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 성씨.
단군은 우리 한(韓)민족이 세운 나라의 첫 임금
천제(天帝) 환인(桓因) 손자이며 환웅(桓雄) 아들
BC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개국
엄밀하게 따져, 한(韓)민족은 한 핏줄이 아니고
유사 종족, 동일 언어권을 갖고 있는 민족 연합.
한반도에는 옛부터 외국인이 귀화한 성씨도 많다.
'한반도 250 성씨 중 130 성씨는 귀화성씨.'
특히, 고려시대에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귀화.
외국인이 귀화하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 초,
그당시는 주로 수(隋), 당(唐)의 중국인이었다.
고려시대 귀화인은 송나라 사람을 비롯
여진, 거란, 베트남,몽골, 위구르, 아랍
이조시대에는 명나라와 일본인 등 많은 외국인이 귀화.
이들이 귀화한 동기는 대체로 정치적 망명, 표착(漂着),
종교홍포(宗敎弘布), 투항(投降), 구원(救援), 상사(商事),
전란피란, 범법도피, 정략결혼, 왕실 시종관계(侍從關係) 등
귀화인들은 대개 당시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우
왕으로부터 성명을 하사받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외래 귀화 성씨를 크게 나누면
중국계, 몽골계, 여진계, 위구르계, 아랍계,
베트남계, 일본계의 등으로 분류 할 수 있다.
柳(문화 유씨.고조선)
車(연안 차씨.고조선)
全(천안 전씨 등 28본.고조선)
趙(평양 조씨 등 5본. 고조선)
南宮(함열 남궁씨. 기자조선)
景(태인 경씨.기자조선)
琴(봉화 금씨.기자조선)
强(충주 강씨.기자조선)
魯(밀양 노씨등 9본.기자조선)
弓(토산궁씨.기자조선)
韓(청주 한씨.마한)
奇(행주 기씨.마한)
鮮于(태원 선우씨. 마한)
徐(달성 서씨 등 10본.마한)
余(의령 여씨.마한)
徐(남양 서씨.당에서 신라)
徐(당성 서씨.신라)
徐(절강 서씨.명나라-정유재란)
소소계 : 18성 63본관
.......삼국시대 이전 귀화성씨...........
李(고성 이씨.BC108년)
羅(금성 나씨 등 15본.BC 200)
張(울진 장씨.전한)
蘇(진주 소씨. 원삼국)
.........소계 : 4성 18본...........
......삼국시대 귀화성씨...........
都(성주도씨.고구려)
黃(평해황씨 등4본.28년)
姜(진주강씨 등 3본.598)
金(진도김씨.265년)
庾(무송유씨.4세기)
孫(안동손씨.5세기)
.....소계 : 6성 11본..........
......통일신라 귀화성씨.........
李(연안이씨.660년)
丘(평해구씨.663년)
嚴(영월엄씨.750년께)
盧(광산노씨 등 9본.755년)
白(수원백씨.780년)
周(상주주씨 등 2본. 786년)
南(의령남씨 등 17본.786년)
皇甫(영천황보씨.신라말)
安(죽산안씨 등 5본.807년)
張(안동장씨 등 48본.8세기)
呂(함양여씨 등 4본.877년)
孟(신창맹씨 등 2본)
崔(충주최씨.889년)
廉(파주염씨.907년)
李(성주이씨.미상)
辛(영산신씨 등 2본.미상)
成(창녕성씨.미상)
吳(해주오씨 등 14본.950년께)
.......소계 : 19성 125본........
.......당나라 8학사 귀화성씨........
元(원주원씨.643년)
魏(장흥위씨.649년)
洪(남양홍씨.649년)
房(남양방씨.649년)
徐(남양서씨.649년)
邢(진주형씨.649년)
方(온양방씨.669년)
卞(초계변씨.743년)
公(김포공씨.763년)
諸葛(남양제갈씨.836년)
林(평택임씨 등 8본.840년)
殷(행주은씨.850년)
司公(효령사공씨.897년)
宋(남양송씨.926년)
陸(옥천육씨.927년)
玉(의령옥씨. ?)
吉(해평길씨 등 2본. ?)
田(남양전씨 등 2본. ?)
....소계 : 18성 27본.........
....고려시대 귀화성씨....................
李(태안이씨.927년)
尹(무송윤씨.960년께)
韋(강화위씨.960년께)
表(신창표씨.960년)
連(전주연씨.고려 초)
禹(단양우씨.고려 초)
任(장흥임씨.정종)
池(충주지씨.960년)
劉(거창유씨 등 4본.고려 초)
杜(두릉두씨.1004년)
牟(함평모씨.현종 때)
李(안성.문종 때)
愼(거창신씨.1068년)
蔣(아산장씨. 예종 때)
鄭(서산정씨.예종 때)
沈(풍산심씨.1110년)
余(의령여씨.1120년)
毛(함평모씨(광주).인종때)
郭(현풍곽씨.인종 때)
具(능성구씨 등 18본.인종 때)
鞠(담양국씨.인종때)
夏(달성하씨. 인종 때)
宋(여산등4본.인종때)
魚(함종어씨.고려 중엽)
閔(여흥민씨.고려 중엽)
簡(가평간씨.의종)
于(목천우씨. 고려중엽)
桂(수안계씨.고려중엽)
章(창녕장씨.고려 중엽)
李(태원이씨.고려 중엽)
伊(은천이씨.고려 중엽)
陳(여양진씨 등 6본.고려중엽)
葉(경주섭씨.고종)
賓(수성빈씨.충렬왕 때)
朱(신안주씨 등 4본.1213년)
宣(보성선씨.1382년)
唐(밀양당씨.고려 말)
李(상산.고려 말)
明(연안명씨.1371년)
昇(창평승씨.1371년)
睦(사천목씨.고려)
墨(광령묵씨.고려)
凡(안주범씨.우왕 때)
燕(곡산연씨.고려)
芮(의흥예씨.고려)
陳(양산진씨등2본.공민왕)
秦(진주진씨.고려)
溫(금구온씨 등 2본.고려 말엽)
尙(목천상씨.미상)
.......소계 : 50성 84본.....
..........몽골계 : 연안 인씨(延安 印氏)..................
시조 인후는 1275년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귀화.
평양군, 자의도첨의사사를 거쳐 검교정승을 지냈다.
아들 인승단이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연안부원군에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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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계 : 청해 이씨(淸海 李氏)
일본계 : 우록 김씨(友鹿 金氏 : 사성 김해 김씨)
...........위그루계 : 경주 설씨(慶州)..............
원효대사 아들 설총이 시조로 되어있는 경주 설씨.
신라 왕실에서 경주 설씨를 하사받은 위구르 귀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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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계 : 덕수 장씨(德水 張氏)............
평택시 팽성읍은 600년전 고려에 귀화한 아랍인 마을.
고려말 의랑 벼슬을 지냈던 덕수 장씨의 중시조 장우.
아직까지도 팽성읍의 주민 70%는 덕수 장씨인 집성촌.
이조로 정권이 바뀌어도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킨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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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계 : 화산 이씨(花山 李氏)..............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 안남국(安南國. 현 베트남)의 왕
이천조가 트란 왕조에게 권력을 빼앗기자 둘째 왕자 이용상
1226년(고려 고종 13년) 배타고 황해도 옹진군 화산으로 피난.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화산군에 봉하고
그곳을 식읍으로 하사하여 화산 이씨가 유래.
국수, 쌈, 목기.등 한반도 문화에 큰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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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대씨는 패망 발해 후손들이 밀양에 정착.
우리나라의 성씨는 275성이고, 본관은 3349본.
우리나라에서 100만명 이상 성씨는 5 개 성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등.'
귀화 성씨로는 기자(箕子)를 시조로 모시는 여러 성씨들
희귀 귀화성씨 대부분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있는 성씨들
천녕 견씨(川寧 堅氏)가 대표적인 그러한 사례.
왕건이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벌할 때
고려 대상(大相) 견권을 시조로 모시고 있었다.
아자개를 시조로 모시는 견씨
견훤을 시조로 모시는 견씨 등.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녹동서원 옆
김충선 기념관(임진왜란 당시 귀화한 왜장).
희귀 성씨 중에는 옛 외국 왕족의 성씨도 많다.
개성 내씨(開城 乃氏)는 원래 개성 왕씨였는데,
이조 개국후 탄압을 피해 개성 내씨로 바꾼 성씨.
밀양 대씨(密陽 大氏)는 발해의 국성(國姓)에서 유래.
시조 대중상(大仲象)은 그 아들이 대조영(大祚榮)이다.
발해가 망한 후 그 후손이 경남 밀양에 정착한 귀화성씨.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 있는 귀화 성씨들도 참 많다.
개성 노씨 시조 노은경(路誾儆)은 원나라 한림 학자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와 개성에 정착
강음 단씨(江陰 段氏)의 시조 단희상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으로 왔다가
이조에 귀화해 강음에 정착한 귀화 성씨.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장 김충선(金忠善)
사야가는 귀화 후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진주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연안 인씨(延安 印氏) 시조 인후는 몽골인
아들 인승단이 충목왕 때 연안 부원군에 봉.
온양 방씨(溫陽 方氏) 중간 시조로 알려진 방운
고려 성종 때 온수(온양)군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
남양 방씨는 고려 때 벽상공신을 역임한 방계홍을 1세
개성 방씨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 공주를 따라 온 방두현
각각 방씨 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천계는 아니다.
지씨의 대표격인 충주 지씨(忠州 池氏) 지용수(池龍壽)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
두 글자 이상을 쓰는 복성(複姓) 중 남궁(南宮)
독고, 사공(司空), 선우(鮮于) 제갈(諸葛) 황보(皇甫)
그 외 51명의 연안 단(單)씨와 36명의 한산 단(端)씨 등
교동 뇌씨(喬桐 雷氏)는 강화도 교동이 연산군을 비롯해
여러 선비들의 귀양지였다는 점에서 귀양 갔던 선비의 후예.
성씨.
한반도 성씨에 대한 족보를 보면
삼한시대의 형성과정이 보이는 듯.
...............삼한시대부터 한반도 성씨 유래..............................
기자조선 영역은 요하 하류, 해성, 압록강 중류, 청천강 상류
B.C 3세기 흉노족에게 시라무렌하 영역을 잃고 연 한 진 때 쇠퇴.
기자조선 후예는 행주 기씨 , 서씨 , 태원 선우씨 , 청주 한씨
그외 해주, 태인 경, 토산 궁(弓), 봉화 금, 밀양, 함평 노(魯)
고구려 고씨(高句麗 高氏)·
백제 여씨(百濟 餘氏) ·
신라 김씨(新羅 金氏) 주류.
고구려는 을(乙)·예(禮)·송(松)·목(穆)·우(于)·주(周)·
마(馬)·손(孫)·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을지
백제는 사(沙) · 연(燕)·협(협)·해(解)·진(眞)·국(國)·목(木)
묘(苗)·왕(王)·장(張)·사마·수미(首彌)·고니(古이)·흑치(黑齒)
신라(新羅)는 박(朴)·석(昔)·김(金)·이(李)·
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요(姚)
우리나라 성씨의 유래는 백제 근초고왕 4세기 초.
그 이유는 그 이전까지는 모계사회 풍습이 있었고
그 이후부터 한반도에 부계사회가 뿌리내렸던 때문.
한반도 성씨는 중국 고대 패망 왕조 국가를 총 망라.
즉, 중국에서 이주해온 유민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
백성이란 100 성씨 씨족들이 모여 이룬 나라의 구성원.
씨족마다 풍습 문화이 다르고 가옥 구조도 천태만상.
한반도는 고대 국가, 8도 지방마다 색다른 가옥구조
전세계에서 가장 천태만상 가옥 전시장 같은 한반도.
.................우리나라 주거환경 특징................
구석기시대 인간은 동굴이나 바위틈 그늘에서 살았다..
그후 나뭇가지 원추형 뼈대와 나뭇잎 등으로 만든 가옥.
제 4 빙하기 이후 신석기시대에는 가축을 기르고 농사
집단 공동생활을 하기 시작하며 반 지하 타원형 주거지.
원형, 타원형, 방형으로 바뀌었고, 말기에긴 네모꼴 형태.
청동기 시대(B.C 10세기경)에는 나즈막한 언덕에 10∼20호.
많게는 100호 정도의 마을을 형성하며 농경 어업 또는 목축.
주거지가 커졌으며 기거, 취사, 작업, 저장 등으로 나뉜 벽체
고조선 시대 움집은 지하를 깊게 파고 기둥을 세워
서까래를 걸쳐 지붕을 짜고 풀 흙 등을 덮은 주거지.
지붕이 땅에서 떨어지는 반 움집의 형태가 생겨났다.
이때 비로소 여자는 안쪽 깊은 곳을 차지하고
중간은 작업실, 입구는 남성 및 야외 생활도구
고구려 주거지는 온돌과 지붕에는 기와를 사용했다.
백제는 고구려와 유사했고 산 중턱에 살았다는 기록
신라는 기후가 따뜻한 지방이므로 평상 위에서 생활
고려는 백성은 움집 형태였고 귀족은 기와집 형태.
이조시대에는 고려 때 주거지 구조를 그대로 계승
목조가구식 온돌과 마루가 있는 민도리집 양식이다.
이조 건축은 규모가 작고 검소하면서 위엄을 갖췄다.
건물 자체의 균형 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과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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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정돈된 우리나라.'
2천년 혈통을 족보로 만들어 대물림한 유일한 나라.
현재 국립 중앙도서관 자료실엔 600종, 13,000권 소장
원래 중국 6조(六朝)시대에 시작된 족보는 왕실 계통 기록.
한반도에서 족보가 보편화된 시기는 1565년(조선 명종20년) 이후
<문화유씨 가정보>에 민족혈통을 수록하자 명문가문도 족보 간행
17세기 이후에 여러 양반 가문들이 다투어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조 초기에 간행된 족보 대부분은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내용.
이조 중기에 들어서자 조상을 미화하고, 조상벼슬을 과장하거나 조작.
심지어 명문 가문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사대주의 사상에 물들어
중국에서 유래된 족보도 많았다.
이조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양반은 국가의 지배 계층.
이조시대 후반부터 양반 계층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난다.
양반 상민의 신분격차가 없어질 무렵 너나 없이 양반 주장.
이조시대 말기에는 매관매직, 족보를 사고 파는 행위도 성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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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는 언제부터 성씨를 쓰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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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족은 누구나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
아울러, 그 성과 본관의 유래가 담긴 족보가 있다.
족보는 한반도의 역사 전통 사회구조 파악에 길잡이.
'고대부터의 혈연과 지연도 알 수 있는 족보.'
성씨는 출생 혈통 겨레(족) 소속집단 국가를 나타내는 호칭.
즉, 혈연집단인 씨족에서 비롯되어 소속 국가까지 알려준다.
하여 성씨는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 뿌리가 하나로 모아진다.
성씨는 한자로 이름 앞에 붙여 본관과 함께 사용한다.
하여, 같은 성씨라도 혈연 관계가 없는 타 성씨와 구별.
성씨는 대대로 갈라져 같은 조상이라도 성씨가 달라지고
같은 성씨이면서도 그 조상이 혈연과 무관한 경우도 많다.
부 또는 모 성을 따르기도 하며 모성 변성, 사성, 자칭성 탓.
중국의 고대사회에서는 남자는 씨, 여자는 성으로 호칭했다.
즉, 부계사회는 씨를 사용했고, 모계사회는 성으로 호칭했다.
훗날 성씨가 합쳐졌고, 씨는 신분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호칭.
귀한 신분은 씨를 사용, 천한 신분은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고려 초기(10세기) 지배층이 부계 혈통을 표시하는 성을 사용.
성은 사회구성원이고 명은 개인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씌여졌다.
하여, 성은 본관을 의미하고 씨는 높임 말의 의미로서 사용했다.
씨는 이조시대에 들어와 양반의 부인을 부를 때 경칭으로 씌였다.
한반도는 삼국시대 전후부터 성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서 중국식 한자 성을 쓴 시기는 고구려 장수왕 시대.
그당시 중국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고(高)씨의 성을 사용했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여(餘)씨, 무왕 때부터 부여씨(扶餘氏)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 김씨 성을 사용했던 역사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누구나 모두 성을 사용한 것은 아닌 듯.
성씨(姓氏)가 보편화 된 것은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은 과거급제 자격을 주지 않는 법령 이후.
성씨 유래와 족보들을 보면, 한반도가 한 핏줄 만은 아닌 듯.
동아시아의 수많은 고대국가들로부터 유래된 성씨의 흔적이다.
서해 지역이 육지였던 시점에서부터 여러 민족이 살았던 한반도.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녹아 해수면 아래로 잠긴 서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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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저지대 민족들은 어디로 뿔뿔이 흩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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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로 각각 흩어져 나라와 언어는 달라도 풍습 외모는 유사.
현재, 한반도에는 수많은 고대국가의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그러나, 각 성씨 족보에만 그 뿌리가 남았을뿐 역사기록은 없다.
한반도 지리산 일대는 성씨 문화 풍습이 다른 여러 민족의 삶터.
마한의 창건부터 패망 역사를 추적해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마한에 관한 역사기록은 그리 많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게 26년(서기8년) 마한의 '국읍(國邑)' 함락.
이듬해 4월 '원산성과 금현성'마저 정복 당해 마한 멸망.- <삼국사기>
삼국시대 달궁계곡은 삼한시대 마한왕조 피난처 -<서산대사 황령기>
기원전 84년 경 마한 효왕이 '30년 진한과의 전쟁' 中 피난처 별궁인 곳.
백제 온조왕 27년 (서기 9년)에 마한 왕조 멸망. - <삼국사기 기록>.
3세기 후반 마한이 중국과 교류, 4세기 서해안에 진출.-<일본 서기>
당시, 전라도 해안에는 인신매매한 해적들의 주민 납치 사례가 잦았다.
해적들은 남자를 노비로 팔아 넘겼고 여자는 유곽에 팔아넘긴 사례 속출.
당나라에는 해적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 살아가는 신라인들이 많았다.
훗날, 노예로 고생하는 신라인들이 안타까워 당나라에서 귀국한 장보고.
해적들을 소탕하고 뱃길을 열어 동북아시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하게 된다.
828년 신라에 귀국한 장보고는 오늘날까지 해신으로 추앙받는 역사적 인물.
그당시 해적의 세력은 신라 국력으로도 손쓰지 못할 규모.
서해항로가 세계적인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음을 알수 있다.
얼마나 많은 거상들의 상선이 서해 항로를 왕래했던 것일까?
<청해진>은 장보고가 지금의 완도에 설치했던 해군·무역기지.
828년(흥덕왕 3)에 당나라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된 장보고
신라 청해진대사가 되어 세력을 키워가자 신라 중앙귀족들이 경계.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항로를 개설한 장보고는 신라와 수평적 관계.
장보고의 적극적 후원으로 신라에서 불교문화는 전성기를 맞게된다.
장보고의 막강한 재력과 군사력이 신라의 국운을 좌우할 정도였던 듯.
당시 장보고 세력의 밑바탕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서해 항로였다.
846년 문성왕은 자객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고 청해진을 토벌.
851년 청해진을 폐쇄하고 주민은 지금의 전북 김제로 강제 이주시킨다.
'장보고 죽음 이후 고려 공민왕 때인 1351년까지 500년 동안 공도.'
장보고가 소탕했던 해적들은 왜구 또는 삼한의 잔여 세력인 듯.
장보고가 암살 당한 후 서해 항로에는 또 다시 해적이 들끓는다.
신라는 장보고 암살 이후에 서해 항로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증거.
'동아시아 해상무역 패권은 어디로 간걸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 서해항로는 일본으로 넘어간 듯 싶다.
백제왕실의 후예가 일본 황실을 찾이하게 된 원동력이 된 듯.
장보고는 일본에서 해신으로 추앙받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7세기 말 신라는 삼국통일을 했지만 9세기 말까지 왕권 다툼.
신라의 지방호족 세력이 반기를 들어 중앙 정부 지배력은 약화.
백성들은 지방 귀족에게 착취당했고 왜적의 약탈에도 시달렸다.
먼 이국에 노예로 팔려 가거나 당나라로 희망찾아 이주하기도 했다.
굶주림과 약탈, 폭정에 견디다 못한 민초 중에는 도적이 되기도 했다.
신라 패망 후에도 한반도 해안지역에서 해적 및 왜구들의 만행은 빈번.
고려말· 이조 초기에 왜구를 근절하려고 세 차례 대마도를 정벌한 역사.
왜구는 13∼16세기 한반도와 중국 연안 일본인들의 해적집단을 총칭한다.
이들은 주로 대마도를 근거로 활동, 무네씨(宗氏)가 대마도를 관리했다.
대마도는 농토가 척박했고 가뭄을 면하기 어려운 환경.
식량부족으로 약탈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여건.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항로 상에 있기에 해적들의 본거지.
고려 말 14년간 378회나 침입한 왜구를 1만 군대로 평정.
왜선 300 여척과 관사·민가를 불태웠던... 1차 대마도 정벌.
2차 대마도정벌은 이조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
태조는 5도의 병선을 모아 대마도정벌, 왜구를 근절시켰다.
1419년( 세종 1) 3차 정벌로 왜구는 평화적 내왕자로 변했다.
한반도의 속국 대마도는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의 속국이 된다.
대마도는 한반도에 세 차례 정벌 당한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하여, 그곳 관광지에 만국기가 걸려있어도 태극기 만 볼 수 없다.
'아직도 600 년전 정벌 당한 맺힌 한이 남아있다는 증거.'
아시아로 각각 흩어져 나라와 언어는 달라도 풍습 외모는 유사.
현재, 한반도에는 수많은 고대국가의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그러나, 각 성씨 족보에만 그 뿌리가 남았을뿐 역사기록은 없다.
왜구(倭寇).
'왜구'라는 용어는 '왜(倭)'와 '구(寇)'의 합성어.
'왜'라는 글자의 뜻은 고대 일본 국호에 대한 호칭.
'구'는 떼도둑 또는 겁탈을 뜻하는 집단 도둑 행위.
일본의 연구자는 13세기부터 16세기 해적으로 정의
그 이유는 중국의 사무역 상인들이 이끄는 해적집단
왜구의 발생의 근본원인은 일본의 국내 사정에 있다.
이 무렵 일본은 남북조쟁란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
중앙정치 권력이 지방에까지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서부 일본 지방의 해안 어민들이 왜구로 변신
특히, 1392년 남북조의 쟁란이 북쪽의 승리로 끝나자
여기서 패배한 남군세력 잔당이 해적 또는 무력 상인화.
인접지역이나 국가에 침입하여 약탈과 파괴행위를 자행.
또한 이들 왜구는 중국과 한반도의 무역 단절로
생필품인 미곡 등을 얻기 위해 약탈행위를 감행.
왜구는 일본 해적이라고 중국과 한반도에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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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암' 이라 부르는 동해 가운데 문무대왕 수중 왕능.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676년에 당나라 세력을 축출
삼국통일 위업을 완수한 신라 문무대왕(661-681)의 수중릉.
'그는 왜 자신의 시신을 동해에 안치하라고 유언했을까?'
용이 되어 동해에서 왜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
사후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문무왕의 마음이 잘 담겨있다.
삼국통일 후에 당나라 세력까지 쫓아냈던 신라의 문무왕.
그가 묻힌 대왕암은 석굴암이 자리한 토함산 밑 동해바다
문무왕은 죽은 뒤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고 전해온다.
660년 김유신과 더불어 5만 군사로 백제를 격멸했던 문무왕.
사후 동해의 용이 되어 왜적으로부터 동해를 지키겠으며
인도식으로 화장해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대왕의 유언.
그 뜻에 따라 화장해 동해의 바위섬, 대왕암의 수중릉에 매장.
육지에서 약 19.8m 떨어져 있는 길이 약 200m의 바위섬
동서남북 십자수로 가운데 거북모양 화강암석 안에 납골.
길이 3.6m, 폭 2.85m, 두께 0.9m 크기의 문무왕 수중왕릉.
이곳은 문무대왕의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
이러한 수중왕릉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특이 한 것.
신라시대에 왜적의 침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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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는 왜구에 대한 한민족의 한이 서린 사찰.
828년(신라 흥덕왕 3) 실상사가 세워진 역사적 배경
한반도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우려해 건립했다.
통일신라가 사찰을 지어 경계할 만큼 왜구는 위협적인 적.
AD 396년(병신년) 비류백제 응신천황은 광개토대왕에게 참패
해상탈출 후 백제의 지배권 왜 나라 지역에 AD 400년경 망명
망명정부(나라 백제, 야마토 왜, 대화 왜)를 수립했다는 기록.
1400 여년전 백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
백제 지배계층 3만명의 망명정부 '일본 시가현 요까이찌시'.
이곳은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이룬 일본의 전진기지 유적지.
'왓따산(渡來山) 정상에 있는... 3층 석탑.'
부여의 정림사 5층 석탑과 닮았고 모국을 그리며 만든 탑.
그 주변에는 망명 백제인들의 혼백이 담겨 있는, 중요한 유적.
주변에는 3만 5천여개 이상의 부도가 바다를 이루는 유서깊은 곳.
백제인들의 이곳 망명정부는 훗날 일본왕실의 주인이 되고야 만다.
일본 황실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백제와 무관하지 않다.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가자 왜의 제명여제가 구원군을 파병.
왜의 천왕 제명여제(의자왕 누이동생)는 나당연합군에게 참패.
결국, 왜와 백제 망명정부 세력이 힘을 합쳐 이룩한 나라 일본.
중국 명나라 해안 봉쇄령 이후 더욱 창궐했던 왜구.
일본의 맹주들과 상인조합이 뒷배경인 무장세력 왜구.
통일신라는 옛 백제 세력과 왜적의 침공을 늘 경계했다.
하여, 828년 통일신라에서 왜구를 경계해 실상사를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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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이조까지 한반도와 중국 연안의 해적 왜구.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지만, 고려 말에서 이조 초 극심
왜구 발생 시기는 고려 몽골연합군의 2 차례 일본정벌 이후.
일본 내란으로 몰락한 무사와 농민들이 노예와 미곡을 약탈
왜구는 일본 호족들의 철저한 보호와 통제 아래 행동하였다.
왜구의 근거지는 대마도, 송도 등등 이었으며, 대마도가 주동.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왜구의 침입은 1350년(충정왕 20)부터이며,
이후 더욱 심해져 공민왕 때 동해·황해·남해의 연안뿐 아니라
한반도 내륙 깊숙이 침입하여 개경(開京)의 치안까지 위협하였다.
고려 우왕 때는 14년 동안 378회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는 1227년 1260년·1263년에 막부에 왜구 단속을 요청
그 뒤 고려·몽골연합군의 일본정벌로 양국관계는 악화되고
사절왕래도 단절된 한편으로 고려에서는 왜구에 대해 강경책
1376년 최영의 홍산대첩,
1380년 나세 최무선(崔茂宣) 등의 진포싸움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荒山大捷),
1383년 정지(鄭地)의 남해대첩(南海大捷)이 유명.
특히 최무선은 화통 화포로 진포싸움과 남해대첩에서 대승
그러나, 고려는 원(元)나라의 2차에 걸친 일본 원정의 기지
과중한 부담을 치뤄 경제적 파탄에 이르러 멸망의 직접 원인
왜구의 침입은 이조시대에 들어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1396년(태조 5) 김사형(金士衡)이 대마도 송도를 정벌
강경책과 귀화의 기회를 주는 회유책을 병행했으나 실패.
1419년(세종 1) 이종무 등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정벌.
이조는 상왜(商倭)를 비롯한 왜인들의 왕래를 제한적 허용.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국제무역을 하게 하면서 회유하였다.
그 뒤 삼포왜란·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달량왜변(達梁倭變)
이조 정권의 왜구 회유정책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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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실의 남북조 혼란기에 왜구는 고려와 중국 연안을 침입
전쟁중 많은 인력이 죽자 주변 국가를 침공해 인력을 보충했다.
왜구는 납치한 인력을 병사, 농부, 잡역부, 노예 등으로 삼았다.
왜구는 빈민이나 군대를 동원해 살인 방화 파괴 약탈 등을 자행.
왜구 실체는 호족 또는 지배 계층의 대대적, 정치적인 해적집단
필요에 따라 수백 척에 수만 명 대군단 규모로 왜구가 출몰했다.
천재지변 흉년 가뭄 홍수 태풍 병충해 돌림병 때마다 왜구가 극성.
왜구는 무역 약탈을 위해 고려 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침입.
왜구의 지휘 장수들은 완벽한 무장과 항해술과 대규모 병력
보병과 기병의 합동전술은 훈련이 얼마나 치밀한지 보여준다.
왜구들은 쌀과 재물을 모아둔 고려 해안가 조창을 집중공격.
고려는 조창을 내륙으로 옮겼는데도, 왜구는 내륙까지 침입.
왜구는 저항하는 아녀자 팔다리를 자르고 살해할 정도로 잔인.
그러나 왜구가 노린 것은 부녀자보다 젊고 힘센 장정들.
고려사에 의하면 왜구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 수가 3 만.
왜구의 근거지로 지목되는 대마도에 모셔진 고려의 불상.
고려불화는 전 세계 100 점 중 90 점이 현재 일본에 있다.
일본 최대의 혼란기 남북조 혈투에서 패한 후쿠오카 통치자
쇼니는 큐슈에서 세력을 잃고 대마도와 고려에서 재기할 꿈.
이성계는 그 왜구를 몰아내어 최영과 함께 국민적 영웅이 된다.
또한 이조 건국의 결정적 계기였던 위화도 회군의 명분도 왜구.
그리하여, 이성계는 왜구토벌 과정에서 민심과 권력을 거머쥔다.
16세기 왜구의 구성원 대부분은 중국인이란 일본 학자 주장.
왜구는 중국 한반도 일본 동남아를 오가는 무역상인들 집단.
당 멸망후 명나라 해안봉쇄령으로 상권을 잃은 중국 무역상들.
왜구가 되어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해적이 되었다고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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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거제도에서 40 km이고, 일본 본토에서는 80km 거리.
해류의 방향은 북한에서 부산과 거제를 거쳐 대마도로 흐른다.
제주도에서 부표를 띄워놓으면 대마도 나가사끼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대마도는 한반도와 실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중개 무역항.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의 무역항로를 잇는 중요한 거점.
'삼별초의 난'은 고려 원종 때 일어난 항몽투쟁.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총칭한 것으로,
최씨 정권의 사병적인 성격이 짙은 군사 집단이다.
1232년(고종19) 몽골 침락을 피해 최씨정권이 강화도로 천도
삼별초는 강도(江都;강화도)를 수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고
섬 밖으로 나와 전국 각지에서 몽골군과 대전해 상당한 전과
1258년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이듬해, 고려 태자가 몽골에 입조
몽골과 30년간 계속된 전쟁이 종식되고 왕정이 복구된 듯한 형세.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무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강화도 고려조정에서는 개경환도에 관해 의견대립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대개 개경환도를 희망
삼별초의 무신들은 몽골에 대한 굴복이라고 하여 반대
1270년(원종 11) 마침내 출륙환도(出陸還都)가 단행되고,
환도에 불응한 삼별초를 해체명령 후 그들의 명부도 압수.
이에 삼별초군은 그해 6월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 주동자 배중손은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연안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도내 인심이 흉흉하고 호응자가 적었다.
하여 3일 뒤 진도로 남하하여 그곳에서 대몽항쟁.
진도로 이동한 삼별초는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11월에 탐라까지 세력을 뻗쳐 남방의 제해권 장악
1271년 5월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으로 세력이 꺾이고
본거지를 탐라로 옮겨 항전을 계속하다가 1273년 2월 평정.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골에 대한 항전
자신들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에 반발,
항거한 병사들과 민중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연합군과 3년간 저항했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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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잔여세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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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고려시대부터 이조시대까지 왜구의 본거지.
임진왜란 후 일본화 되었지만 그 전까지 독립 자치령.
동아시아 해상무역권 향방이 대마도 정치노선을 좌우.
임진왜란 이후부터 동아시아 해상무역권 주역은 일본.
장보고가 동아시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했을 때엔 한반도.
그 이후부터는 중국(당나라 명나라 원나라)이 주역인 듯.
왜구는 해상무역 및 상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무장집단.
왜구는 한반도 항로는 물론 내륙의 지리까지 꿰뚫고 있다.
왜구는 첨단무기로 무장한 거상들의 무장군사들로 추정된다.
왜구는 한반도 백성들을 납치해 온갖 만행을 저질러왔다.
당나라 노예의 상당수는 해적들에게 붙잡혀왔던 신라인들.
힘센 남자 신라인들은 해적의 무장 병력으로도 충당되었다.
일본과 한반도 중국을 잇는 항로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
그 섬주민에게는 국법보다 해적의 만행이 훨씬 무서웠을 듯.
한반도에서는 남해와 제주도 일대 다도해가 해적들의 본거지.
이조시대에 삼포를 개항, 왜구들을 귀화시키거나 달래기도 했다.
이조에 귀화한 만여명 왜인들은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총의 유효사거리 및 왜군의 취약점을 한반도 의병들에게 알렸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필승.' - 손자병법.
우리나라는 아직도 일본역사나 왜구의 실체에 대해 어둡다.
일본을 이기려면 항일 감정보다 일본을 아는 것이 우선일 듯.
이조가 왜구를 배타해 대마도를 상실한 역사는 정말 뼈아프다.
왜구가 자주 출현했던 우리나라의 도서 지방
신안군 도서. 강화도, 진도, 거제도, 제주도.
마한의 패망세력이 정착한 곳으로도 추정된다.
신안군
부산에 가면 자살바위로 유명한 태종대가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무열왕이 활을 쏘던 곳.
그 활시위가 바다를 향했을까? 절벽을 향했을까?
................무열왕 김춘추..............
신라 제29대 왕으로서 성은 김, 이름은 춘추이다.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654년 진덕 여왕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죽자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던 김춘추.
법률, 관료 제도를 정비, 군사조직 강화, 국가체제 확립.
660년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 통일 기반을 마련.
백제 점령 이듬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삼국통일 위업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한 김춘추.
어려서부터 용모가 범상치 않았고 영특했다.
당나라 태종도 그를 보자마자 이렇게 감탄.
" 호오, 성인의 기개가 서려 있구나 ! "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로잡을 원대한 뜻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일찌기 받아들였다.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여 신라를 발전시킨 왕.
무열왕릉은 선도산 아래의 송림속에 자리잡고 있다.
무열왕릉 남쪽에는 무열왕의 비석인 돌거북과 이수
조각이 무척 씩씩하고 아름다워 우리나라 최고의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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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대 절벽 너머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망부석.
바다로 떠난 님 기다리다 세월에 굳어진 망부석
다시 돌아오지 않을 님 향한 천년의 기다림인 듯.
태종대에서 나오는 길에 해양대학교 선착장의 목선.
돛을 내린 범선 뱃머리에 씌여있는 ‘700년 전의 약속’
'어떤 약속인지 자못 궁금해지는 그 사연.'
고려 충숙왕때, 양자강 하구 경원(영파)항을 떠난 중국상선
폭풍을 피하다가 임자도 앞바다에서 조난을 당하고 말았었다.
세찬 바람에 밀린 배는 파도를 피해 전남 서해안의 다도해 속
그러나, 임자도 4km 남겨두고 안타깝게 바다 속에 침몰했다.
겨우 섬에 상륙한 몇 명의 선원들 마저 임자도에서 죽어갔다.
삼별초군을 제압하기 위한 공도령으로 임자도는 무인도였던 탓.
그당시 추토사 김방경은 70년 전에 주변 섬들에 공도령을 발령
그후, 1270년 영광군으로 천읍한 후 154년 간 임자도는 무인도.
중국 경원(영파)항은 700년 전, 원나라 말 신안 유물선 출항지.
경원 항은 남방의 광주, 천주, 복주 등과 함께 세계적인 무역항
모두 고려와 왜를 연결하는 남방 항로의 기점이었던 항구들이다.
경원항과 신안은 왜를 연결하는 옛날부터 위험한 뱃길이다.
죽음을 각오한 항로이라 항해 성공확률이 반반인 무역 항로,
항해에 성공하면 교역이윤은 최고 원가의 200 배 실패하면 죽음.
그런 배가 풍랑을 만나 다도해에 가라앉은지 어연 650년.
1975년 5월, 임자도 앞바다에서 보물선의 실체를 드러냈다.
고기잡이 어부들이 청자수병, 백자대발, 백자접시 보물 발견
1996년 6월, 한 방송국에서 방송용으로 중국에서 복원
'700년 전의 약속 호’로 명명되어 19일간의 뱃길 탐사
옛 고대 항로를 복원하는 3000km 대장정을 마쳤던 것이다.
복원된 배는 총길이 31m, 몸체높이 2.6m로 중국 대형 상선.
700년 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초했던 중국의 보물선.
중국 영파에서 출항, 목포,·후쿠오카를 거쳐 오사카까지
19일간의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700년 전의 약속을 이룬 것.
'7백년 전의 약속 호’목포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된 후
다시 부산 한국 해양대학교에 기증되어 그곳 선착장에 보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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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은 자연경관이 뛰어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옛부터 동아시아 해상왕국 전략적인 요충지 신안군.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왜선을 물리친 해전 격전지.
'옛부터 한반도에서 항해술이 제일 발달한 곳.'
마한은 패망 전까지 신안군 앞바다를 사수.
그러나, 동아시아 해상왕국을 이룩하려던 백제.
가야국과 연합한 백제는 마한의 달궁을 점령한듯.
달궁 전투는 동아시아 해상왕국 패권다툼.
신안군 앞바다는 동아시아 실크로드 요충지.
마한 잔여세력은 이후 신안군을 유랑한듯 싶다.
옛부터 해적과 왜구가 창궐했던 도서 지방.
자욱한 안개로 인해 침몰된 선박이 많은 곳.
하여, 아직도 어부 그물에 종종 걸리는 보물.
'보물선에 대한 루머가 끊이지 않는 곳.'
지도읍·증도면·임자면·자은면·비금면·도초면·
흑산면·하의면·신의면·장산면·안좌면·팔금면·
암태면·압해면, 선도·병풍도·우이도·가거도·태도·
대둔도·자라도·매화도·고이도 출장소 등 1개읍 13개면
9개 출장소 143개 동리. 군청소재지는 목포시 북교동이다.
면적 652.15㎢, 인구 50,769(2003), 인구밀도 77.6명/㎢(2003).
이조시대까지 신안군 도서들은 월경지(越境地) 형태
나주·영광·부안·만경·무안 등에 소속되어 있었다.
1896년 돌산군·완도군·지도군 신설
서남해안의 섬들을 소속시켰는데,
지금 신안군 섬들은 옛 지도군.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지도군이 폐지
지도군 소속 섬들과 완도군 팔금면,
진도군 도초면이 무안군에 편입,
군내면이 지도면으로 개칭.
이조시대 도서지역은 중앙관서와 궁방들의 토지
일본 식민지 시기까지 토지분쟁을 일으켰던 요인
1914년 하의도를 시작으로 1923년 암태도에서
소작 쟁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
1969년 무안군 섬 지역을 분리해 신안군을 신설했다.
1976년 '신안 해저유물'이 인양되어 주목을 받았다.
2006년 6월 27일 SBS 시사프로그램 '긴급출동 SOS 24'
전남 신안군의 한 섬에 갇힌 채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
'현대판 노예 청년'을 방송 후 네티즌들의 비난이 빗발.
오후 2시까지 30일 하루 방문자수는 무려 8400 여명
하루종일 일하고 쉰 김치에 찬밥 신세였던 노예 생활.
마치, 해적이 들끓던 그 옛날 고대사회로 돌아간 느낌.
'신안군은 고대사회 동아시아 해상무역 요충지.'
[자연환경]
무안반도에까지 뻗어내린 노령산맥이 서해로 빠져.
형성된 유인도 79개, 무인도 750개의 섬으로 구성.
안좌도·압해도·도초도·임자도·암태도·증도·
장산도·하의도·대흑산도·홍도 등이 중요한 섬.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고 해역은 수심이 15m 내외
해양성 기후, 연평균기온 13.9℃ 내외,
1월 기온 2.1℃, 8월 기온 27.2℃ 내외,
강우량은 613㎜, 한류와 난류 교차 지역
짙은 안개가 많아 선박 항해에 영향을 끼친다.
[산업·교통]
주민 64%가 농업, 24.8%가 수산업에 종사.
간석지에서 굴·꼬막 김·미역 양식 및 제염업
오징어 멸치 도미 조기 갈치 고등어 홍어 새우
우이도 꽃게, 비금도 강달어, 임자도 새우,
흑산도 삼치 강달어 홍어 등이 많이 잡힌다.
대부분 목포항에서 암태면·비금면·도초면·
흑산면·임자면·하의면·장산면, 정기 여객선
목포-홍도 간을 1시간 30분 만에 운항하는 쾌속정
[유물·유적·관광]
대흑산도에서 돌도끼와 토기가 포함된 패총 발견
대흑산도 진리, 장산도 대리, 압해도 대천리 고인돌
압해도에는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포함된 패총이 분포.
팔금도 신안읍리 3층석탑(전남 유형문화재 제71호),
대흑산도 3층석탑, 장산도의 불상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흑산도의 신안향교,
지도읍의 지도향교와 태천리 연계사(蓮溪祠),
임자면 이흑암리의 화산단(華山壇) 등이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전지역이 관광지.
해수욕장으로는 임자도의 대광 해수욕장,
암태도 추포 해수욕장, 비금도 명사십리,
도초면의 시목, 대흑산도의 진리해수욕장
<민속놀이>
뺑돌이치기·밤달애놀이·광대놀이·앙감질하고놀기
<설화>
<자은용추의 용〉〈희룡산 선녀봉〉〈부룡떡시루바위전설〉
<민요>
〈동당기타령〉〈밤달애노래〉〈탕건바위노래〉
강화도
강화도는 황금알을 낳는 해상무역 상권의 요충지.
고구려도 서해 해상무역을 장악해 강대국으로 성장.
마한은 백제에게 강화도를 뺏기고 달궁까지 남하한듯.
'그 가능성과 흔적을 찾아 강화도로 가보자.'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가 지나도 강화는 눈벌판.
그곳으로 가는 차창밖 김포평야도 시베리아 벌판 같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유적지 강화.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기원전 6세기 전후)의 돌무덤.
전 세계 7만기 고인돌 중 우리나라 고인돌은 3만.
그중 고창은 가장 많은 고인돌이 모여 있는 곳이다.
화순은 보존 상태가 좋고 고인돌 채석장이 있는 고장.
'강화군 오상리와 삼거리, 부근리 등은 고인돌 120기.'
강화는 우리나라에서 최대 크기의 고인돌 밀집 유적지.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의 상판 돌의 길이가 7미터가 넘고,
높이 2.6M 덮개 돌의 무게만 80톤이나 되는 북방식 고인돌.
중부 지방과 황해도, 평안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북방식,
영호남 지방서 주로 발견되는 고인돌 형태는 남방식이다.
북방식은 시신을 땅 위에, 남방식은 땅 속에 모시는 특징.
강화 지역 고인돌은 이 두 가지 방식의 혼합 형태를 띤다.
'그 아득한 옛날에 왜 이런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고대인들의 목숨 건 이런 노력에서 비롯된 현대문명.
잠시 발길을 돌려 가까운 곳의 전등사로 찾아가보자.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72) 아도화상이 창건.
'고려 충렬왕 원비가 불전에 옥 등잔을 올려 전등사.'
대조루(對潮樓) 돌계단은 각 층계는 아홉부분으로 구성.
대조루는 아침 저녁으로 밀려오는 조수를 바라본다는 뜻
전등사는 조선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그 소임을 다해왔다.
전등사 대웅전 추녀는 아홉 불상이 그려진 것이 특징.
중국 윈깡의 석불동(石佛洞)에 안치된 불상을 보는 듯.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골군을 피해 강화로 천도(遷都)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돌아오기까지 39년 동안 도읍
강화 남쪽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단군에게 제사 지낸 곳.
강화는 국란이 있을 때마다 대피한 천연 요새와도 같은 곳.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가 강화로 피신해 머물렀고,
병자호란 때에도 강화도는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배도.
그 후 효종은 인조 때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인화보, 승천보 등등
강화 해안에 방어시설을 만들고 둘레 112KM를 요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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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경기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한민족의 신도(神道)
지금부터 4천3백년 전 단군이 천제를 행한 역사적 유적지.
강화도 서남단 바닷가에 삼신상제님께 제를 올렸던 마리산
이 산은 마치 자로 잰 듯 백두산과 한라산의 꼭 중간지점
마리산은 박달나무 자생지, 마리산 쑥은 강화약쑥 중 명약
현재, 마니산(摩尼山)이란 지명의 옛 이름은 마리산(摩利山)
단군이 천제를 올린 참성단이 있는 곳이 마리산.
1231년 몽고 침략 때 1232년 고종은 강화로 천도.
1270년 개성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몽고군과 대치
그러나, 三別抄는 항몽 정권을 수립후 진도로 남하.
고려 때 강화도 마니산에 참성단을 다시 쌓아
단군에게 제사지내면서 민족이 하나로 뭉친다.
단군 제사는 국난에서 나라를 지키는 원동력
강화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군사적인 요충지
상고시대에는 강화도는 '갑비고차'라고 하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400년)에는 혈구군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742년)에 해구군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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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무역항로 길목.
강화는 마한의 일부 잔여세력이 정착한 곳인듯.
강화 진도 제주도 대마도를 거점으로 무역한 듯.
즉, 왜와 중국을 오가며 해상무역으로
재기의 발판을 삼으려고 한듯 추정된다.
마한 세력이 3세기 후반 중국과 교류한 기록..<삼국사기)
마한 세력이 4세기 전라도 해안에 진출한 기록..<일본서기>
그렇다면, 해상무역의 요충지이고
임진왜란 격전지인 진도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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