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32. ( 피아골. 피아골산장 .함태식 옹. 흰덤봉. )

donkyhote 2010. 10. 16. 21:29

피아골.




천왕봉 방향에서 노고단 방향의 지리산 종주.
노고단보다 임걸령 거쳐 피아골 하산도 바람직.
특히, 가을 꽃단풍 계절에는 경관이 환상적이다.

(지리산 제 2 경- 피아골의 단풍)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 계곡 단풍 = 지리산 10 경.
철쭉은 거울 같은 계곡 물에 그 고운 빛을 비추고
여름에는 햇살조차도 파고들지 못할 만큼 짙은 녹음.

가을엔 단풍이 아름답고, 겨울엔 눈꽃나라.
계곡 초입에 있는 연곡사와 국보급 문화재.

매표소부터 피아골 산장까지 6km 계곡길.
피아골 산장에서 임걸령까지 2km 능선길.

연곡사-직전마을-피아골 산장
여름철 피서지로 잘 알려졌다.

특히, 단풍 아름다운 가을에
삼홍소 인근의 계곡미는 압권.

<삼홍소>란 어떤 뜻일까?

<골짜기를 붉게 물들인 단풍의 아름다움.
<수면 위를 붉게 비추는 단풍의 아름다움.
삼홍소 주변에 수북히 쌓인 단풍의 아름다움.

"온 산이 붉고
계곡 물이 붉어
사람 마음도 붉다"

남명 조식 作., 삼홍시.
삼홍소는 삼홍시에서 유래.

<피아골 단풍제> 산신제는 10월 말.
1977년부터 계속 이어 온 연례 행사.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11월 초.

반야봉 중턱에서 발원한 맑고 깨끗한 개울.
임걸령- 불무장등 - 피아골 - 섬진강 - 남해.

임진왜란, 한말(韓末) 격동기,
여순 반란사건, 6. 25 전쟁 등
전란이 일때마다 격전지., 피아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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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단풍은 다른 골짜기에 비해 유독 붉다.
그 단풍은 수탉의 붉은 볏처럼 싱싱해 보인다.
이곳 단풍이 고운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연곡사 아래부터 섬진강 따라 다랑이논
바깥 세상에서 살길 없어 비탈에 일군 논.
그것마저 지주에게 빼앗기고 굶어죽은 농민들.

임진왜란이 일자 왜놈들의 방화 약탈과 살인
경상도를 휩쓸고, 전라도를 더럽히려 할 무렵
피아골 입구에서 막지 못하면 나라를 잃을 판국

관군은 이미 있으나 마나 했던 상태라서
의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던 농민들
거기에 승려도 합세해 연곡사에 지휘본부

의병들은 왜놈들과 맞섰지만
무기부터 비교 되지 않았다.

의병들은 섬진강을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고,
힘이 모자란 그들은 피아골로 밀리게 되었다.
왜놈들은 의병들을 바위에 세우고 목쳐 죽였다.

칼을 내려칠 때마다 목 따로, 몸뚱이 따로
계곡에 곤두박질쳐 삼흥소가 시체로 넘치고,
피로 물든 계곡물이 섬진강까지 흘러 닿았다.

갑오년 농민전쟁으로 인해 피로 물든 피아골.
그때도 농민들은 목이 뎅겅뎅겅 잘려 죽었다.
조정은 왜놈들을 불러들여 청부살인권을 준 것

그후 한일협약을 계기로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때 전남 의병들이 몰리다가 최후를 맞이한 피아골
여순사건 때도 피아골로 쫓긴 군중들이 피를 뿌린 곳.

옛부터 피밭[稷田]이 많아
유래되었다는 지명., 피밭골.


..........................찾아가는 길..............................................
<코스 - 1.> 임걸령 -3.5Km- 용수암삼거리 -0.5Km- 피아골 산장
-1Km-구계포계곡 -1Km- 삼홍소 -2Km- 선유교 -2Km- 직전리
<총거리 10 Km, 등반시간 3시간 40분, 하산시간 2시간 10분 소요.>

<코스 - 2.> 노고단 산장 -4Km- 질매재 -1Km- 피아골 산장
-1Km- 구계포계곡 -1Km- 삼홍소 -2Km- 선유교 -2Km- 직전리
<총거리 11Km, 등반시간 4시간 10분, 하산시간: 3시간 10분 소요>

구례군 토지면 직전리에서 노고단이나 임걸령까지 울창한 원시림
숲속의 계곡따라 14 Km 오르는 단풍등산 코스가 가장 대중적이다.

구례 또는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오면 외곡리 검문소
여기에서 북쪽 2 차선 포장도로를 달리면 좌측에 연곡천
연곡사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토지면 내동리 평도부락이다.

여기에서부터 피아골 등산로가 시작된다.

연곡사 좌측 시멘트 포장도로따라 30분 가면 직전마을
피아골은 양봉 토종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
선유교 철다리 건너 계곡 우측 오르는 곳에서 식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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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산장 ( 061-782-9675 )



피아골 산장은 공포체험을 즐기기 적당한 산장
연인끼리 이곳에서의 하룻 밤은 잊지 못할 추억.
땀과 더위를 씻을 만큼 개울물이 풍부한 산장 주변.

붉은 단풍잎이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피아골 산장.
산장 터에서만 인골 한 트럭이 나왔던 빨치산 격전지.
나병에 효험 있다는 인골이 많아 나병환자 몰려들던 곳.

'귀신이라도 나올 듯 음산한 기운이 감돌던...귀곡'.
밤이면, 무덤을 파헤쳐 인골의 물을 마시던 나병환자.
그 음산한 곳에 폐허로 방치되다시피 했던 피아골 산장.

1988년 산장지기로 온.. 함태식 씨.
2006년 10월 말 현재 79세 산장지기.

그곳 산장을 새로 짓다시피 개보수,
지금껏 그곳을 떠나지 않는 산장지기.

피아골 버스종점에서 도보 2시간 거리.
수용 인원은 70명, 겨울에는 9시 소등.
<1박 5000원, 침낭 2000원, 담요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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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태평양 연안이라 옛부터 나병환자 많던 지역.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병기록은 고려 고종때〈향약구급방>
천포창(天泡瘡), 양매창(楊梅瘡), 음창(淫瘡) 등이 나병.

이조 문종(1450~52)은 1백여명의 나환자를 남녀별로 수용
고삼원 약으로 치료하면서 바닷물에 목욕을 시켰다는 기록
광해군(1608∼23)은 경상·강원·충청도에 환자를 수용 치료

이조 중기에는 무속신앙도 큰 몫을 했고 미신요법도 성행했다.
주술 기도 또는 인육이나 인골에 고인 썩은 물을 약재로 사용.
하여, 나병환자가 밤중에 무덤을 파헤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하여, 피아골 산장은 나환자가 많이 몰려들기로 소문난 곳.
산장 건립할 때 발굴된 인골이 많아 귀신 나올 듯 음산한 곳.
우리나라에서 객사한 시체는 집안에 들이지 않는 풍습이 있다.

그대신 맺힌 한을 풀 수 있도록
굿 또는 회혼제를 지내기도 한다.

물에 빠져 죽은 원귀에게는 수혼제,
처녀귀신에게는 영혼끼리의 결혼식.

아직껏 복권되지 못한 불명예스럽게 죽어간 빨치산들.
영혼마저 천도되지 못하고 구천에 맴돌아야 하는 영혼들,
피아골은 비참하게 죽어간 빨치산들을 떠오르게 하는 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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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의 詩.....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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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 숲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짓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짓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 지리산이여~~.. 

 

함태식 옹.



1928년 구례에서 태어나 순천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수학.
1970년부터 노고단 산장지기 였고 현재는 피아골 산장지기.
1991년 왕시루봉 외국인 별장지기 자원, 두 곳 지리산 지킴이.

그는 지리산을 찾기도 어려운 시절에 홀몸으로 노고단에 올랐다.
전란 중에 불 탄 외국인 별장을 산장으로 개조하려던 노력은 실패.
혼자 힘으로는 전쟁 통에 값 비싼 건축용 자재를 살 수 없었기 때문.
71년, 노고단에 무인 산장이 지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내려갔다.
관리인이 없어 쓰레기 더미가 된 무인산장을 보수해 산장지기로 정착.

전기불도 없는 무인고도 같은 산장에서의 겨울 밤 추위는 잔인했다.
무인산장에서 새우잠 자며 혹한을 버티느라 폐 한 쪽을 잘라내는 수술.
대부분의 산장지기처럼 그 역시 엄해 노고단에 쓰레기 버리면 하산 조치.
88년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직영관리 전까지 노고단산장에서 산장지기
그후 타의에 의해 피아골 산장으로 내려왔지만 그의 지리산 사랑은 여전.

지리산 중에 어디가 좋으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며
지리산에 산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행복할 뿐이라고 말한다.

요즈음 그는 왕시루봉에 올라가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산장지기 하며 사귄 산 친구들이 찾아와 귀찮게 굴기 때문.

그에게는 살아 생전에 언제나 변함이 없는 두 가지 소망.
여생을 지리산에서 살고, 죽으면 지리산에 묻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살다가 쓰러진 장소가 무덤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문명 이기와 동떨어져 수염 조차 깎기 어려운 산장지기 생활.
사람들은 그를 ‘노고단 호랑이’ 또는 ‘지리산 털보’라고 불렀다.
그의 삶 자체가 지리산의 유래이고 전설로서 길이 남을 것 같다.

2006년 현재 - '79세! 피아골 산장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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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산장의 에너지원은 태양열.
전기를 아낄 수 밖에 없는 산장의 밤.
겨울에는 밤이 더욱 더 길 수 밖에 없다.

해 저물면 곧 잠자리에 들게되는 겨울
해 뜨면 곧 일어나게 되는 산 속의 생활.
자연의 섭리에 맞춰 따라가게 되는 생활습관.

함태식 옹은 조미료 음식은 먹지 않는다.
무, 양파, 감자 등은 무거워 운반이 어렵고
또 막상 산에 가져다 두면 보관하기가 어렵다.

그 식품들을 살아 숨쉬게 보관하는 방법.
무의 머리를 잘라내면 무는 숨쉴 수 없다.
모든 사물들은 그 나름대로 생명력이 있다.

'산은 그 산에서 나와야 그 산이 보인다.'

피아골 산장에 파묻혀 있듯 살아가는 함태식 옹.
산 아래 내려오면 아름다운 곳인줄 알게 된단다.
피아골 산장에서 보는 흰덤봉이 아름답게 보이듯.

그안에 있을때는 아름다운 줄 몰랐다는 피아골산장.
늘상 바라보는 흰덤봉의 아름다움만 부러워했던 그.
그는 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인줄., 모르는지도 모른다.

 



흰덤봉. 



피아골 산장 동쪽에 눈에 띄는 암봉의 이름(뜻 : 흰 무덤).
흰 눈에 덮이면, 하얀 무덤인 듯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

피아골 산 아래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높아보이는 암봉이다.
그러나, 흰덤봉에 오면 고산중령에 가려진 일개 무덤에 불과.
산은 오르지 않고는 그곳을 말할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곳.

옛날 사명당(유정)이 피아골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곳 위에서
의병을 작전 지휘하던 곳이라고 전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흰덤봉은 무장 구례군당 유격대가 훈련받던 곳
1948년 10월 여순반란 사건 이후 구례군당 비트.

1948년 4월 28일 구례지역 반동 숙청 사건 후
구례군당 유격대장 박종하는 전투 능력을 발휘
이현상이 이끌던 남부군 총참모장까지 지내다가
후평 반전 후 남하하다가 경찰 유탄에 맞아 사망.

남부군은 딸뜨기 능선을 따라 지리산으로 재 입산
박종하가 죽자 단 한번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

남부군 지도부는 대원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오락회
달궁, 피아골 오락회에서 이현상이 직접 훈장 수여식
그 장소가 지금의 피아골산장 앞 흰덤봉 부근이라 한다.

그 후 토벌대의 동계토벌로 인해 세력이 약화된 남부군
1952년 봄에 피아골에서 보급투쟁만 하며 머물렀다 한다.
따라서, 흰덤봉 일대는 역사적으로 군사 전략 상 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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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부터 지리산 왕시루봉 외국인 별장의 별장지기
지금은 피아골 산장에만 전념하는 산장지기 함태식 옹.
피아골 산장은 양쪽으로 계곡을 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아침볕과 저녁볕이 아주 인상에 남는 곳이 피아골 산장.
1928년 구례 출생 노고 산장지기 18년후 피아골 산장지기
1971년부터 지리산의 삶을 빼고는 할 이야기가 없는 경력.

그가 조직한 지리산악회 활동으로 지리산은 국립공원 제1호.
국립공원 직영화로 쫓겨나다시피 했던 삶의 터전 노고단 산장.
1988년 1월4일.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에 도착한 피아골 산장

육체적 고통보다 마음이 아파 발걸음을 더디게 만든다.
61세의 나이에 유랑길에 오른 듯 들어왔던 피아골 산장.

저녁 노을에 붉게 물혀 눈덮인 흰덤봉의 장관.
흰덤봉이 붉은 얼굴 화사한 미소로 손짓하는 듯.
함태식 옹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었다는 흰덤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