을 벌기 위해
농번기에도 품팔이를 나섰던 구례 농부들.
그렇다면 노고단 '외국인 별장촌' 실체는 무엇일까?
그곳의 정식 명칭은 '한국 주재 선교사 수양관'이었다.
이 땅에 찾아와 복음을 전파하던 서양 선교사들의 수양관.
이 수양관 시설물들은 변요한(프레스톤) 선교사의 책임하에
조선총독부와 영구 임대계약을 맺고 세운 교회지도자들 수련장
선교사들이 하필 노고단에 그 건물들을 세웠던 것일까?
그들로서는 생사의 갈림길이라 할 절박한 문제가 있었다.
서양 선교사와 그 가족들은 여름철만 되면 이 땅의 풍토병,
특히, 수인성 질환, 말라리아, 세균성 이질 등에 속수무책
농촌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펼치던 선교사들에게는 저승사자.
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풍토병에 따른 희생이
아프리카의 풍토병보다 더욱 더 극심했다고 한다.
선교사들은 당시 풍토병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하거나
선교부 철수까지 검토할 만큼 선교의 맥이 끊길 위기
유진 벨 선교사가 여름철 기온이 낮은 노고단 피양을 제안,
선교사들은 주거지 개념으로서 수양관을 조성했다고 한다.
흔히들 말하는 '외국인 별장촌'과는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호남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펴던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자세
그들 중 상당수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대대로 봉사활동
그들이 가마타고 거들먹거리며 노고단에 오르지는 않았을듯.
환자나 노약자는 걸을 수 없어 가마에 의존했던듯.
그런 경우에 가마 메는 품삯을 넉넉하게 지급했던듯.
노고단의 선교 유적지는 6.25를 전후하여 폐허로 바뀐다.
모든 건물이 불타고 그 잔해 일부만 남아 있을 뿐.
6.25 이후에는 휴 린튼(한국명 인휴, 印休) 선교사와
조 요셉 목사 등이 이곳에 천막치고 여름 수양회 개최.
하지만, '노고단 수양관 복원의 꿈'은 이루지 못했단다.
인요한의 아버지 인휴는 노고단 대신에
제2의 선교사 수양관을 건립한 왕시리봉.
.....................찾아가는 길....................................
코스 : 노고단 산장 -1.5Km- 문수대 -2.5Km- 질매재
-5Km- 느진목재 -2Km- 왕시루봉 -8Km- 토지면
<총 19Km, 등반 : 9시간 10분, 하산 : 7시간 10분>
중간중간 쉼터와 샘도 있어 전문 산꾼들에게 인기가 있다.
왕시루봉만 올랐다 피아골 또는 문수리로 하산할 수도 있다.
'문바우등'을 넘어 질매재에서 피아골 산장으로 하산할 수 있다
...........................................................................................
..........................주변 등산로.............................
피아골산장에서 서쪽으로 경사 심한 투박한 돌밭길따라 오르면
질매재에 이르고 여기서 노고단까지 능선길로 해서 오를 수 있다.
피아골 산장 우측 완만한 오르막 길따라 산죽 듬성듬성한 울창한 숲
계속 가면 좌측의 지류와 만나는 곳에 아치형 교각의 철다리가 나온다.
길이 20m, 폭 1m의 불로교 철다리 건너면 용수암(龍水岩) 삼거리 이정표
여기서 가파른 좌측 비탈길로 올라
갈지 자로 가다보면 산죽밭 옛 초암터.
단풍나무와 참나무가 많은 흙길을 오르면
뒤로 왕시루 능선이 나타나고 또 한차례 오르면
좌측으로 암봉이 보이고 침엽수림을 1시간 넘게 오르면
삼도봉, 불무장등, 임걸령이 훤히 보이는 능선 위 잣나무숲
그곳을 돌아 오르면
임걸령 삼거리-피아골 삼거리- 질매재까지 급경사.
임걸령 삼거리에서 식수 준비 후 오르는 것이 좋다.
...................................................................
왕시루봉 동쪽 턱밑에는 '한국 주재 선교사 수양관촌'이 있다.
컨세트형 교회 건물, 테니스장과 수영장, 수양관 건물들이 있다.
숲속 여기 저기엔 7∼8평 규모의 아담하고 멋진 목조건물 별장들.
찻길도 없어, 두어 시간 진땀을 빼야 도착할 수 있는 곳.
1920년 대 외국인 별장촌은 이곳이 아닌 노고단에서 시작.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 영국, 호주, 프랑스 선교사들.
당시, 이질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으로 신생아 10중 9 명이 사망.
여름철 수인성 질병을 피하려 무려 52동의 수양관촌을 세웠던 것.
그러나, 노고단 수양관촌은 6.25 당시 폐허
1961~1962년에 왕시리봉 느진재목으로 이전.
20 여동 건물이 완성되었고, 지금은 11동뿐.
존폐 여부를 놓고 논란의 대상이 되는 곳.
1920년대 노고단에 들어선 선교사 수양관촌.
미국, 영국, 호주, 프랑스 선교사들 휴양지.
구한말 쇄국정책과 100년간 천주교 탄압 정책.
그로인해 이조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된다.
일제시대 노고단에 들어선 선교사 수양관
미국 영국 호주 프랑스와 외교를 위한 정책.
이곳 수양관 존폐 여부는 심사숙고할 사안.
자칫 잘못하면, 국제사회 고립을 자초하는 일.
국가 외교 차원에서 득실보다 손실이 많을 듯.
지리산의 자연보호 목적을 위해 없는 편이 좋다.
그러나, 우방국 선교사들이 이용하는 종교시설.
특히,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천주교 바티간 궁전.
전세계 천주교도들로부터 비난받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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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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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수양관촌이 들어서게 된 근본 원인.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박해 때문인듯.
일본이 세계 열강 선교사들을 어루만진 외교술.
'선교사는 곧 그 나라의 외교사절.'
구한말 천주교는 1백년간 10 회에 걸쳐 박해
1785년(정조 9) 봄 초기 신자들이 형조에 적발
양반 자제들이 연루되어 중인 김범우만 유배형
김범우는 유배지로 가는 도중 숨져 최초의 순교자
1791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불리는 신해박해
모친상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사른 죄로 처형.
1795년 을묘박해는 주문모의 체포령에서 발단
주문모는 피신하고 최인길·윤유일·지황이 사형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 등 좌천 또는 유배
1801년 순조가 즉위하자 다시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
득세한 노론벽파가 남인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한 신유박해
<첫단계>
천주교 지도급 남인 이가환·권철신·이승훈·
최필공·홍낙민·정약종·홍교만 등의 사형.
이가환은 원래가 천주교인이 아니었고,
이승훈은 배교했지만 정치적 보복 사형.
<둘째 단계>
신부 주문모의 순교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
여기에 연루되어 강완숙 등
여교우들도 많이 참수되었다.
<마지막 단계>
백서사건이 확대되어 관련자가 처형되는 동시에,
봄에 갇혔다가 풀려난 정약전·정약용 등을 체포.
백서와 관련된 사실이 없었으므로 유배로 끝나고,
황사영과 서울 전주에 수감된 천주교인들은 사형.
그 뒤에도 두 번의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
1815년(순조 15)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헌종 때 두번째의 큰 박해가 일어났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교인의 후예들이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고 선교사 영입
1836년 이래 주교와 선교사들이 입국
천주교는 다시금 활기를 되찾게 된다.
1839년(헌종 5)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세도다툼으로 인하여 박해가 시작된다.
그 해 3월 5일에 선교사 3인 모두 순교
1846년 병오박해는 신부 김대건 체포가 발단
김대건과 남녀 교우 9인이 순교를 하게된다.
1860년(철종 11) 경신박해는
교회측 기록에만 남아 있을 뿐
관측 기록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마지막 박해인 1866년(고종 3)의 병인박해
그 규모가 과거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혹독
대원군은 초기에 천주교를 적대시하지 않았고
러시아 남침을 막으려 주교 베르뇌에게 협조 요청
그러던 그가 박해자가 된 이유는
1860년(철종 11)의 북경함락사건
이어 양인학살(洋人虐殺) 사실이
이조에 전해졌기 때문인 것인듯.
박해는 대원군이 실각하기까지 10년간 계속
병인년 초 주교 베르뇌의 체포로 시작되어
불과 3개월 사이에 선교사 12인 중 9인 처형.
교회 지도층 평신도들이 거의 모두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3인의 선교사 중 신부 리델(Ridel,F.C.)
중국으로 건너가 프랑스 함대 사령관에게 구조 요청.
프랑스 함대는 한강과 강화도에 나타나
선교사 학살의 책임을 묻자 병인양요 박해
대원군은 프랑스함대가 서강에 침입했다 하여
인근 양화진(절두산)을 새 형장(刑場)으로 정하고,
그곳에서 선참후계형식으로 천주교인을 무수히 학살
1868년 해미지방(海美地方)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천주교인이 희생되었다.
도시에 집중되었던 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산간벽지로 피신해 많은 교우촌을 형성한다.
철종 때 천주교는 비교적 평온을 누려 발전
세도정치의 주인공 안동 김씨는 시파(時派)로,
천주교에 우호적이라 천주교를 묵인하는 입장.
천주교(서학) 박해로 일어났던 실학사상 동학.
........
대원군.
.........
구한말에 농민항쟁 붕기로 일어났던 동학혁명.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지리산으로 은둔한 농민들.
화전을 일구며 그들만의 이상향을 추구한다.
일제 치하에서는 항일 독립운동에도 앞선다.
1950년 6.25 사변 전후로 벌어진 남북 사상전
지리산은 동족상잔의 비극의 격전지가 된다.
천주교 박해, 동학혁명 때 탄압받았던 후손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전에 휘말려 죽어간다.
'그 시대적 혼란기 중심에 있었던 대원군.'
대원군을 통해 당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1820(순조 20)~1898(광무 2) 이조 왕족 정치가.
이름은 이하응.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대원위대감의 아들이 곧 이조 제 26 대왕 고종이다.
1841년(헌종 7) 흥선정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 대존관(代尊官)
안동김씨 세도정치하에서 주목을 피하기 위해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난행을 일삼으면서,
한편으로 후사가 없는 철종의 유고시에 대비해
조대비와 가까이 지내다가 1863년 철종이 죽자
둘째 아들 명복이 조대비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조대비에 의해 흥선대원군으로 진봉되어 섭정 총괄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의 동맹관계
안동김씨 일부의 지원으로 권력 장악
집권 후 일부 안동김씨 세력을 축출한다.
한편, 안동김씨 권력층의 명문 양반가를 포섭
양반지배층 각 당파에 관직을 안배하여 세력균형
실추된 왕권을 높이기 위해 왕족을 집중적으로 발탁
재정·군사·경찰 등 권력의 핵심부분에 등용.
총명하고 재주 있는 중인계층을 선발하여
각 조(曹)에 집리(執吏)로 배치해 제도개혁.
1871년 3월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폐쇄.
훗날 지방 유생들의 반발로 정계에서 은퇴.
1862년(철종 13) 농민항쟁 원인은 삼정문란
삼정을 개혁해 농민의 불만을 수습하려 했다.
국가재정 부족을 메우려 포량미(砲粮米)를 신설
도성의 문세(門稅)를 징수했으며,
궁방(宮房) 포구 주위의 유력자들이
불법 부과한 각종 사세(私稅)를 혁파
그 세금을 중앙정부 재정에 편입시켰다.
경복궁 중건과 병인양요 소요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당백전을 주조하고 청나라 화폐 청국소전을 강제 유통
이는 물가를 폭등시켜 상민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토호의 무단(武斷)을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궁방전도 세금을 내게 했고 지방 향리 부정에 엄벌.
근무 연한에 따라 서리 벼슬을 입역(立役)하게 했다.
1866년 8월 천주교 박해 구실로 쳐들어온 프랑스를 격파
이 병인양요 사건으로 대원군은 외국 세력에 대해 적개심
1871년 4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침입.
종로 네거리 및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고 항전 준비
이조가 외교 교섭에 응하지 않자 미국 함대는 그해 5월 철수.
일본도 메이지 유신이후 근대적 조약 체결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입장에서 이를 거절.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 침략이 일단은 저지
이후 더욱 강화된 쇄국정책으로 국제교류 기회를 상실.
흥선대원군은 외척을 봉쇄하려 민비를 고종황후로 맞이
그러나 민비는 척족을 규합하고 대원군 반대세력을 결집
1873년 최익현이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한 상소
그해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대원군은 정계에서 하야.
양주에 은거하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계 복귀를 꾀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반포를 계기로 이듬해 전국 유생들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전개되었는데, 그때 승지 안기영(安驥永) 등이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재선(載先)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누설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에 흥선대원군이 관련되었으나, 국왕의 아버지라 하여 불문에 붙여졌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에게 사태수습 전권을 위임받자,
이 기회에 대원군은 정권회복을 시도.
대원군은 궁궐에서 도망친 민비가 죽었다고 공포
그러나 민씨파 요청을 받은 청 군대에 의해 납치.
청나라 유폐생활후 1885년 8월 돌아와 운현궁에 감금
1894년 일본군은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민씨정권 타도.
대원군을 앞세운 개화파 새 내각을 만들어 갑오개혁 추진
일본 뜻에 따르지 않아 이노우에에 의해 은퇴를 강요당했다.
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가 주도한 을미사변 때
일본군과 함께 궁성으로 들어가 새로운 내각을 조직
이듬해 2월 궁성을 나간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피신.
친 러시아파 정권이 들어서자 대원군은 양주로 은거.
대원군은 서화에 능했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그는 10년간의 집권기를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면서
체제개혁으로 봉건제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그의 개혁정치는 일시적으로 내부모순을 완화
외세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아 이조는 급격히 해체
외세침략도 더욱 심화되며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
1907년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고 시호는 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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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일합방 이후에 이조 왕실은 해체되고 만다.
이미 구한말부터 재정이 어려워져 궁녀를 줄인 이조.
한일합방후 남자요리사 상당수가 나가야 했다는 기록
창덕궁 낙선재에 남은 궁녀는 윤태후를 섬기거나
순종, 고종, 덕혜옹주의 처소에 배속되어 있었다.
최후의 황후 윤태후를 곁에서 모신 상궁은 5~6명.
이조 왕실의 수많은 궁녀는 어디로 갔을까?
의친왕저 사동궁 운현궁 궁녀들은 옛 법도 대로 생활.
출궁한 궁녀들은 사가로 돌아갔거나 비구니가 되었다.
정업원은 원래 왕의 후궁들이 비구니가 되었던 여승방.
창경궁에서 멀지않은 도성 안에 있던 정업원.
이조 왕실의 해체로 갈 곳조차 없어진 궁녀들.
대부분 비구니 사찰에서 여생을 보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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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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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왕실이 해체된 결정적 계기는..러일 전쟁.
청일전쟁 승리로 국력에 자신감을 갖게된 일본.
러일전쟁 승리후 한반도를 노골적으로 식민지화.
세계 2차 대전에서 야욕을 드러낸., 일본.
일본이 패망하며 그 여파로 벌어진 6.25동란.
1950년대 지리산 일대는 '반란의 역사' 격전지.
그 참혹한 비극의 서막은 러일전쟁에서 비롯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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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힘을 겨룬 제국주의 러일전쟁.
청일전쟁 승리로 한국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계획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 간섭에 의해 일시적으로 저지
일본은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려 을미사변으로 민비 학살
그러나, 반일 의병투쟁을 불러일으켜 더욱 수세에 몰렸다.
1896년 2월 친러파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친러정권이 수립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여전히 한국을 독점 지배
청일전쟁 후 이조의 대외무역에서 일본은 수입 60~70%
수출 80% 우세를 차지해 이권 최혜국 위치를 확보한다.
이를 유지하려 대 러시아 전쟁에 대비해 군비 확장.
일본은 청나라에서 받은 전쟁배상금 3억 6,000만 엔
그 중 2억 2,000만 엔을 군비 확장에 사용하고,
1896~1903년 예산 세출 평균 5할을 군비로 충당.
일본은 영국 미국의 이권을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외교적 군사적 지원을 받아
러일전쟁 전비 17억 엔 중 8억 엔을 외채로 보충.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보 후퇴하여 만주에 발판
1900년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
러시아는 이조를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삼으려 했다.
일본은 1902년 1월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대응,
러시아도 양보의 태도를 보여 4월 만주철병 단행.
러시아는 봉황성·안동성 일대를 장악 뤼순을 요새화
1903년 4월 압록강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
일본은 더 협상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결의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 개전을 결정했다.
2월 8일 뤼순항을 기습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
9일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대 격침후 10일 선전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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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
포츠담 회담과 을사조약으로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이조.
러일 간 사태를 감안, 1904년 1월 23일 국외 중립을 선언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군대를 서울에 투입하고
2월 9일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정 2척을 격파
2월 23일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 체결.
일본은 이 의정서에 따라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
통신망 접수후, 경부선 경의선의 부설권, 연해의 어업권,
전국 개간권까지 획득했고, 이조는 일본이 승세로 기울자
같은 해 5월 18일자로 러시아와 체결한 조약과 협정을 폐기.
일본은 8월 22일 ‘외국인 용빙협정’을 이조와 체결,
이조의 외교권을 거의 박탈하는 ‘고문정치’를 확립.
당시 서방의 열강인 영국과 미국과 외교적인 협의 후
1905년 7월과 8월 이조의 독점적 지배권을 갖게되었다.
이어 9월 포츠담 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이조의 독점적인 지배를 확인받아 식민지화.
<선교사 수양관촌 건립>
1920년대 노고단에 일제에 의해 건립된 수양관촌.
서방 열강과 돈독한 외교관계를 위한 일본의 포석.
구한말 천주교를 탄합한 이조는 서방세계에서 고립.
서방 열강으로부터 외면받는 결과를 초래.
이조가 천주교를 탄압한 댓가를 치루게된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강한 로마의 교황청.
세계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영향력이 큰 바티칸.
이조 말 천주교도 및 선교사 탄압.
특히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은 악몽.
전세계 천주교 역사 상 아직도 오명.
오래된 사찰과 산장 일색인 지리산.
지리산에서 유일한 선교사 수양관촌.
'있는 것이 국익에 도움될까?
없애는 것이 국익에 도움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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