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리산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 152 ( 1955년 지리산 등반기 - 全光鏞 作. )

donkyhote 2012. 5. 3. 20:46

1955년 지리산 등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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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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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까지도 지리산은 출입 통제구역
1963년 11월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 체포.
빨치산 잔당이 완전 소탕되지 않았다고 여겼다.

......................빨치산.............................
빨치산(partisan) 프랑스어 뜻은 '동지' 또는 '당파'
일정한 조직 체계에 소속되지 않는 비정규군의 별칭.
스페인어 게릴라(소규모 전투)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배후에서 후방을 교란한다.
통신소, 경비가 허술한 기지, 병기·연료·탄약 등
물자를 저장하는 곳, 교통의 요지들을 주로 공격한다.

단독·소부대의 행동으로 적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리고
신속하게 빠져나와 일반 민중 속에 숨어 반격을 피한다.

따라서, 일반 민중의 지원이나 협조가 없어서는 안되며,
활동지역 지형 특색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어야만 한다.

항일투쟁 하던 일제치하와 6.25 전후에 있었던 빨치산.
1950년 6. 25 전후의 빨치산은 두 부류로 나누어 구분.
반(反)공산주의 빨치산, 또 하나는 공산주의 빨치산이다.

보통 빨치산은 6. 25 전후 지리산의 공비들을 일컫는다.
공비는 6·25 당시 다양한 게릴라식 전투로 후방을 교란.
1950. 6·25 전쟁이 UN군 승리로 끝나자 거의 괴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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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지리산 빨치산이 거의 소탕된 시기이다.
그러나, 완전히 소탕되었다고 믿기 어려웠던 때.
하여, 1960년대 초반까지 지리산은 출입 통제구역.

빨치산 잔당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지리산.
그뿐 아니라 불발 폭탄들이 녹슬지 않은 상태.
하여, 지리산 경비대가 당시 민간인 출입을 통제.

1950년대 산행기를 보면 지리산 들머리는..달궁.
그당시 지리산 종주코스는 달궁에서 백무동까지.
또는 백무동에서 천왕봉을 오른 후 달궁으로 하산.

'지리산 산행기 자체가 희귀했던 1950년대.'

1955년 당시는 야생동물이 사람을 쫓아다닐 정도.
호루라기를 불어 맹수를 쫓으면서 산행할 정도였다.
특히, 달궁 하산길은 절벽이 하산길을 막아 위험했다.

'그러므로, 달궁에서 출발해 백무동으로 하산.'

하여, 당시에는 목숨을 걸 만큼 절박한 지리산 종주.
개척된 등산로도 없고, 등산장비도 부실했던 시기였다.
1955년 등반기를 통해 그당시 지리산의 모습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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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등반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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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55.8.25-26 기사 )
全 光 鏞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능선을 타는 횡단노정.
평화시에도 준봉총림에 맹수까지 출몰하는 험로

그런 말은 들었음에도, 산악회의 안종남, 남궁기
두 사람의 감행 결의에 용기를 얻어 이문규(문리대),
유광로(성대), 정인영(연대) 등 세 학생과 더불어
6명의 대원 속에 나 자신도 한 자리 끼게 되었다.

2주야의 노숙 준비를 마련하느라고
열한시가 가까워서야 노고단을 출발.

"조심해 다녀오시오"

남은 대원들의 인사가 격려라기보다는
그 어감이나 표정이 최후의 결별과 같다.

악수의 감촉마저 어떤 불안을 예시하는 듯.
내심 착잡한 상념이 일순간 머리를 스쳤다.

다행히 길 안내역으로 동반되는 무장경비원 4명
기고만장한 모습이 우리 일행을 매우 안심시켰다.

그러나, 지름길을 찾아든다는 것이 길을 잘못 들어
출발 후 한 시간도 못되어 우리는 밀림지대에 갇혔다.

우거진 숲속에 길을 잃어 가도가도 능선은 보이지 않고,
태양빛마저 가려진 계곡 속에서 방향감각마저 잃고 방황.

땀은 전신을 적시고 머리를 더듬거려야 겨우 조각 하늘
멋모르고 내려만 갔던 급경사 지나온 길을 후퇴하기 시작.
알고보니 빨치산 최후의 거점의 하나인 '비암사골'이란 곳.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중추신경에 충격을 주었다.
겨우 능선을 찾아 오르니 산들바람이 겨드랑이를 적시고,
산 중턱에 펼쳐진 구름이 다소 풍류 기분을 자아내는 듯.

1751m 반야봉에 접어드니 연봉의 양쪽으로
피아골, 문수리골, 화개골, 대수골, 비암사골
짧아도 30리, 긴 것은 80~90리의 깊은 골짜기
완곡선을 이루고, 서로 섬진강, 동으로 남강

두 물줄기로 까마득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승도(僧都) 지리산은 산까마귀도 염송(念頌)한다는 곳.
방사선형 골짜기 구석 구석마다 산자수려한 명당 거찰들.

벽소령을 앞에 두고 가는 길목에는 백산국(白山菊) 꽃.
가을인 양 만발했고 붉은 산백합 사이로 나르는 호랑나비
손바닥보다 더 큰 오색찬란한 날개로 너울거리며 날고 있다.

오후 3시, 물줄기를 찾아서 점심을 먹었다.

나무 우거진 심산유곡이라 곳곳에 약수 못지않은 계류
8부 능선을 타며 샘터를 찾기란 상상 밖으로 어려운 일
갈증을 느낀 세 시간 후에야 골짜기로 내려가 만난 샘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대상에 비할 바 없는 희열
점심 참 내내 일행들 사이에서는 화제거리로 떠올랐다.

이로부터 벽소령까지의 길은 더욱 험악하여
몇 백년 고목이 하늘을 가리듯 찌르는가 하면,
그 밑은 새밭이 한 길넘고, 넘어진 거목과 기암괴석

습기 띤 이끼로 미끄러지는 낭떠러지 나무 뿌리를 붙잡고
기어올라 겨우 숨을 돌렸다 생각하면 머루와 다래넝쿨 터널
몇십 미터 계속 통과하며 연거푸 철쭉나무, 가시나무 관목 숲.

팔다리가 긁히고 얼굴에 거미줄이 걸리면서도
단조롭지 않은 변화와 앞길에 대한 초조(焦燥)
쉬고 싶은 생각을 봉쇄해 버리고 마는 길없는 숲.

오후 다섯 시가 지나
또 다시 길을 잃었다.

그러나 이번은 한번 선한 길이라 얼마 아니 가서 후퇴
동서남북 몇백 미터씩 걸어가도 능선이 보이지 않으므로
도무지 방향을 찾을 수 없고 여름 해도 산속이라 짧은 듯.

여섯 시가 지나자 일행은 초조하기 시작.
해만 떨어지면 촌보를 옮길 수 없을 것이니
방향도 모르는 심산 밀림 속에서 지새울 밤.

샘물도 없이 밤새운다는 것은
여간한 모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야영 목적지는 세석평전이었지만,
이꼴로는 도저히 닿을 가망이 없으므로
샘물만 발견되는대로 밤을 새우기로 작정

천왕봉 방위인 동쪽을 향해 해를 등지고
없는 길을 만들며 급경사를 거슬러 올랐다.

태고적부터 썩으며 쌓인 듯한 낙엽
스프링 처럼 발자국마다 출렁거린다.

다람쥐처럼 바위섶을 기어오르고,
나뭇 가지를 붙잡고 뛰어내리면서
빗발처럼 흐르는 땀을 입술로 뿜으며
일행들은 말 한마디 없이 걷기만 한다.

무슨 약인지 이름 모를 약초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진시황이 불사약을 찾으려 보냈다는 삼신산 동자들
혹시 산삼이 아닌가 하여 침묵을 깨고 몇 마디 대화.

바위 구덩 옆에 짐승의 커다란 발자국
갓 지나간 흔적인듯 풀이 쓰러져 뭉개졌다.

능선마다 빨치산 아지트와 진지(陣地) 자취.
밧데리 조각과 탄환까지 발에 밟히는 듯 하니
장구한 시일에 걸친 격전의 흔적들이 엿보인다.

태양이 사라지고 겨우 찾은 능선마저 어두워져
시장끼와 갈증이 함께 엄습하니 다리는 후들후들.

가시 넝쿨에 걸리고, 바위에 미끄러 넘어지면서도
벽소령까지 가면 물이 있더라는 한 경비대원의 말.
오로지 그 사람 기억을 믿고 어두운 길을 더듬었다.

벽소령에 닿은 것은 밤 여덟 시 지나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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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등반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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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 호(壕) 속에다 야영터를 잡으려다가
불안해 길에서 외진 바위 밑에 잡은 잠자리.

반은 반합(飯盒)을 가지고 물옆에 가서 식사준비,
나머지는 바위벽에 비스듬히 큰나무 몇 대를 걸치고
그 위에 활엽수 가지를 꺾어 덮어 이슬받이를 만들었다.

밑에는 우장(雨裝)을 깔고
그 위에 담요 한겹 더 깐다.

극도의 피로에 다리 관절은 부자유한 정도였고
된장국에 배꼽이 들썩해지자 신발까지 신은 대로
담요를 뒤집어쓰고 그 자리에 누워 녹아 떨어졌다.

그러나 처음 얼마를 지나서는
도무지 깊은 잠이 들지 않았다.

노고단을 떠날 때에
세석 정상에서 봉화를 올려
피차 신호를 교환하기로 약속.

이렇게 목적지에 미치지 못한 낮은 능선에서
밤을 새게 되어 불도 피우지 못하고 뒹굴다 보니
숨죽은 듯 고요한 산 속에 가끔 무슨 짐승의 소리인지
메아리를 울리는 것이 들려올 뿐 불길한 예감의 연속이다.

잠깐 붙였던 눈을 엉겁겁결에 뜨니
중천에 뜬 그믐달 숨소리마저 들릴 듯
마치 천리 밖에 홀로 내동댕이처진 듯
나도 모르게 고적한 심사를 느끼게 한다.


이튿날 아침 조반이 끝나자
원기 회복하여 다시 출발했다.

산중에서 하룻밤 무사히 지낸 것이
퍽이나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한 한 오전 중에 천왕봉에 닿겠다는 욕망으로
속보를 거듭했으나, 첫길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호를 지나고 아지트를 밟아 넘어가고,
문자 그대로의 형극로 가시나무밭 지나
다시 교목 속에 접어들자 누워 있는 해골

표본같이 새하얗게 빛 바랜 전신 골격에
바지가랭이 끝에 끼었던 고무줄 두 개만이
뼈에 감긴 대로 남아 있고, 조개 단추 하나

아침 햇살에 반사될 뿐,
두개골도 아무 형적조차
찾을 길 없이 이빨만 앙상

그렇게 나뒹굴고 있는 인골.

격전의 모습과 38휴전선의 현실 등
두서 없는 연상이 주마등같이 스친다.

한 개 고무줄보다도 못한 인간의 육신이라 생각하니
천은사 약사암에서 만난 여학교를 졸업한 19세 홍안
승적에 입도해 10년 수도생활을 겪었다는 오동림 여승

자기 인생관을 담담히 이야기하던
그 모습이 눈 앞에서 삼삼거릴 뿐.

아침이슬에 흠뻑 젖고 생길을 갈아서
몇 고비나 바위섶을 오르고 내렸던지
세석평전에 닿은 것은 오후 한 시였다.

소개소각(疎開燒却)을 당한 몇 채의 집터에는
잡초 속 사기 질그릇 부서진 조각만이 눈에 띌 뿐
인가(人家)의 지난 날 자취란 거의 찾아볼 길이 없다.


천왕봉까지 물 안먹을 양으로 실컷 물배를 채우고나서
세석봉 위에 오르니 섬진강 줄기가 꼬불꼬불 사라진 끝에
저 멀리 여수 앞바다가 눈 앞에서 어렴풋이 내다 보인다.

노고단에서 아득하던 천왕봉
이제 눈앞에 다가서는 듯하고,
뒤로 돌아서니 노고단과 반야봉
아득한 서쪽에 봉우리를 나타낼 뿐.

이 때부터는 길 옆에 군데군데 채약(採藥)한 자리가 패이고,
어떤 곳은 밭을 갈아놓은 듯 모조리 긁어간 데도 눈에 띈다.

오후 네 시 장판재(일명 장타매기)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천왕봉 하(下), 중(中), 상봉(上峰)
본봉 줄기로, 곧게 올라만 가면 하봉을 거쳐 상봉,
그 옆에 중봉이 슬며시 뒷받침을 하는 듯이 보인다.

장판재에서 절터까지 가서
해전에 천왕봉을 돌아올 예정
짐벗어 풀속에 놓고 길을 나섰다.

하봉까지 가는 길은 전나무, 잣나무의 아름드리 원시림
하늘이 보이지 않고, 가람나무, 자작나무 바다와 관목숲.
바위 틈바구니를 지나 암석 사이에 걸쳐놓은 외나무 다리

그곳을 기어올라 잠시 숨을 돌리고
최후의 힘을 다해 1915m 천왕봉 정상
그곳에 닿은 시기는 오후 5시 반 정각.

최고 절정은 바위 끝이요, 발 밑은 천험절벽이다.
하동, 진양, 산청, 함양 굴곡많은 봉우리와 골짜기
눈밑에 끝없이 전개되고 멀리 노고단을 바라보인다.

지리산맥의 가장 높은 중추 능선을
끝에서 끝으로 횡단한 1백20리 노정.

한마디로 말하면 금강산은 질(質)의 산
지리산는 양(量)의 산이라고나 표현할까.

고인이 왈(曰),

"봉래(蓬萊)는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방장(方丈)은 장이불수(壯而不秀)" 란 말,

언뜻 머리에 떠오르니
세월은 유구히 흘러도
인간 감정은 고금을 통해
일관된 보편성이 있는 듯.

수많은 희생의 대가로 찾은 지리산의 평화 속에서
이틀 동안에 사람의 발자국 하나도 보지 못하다가
이날 밤 백무동(白武洞) 골에서 만난 주걱 깎는 노인

우리가 만난 지리산 최초의 사람.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는
지리산의 산곡(山谷)에서 산막의 밤은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