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25. ( 광한루원. 남원. 독우물굿. 판소리. )

donkyhote 2010. 5. 14. 02:13

광한루원(廣寒樓園).


섬진강의 요천을 끌어들인 광한루원.
요천(遙天)은 아득히 먼 하늘이란 뜻
하여, 우주를 뜻하는 광한루원의 연못.

3神 섬은 백두대간을 상징.

영주각 정자가 멋스러운 영주섬.
백일홍 붉은 꽃이 아름다운 봉래섬.
대나무 숲이 늘 푸른 오작교 옆 방장섬.

영주신은 백두산의 정기를 수호하는 산신령
봉래신은 금강산 황홀경을 지키는 산신령.
방장신은 지리산 불로초 지키는 산신령.

천신의 정기가 분출되는., 백두(白頭)
천신의 정기를 받아들이는., 봉래(鳳來)
천신의 정기가 만들어진다는., 방장(方丈).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오작교 건너 광한루.
춘향과 몽룡이 사랑을 속삭이던 광한루의 밤.
천상의 세계를 뜻하는 수중 누각 완월정(玩月亭)

춘향제 주요무대., 수중 누각., 완월정.

춘향이 흘린 눈물바다에 버선 던져 넣는 곳.
눈물 바다는 은하수가 되고, 버선은 북두칠성.
두 연인이 이별하며 바라 보았다는..견우직녀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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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 흘린 눈물바다가 은하수를 이루고
그녀의 버선이 북두칠성이 되었다는 발상.
도교 신선 사상에서 비롯된 흥미로운 설화.

...............방장...............
도교에서 3신이 살고 있는 3신산을 뜻함
불교에서는 주지가 머무는 사방 3m의 방.
3 神이 살고 있다는 지리산이 곧., 방장산.

사방 1丈(약 3m)이 되는 넓이 또는 방.

특히 선종의 선원에서 주지의 방을 뜻하나
주지 또는 스승의 존칭으로 쓰는 불교 용어.

유마(維摩)거사가 거처하는 방에서 유래.

방장은 원래 중국에서 청렴한 성인의 거실로 간주
이것이 '유마거사'의 간소한 거처와 결부되어 방장.

유마거사가 3만 2,000 좌석을 벌여놓은 법력에서 유래.
그러한 유래로 방장이 주지나 스승의 의미로 쓰이는 것
근래 큰 절의 주지(主持)를 가리켜서 방장화상이라 한다.

현재, 4사찰에만 있는 방장.

해인사의 해인총림(海印叢林),
송광사의 조계총림(曹溪叢林),
통도사의 영취총림(靈鷲叢林),
수덕사의 덕숭총림(德崇叢林)

'사방 3m 정자는 방장에서 유래.'
원래, 신선사상에서 유래된.,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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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찾았다가 뱀사골로 하산하면 귀가하기 바쁘다.
남원 추어탕 한 그릇 먹고나면 남원 구경 다한 듯 여긴다.
사실 남원까지 왔으면 광한루원은 꼭 한번 들러볼만 한 곳.

춘향전 소설속 이몽룡과 성춘향이 처음 만난 곳.

남원은 군사적 요충지였던 만큼 옛부터 관기가 많았던 고장.
남원은 옛부터 빼어난 기생이 많아 풍류와 문학이 발달한 곳.
우리나라의 고전문학 <춘향전> <흥부전> <변강쇠 전>의 무대.

'특히, 춘향전과 관련된 남원의 명소가 광한루원.'

광한루원은 우리나라 조경 역사를 대표하는 백제의 정원양식.
우리나라 정원양식의 뿌리는 이곳에서부터 비롯된 듯 보인다.
광한루원 연못속 3섬과 오작교는 백두대간과 견우 직녀를 상징.

'그러나, 얼핏보면 실망해 발길 돌리기 쉬운 곳.'

광한루원은 춘향전의 무대보다 우리나라 조경사에서 더욱 값진 곳.
백제의 정원 양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우주류 '고산수식'으로서 발전.
자연을 존중하는 이조의 성리학 우주관도 누원의 곳곳마다 담겨있다.

'누원 전체에 우주를 상징하는 요소가 가득 찬 명소.'

이를테면, 연못은 은하수, 연못의 세 섬은 삼신산(三神山)을 상징.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되새기며 흰눈이 쌓인 경내를 걷다보면
춘향전의 한 대목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문 밖 나가오면 광한루 좋사온데,
오작교 영주각은 삼남 제일의 승지로소이다”

- 춘향전의 한 대목 -

..........................광한루원......................................
광한루원은 전설 속 이상향을 그려 놓은 전통 조경양식.
춘향전 무대로도 알려졌지만 산책하기 참 좋은 조경공간.
광한루원 정문 '청허부'는 천상세계 월궁의 출입문을 상징.

달선녀 항아가 사는 월궁의 ‘광한청허부’
그 전설속에서 본딴 누각 이름이 '광한루'.

남원으로 유배왔던 황희 정승이 세운 '광통루'
세종 26년(1444년)에 정인지가 광한루라고 명명.
정유재란 당시에 불타 1638 년 현재 상태로 복원.

1462 년(세조 8년) 남원부사 장의국이 놓은 오작교.
길이 33 m 폭 2.6 m 높이 4m의 화강암으로 만든 다리.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금실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처녀 혼자 오작교를 밟으면 다리가 무너진단다.
연인이 함께 오작교를 건너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명소.

'춘향전을 보면, 이조 때 백성에게 개방된듯.'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이 시작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단오날 광한루에 올라 이몽룡이 그네를 뛰는 춘향을 보고
첫눈에 반한 곳..월궁 항아를 본 듯. 견우가 직녀를 만난 듯,

천상의 세계를 꿈꾸며

달이 뜨는 동쪽을 향해

지어진 수중누각 완월정.


전통적인 이조의 건축양식 누각으로

춘향제 행사의 주요 무대로서 쓰인다.


 

요천을 끌어들인

광한루원의 호수는

 은하수를 상징한다.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만날 때 까마귀와 까치들이 은하수에 모여
두 연인이 만날 수 있도록 서로 몸을 이어 만든 전설의 다리 오작교.
춘향과 이몽룡이 신분의 벽을 넘어 아름다운 사랑을 꽃 피운 다리이다.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일컫는.,전설 속의 삼신산.
그곳 열매를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나무가 있다.

신선이 즐겨 먹는다는 전설의 과일., 천도(天桃) 복숭아.

지리산 반야봉 심마니 능선의 산삼은 불로초.
금강산을 봉래, 지리산을 방장, 한라산은 영주.
광한루 앞 호수 안 전설의 삼신산은 세 개의 섬.

1920년대 춘향의 영정을 모신 춘향사를 건립
총 면적 21,113평의 광한루원(사적 제303호)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담긴 오작교를 비롯
광한루를 중심으로 춘향사당 춘향관, 월매집,
완월정, 영주각, 삼신산과 여러 정자와 누각들.

매년 5월 5일에 열리는 춘향제.

광한루원 완월정 상설 전통혼례식
4월 ~ 10월말 까지 일요일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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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광한궁...................
중국의 음력은 달이 지구를 한바퀴 도는 기간이 한달.
중국에서 음력 8월 15일은 가을철 중간이라 중추(추석)
추석엔 달에게 절하고 제사를 지내며 보름달을 감상한다.

<상아가 달로 오르다>(嫦娥奔月) - 중국 전설.

상아의 남편인 후예는 인민을 위해 해물을 제거하는 영웅.
두 사람은 장생불로하여 영원히 다정하게 살아가길 원했다.
하여, 후예는 천신만고 끝 천후에게서 불로장생 약을 얻었다.

후예의 제자가 이것을 알고 후예가 집에 없을 때
상아에게 그 약을 내놓으라고 상아에게 협박했다.
상아는 핍박에 못이겨 8월 15일날 그약을 삼켰다

상아는 가벼운 연기마냥 하늘로 날아올라
월궁에 자리잡은 선녀로 되여 후예와 이별.

후예는 나중에야 그 사정을 알게 되었으므로
더없이 슬퍼 뜨락에 과일과 식품을 차려놓고
상아를 향한 그리운 마음을 스스로 되새겼다.

마을사람들은 후예와 상아의 사랑을 귀히 여기고
해마다 8월 15일 후예처럼 달을 향해 절을 올렸다.
추석은 달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중국풍습에서 비롯.

중국 고대 기록에 의하면

2천년전 고대 제왕들이 봄에 해를 향해 제사를 지내고
가을에는 달을 향해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풍습.

달이 새벽에 이슬을 베풀기에 풍작을 이룬다고 여겼다.
북경의 '월단'이 명나라 황실에서 달에 제사 지내던 곳.
추석에 달을 감상하는 풍습은 7세기 당나라에서부터 유래.

'전설에 의하면, 보름달 감상을 즐긴 당명황제.'

어느해 8월 15일 달나라로 올라갔으면 하고 소망.
달나라 광한루 궁전 앞에서 선녀들이 춤추는 환상.
아름다운 선률에 따라 너울너울 춤추는 모습에 도취.

그 환상 속에서 들려왔던 달나라 음악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은 불후의 명작

그후 보름달을 감상하는 풍습이..중추절.
중추절은 농민이 농작물을 수확하는 시기
이날이 오면 술 마시고 춤추며 풍작을 경축.

왕공 귀족들과 문인 서생들에게는 낭만적인 명절
잔치상을 차리고 시와 가무를 즐기며 감정을 토로.
배월단, 배월정, 망월루 같은 유적들이 풍류의 명소.

둥근달을 모임의 상징으로 여기는 중국인들.

집안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달에게 행복을 기원
하여 추석을 단원절로도 부르며 월병을 나눠 먹는다.
'달의 상징' 월병은 둥근 다과로서 단원을 의미한다.

월병 안에는 설탕과 깨,계화,땅콩, 팥 등을 넣고
월병에 달과 상아를 그리고 광한궁 글자를 새긴다.

어른은 월병을 식구 숫자만큼 칼로 쪼개 먹는다.
그리고, 사람마다 월병을 한 덩어리씩 나눠준다.
그리고, 집에 없는 사람 몫으로 남겨 화목을 도모

하여, 타향에 간 사람들은 추석날이 오면
더없이 고향을 그리며 달을 바라보게 된다.
광한궁은 중국 중추절 풍습의 유래가 된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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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북해궁정은 지금의 북해공원.
북해는 원(元), 명(明), 청(淸) 시대
황성내 서원(西苑) 태액지(太液池) 일부

영대(瀛臺)를 남해(南海)라 부르고
초원(蕉園)을 중해(中海)라 부르고,
오룡정(五龍亭)을 북해라고 불렀다.

북해 지역은 당(唐)조 시대 계성의 동북에 위치.
북해 원림의 개발은 요(遼)나라때에 시작되었으며
금나라 시대에는 그 기반 위에 태녕궁(太寧宮)을 건설

태녕궁은 1179년에 완공되어 만녕궁으로 개명.

궁정에는 많은 집과 망루를 지었고
궁정의 밖에는 넓은 논밭이 있었다.

태녕궁 경화도에는 광한궁(廣寒宮)을 건설하고
태호석(太湖石)으로 장식한 금나라 황제 피서처.

원나라 4년(1267년) 경화도는 만수산으로 개명.
만수산이 위치한 늪을 태액지(太液池)라고 했다.

만세산 태액지를 중심으로 동부는 황궁,
서부는 륭복궁, 흥성궁으로 3 궁전을 건걸.
명나라 영락 18년 (1420년) 여러 차례 확장.

청나라 초기 광한궁 옛터에 티베트식 백탑을 건설
만수산을 백탑산(白塔山)이라 바꿨고 원림도 확장
광서 11년(1885년), 서원과 3해를 건설한 현재 모습.

1900년 7월 8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침입한 후
이곳은 일본,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 사령부
1925년 북해 공원으로 확정되고 8월 1일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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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7년(1461) 만들어진 오작교
춘향과 몽룡이 사랑을 맹세한 곳.
선조 15년 정철이 만들었던 삼신도

봉래섬, 영주섬, 방장섬 = 삼신도

선조30년(1597), 정유왜란으로 광한루 우주 파괴
선조40년(1607) 파괴된 우주의 작은 누각을 복원,
인조17년(1639) 남원부사 신감이 광한루를 복원한다.

정조18년(1794) 영주각, 1964년 방장섬에 방장각을 건립
춘향과 몽룡이 사랑을 속삭인 장소로만 알려졌던 광한루.

춘향과 몽룡의 발길을 따라 걷는 광한루.
춘향이 몽룡과 눈물로 이별을 했던 오리정,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버선을 던져 버린 곳.

하여, 오리정의 그곳이 버선밭.
춘향의 눈물로 이루어진 눈물방죽.

번창했던 월매 주막이 아련히 연상.

광한루는 보물 제281호. 남원시 천거동
춘향과 몽룡이 처음 만나 사랑을 느낀 곳.
1419년 남원으로 유배 온 황희 정승이 지은 누각.

광한루의 당시 이름은 광통루.

세종 26년(1444), 하동 부원군 정인지에 의해 광한루
정인지는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에 비유.
월궁 속 '광한청허부'에서부터 유래되었다는 광한루 이름.

칠석날 은하수 견우성과 직녀성의 만남.
그 전설에 따라 별에게 제사지내는 행사.
민간은 호박부침을 만들어 칠성신께 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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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원'은 백두대간 및 우주를 상징하는 백제 조경양식.
넓지 않은 정원에 세상만물 이치를 표현한 우주류 정원 양식.
일본으로 건너가 고산수식(古山水式)의 뿌리가 된, 백제 조경.

삼국시대 조원(造園) 기술이 가장 뛰어났던 백제.
백제의 조원기술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도 등장.
개로왕(475년) 때 궁궐과 정원 속에 정자를 지었다.'

당나라 도교(신선) 사상에 영향을 받은 백제정원.
백제정원은 왕궁리 유적이 왕궁임을 반증하는 단서.
백제 정원기술은 일본 조경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도교(신선) 사상............
중국에는 두줄기 사상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공자,맹자 중심의 유교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노자 장자 중심의 도교 사상.

유교는 먼저 개인적인 인격을 수양한 후,
치국평천하(治國平千下) 하여 행복을 추구

도교는 인위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오직 천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인식
모든 일을 운명 대로 따르는 것이 행복

하여, 유교는 중국 사회 상류계급에 침투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 위치에 있게 만들고,
도교는 일반인 마음을 위로하는 종교적인 경향.

'우리나라 조경 양식은 도교사상이 밑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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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서기 612년 기록..................
"백제인 노자공이 궁 남쪽 뜰에 만든 가산
수미산을 상징하며 그곳에 '오교'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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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원문화가 백제에 의해 시작됐음을 밝히고 있다.
일본 나라(奈良) 헤이세이큐(平城宮) 도엔(東院)에 복원
기암괴석 석가산과 정자 조성 등 왕궁리 백제정원과 흡사

'백제 정원은 귀족들이 소유한 지배층의 상징.'

백제 정원양식은 일본으로 건너가 더욱 성역화.
일본 정원의 4대 양식은 古山水式, 선정식(禪庭式)
'수경정원' 문인조(文人造) 정원, 다정식(茶庭式) 정원

일본정원은 바위가 모여있는 방식에 따라 의미를 부여.
천국으로가는 관문, 천국의 자리, 신의 울타리, 신성한 장소.
우리나라의 전통정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전통정원.............................
신림(神林), 궁원(宮苑), 사원(寺院), 서원(書院) 별원(別苑),
지방 관아의 누원(樓苑), 민가(民家)의 정원, 묘림 (墓林) 등등.

우리나라 전통정원으로는 서울 종로의 석파정(石坡亭),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苑), 강원도 강릉의 선교장(船橋莊),
전남 완도의 부용동(芙蓉洞) 정원, 담양의 소쇄원(瀟灑苑),

대전의 남간정사 (南澗精舍), 경남 함안의 무기연당(舞沂蓮塘),
경북 영양의 서석지(瑞石池), 월성의 독락당(獨樂堂),
봉화의 청암정(靑巖亭), 경주의 안압지(雁鴨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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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한루는 한반도 전통정원 중 가장 유서깊은 곳.
우리나라의 전통정원은 광한루에서부터 유래된 듯.
옛부터 정원은 생활공간 속의 자연이자 풍류의 장소.

 

 

남원(南原).



...........................<함양. 산청>
................................../
.................백무동.....천왕봉..중산리
............반선..~~~~뱀사골
* <남원>---------삼도봉--쌍계사--섬진강--*< 진주>.
...........................노고단 산장.
........................../
......................<구례>. 화엄사.


옛부터 강장 보양음식으로 널리 알려진 남원 추어탕
추어탕은 미꾸라지가 가장 살찌고 맛 좋은 가을 음식.
옛부터 남원은 전통적인 풍류 문화 및 판소리의 본향.

미꾸라지를 넣고 얼근하게 끓인 추어탕(鰍魚湯).
전라도에서는 산 미꾸라지를 그대로 쓰기도 한다.

고기 장국을 끓이다가 고추장으로 간을 맞추고
두부를 통째로 넣은 다음 즉시 미꾸라지를 넣으면,
미꾸라지가 끓는 물을 피해 두부 속으로 모두 파고든다.

'하여, 예나 지금이나 널리 알려진 남원 추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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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1500년전 고령 대가야 영역 중 한곳
고령 대가야국 가실왕의 왕국 악사였던 우륵
가야금을 만들고 12개 연주곡을 지은 음악 성인.

고령읍 쾌빈리는 우륵이 가야금을 창제하고
연주곡을 작사 작곡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대구 달성군, 경북 고령·성주군, 경남 합천·
거창·함양·창녕·산청, 전북 남원시·장수군
고령 대가야 영역 옛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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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연대 미상, 작자 미상 춘향전의 본향.
남원 기생 춘향이 광한루에 그네를 타러갔다가
사또의 아들 몽룡을 만나 평생을 같이하기로 약속.

사또가 서울로 자리를 옮기며 두 사람은 이별.
새로 부임한 사또가 춘향에게 수청 들라고 강요.

춘향은 죽기를 무릅쓰고 신관 사또의 요구를 거절
이때 암행어사가 된 몽룡이 춘향의 목숨을 구하고
함께 서울로 올라가 평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영조·정조 시대에 생성되어
개화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승되는 이야기.
〈춘향전〉은 설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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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남원은 전북 관광 및 문화 예술의 중심지.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격전지였던 전략적 요충지.
전라도 서해와 남해 일대의 육로는 남원으로 모인다.

'즉, 실크로드 뱃길과 육로가 모이는 곳.'

남원은 삼한시대 마한 왕조의 도읍지였던 곳.
남원은 고조선 세력의 최후 항전처인 곳이다.
남원은 고대국가 전부터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통일신라 시대 5 소경(小京) 중 하나 남원.

..................소경(小京)........................
소경은 신라 영역에 설치한 작은 도읍 중 하나.
신라 지방통치 불편을 보완하려 설치한 5곳 소경.
최초 소경은 514년(지증왕 15) 의성(義城)에 설치

아시촌소경에 6부 왕경인 및 남쪽 백성들을 이주.
그러나 아시촌소경은 훗날 5소경에 속하지 않았다.

최초의 소경은 557년(진흥왕 18) 충주 국원소경(國原小京)
신라는 귀족 자제 및 왕경 6부의 호민들을 이주시켜 정착.

이어 639년(선덕여왕 8) 강릉지역에 북소경(北小京)을 설치
말갈족의 침략이 계속되자 658년(태종무열왕 5)에 철폐했다.

678년(문무왕 18) 북원소경(北原小京 : 지금 원주)을 설치
강릉 지역의 북소경을 현재의 원주지역으로 옮긴 것이었다.

680년 가야 땅에 금관소경(金官小京 : 지금 김해)
685년(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 : 지금의 청주)
아울러,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며 5 소경 완성.

'5 소경 = 충주. 원주. 청주. 김해. 남원.'

소경은 신라 정령지역 지배층 연고지 단절이 목적.
동시에 그들을 회유·감독하기 위한 집단 거주지역
그것이 점차 지방 정치문화의 중심지로서 변모했다.

신라는 소경에 장관 사신과 차관 사대사를 1명씩 파견.
소경의 행정구역은 수도 경주와 같이 6부로 나누어졌고,
그 아래 방(坊)과 리(里)를 두어 왕경인을 소경으로 이주

'왕경(인)'이란 왕이 사는 도읍.. 경주(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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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 인구 분산책.
점령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정책을 폈다.
하여, 남원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풍습이 공존.

아울러, 통일신라 시대 당나라 유민들이 정착.
고려시대에는 발해 유민들이 대거 남원에 정착.
고려 말엔 원나라의 동아시아 유민들 분산 정책.

'하여, 남원은 동아시아 역사의 축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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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의 서북쪽은 모두 남원으로 통한다.
즉, 남원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서북쪽의 관문.
남원을 모르고는 지리산 유래를 이해하기 어렵다.

남원은 삼국시대부터 백제권 전략적 요충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전쟁이 빈번했던 고장.
하여, 목기 같은 군수물자와 전쟁 유적 많은 곳.

남원은 삼국시대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진을 두고 성을 쌓았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685년에 남원소경 설치

757년 전주에 예속시켰고
940년 고려 때 부로 강등
1018년에 지부사(知府事).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전략적 요충지.'

남원이 함락되면 전주와 한양은 바람 앞에 풍전등화.
권율 장군의 육군과 충무공의 수군이 연합해 결사항전.
위태로웠던 이조 국운을 왜적으로부터 지켜냈던 남원성.

전라도가 없었다면 이조가 없었다는 상징의 고장이 남원
역사적으로 남원은 왜구 침략이 잦았던 고장이기도 하다.
하여, 임진왜란 7년 전쟁 특히, 정유재란 피해가 컸던 곳.

운봉읍·주천면·수지면·송동면·주생면·금지면·
대강면·대산면·사매면·덕과면·보절면·산동면·

이백면·동면·아영면·산내면·동충동·죽항동·하정동
쌍교동·천거동·노암동·신촌동·어현동·금동·조산동·

왕정동·신정동·화정동·향교동·용정동·광치동·내척동
산곡동·도통동·월락동·고죽동·식정동·갈치동 등 1개읍
15개면 23개 동이 있고 시청소재지는 도통동 면적 752.02㎢,

고려 940년 부로 강등되었으며, 1018년 '지부사'로 개편.
이때 임실 순창을 속군으로, 장계 적성 거령은 임실군 영현
940년 거령현으로 개칭했고, 1018년 남원에 병합(별호: 寧城)
구고(九皐)·장수(長水)·운봉·구례(求禮)를 속현으로 두었다.

1310년 대방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360년 부로 승격되었다.
1413년 도호부, 1739~50년 일신현, 1844~53년 현으로 강등
별호는 용성(龍城)이었고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남원부

1896년 13도제 실시로 전주와 함께 1등군이 되어 전북 소속
1906년 월경지 정리로 15개면이 장수·임실·구례군으로 이관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운봉군을 병합하고 19개면으로 조정.

이때 통한면 등 4개면을 합친 남원면이 1931년 읍으로 승격
1955년 왕치면이 남원읍에 편입. 1981년 남원읍이 시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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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맥, 반야봉 노고단·명선봉 덕두산에 쌓인 남원.
산내면 반야봉은 전남·전북·경남의 분수령을 이룬다.

동북부의 장수군 반암면 대윤리에서 흘러 들어온 요천
남원 시내 지나 서남부 전남 곡성군 고달면으로 흐르며,
요천 중심으로 옥률천·갈치천 소한천이 수지상으로 발달.

운봉읍 일대에서 발원한 광천이 동부를 굽이쳐 흘러,
노고단에서 발원한 소하천과 합류해 만수천을 이룬다.

이들 하천 연안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전개되며,
금지면과 운봉읍 광천 유역은 넓은 평야가 형성.
지형상 평야부의 분지, 고원상의 분지, 고원지대

연평균 기온 11.8℃ 내외, 연평균 강수량 1,250㎜
식물은 떡갈나무·신갈나무·졸참나무 등이 분포하며,
산내면 뱀사골 계곡은 원추리 군락지이고, 약초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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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동남부에 위치한 남원은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
농업이 발달하였고, 천혜의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의 관광도시

지리산의 서북 관문 남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
벼 한말을 심으면 140두를 추수할 수 있다는 축복 받은 땅
남원은 국악의 발상지이고 이성계의 이조 창건 단초가 된 곳.

황산대첩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단초가 된 남원성 싸움.
삼국시대 남원성 서편에 만인의총(萬人義塚:사적 제272호)
정유재란 때 전사한 1만여 명과 순절한 8충신을 합장한 무덤.

운봉읍 화수리에는 1380년 이성계·이지란 장군의 황산대첩비
왜장 아시누키 미야코를 물리친 사실을 기념(1577년 : 선조 10)

'남원은 통일신라 경덕왕(757년) 이후 1300년간 지속된 지명.'

뱀사골로 하산하면, 거의 반선을 거쳐 남원을 들러 귀경한다.
어차피, 남원을 들르게 되면 여유를 갖고 명소탐방도 좋을 듯.
삼도에 걸쳐 동서로 뻗은 지리산' 북쪽 모든 접근로가 모인 곳.

봉화산은 남원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
임진왜란 당시 남원이 함락되면 전주와 한양까지 파죽지세.
남원을 보루로 왜적과 결사항전을 벌린 충무공의 난중일기.

남원은 옛부터 목기 특산물, 유배지, 춘향전, 기생이 유명한 곳.
아울러, 전통 풍습이 살아있고 판소리 동편제의 산실인 곳이다.
아직도 남도의 전통적인 문화를 즐길만큼 옛부터 풍요로운 고장.

남원은 백제 신라 고려에 걸쳐 불교 문화의 산실.
아울러 남원은 집성촌 고을이자 역사적인 격전지.
남원에는 전쟁과 관련된 문화 유적이 유난히 많다.

 

 

 

독우물굿.



독우물은 밑바닥 없는 독을 묻어 만든 옹정(甕井)
그것은 옛부터 아름다운 여성의 음(움) 물을 상징 .
굿은 무당이 길흉화복을 신에게 기원하는 의식절차

경남 영산지방 특유의 무속으로 매년 5월 1~6일.
호남지역 동신제(洞神祭)는 징 꽹과리 장으로 농악.
무당이 노래하고 춤추며 귀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의식.

'독우물 굿'은 옛날부터 '남원 굿'을 지칭.

선사시대 마한 영역을 중심으로 나라를 건설한 백제
고대 음악을 알만한 역사적인 자료가 매우 부족한 편.
하여, 고대 음악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선사시대 제천의식과 백제인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들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통해 음악이 상당히 발전했을듯.
백제음악을 시기적으로 분류하면 B.C.18년 ~ A.D. 660년.

...............백제 음악에 쓰인 악기..................
4세기 이후 백제는 고(鼓-북), 각, 공후, 쟁, 우, 지, 적
이 악기들은 중국의 남부와 북부의 악기로 나눌 수 있다.

남부악기 - 공후, 쟁, 우, 지, 적
북부악기 - 고, 각

북 종류인 고와 뿔피리 일종의 각은 고구려도 사용한 악기.
6세기 이후에는 도피리, 횡적, 군후, 막목 등이 연주에 편성.
백제 노래는 정읍, 선운산, 방등산, 무등산, 지리산 등이 있다.

백제는 기악과 노래 외 산대도감 놀이와
봉산 탈춤의 전신인 기악무도 공연하였다.

'남원의 유래를 대변해주는..남원농악.'

남원농악은 전라도지역 마한의 제천의식에서 유래.
풍년을 기원하는 축원 형태의 농악에서 비롯된 듯.
현재 각 마을 읍면에서 전승되고 있는 농악 풍습들.

남원농악은 각 마을 단위로 행해진 공동 제사의식
축원농악(祝願農樂), 노작농악(勞作農樂)/두레농악’
마을 공동체 농악에서 걸립농악(乞粒農樂)으로 발전.

각 마을 굿패가 전국을 누비는 걸립 농악패가 된다.
소위, 연예 농악(演藝農樂)/ 걸립패 농악으로 발전
실제로 남원에서는 그러한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농악은 모두 구비전승과 행위전승으로 전승
이러한 유래와 역사의 고증을 단정하기에는 어렵다.
하여, 남원농악은 좀 더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듯.

남원농악 계보는 곧 우리나라 역사의 정체성

현재 전승되는 남원농악 계보는 대부분이 마을굿 형태
소박한 농악들 뿐이고, 그나마도 대부분 거의 사라졌다.
현재 분명하게 전승되는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독우물’

............옹정리 석정(石井)마을......................
남원군(南原郡) 기지면(機池面) 옹정리(甕井里)
항아리처럼 생긴 우물이 있어 독우물 또는 옹정.
옹정리 동편 마을을 금정(金井), 서편 마을을 석정

석정마을은 통일신라 초 원주 원씨(原州元氏) 집성촌.
지금의 요천수가 마을 뒷산 밑을 굽이 돌아 흘렀는데
이때 흥덕 장씨 제각 부근에서 낚시질을 했다고 한다.

'그후 김씨, 장씨, 양씨, 기타 성씨가 모인 큰마을.'

원씨 일가가 모여사는 남원 제일 샘이 옹정(甕井).
어느 샘이고 항아리처럼 생긴 것은 공통적이지만
이곳 샘은 항아리 속에 또 항아리가 있는 것처럼
생겨 이로 인해 독우물 , 독우멀 로 불리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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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굿.........................
우물굿은 마당밝기 중간에 마을 중앙 공동우물에서 고사
우물을 두겹으로 둥글게 에워싸고 풍물장단에 춤을 추며
한동안 돌다가 굿판 대표인 '비나리'가 고사덕담을 한다

"고설 고설 고사로다 성겨 드리는 고사로다이
고사를 드리오니 동방청제 용왕님 남방적제 용왕님

일년이면 열두달
칠년대한 가뭄이나
오뉴월 긴 장마나
맑은 물이나 철철철
나오도록 하옵소사."

우물굿을 끝내고 삼채가락을 치며
동네 우물을 크게 몇 바퀴 도는데
밀무동은 윗무동을 어깨 위에 세워
춤추고 도령은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왜장녀와 남장녀는 무동앞에서 가는 길을
장난스럽게 막기도 하며 맞춤을 추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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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남원 '독우물굿/독우멀굿'의 계보.

그러므로 남원농악은 이 독우물굿을 중심으로 하여
가장 분명한 남원농악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
남원 농악은 삼한시대 마한의 제천 의식에서부터 유래.

남원 농악은 마을 단위로 행해진 공동체의 제사의식
마을 단위로 공동체 문화를 형성한 결실이 '두레농악’
여기서 형성된 농악 굿패가 다른 마을까지 두루 다녔다.

즉, 걸립(乞粒)농악 굿패는 연예(演藝)농악으로 발전
대를 이어 예능으로 전수되어 온 대표 굿이‘독우물굿’
1948년경까지 전국을 상대로 했던 남원농악 굿패 구성.

...............남원 농악 굿패..............
이조시대 전라도의 산간 내륙은 좌도
서해와 가까운 평야 지역은 우도 지역

좌도는 남원, 담양, 임실, 진안, 곡성, 구례 등 21개 지역
우도는 김제, 정읍, 고창, 영광, 함평, 해남 등 36개 지역.

이러한 구분에 따라 풍물굿도 좌도와 우도 농악으로 구분.
좌도 농악은 가락이 빠르며 쇠가락이 발달. 진풀이가 단순
반면, 윗놀음(상모놀이) 등의 농악이 다양하게 발달되었다.

우도농악은 느린 가락에 다양한 진풀이, 장구가락이 발달.
대표적인 좌도농악은 남원지방 독우물(금지면 옹정리)농악
그당시엔 모르는 사람이 없이 널리 알려져 있는 농악이었다.

약 30명이나 되는 전 굿패가 한마을 사람으로 형성
이때문에 독우물굿이라 하면 아주 유명한 굿이었다.

남원지역 농악의 명인 중 가장 앞선 전판이 선생
생존했으면 지금 약 130여 세 가량 된다고 하는데
매우 뛰어난 기량을 가졌고 주요 활동 무대가 남원

전판이 선생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밝혀지지 않지만
남원 인근 임실 곡성 농악에도 영향을 끼친.. 상쇠.
그의 농악은 독우물에 살던 류한준 선생에게로 계승.

류한준 선생의 부친 류선장씨는 을사조약 당시 의병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돌아가신 독우물 지역의 상쇠.
류한준 선생은 일제시대에 부친께 농악을 배우기 시작

일제의 억압으로 농악을 하지 못하다가
정부수립이 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후
창경궁에서 전국 농악 경연대회가 열렸다.

전북에서 내노라하는 굿패가 다 모였지만
그중 독우물 굿패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류한준 명인을 상쇠로 한 전북팀은 대회1위

그후 전국의 농악경연대회를 모두 휩쓴다.
이때부터 류한준 선생은 전국적으로 명성.
그러다가 6.25 전쟁 중 52세로 생을 마감.

그후 류한준 명인의 부쇠로 활약하던 강태문 명인
그 뒤를 이어받아 남원굿 상쇠로 명성을 떨쳐왔다.

그무렵 16세 소년 류명철이 강태문 명인에게 농악을 배워
남원 소년 농악대를 조직, 남원 농악경연대회에서 특별상
소년은 바로 류한준 명인의 아들로서 남원굿을 계승받는다.

류명철은 강태문 선생이 작고하고 나서 5.16후
상쇠인 김수동과 함께 전북대표로 출전하여 1등
그 부상 특별 흥행허가로 전국을 누비며 포장걸립

그후 구례 농고, 남원 수지 중학교, 전주 농고 농악반 강사
1978년 전주대사습 필봉굿 상쇠로 출전하여 대상을 받는다.

1988년 서울 대학로 '공간사랑' 공연을 끝으로 가사에 전념
1994년 남원농악 맥을 이으려는 제자들 요청으로 활동을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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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각성바지' 집성촌이 모인 고을.'

집성촌마다 긍지 가득한 고유풍속 마을 농악.
고조선, 고구려, 당나라, 원나라, 유민 정착지.
다양한 유민 집단이 모여 형제처럼 지내왔던 남원.

전쟁으로 나라와 고향을 잃어버린 유민들.
서로 그 슬픔과 애환이 이심전심 통했던 듯.
하여, 전란 때마다 일심동체가 되어 남원 사수.

'제 2의 고향을 다시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판소리.



동편제 창법은 웅장하면서도 맑고 깨끗하다.
섬진강 동쪽 구례, 남원, 순창에서 불리워졌다
서편제 창법은 그 소리가 부드럽고 애절한 느낌.

전북 운봉·구례·순창·흥덕에서 많이 부르는 동편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목으로 우기는 '막 자치기 소리'
기교보다 곧게 내리지르는 통성이라 거칠면서 호방한 맛

영화 서편제 (1993년 임권택 감독)에서의 판소리.
<동편제와 서편제>는 그 지역 산의 생김새와 같다.

동편제는 섬진강 동쪽 지역 웅장하고 장엄한 지리산 지역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 끊어질 듯 부드러운 나즈막한 산세

판소리는 지역감정 및 악기재료 원산지의 영향도 받게 된다.
결국 지역적 풍습 기후 토양 그리고 지형의 영향도 받게된다.

소리가 물체 진동에 의해 일어나는 음파,
음파는 결국 산과 골짜기 생김새에 영향.

인간의 감정 또한 자연 환경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창법이나 소리의 형태로 표출되는 듯.

지리산을 서사구조(敍事構造)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판소리
춘양가는 남원 , 흥보가는 지리산, 변강쇠 타령은 서도(西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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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족을 대표하는 민요는 아리랑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게하는 진도 아리랑 가사.
진도 아리랑 민요는 서편제에 해당하는 가락이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 주소~~.(중략)

그 가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아리랑 쓰리랑'.
시베리아 남부지역에 살고 있는 에벤키족의 언어.
아리랑은 '맞이한다' 쓰리랑은 '느껴서 알다'란 뜻.

아리랑은 알다(知) 어원을 가지고 있고,
쓰리랑은 쓰다(用) 어원을 가지고 있다.

아리는 알이(知人, 잘 알고 있는 사람이란 뜻)
쓰리는 쓰는 이(用人, 사람을 쓴다, 또 그 사람)
랑은 라(羅, 那) 즉, 나라의 변음으로 볼 수 있다.

아리랑은 지혜로운 사람, 현자, 대인이 있는 나라.
쓰리랑은 이들이 중요하게 쓰이는 백성이 있는 나라.
아리랑 쓰리랑은 에벤키 족 조상의 나라와 그 백성들

'우리 민족은 에벤키 족과 이웃인 브리야트 족.'

우리 민족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부터 유래.
해뜨는 동남쪽을 향해 끝없이 이동후 한반도에 정착.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혼이 가득 담긴 판소리.

지리산 등줄기를 닮은 동편제.... 섬진강을 닮은 서편제.
남도 문화로 꽃 피워 지구촌 곳곳마다 흐르는 무형문화제.
'동편제와 서편제'를 합친 한반도의 고유가락이.. '판소리.'

중앙아시아 티벹 고원 유목민의 음률.
인도 불교음악에서부터 유래된듯한 음률.
때론 아라비안 나이트를 연상케 하는 음률.

'우리 민족 옛 조상의 혼이 담겨있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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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주능선은 하늘을 향해 빚어지는 춤사위 같다.
지리산 주능선에 흐르는 고저 장단은 판소리 가락 같다.
아득한 수평선 파도의 물결처럼 광야를 달리는 산등성이.

섬진강 푸른 물이 흘러 빚어 낸..가슴 끓는 애잔한 민족 혼.
지리산의 자락을 맴도는 바람소리는 귓전을 울리는 판소리.
하늘을 나르는 새들의 지저귐이 장단 맞추면 저절로 어깨 춤.

'판소리는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선율.'

판소리는 지리산 일대 무당음악과 불교음악의 결합.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격변기를 거쳐 발전.
급성장한 평민 계층의 현실적인 불만과 욕구의 발로.

무엇보다도 최하층 천민들의 민속 예술에서부터 유래.
무가기원설, 육자백이토리설, 판놀음기원설, 광대소리

지금까지 발견된 판소리 사설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
이조 영조 30년(1754년) '만화집'의 <춘향가(春香歌)>
문헌 자료에 의하면, 늦어도 정,순조 때 12종의 판소리

당시,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廣大)와 재인(才人)을 불러
3일유가(三日遊街)하고 홍패고사(紅牌告祀)를 지내던 풍습

정조 때 가난한 선비 송만재는 잔치를 베풀 수 없어 글로 대신
그 글이 관우희(觀優戱)이고 거기에 소개된 12 바탕의 판소리.

<심청가>,<춘향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장끼타령>,<옹고집>,<왈자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전>,<가짜신선타령 =숙영낭자전)이 수록된 관우희.

<춘향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심청가>
오늘날까지 명맥이 끈기지 않고 전해오는 5 바탕.
이들 판소리 주제는 오륜에서 각각 찾을 수 있다.

'부부유별 장유유서 군신유의 붕우유신, 부자유친.'

숙종말 이후 영,정조 때 명창은 우춘대, 하은담, 최선달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김제철, 주덕기, 황해천, 박유전, 송광록 등이 알려진 명창

동편제 始祖 - 송흥록. 전라도 남원 운봉 태생
서편제 始祖 - 박유전. 순창에서 태어나 보성 강산에서 살았음
중고제 始祖 - 염계달. 경기도 여주 출신

동서편 구분은 산악 대 평야, 혹은 섬진강 좌우가 분기점
지형적 특성상 동편제는 빠르고 씩씩하며 웅장하되 고졸함.
서편제는 느리고 애잔하며 장식음이 많고 기교적인 판소리

고종 후기에서 일제하의 1930년대까지는 '5 명창 시대
대개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꼽는다.

1940년 이후에는 김정문, 정응민, 공창식, 장판개, 조몽실,
임방울, 김연수, 박동실, 정광수, 성원목 등의 남자 명창과
이화중선, 박녹주,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등의 여류 명창.

판소리는 18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 정착.
이후 판소리는 점차 양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발전.
판소리계 최초의 여자 창자인 진채선은 많은 일화의 주인공.

'여류 명창 '진채선'은 고창 무당의 딸로 태어났다.
신재효에게 판소리를 배운 뒤 경회루 낙성연에서 소리.
진채선의 소리를 들은 대원군은 그녀를 곁에 두고 사랑

서울에 올라간 진채선이 내려오지 않자
신재효는 진채선을 그리워하며 지은노래.
'도리화가' 판소리는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끝끝내 신재효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진채선



'지리산의 명창 - 故 강도근.'

남원이 배출한 소리꾼..판소리의 고장 동편제의 제왕 강도근 명창.
1918년 남원시 향교동에서 농군의 자식으로 태어나 1996년 에 타계
그의 제자로서는 안숙선, 강정렬, 전인삼, 이난초등 명창들이 알려졌다.

김정문, 송만갑, 유성준 문하에서 판소리를 전수 받은 남원 동편제 대가.
일찌기 지리산 계곡에서 혹독한 독공을 통해 얻은 소리는 지리산이 스승
평소 "자작을 안 한다. 배운 대로만 한다" 할 만큼 전통에 충실했던 소리꾼.
73년 이래 남원 국악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쳐 남원 판소리의 맥을 이어왔다.

동편제 소리는 19세기 초반 운봉 출신 가왕으로 불리는 송흥록으로부터
송광록, 송우룡,송만갑, 유성준에게 이어진 소리로 일제시대에는 박봉래,
박봉술, 임방울, 김연수, 정광수, 박초월, 김소희, 박록주, 박동진 대물림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를 장기로 삼는 수많은 명창들을 배출했던 판소리.

동편제 소리는 기교 장식을 달지 않고,
가성을 쓰지 않으며, 감정을 절제하고,
소리 끝을 뭉툭 끊는 남성적 장대한 창법.
지리산 산줄기와도 같은 웅장한 맛의 판소리.

'강도근이 동편제 소리꾼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그의 스승들이 전형적인 동편제 소리의 대가였다는 점
둘째, 배운 것을 나름대로 고쳐부르려 하지 않았던 그의 고집.
1988년 흥부가로 무형문화재 5호를 지정 받을 만큼 전통 고수.
셋째, '목으로 우기는.. 도음'을 낸 타고난 성대, 동편제 소리.

목 쉰 소리이면서 고음인 송만갑과 김정문 목소리가 바로 철성.
그를 동편제 소리의 대가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게 한 원동력.
지금도 지리산 일대는 우조 가락의 웅장하고 힘찬 동편제의 고장.


'<판소리의 법통>을 잇는 송씨 가문.'

판소리는 운봉 중심으로 섬진강 동쪽 구례로 내려와 동편제.
섬진강 서쪽 장흥과 보성을 중심으로 서편제의 유파가 정립.

지리산 주변지역과 관련깊은 판소리 내력은 명창들의 계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판소리는 18세기 초기에 발생한 것으로 18세기 중엽에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19세기 전반기는 양반 대상 <전기 8 명창시대>
송흥록, 송광록 형제 등등을 명창으로 손꼽는다.

19 세기 후반은 <후기 8 명창시대>라 한다.
송우룡, 이들의 판소리 풍은 송만갑으로 전승.

조선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친 명창 송홍록
전북 운봉 출신으로 가왕의 칭호를 받는 소리꾼.
진양조 판소리를 개발, 귀곡성을 잘낸 것으로 유명

'후대를 잇지 못해 끊긴 것이 아쉬운 진양조.'

송광록은 처음엔 형인 홍록의 고수로 활동했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명창의 대열에 오른 소리꾼.
구례에 정착 그의 아들 송우룡은 고종때까지 명창.

송우룡의 아들 송만갑 역시 대를 이은 소리꾼이다.
송만갑은 부친 송우룡에게 판소리를 7살부터 배웠다.
판소리 2백년 역사에 가장 유명한 국창(國唱)은 송만갑

'오늘날 판소리의 주류를 이루어 낸 송씨 가문.'

판소리는 명창들 출신지나 노래하는 방법에 따라
그 제자들이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뉘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