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154 ( 반선. 당집. 몽고. 반야봉., 박영발 비트. )

donkyhote 2012. 5. 3. 20:55

반선.



반선.~~~~.~~~~~~.뱀사골....산장...................↘
........↖...................................삼도봉.......불무장등....화개골(남난희)... 화개장터...섬진강
...........↖..........*반야봉.........노루목..... .칠불사.....(무학대사)...불일폭포..쌍계사...
..............↖.*달궁................임걸령 샘터..........피아골 산장....연곡사...........
.................↖.....................돼지령.
.................심원계곡.........노고단 산장....왕시리봉.........문수골
.......................↖............성삼재
............................←.....차일봉................화엄사


반선은 뱀사골 들머리이자., 달궁에서 내령 방향 약 5KM 지점.
달궁계곡을 넘어가면 유명한 화엄사가 있어 등산코스로도 한 몫
천은사로 통하는 관광도로가 있고 남원에서 반선행 버스 15분 간격.

반선에서 지리산 관광도로를 따라 4.6km를 가면 달궁마을.
계속가면 노고단과 시암재를 넘어 천은사까지 연결이 된다.
남원공용버스터미널- 반선행 직행 15분 간격 운행(1시간 소요)

전주공용버스터미널에서 반선행 버스 22회 운행( 3시간 소요 )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뱀사골행 직행 9회 운행(2시간30분 소요)
대구서부시외버스정류장-거창,함양 경유 뱀사골 버스 7회(2시간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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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 반선, 뱀사골 지명에 관한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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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약 1300년전 송림사(松林寺)라는 사찰.
신라고찰 구산선문 실상사보다 100년이 앞선 대찰
많은 고승이 모여 수도를 하는 사찰이였다고 한다.

이 절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음력 칠월 백중날에
불심이 가장 두터운 스님 한분이 뽑혀 목욕 재개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신선바위에 올라 기도를 하면
그날밤으로 신선이 된다고 하여 해마다 행사를 계속.

그러던 어느해 송림사에 고승 한분이 찾아온다.
지금까지 송림사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듣는다.
그리고 그 이상한 일을 직접 확인하려고 결심한다.

고승은 그해에 선발된 스님 옷깃에 비상을 발라 입힌다.
그 스님이 입은 옷은 임금님이 특별히 하사한 비단 도포.
선발된 스님은 신선바위에 올라 기도를 드리도록 하였다.
한편, 송림사는 그 스님을 위해 100명 고승이 100일 기도

100일 기도가 끝나는 날 새벽 축시경 어디선가 찬바람
골짜기가 무너질 듯한 청천병력과 함께 괴성이 들려왔다.
신선바위의 스님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밝은 후 스님을 찾아 계곡을 올라가니
스님은 용소 옆에 단정히 정좌하여 합장하고 있었으며
그 앞에는 어마어마한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어 있었다.

100 명 고승의 기도가 그 선발된 스님의 목숨을 구한 것.
이무기는 스님의 옷깃만 물고 하늘로 날아 올라간 것이다.
그 선발된 스님 옷깃에 묻은 비산을 먹고 이무기는 용틀임.
산신령도 감동해 용이 못된 이무기를 벼락으로 쳐 죽인 것.

이때부터 이 산을 반야심경의 반야봉이라 불렀단다.

용소는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던 곳이라 뱀소로 격하
또한 뱀이 죽은 골짜기라하여 뱀사골(巳死谷)이라 명명
신선바위에 올라간 스님들의 반은 신선이 되었다하여, 반선.

임금님이 선발된 스님에게 비단도포를 하사한, 금포정
그때 살아 돌아온 선발된 스님이 '정진 스님'이었단다.
스님은 고승들의 100일 기도를 드렸던 곳에 사찰을 건립.

은혜를 갚기 위해 평생 수도를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한다.
그런데 사리가 많이 나와 사리탑을 쌓고 그 암자를 정진암
지금도 정진암(正眞巖) 터에는 기와조각들만이 흩어져 있다.

'반야봉, 뱀사골, 반선' 지명에 담긴 인신공회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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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선 지명은 전통 무속신앙과 불교가 결합된 흔적.
우리나라에는 옛부터 인신공회에 관한 전설이 많다.
특히, 우리나라 당집의 전설은 하나같이 내용이 같다.

....................인신공회 전설........................
어느날 당집 건너 편의 돌덤(石峯)이 점점 커지더니
산덩이만한 수탉이 되어 주변에 사는 사람을 해치고
곡식까지 전부 주워먹어 사람들이 살수 없게 되었다.

예쁜 처녀를 제물로 바치면 환란을 면할 것이라는 스님.
그 뒤 처녀를 제물로 바치면서부터 그 환란은 면했으나
처녀가 있는 집에서는 서둘러 그 마을을 떠나갔기 때문에
이제 그 마을에서 마지막 남아있던 처녀를 바치는 밤이었다.

마을 원로가 제물로 바치기 위해 처녀를 데리고 가는데
별안간 당집이 훤해지며 커다란 구렁이가 당집에서 나와
수탉과 맞붙어 싸우는 광경이 용호상박하는 형상 같았다.

'마을 수호신 당할머니가 구렁이로 변해 수탉과 싸움.'

노인과 처녀는 겁에 질려 쥐구멍 찾듯 당집에 숨어
태산이 진동하듯 으르렁대는 소리에 뜬 눈으로 밤샘.

다음날 수탉은 부리가 잘린 채 죽어 있었고
구렁이는 전신에 상처 입은 채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정성껏 흙으로 덮어 주었는데
무덤 하나는 부리 없는 수탉산이 되었고
또 다른 무덤은 구렁이 산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마을에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 수호신 당할머니는 구렁이로 변해 용 써서
수탉산 부리를 못 자라게 하여 마을을 지켜주었다.

마을 주민들은 구렁이로 변해 수탉을 죽이고
죽어서도 마을의 평화를 지켜준 당할머니 은혜
그 보답으로 구렁이 동산에 당집을 지었다 한다.

'그후 음력 정월 사흘 밤마다 당집에서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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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집 전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천왕성모 8딸이 팔도무당이 되었다는 백무동 전설.
백무동을 거점으로 무당이 전국으로 퍼져나간 흔적.
반야봉, 뱀사골, 반선 일대는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당집은 기자 조선에서 비롯된 전설의 고향인듯.'

기자 조선 유민들이 세운 고대국가 변한
삼한은 한반도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국가.

이 일대 당집 전설은 한반도 인간역사를 알려주는 듯.
신석기시대부터 옛 조상들이 남긴 삶의 터전 흔적 같다.
즉, 고대 동아시아 유목민들이 집단 이주해 정착한 흔적.

특히, 고려 초에 발해 유민들이 대거 집단 이주한 흔적.
발해는 고구려 지배층과 거란족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나라.
거란에게 패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던 고려의 왕건.

'특히, 발해는 고려의 맥을 잇는다고 자처한 국가.'

왕건은 발해 세력과 힘을 합쳐 후백제 점령 후 후삼국 통일.
발해 유민들은 고려 왕조의 굳건한 지지기반으로서 정착한다.
따라서, 고려의 한반도 통일은 옛 고구려의 부활을 상징한다.

지금부터 이 일대 풍습을 통해 그 사실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는 제수로 웃는 형상의 돼지머리를 선호한다.
아울러, 돼지 주둥이에 돈을 물려주는 '고사'는 부를 상징.
복권에 당첨됐거나 횡재했다는 사람들은 돼지 꿈을 말한다.


- 진서의 숙신씨 편에 식생활과 시체 매장법 기록 -

“그들은 돼지의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기름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았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돼지를 잡아 관 위에 올려놓았으니, 죽은 사람의 양식으로 바치는 습속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영토가 된 만주지방에 살던 읍루족의 기록.
오늘날 제삿상에 돼지 머리 얹는 것은 여기서 유래된 풍속.

삼국지 '위지 동이전’기록을 보면 색다른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여에는 목축이 발달하였으므로 가축 이름에서 본딴 벼슬 이름.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견사(犬使) 등.

'가축을 벼슬만큼 소중하게 생각했음을 알수 있는 기록.'

어쨌든 죽고 나서도 웃는 듯한 제사상의 돼지머리를 보면,
끈질기게 농토를 지켜낸 민족의 한과 해학을 느낄 수 있다.
웃는 돼지머리에 절하며 소원을 빌고는 짤라 나눠먹는 풍습.

'뱀사골 들머리에 있는 유성 식육식당
달궁 만복식당은 토종 흑돼지 요리 명소.

고추장 된장으로 무쳐낸 산나물도 맛있고
철판 숯불구이에 3년 묵은지(김치)도 별미.
뱀사골 또는 달궁을 찾을 때 들러볼만 하다.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에서부터 인월면 일대 인근마을.
상황리, 중황리, 하황리, 마천 일대는 흑돼지 오지 마을
옛부터 지금까지 흑돼지 마을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지리산 일대 산간 오지마을들의 특성이기도 하거니와
지금도 쌀죽겨, 구정물만 먹인 흑돼지를 구할 수 있는 고장.
100근 미만 흑돼지는 꼬리가 말려있고 주둥이가 벌쭉거린다.

그 옛날 똥돼지 냄새를 피우고 있는데 보기만 해도 정겹다.
또 허리는 길고 발목은 짧아 대도시의 살찐 돼지와 다르다.

이 일대는 지리산 토종돼지 소금구이가 별미인 지역.
비계 껍질이 골고루 섞이게 삼겹살을 석쇠에 올린다.
굵은 소금만 홀홀 뿌리며 구워도 토종돼지 맛을 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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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재래식 화장실 안에 흑돼지를 키우던 풍습
화장실 아래 우리에서 인분을 받아먹어 일명 똥돼지
제주 똥돼지 관광은 요즘 신혼여행 부부에게 큰 충격.

1980년대까지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집모퉁이 돼지우리 위에 가릴곳 없는 화장실
볼일 볼 때 돼지가 달려와 받아 먹는 놀라움.
이따금 배고픈 돼지가 부랄이라도 따 먹을 듯

'화장실 옆에 놓여있는 장대 같은 막대기.'

비로서 뒤늦게나마 그것의 용도를 알게된다.
화장실에서 용변볼때 필요한 똥치는 막대기.
돼지가 인분을 받아먹다가 귀를 털면 똥벼락.

멋을 잔득 낸 신혼부부에게는 긴박한 상황.

달려드는 돼지를 쫓을 때 인분을 치울 때 요긴.
볼일 본 후엔 천덕꾸러기 신세인 똥치는 막대기.
볼일 볼때 만큼은 이것처럼 소중한 것도 없는 듯.

제주에서는 볼일을 보며 이웃 사람들과도 담소
며느리 볼일 보고 있는데 말을 건네는 시아버지.
감나무 잎으로 뒤처리하는 모습도 흉허물이 없다.

돼지 덕분에 뱀에게 물림 염려 없는 화장실.
돼지가 뱀을 잘 잡아먹기 때문에 안전한 장점.
까만 빛깔 윤기가 잘잘 흐르는 제주 검은 똥돼지.

체중 60Kg 전후라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
흑돼지 5겹살 단백한 육질 맛은 정평이 나 있다.
흑돼지 사육법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유입된 풍습.

제주도와 지리산 일대는 원나라 풍습이 많은 고장.
흑돼지는 고려 말 원나라 유민들이 정착했던 흔적.
흑돼지 사육은 고구려 유민들의 전통적인 풍습이다.

지리산 흑돼지 마을들은 이웃마다 풍습이 서로 다르다.
백제권 풍습인 듯해도 고대부터 외래 문화가 유입된 듯.
마을 공동으로 올리는 당산제와 기우제가 이를 뒷받침한다.

'도대체 고대사회 어느 나라에서 유입된 문화일까?'

상황리 <상황마을> 입구 둘레 580cm 수령 500년 느티나무
수고 25m인 이 나무에서 해마다 7월 7일(음력)에 '당산제.'
제관은 이장이 하며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기원하는 목적

<중황마을>은 하황마을과 상황마을의 중간에 있는 마을.
마을에서 북쪽으로 가면 길가에 두 그루 느티(당산)나무.
과거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 지금은 매년 두레 잔치할 때

추수감사의 의미로서 이장이 제관을 하고 주민들이 당산제.
제물로 뫼밥, 돼지, 산나물, 과일 등으로 일반 제사와 같다.
특히, 당산제가 끝나면 농악을 울리면서 동네를 한바퀴 돈다.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마을 기금으로 공동 운영 하고 있다.

중황마을에는 2기의 누석단( 마을 북쪽과 마을 서쪽 개울가)
북쪽 누석단은 논가에 있는데 너비가 640㎝이고, 높이는 4m
마을 서쪽 누석단은 너비가 약 6m정도이고, 높이는 약 250㎝

이 마을에서 소년들이 자주 죽자 지관 지시에 따라 탑을 쌓았다
또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누석(累石)을 쌓았다고 여겨진다.
이곳에서는 누석단을 '조산(造山)' 또는 '조산무데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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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자락 매동마을은 곶감 산지로 유명.
<매동마을>엔 마을 뒷산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당산이 있고,
마을 복지회관 옆에 작은 할머니 당산이 있어 모두 3 군데.

할아버지 당산은 고사한 나무와 누석단의 결합한 형태이고
할머니 당산은 누석단, 작은 할머니 당산은 땅에 뭍힌 암체.
제관은 마을에서 깨끗한 사람을 선정하여 부부가 함께 지낸다.

제관은 삼일간 찬물로 목욕을 하고 부부관계를 금한다.
비용은 마을에서 모우고 제관은 조기, 과일, 밥을 준비
부부가 음력 정월 초사흘날 밤 12시부터 제사를 지낸다.

할아버지 당산에서 할머니 당산, 작은 할머니 당산 순서
당산제의 물은 신령 약수터, 음식은 세 당산을 따로 장만
제사 후 마을에 재해가 없기를 바라며 함께 모여 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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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동리' <소년대 마을>은 매동마을 옆에 있는 작은 마을.
이 마을 뒷산에 병풍바위 혹은 노암바위가 바로 당산이다.
정월 초사흘 날 새벽 1시에 마을에서 깨끗한 부부가 제관

이들 부부가 음식을 장만하고, 마을 공동기금으로 당산제
제사 전날에 당산에 황토를 뿌리고 왼새끼를 꼬아서 금줄
상주나 산모 등등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사전에 통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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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마을은 산세가 노루 목과 같아 붙여진 이름.'

장항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 당산제를 지내온다.
마을 두시산에 산제당이 있고, 그 약간 아래 쪽에 중당산
마을 앞 쪽에 하당산이 있고 산제당 형태는 소나무 4-5 주.

중당산은 소나무와 누석단(累石壇)의 결합 형태이다.
하당산(下堂山)은 귀목나무와 누석단의 결합 형태이다.

음력 1월 2일 밤 12시에 제관 혼자 산제당에서 제사.
직접 밥을 하고, 사과, 대추, 미역자반(건포)을 준비.

다음 날 새벽 2시 정각에 중당산에서 다른 축관이 독축
돼지 머리가 없어지면, 산신이 먹었다고 믿는다고 한다.
계명축시(鷄明丑時) 즉 새벽 3시에 할머니 당산에서 굿
할머니 당산제를 끝으로 모닥불을 지피고 밤 세워 논다.

제관은 부정을 타지 않은 깨끗한 마을사람이 선정되어
삼일동안 찬물에 목욕제게(沐浴齊戒)하며 근신을 한다.

또한 삼일 전에 제관의 집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며,
당산주변에도 금줄을 친다. 제사 비용은 각 집에서 추렴
제사에 쓰이는 모든 물은 '바람골' 계곡의 물을 사용한다.

'장항마을 서쪽 200m 떨어진 천변의 애기바위.'

자연석 3층 윗부분의 돌은 남근을 연상케 하며 2m 정도.
마을 사람들이 애기바위에 돌을 던져 그곳에 맞으면 아들
그곳에 맞추지 못하면 아들을 낳을 수 없다고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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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마을 당산제는 제단 주위에 사람이 밟지 않았던
붉은 흙을 뿌리고 금줄에 문종이를 찢어 달아 놓는다.

제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돼지머리
제사상에 차릴 음식은 간을 보지 않는다.

돼지머리 뼈를 위턱과 아랫턱에 나눠 묻고
밥은 문종이에 싸서 나무 뒤에 따로 묻는다.
제사는 정원 초사흘 11시 30분에서 1시 사이
요즘에 와서는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지낸다.

제관은 초하루와 초사흘 사이에 정하는데
인원수에 제한없고 깨끗한 사람이면 된다.

밤마다 당산나무에 가서 호롱불을 켜고
아침에 끄는 것을 14일 동안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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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마을은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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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당산에는 술, 명태, 과일만 놓으며
할머니 당산에는 돼지고기, 술, 쇠고기로 제사상
여기에서는 지신제와 거리제를 당산제와 함께 한다.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정월 초사흘
당산(느티)나무 둘레가 18㎝이고 조산과 함께 위치한다.
당산제를 지내는 목적은 마을 수호와 마을의 풍요를 기원

지신제를 지내는 데는 특별한 행사없이 음식만 차려놓고
정월 대보름의 제사를 지금은 당산제와 같은 날에 지낸다.
거리제 역시 당산제를 지낸 후 잘가라는 의미에서 같은 날.
제관은 이장과 깨끗한 젊은이 네 명 정도인데 당일날 선출.

이 마을에 2개의 조산 중 하나는 마을 입구 오른 쪽 끝
이것은 마을의 재앙을 방지하고 마을의 평화를 위한 것.
1m 암반 위에 높이 205cm 높이로 쌓여 있고 암반포함 305cm.
둘레 9m 끝에 입석이 3개, 다른 조산은 당산나무 앞에 위치

내령마을 신선바위는 1800년대 팔령치 화전민들 정착마을.
마을 입구의 300m 지점에 산신바위는 신선이 노는 영대(靈臺)
그 신선바위 이름을 따서 내령리(內靈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일대에 당집은 백무동 지명과 무관하지 않은 듯.
지금은 백무동이라고 하지만 이조시대 지명은 백무당.
지리산 이야기 - 149 ( 1790년 이동향의 방장유록 ) 참조.

 

 

당집.

 



당집이 많은.,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분당 신도시 일대.)
분당, 정자, 수내, 서현, 이매, 여수, 율, 야탑, 도촌동 등등.
낙생면(동원, 금곡, 궁내, 삼평, 백현동)과 용인군 수지면 등.

분당은 '당모루' '장터' '안골' '점골'등을 합친 지명
예전엔 '동이점'이라 불렀고, 이후 '분점리'에서 '분당'
분당 = 분점리 '분'자 + 당우리 '당'자 = 옹기 구운 곳.

고려 말 우리나라에 귀화한 당성의 후손들이 사는 고을.
즉, '당모루'라고 부르다가 '당우리'가 된 고을의 이름.

분당의 지형은 '앞발을 들고 일어선 당나귀 상'

'녹수 마시는 당나귀', '여명을 응시하는 당나귀.'
당나귀는 꾸준한 인내심으로 저력을 상징하는 동물.
분당은 고려 말 한반도에 귀화한 원나라 유민 집단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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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에서는 마을 제사인 당산제를 지내는 마을이 많다.
우리나라의 민간신앙을 보면 그 조상의 뿌리가 보인다.
특히, 불교, 도교, 유교 등과 민간신앙과 결합한 흔적들.

마을신, 집안신, 무속, 독경, 고목, 영웅, 사귀(邪鬼)
점복, 예조, 금기, 주술, 풍수지리, 민간의료 등의 신앙.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삼한의 시월제.
예맥(濊貊) 사람들의 의례와 풍속에 대해 언급된 동이전.
우리나라의 제례는 유교식, 불교식, 무교식 법칙이 주류.

조상제사와 성인을 모신 사당에 대한 제사는 유교식,
49재와 우란분재는 불교식, 서낭제 씻김굿은 무교식.
불교식은 염불, 유교식은 향, 청수, 꽃 과일 음식공양

강릉 단오제는 먼저 시장이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무당이 본격적인 무교 제의로 진행되는 이중구조 특징.
남성 중심 제의는 서낭제, 산신제, 거리제, 돌탑제 등
여성 중심 제의는 가족 안녕과 가운번창을 비는 안택제

굿은 신과의 상봉으로 소망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위.
유교식 제사는 가문의 조상 및 성인을 모신 사당 제례.

생활환경이 같은 마을사람들의 공동신앙이 당산(부락)제
호남에서도 전북 지역에 당산제가 많고 전국적으로는 동제.

우리나라 동제의 시초는 12월에 하늘에 제사한 부여의 영고,
10월에 제사한 고구려의 동맹, 마한은 소도라는 신역에 솟대
신라는 진흥왕 33년에 국태민안을 위한 전통적인 산천제 동제.

서낭신·산신·용신·당산신·장승 솟대
마을 뒷산 정상 국사당, 산 중턱 산신당,
동구 옆에 서낭당이나 장승, 동구 밖 솟대

동제는 봄 가을 또는 정초나 대보름날 밤 자정
해안지방의 동제 별신굿이나 용왕굿은 특별히 날.

동제당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서낭당, 성황당, 산제당
산신당(경기·충청), 당산(전라·경상), 포제단(제주)

서낭당은 유목민이 천신의 거주처를 마련한 민속신앙
몽골의 '오보'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신제를 지내는 천제단, 마을 뒷산 고개마루에는 국사당

산신 산신령 호랑이에 대한 신앙이 강한 사람들은 심마니
경기 중부지방은 장승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을 새긴다.
충청 지방은 장승을 수살ㆍ수살막이ㆍ수구맥이 등으로 호칭.
영호남은 벅수ㆍ법수ㆍ미륵이라 부르고, 제주도는 돌 하루방

장승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전북 부안군 서외리 성문안 돌장승
이조 숙종 15년(1689)에 세운 것과 실상사 입구에 있는 돌장승

<솟대>는 몽고와 만주에서 비롯되었고 까마귀를 상징.
까마귀와 까치를 신성시하여 잡는 것을 금기로 하였다.
까마귀는 '태양의 상징'이고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
고대인에게 까마귀는 암흑을 막을 수 있는 태양의 상징

<돌탑>은 "산의 뼈, 흙의 정(精), 기(氣)의 핵".
돌은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생필품 도구
고인돌처럼 무덤으로 쓰이며 사후의 안식처로 이용

돌은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신성체(神聖體)
돌은 생명의 근원이고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기자신앙.
돌이 인간한계를 극복해 주는 주술적인 영험물로 인식

하여, 사람들은 바위와 돌을 조형하여 탑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 탑을 신앙의 대상으로서 여기고 받들어 섬겼다.
대체로 탑에는 조각한 돌을 층층이 쌓아 만든 사찰의 석탑,
제단으로서의 누석단(累石壇), 몽골의 오보와도 같은 서낭당,

마을의 번창과 삼재(三災)를 막아주는 조산(造山)
냇가 주변에 널린 막돌을 원뿔형으로 쌓아올린 돌탑

돌탑 내부에는 감실을 만들어 내장물을 넣는데
오곡단지 금두꺼비 쇠스랑 부적 숯 등을 넣는다.

오곡단지는 풍농을 기원하는 뜻에서 넣는 곡식단지,
금두꺼비는 제비혈 지세인 마을의 피폐하는 것을 방지.
은두꺼비를 탑 속에 봉안하여 마을의 안녕을 도모한다.

두꺼비는 마을이 부자 되도록 하려는 주민들의 염원.
숯과 소금을 넣은 것은 도깨비 불장난으로 화재 방지.
부인들이 살림을 알뜰히 하라고 간수나 소금을 넣는다.

감실에 두꺼비를 넣는 마을은 두꺼비 형태 윗돌을 얹는다.
전북 진안군 진안면 물곡리는 화재를 막아주는 화재막이 탑
윗돌로는 정교하게 조각한 돌거북을 올려놓아 화재를 예방.

<기우제>는 단군이 360 가지 인간사를 다스린 중에서 으뜸.
부녀자들이 산상에 열지어 앉아 일제히 방뇨하는 방료기우
부녀자들이 강물을 키에 담고 달려 새는 물줄기로 기우 기원.

제주는 딸만 낳은 부인이 기우제 효험이 크다 믿어 비싼 품삯.
일부 지방은 무당들의 속바지를 벗게 한 후 집단 난무로 기우.
여성을 음의 상징으로 여기는 기우제 풍습이 전해져 내려온다.



몽고.



외몽골, 또는 몽고라고도 불리우는.. Mongol Uls.
북쪽 시베리아와 남쪽 중국 사이에 위치한 내륙국.
중앙 아시아 북부에 속하며, 면적은 아시아에서 6번째

인구는 가장 적으며 북위 42~52°, 동경 87~120°에 위치.
동서 2,392km 남북 가장 긴 곳이 1,259km 수도는 울란바토르
타원형의 국토면적은 1,564,116㎢, 인구 2,493,000(2003 추계).

역사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
몽고와 한반도가 같은 혈통임을 대변하는 몽골반점.
몽고 바이칼 호수에서 도래했다는 고조선 단군 왕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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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고원을 말달려 야생동물을 수렵한 유목민
때론 커다란 맹수와 싸우려면 용맹해야 했을듯
옛부터 티벳고원 북방 유목민의 전투력은 일당 백

러시아를 상대로 혹한기 겨울에 연전 연승할 정도.
몽골의 기마 군단은 얼어붙은 강과 하천을 내달렸다.
겨울에 러시아를 패퇴시킨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것.

....................... 몽골 원정군.......................
40% 중기마병이 가죽 갑옷에 투구 쓰고 창을 잡고 충격 행동
60% 경기마병은 활, 던지는 창, 올가미 밧줄, 전통(戰筒) 두 개.

화살 운반 차량이 뒤따랐고 경기마병은 정찰, 수색하고
중기마병을 지원하고 소탕 작전과 추격 작전을 수행했다.

장거리 기동할 때 예비말을 하나 이상 갖고 번갈아 탔으며
경기마병들은 아라비아 언월도(偃月刀). 전투용 도끼를 사용.

몽골군의 무기는 활, 갈고리가 달린 철퇴, 칼과 창을 사용
그 중 말을 타고 달리면서 목표물을 맞추는 활쏘기가 익숙
동물 가죽으로 가벼운 갑옷을 만들어 입어 기동력이 뛰어났다.

전투에 임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고,
위험한 곳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며
보급이 끊어져 어려움을 당하면 말젖을 먹고
사냥한 들짐승을 먹으며 보통 1개월쯤 견딘다.

남자는 이틀낮 밤을 말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견디며
말이 풀먹는 동안 잠잘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다.

급한 임무를 수행할때에는 10일쯤 불도 피우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고 말의 피를 빨아먹으며 강행군한다.
자기가 타는 말의 정맥을 끊어 그 피를 마시는 것이다.

18필의 숫말과 암말을 가지고 다니며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바꾸어 달린다.

몽골군은 젖을 걸쭉한 풀처럼 만들어 군량으로 사용한다.
젖을 끓이면 뜬 크림을 다른 그릇에 담아 버터를 만든다.
버터는 전투식량으로 10 파운드씩 지니고 다니며 먹는다.

몽골군은 적가운데로 뛰어들어 혼전(混戰)하는 일이 없다.
말을 타고 적군 주위를 돌며 측면에서 활을 쏘며 공격한다.

전형적인 몽골군의 전술은 기마병의 기동성을 최대로 활용
적의 측면을 돌아 배후공격으로 혼란시킨 다음에 포위 섬멸.

때론 거짓 패하는척 퇴각하며 유인후 매복군으로 급습
또는 말 달리며 도주하다가 뒤로 돌아 활을 쏘아 반격

각 기병대에는 짧은 창(槍)과 검을 가진 500명의 보병
말 엉덩이에 타고 도주하다가 내려서 기습적으로 반격
적의 말을 찔러 적의 기마병을 떨어뜨려서 죽이는 작전.

몽골 기마병단은 어떤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있게 훈련되어
이합집산, 퇴각 공격을 자유자재로 하여 기동성으로 병력집중
순간 순간마다 우위를 확보해 반드시 승리할 때만 싸우는 전법

'갈가마귀처럼 모였다가 별처럼 흩어지는 전법.'

몽골군은 깃대를 뽑기 전에는 전쟁터를 떠나지 않고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도 절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몽골군은 첫 폭설이 올 때부터 잡초가 싹이 틀 때까지
주둔지에서 멀리 떠나 대규모 사냥을 하여 군사 훈련.

몽골군이 기동할 때 3개군으로 나눠
중군(中軍), 좌군(左軍) 우군(右軍)이
거의 평행하게 전진하며 서로 정보 교환.

각군은 다시 중로(中路), 좌로(左路) 그리고 우로(右
路)로 3개 제대로 병행하여 행군하거나 전투를 하면서
서로 측익을 엄호하면서 필요시 상호 협력하도록 했다.

행군할 때 1개 부대는 2일 간 노정(路程)
측면 후면 1개 부대씩을 두어 기습에 대비

전투 형태는 주로 다섯 줄(5線)로 배치하며
첫 번째 두줄은 중기마병(重騎馬兵)을 배치
다음 세 줄은 경기마병(輕騎馬兵)을 배치한다.

여기에 배치되지 않은 경기마병은
5선 앞에서 수색과 정찰을 실시한다.

특히 수색과 정찰로 적의 주력 위치를 정확하게 포착
기마병에게 장애가 되는 지형을 사전에 철저히 분석.
역전제도를 만들어 전령이 하루 150내지 250킬로를 달려
인접 부대 소식을 전하고 몽골의 통치 지역마다 역마제도

역사마다 지친 말을 두고 새 말을 타고 가도록 하였으며,
원(元)나라 전역에 역사가 1만개, 역마(驛馬)가 24 만필
역사마다 급사가 있어 2일낮 2일밤 이내 황제 명령이 전달.

대도시를 공격할 때는 정찰대를 먼저 보내 동향을 파악하고
포위해 공격하고 그 지역 포로들을 동원하여 헤자를 메꾸고
투석기 등 공성장비를 운반하도록 하여 공성을 돕도록 한다.

공성장비는 주로 중국인 및 이슬람인 기술자에 의해 제작
수공법(水攻法)은 중국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다.
몽골군은 어떤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을 만큼 용맹하고 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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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몽골 기마군단 원정군은 12월에 고려를 침공
병사마다 말안장 밑에 깔린 3개월 분 육포 비상식량.
불과 열흘만에 고려를 정복해 80년간 속국으로 지배.

......................역마 제도........................
몽골은 '역마 제도'라는 독특한 통신망을 확보.
광대한 제국의 통치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다.

대칸의 명령과 각종 정보가 빨리 전해질 수 있도록
40㎞마다 「참」이란 역을 두고 숙박시설과 말을 구비

전령들은 릴레이식으로 하루에 5백㎞씩 주파,
카라코룸에서 유럽까지 보름이면 도착했었다.

이 통신로는 20세기 초 이전까지는 가장 빠른 지름길
현재 유라시아 횡단철도와 군사로 겸 통상로로 쓰인다.

마르코 폴로는 역마제도를 얌브(yamb)라고 기록하여
각 역에 언제나 400필의 좋은 말을 상비하고 있다가,
사절은 여기에 지친 말을 두고 새 말을 타고 갔었다.

원(元)니라 천역에 역사가 1만개, 역마(驛馬)가 24만필
각 역사에는 황제의 급사(急使)가 있어 한 역까지 가면
다른 급사가 서류를 받아 계속 달려 황제의 명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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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는 많은 이민족 문화를 수용한 다민족 국가였고,
복합적 사회였으며, 몽골은 혈통을 중시하는 지배민족
따라서, 통치 방법에 있어서도 신분제 의식에 따랐다.

몽골인을 국족(國族), 서방계 투르크,
이란 유럽인을 색목인(色目人), 한인(漢人),
강남에 사는 남송의 유민을 남인(南人)이라 구별.

종교도 거의 모든 종교를 수용했다.
이슬람이든 불교든 관여하지 않았다.

13세기 티무르,무굴(몽골)제국은 인도를 점령.
몽골 호라즘 왕자가 인도로 도망가 세운 나라.

칸은 그를 잡으려 인도까지 부하들을 보내었다.
그들이 바그다드에 갔다하여 바그다드까지 침공.
당시 어느 누구도 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배신자는 지구 끝까지 쫓아가 처형했던., 칸.'

특히 피정복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약탈
어느나라 누구도 반항할 수 없게 하려는 심리전.
그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걸했을까?

....................징기스칸.........................
1155년 또는 1162년 몽골 바이칼 호 근처에서 출생.
1227. 8. 18. 운명한 몽골의 무사이자 통치자 태무진.
그 손자 쿠빌라이(忽必烈)가 원(元) 태조(太祖)로 추증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복왕 가운데 하나이며,
유목민 부족들로 분산되어 있던 몽골을 통일후
1206년 칸에 올라 몽골을 아드리아 해까지 확장.

[역사적 배경]

유목민과 정착민 두 사회는 정반대 생활양식
늘 적대 관계이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처지였다.
북방 유목민들은 남부 생필품과 사치품들을 필요

유목민이 생필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 또는 약탈
중국 남쪽의 정착민은 유목민 침략에 늘 시달렸다.
하여, 중국의 역사는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전쟁사.

징기스칸은 뛰어난 체력, 강한 목표, 강철 같은 의지
아내들, 어머니, 모든 사람들의 조언을 즐겨 경청했다.
남을 속이기도 했지만 사소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충성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배신자는 징기스칸으로부터 차가운 대접
그는 배신자의 배신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조직, 기강, 기동성, 무자비한 목적의식 등

그가 이룩한 베이징부터 카스피해까지 제국
그의 부장들은 페르시아와 러시아를 침공했다.
또한 후계자들은 중국, 페르시아, 러시아를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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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아시아 중동 유럽을 지배했던 대제국.'

징기스칸이 몽골을 일으킨지 불과 2년 만에 이룬 업적.
징기스칸은 부하들을 흙벽돌 집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
몸에 군살 붙으면 기동력이 떨어져 말타기 어렵기 때문.

'평생, 유목민 텐트에서 살다 간.. 징기스칸.'

결국, 징기스칸 군사의 화살같은 기동력은 세계를 정복.
말안장 밑에 깔아놓은 육포는 징기스칸 용사들 전투식량.
그들이 정복한 나라의 모든 재산과 여성은 몽골제국 소유.

그들은 고려를 침략한지 불과 한달 만에 제주도까지 정복.
제주도는 원나라의 자치령, 고려는 80년간 원나라의 속국.
80년간 수많은 고려 여인들이 공출되어 원나라로 끌려간다.

"용감한 자만이 미녀를 찾이할 수 있다."

몽골 병사들은 약탈혼으로 점령국에서 신부 조달.
신부가 4~5세 연상이면 적당하다고 여긴 몽골 풍습.
신부의 구비 조건은 바느질 솜씨와 띠와 기질을 중시.

할하족은 생기가 돋는 얼굴, 두터운 입술, 크고 검은 눈,
정렬된 하얀 치아, 눈썹이 두꺼우며, 긴머리와 넓은 이마,
넓은 얼굴, 가는 허리, 긴다리, 행복한 미소와 온화한 얼굴.

이를 미인으로 여겨 적합한 여자를 골라 약탈혼이 성행.
그러면서도 몽골 민족은 결혼 약속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당시 원나라 몽골족 군사에게 고려 여인은 이상형인 신부감.

원나라로 공출된 헤일 수 없이 많은 고려 여인들.
고향 가족 애인을 두고 끌려간 고려 여인들의 한.
당시 생이별의 한이 담겨진 고려 가요가 청산별곡.

"남자는 도둑놈." = 몽골 약탈혼에서 유래.

몽골의 징기스칸은 아버지가 전쟁에 나간 뒤에 출생.
어머니가 상대 부족에게 겁탈당한 뒤 세상에 태어났다.
징기스칸의 첫아들 오고타이 역시 비슷한 운명으로 출생.

징기스칸이 원정나간 사이 그 아내가 겁탈 당한 결과
당시 여성은 승전국의 노예 또는 점유물로 취급받았다.
징기스칸 역시 패전국의 여성들을 겁탈하며 승전을 자축.

징기스칸이 몽골통일 전까지는 5 부족이 내전 상황
당시 칭기스칸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메르키트 부족.
메르키트 부족과 칭기스칸의 몽골 부족은 서로 악연.

징기스칸 어머니는 징기스칸 아버지에게 납치 당했다.
아내를 빼앗긴 사람은 메르키트 족장 동생 칠레두였다.

징기스칸 아버지는 타타르 부족에 의해 독살을 당했고
남은 유족은 자기 부족인 몽골 부족에게도 버림 받았다.

징기스칸이 외롭고 힘든 생존투쟁을 벌릴 때였다.
고립된 징기스칸의 숙영지에 침범한 메르키트 족.
남자들은 몸을 피했지만 여자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수레를 타고 도망치던 징기스칸의 아내 버르테
포로로 잡혀 적지에서 적장과 함께 살아야 했다.
징기스칸의 아내를 납치한 칠레두의 동생 칠게르.

1202년 가을, 나이가 마흔이 된 징기스칸은 몽골 통일.
징기스칸 어머니를 약탈했던 메르키트 족장은 전사한다.
징기스칸은 그 아들 '다이르 우순'의 딸 콜란과 약탈혼.
그녀가 징기스칸의 두번째 부인이자 가장 사랑했던 여인

'징기스칸 발 아래 무릎꿇은 패전국 여성들.'

패전국 여성들의 굴복을 보며 승리를 만끽한 징기스칸.
혹한기에 알몸으로 무릎꿇고 칸의 발 아래 엎드린 미녀들.
패전국 남자 포로는 무조건 거세 후 몸으로 전쟁부채를 청산.

칸에게 끝까지 항전했던 패전국 지배 계층은 비참한 말로.
어느 나라도 그와 감히 맞서 싸울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다.
하여, 달리는 말의 속도로 그당시 세계를 정복했던 징기스칸.

당시 몽골의 징기스칸은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
1274년과 1281년 고려 군함을 타고 규슈로 침공
그러나, 폭풍으로 전투 다운 전투도 못하고 퇴각.

결국, 몽골의 일본 정복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당시 몽골 군사들은 지리산 일대에 주둔한 듯 싶다.
흑돼지 마을, 마을제(당제) 풍습이 이 사실을 뒷받침.

징기스칸은 부하들의 개인 약탈을 엄금해 군기강 확립.
그는 패전국 여성들을 부하들이 불평 없도록 고루 분배.
결국, 몽골 제국 관비 또는 기생은 전세계 여성들로 구성,

'바다가 앞을 막아 더 정복할 땅이 없었던 몽골.'

유목사회는 전투성을 바탕으로 하는 약육강식 약탈문화
우리나라 민족성은 약육강식 몽골 부족의 전통이 흐른다.
우리나라는 역사 상 천여 번 외침 속에 명맥을 이어왔다.

특히, 지리산 일대는 고대국가 간 전쟁이 잦았던 격전지.
옛부터 남원과 진주는 기생이 많게 된 역사적인 배경이다.
'전통적인 기생의 고장' 남원은 전쟁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 전쟁 역사를 대변해주는..토렴 국밥.'
'우리나라 3일 장, 5일장, 장터마다 몽골식 텐트.

오늘날 시골장터마다 맛볼 수 있는 뚝배기 토렴 국밥.
밥에 뜨거운 국물을 몇 차례 부었다 따라내는 조리 방식.
뚝배기에 국밥을 담아 조리하는 과정만 봐도 침넘어간다.

토렴 조리방식은 삼국시대부터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토렴 국밥은 옛날부터 전쟁터에 군사들이 먹던 음식이다.
우리나라 전통 음식에는 꿩토렴, 닭토렴, 한우토렴도 있다

철 투구에 물을 끓여 아채와 고기를 익혀먹거나 데워먹기.
고려시대 때 몽고군이 토렴을 배워 징기즈칸 요리로 발전
일본은 임진왜란 때 토렴을 배워 샤브샤브 요리로 진일보.

징기스칸은 몽골 병사들의 전쟁터 음식으로 알려져왔다.
커다란 솥에 얇게 썬 고기를 살짝 데쳐서 먹는 즉석요리.
그 전쟁터 즉석요리에 정복자의 이름을 붙여서 징기스칸.

샤브샤브(しやぶしやぶ)는 살짝살짝 찰랑찰랑’이란 뜻.
펄펄 끓는 육수에 음식을 살짝 데쳐 먹는 일본 음식이다.
얇게 썰은 고기를 끓는 유수에 흔들어 익혀 먹으면 맛있다.

샤브샤브, 징기스칸은 끓는 육수에 살짝 익혀먹는 조리법,
토렴은 밥(국수)에 뜨거운 육수로 음식을 데워 익혀 먹기.
샤브샤브 징기스칸 토렴은 몽골리안 기마족의 전쟁터 음식.

'모두 천연 맛과 영양을 지닌 고단백 저칼로리 건강식.'

고려는 80년간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제주도는 1세기 동안이나 원나라 자치령.
그당시 원나라는 일본을 두차례 침공했다.

그러나, 풍랑 때문에 두 차례 다 실패했다.
원나라 군사들은 장기간 한반도에 주둔했다.
고려 여인들은 원나라 약탈혼 풍습의 피해자.

원나라에서는 고려에서 내시까지 조공받았다.
그 내시들이 앞장서 고려 여인들을 뽑아간다.
하여, 고려여인들은 원나라에 많이 끌려간다.

고려 왕 이름에 충(忠)자를 넣어야 했던 시기.
제주도는 원나라의 자치령이었고 고려는 속국.
원나라는 왜를 정복하려고 제주에 말을 키웠다.

사실 상 원나라와 고려는 국경 없는 주종 관계.
고려에 주둔한 원나라 군사와 민간인도 많았다.
세계를 지배했던 몰골은 오늘날 약소국으로 변모.

'몽골이 오늘날 쇠퇘한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약탈혼으로 출생한 2세 후손들은 모계 쪽으로 동화.
몽골 대제국은 그들이 정복했던 나라 별로 쪼개진다.
약탈혼은 몽골을 융성케도 했지만 패망하게도 한 요인.

여성을 전리품으로 여기며 약탈혼을 했던 몽골족.
약탈혼 후손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나라를 버리고
어머니 나라로 흩어져 원나라는 국력이 쇠퇴한다.

'여성을 존중하는 나라가 오늘날 선진 강대국.'

가문에서 대접받은 여성이 가문을 일으키고
나라에서 대접받은 여성이 나라를 일으키 듯.
몽골의 흥망성쇄 역사는 가슴속에 새길 깨우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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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으로 80 년간 지배받았다.
하여, 지리산 일대에 원나라 풍습 흔적들이 있다.
초나라 풍습을 비롯한 일본 남방계 풍습도 섞여있다.

고대국가 이전부터 유입된 다양한 민족의 풍습들.
반선 일대 마을제(당제), 춘향전, 단오 풍습.등등.
제주도를 포함한 산청군 일대의 토종 흙돼지 마을들.

고대사회부터 다양한 민족 풍습이 토착된 지리산 일대.
국가 위기마다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킨 지리산 산간마을.
특히, 반선 일대는 역사 상 가장 전란에 많이 시달린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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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3차례 일본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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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는 다뉴브 강 유역 평원지대까지,
남쪽으로는 사라센 제국의 중심부 지역까지,
동쪽으로는 한반도 고려까지 속국내지 우호국

'원나라와 여러 '칸국'으로 합쳐진 몽골제국.'

동해 너머 일본 열도까지 정복욕을 불태운 몽골.
일본이 항복하지 않자 몽골은 일본 침공을 단행
해전에 약한 몽골은 고려를 앞세워 두 차례 침공.

고려는 몽골의 강압에 못 견뎌 연합군을 결성

당시 몽골은 송나라와의 마지막 결전에 총력을 집중
고려와 승산 없는 전쟁을 30년간 해오고 있었으므로,
전쟁에 필요한 준비를 고려로 하여금 담당하게 했다.

고려는 몽골과 불평등한 속국으로서의 강화조건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골은 당시 남송 공략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후방 위협요소였던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했다.

몽골은 일본 침략이 승리로 끝나건 실패로 끝나건
당시 몽골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는 몽골전쟁 후 10년 만에 급속도로 국력 회복

몽골은 고려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1274년 몽골과 고려 연합군은 큐우슈우 해안에 당도
태풍을 만나 25,000 명 병사 중 13,500명이 사망했다.
몽골 2만, 고려 5천 연합군은 많은 함선을 잃고 귀환.

이에 고려의 국력은 매우 피폐해졌으나
몽골은 2차 일본 정벌을 시도하기로 하고
고려에 더욱 많은 전쟁 준비 부담을 지웠다.

그리하여 남송을 멸망시킨지 2년후인
1281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 10만명
(원나라 병력 7만5천명, 고려군 만여명)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과 태풍으로 다시금 실패
당시 태풍을 일본인은 신풍(가미가제)이라 하여
천우신조의 증거로 지금까지도 고마와하고 있다.

몽골의 강압에 의한 두번에 걸친 전쟁준비를 한 고려
고려는 국력이 피폐해졌기에 몽골을 원망하게 되었다.
당시 몽골군은 일본의 수비군과 주민을 잔인하게 진압

학대와 학살이 일본에게 복수의 집념을 심어주게 된다.
그리고, 그 목표는 원나라가 아닌 고려로 향하게 되어,
그후부터 고려는 일본으로부터 수많은 침공을 겪게된다.

당시 고려가 처한 국제정세를 이해하지 못한 왜인들
고려를 철천지 원수로 여겨 전라도 남해 일대를 침공.
훗날 일본의 임진왜란 침공은 고려의 침공에 대한 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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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정복자들은 과감한 무력행사와 잔인한 통치법
짧은 기간 내 인류역사 상 최대 판도의 영토를 확보

그러나, 몽골에 억눌린 각 민족들의 불만이 팽배
결국, 몽골 제국주의는 급격한 쇠퇴의 길을 초래.
약 백년간의 전성기를 거쳐 몽골제국은 붕괴한다.

원나라가 멸망한 결정적인 계기는 '홍건적의 난'

하남(河南)지역에서 백련교(白蓮敎)를 주축으로 한 봉기
홍건 세력 중 주원장이 두각을 나타내며 그 세력이 신장
남경 함락후, 양자강 하류 곡창지대를 장학악해 세력 구축

1368년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를 함락후 몽고를 축출
원나라는 몽골 귀족들간의 내분 내전으로 국력이 쇠퇴
하여, 원나라 황제는 북경을 떠나 몽골로 옮겨가버린다.

이때 주원장은 "원 왕조는 멸망했다"고 선언
명 왕조를 세웠지만, 그후로도 원 왕조는 유지.
즉, 원 왕조는 원래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을 뿐.

명 왕조는 몽골제국 일부분 중화지역을 되찾았을 뿐.
몽골 제국의 다른 영토들은 서로 나뉘어져 계속 유지.

킵차크 한국 등은 러시아 제국에게 정복되고
아랍 지역의 한국들은 티무르에게 정복당한다.

'칸',은 우리말 '간'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란 뜻.
칸이 통치하는 나라를 칸국 또는 한국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원나라 멸망후 유럽과 아시아에 있던 4 한국.

'챠카타이(중앙 아시아) 한국, 오고타이 한국,
일 (아랍) 한국, 킵챠크(러시아) 한국.

.....................오고타이..........................
1227 징기스칸이 운명 후 몽골제국의 제2대 황제.
칸의 3남이자 계승자로서 몽골제국의 영토를 확장
자신을 카간(大汗)으로 부른 최초의 몽골 통치자이다.

오고타이는 동쪽으로 중국북부에 있던 금나라를 공격.
남송은 금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으려 몽골과 연합,
1234년 오고타이가 금을 공격해 점령하는 것을 도왔다.

요(遼)나라 출신 오고타이의 정치고문 야율초재

정복지에 대한 몽골의 정책을 바꾸도록 건의했다.
이에 따라 오고타이는 정복지의 전주민을 살해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통적인 몽골 방식을 삼가했다.

대신, 그 지역의 부와 주민의 기술을 활용하는 정책.
그의 이같은 결정으로 화북 문화가 보존될 수 있었고
몽골군이 중국무기를 이용해 남송을 정복할 수 있었다.

몽골은 화북지방 주민들로부터 통치기술을 익혀
중국의 정복자가 아닌 그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오고타이는 이란·이라크·러시아로 원정군을 파견.
1240년 러시아 키예프를 함락후 저항을 종식시켰다.
다음해 독일 폴란드 연합군을 분쇄하고 헝가리 정복.

그후 200년 동안 러시아는 킵차크 한국(汗國)의 속국
오고타이가 주연(酒宴) 중 사망하자 유럽 진격은 중단.
그가 죽은 후 미망인 토레게네가 1246년까지 섭정했다.

그녀와 오고타이 사이 아들 구유크가 제위를 계승.
그당시 기록들은 오고타이는 강인하고 정력적이며
술과 여색을 몹시 탐닉했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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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서 '한'은 '큰'이란 뜻이다.
예를 들면, 큰강인 한강과 대한민국.

몽골제국 원나라가 힘을 잃자 고려 왕조도 쇠퇴.
이성계는 이조를 건국하고 명 주원장과 우호관계.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는 이조에 구원군을 파견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국력이 쇠퇴.
몽골 제국 후예 후금에게 망하게 된다.
후금은 중국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건국.

결국, 구한말 일본에 의해 점령 당한 우리나라.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청일전쟁으로 중국 정복.
과거, 몽골의 영역인 동아시아 대부분을 장악한다.

 

 

 

박영발 비트



반야봉 일대는 1955년 5월까지 빨치산들의 은둔 항전처.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문수골로 진입했던 남부군들.
반선, 뱀사골, 반야봉 일대에서 토벌군에 의해 섬멸된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도 패잔병을 수습해 잠입한 문수골.
당시 김지회, 홍순석 등이 이끄는 문수골 빨치산은 2천명.
구례읍과 인근마을에 빨치산의 야간 습격이 잦아지게 된다.

1948년 11월 5일 토벌대 주둔,
1949년 4월 18일까지 토벌작전

토벌대의 끊임없는 소탕작전과 빨치산의 반격
빨치산 토벌 작전 일환으로 진행된 거점 분쇄작전
군작전상 지리산 주민들을 강제 이주 시킨, 소개령.

그후 은신처를 찾아서 반야봉으로 들어간, 빨치산
결국, 그곳에서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잊혀진 빨치산 비트들.

 

묘향암이 저만치 보일 즈음

골짜기 타고 내려가야 한다.


길없는 길..
엉클린 나무..
흔적없는 바람..
이낀 묻은 바위..
발길을 붙잡는 넝쿨..

이런 길을 하룻밤 사이에 내달려 다녔다니.
요즈음 생각으로는 그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거대한 암반 사이에서 나오는 한기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만한 돌틈.
'ㄱ'자로 꺽여 낮은 포복으로 이어진 굴.

듬성듬성 버려진 전선
짝 없는 검정 고무신
깨어진 빈 병


녹이 낀 폐건전지
몸체 사라진 밧데리

 

어떻게 이 좁은 공간에서 7~8 명이 동거할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이런 산속, 비좁은 돌 틈으로 내몰았을까?
비트 속 오싹한 냉기 만큼이나 가슴 한켠이 눅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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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
지리산 역사기행에 참가해 탐사한 비트.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박영발 위원장 은신처

박영발 비트는 2005년 2월 처음으로 발견됐으며,
광주지역 인터넷신문 '시민의 소리'가 최초 보도.

'조선출판사'를 운영하며 북에서 내려온 지령을 담아
유인물을 만들 때 사용한 등사기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50년 전 주인을 잃은 고무신 한짝.
지리산 능선, 골짝 돌부리 풀뿌리마다
붉은 피로 물들이며 흙 한 줌으로 변해간
동지들이여...”-옛 동지 추모 위령제 글에서 -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빨치산 출신 옛 동지들.

빨치산 당사자들과 공작원 출신 비전향장기수들,
시민사회단체 50 여명은 지리산 성산재 고개에 모여
뱀사골 인근 반야봉 함박골 '박영발 비트'를 찾아갔다

연로해 산을 오르지 못하는 원로들은 성산재에 남아
심장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지리산을 바라다 보았다.
비트 안에는 아직도 당시 숨결을 느낄수 있는 유품들

그러나 70대 후반의 일부 빨치산 출신들은
약 2시간 가량을 걸어 임걸령 샘까지 동행.

박영발과 함께 일했던 박남진 선생의 증언을 바탕으로
소년 빨치산 출신이었던 김영승(73세)선생이 찾아냈다.
이번 비트 위치를 증언한 박남진(84. 54년 12월 체포) 선생

...............박남진 선생 증언 내용......................
1953년 9월 18일 이현상 남부군 사령관이 빗점골에서 사망하자
박 위원장의 보위대가 반야봉 아래 암벽지대에 비트를 마련했다.
그해 10월 말부터 다음해 2월 박 위원장이 사망할 때까지 4개월
박위원장 일행이 이용했던 빨치산 전남도당 지휘본부로 알려졌다.

이현상 남부군 사령관은 비교적 건강한 체력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임시 비트를 이용한 반면,
박 위원장은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 때문에
한쪽 다리가 불편해 비트 중심으로 활동을 펼쳤다.

하여, 김선우 남로당 전남도당 부위원장은
박위원장을 대신해 전남 유격대를 이끌었고
박 위원장은 이곳 비트에서 조국출판사를 운영
유인물 등을 찍어내며 지휘부 역할을 수행했다.

이 동굴에서 박 위원장 이외에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견습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던 곳.

일반인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교묘한 V자 형 천연동굴
V자 오른쪽 꼭지점에서 중앙을 향해 2.3m를 타고 내려가
다시 3.2m쯤 되는 왼쪽 석벽을 타고 올라가야 동굴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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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 중간 허리 노루목에서
삼도봉으로 가는 길목 '함박골’

묘향암 스님들 만이 다니는 인적 뜸한 길.

함박골로 들어서려면 이 길 막다른 곳에서 방향을 돌려
수풀이 우거진 오른쪽 험한 비탈길로 내려가야만 하는데,
산을 잘 타지 못하는 몇몇 일행은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김영승, 기세문, 양희철 선생 등 젊은 층 비전향장기수들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권오헌 회장, 전국연합 노수희 의장,
그리고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20명은 수풀을 헤치고
썩은 나무를 치워 길을 만들면서 함박골 비탈길을 내려갔다.

날랜 동작으로 산비탈을 내려가는 김영승 선생을 따라
사납게 돋은 풀이 정강이를 베는 지도 모르고 약 40분
정신 없이 걷자 비트로 사용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치처럼 엉킨 수풀이 시야를 가려 동굴이 아니라
보통 검은 빛깔의 큰 바위라고 생각될 정도의 비트.
53년 10월부터 54년 2월 22일 사살될 때까지 은신처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비트로 들어가려면 높이 3m 가량의 미끄러운 벽을 타고
내려가거나 동굴 아래 하수관 모양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표준 성인 남성이 낮은 포복 자세로 기어가기에 알맞은 크기.

좁은 틈새 사이를 두고 구분된 주거 공간과 통신 공간

통신용 공간은 성인 남자 2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간이 사다리를 타고 동굴안 은신처로 올라가자 컴컴한 어둠
50년을 묵은 듯한 퀴퀴한 냄새와 함께 온 몸을 휘감는 한기.

초여름인데도 은신처 안에 들어가자 하얗게 입김
2평 가량 공간에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낮은 천장.
토벌대 수류탄에 맞아 여기저기 무너진 돌무더기.

무전을 하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깃줄
흰색 주사용 앰플, 깨진 갈색 병, 깡통, 50여 개
배터리 그리고 바닥이 반으로 갈라진 고무신 한 짝

치료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사약

이 굴은 박영발 위원장을 호위하고 있는 보위대가
반야봉 허리를 훑어 발견한 동굴로 8명의 거주공간.
박영발 외 무전사, 여성비서, 견습무전사 의료병 등

북측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지령 등을 모아 유인물 제작.
비트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는 구들장 아궁이 주거공간
아궁이에 불을 지펴 천막 치고 겨울을 지낸 곳인듯 하다.

동굴을 나와 50m 내려가니 3층으로 쌓아올린 '구들장터’
구들장터에서 오른쪽 10m 지점에 불을 땐 아궁이도 발견.

아궁이에 불을 때면 돌과 흙이 달아 따뜻해진다.
여기에 천막을 세우면 추운 겨울도 지낼 수 있다.
구들장터에선 인쇄하는데 사용했던 등사기도 발견.

등사기와 함께 발견된 잉크통에는 검은색 잉크
고스란히 담겨있어 일행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모든 생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빨치산의 유골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토벌대가 시신을 산내면 초등학교에 전시후
빨치산 포로을 불러 신원을 확인하고 처분한 탓.

54년 2월 22일, 동굴을 발견한 군경이 던진 수류탄으로
동굴 안에서 죽었으며 박영발 여성비서 이정례 만 생존.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사경을 헤매다 보위대에게 발견.

이정례는 이후 화개재에서 빨치산 활동 중
뱀사골에서 잠복한 토벌대에게 사살 당한다.

매일 토벌대의 동태를 감시하던 보위대는
55년까지 전라도 조계산에서 싸우다 전멸.

"두 번 다시 비극적 역사 되풀이되지 않기를..."

지리산에 울려 퍼진 살아남은 빨치산의 노래
마치 50년 전 그 때로 돌아간 듯 굳은 표정들.
동지들의 흔적들을 어루만지며 기억을 반추했고
청년들은 경건하게 구들장 위에 제사상을 차렸다.

굴비, 완두콩밥, 돼지고기, 과일, 떡 등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이 올라간 제사상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지리산에서 숨을 거둔 넋들을 위로하려는 듯.
‘백두산 불로초’술이 그 넋들에게 바쳐졌다.

김영승 선생은 박영발 위원장의 비트 외에
백운산, 지리산 문수골, 피아골, 천왕산골,
장흥 유치내산 등에 숨겨진 비트를 찾고 있다.

이제 전국에 확인된 빨치산 생존자는 30 여명,
물론 전력을 숨기고 사는 빨치산까지 포함되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들 대부분 70 - 80세
사라져가는 반쪽 역사를 복원할 시간은 많지 않다.

사회적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동굴 개방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동굴에서 발견된 유품들은 그대로 두어
역사기행을 위해 비트 방문객에게 전시할 계획.

위령제를 마치고 일몰시간 전에 하산하기 위해
일행은 서둘러 3시간 30분 만에 노고단에 도착.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이 주최한
지리산 역사기행에 참석한 시민단체와 옛 빨치산
피아골 부근 산장에 여정을 풀고 옛 전우들과 해후.

저녁 9시부터 시작된 모임에서 빨치산 출신들은
자신들이 활동한 지역과 당시 전투상황을 소개했고
빨치산들이 즐겨 부르던 '태백산에 눈 나린다'를 합창.

사전모임에는 전남도당에서 활동했던 정운창 (77,)선생
남편따라 입산 이현상 부대에서 활동한 이옥자(78) 여인.
'부부 빨치산'이 참석해 여러 참석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비전향장기수 김용선 선생의 아들 김병제 씨
전라도당 빨치산 양혜정 선생의 아들 양근서 씨
빨치산 후손들도 자리를 함께 해 눈길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