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35. ( 문수골. 문수골의 봄. 토종벌. 문수사. )

donkyhote 2010. 10. 18. 01:33

문수골.

 




이원규시인., 피아산방

 


노고단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내린 문수골.
서쪽은 화엄사골이고 동쪽은 피아골이다.
지리산에서 가장 맑은 물이 흐르는 문수골.

'구례 식수원일 만큼 문수골의 맑은 물.'

문수골 다랑이 논밭 사이 아래로 흐르는 개울.
개울이 굽이굽이 흘러가며 이룬 아기자기한 소
그 아래로 저멀리 구례군 토지면 평야와 섬진강.

토지면은 옛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평야.
풍수지리설 상 여인(구례)의 음부(토지면)
문수골이 있어 가뭄을 타지 않는 토지면 토지.

'토지면 전답을 늘 촉촉히 적셔주는 문수골.'

문수골은 문수보살 불교문화에서 유래된 지명.
불교 전래 이전까지는 모계사회로 추정되는 곳.
문수골을 품은 노고단은 '마고 할미 전설의 고향.'

마고는 모계사회 족장회의를 주최했다는 여신.
마고는 일명 노고단의 여신 '노고(늙은 할머니)'
토지면 일대는 신석기시대 모계사회의 영역인듯.

노고단 깊고 깊은 문수골을 음부 같은 산세.
지리산 노고단은 아름다운 미녀와 같은 산세.
구례군 토지면 전답에 생명을 불어넣는 문수골.

'지리산녀가 살던 '전설의 고향'.. 문수골.'

아름다운 여인을 문수보살이라 여겨 문수골.
불교가 들어오기 전 이곳 여신은 산신 할머니
문수골을 품은 노고단 지명도 '노고'에서 유래.

노고 = 선도성모 = 마고 =문수보살.
아름다운 미녀 = 지리산녀 = 선녀.
모계사회 풍습에서 비롯된 민간신앙.

'하여, 문수골은 풍수지리 상 명당.'

..............'문수골의 3 명당터'............
상대 : 금구몰니 = 땅속에 묻혀있는 금거북이
중대 : 금환락지 = 선녀가 풀어놓은 금가락지
하대 : 오보교치 =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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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금환락지'는 문수골 최고의 명당터.
천신의 정기를 쏟게하는 선녀의 아름다움.
천신의 정기(비)를 부르는 문수골 계곡(음부).

하여, 형성된 상대마을, 중대마을, 하대마을.
주민들은 대대로 자기 마을이 명당터라 생각.
옛부터 이상향 청학동으로 여겼던 문수골 일대.

대나무가 많을 만큼 습기가 많은 마을들.
하여, 높은 곳이 상대, 낮은 곳 하대 마을.
이상향을 꿈꾼 옛 화전민들이 일군 산간마을.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전설을 품고있는 문수골
그 '전설의 고향'들을 찾아 문수골로 떠나보자.
아울러, 전설 속 명당터라는 3곳도 찾아가 보자.

풍수지리상 이곳은 섬진강 물을 마시는.. 용의 목덜미.
문수제 능선 너머 우리나라 4대 명당.. 오미리 운조루.

아침이면 섬진강 물안개가 서서히 차오르고
저녁이면 섬진강 건너 오산에 깔린 붉은 노을.
운조루에서 바라보이는 아침 물안개와 저녁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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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영조 52년(1776) 전통양반 가옥 운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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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운조루가 있는 계곡.
그곳에서 6km 올라가면 반달곰이 사는 문수사.
운조루와 불과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화엄사.

내친 김에 성삼재에 차를 주차하고 노고단 산책.
화개장터도 10분 남짓 섬진강 따라 드라이브 코스.
화개장터 옆 남도대교 건너 아래로 가면 매화마을

화개장터에서 하동방향으로 곧장 내려가면 최참판댁.
토지 드라마 셋트장과 멋진 악양들판을 감상할 수 있다.
구례 산동 지리산 온천과 그 건너 편에 있는 산수유마을

조금 멀리 순천 방향 '낙안 읍성 민속마을'과 보성 녹차밭.
그리고 하동 방향으로 가서 청학동과 삼성궁도 관광 볼거리.
구례군 농업기술센터 야생화 관람, 섬진강 쌍계사 벚꽃축제

승용차로 여행 다니기에도 적당한 문수골 일대.
며칠 여유 있다면 머물며 여행하기 적당한 문수골.
문수골의 깊숙한 개울가 민가에 며칠 머물러도 좋다.

지리산 자연환경에만 기대어 사는 오지 주민들.
도시문명의 이기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생활상.
지리산의 깊은 맛이 물씬 배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정 일급수 맑은 물속에서만 산다는 올갱이.
헤엄치며 올갱이 잡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릴듯 수많은 별도 아름답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저절로.. 동심.'

알몸 헤엄을 만끽할 만큼 인적드문 곳.
대자연 품 속에 파묻힌 느낌이 드는 곳
지리산에서도 가장 지리산 다운.. 문수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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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문수사리보살 지와 리를 본 딴 지리산.'
지리산에서 외지인 발걸음이 가장 뜸한 문수골.
그 덕분에 천연 야생동물원 조건을 갖춘 문수골.

'반달곰을 방사할 만큼 야생동물에게는 천국.'

지리산은 옛부터 지리 또는 두류산이라 불렀다.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이다.

신라때 오악은 토함, 계룡, 지리, 태백, 팔공
그 오악 중 지리산은 남악이라 불리워져 왔다.
지리산은 넓은 만큼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

두류(頭流), 방장(方丈), 지리(地理 또는 地利),
불복(不伏), 반역(反逆), 적구산(赤拘山) 등등.
그 이름마다 배어있는 속내와 아픔을 알 것 같다.

지리산과 더불어 구례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
지리산 노고단에서 하늘과 산에 제사를 올리고
국태민안과 시화연풍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라 때 매년 나라에서 제관을 보내어 제례를 받들고
이조 때 노고단 남쪽 현재 광의면 온당리에서의 제례.
노고단은 천왕봉, 반야봉과 더불어 3대 주봉 중 하나

노고단 정상 서쪽에 있는 30만평 넓은 고원인 길상봉.
옛날에는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南岳祠)가 있던 곳.
'산신 할머니를 모시는 단'이라는 의미로 명명된 노고단.

'산신할머니'가 문수보살로 바뀐 것은 불교 영향.

한반도 모계사회에서 산신 할머니는 민간신앙.
문수보살은 민간 토속 신앙에 기대어 퍼져간다.
그러나, 훗날 문수보살은 산신 할머니 신앙을 흡수.

'문수보살은 차츰 독자적인 불교신앙으로 정착.'

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인간적이고,
인간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절대자의 기품.

엄숙하다고 하다고 말하기엔 온화하고,
인자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엄격한 모습.

젊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의젓한 모습
노숙하다 말하기엔 너무 탄력있는 모습.

남성이라고 보려 하기에는 풍염하고
여성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건장하다.

아버지라고 보려하니 너무 자비롭고
어머니라고 보려하니 너무 엄격하다.

이 세상 질서와 평화가 한 몸 안에 있는 듯.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이미 보았기에 감히 말 할 수 없는 모습.

문수보살 신앙은 그렇게 한반도 고대국가에 정착.
오늘날까지 문수보살은 지리산의 모습으로서 정착.
문수골은 문수보살에서 유래된 불교 색체 지명 같다.

'대승불교에서 최고의 지혜를 인격화한.. 문수보살.'

문수보살이 나오는 경전은 250년 무렵에 만들어졌고
예술작품에는 400년 무렵부터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

오른손에 무명(無明)의 구름을 자르는 지혜의 칼을 들고
왼손에는 패엽(貝葉)으로 된 반야바라밀경을 든 왕자 모습.

남녀 양성이 한몸에 있는듯한 모습.
어떤 형태로도 변신술이 가능한 존재.
때론, 구도자를 유혹 시험하는 문수보살.

이집트 최초 여성 파라오 하쳅수트.

이집트의 통치자이자 최초의 제사장.
늘 남장을 하고 인조 수염을 단 여왕
(BC 1503~1482 재위) 이집트의 통치자.

헤라 여신 신화는 하쳅수트에서부터 유래.
출산과 결혼을 주관한 그리스의 헤라 여신.

세석평전 음양샘은 문수보살의 상징이자 생명의 산실.
음양샘의 샘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
음양샘을 들여다 보면 남녀 양성의 성기를 갖춘 모습.

'음양샘 베일 속 수수께끼가 여기서 풀리는 듯..'

중국에서는 8세기 무렵부터 문수보살 신앙이 널리 유행
산시성(山西省)에 있는 우타이산(五臺山)은 문수보살 성지

우리나라 문수보살 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유행.
신라의 고승 자장은 그 유포에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오대산은 문수보살 상주처(常住處)
643년(선덕여왕 12) 중국에서 귀국한 자장법사
오대산 중대(中臺)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

황룡사 9층탑도 자장법사의 노력에 의해 세워졌다.
우리나라 문수보살은 대웅전 석가모니 좌측에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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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문수골 깊고 깊은 골짜기 끝에 있는 문수사.
지리산 문수골의 문수사는 반달곰을 사육하는 사찰.
사찰 입구에 커다란 흑돼지 사육하는 광경도 이색적.

'삼층 건물인 대웅전 지나서
계단을 오르면 산신각 문수전.'

백제 성왕 2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했다는 사찰.
화엄사 법계사 내원사 등등과 비슷한 시점에 창건.
문수사가 의외로 유서 깊은 사찰임을 알게 해 준다.

원효대사, 의상법사, 서산 소요 사명대사 등이 수행
1950. 6·25 당시 소실되었다가 1988년 대웅전을 복원


'반달곰을 사육하는 문수사로 찾아가는 길.'

섬진강변 19번 도로 오른쪽 길가에 문수사 안내판.
노고단에서 흐르는 밤재능선과 왕시루봉 능선 사이
해발 800m 높이에 아주 깊고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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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은 반달곰을 방사할 만큼 산간 오지마을.
멧돼지를 잡기 위해 설치한 올무에 희생된 반달곰.
반달곰이 올무에 걸려 힘들어하는 당시 모습도 공개

올무에 걸린 반달곰이 버둥거릴수록 파고드는 철사줄.
허리 깊이 파고드는 올무에 발버둥치던 단천골 반달곰.
허리 상처가 배를 덮고 있는 반달곰을 의료진이 긴급 수송.

하지만, 이미 상처의 고통으로 탈진한 반달곰.

이 반달곰은 지난 7월 방사된 북한산 반달곰 장강 21.
별명이 왕초였을 만큼 무리 사이에서 활발했던 반달곰.
먹이를 찾아 단천골을 헤매다가 올무에 걸리고 말았다.

'단천골의 벌통을 습격하려다 농가 올무에 걸린 듯.'

올무에 걸리면 대부분 오랫동안 사투를 벌이다 죽게된다.
올무 한 개가 설치되면 3년이면 인근 큰 동물은 다 전멸.
반달곰 복원 사업이 시작된 지 5년 만에 일어난 올무 사건.

단천골 주민이 멧돼지 퇴치용으로 놓은 율무.
주민 입장에서는 멧돼지로 인한 피해가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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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은 1960 년대까지 반달곰이 마을을 다닐 만큼 외딴 곳.
얼마전 이 마을에 나타난 반달곰이 토종꿀을 먹어치웠던 사건.
인공 사육 후 방사한 반달곰들이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

문수골은 반달곰 서식지 조건을 갖춘 천연 자연환경.
이곳 청정 개울은 구례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쓰인다.
지리산 10 여 계곡 중 가장 규모가 작고 외딴 문수골.

맑고 깨끗한 개울 중간 중간에 헤엄칠 만큼 넓은 소.

옛날엔 이곳에서 헤엄치던 반달곰이 섬진강으로도 진출
섬진강 물고기까지 잡아먹었던 반달곰이 지금은 구걸꾼.
반달곰이 산장과 사찰을 기웃거리며 먹을 것 달라고 구걸.

앞으로 방사한 반달곰이 이곳에서 잘 살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러나, 문수골에 사는 토종꿀 농민들에게 반달곰은 애물단지.
꿀을 좋아하는 반달곰이 민가로 침입 토종꿀을 먹어치우기 때문.

'도시인에겐 낭만의 대상..반달곰.
토종 농가에겐 애물단지.. 반달곰.
관계당국이 겪는 말 못 할.. 애로사항

'강장제이자 여성을 상징하는.. 꿀'
그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곰의 식성.
웅담을 얻으려고 곰을 노리는 밀렵꾼들.

구례군 당국은 밀렵꾼으로부터 곰을 보호하려고 애쓴다.
방사한 곰의 보호구역인 지리산의 토종 농가들은 괴롭다.
반달곰들의 피해 농가들이 곰을 혼내 줄 방법이 없기 때문.

'빗장을 닫아 걸 수도 없고,
마을 밖으로 쫓아낼 수도 없다.
앞으로 관계당국이 풀어야 할 과제.

빨치산과 토벌군 틈새에서 죽어간 주민들
그 주민들의 봉분 없는 무덤이 많은 문수골.
후손조차 끊겨 돌보는 사람 조차 없는 무덤들.

문수골 곳곳마다 남아있는 치열한 격전의 흔적들.
이젠 반달곰 못지 않게 문수골 주민도 배려할 시기.
반란의 역사 증인들과 격전 유적지도 보호 할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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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은 깊이 빠져들수록 발길 사로잡는 곳.
우연히 다녀가도 그 추억 잊혀지지 않는 고장.
세속을 잊고 푹 파묻혀 있고만 싶어지는 여행지.

때론 어디론가 훌쩍 멀리 떠나고 싶을 때.
그럴 때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문수골.
문명의 이기와 동떨어지고 싶을 때 갈만한 곳.

우리나라 산간 오지마을의 공통점은 흙벽돌 토담집.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흙벽돌집들과 다를바 없다.
흙벽돌 토담집은 우리나라 민족의 이동경로를 말해준다.

'문수골 산간마을 흙벽돌 토담집도 예외 아닌듯.'

문수골은 오지마을이면서도 유서깊은 전설의 고향.
지금부터 그 인적 드물고 외딴 곳으로 들어가 보자.
한번 빠져들고 나면 영영 다시 나오고 싶지 않은 그곳.

전남 구례군 토지면 산간 오지마을인 문수골.

노고단 아래 왕시리봉 경관 수려한, 인근 골짜기.
여순반란 패잔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숨어든 경로.
지리산을 같은 민족의 피로 물들이는 비극을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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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문수골은 남부군 출입 통로
1948년 10월 23일부터 1955년 5월까지 7년간 반란의 역사.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도 패잔병을 수습해 잠입했던 문수골.

당시 김지회, 홍순석 등이 이끄는 문수골 빨치산은 2천명.
구례읍과 인근마을에 빨치산의 야간 습격이 잦아지게 된다.
1948년 11월 5일 토벌대 주둔, 1949년 4월 18일까지 토벌작전

토벌대의 끊임없는 소탕작전과 빨치산의 반격
동족상잔의 비극을 지켜보았던 지리산의 민초들
빨치산 토벌 작전 일환으로 진행된 거점 분쇄작전


<군작전상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소개령.>

지리산의 토착민들은 고향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비극
이념 싸움은 지리산의 오지마을을 모조리 파괴한 결과.
토지면 문수리 토착 주민들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57년까지 지리산은 군작전상 소개령 지구.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폐허의 마을로 방치되어 있었다.
1957년부터 문수골 옛 주민들은 하나 둘 다시 돌아왔다.

'아직도 반란의 역사 흔적이 가득한 문수골.'

문수골은 소개령으로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와 이룬 마을.
낮에는 토벌군 세상, 밤에는 빨치산 세상에 살았던 그들.
지금은 야생 멧돼지와 방사한 반달곰에게 시달리며 산다.

'구산리 왕시리봉에는 57년에 들어선 외국인 별장촌.'

외국인 선교사들 노고단 번잡함을 피해 이곳으로 이전.
문수골 마셔도 될 1급수 개울에서 올갱이 잡기 신선놀음.
피서철 인파를 피해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산간 마을.

칠선계곡 심원계곡과 아울러 지리산 3대 계곡 中 하나.

문수골에서 왕시리봉 거쳐 지리산 종주도 좋을 듯.
함태식 옹이 있는 외국인 별장촌에서의 일박도 운치.
산꾼은 성삼재 노고단의 번잡함을 피해 이곳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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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은 흙냄새 물씬 풍기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
토종꿀과 고로쇠 수액이 흐르는 지리산 자락 오지마을
구례는 '원수에게도 예를 베푼다'는 뜻이 담겨있는 지명.

오미리에서 문수사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만나는 문수리.
문수 저수지를 지나면 곧바로 깊고 아름다운 덕은내 계곡
무려 30리에 이르는 길고도 길다 못해 지루한 골짜기이다.

왼쪽 형제봉, 오른쪽 왕시루봉, 질마재 넘으면 노고단.
문수리는 문수보살이 문수암에서 성불했다는 뜻의 지명
임진왜란 때 김해 김씨가 밤재에 정착하며 마을이 형성.

밤재, 불당, 중대(영암촌), 상대(웃대내) 등의 마을.
밤재는 옛부터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고,
불당은 사찰이 있었던 것에서부터 유래되어 붙여진 이름.

중대는 영암에서 이주한 장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
영암촌이라 하다가 문수리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중대.
마을에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중대마을'이라 불리운다.

상대은 오미리에 있는 하대,
내대의 웃동네라 하여 웃대내.

문수리가 속한 토지(土旨)면은 원래 토지(吐指)라고 표기.
이는 천상의 옥녀신이 가락지를 떨어뜨린 곳(吐)이라는 뜻.

옛날 이곳에 지리산 형제봉 형제신이 살았는데,
이 중 한 남신은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옥녀신 자매는 형제신과 결혼하도록 약속했었다.

그런데, 어느 쪽이 자식을 낳을 수 없는지 알 수 없었다.
이에 옥녀신 자매는 함께 형제봉에 올라가 빌었다고 한다.

이때 옥녀신의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지면서 알게 되었다.
옥녀신의 손에서 떨어진 반지 형상을 띤 토지면 오미리 일대
지금까지도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명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문수골의 봄. 
 


지리산의 봄은 오지마을 처마 밑 고드름의 낙수소리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늦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빨라져 봄을 부르는 노래.
문수골의 계단식 다랭이 논둑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빚어낸다.
지리산 화엄 지구와 피아골 지구 사이 계곡에 파묻혀 있는 오지마을.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귀틀집, 초가집, 억새 지붕 샛집
전답이 부족한 원주민들은 토종꿀, 고로쇠 채취로 산에 기대어 살아간다.
이곳 고드름이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이유는 지붕의 눈이 먼저 녹는 탓이다.

산간마을이라 땅보다는 지붕이 햇살받는 각도가 넓은 탓인 듯.
대지는 한겨울이라도, 그곳 오지마을 지붕에서는 봄이 시작된다.
눈 녹은 물이 지붕처마 끝에서 흐르다 얼고, 다시 녹아 얼기를 반복
고드름 단면에 나이테를 세어보면 며칠 간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지붕위에 쌓인 눈이 처마 끝에 고드름을 빚고 그 끝에 맺힌 물방울들.
물방울은 서서히, 조금씩 커지는데 햇살에 반짝이면 영롱한 보석같다.
고드름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며 ‘통통’ 맑은 낙수 소리를 낸다.

낙수 소리는 고드름이 아주 늦게 녹아 처음엔 소리 간격도 뜸하지만,
햇살이 따듯해질수록 점차 그 낙수소리 속도가 빨라지면 봄의 교향곡
땅바닥에 홈이 패이고 홈마다 흥건히 물이 고이면 더욱 아름다운 음악.
이따금 처마 끝 고드름이 통째로 하나씩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기도 한다.
이 무렵이면 개울가에 두터운 얼음장 밑에서도 "돌돌" 물이 흘러가는 소리

봄눈 위로 눈보라 소리와 설피를 신고 눈을 밟는 소리
산마루에서 봄바람에 마른 갈대끼리 부딪쳐 우는 소리
겨우내 마른 잎을 매단 참나무 숲에서 낙엽 구르는 소리

싸리비로 낙엽쓰는 소리, 벼 이삭 부딪히는 소리.
장마철 불어난 계곡물, 폭우, 우박 떨어지는 소리.
문수골은 사계절 자연이 빚는 소리가 아름다운 곳. 



토종벌. 



피아골 일대를 비롯 문수골은 토종벌 보호구역으로 지정.
토종벌통에는 수십수펄을 거느린 여왕벌 1마리가 통치자.
이천 마리 일벌이 위계질서를 이루고 분업생활을 하며 산다.
봄 여름 가을 동안 모여진, 하얗게 엉겨붙은 꿀을 가을에 채취
5월 경에 새끼벌을 칠 때에는 사람이 벌통 주위에 상주한다.

이들을 새 벌통에 입주시키지 못하면 까다로운 일이 벌어진다.
분가할 수천 마리 벌들이 주위를 맴돌며 나무나 바위에 머문다.
이때 (2~3시간 안에) 새로운 벌통으로 옮기지 못하면 집단가출.

벌들이 산속으로 도망가 새집을 만든 것이 '자연석청'.
바위틈이나 고목 통나무 속에 살며 꿀을 채집하며 산다.

꽃을 찾아 이동하며 치는 양봉꿀
제자리에서 이동 없이 치면 토종꿀.
토종굴은 효과가 뛰어나 고가에 팔린다.

지리산 주민들에게는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유망한 소득업종.
덩치 큰 양봉벌이 토종벌을 공격해 보호구역내에 양봉은 규제.
가끔 남의 집에 잘못 들어간 벌은 그 집 벌들에게 호되게 혼난다.

'기하학적 육각형 벌집을 짓는 벌들의 공학세계는 놀라울 뿐.'



문수사.

 

 


 

 문수사로 오르는 도중 '하늘아래 첫동네' 같은 마을.

상당히 경사지고 깊은 산속인데 인가가 있어 놀랍다.

다랭이논., 벌통들., 왕시루봉 아랫 마을인 '영암마을'.

800m 고지에 시원한 지리산 샘물. 

일주문을 대신하는.,문수사 아취형., 등나무.

 문수사에서 다람쥐를 쫓아 뛰어 다니는., 개 두마리.

개가 무서워 내려오지도 못하고 엉엉 우는.,어린아이.

3층 목탑으로 된 문수사 대웅전.

1998년 9월 고봉 주지스님이 건립

좌청룡 우백호 기운이 뚜렷한 문수골 문수사

백제 성왕 25년(서기 547년)에 연기조사 창건

 

그 뒤 저자거리에서 불법을 선양한 원효대사,

해동 화엄의 종조가 된 의상법사를 비롯하여

윤필, 서산, 소요, 부유, 사명대사 등 수행정진.

고당 청허당 스님 젊은 시절 수행처

 이때의 한 고사가 전해져 내려온다.

불법을 깨우치기 위해 수도하던 중

걸승이 찾아와 함께 수행하기를 요청.

 

처음에는 식량이 모자라는 터라 거절했지만

노승의 청이 너무 간절해 같이 수행하게 되었다.

 

밤잠을 자지않고 수행에 전념하던 어느날,

노승이 새벽녘에 주장자를 앞산으로 날려

황룡을 만들어 타고는 안개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문수사는 성불하는 수행처로 알려졌다.

임진왜란때 일부가 왜병의 난입으로 파괴된 뒤

불당을 조성하지 못한채 6.25 사변을 맞아 전소

 

1984년 요사채를 세우고 1988년 옛 대웅전 터에

지금의 고금당선원을 건립하고 진입도로를 완성

이어 문수전, 삼성각, 고봉선원, 방장굴, 설선당 건립

석축을 쌓고 삼층법당 대웅전을 건립 오늘에 이르렀다.

 

범종각에는 문수사 중창불사때

스님들이 사용했던 지게들이 정렬.

 

반달곰은 네마리를 시주받아 두마리는 지리산에 방생하고

두마리는 사나워서 우리 안에 있다.'고 안내문에 씌여 있다.

반달곰에게 먹이를 주고 바라보는 스님.

반달곰은 새끼를 포함해 다섯마리가 있다.
오천원을 불전함에 넣으면 참외 하나를 준다.

곰들 사이에서 참외 쟁탈전이 격렬하다.

참외를 먹지못한 곰은 괴성을 질러댔다.

 문수암

 문수전


삼성각

고봉선원



높은 산에 위치해 있지만 관람객들이 조금 있는 편.
곳곳에 있는 식수는 매우 깨끗하고 시원해 꿀꺽 꿀꺽.

 문수사를 내려오는 중에 계곡물..

나무 그늘이 없는 것이 조금 아쉽다.

문수사는 다람쥐와 야생화들의 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