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30. ( 씨받이촌. 씨내리. 나비부인. 병자호란. )

donkyhote 2010. 10. 16. 21:27

우리나라 왕이 외국 황제에게 무조건 항복한 적이 두 번.

고려왕이 원 황제에게,  또 한번은 조선왕이 청 황제에게.

청 태종에게 인조가 절하며 머리를 땅에 찧었다는 굴욕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만주풍습은

세번 무릎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다

이는 신하가 황제를 알현할 때 행하는 의식.

 

하지만 머리를 실제로 땅에 대는 것은 아니다

청 황제는 인조에게 이 의식을 요구한 것이다.

 

봉건시대 패전국의 왕은 평민으로 강등되거나 유배

인조는 비록 용포는 입지 못하지만 시종을 거느리고

백마를 타고 삼전도까지 갔으며 항복의식을 마친후에는

청 황제의 오른쪽에 앉게 되었으니 청이 많이 봐준 셈이다.

 

"용골대(청의 장수)가 말하기를

 

‘황제가 심양(瀋陽)에 있다면 (항복)문서만 보내도 되겠지만

지금은 이미 청 황제께서 삼전도에 나오셨으니 조선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 인조실록 15년 1월 21일 -

 

용골대가 말하기를

 

"항복에는 예부터 규정과 제도가 있소.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짊어지고 나가는

으뜸 절목은 참담하니 둘째 절목으로 하겠소.

 

오백명의 하인을 거느리되

위엄있는 용포 차림은 없애고

군사의 호위도 없애는 것이오.

 

또한 죄가 있는 자는 정문으로 나올수 없으니

서문으로 나옴이 옳소". - 비어고,  인조 15년 1월 28일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한(황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을 말하려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가 상을 인도해 동문을 나왔다가 동쪽에 앉게 하였다.

- 인조실록 15년 1월 30일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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