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6. ( 산죽. 황금능선. 무재치기 폭포. 장당골. )

donkyhote 2007. 10. 9. 14:31

 

 

산죽(조릿대).


 


지리산은 온통 산죽으로 뒤덮여 있는듯 하다.
등산로에서 벗어나면, 산죽이 진로를 막는다.
황금능선의 빼곡한 산죽밭은 악명 높기로 유명.

1950년대 빨치산들의 산죽잎 침낭.
밀가루 푸대에 산죽잎을 넣은 침낭.
토벌대에게 쫓길 때 사용했던 침낭.

겨울에 얼어죽지 않은 것이., 기적.
동상에 걸린 발이 썩어문드러지고
죽지 못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산죽은 대나무 중에서 가장 작은 대나무.
쌀을 씻어 건지는 '조리'의 원료라 일명 조릿대
중부 이남의 산에 빽빽하게 무리지어 흔히 자란다.

산죽은 인삼을 능가한다고 할 만큼 놀라운 약 성분.
당뇨병 고혈압 위염 위궤양 만성 간염 암 등에 효험.

키는 1∼2미터, 지름은 3∼6밀리미터쯤 자라고
일본에서도 자라지만 일본 산죽은 약효가 별무.
산죽은 그늘에서도 잘 자라고 추위에도 강한 편.

잎은 긴 타원 형 피침 꼴로 길이 10∼25cm이고
잎은 뾰족하고 가장자리는 가시같은 잔톱니와 털.
꽃이 피고나면 죽기에 일생에 한번 꽃피고 맺는 열매

꽃은 4월에 피며 열매는 6월에 익는데
열매의 모양새는 보리나 밀을 닮았다.

조릿대 열매로 떡을 만들거나 밥도 짓는다.
수십년, 또는 수백년 만에 한번 꽃이 핀다.

갖가지 암에는 조릿대 뿌리 10∼20그램을 달인 물
씨앗을 불로 살짝 볶아 가루 낸 것을 한 숟가락씩
하루 세 번 식전 복용 또는 조릿대 다린 물을 복용.

조릿대는 심장의 열과 위장의 열을 씻어 내며
간장의 열독을 풀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오줌을 잘 나가게 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치료약

당뇨병 고혈압 간염 위궤양은
조릿대 뿌리달인 물이 치료약.

조릿대 뿌리를 12시간쯤 달인 뒤
물이 진득진득해질 때까지 졸여서
오동나무 씨앗 크기로 알약을 만들어
10∼20개씩 하루 세 번 식전 30분에 복용.

불면증이나 신경쇠약에도 조릿대 잎차를 마시면 효험
조릿대 잎을 달인 물을 돐 지난 아기에게 먹이면 튼튼
자궁경관염으로 냉이 흐르고 허리와 아랫배 아플 때 직효.

조릿대 잎(산죽)을 가루내어
한번에 3g씩 하루 3번..복용

조릿대는 성질이 차므로
냉한 체질이나 저혈압은
복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지리산 산죽은 조랫대 원료이다.
지리산 일대는 산죽 공예 생산지.




황금능선.




"황금 빛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고,
애욕의 불꽃이 마음에 검은 그을음을 만든다."

'이 말이 실감나게 떠오르는 황금능선 산세.'

마치 애욕에 몸부림치는 여인의 자태같은 산세.
불교에서는 욕망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일이 애욕.
이성(異性)에 집착하는 인간의 성적욕망 또한 애욕.

'황금능선 산죽밭에 잘못 빠져 들면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어 위험천만.'

웅석봉 - 밤머리재- 도토리봉 -왕등재 습지
- 외고개 - 새재 - 국골 사거리 -하봉 -중봉
천왕봉 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이 동부 능선.

황금능선은 지리산 동부능선의 가지능선.
구곡산 - 국사봉 - 써리봉 = 20km 황금능선.
'구곡산 능선' 이라고도 불리우는.. 황금능선.

내원골과 장당골 두 계곡 사이에 있는 황금능선.
두 계곡의 합수지점인 내원사가 황금능선 들머리.
뢍금능선은 내원골이 생가인 정순덕 여인의 은신처.

토벌군에게 쫓길 때마다
정순덕 여인에게는 생명줄.
최후의 빨치산 은신처였던 곳.

대원사길과 중산리길이 나뉘는 산청군 시천면 덕산마을
그 서쪽에 솟은 구곡산에서 국사봉을 거쳐 써리봉 능선.
영호남 산악인에게는 지리산 종주 코스로서 알려진 코스.

황금능선은 기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차이가 많다.
가장 긴 코스는 구곡산 남쪽 마을인 외송 마을 들머리.
산 중턱에 위치한 도솔암까지는 차량으로 오른 후 산행.

능선 중간으로 질러 오르는 산길 중 인기 높은 코스
중산리에서 국사봉 또는 느진목으로 오르는 산길이고,
내원골에서 국수재를 거쳐 써리봉으로 오르기도 한다.

외송마을 들머리는 도솔암 직전 왼쪽 계곡부터 시작.
계곡이 두 갈래로 나뉘는 지점에서 산길은 왼쪽 계곡.
구곡산에서 써리봉 못미처 물가름이까지는 샘이 없다.

하여, 도솔암 왼쪽 계곡에서 식수를 마련해야 한다.
구곡산에서 써리봉까지는 중간중간 한 길 넘는 산죽
눈으로 길이 확인안될 때에는 발로 길을 찾아야 한다.

써리봉 직전 안부상 늪지대인 '물가름이'
그곳에서 써리봉 오름길은 여러 가닥이다.
길이 헷갈리면 곧장 치고 오르는 편이 낫다.

써리봉 능선에 올라 오른쪽 길로 내려서면 치밭목산장.
왼쪽 길을 따라가면 중봉 거쳐 천왕봉에 오르는 등산로.
구곡산에서 써리봉까지 하루에 가는 일정은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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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산죽으로 뒤덮여 헤쳐나가기 악명 높은 황금능선.
1979년 세석산장 관리인(정원강)이 낫으로 개척한 산길
써레봉에서 구곡봉 지나 덕산의 덕천강가로 이어진 능선

가을 산죽밭 황금빛에 반해 명명한., '황금능선'

서산에 걸린 오후 햇살 아래 구비쳐 내달리는 능선
중봉 인근에서 바라다 보면 그 풍경에 어울리는 이름.
지독스러운 산죽밭에 빠져들면 탈진하기 쉬운 황금능선.

마치, 숨은 매력까지 온통 드러낸 여인의 유혹.
그 품속에 빠져들수록 앙칼지게 거부하는 산죽밭.
결국, 잘못 헤메면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황금능선.

내원골 - 내원사 - 안내원 - 국수재 - 황금능선.
황금능선 국수재에서 발원한 내원골은 덕천강 상류
황금능선의 산행기점은 덕산과 내원사를 꼽을 수 있다.

내원사 앞의 다리를 건너 왼편 깊숙한 골짜기로 신판도로
이 도로 끝까지 따라 오르면 해발 800m고지에 안내원 마을
써리봉에서 국사봉으로 흘러내리는 황금능선과 연결되는 곳.

안내원 마을 끝집인 지리산 농장식당 마당 지나
오른쪽에 차단기가 설치된 옆으로 오르면 들머리.

마을에서 국수재까지 약 1시간 거리.

내원사 - 안내원 - 국수재를 잇는 길은 옛 등산로
시외버스가 시천면사무소인 덕산까지 운행할 때는
천왕봉 오르던 사람들이 주로 이 길을 이용했었다.

구곡산은 써래봉에서 이어지는 일명 황금능선의 정점
가을철 억새와 산죽이 어울어져 산악인을 유혹하는 곳.
특히 써래봉에서 국수봉을 거쳐 구곡산에 이르는 능선

좌우로는 빨치산 최후의 인물인 정순덕의 활동무대.
내원골과 장단골은 아직도 숨겨진 비경으로 남은 곳.
신비의 마야계곡에는 빨치산아지트가 자리잡았던 협곡.

'그 신비의 계곡을 일궈낸 육중한 능선이 황금능선.'

지리산 동부능선의 비경지대인 원시림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지천에 널린 산죽은 보호동물인 반달곰의 먹거리.
이일대는 반달곰의 서식지로서 분류되어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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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자태를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황금능선.
천왕봉- 중봉- 써레봉- 국사봉 - 구곡산 = 동남부능선.
천왕봉에서 30km에 달하는 가을 능선 초원은 황금 물결.

덕산 뒷산 구곡산까지 이어져., 일명 구곡능선.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연상하게 하는 구곡능선.

천왕봉에서 써레봉 거쳐 치밭목산장으로 이어진 등산로
써레봉에서 오른쪽 등산로를 비켜 나가면 황금능선이다.
써레봉 주변은 등산로 구분이 희미해 길 찾기가 어렵다.

이 부근만 지나면 별 어려움이 없이 산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안개속에서는 길을 잃고 여우에 홀린 듯이 방황.
구곡능선에서 뻗어내린 좌우 18 골짜기로 헤메이기 쉽다.

가을에는 한껏 멋스러운 여인의 화려한 몸단장
애욕에 몸부림치는 여인의 흐느낌 같은 바람소리.
마치, 베일에 가려진 매력까지 드러낸 여인의 유혹.

능선에는 초지대와 함께 산죽들이 우거져 있고
오른쪽에 천왕봉이 고고한 자태로 우뚝 솟았다.
가을날 이 능선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황룡 같다.

여기에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순두류계곡과 중봉골,
천왕골의 넉넉함과 1,037봉과 국사봉 단조로운 맛.

국사봉은 안내원마을에서 한시간 가량 거리.
국사란 신라와 고려 때 승려의 최고 법계이다.
국사봉은 원나라 지배를 받았던 고려 때의 지명.

이 봉우리를 기점으로 큰 절골, 작은 절골 등등.
'외탑이' 분지 지점과 골짜기에는 옛 여러 사찰터.

수많은 탑이 세워졌을 만큼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곳
현재 잡초와 수림에 덮혀 절터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절골은 통일신라 말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으로 추정된다.

'내원마을에서 국사봉에 이르는 길.'

1960년대까지 순두류 거쳐 천왕봉 가는 등산로로 각광.
지금은 이 코스로 천왕봉을 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사봉은 덕산과 천왕봉 사이 일직선 상의 가운데 위치

지형 특성상 옛날의 국사봉은 봉화대 역할을 한 통신기지
또 국사봉은 가지 능선들이 발달해 있어 빨치산 지휘본부
깊은 산중이면서 민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절묘한 은신처

동남부능선은 천왕봉에서 구곡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중간 중간에 하산 또는 탈출할 수 있는 길들이 많다.

..........정순덕 여인의 비상통로..............
치밭목 산장에서 중산리 지름길은 무재치기폭포
- 1250안부 -늦은목재 - 마야계곡(중산리계곡)-
순두류 - 중산리는 정순덕 여인이 많이 이용한 길

안장단골에서 내원능선으로 오르는 비상통로들.
정순덕 여인이 자기 마을을 찾을 때 비상통로들.

마야계곡에서 써레봉,중봉,천왕봉 동사면으로 통로
중산리계곡 상류에서 황금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발달

써레봉에서 순두류 또는 장당골로 빠질 수 있으며,
국사봉에서 내원마을이나 순두류로 하산할 수 있다.

또 국사봉에서 구곡산으로 가다가 곡점이나 시천면 동당,
외공마을로 빠질 수 있는 것이 이 능선의 지형적인 장점.
국사봉에서 두어 시간 걸어 마지막 봉우리가 구곡산 정상

구곡산에서 맑은 날엔 천왕봉과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솔암 거쳐 덕산중학교까지의 하산 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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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능선 등산로

1. 중산리에서 국사봉 또는 느진목으로 오르는 산길
내원골에서 국수재를 거쳐 써리봉으로 오르기도 한다
.
외송마을 기점 등산로는 도솔암 직전 왼쪽 계곡에서 시작.
계곡의 두 갈래 지점에서 산길은 왼쪽 계곡으로 이어진다.
이 등산로는 산행하기 전에 식수를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2. 써리봉 능선에 올라 오른쪽 길로 내려서면 치밭목대피소
왼쪽 길을 따르면 중봉(1,875m)을 거쳐 천왕봉에 오르게 된다.
구곡산에서 써리봉까지 황금능선 코스 당일 산행은 쉽지 않다.

따라서, 치밭목산장에서 일박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만약, 시작이 늦었다 싶으면 야영 장비를 갖추는 것이 현명하다.


구곡산(황금능선 끝봉) 하산길.

동당마을, 곡점, 외공리, 덕산등 여러 곳이 있다.
그중 차편은 덕산 쪽이 편하나 길 찾기가 어렵다.
외공리로 내려가는 길이 비교적 수월하고 무난하다.

외공리 마을회관 앞에 높이 60㎝ 여근석과 남근석.
이 한쌍의 음양석은 남녀 생식기를 닮아 신기하다.
이 음양석은 60년 전 마을 주민이 주워온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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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곡산(961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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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곡산은 글자 그대로 아홉 계곡이 있다고 하여 구곡산.
'꼬리 9 달린 여우' 내원골은 구곡산의 9 계곡에서 유래.
구곡산은 황금능선 끝 봉우리이자 '산악 마라톤대회 코스.'

덕산에서 바라보는 구곡산의 골짜기들.
골짜기가 골짜기를 가지치는 골짜기 늪.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떠오르게 하는 곳.

지리산 천황봉이 손에 잡힐듯이 가까워 보이며,
구곡산은 항상 규제없이 산행이 가능한 산행코스
봄이면 철쭉, 가을이면 단풍아 아름다운 산행코스.

천왕봉 코밑까지 무성한 산죽구간 탐험코스.

구곡산은 1950년대 빨치산과 토벌군 간의 격전지.
마지막 남부군으로 알려진 정순덕 여인의 활동무대.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으로 구미호로도 불렸던 정순덕.

구미호는 술수와 변화를 부려 인간을 괴롭히는 요물.
여우는 무덤을 파서 송장을 먹는다하여 '죽음의 상징'.
옛날부터 사람의 죽음을 예고한다는 구미호의 울음소리.

남자를 홀리는 요염한 여성으로서 자유롭게 변신하며
여우가 천년을 묶으면 구미호로 둔갑한다고 전해온다.
구미호는 고대중국 '은나라 주왕의 비' <달기>의 별칭.

주왕은 어진 신하의 충언은 외면하고 달기 만을 총애.
죄인을 숯불 위에 걸쳐놓은 구리 기둥을 걷게 한 주왕.
죄인이 미끄러져 타죽는 형벌을 보면서 웃고 즐긴 달기.


"여우 같은 지지배!"
"여우 같이 약은 녀석.

원래, 여우는 우리 민족에게 사랑받던 동물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아스라이 남아있는 '여우놀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잠 잔다~~."

깊은 산속에서 달밤에 목놓아 우는 여우의 울음소리.
전설의 고향에 단골로 등장한 구미호, 백여우, 여우골.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사라진 여우.

"아우~~우우우우~~~~"
"어우~~~어우 어우 우~~ "

여우가 짝을 찾아 서로 울부짖는 소리는 매우 애달프다.
짝찟기 상대를 쉽게 구할 수 없어 밤새 울부짖는 것 같다.
깊은 산속에서 야영을 하면 간간히 들려오는 여우 울음소리.

'여우는 긴 꼬리, 쫑긋한 귀, 뾰족한 입이 특징.'

특히, 붉은 여우는 꼬리 끝이 하얀 매혹적인 자태의 동물이다.
하여, "여우 같은 계집애."는 아름다운 여성을 극찬하는 감탄사.
현재, 한반도 휴전선 남쪽 여우는 거의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여우는 왜 우리나라에서만 사라진걸까?’

여우는 주변에서 너구리처럼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동물.
여우 모피를 얻기 위한 사냥과 쥐약 살포가 직접적 원인.
일제시대 여우털 목도리는 부를 뽐내려는 귀부인의 상징.

1960/70년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쥐약 살포.
죽은 쥐는 여우의 먹이가 되므로 방방곡곡에서 숨져간 여우.
그러나, 배고팠던 시절인 당시 여우의 죽음은 관심 밖이었다.

몽골 대초원에서 여우굴을 파고 자유롭게 사는 여우.
안타깝게도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에 가로막힌 통로.
이제는 불러도 대답 없는 전설 속 이름이 되어버린 여우.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여우골 또는 여우고개 지명이 많다.
예전에 인적없고 산세 험한 여우 출몰지역 남태령(南泰嶺).
사람으로 변신한 천년묵은 여우까지 나타난다는 호랑바위골

그 남태령 서울과 과천 경계이며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 고개
18세기 말 정조임금이 수원 선친 사도세자 능(陵)을 자주 참배
어느날 이 고개 이름을 묻자 남태령이라 엉겁결에 대답한 신하

여우고개 지명이 상스러워 감히 왕에게 말못한 신하.
서울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라 남태령이라 했던 것.
그후 그 여우고개는 남태령으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

서울 북한산에서 가장 인적없고 으슥한 '여우골'.
여성 산악인 고미영을 배출한 시발 산악회 야영장.
지금은 폐쇄된 야영장으로 산꾼들의 은밀한 비박지.

그곳에 숨겨진 동굴 절벽을 거쳐 백운대 오르는 골.
시발 야영장 - 여우굴 - 처녀샘 - 백운대 = 여우골.
아직도 여우 전설은 우리 주변에 친근하게 남아있다.

야생동물이지만 개과 동물인 여우.
그래서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에 자리잡은 구곡산
써래봉에서 이어지는 일명 황금능선의 정점
가을철 억새와 산죽이 어울어진 환상의 코스

특히 써래봉에서 국수봉을 거쳐 구곡산에 이르는 능선
그 좌우로 내원골과 장단골 및 빨치산 아지트 마야계곡.

그 신비의 계곡을 일궈낸 황금능선은 지리산의 동부능선
그 능선 따라 크고 작은 협곡과 원시림은 반달곰 서식처.
특히, 능선 전체를 뒤덮은 산죽은 반달곰에게 중요한 식량.

이 일대 산죽밭은 원래 반달곰 서식처로 알려져왔다.
최근 이 일대에는 흑해주 연안 원산지 반달곰을 방사.
과연 자연환경에서 적응하며 살아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구곡산 산행코스

1코스 : 덕천서원→우농원→도솔암→계곡→안부→헬기장→정상.
2코스 : 동당→기도원→제2계곡→전망대→헬기장→정상→덕천서원
3코스 : 동당→기도원→헬기장→정상→제2헬기장→제3계곡→동당
4코스 : 덕천서원→안부→정상→제2헬기장→천잠→덕치재→덕치


교통안내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단성IC→시천(국도20번)→덕천서원→구곡산
- 산청IC→금서면 매촌(국도59번)→밤머리재→시천→덕천서원→구곡산

<국도3호선> - 신안면 원지→시천(국도20번)→덕천서원→구곡산
- 산청읍→금서면 매촌(국도59번)→밤머리재→시천→덕천서원→구곡산

현지교통 : 진주- 덕산(30분 간격) 버스로 덕산주차장 하차
주변관광지 : 덕산서원, 조식유적지, 대원사, 내원사, 양수발전소




무재치기 폭포.




지리산에는 크고 작은 골짜기들이 아흔 아홉.
저마다 그 나름대로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골짜기마다 간직하고 있는 크고 작은 폭포들.

큰세개골 대성폭포
천왕봉 법천골 유암폭포
반야봉 함박골 실비단 폭포

한신지곡 <천령, 내림> 폭포
칠선계곡 <칠선, 대륙, 마> 폭포

단천골 용추 폭포.
장당골 무재치기폭포
그외 수많은 무명폭들.

맑은 계류가 떨어지며 쏟는 하얀 포말
탁한 세속을 맑고 깨끗하게 씻어주는듯
'생명의 근원' 천신의 정기가 쏟아지는듯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
아울러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위치.
무재치기 폭포는 마치 '왕의 여자'인듯.

흰 白(백)은 백의민족의 상징
百(백) 성씨가 모여 사는 민족.
100 성씨 통치자는 신격화된 왕.

백의민족에게 백색은 '신의 정기'.
폭포는 '생명의 근원' 천신의 정기.

아흔 아홉이란 숫자는 인간세계.
아흔 아홉을 넘어서면 하늘나라.
아흔 아홉은 인간 세계의 한계선.

.............'아흔 아홉 골'의 유래...............
한라산 자락 수많은 골짜기로 이루어진 아흔아홉골.
백에서 하나가 모자라 불행이 시작됐다는 설화 내용.

'아주 먼 옛날 한라산은 100 골짜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자와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뛰놀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날 중국 스님이 찾아와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대국동물대왕입도(大國動物大王入島)
라고 외치면 맹수들을 없애 주겠다."

백성들은 스님이 시키는 대로 외치자
맹수들이 모두 한 골짜기로 몰려왔다.
스님은 불경을 외고 나서 맹수들을 향해

"이제 너희들은 떠나라.
이 골짜기는 없어지리니
만일 너희가 또 다시 오면
너희 종족을 모두 멸하리라!"

스님이 큰 소리로 외치자
그 골짜기는 사라져 버렸다.

그 후부터 제주에는 맹수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큰 인물이 나지 않아 백성들 고난이 시작됐다는 설.

와룡산에도 이와 유사한 아흔아홉골 전설이 있다.
한라산 와룡산은 지리산과 아울러 동식물의 보고.
대홍수 시절 동식물들이 '종의 명맥'을 유지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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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중의 골짜기' 경남 산청 장당계곡
기암괴석과 옥류,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곳.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심산유곡 자체인 장당골.

써리봉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내원사를 거쳐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덕천강에 합류하는 50여리
대포마을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찰 내원사

이곳에서 내원사 왼쪽은 내원골, 오른쪽이 장당골.

무재치기 폭포 물줄기와 써리봉이 있는 바깥 장단,
남단부에서 발원한 물줄기 등이 있는 곳이 안장당.

장당골은 지리산의 광대함과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
깊은 골짜기로 인해 피란과 비극의 역사현장이 되었던 곳

1862년 산청일대 농민항쟁과 동학혁명에 실패한 사람
일제강점기에는 의병 은신처, 6.25때는 빨치산 은거지.
1963년 11월 마지막 빨치산 이홍이와 정순덕이 잡힌 곳.

'장당골의 발원지인.. 무재치기 폭포.'

무재치기는 '무지개 + 치기' 합성어 줄임말.
바위벽을 치는 폭포 물방울이 빚어낸 무지개.
'무재치기 폭포'는 '무지개가 뜨는 폭포'란 뜻.

 

무지개 뜰 무렵 환상처럼 나타나는 폭포.
비가 개이고 개울이 마르면 평범한 바위벽.
그곳이 폭포인지 조차., 모르고 지나칠 정도.

무재치기 폭포는 비가 온 직후에 아름답다.
마치, 기품 있는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인듯.
여왕이 목욕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무재치기폭포는 써리봉(1642m) 밑에 있는 폭포.
조개골과 한판골이 합류되어 폭포수를 형성한다.
무재치기 폭포는 장당골을 거쳐 덕천강으로 간다.

지리산에서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숨겨진 폭포.
마치, 하늘 높은 여인의 자존심을 상징하는듯.
목욕하는 선녀가 은밀한 자태를 한것 드러낸듯.

눈부시게 빛나는 백옥같은 피부의 아름다움.
속세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여인의 몸짓.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천상의 아름다움 

'대원사 계곡 끝, 치밭목산장 아래 있는 폭포.'

이 폭포는 바위에 부딪치면서 3단으로 떨어지며,
이 때 물안개가 형성되면서, 산 바람의 기류 현상
떠오르는 동쪽 햇빛과 조화를 이루어 무지개가 핀다.

하여, 맑은 날 오전에 무지개를 감상할 수 있다.
무재치기폭포란 이름은 무지개 치기 폭포의 준말.
장구한 세월동안 장당골을 빚어왔던 무재치기 폭포.

폭포는 천상을 연결하는 사닥다리.
폭포는 옥황상제 침소와 연결된 통로.
옥황상제에게 음기를 받치는 기우 의식.

'생명의 단비'를 내려달라는 기우제.
선녀같은 여성들이 목욕재개하는 모습.
옥황상제를 감동시키기 위한 기우 행위.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기우제.

이조에서는 기우제를 지낼 때 무당을 동원.
여성의 음기로 '천신의 정기'인 비를 부른다.
목욕재개한 여인이 속옷 차림으로 천신을 유혹.

'천신의 정기가 대지를 적시길 바라는 염원.'

폭포 = 천신을 유혹하는 듯한 여인의 자태.
비 = 모든 동식물의 젖줄이자 천신의 정기.
천신의 정기 =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 근원.

폭포는 비온 다음에 물줄기가 철철 넘쳐흐른다.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폭포는 말라 버린다.
폭포는 가뭄 때에는 폭포인줄 모를 만큼 볼품 없다.

'골이 깊고 숲이 무성할수록 아름다운 폭포.'

폭포는 비온 직후가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사랑을 호소하듯 촉촉하게 젖는 여인의 자태.
하여, 폭포를 여인의 음기에 비유하는 것일까?

폭포는 그 은밀한 음기가 비를 불러온다는 믿음.
기우제 장소로 높은 산 북사면 계곡의 폭포 인근.
지리산에서는 한신계곡 가네소 폭포가 기우제 명소.

'일년 내내 물줄기가 철철 넘치는 폭포.'

속치마 여인들이 방망이를 두드리는 기우제.
젊은 여인의 유혹적인 자태일수록 영험한 효과.
목욕 재개후 알몸 속치마 무녀들이 천신을 유혹.

방망이로 바위를 두드려 목마른 애틋함을 호소
천신의 정기인 비가 쏟아지길 바라는 주술 행위.
비가 메마른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게 해달라는 바램.

'고대 국가마다 가뭄 때 올렸던 기우제 풍습.'

무지개는 폭포의 음기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믿음.
이와 같은 믿음은 중국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공통점.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서로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무지개를 보고 홍수를 예상.
서쪽에 무지개가 서면 '소를 강가에 매지 말라.'는 속담.
즉, 서쪽 무지개는 동쪽에 태양이 있고 서쪽에 비를 뜻한다.

무지개는 짧은 시간에 빗방울이 굵은 소나기를 동반한다.
하여, 홍수가 일어나기 쉽고, 하천이 범람하는 것을 예고.
무지개는 종교에 따라 동서양 나라마다 다른 뜻을 품고있다.

노아의 홍수 같은 멸망은 다시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증.
인디언, 아프리카 바이라족, 말레이반도 주민은 뱀으로 해석.
하늘나라의 거대한 뱀이나 용이 물을 마시러 온 것이라고 생각.

동남아시아는 무지개를 산신령이 다니는 사다리로 해석.
선녀(仙女)들이 무지개 타고 지상으로 오르내리는 통로.
무지개는 하늘나라 선녀가 목욕처로 오가는 천상의 다리.

선녀가 무지개 타고 지상에 내려오는 곳.
상서로움을 뜻하는 오색 영롱함이 있는 곳.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을 떠오르게 하는 곳.

'비에 젖은 여인의 아름다움' 같은 무재치기 폭포.
그 누구라도 그 유혹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아름다움.
목욕하는 선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무재치기 폭포.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이 많은 날엔 더욱 아름답다.
마치, 영롱한 무지개 빛 폭포로 수줍음을 가린 모습.
폭포에 부딪친 물줄기마다 피어오르는 환상적인 물안개.

메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사랑의 빗줄기.
비에 젖어들듯 사랑 앞에 젖어드는 여인의 자태
그 은밀한 아름다움을 뽐내는듯한 무재치기 폭포

'어디로 가면 그곳을 찾아갈 수 있을까?'

지리산 동쪽 대원사 계곡 등산로는 두 갈래로 나뉜다.
대원사에서 무재치기폭포 치밭목산장 천왕봉 가는 코스.
대원사 상류 조개골은 치밭목산장을 오르는 이들이 이용.

치밭목까지 힘들이지 않고도 오를 수 있는 한적한 코스.
대원사를 한참 지나 더 도로 따라 올라가야 조개골 들머리.

천왕봉을 오르는 제일 동쪽 코스인 대원사 들머리는 늘 호젓.
산행 도중 불일폭포 다음으로 큰 무재치기 폭포를 볼 수 있고,
써리봉의 암릉을 체험할 수 있는 지리산에서 가장 투박한 코스.

대원사 입구 매표소와 대원사교를 지나면 왼쪽 사면에 대원사.
본격적 산행 코스는 대원사에서 약 1km 떨어진 유평리에서 출발
대원사 계곡 안쪽 3km 지점의 새재마을은 천왕봉 지름길 들머리.

우선 초입에 이정표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 유평리.

등산로는 작은 첫 능선 하나를 넘는 것부터 시작된다.
능선 마루에 올라서면 천왕봉 위용이 눈앞에 펼쳐진다.
장당골 상류로 4.5km 더 가면 오른쪽 새재로 넘는 갈림길

'갈림길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무재치기 폭포.'

이 폭포에서 치밭목산장까지는 약 40분 도보거리.
'취나물 밭 길목'을 세 글자로 줄인 말., 치밭목
무재치기 폭포에서 중봉까지는 치밀한 암릉 등산로.

중봉에서 천왕봉까지 약 30~40분 도보거리.
유평리에서부터 천왕봉까지 약 6 시간 소요.

무재치기폭포는 대원사계곡 깊숙한 새재마을이 들머리.
조개골 산장식당 왼쪽 계곡을 가로지른 녹색 구름다리
다리를 건너 산자락 비슴듬히 작은 지류와 능선을 횡단.

급하지 않은 두 번째 고개를 넘어서면
유평리에서 올라온 등산로와 합류한다.

'대원사- 무재치기 폭포- 치밭목 산장' 코스.
산행거리만 따지면 유평리 들머리보다 가깝다.

무재치기 폭포는 써리봉에서 발원한 물줄기
무재치기폭포는 치밭목산장보다 아래에 있다.
해발 1000 m 암벽에서 떨어지는 40 m 3단 폭포.

1단은 세 갈래 물줄기가
2단은 8갈래로 흩어졌다가
3단에서 양갈래로 쏟아진다.

마치, 현악기 줄과도 같은 폭포의 여러 갈래 물줄기.
폭포에 움푹 패인 곳은 악기의 울림통 역활을 하는 듯.
폭포수 물줄기마다 바위에 부딪쳐 빚어내는 자연의 소리.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듯한 폭포수 소리.
여러 악기들이 합주 하는 듯한 신비한 하모니.
고혹적인 선녀가 속삭이듯 토해내는 천상의 소리.

인간의 지친 영혼을 애무하는듯 황홀한 음률.
속수무책 감정의 찌꺼기를 배설하게 하는 소리.
모진 산상 비바람에 버텨온 천년 고목의 맺힌 한.

'천년 고목에 선녀의 옷자락 같은 실.'

우륵이 폭포 소리를 듣고
나무에 실을 매달아 튕기며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곳이다.

우륵은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 당할 무렵
신라에 망명한 궁중악사로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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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년전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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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당골.

 

 

 

 

 


무재치기 폭포는 판소리 가락처럼 흘러 장당골로 간다.
여인의 손끝에서 튕겨지는 아스라한 가야금의 선율처럼.
우리나라 근대사의 뼈아픈 민족 애환이 서려있는 장당골.

'동부능선 일대는 삼국시대부터의 전략적 요충지.'

중봉 - 하봉 - 국골 사거리 - 새재 - 외고개
- 왕등재 습지 - 도토리봉 - 밤머리재 - 왕재.
- 웅석봉 - 경호강(지리산 태극종주 동부능선 일대)

'가야국 마지막왕의 마지막 항전처'

장당골은 통일신라 시대 화랑들의 심신수련장.
하여, 옛부터 무관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장당골 지명에 관해서는 다양한 유래가 전해져온다.

동부능선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격전지.
원래, 당골은 성황당, 산신당, 칠성당, 기우제당,
도당, 별신당 등이 많이 남아있는 곳을 일컫는다.

.................당골.......................
호남지역에서 단골판을 매개로 하여
맺어진 세습무(世襲巫)와 신도집단.

단골은 호남지방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
세습무는 일정 지역의 무속의식을 전담
단골무당은 늘 정해두고 거래하는 무당.

단골 ·당골네 ·단골에미라고도 한다.

당골이란 우랄알타이어계의 천신(天神)을 의미
'tengri'가 단군·당굴 등으로 변화하면서 정착
세습무로서의 당골은 혈통에 의한 사제권의 세습,

사제권에 의한 단골판의 계승,
강신체험이 없어 영력이 없다.

신관(神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점,
집에 신단(神壇)을 설치하지 않는 점,
신을 향한 가무로 굿을 주재하는 특징

대개 부부가 함께 굿을 하는데,
남편은 주로 악기를 연주하며
굿의 실제적인 주관자는 부인.

당골은 자기가 맡은 지역 내에서만 굿을 할 수 있으며,
이 단골판의 권리는 사고 팔거나 세를 놓을 수도 있다.

신도집단의 상담역할도 하며,
길흉과 관련하여 점을 치거나
굿을 하는 사제기능을 담당했다.

이들은 특히 호남지역에서
각종 민속예술을 창조하고
전승시키는 중역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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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판.......................
당골(단골) 또는 당골네(단골네)라는 다양한 명칭
호남지역에서 세습무인 무녀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전통사회에서 이들은 극심한 차별을 받아 왔다.
비록 신분제도가 엄격한 봉건시대의 일이었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들에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녀들은 그들이 의례를 제공하고
마을에서 받는 보수를 '하시 값'이라 한다.

그들은 또한 일반인들과 혼인할 수도 없고,
다른 직업으로 바꿀 선택의 자유도 없었다.
이런 전통적인 차별의식은 아직도 남아있다.

따라서, 신분제 사회가 오래 전에 철폐되고
무속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대도시로 이사해 신분을 감추고 산다.

당골네는 원칙적으로 모계 전승이다.
어머니와 딸,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단골판은 마을과 당골, 개인과 당골간 제도화된 조직
단골판은 수개 마을과 일정한 종교적 독점관계에 있다
즉, 당골판(단골판)은 당골의 사회적 관할구역을 말한다.

무당은 의례를 주재하며 종교적 행사를 행하고,
마을 사람들은 당골 무당의 경제적 후원자이다.

당골은 마을차원이나 주민들이 부양할 의무가 있다.
당골은 당산굿을 주제하고, 정초에 안택굿을 해야 하며,
결혼, 출산, 사망, 질병, 재액에 관련된 의례를 해야 한다.

반면에 신도는 당골의 생계를 책임지는 차원에서
봄철에는 보리 한 말, 가을철에는 나락 한 말, 또는
목화나 삼농사를 지을 경우에도 수확의 일정 양을 제공.

'이러한 종교적·경제적 관계망 = <단골판>.'

단골판은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는 불가침 지역이기에
대대로 세습되거나 공식 거래를 통해서 소유권이 매매.

예컨대 당골이 이사를 하거나 무업을 그만 둘 경우,
그 단골판을 팔고 소유권을 넘겨 주는 것이 관례이다.

이때 댓가 지불 방식은 현물로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경작 관행에서 '도조'라는 방식처럼 지불한다.
매년 봄철이나 가을철에 약속된 댓가를 지불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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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단골은 가무를 하면서 제를 주관하는 곳
일정 보수를 받고 풍어제 기우제를 주관

산업사회가 되면서 단골 무당은 사라지고
말만 남아 단골 손님으로 그 뜻이 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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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손님 = 늘 정해 두고 거래를 하는 손님.
오늘날 흔히 통용되는 단골은 단골판에서 유래.
장당골은 무속인들이 많았던 '무당골'로 추정된다.

무당골은 전국 어느 곳을 가도 흔한 굿 음식.
제법 먹음직한 돼지머리를 비롯해 떡 과일 등.
하여, 숨어사는 은둔자에게 귀중한 식량 공급원.

................무당골.....................
구한 말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세 길이 있었다.
민씨, 외세에 붙거나 무당에게 붙어야만 했다.
명성황후가 무당을 신뢰해 무당이 기승을 부렸고
무당 인맥은 상류사회를 아는데 좋은 지표가 되었다.

어느날 대원군 심복치 청나라 보정부에 인질 잡혀가자
대궐 기도를 맡은 장님 이당주 기도 내막을 살피라 명.
한석진은 덕수궁 석조전 뒤편에 있는 이당주 집에 잠복.

이당주가 젊은 첩을 데리고 대청에 들어가는데
음식을 차린 신탁 정면에 영정 하나가 걸려있고
그 아래 '대원군 이하응'이라 씌어있는 것을 발견.

이당주가 경쇠를 흔들며 저자를 아비지옥으로
가두어 주소서 하는 내용의 축사를 49번 외우고
첩이 벽에 걸린 활을 꺼내 영정을 향해 49번 쏘았다.

대원군에게 사실을 고하고 이당주를 잡아들이니
대원군은 그를 사랑에 들여 정중히 모시게 하고
밥상도 함께 하며 사나흘 융숭하게 대접해 보냈다.

그간 불안했던 사람은 저주기도를 시킨 명성황후.

바로 이당주를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물으니
대원군에게 융숭히 대접받고 나왔다고만 하자
대원군에게 매수당해 고자질한 것으로 오해하고
이당주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해버린 명성왕후

그렇게 될 것을 가늠한 대원군의 노련한 술책.

이처럼 명성왕후는 무당의 점술이나 주술을 신뢰
임오군란 피난 때 충주의 과부 점장이를 데려왔다.

언제 난리가 멎고 궁에 언제 돌아갈 수 있냐고 묻자
과부 점장이 박소사는 창밖 먼 산을 손가락질 하면서

"이 산 이름이 국망봉이요, 방위도 서북쪽에 있어
망일(15일)에 서북방으로 환궁할 수 있나이다" 예언.

공교롭게 그 보름날 대원군은 청나라로 납치 당하고
왕은 청나라 용병 100명의 호위를 받고 8월 1일 환궁
명성황후가 무엇보다 놀란 것은 박소사의 예언이었다.

명성황후는 박소사를 자신을 보호하는 수호신이요
신령이라 믿었기에 박소사는 명성황후를 따라 환궁.
명륜동 관우를 모시는 북관묘에 박소사를 데려다놓고
신령군 군호를 내렸고 창덕궁과 통하는 새길을 만들었다.

하여, 박소사는 황후의 대소사를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고종과 왕세자마저 이 북묘에 행차하여 행례를 했으니
권세의 길은 북관묘 박소사로 크게 트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고종의 아관파천을 주도한 대신 이범진
아버지가 천주교 박해를 담당했던 포도대장이요
대원군 심복이라 명성황후 세도하에 출세는 불가능

그러나, 신령군에게 접근, 무당 추천으로 출세의 길.

이렇게 뿌리내린 무당 인맥은 국운을 기울게 했다.
조정에 기생하는 북묘 인맥을 배경으로 날뛴 진령군,

경운궁 창덕궁을 자주 내왕한다는 이궁 여대감,
신당 이름을 옥황당이라 하였기에 일명 옥황부인
평양 할미(평양파), 코가 컸던지 코보, 서강 할미
구한말 나라를 망치는 8 무당을 '팔망'이라 불렀다.

'지금도 전국의 명산마다 자리잡은.,무당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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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골의 공통점은 옛 사찰터가 많았던 골짜기.
미인의 유방 또는 향로 형태의 봉우리가 있는 곳.
예를 들면 북한산 수리봉 독박골 옆 골짜기가 무당골.

여인의 탐스러운 젖가슴처럼 눈부시게 고운 수리봉.
그곳으로부터 흘러내리듯 뻗어내린 골짜기가 무당골.
그 옆 독박골은 '이괄의 난' 당시 은밀한 반란군 훈련처.

'전국의 무당골 및 당골 대부분은 전란 격전지.'

장승이 서 있던 곳, 돌을 던지며 기원하던 적석(積石),
혹은 부군당이나 국사당, 마을 동제를 치루는 곳도 당골.
장당골은 우리나라 당골 중 우두머리 당골이란 주장도 있다.

통일 신라시대 불교가 성행했던 장당골 일대.
이조시대 불교 탄압 영향으로 폐쇄된 사찰들.
그후 잦은 전란에 휘말려 남은 사찰마저 소실.

토벌군이 빨치산 근거지를 없애려 작전상 소개.
대원사 벽송사를 소개할 때 함께 소실된듯 싶다.
하여, 안타깝게도 옛 절터 지명들만 전해져올 뿐.

장당골은 신석기시대부터 민간신앙이 성행했던 곳.
유교, 불교, 도교가 합쳐진 '유불선' 사상의 진원지.
민간신앙과 무속과 불교가 합쳐진 미륵사상의 진원지.

'1950년대 '반란의 역사'로 피비린내 나던 격전지.'

대원사계곡에서 몇겹 산허리 돌아 내원사가 있는 장당골.
장당골은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여인과 이홍이의 은닉처.
1948년부터 1963년까지 무려 15년 간이나 산속에서 생활.

1952년 대성골 전투에서 무너졌던 지리산 빨치산 주력부대.
1953년에는 거의 투항하거나 민가로 숨어 들어갔다가 검거.
그 이후 10년을 더 산속에서 살아 마지막 빨치산이라 한다.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하정계곡 = 인민재판 즉결처형장
삼장면 유평리 = 경남도당 야전병원 암굴아지트 방앗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사살된 곳.

경남은 빨치산과 토벌대 루트를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
산청군 함양군 하동군에서 20 여곳 빨치산 관련 유적지.
기존 6개 노선 등산로를 연결한 34km의 빨치산 관광 루트.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한 솔밭 아래 40여기 무덤들.

빨치산들이 양민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뒤 집단 학살
연고자가 안 나타나 마을사람들이 봉분을 만들어 수습
군자리 아래 삼정리 하정계곡 = 인민재판 즉결 처형장.

"계곡마다 송장들 썩는 냄새 때문에 코가 아팠다"

일부에서는 빨치산을 영웅화 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
베트남이 베트콩 게릴라 본거지를 관광명소로서 개발
관광객 유치에 성공하자 경남 당국이 이 사업을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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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면 대포리 장당골은 불교용어 장등(長燈)에서 유래 설.
'밤새도록 부처 앞에 등불을 켜 둔 골짜기'라는 뜻의 이름.
배의 돛대 꼭대기에 달아 앞을 비추는 항해등도 장등(檣燈)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 별빛은 커다란 위안.
칠흙 같은 밤바다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별 하나.
그것마저 없다면 밤바다는 지옥같은 암흑의 세계.

'별빛마저 없는 밤바다에서 길잡이는 항해등.'

언제 어느 곳에서 암초가 나타날지 모르는 두려움.
배가 어느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는지 모르는 두려움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유일한 신호등이 바로 항해등.

'망망대해에서 오직 신의 가호가 있기만 빌뿐..'

항해등은 칠흙같은 망망대해에서.. 유일한 빛.
옛날부터 뱃사람들에게 등불은 꿈과 희망의 상징.
등불은 저지대민족으로부터 비롯된 민간신앙 흔적.

장당골은 밤새 등불 행렬이 줄 잇던 곳.
1950년대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전부 소각.
지금은 폐사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진 곳.

매년 초파일 무렵 10 여 암자가 등불 밝히던 곳.
하여, 산등성이로 등불이 길게 줄을 이어., 장당골
그러나, 지금은 초파일 무렵에도 등불 하나 볼 수 없다.

각 사찰에서 법당에 밝히는 등불이.. 인등 자명등.
사찰 도량과 불교 신도 가정에서도 등불을 밝힌다.

'사찰 등불은 어디에서 유래된걸까?'

사찰의 등불은 최초의 비구니와 관련 깊다.
최초의 비구니 난타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비구니 난타....................
'설일체 유부경전'에 의하면 기원정사 법회에서 유래.
아사세 왕이 부처님께 법문을 들을때 동참한 불제자들
기름 등불을 켜 법회 자리를 밝힌데서부터 유래되었다.

이때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짤라
그것을 팔아 기름 한 되를 구해 등불을 밝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름 등불 공양을 올리는 것을 보고,
스스로도 복을 쌓고 싶었으나 가진것이 없었던 때문.
아침이 되어 모든 불은 꺼졌으나 그녀 불만 타올랐다.

'지극한 성심으로 밝혔기에 꺼지지 않는 등불.'

그후 난타는 출가하여 계를 받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때부터 부처님 전에 지극 정성으로 등불을 켜면
공독을 입을 수 있다 하여 밤새도록 사찰마다 등불.

'불교에서 비구니의 유래가 된 여인.. 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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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당골은 불교문화에서 유래된 지명.
원래, 비구니와 관련 깊은 지명 같다.
앞으로 풀어야 할., 베일 속 수수께끼.

장당골은 지리산 야생동물들의 낙원.
장당골에는 '경상대 연습림'이 있다.
피서철 장당골 개울가는 은밀한 휴식처.

개울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비경의 연속.

하늘나라 선녀가 내려와 목욕할만한 소.
혹시, 선녀를 엿볼 수 있을까 마음 설렌다.
그래서인지 선남 선녀 연인간 은밀히 찾던 곳.

무재치기 폭포 - 장당골 - 내원골 합류 - 대포리
무재치기 폭포는 장당골을 거쳐 덕천강으로 유입.

장당골로 들어가는 가장 알려진 등산로는 3군데 정도.
무재치기 폭포 넘어 헬기장 등산로 또는 황금능선 소로
요즘은 출입통제된 내원사 매표소 들머리 등산로가 있다.

장당골은 내원사에서 시작되어 무재치기폭포에서 끝난다.
장당골 가는 길은 찾아 헤멜 필요가 없을 만큼 찾기 쉽다.
내원골과 장당골이 만나는 지점 언덕에 내원사가 있기 때문.

내원사에서 장당보호소까지 10km는 호젓한 산책로

장당골 특유의 깨끗하고 푸른 계곡물을 만날 수 있다.
큰 폭포, 산중호수 같은 소. 오밀조밀한 계곡의 풍치.
사계절마다 색다른 자연미를 보여주는 절경을 자랑한다.

장당골 진주 경상대학교의 연습림은 지리산의 자연공원.
대자연의 경이로운 세계를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곳.
하늘을 찌르는 잣나무 숲은 일제 때 조림한 규퓨대 연습림.

'1945. 8.15 광복과 함께 경상대에서 인수받은 연습림.'

.................장당골 가는 길.................
덕산에서 대원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대포마을
대포마을에서 계곡을 거슬러 가다보면 내원사 앞
왼쪽은 내원골, 오른쪽이 바로 장당골에 해당된다.

장당골은 바깥장당과 안장당

무재치기폭포로 이어지는 지류
써리봉과 남단부에서 발원한 지류
써리봉∼국사봉을 잇는 황금능선 지류.

경상대 연습림 장당보호소 주변에서 모여
내원사 앞 내원골과 합류해 대포마을로 간다.

경상대 연습림은 널은 산판도로와 8차례나 교차.
등산로라기 보다 산책로 정도로 평가되고 있으나
상류는 울창한 수림이 뒤엉켜 원시림이 가득한 곳.

대포마을에서 내원사까지는 차량 이용이 가능
내원사에서 경상대 연습림 장당보호소까지 도로
장당골의 경상대 연습림 전체 면적은 4천5백37ha

옛 화전민 가옥과 화전민 삶터가 있는 곳.

장당골에는 6.25 이전까지 50여 가구의 화전민 마을.
빨치산 근거지로 이용되며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1960년 대 다시 장당골에 들어왔던 화전민 옛 주민들

통나무집을 짓고 가축을 기르며
바깥 세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영위

1964년 화전 민가전 방화사건과
1967년 국립공원 지정후 모두 이전.
자연학습원이 복원한 두류옥(귀틀집)

사실은 장당골 화전민들 폐가인 통나무집
굵기가 비슷한 통나무를 일정한 길이로 잘라
네 귀퉁이를 연결해 쌓아올린 뒤 흙을 발랐다.

지붕은 원래는 갈대나 산죽 등을 엮어 이용
남아있는 이들 집엔 양철지붕이 씌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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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봉 가는길인 내원골은 정순덕 여인의 활동 근거지
빨치산 활동 루트를 중심으로 관광지가 조성된 곳이다.
마지막 남부군, 남장 여인으로 유명했던 그녀가 잡힌 곳.

1963년 12월11일 새벽 1시.
그녀가 태어난 내원골 민가.

그곳에 보름간 잠복한 경찰에 의해 이홍이는 현장 사살
정순덕 여인은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서 붙잡혔다.

황금능선을 가운데 두고서 내원골과 장당골이 감싼 산세.
따라서, 내원골과 장당골의 합수지점은 전략적인 요충지.
황금능선은 빨치산의 도주로 및 은신처이자 활동무대였다.

산죽밭 무성한 곳마다 도사리고 있는 빨치산 비트.
남부군 무덤으로 추정되는 주인없는 6~7 기 무덤들.
장당골 빨치산을 숨겨주었음직한 산죽밭과 실개울들

'남부군 소탕할 목적으로 사용했음직한 폐 헬기장.'

천왕봉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길게 뻗어내린 황금능선.
푸른 초원이 가을 황금빛에 물들면 능선은 꿈틀대는 황룡
써리봉 동남쪽 국사봉 거쳐 구곡산까지 약 20km의 긴 능선.

학술조사 등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경우에 출입이 허용되며
그것도 관리사무소의 입산허가를 받아야 산행이 가능하다.
황금능선은 등산객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아 울창한 원시림

왼쪽으로 있는 안장당골과 오른쪽으로 있는 순두류계곡 사이
산행 중 돌아보면 저토록 험한 곳을 지나왔을까 할 정도 산세.
안장당골이나 안내월에서 보면 지례 겁먹고 중도에서 포기한다.

장당골은 지리산의 광대함과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깊은 골 안에 거미줄 같은 미로 투성이라 피난과 비극의 현장.
1862년 농민항쟁과 동학혁명에 실패한 사람들의 화전민 마을터.

이조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18세기
농업, 산업, 수공업, 신분제도 등등에서도 변화
실학(實學)과 함께 새로운 평민 의식이 일어난다.

그 단적인 예가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그 후 1862년(철종 13) 진주(晉州)의 농민 봉기
삼남 각 지방에서의 농민 반란은 전국으로 번진다.

농민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된 최제우의 동학
유(儒),불(佛),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인내천

'인내천(人乃天) = 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

새로운 세계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
당시 재야에 있던 몰락 양반계급과 백성들이 가세.
불길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종교세력을 이루게 된다.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체포, 1864년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자, 동학교도들이 뭉쳐 동학 농민혁명을 일으킨다.
그 동학군을 영도한 인물로 전봉준(全琫準)이 등장한다.

동학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뿔뿔이 흩어진 농민들.
장당골은 그들이 그들만의 이상향을 꿈꾼 화전 터.

일제시대에는 의병들의 은신처,
6·25전쟁때는 빨치산의 본거지.

하여, 장당골로 깊숙이 들어가면 길 찾기가 쉽지 않다.
중산리-자연학습원-황금능선-장당골 -무재치기폭포-대원사
황금능선에서 장당골로 가려다 보면 지독스러운 산죽길이다.

좌측으로 내려가면 장당골이고 능선 따라 내려가면 내원사
산죽사이로 내려와 좌측 장당골 하산로, 우측 지리산신제단.
장당골은 남향에 가까워 이른봄에는 야생화를 관찰하기 좋다.

장당골은 지형도와 등산안내도에 대부분 '한판골'이라고 표기.
써래봉 위에 서면 황금능선이 굽어보이고 그 아래 숨은 장당골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내원골과 장당골은 그 길이 만 합쳐 100 리.

내원사 입구에는 약 20년 전통의 민박집들.

텐트 30 동 정도 칠 수 있는 규모의 야영장도 있다.
그곳 음식점에는 산나물, 도토리묵, 조껍데기 동동주,
닭도리탕, 백숙, 정식, 국수, 파전 등을 맛볼 수 있다.

 

'여기에서 영계백숙에 조껍대기 술 한잔.'

이조시대 이곳을 찾았을 풍류 문인과 기생들.
무더위 피해 이곳에서 질퍽하게 어울렸을 듯.
그 풍경 머리에 떠올리면 마음 심란해지는 곳.

'잠 못 이루는 이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는 지척도 천리.

바른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에게
어둠 속 윤회의 길은 멀고 멀어라.'

- 법구경 제 60 - 


장당골 깊숙이 숨어있는 비경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
몸을 감는 덩쿨, 싫다고 뿌리치면, 옷 찢고 얼굴도 할퀸다.
이별의 통한이 담긴 연대 미상 <가시리> 가요와 같은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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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가시리잇고..바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고..바리고 가시리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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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둘러볼만한 주변 명소들.
산청 사람들 정신적 지주인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
문익점 유물과 각종 베 관련품이 전시된 면화 시배지.
                          

출처 : 산사모산악회
글쓴이 : 선경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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