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 허만수(許萬洙)
2007년 3월 4일 오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중산리 계곡.
30년 전 실종된 허만수씨 흔적을 찾아 나선 산악인들.
그와 함께 지리산을 누볐던 성산(74.부산 대륙산악회 고문).
성락건(62.지리산 옹고집들 대표).이광전(65. 대한산악연맹).
송철기(65)씨 등 원로 산악인 10여 명에 의해 이루어진 행사.
"그동안 '내가 사라지더라도 찾지 마라.
"그동안 '내가 사라지더라도 찾지 마라.
지리산 산신령이 돼 지리산을 보호할 것"
관절염 때문에 지팡이 짚고 수색에 나선 성산씨
허씨가 생전에 남긴 말 때문에 찾지 않았지만
하루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며 숙연해했다.
이날 원로 산악인들이 중산리계곡부터 먼저 찾은 이유는
이날 원로 산악인들이 중산리계곡부터 먼저 찾은 이유는
허씨를 실종 몇달 전에 만났던 성씨의 옛 기억 때문이었다.
성씨는 1976년 초 천왕봉에서 내려오다 만난 허씨를 따라
중산리 계곡 토굴에서 함께 하루를 묵으며 허씨가 남긴 말.
"내가 안 보이면, 이곳에서 죽은 줄 알아라.
흔적 없이 지리산 품에 묻히고 싶으니 찾지 말라"
허씨를 이번처럼 본격적으로 찾는 행사는 처음이다.
다음달부터 허씨가 자주 다녔던 세석고원과 칠선계곡.
도장골. 내대 등 흔적을 찾을 때까지 매달 수색할 예정.
수색대는 세석 주변 영신대 바위굴을 주목하고 있다.
수색대는 세석 주변 영신대 바위굴을 주목하고 있다.
영신대 일대 12개 바위굴을 최근 답사했던 성락건씨
영신대 인근을 허씨가 사라진 곳으로 주목하고 있다.
허씨의 딸인 덕임(61.경남 사천시 완사초등 교감)씨
허씨의 딸인 덕임(61.경남 사천시 완사초등 교감)씨
"아버지는 1년에 한 번쯤 학교로 찾아왔지만
76년 6월 꿈에 흰옷을 입고 여러 마리 학과 함께
나타나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덕임아 나는 간다'
고 말한 뒤 지리산에서 본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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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600m 중산리에서 천왕봉(1915m)으로 오르는 길.
지리산에서 천왕봉을 가장 빨리 올라갈 수 있는 길이다.
중산리 버스정류장에서 매표소까지 아스팔트 고갯길 30분
국립공원 관리공단 매표소 지나 법계교를 건너면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리던 字天 허만수 추모비
지리산을 사랑해 지리산에 머물다가 사라진 우천.
'검은 얼굴로 먼저 반기는 듯.. 검은 돌 비석.'
지리산은 옛부터 온갖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많았던 산
하여,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 지명 지리산(智異山)
'지리산 산신령' 우천도 지리산이 배출한 이인 중 한 사람.
무심히 지나치기도 쉬운.. '우천 허만수 추모비'.
이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쉬어가도 좋을 듯.
법계교는 본격적인 등산로로 접어들기 전에 나타난다.
그곳에서 법천골을 따라 올려다보면 우뚝 솟은 천왕봉
겨울철 맑은 날씨이면 파란 하늘아래 천왕봉이 인상적.
세속적인 속인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다 간 산악인.
세인들은 아직까지도 그를 지리산 산신령이라 부른다.
그가 세인들 곁에서 사라진지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지리산 산신령.......우천 허만수.'
2001년 9월 경남일보 기사 - 한중기 기자.
그에 관한 기사로 인해 널리 알려진..'우천'.
그전까지 뭇 속인들에게 미치광이 취급받던 그.
그러나, 그에게 은혜를 입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그가 떠난지 20 년후에도 그를 추모했다.
그만큼 그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는 거룩한 증거.
...........2001년 우천에 관한 경남일보 기사...............
1976년 6월, 지리산에서 홀연히 사라진 우천.
그후 해마다 그가 사라진 6월 철쭉꽃 필 무렵.
어김없이 그를 찾아와 추모하는 산악인의 행렬.
1996년 6월 2일 제 25회 지리산 철쭉제 폐막식.
중산리에서 천왕봉가는 길가에 있는 그의 추모비
수많은 산악인들은 20년 전 사라진 그를 추모했다.
그의 딸 덕임씨(진주 한평초등학교 교사)가 처음 참가.
산을 위해 산에서 살다가 떠나가신 아버지 향한 그리움
설움을 주체할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낸 피붙이.
"그 누가 무어라 해도 아버지 당신만큼
지리산을 사랑했던 이는 없을 것입니다."
끝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말로 잇지 못한 딸.
폐막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든 딸.
추모제에 참석한 진주에서 화실을 경영하는 이길성씨(65)
우천이 생전에 제작한 지리산 등산안내도를 처음으로 공개.
진주산악회에 기증된 우천의 지리산 등산안내도(1973년 제작)
1973년 4월 5일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30원에 판매.
그 가격 표시가 있고 양면으로 석판인쇄 된 것이다.
등산안내도 뒷면에 산악인의 자세에 대해 쓰여있다.
"바위, 폭포, 수목을 진심으로 수호함이
산악인의 자연을 순수하게 사랑함이요,
진실한 미덕이고 숭고한 정서일 것이다.
이것이 곧 산악인의 윤리일 진 져."
우천은 이 등산안내도를 제작, 판매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했던 듯.
이 등산안내도가 제작된 지 3년 후 사라진.. 우천.
'속세를 떠난 구도자처럼 살다 간 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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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신령.. 우천, 그는 누구인가?
33 세에 지리산 세석고원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생활.
지리산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샘터를 개발 및 보수.
수많은 사람들의 인명구조 및 안내로 한 평생을 바친 사람.
산이 좋아 사랑하는 가족도 버리고
홀로 살며 산에서 여생을 마친 산꾼.
1976년 6월 그가 60세 되던 그 해.
세석 철쭉꽃을 등지고 사라진 우천.
'그는 과연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가 숨졌을 곳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분분.
칠선계곡, 도장골, 신선너덜 일 것이란 추측.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세석산장이 들어서기 전, 옛 산장 터에 있던 움막집.
외딴 오지마을의 헛간 같았던 그곳이 우천의 보금자리였다.
세석평전에 인적이 끊기면 나무열매, 산나물로 배를 채웠다.
우천이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일본 입명관(入命館) 중학시절.
당시 그 학교에는 '동정(童貞)클럽' 이라는 등산모임이 있었다.
회원 모두가 산을 즐기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산을 좋아했던 우천
본격적인 산악인이 될 출발점이었다.
우천은 중학교를 그럭저럭 마쳤지만 대학진학이 문제였다.
산에 미친 우천이 대학을 포기하자 부모가 억지로 결혼 강요
22살 되던 해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여 진주의 고향 처녀와 결혼.
'혹시, 산에 폭 빠진 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우천은 부인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경도 전문학교 졸업
29살에 해방을 맞은 우천은 부인과 딸 셋을 데리고 귀국.
진주에 '대동서점'을 내고 2년 동안은 그럭저럭 꾸려갔다.
그러나, 산에만 정신이 팔린 그의 서점이 잘 될리 없었다.
서점 문을 닫자 홀가분해진 우천은 산에 미치기 시작했다.
31살 어느 가을 , 부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집을 떠난 우천.
"산의 향수 때문에 신혼의 달콤함도 몰랐다." - 우천.
우천이 처음 찾아간 경남 의령의 자굴산 양지바른 중턱.
그곳에 땅굴을 파고 풀을 엮어 바닥에 깔고 둥지 틀었다.
자굴산에서 지낸지 2년 만에 지리산 세석평전 토담 움막.
4년째 되던 여름날, 부인이 불쑥 세석의 움막을 찾아왔다.
3일 동안 우천 곁에 머물며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
"나는 이미 산에 바친 몸이니 단념하라"며 하산을 거부한 우천
결국 부인은 하산 설득을 포기하고 혼자 산을 내려갔다.
우천은 지리산에 살며 곳곳에 10 여개 샘터를 찾아낸다.
푼돈이 생기면 모은 몫돈으로 안내판까지 만들어 붙인다.
"지리산에 살다 지리산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다"
1976년 6월 어느날 우천은 지리산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그후 어느 등산인은 팔공산에서 그를 보았다고도 했지만
지리산은 물론 전국 어느 곳에서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
우천은 <5등반 코스>와 <특수 등반로 2 코스>를 개척했다.
...................우천 안내도의 <5 등반 코스>....................
중산리, 칼바위, 법계사, 천왕봉, 통천문, 장터목, 제석당
하동바위, 백무동,덕전, 마천 (1박 2일 : 법계사 1박) 구간
<구간별 거리 표시로 등산객 편의를 도모한, 우천의 안내도>.
중산리, 천왕봉, 대원사 구간은 천왕봉 최단거리 코스.
<써리봉은 웅장하고 험악한 암벽이 펼쳐졌다고 소개.>
쌍계사, 대성동, 세석, 천왕봉, 대원사는 사찰과 천연공원>.
마천, 백무동, 장터목, 천왕봉, 장터목, 세석,대성동, 쌍계사
전남북 지방에서 쉽게 등반할 수 있는 코스로 안내도에 소개.
화엄사, 노고단, 세석, 천왕봉, 칠선계곡, 의탄, 마천 코스
<지리산 등반 최장거리로 58km로 4박5일 소요 종주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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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등반로 2 코스........................
중산리, 칼바위, 남부암벽 특수등반로, 천왕봉 구간.
남부암벽은 홈바위를 지나 통신골 따라 8km의 험로.
쌍계사, 버드내재, 삼신봉, 세석 코스는 길찾기 힘들다.
숲이 많이 우거져 특별한 지형의 지식 없으면 조난 위험.
우천이 제작한 등산 안내는 오늘날 안내지도와 매우 유사
그동안 교통의 발달로 인해 등반 일정만 다소 차이가 날 뿐.
오히려, 지금 폐쇄된 등반로까지 상세하게 표시된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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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지면 칠선계곡으로 떠난 줄 알라'던 평소 그의 말.
추모비 위치는 법천골 입구에서 법천교 다리 지나.. 칼바위 전.
'그는 정말 입버릇처럼 말했던, 칠선계곡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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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異 대자연 속으로 떠난 "인간 산신령"
홀연히 종적 감춰 "入神 20년" - 묘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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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뒷면에는 그의 일생이 담긴 비문이 새겨져있다.
우천을 흠모하는 산악인들이 뜻을 모아 만든 추모비.
추모비에 새겨진 뒷면 마지막 글은 이렇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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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꽃으로 피어오르는 듯 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게 하는 바이다. 우천의 자연으로의 동화 20 주년
맞이한 즈음 뜻깊은 추모제라도 한번 가졌으면 하는 바램 - 한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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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는 지리산의 기인으로서 알려졌던 우천.
사후에는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리우는 우천.
그의 영전에 애도의 뜻으로 시 한수를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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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바 위 - 유 치환 (柳 致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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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손창화 보살.
1960년대 전란 평정 직후 지리산 개척 등산 초창기.
이 시기에 개척산행에 나선 이들은 산악계 선구자들
이들은 대개 유명 의사나 체육인, 학자 등 지도자 급
당시 지리산 등산은 천왕봉과 세석고원 정도로 압축
법계사 초막(草幕)과 천왕봉, 세석고원이 주요 거점
이 세 곳에는 저마다 터줏 대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세석고원 움막의 우천 허만수,
법계사 초막의 손 (청화) 보살,
천왕봉 토굴 속의 김순룡 노인
천왕봉 남쪽의 법계사도 6.25 전란 와중에 전소
법계사를 복원하려고 초막을 짓고 지키던 손보살
천왕봉 아래 토굴은 일제시대 반토굴식 산장 자리.
50년대 후반~ 60년대 중반에 김순룡 노인이 지켰다.
6.25 전후에 빨치산들이 이용했던 반지하식 토굴
그후 토굴을 산장처럼 이용한 진주의 김순룡 노인
그 가운데 산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손보살.
부산 대륙 산악회의 성산씨 등을 비롯한 산악인들은
손보살이 내주는 팔선주를 마시는 것이 최고의 기쁨
법계사 초막을 찾는 이들에게 받은 시주로 복원 불사
당시 법계사 초막은 특별한 산장 역할을 한 셈
허우천, 손보살, 김순룡 노인은 서로
낯돌리고 남처럼 지낸 것은 아니었다.
거리 상으로는 서로 꽤 떨어져 있었지만,
사실 세 사람은 협력 체제로 함께 지냈다.
손보살이 법계사 초막을 비울 때 허우천이 지켜주고,
천왕봉 김 노인 또한 법계사 초막에 종종 묵기도 했다.
손보살은 허우천이 들르면 가족처럼 밥과 술을 대접했다.
우천에게 인정을 베푼 곡점마을의 민박집이자 국밥집
노선버스 종점 국밥집 주인 부부는 이광덕 & 조순례
큰 가마솥에 종일토록 장작불을 지펴서 끓여내는 국밥
이 집 안주인은 진주 태생 미인으로 인정도 많았다
국밥집 안주인은 세석고원 우천을 끔찍이도 아꼈다.
우천이 찾아오면 며칠씩 붙들고 영양보충 시킬 정도
허우천은 먹을 것이 없으면 그냥 굶고,
술이 있으면 몇 날 며칠이고 술만 마셔
건강을 잃고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곡점의 국밥집은 우천의 허기진 배를
언제든지 한껏 채워주었던 고마운 곳.
허우천은 그곳에서 배를 든든하게 채우면
그 길로 걸어서 진주까지 다녀오고는 했다.
진주에서는 친구나 가까운 사람들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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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2월 무렵 법계사는 을씨년스러웠다.
장독대 위 불상 하나 정도가 눈에 들어올 뿐.
법계사 터에 3층 석탑 보물이 있긴 있었지만..
이 사찰은 고려 우왕 6년(1380년)에는 왜구들의 방화.
또 1948년 여순반란군 토벌대가 대원사와 함께 태웠다.
그 법계사 복원을 염원하는 한청화 보살이 세웠던.,초막
1955년부터 부산, 경남 산악 선구자들이 천왕봉 등정
부산 신업재, 김재문, 김용기, 김규태, 오점량, 한형석,
성산, 김택진, 이영도 그들에게 전초기지였던 법계사 초막
로타리산장 설립에 결정적 역활을 했던 법계사 초막
한청화 보살은 법계사 복원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로타리산장을 건립하는데 그 디딤돌 역활을 했다.
손보살 그녀의 이 공로는 높이 살 만하다.
전란 직후 산악 선구자들의 산 중 오두막
법계사 초막에서 저마다 낭만을 꽃피운 것.
대륙 산악회.
1958년 9월 19일 성산, 이명선, 박선종, 오봉구, 이창동
7명이 부산 서구 초장동 3가 75번지에서 총회를 열어 창립
지리산 창립기념 등산, 칠선계곡 개척 산행을 이끈 산악회.
1960년대 우리나라 등산장비는 대부분이 군용장비 뿐
장비 대부분을 일본 카타로그를 보고 주문 제작해 사용
태백산, 함백산 등을 동계 극지법 등반으로 적설기 초등
지금 보급되어 있는 안내등산의 선구자 역할.
1963년 지리산 칠선계곡을 최초로 답사,
선녀탕, 청춘홀, 쟈일3단폭포, 부일폭포,
합수골, 대륙폭포, 마폭, 개선문 등을 명명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 일원의 암벽코스를 개척,
고별대, 대륙봉, 숨은벽,나비암, 부채바위, 은벽,
파리봉 등을 명명, 지도상에 그대로 등재되어 통용.
1964년 제1회 부산등산대회를 금정산에서 개최하였고,
1965년 대한산악연맹에 개인단체 자격으로 가맹하였고
1967년 부산 산악인들의 모임 부산산악연맹 창립에 참여.
1969년 성산 씨가 대한산악연맹 초대 전무이사
전국등산대회에 성산, 곽수웅, 서승일, 윤완석,
조창래 회원 등이 심판, 산악계 발전에 이바지
1968년 일본 후꾸오까 산악연맹과 자매결연
지리산과 설악산, 한라산을 합동등반하였다.
1971년 부산에서 2번째 해외원정(일본 북알프스)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에 곽수웅, 쟈누봉에 안진현,
시샤팡마 초오유에 이주이, 알프스 3대 북벽 조창래
인도 히말라야 다람슈라봉에 서승일 회원 등을 파견했다.
1987년 산악회 단독으로 칸첸중가 원정대를 조직,
정상무 대장 외 8 대원이 도전, 이성호 대원 사망.
1988년 1월2일 세계 2번째로 이정철 동계등정 성공,
이 공로로 故 이성호를 비롯한 전대원이 체육훈장
1960년 태백산 현리동굴
1975년 매봉산 무건리 동굴탐사,
1977년 강원도 삼척의 관음굴, 환선굴 탐사
동굴탐사반을 결성, 초당굴, 용소굴 등 동굴탐사
부산 해저탐사반을 결성, 스킨 스쿠버 교육을 매년 실시,
산악, 동굴, 바다 등 시야를 넓혀 회원들의 욕구를 충족
등산, 동굴탐사, 해저탐사, 산악서클 이정표를 제시했다.
지리산에서 천왕봉을 가장 빨리 올라갈 수 있는 길이다.
중산리 버스정류장에서 매표소까지 아스팔트 고갯길 30분
국립공원 관리공단 매표소 지나 법계교를 건너면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리던 字天 허만수 추모비
지리산을 사랑해 지리산에 머물다가 사라진 우천.
'검은 얼굴로 먼저 반기는 듯.. 검은 돌 비석.'
지리산은 옛부터 온갖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많았던 산
하여,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 지명 지리산(智異山)
'지리산 산신령' 우천도 지리산이 배출한 이인 중 한 사람.
무심히 지나치기도 쉬운.. '우천 허만수 추모비'.
이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쉬어가도 좋을 듯.
법계교는 본격적인 등산로로 접어들기 전에 나타난다.
그곳에서 법천골을 따라 올려다보면 우뚝 솟은 천왕봉
겨울철 맑은 날씨이면 파란 하늘아래 천왕봉이 인상적.
세속적인 속인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다 간 산악인.
세인들은 아직까지도 그를 지리산 산신령이라 부른다.
그가 세인들 곁에서 사라진지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지리산 산신령.......우천 허만수.'
2001년 9월 경남일보 기사 - 한중기 기자.
그에 관한 기사로 인해 널리 알려진..'우천'.
그전까지 뭇 속인들에게 미치광이 취급받던 그.
그러나, 그에게 은혜를 입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그가 떠난지 20 년후에도 그를 추모했다.
그만큼 그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는 거룩한 증거.
...........2001년 우천에 관한 경남일보 기사...............
1976년 6월, 지리산에서 홀연히 사라진 우천.
그후 해마다 그가 사라진 6월 철쭉꽃 필 무렵.
어김없이 그를 찾아와 추모하는 산악인의 행렬.
1996년 6월 2일 제 25회 지리산 철쭉제 폐막식.
중산리에서 천왕봉가는 길가에 있는 그의 추모비
수많은 산악인들은 20년 전 사라진 그를 추모했다.
그의 딸 덕임씨(진주 한평초등학교 교사)가 처음 참가.
산을 위해 산에서 살다가 떠나가신 아버지 향한 그리움
설움을 주체할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낸 피붙이.
"그 누가 무어라 해도 아버지 당신만큼
지리산을 사랑했던 이는 없을 것입니다."
끝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말로 잇지 못한 딸.
폐막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든 딸.
추모제에 참석한 진주에서 화실을 경영하는 이길성씨(65)
우천이 생전에 제작한 지리산 등산안내도를 처음으로 공개.
진주산악회에 기증된 우천의 지리산 등산안내도(1973년 제작)
1973년 4월 5일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30원에 판매.
그 가격 표시가 있고 양면으로 석판인쇄 된 것이다.
등산안내도 뒷면에 산악인의 자세에 대해 쓰여있다.
"바위, 폭포, 수목을 진심으로 수호함이
산악인의 자연을 순수하게 사랑함이요,
진실한 미덕이고 숭고한 정서일 것이다.
이것이 곧 산악인의 윤리일 진 져."
우천은 이 등산안내도를 제작, 판매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했던 듯.
이 등산안내도가 제작된 지 3년 후 사라진.. 우천.
'속세를 떠난 구도자처럼 살다 간 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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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신령.. 우천, 그는 누구인가?
33 세에 지리산 세석고원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생활.
지리산 곳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샘터를 개발 및 보수.
수많은 사람들의 인명구조 및 안내로 한 평생을 바친 사람.
산이 좋아 사랑하는 가족도 버리고
홀로 살며 산에서 여생을 마친 산꾼.
1976년 6월 그가 60세 되던 그 해.
세석 철쭉꽃을 등지고 사라진 우천.
'그는 과연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가 숨졌을 곳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분분.
칠선계곡, 도장골, 신선너덜 일 것이란 추측.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세석산장이 들어서기 전, 옛 산장 터에 있던 움막집.
외딴 오지마을의 헛간 같았던 그곳이 우천의 보금자리였다.
세석평전에 인적이 끊기면 나무열매, 산나물로 배를 채웠다.
우천이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일본 입명관(入命館) 중학시절.
당시 그 학교에는 '동정(童貞)클럽' 이라는 등산모임이 있었다.
회원 모두가 산을 즐기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산을 좋아했던 우천
본격적인 산악인이 될 출발점이었다.
우천은 중학교를 그럭저럭 마쳤지만 대학진학이 문제였다.
산에 미친 우천이 대학을 포기하자 부모가 억지로 결혼 강요
22살 되던 해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여 진주의 고향 처녀와 결혼.
'혹시, 산에 폭 빠진 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우천은 부인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경도 전문학교 졸업
29살에 해방을 맞은 우천은 부인과 딸 셋을 데리고 귀국.
진주에 '대동서점'을 내고 2년 동안은 그럭저럭 꾸려갔다.
그러나, 산에만 정신이 팔린 그의 서점이 잘 될리 없었다.
서점 문을 닫자 홀가분해진 우천은 산에 미치기 시작했다.
31살 어느 가을 , 부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집을 떠난 우천.
"산의 향수 때문에 신혼의 달콤함도 몰랐다." - 우천.
우천이 처음 찾아간 경남 의령의 자굴산 양지바른 중턱.
그곳에 땅굴을 파고 풀을 엮어 바닥에 깔고 둥지 틀었다.
자굴산에서 지낸지 2년 만에 지리산 세석평전 토담 움막.
4년째 되던 여름날, 부인이 불쑥 세석의 움막을 찾아왔다.
3일 동안 우천 곁에 머물며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
"나는 이미 산에 바친 몸이니 단념하라"며 하산을 거부한 우천
결국 부인은 하산 설득을 포기하고 혼자 산을 내려갔다.
우천은 지리산에 살며 곳곳에 10 여개 샘터를 찾아낸다.
푼돈이 생기면 모은 몫돈으로 안내판까지 만들어 붙인다.
"지리산에 살다 지리산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다"
1976년 6월 어느날 우천은 지리산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그후 어느 등산인은 팔공산에서 그를 보았다고도 했지만
지리산은 물론 전국 어느 곳에서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
우천은 <5등반 코스>와 <특수 등반로 2 코스>를 개척했다.
...................우천 안내도의 <5 등반 코스>....................
중산리, 칼바위, 법계사, 천왕봉, 통천문, 장터목, 제석당
하동바위, 백무동,덕전, 마천 (1박 2일 : 법계사 1박) 구간
<구간별 거리 표시로 등산객 편의를 도모한, 우천의 안내도>.
중산리, 천왕봉, 대원사 구간은 천왕봉 최단거리 코스.
<써리봉은 웅장하고 험악한 암벽이 펼쳐졌다고 소개.>
쌍계사, 대성동, 세석, 천왕봉, 대원사는 사찰과 천연공원>.
마천, 백무동, 장터목, 천왕봉, 장터목, 세석,대성동, 쌍계사
전남북 지방에서 쉽게 등반할 수 있는 코스로 안내도에 소개.
화엄사, 노고단, 세석, 천왕봉, 칠선계곡, 의탄, 마천 코스
<지리산 등반 최장거리로 58km로 4박5일 소요 종주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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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등반로 2 코스........................
중산리, 칼바위, 남부암벽 특수등반로, 천왕봉 구간.
남부암벽은 홈바위를 지나 통신골 따라 8km의 험로.
쌍계사, 버드내재, 삼신봉, 세석 코스는 길찾기 힘들다.
숲이 많이 우거져 특별한 지형의 지식 없으면 조난 위험.
우천이 제작한 등산 안내는 오늘날 안내지도와 매우 유사
그동안 교통의 발달로 인해 등반 일정만 다소 차이가 날 뿐.
오히려, 지금 폐쇄된 등반로까지 상세하게 표시된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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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지면 칠선계곡으로 떠난 줄 알라'던 평소 그의 말.
추모비 위치는 법천골 입구에서 법천교 다리 지나.. 칼바위 전.
'그는 정말 입버릇처럼 말했던, 칠선계곡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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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異 대자연 속으로 떠난 "인간 산신령"
홀연히 종적 감춰 "入神 20년" - 묘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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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뒷면에는 그의 일생이 담긴 비문이 새겨져있다.
우천을 흠모하는 산악인들이 뜻을 모아 만든 추모비.
추모비에 새겨진 뒷면 마지막 글은 이렇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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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꽃으로 피어오르는 듯 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게 하는 바이다. 우천의 자연으로의 동화 20 주년
맞이한 즈음 뜻깊은 추모제라도 한번 가졌으면 하는 바램 - 한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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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는 지리산의 기인으로서 알려졌던 우천.
사후에는 '지리산 산신령.'으로 불리우는 우천.
그의 영전에 애도의 뜻으로 시 한수를 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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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바 위 - 유 치환 (柳 致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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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손창화 보살.
1960년대 전란 평정 직후 지리산 개척 등산 초창기.
이 시기에 개척산행에 나선 이들은 산악계 선구자들
이들은 대개 유명 의사나 체육인, 학자 등 지도자 급
당시 지리산 등산은 천왕봉과 세석고원 정도로 압축
법계사 초막(草幕)과 천왕봉, 세석고원이 주요 거점
이 세 곳에는 저마다 터줏 대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세석고원 움막의 우천 허만수,
법계사 초막의 손 (청화) 보살,
천왕봉 토굴 속의 김순룡 노인
천왕봉 남쪽의 법계사도 6.25 전란 와중에 전소
법계사를 복원하려고 초막을 짓고 지키던 손보살
천왕봉 아래 토굴은 일제시대 반토굴식 산장 자리.
50년대 후반~ 60년대 중반에 김순룡 노인이 지켰다.
6.25 전후에 빨치산들이 이용했던 반지하식 토굴
그후 토굴을 산장처럼 이용한 진주의 김순룡 노인
그 가운데 산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손보살.
부산 대륙 산악회의 성산씨 등을 비롯한 산악인들은
손보살이 내주는 팔선주를 마시는 것이 최고의 기쁨
법계사 초막을 찾는 이들에게 받은 시주로 복원 불사
당시 법계사 초막은 특별한 산장 역할을 한 셈
허우천, 손보살, 김순룡 노인은 서로
낯돌리고 남처럼 지낸 것은 아니었다.
거리 상으로는 서로 꽤 떨어져 있었지만,
사실 세 사람은 협력 체제로 함께 지냈다.
손보살이 법계사 초막을 비울 때 허우천이 지켜주고,
천왕봉 김 노인 또한 법계사 초막에 종종 묵기도 했다.
손보살은 허우천이 들르면 가족처럼 밥과 술을 대접했다.
우천에게 인정을 베푼 곡점마을의 민박집이자 국밥집
노선버스 종점 국밥집 주인 부부는 이광덕 & 조순례
큰 가마솥에 종일토록 장작불을 지펴서 끓여내는 국밥
이 집 안주인은 진주 태생 미인으로 인정도 많았다
국밥집 안주인은 세석고원 우천을 끔찍이도 아꼈다.
우천이 찾아오면 며칠씩 붙들고 영양보충 시킬 정도
허우천은 먹을 것이 없으면 그냥 굶고,
술이 있으면 몇 날 며칠이고 술만 마셔
건강을 잃고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곡점의 국밥집은 우천의 허기진 배를
언제든지 한껏 채워주었던 고마운 곳.
허우천은 그곳에서 배를 든든하게 채우면
그 길로 걸어서 진주까지 다녀오고는 했다.
진주에서는 친구나 가까운 사람들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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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2월 무렵 법계사는 을씨년스러웠다.
장독대 위 불상 하나 정도가 눈에 들어올 뿐.
법계사 터에 3층 석탑 보물이 있긴 있었지만..
이 사찰은 고려 우왕 6년(1380년)에는 왜구들의 방화.
또 1948년 여순반란군 토벌대가 대원사와 함께 태웠다.
그 법계사 복원을 염원하는 한청화 보살이 세웠던.,초막
1955년부터 부산, 경남 산악 선구자들이 천왕봉 등정
부산 신업재, 김재문, 김용기, 김규태, 오점량, 한형석,
성산, 김택진, 이영도 그들에게 전초기지였던 법계사 초막
로타리산장 설립에 결정적 역활을 했던 법계사 초막
한청화 보살은 법계사 복원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로타리산장을 건립하는데 그 디딤돌 역활을 했다.
손보살 그녀의 이 공로는 높이 살 만하다.
전란 직후 산악 선구자들의 산 중 오두막
법계사 초막에서 저마다 낭만을 꽃피운 것.
대륙 산악회.
1958년 9월 19일 성산, 이명선, 박선종, 오봉구, 이창동
7명이 부산 서구 초장동 3가 75번지에서 총회를 열어 창립
지리산 창립기념 등산, 칠선계곡 개척 산행을 이끈 산악회.
1960년대 우리나라 등산장비는 대부분이 군용장비 뿐
장비 대부분을 일본 카타로그를 보고 주문 제작해 사용
태백산, 함백산 등을 동계 극지법 등반으로 적설기 초등
지금 보급되어 있는 안내등산의 선구자 역할.
1963년 지리산 칠선계곡을 최초로 답사,
선녀탕, 청춘홀, 쟈일3단폭포, 부일폭포,
합수골, 대륙폭포, 마폭, 개선문 등을 명명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 일원의 암벽코스를 개척,
고별대, 대륙봉, 숨은벽,나비암, 부채바위, 은벽,
파리봉 등을 명명, 지도상에 그대로 등재되어 통용.
1964년 제1회 부산등산대회를 금정산에서 개최하였고,
1965년 대한산악연맹에 개인단체 자격으로 가맹하였고
1967년 부산 산악인들의 모임 부산산악연맹 창립에 참여.
1969년 성산 씨가 대한산악연맹 초대 전무이사
전국등산대회에 성산, 곽수웅, 서승일, 윤완석,
조창래 회원 등이 심판, 산악계 발전에 이바지
1968년 일본 후꾸오까 산악연맹과 자매결연
지리산과 설악산, 한라산을 합동등반하였다.
1971년 부산에서 2번째 해외원정(일본 북알프스)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에 곽수웅, 쟈누봉에 안진현,
시샤팡마 초오유에 이주이, 알프스 3대 북벽 조창래
인도 히말라야 다람슈라봉에 서승일 회원 등을 파견했다.
1987년 산악회 단독으로 칸첸중가 원정대를 조직,
정상무 대장 외 8 대원이 도전, 이성호 대원 사망.
1988년 1월2일 세계 2번째로 이정철 동계등정 성공,
이 공로로 故 이성호를 비롯한 전대원이 체육훈장
1960년 태백산 현리동굴
1975년 매봉산 무건리 동굴탐사,
1977년 강원도 삼척의 관음굴, 환선굴 탐사
동굴탐사반을 결성, 초당굴, 용소굴 등 동굴탐사
부산 해저탐사반을 결성, 스킨 스쿠버 교육을 매년 실시,
산악, 동굴, 바다 등 시야를 넓혀 회원들의 욕구를 충족
등산, 동굴탐사, 해저탐사, 산악서클 이정표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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