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31 ( 환향녀. 이태원. 용수골. 베틀. 모시, 무명. )

donkyhote 2010. 10. 16. 21:27

 

 

 

환향녀.



'천왕봉 천왕성모,
가락국 마야부인,
신라의 선도성모.
'
고대 사회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여성들.
신석기시대부터 고대국가까지의 모계사회

철기시대에는 약탈과 전쟁으로 씨족시회 해체.
강력한 가부장제도로 전환되며 모계사회 해체.

고구려의 데릴사위 제도도 사라지고
남녀 간 불평등은 점점 더 커져갔다.

일부 모계사회조차 남녀평등 사회로 뒤바뀐다.
약탈에 맞서 싸우려면 강한 남자 힘이 필요한 탓.

모계사회 제사장이자 통치자 무당.
남성을 제사장을 섬겨 씨족을 보호.

성상납 조공이 관행화 되던 철기시대.
모계사회의 무당은 기생으로 전락한다.

한반도에 불교문화가 꽃 피고
전쟁이 잦아지자 남성 중심사회

이조시대 빈번했던 외침
유교관의 남성 지배사회.

한반도 여인들의 수난사
이 때부터 본격화 된 듯.

이조 때 간통은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강간죄는 피해여성의 행실에 따라 처벌수준이 달랐다.
당시 '강간은 없다'는 통념 탓에 화간으로 오해받은 탓.
부정한 여성에게 내린 장 80대는, 죄질에 비해 가벼운 형.

태형(笞刑) 장형(杖刑) 의형(岺刑)
비형(흙刑) 궁형(宮刑) 묵형(墨刑)

태형은 가장 가벼운 신체형으로 회초리로 볼기를 치는 것.
옷을 벗기고 맨살 위에 매를 때려 고통과 수치심을 주었다.
원래 궁녀들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행했던 궁궐의 태형.

곤장은 원래 군사 기강을 세우기 위한 형벌.

장형은 곤장이며 여성이 간통 또는 화간을 행하면 곤장 100 대.
곤장 100 대 이면, 남자도 못 견딜 죽음에 이르는 가혹한 형벌.
여인들에게 외간 남자와 얼굴조차 마주치기 꺼려하게 만든 악법.

이조시대 축첩제도 공인
여성의 투기는 칠거지악.

남성 스캔들은 일반화 되었지만
여성 스캔들은 철저히 응징했다.

이조시대 간통녀 유감동은 세종 때의 실존인물이다.
이 사건은 세종 9년 9월16일의 최종 종결까지 두 달.

'그당시 40명과의 간통녀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감동은 사형, 간통 남성 20명은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유감동의 간통죄를 감면하여 곤장 110대.
간통죄는 곤장 100대지만 유감동은 양반 유부녀라 보너스 10대.

형벌의 수치심을 더하기 위해 옷을 벗기우고 매맞은 유감동.
형벌을 받은 후 천민 신분으로 강등 후 지방 관기로 내친다.

남자들은 곤장 40대, 태형 50대, 파면, 등등의 가벼운 판결.
그것도 사대부 양반 남성은 대부분 속전을 물고 처벌을 모면.

성종 11년 10월18일 어우동 역시 같은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
어우동 남편 방산수가 지목한 간통한 남자들에게 가벼운 판결.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김휘 정숙지 등등 간통한 사대부들.

어유소·노공필·김세적은 석방하여 신문하지 않았고,
김칭·정숙지 등은 한 차례 형신(刑訊)하고 석방했다.
그외 모두 다 2년 뒤에 풀려났다(성종 13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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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청나라에서 돌아온 환향녀 3만 5천명의 잃어버린 정절.
인조는 홍제천에 몸을 씻으면 그 허물을 탓하지 말라했던 아픈 역사.
하여, 오늘날 홍제동, 모래내 일대의 홍제천(연신내)이 '회절의 강'.

당시, 속전을 물고 심양으로 끌려간 사대부 여인들만 환향.
노예로 팔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던 고려 여인들도 많았다.

속전이란 죄인이 잘못을 속죄하며 용서 받으려고 내는 벌금.
이조는 국고를 바닥 내 3만 5천 환향녀를 데려올 수 있었다.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갔던 여인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청나라에 붙잡혀갔을까?'

그당시 청군 감시를 피해 갓 쓰고 몰래 도망쳤던 남장 여인들.
갓쓴 애 같아보였기에 갓쓴 아이 -가스나이 -가시내가 되었다.
오늘날, '가시내'라는 말의 어원에는 그만큼 슬픈 역사가 있다.

당시 청나라에 끌려가던 사대부 여인들은 한결같이 굳게 다짐.
“만약 청군에게 수모를 겪고 정절을 잃으면 차라리 자살하겠다.”
그러나, 대부분 청군에게 몸이 더럽혀질 대로 더렵혀져 돌아왔다.

목숨을 부지하려 청군에게 온갖 추파와 수모를 던지기도 했었다.
당시 목숨걸고 정절을 지키려던 여인들은 온갖 고초를 겪었던 탓.
하여, 환향녀에게 정절을 잃고 몸 버린 그 잘못을 물을 수 없었다.

그래서 홍제천에 몸 씻은 환향녀는
"허물을 탓하지 말라" 했던 것이다.

홍제천은 이조시대 홍제원계(弘濟院契)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홍제원(弘濟院)은 중국 사신을 위한 여각으로 홍제동 131 번지.
한양에는 4 원(홍제원 보제원 이태원 전관원)의 여각이 있었다.

홍제원은 중국 사신이 4대문 안에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 휴식처.
원래 예복을 갈아 입는 곳이지만 중국사신의 여독을 풀어주던 곳.
홍제원은 나라에서 직접 운영했으며 오늘날 국빈관과 같은 곳이다.

홍제천은 북한산 문수봉·보현봉·형제봉에서 발원해 종로구·서대문구·
마포구 일부 또는 전역을 포함해 3개 구 15개 동에 걸쳐 흐르는 하천.
그 하천이 모래 밑으로 스며 흘렀던 탓에 일명 ‘모래내’ 또는 사천(沙川).

환향녀들의 자살한 시신이 즐비하게 널려있던 곳.. '홍제천'.
어떠한 사연이 있었기에 환향녀들이 그곳에서 자살한 것일까?

1648년 국고금 은 2천5백 냥으로
3만 환향녀들이 풀려나게 되었다.

당시 국고금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이조가 청나라에 담배를 수출해 번 돈.
담배가 실록에 처음 등장한, 광해군 일기.
병자호란 환향녀를 사오는데 톡톡히 한 몫.

남초(南草)란 담배가 일본산 임을 의미한다.
담배는 당시 청나라에 수출한 대표적인 상품.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알았던
환향녀 가족, 친지들이 환호는 잠깐.
환향녀로 고향에 돌아온 기혼 여성들.

갈 곳이 없는 사례가 속출하기 시작.
멸시와 비난의 눈총을 감당할 수 없어
청나라로 되돌아가는 환향녀도 많았다.

결국 인조는 환향녀를 데려온 최명길의 진언에 따라
전국 고을마다 강을 지정, 지정한 날 몸을 씻게 하고
그것으로 심신을 닦은 것으로 간주 맞아들이라는 전교.

도성과 경기도는 한강의 홍제천,
강원도는 소양강, 충청도는 금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

각각 회절강으로 삼고, 귀가시켰다.
그러나, 양반가는 받아들이기를 거부
당시 회절강에서 자살한 수많은 환향녀.

정말 어렵게 고향에 돌아와 받았던 질타와 수모.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냉대는 견디기 힘들었던 듯.

이조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전국 도처에서 벌어진 집단 이혼소송.
환향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항의 때문.

특히, 미인이 많은 의주에서 평양까지
벼슬아치나 사대부 가문에서 더욱 극심.
청나라에서 가까워 환향녀가 더 많던 지역.

불모를 피해 조혼한 유부녀까지도
청군의 전리품에서 예외는 아닌 탓.

국법은 이혼을 허락 않는 대신에
축첩을 허용해 실질적 이혼 판결.

그 이혼 판결은 가문에서 버림받고
눈총 받던 환향녀를 두 번 죽인 결과.

환향녀는 바느질품 조차 팔 수 없어
천민에게도 몸을 팔 만큼 곤궁한 처지.

남편도 돌봐주지 않으려 했고
누구도 일감을 주기 꺼려한 탓.

남자들이 나라를 못 지켜 여인들이 고초를 겪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부 가문일수록 절개 정조를 운운
며느리는 물론 딸도 받아들이지 않아 목매거나 우물에 투신.

우리나라 도처에서 자살사태가 일어나
회절강 가에는 환향녀들의 주검이 즐비.

인조 다음 왕인 효종은 북벌을 준비 중 좌절.
청나라와 전쟁을 치룰만한 국력이 없었던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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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어떤 이유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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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 뒤 후금과 이조는 형제지국
그러나, 이조는 해마다 무리한 조공에 응하기 힘들었다.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 또한 문제.

북쪽 오랑캐 후금과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후금은 정묘호란 다음해 내몽골 챠하르를 침공.
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골의 점령한 후 북경까지 공략.

청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변경.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정예 병사 3만 명까지 요구했고 이조는 조공감액 교섭을 실패.

그 다음달 후금은 이조에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공급 요구
1636년 용골대 마부대가 인조의 비 조문을 와 '군신의 예' 강요

이조 신하들은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 사신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청나라로 도망.

이조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 서도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청나라로 도망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 내용을 알게 된다.

1636년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숭덕으로 개원하고 태종은 관온인성 황제 존호.
즉위식에 참가한 이조 사신들이 신하국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태종은 귀국하는 이조 사신에게 국서를 보낸다.
이조에서 왕자를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침략한다는 협박
이 국서를 받은 이조 조정은 격분하여 나덕헌 등을 유배

청나라를 배척하는 신하들은 최명길 이민구 등을 탄핵했다.
청태종은 그해 11월 이조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을 통보.
이조가 반발하자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직접 이조를 침공.

청태종은 명나라가 이조를 지원하지 못하게 해로 봉쇄.
12월 2일 만주족 몽골족 한인 2만 대군으로 이조 침공.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10 일 만에 한양까지 육박했다.

이조는 12월 13일 봉림대군(훗날 효종), 인평대군 강화 피난.
그날 밤에 인조도 세자와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청군을 피해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와 밤늦게 남한산성에 도착.

다음날 새벽 인조는 강화로 향했으나 산길이 미끄러워 포기.
인조는 1만 3,천 군사로 성을 지키고 명나라에 구원병 요청.
이때 성 안에는 군량미 2만 3천 6백석 약 50일 분량의 양식.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많은 군사들이 남한산성으로 몰려왔다.

이조가 기대한 명나라 원병은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
청태종은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12만 명의 청군을 집결.
청군은 이조가 맹약을 깨뜨렸다며 강력 응징할 것을 표명.

이틀 후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화에는 세자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난
패전하여 빈궁과 대군 이하 200 명 포로가 남한산성으로 호송.

인조는 항복을 결심하고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 의식
이조는 청나라를 향해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을 요구.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사신을 청나라에 내조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화의가 이루어지자 청태종은 돌아갔으며,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 선양으로 갔다.

청군은 돌아가던 중 가도의 동강진을 공격했고,
이조는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청군을 도와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괴멸.

병자호란 후 조선은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을 정기적으로 보내 이조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 1639년에 거절한 바 있고,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소극적인 협조.

임경업 장군의 군함 30 척은 풍랑을 만나 표류하고
이때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전력을 자세하게 알렸다.

1643년 이조가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은 청나라 선양으로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명나라를 정복하고 베이징 천도한다.

1645년 청은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이조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인조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전후 처리는 일단락되었고, 조공 조건 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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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말기엔 유림 당쟁으로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
구한말 한일합방 이후엔 여성들이 일본군들의 정신대.
1945년 해방 후 5년 만에 6.25에 참전한 UN군과 미군.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한 1637년 1월 30일
1259년 4월 몽고에 굴복한 역사까지 국치일이다.

1231년부터 몽고의 고려침략은 고종 46년(1259년)까지 28년 간 일곱 차례
고종 41년(1254년) 7월 원나라 장수 차라다는 2년 동안 20만 6천 8백명 인질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원나라로 인질들이 잡혀간 이후에도 공녀를 공출

이런 가운데 더 한심한 것은 고려에서 징발된 황제측근 내시들의 횡포.
그들은 황제의 밀지를 갖고 있다는 핑계로 고려의 어린 처녀들을 징발.
그들은 그 처녀들을 원나라 고관들에게 바치고 자기들의 이익을 챙겼다.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은 참상을 보다못해 원나라 황제에게 보낸 편지.

(代言官請破取童女書);

".... 그들이 모집한 처녀들의 수는 많을 때에는 사오십 명씩이나 됩니다. 이렇게 선발된 처녀들의 부모와 종족들은 한자리에 모여 미친 듯이 울부짖으니 그 애처러운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질 않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들이 사신의 행차를 따라 이 나라를 떠날 때에는 옷깃을 잡아 댕기며 엎어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쓰러지기도 하니 그 슬픈 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또는 목을 매어 죽는 자도 있으며, 피눈물을 흘리다가 시력을 잃는 사람도 있어서, 이러한 참혹한 정상을 일일이 다 여기에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례는 고려가 이조로.. 중국 원이 명이 된후에도 여전.
명나라 3대 황제 성조는 유난히 이조의 여인들을 좋아한 탓에
이조에서 뽑힌 공녀들이 명나라 황실로 들어간 사례가 많았다.

운 좋게 황제의 사랑도 받았지만, 후궁들의 투기로 억울한 죽음
황제가 죽을 때에 수십 명이 함께 무덤에 생매장 당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 상 외침으로 대동강 이남을 지킨 나라는 신라 뿐인 듯.

병자호란을 겪고나서 인조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지난날의 잘못을 생각하면 후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고 단련, 환란에 대비하려 했지만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려면 백성이 곤궁." -중략 -

...........이조 16대 왕 인조(1623~1649)는 어떤 인물인가?.................
선조의 손자이며 원종의 아들.1607년(선조 40) 능양군(綾陽君)에 진봉.
광해군의 폭정으로 반정이 일어나 왕위에 올라 반정공신에게 논공행상
이때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공주(公州)로 피난갔던 왕.
친명 배금정책을 취하다가 16 27년 후금이 쳐들어오자 강화도로 피난살이.

강화에서 피난살이할 때 임금 밥상 위의 놓인 생선구이.
이 생선은 이름을 무엇이라 하는고? '묵'이라 하옵니다.
묵이라니 이렇게 맛 있는 생선을..은어라고 해라. "네이."

전쟁이 끝난 후 피난시절에 먹었던 음식을 다시 찾은 왕.
이 생선의 원래 이름이 무엇이었던고? '묵'이라 하옵니다.
에이!~~다시 먹어보니 맛이 없구나. 도로 묵이라고 해라.

정묘효란 당시엔 정묘화약으로 후금과 '형제의 의'를 맺고 환도.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피난 후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
남한산성에서 맨발로 나와 청태종에게 21번 예를 갖추고 '군신의 의'.
1639년 청(淸)나라 요구로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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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수치스러운 역사를 감추려 애썼다.
그 바람에 우리나라 역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이제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솔직히 밝혀 거울삼아야 할 때.

'하늘문 열쇠’를 펴낸 양점숙 시인
'한국 시조 시인 협회장' 상을 수상.

시상식 소감 도중에 애착이 가는 시를 묻자
양점숙 시인은 ‘환향녀’한 편을 손꼽았다.

'정신대 할머니들의 삶을 다룬 시'.





환향녀

"그 소녀의 상복은 역사를 알 수 없었다.
조국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눈물로..
날려간 바람의 땅은 짓무른 늪이었다.

눈물로 깨어나는 땅, 잠든 모천의 여울목.
육신의 핏물이 번져 망향의 강을 이룰 때
명치 끝에 갈대를 심고 그 소리로 울었다.

- 양점숙 作 -


“어린 시절 경기도 주변에 정신대 여자들이 살았어요.
웃어른들은 환향녀라 불렀는데, 웬지 까닭 모를 슬픔이..
커가며 알게된 것은 남자들의 무능력으로 태어난 희생자
그런데, 여성의 굴레로 남았다니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요?”

그렇다. 한반도 여인들의 수난사. 무능한 남자들 잘못.
우리나라 여성들에겐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늘진 미소.

'기쁨도 슬픔도 아닌....,경계심이 가득한 미소.'




이태원.




서울 용산구 이태원은 서울 속의 외국인 거리.
상가마다 외래어 간판이고 외국인 인파가 많다.
한강과 가까운 이곳은 주한 외국인 군사 요충지

배리(梨), 클태(泰),사원원(院).,이태원

배가 많이 열리는 곳이라 하여 명명된 이태원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적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
그당시 비구니 사찰 운종사(雲鍾寺)가 있었던 곳

주둔한 왜적이 여승들을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정은 왜군에게 겁탈 당해 낳은 아이들 문제로 고심
보육원을 지어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비구승들이 기거하는 곳이 이태원,
다를이(異),애밸 태(胎),사원 원(院)
즉, 이국인들 애를 밴 사원이라는 뜻.

임진왜란 때 귀화한 왜군들이 살아 이타인(異他人)
효종 때 배나무를 많이 재배했기에 이태원(梨泰院)
그후 여행자 숙소 원을 지었다해서 지금의., 이태원



병자호란 이후에는 환향녀 마을이, 용산 이태원.
이태원은 가문에서 버림 받은 여인들이 살던 마을.

임진왜란 구원군, 명나라 군인,
병자호란 당시에는 청나라 군대.

구한말 이후 100년간은 일본군
현재까지 미 8군 주둔지인, 용산.

영광보다 치욕과 통한으로 점철된
'외국군 주둔지’를 재조명해 보자.

................이태원의 유래..........................
지하철 4호선 삼각지 역에서 전쟁기념관 쪽.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용산 미군부대 80 만평.
그 주변은 1950년 6.25 이후부터 환락가 밀집 지역.

용산 효창동의 심원정 터와 500년된 은행나무 터.
1593년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구원군이 주둔한 곳.
왜군과 세차례 강화회담을 벌린 기록이 남아있는 곳.

1592년 압록강까지 진출한 왜군이 명군에 밀려 한성까지 후퇴.
1592년 2월 12일 행주산성 권율장군과 명군에 의해 왜군 참패
1593년 3월 7일 명장 심유경과 왜장 가토오 키요마사가 1차 협상.

회의 장소 : 용산강 인근 심원정
(용산강은 한강 지류인, 원효로 4가)

1593년 3월 15일에 2차 교섭,
4월 8일에 3차 교섭을 했던 곳.

이 화의는 개전후 첫 강화회담

.......명군 측이 왜군에게 제시한 내용............
▲조선 영토 무조건 반환,
▲인질로 잡힌 임해군, 왕자, 대신을 송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죄를 전제로
한일 왕 책봉 등에 관한 3개 항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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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 측이 명에게 제시한 내용..............
▲명의 대일강화사 파견,
▲명군의 요동 철수,
▲조선의 왕자와 대신 송환,
▲일본군의 한성 철수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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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일본에 위장 강화사를 보내 양측 화의는 결렬
이조는 정유재란 및 병자호란까지 전란에 휩싸인다.

임진왜란 30년 전후로 2회 청의 침략
용산은 청나라 군대의 주둔지가 되었고
이태원은 임진왜란 왜군 포로들의 귀화촌.

하여, 이타인(異他人)이라 불린 곳,
가문에서 버림받은 환향녀들의 마을.

정절을 잃고 사대부 양반 가문에서 버림받은 환향녀들.
임진왜란 후 귀화한 일본인들만 수용해 살게했던 이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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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최초로 정치 세력이 등장한 백제시대.
마한을 정복하고 세력을 확장해 용산을 장악.

이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
5세기 경 77년간 고구려에 편입

통일신라시대 용산은 한산주, 한양군 관할.
고려시대에는 양주, 남경을 한양부에서 관할,
이조 말기에 한양부 용산방으로 행정구역 개편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며 경기도.
1911년 4월 경성부내에 5부 8면제를 실시하며 용산방이 용산면이 된다.
1943년 6월 구제를 실시, 경성인구가 늘어 용산구역소가 해방후 ‘용산구’




용수골



지리산 불무장등과 솔봉장등 사이에., 도투마리골.
도투마리처럼 허리가 잘록한 계곡이라 붙여진, 지명.
불무장등 아래 피아골 지계곡 중 하나 용수골(龍水谷)

'즉, 삼도봉에서 피아골 산장으로 흘러내린 용수골.'

도투마리골 및 용수골은..베틀과 관련 깊은 지명이다.
베틀 실이 끊어지지 않으려면, 덥고 음습한 곳이 적지.
도투마리골은 베틀로 옷감짜기에 적당한 자연환경일듯.

1950년대 중반 이후 산업화로 사라진 베틀 움막들.

1363년 원나라에서 금수품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
장인과 함께 3년 만에 목화 재배 성공 후 물레 보급
누에 면사에서 목화 목면포(木綿布)로 섬유문화 혁신

목화는 송 말(宋 末) 원 초(元 初)에 처음 보급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목화재배 시기는 고려말.
60cm 가량 땅을 판 반지하에 어둡고 비좁은 움집들.

여름용 모시 원단은 용수골에서 주로 생산했을듯.
'전설의 고향' 피아골 종녀촌은 용수골로도 추정된다.
전설 속 거대한 남근 석상은 용수골이 용주골로 변한듯.

가뭄에 마르지 않는 용수(龍水)가 있어야 베짜기 적지
용수골(龍水谷)에 그 움막들 흔적이라도 있을 것 같다.
반지하에 어둡고 좁은 베틀마을 움집, 또는 도투마리집.

..................농촌의 가옥 형태...................
도투마리집 : 퇴 없이 몸칸만 세마루집으로 이루어진 집
외통집 : 몸칸은 외줄로 하고 앞뒤에다 퇴를 덧붙이는 집
겹집 : 두줄백이집(충남), 복판에 퇴를 설치 기둥이 3~4줄

양통집 : 집의 간잡이가 두 줄로 설치, 기둥은 세줄
사방집 : 전면 3칸, 측면 3칸의 세마루집 또는 세겹집
똬리집 : 사방집 복판을 뚫어서 지붕이 똬리 모양인 집.

뜰집 : 똬리집보다 가운데 복판이 커져 안뜰이 있는 집.
입구자집 : 집의 평면이 입구(口) 자 모양으로 생긴 집.
곱패집 : 곱은자집 또는 꺾음집, 집 평면이 ㄱ 자 모양.

두二자집 : 한 일(-) 형태 안채와 행랑채(또는 아래채)
안팎채 : 제주에서는 안거리, 밖거리를 합쳐서 안팎거리
경기도에서는 곱은자 안채와 행랑채를 합쳐 안팎채라 한다.

옹팡집 : 귀틀집의 다른 이름(당진)
담집 : 전면을 제외한 3면을 담으로 쌓고
전면과 지붕틀만 뼈대로 담에 기대 지은 집

둑집 : 담집의 일종으로서 벽체를 둑으로 만든 집
벼름집 : 대장간 대용으로 농기구 등을 벼르는 용도
지붕 없이 담만을 둘러치고 입구만 설정하여 이룩한 집.

너와집 : 전나무를 도끼로 쪼갠 판자로 지붕을 이은 집,
굴피집 : 지붕에 나무껍질을 2겹 내지 3겹 깔아 이은 집
죽실집 : 태백산맥 골짜기 산죽, 죽실로 지붕을 이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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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인물) 났다' - 속담.

과부가 용을 품어 낳은 아들.
용(龍)은 지신(地神)을 의미.

이조시대 민중을 중심으로 성행한 용화교.
1688년(숙종 14) 요승 여환이 일으킨 사건.
여환은 아내 원향, 무녀 계화(戒化) 등을 규합

"석가불이 다하고 미륵불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
경기도 양주군 청송면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전파.
그를 따르는 무리는 황해도·강원도 등지까지 퍼졌다.

“이제부터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다스릴 것.”

여환은 자신의 아내를 용녀부인이라 불렀고
그녀의 신통변화는 측량할 수 없다고 선전했다.
무당 계화는 정성인으로 탈바꿈해 민중들을 현혹,

용수골은 예나 지금이나 미륵신앙 발원지
격변기마다 서민을 선동하는 밀교의 근원지.
따라서, 용수골은 서민들의 애환이 가득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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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 용주골은 집창촌으로 변한 옛 용수골.
6.25 전후 UN군이 주둔하면서부터 현재까지 집창촌.
하천가에 있는 집 형태로 보아 옛날엔., 베 짜는 마을.

용주골은 용수골이란 지명에서 유래.

원래, 모시 짜는 곳은 무덥고 음습한 곳.
땅속 60cm 반 지하에 어둡고 비좁은 움막.
오늘날 집창촌을 연상하게 하는 베틀 움막.

베틀로 옷감을 짜는 마을이 있던 곳이 도투마리골.
덥고 음습한 도투마리골 인근에 으례 있는 용수골
용 한마리가 하늘로 올라간 자리에서 솟아난 샘물

그 샘물이 마르지 않고 흐른다 하여 ‘용수골(龍水谷)
용수골의 샘물을 식수 삼아 형성된 마을이 곧 용수골.
성풍속이 개방된 용수골이 다른 이름으로 변한 용주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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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와 대숲이 있는 숲속에 핀 무지개.
낡은 물레방아는 덜컹덜컹 玉水를 퍼내고
폭포 소리 우르릉거리는 숲 속 물레방아간

벼락치듯 물기둥이 내려박히면
온 천지가 물소리와 물안개로 가득
그런 때면 내 밖의 모든 것은 묻히고,
오직 내 안 모습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곳.

욕망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새벽 3 시.
폭포 물안개가 물레방아간 가득 뒤덮어오면
뜨거운 욕망 속으로 가슴 벅차게 빠져드는 곳.

교교하게 떠있는 달빛은 소나무 가지에 걸리고,
어디서인가의 두견새 울음소리가 마음을 흔들고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 속에서 물레방아간은 선경.


詩 - 용주골.

발자국에 짓밟힌 길이
비틀거리며 간다.

상처난 자리마다
반창고 붙이듯

한 겹 검은 아스팔트 피부를 이식하고
환하게 웃는 미소가 쓸쓸하다.

아직, 흙내음 풋풋한 신작로 속으로
이방인은 둔탁한 발자국을 찍으며
밤꽃 향기를 토악질 하고,

달빛에 몸을 반쯤 감춘 길이
자동차 불빛에 깜짝놀라
어둠 속으로 도망친다.

오랜시간 밟히고 밟힌
지친 길은 골목 속에 갇힌채
촉 낮은 전등 불빛에 발가벗겨진 상처들

상처 속으로
상처 밖으로
날마다 흐르는

알코올

이렇게 상처가 깊은게
발자국 때문이라면서
또다시 발자국을 기다리는

그 길에

목구멍에 가득 차오르는
가래침을 몇 번이고 뱉아보것만

용주골 그 짧은 거리를
지나오기도 전에
가슴 한 쪽을
쓸며가는 길 하나

누군가
나를 밟고 가는
발자국 소리 




베틀. 

 

옷감이 없어 헌 누더기 하나도 못 버린 시절
집집마다 무명이나 모시 삼으로 베를 짰던 베틀.
베틀로 옷감을 짜는 마을이 있던 곳이 도투마리골.

할머니 어머니 고모 누나가 번갈아 가며
북 속의 씨실과 베틀 위의 날실을 엮어
우리의 옷감 자료인 베를 짜던 기구였다.

베를 짜면 전신 운동이기에 땀이 나기 마련.
남정네를 설레게 하는 베를 짜는 여인의 노래.
지금은 옛 전설이 되어가고 있는., 베틀 노래

"달가운데 계수나무 동쪽으로 뻗은나무
금도끼로 쫏아내어 은대패로 밀어내어
모았도다 모았도다 베틀한채 모았도다

베틀치장 볼작시면 좌우한편 둘러보니
옥난간이 비었구나 앞다리는 동에동쪽
높게놓고 뒷다리는 남에남쪽 낮게놓고

부티라고 둘른것은 허리안에 둘른듯고
누름대는 호부래비 잉잇대는 삼형제요
자질스레 지는양은 강태공의 곧은낚시

여수강에 드리운듯 용두머리 우는양은
외기러기 쌍기러기 짝을잃고 우는듯고
헌신짝이 목을매어 지옥강에 왕래하고

뱁대이가 듣는양은 구시월달 시단풍에
가랑잎이 듣는듯다 바디집 치는소리
백옥천상 깊은골에 벼락치는 소리로다

쿵절쿵절 도투마리 정절통이 뛰는소리
베짠바닥 돌아보니 논위에의 얼음이레
뚝닥한필 짜냈구나 그베랑을 가지고써

앞도랑에 씻어다가 뒷냇물에 헤어다가
백옥같이 바래어다 서울갔던 서방님을
직령베고 도복베고 다문댓자 남았더니

요내적삼 베어보니 깃도없고 섶도없네
앞집에라 동시들아 텃밭머리 돌아가면
가짓잎을 훑어다가 섶을달아 못입으리

뒷집에라 동시들아 지난달에 줄에매던
그재주가 그만하면 텃밭머리 돌아가서
수숫잎을 훑어다가 깃을달아 못입으리

정절비단 섶에다가 수절비단 깃에다가
옷해논것 보아하니 어떻게나 좋았던지
벗었다가 입었다가.." -중략 - 




모시. 



저마를 재배하는 모시밭은 덮고 습기 많은 곳이 적지
모시 재배 적정온도 20-24℃, 연 강우량 1,000㎜이상
모시풀은 다년생 모시풀 뿌리를 옮겨 심어 번식 재배.

뿌리쪽 줄기가 황갈색으로 변하면서 2m쯤 되면 수확.
수확은 1년에 3회를 하는데 첫 수확은 5월말에서 6월초,
두번째 수확 8월초~ 8월하순, 마지막 수확 10월초~ 하순.

수확한 모시 껍질을 벗겨내고 속껍질로 만든 섬유 태모시
태모시를 상저, 중저, 막저로 품질 구분하는 일, 모시째기
모시날기, 모시 매기, 꾸리감기 후에 마지막으로 모시짜기.

모시 짤 때 건조하면 날실 이음부분이 끊어지므로
지면보다 약 60㎝ 낮게 땅을 파서 만든 움집을 이용

움막 방의 크기도 베틀을 겨우 들여 놓을 정도이고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협소하고 어두운 장소. 



 
무명 



무명 옷의 제작과정은 재배와 수확,
씨앗기와 솜타기, 고치말기, 실잣기,
무명날기, 베매기, 무명짜기.. 순서.

8월 중순부터 목화를 따기 시작,
처음 딴 목화가 가장 좋다 한다.

볕에 말린 목화를 씨아틀로 씨를 빼내 씨앗기
솜활 기구를 이용해 솜을 부드럽게 만드는 솜타기

탄 솜을 말판 위에 펴놓고 말대로 비벼 고치를 만든 후
물레를 이용해 실을 뽑아 가락에 감는 작업이.. 실잣기.

가락옷에 감긴 실뭉치를 댕이라 부른다.
무명 한 필에는 10개의 댕이가 필요하다.
샛골무명에도 칠새에서 보름새까지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십이새가 고작이다.
목화 5근으로 무명 20자 한 필을 짠다.

바디로는 40구멍이 한 새
한 구멍에 두올씩 들어가니
올로는 80 올이 되는 셈이다.

실 굵기에 의해 한 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하는 무명날기
날틀과 겉틀을 10자로 고정시켜 무명을 날고 베매기인 풀먹이기.

새에 맞추어 무명올을 바디에 꿰서 끝을 도투마리에 고정시키고
그것을 들말에 걸어 놓고 돌로 눌러서 고정시킨 다음에 풀먹이기.

매는 일이 끝나면 도투마리를 베틀로 옮긴다.
무명을 짜는 과정은 모시를 짜는 과정과 같다.
다른 것은 무명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

결은 실꾸리에서 속대를 빼고 실끝을 찾아내
물에 담가 속속들이 적신 다음 북에 넣어서
속실 끝에서부터 짜기를 시작한다.

이중 날줄이 교차될 때마다
북이 좌우로 오락가락하면서
바디집으로 씨줄이 들어간 곳을
앞으로 당겨 치며 씨를 다져간다.

베틀은 부티, 앉을개, 눌림대, 선자리, 끄신게,
도투마리, 뱁댕이, 시치미, 누운다리, 말코, 북,
바디 등 나무로 만든 여러 제품으로 이뤄졌으며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개발해 사용

운율(韻律)은 4.4조 4음보 부녀자들의 노동요
흥과 멋이 있었으나 1950년대부터 사라져갔다.
우리나라 섬유사업이 발달하면서 사라진 베틀.

바디 위와 아래는 나무를 끼워 바디집을 만들었고
또 베틀에는 베를 짤 때 그 모양이 좁아들지 않고
일정하도록 활처럼 등이 휘고 끝이 뾰족한 쇠촉을 이용,
짜여진 베 양쪽 끝에 꽂았으며 베를 짜 도투마리에 감으며
날실이 엉키지 않도록 대나무 뱁댕이로 사이마다 끼워 넣었다.

당시 농촌 주부들은 농한기에 온종일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짜며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시아버지, 남편, 시동생과 시누이, 아이들의 옷감.

오직 씨실 속에 시름을, 날실 속에 인생을 담아
베를 짤 때 고됨과 지루함을 잊기 위한 베틀노래
베를 짜며 삶의 용기와 희망, 인내를 잃지 않았다.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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